난 20세기까지 학문의 경계는 뚜렷했다. 하지만 21세기 새로운 문명은 분과(分科) 학문의 경계를 뛰어넘는‘통섭’의 학문을 요청하고 있다. 진리의 세계는 인위적으로 분류한 학문체계로 더 이상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학문의 대통합은 1988년 진화생물학자 에드워드윌슨이 자신의 저서‘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에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넘나드는 지식의 대통합을 주장하면서 지식사회의 화두로 떠올랐다. 한국에서는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가 이를‘통섭(統攝)’이라고 번역하며 처음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통섭’은 불교와 도교 같은 동양사상에서 자주 쓰이던 말로‘큰 줄기(統)를 잡는다(攝)’는 뜻이다.학문의‘통섭’은 아직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모두 아우르고 있지는 못하다. 하지만 자연과학분야에서 분과 학문을 넘어서는 통합 연구는 활발히일어나고 있다. 하버드대 의대는 2004년 시스템 생물학과를 창설하고 수학ㆍ물리학ㆍ화학ㆍ컴퓨터과학ㆍ공학을 아우르는 통합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관수동국대 교수가 시스템 생물학과를 창설한 마크 커시너 하버드대 교수를 인터뷰했다. 최재천 교수는 기고를 통해“학문의 통섭은 새로운 문명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한다.
이한수 기자 hslee@chosun.com
보스턴=이관수 동국대 교수ㆍ과학기술사
“분과 학문을 통섭하는 연구 없이는 자연에 대한더 깊은 통찰, 복잡한 기술문명의 존속이 힘들 것이다. 생물학 연구를 통해 개별 유전자에 대한 정보를많이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유전자들이 어떻게 결합해서 전체 시스템을 작동시키는지 알지 못한다. 이를 규명하려면 다양한 분야를 전공한 연구자들의 통섭적인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지난 40년간 세포생물학자로 활동해온 미국 하버드대 의대 마크 커시너(Marc Kirschner) 교수는 지난 2004년 하버드대 의대에 시스템생물학과를 창설한 주역이다. 수학ㆍ물리학ㆍ화학ㆍ기계공학ㆍ컴퓨터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전공한 젊은 연구자들이 이 학과 박사과정에 참여하며 통합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커시너 교수는“분과 학문에 매몰된 연구로는 답을 알 수 없다. 다양한 분야를 통섭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시스템 생물학과를 창설한 이유는 무엇인가. “생물학 연구 내적인 맥락에 강력한 필요가 있었다. 인간은 약 2만 2000개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생물학 연구를 통해 개별 유전자들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상세한 정보를 확보했다. 이것은 엄청난 성과다. 하지만 여전히 유전자 단계 이후에 전체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모르고 있다. 개별 유전자는 다양한 기능을 위해 반복 사용된다. 시스템 작동을 이해하려면 각 구성요소들이 서로 어떻게 얼마나 상호작용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 같은 문제는 기존 생물학만으로 해답을 얻기 어렵다.”—전체를 통합적으로 연구하는 시스템적 관점이 왜 중요한가.“생물은 대단히 유연하면서도 강건한 시스템이다. 사람들의 유전자는 제각기 다르지만, 남녀의 유전자가 하나의 수정란 세포에 모이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개체로 성장한다. 대단히 경이로운 일이다. 핵심적인유전자와 단백질 중에는 진화과정을 통해 거의 변하지 않은 것들이 많다. 기초적인 구성요소는 같아도 그들이 서로 연결되는 방식이 달라지면서 새로운 생물이 나타난다. 마치 레고 블록 같다. 레고 블록으로 만든 모델을 이해하는 것은 블록 한 개의 특성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개별 유전자의 작동뿐 아니라 그들이 결합하는 방식, 즉 통합적 시스템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하버드대의 시스템 생물학 프로그램이 과학의 새로운 조류를 상징한다고 이야기한다.
이관수 교수 제공 하버드대 의대에 통합 학문을 지향하는‘시스템 생물학과’를 창설한 마크 커시너 교수.
'한 분야에 매몰된 연구는 분명한 한계가 있어
생물학ㆍ수학ㆍ물리학 등 통합적 연구가 필요
'통섭의 학문'을 통해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라'
“그렇다. 문제는 이제 새로운 흐름을 넘어 주된 흐름으로 갈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그 어떤 나라도 불과 몇 세대 동안만 과학을 선도했다. 20세기 초에는 화학이 중요했고, 독일이 최고였다. 20세기 후반을 주도한 분야는 생물학이고, 미국이 중심지였다. 이제는 다양한 분야를 통섭하는 일이 큰 흐름으로 될이다. 여기에는 컴퓨터과학이나 물리학이 더 큰 기여를 할 것인데, 중국ㆍ인도ㆍ한국ㆍ이스라엘 같은 나라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
—시스템 생물학과 창설로 당신의 연구도 변화했나. “나로서는 그것이 가장 놀라운 점이다. 학과를 만들 때 나는 계속 세포생물학 연구를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리라고 예상했다. 4년 반이 지난 지금 내 연구의 절반은 예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이다. 다양한 분야 출신의 사람들에게 생물학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면서 나 자신도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생물학 이외의 다른 전공자들도 관심을 보이는가. “내가 놀랐던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분야의 사람들이 관심을 보인것이다. 동료 생물학자들은 물론 엔지니어들도 관심을 보였다. 복잡하면서도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에 대해서 엔지니어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그런데 언어학자들도 관심을 보일 줄을 몰랐다. 언어는 엄격한 규칙을 가지면서도 대단히 유연하다. 조상들이 세포생물학이나 컴퓨터 분야에 사용될 것을 생각하고 언어를 구성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어를 이용해 과거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활동을 하고 새로운 개념을 표현한다. 건축가들이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공간을 구성하고 사용하는 일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예기치 못했던 분야들에서 비슷한 질문을 하고 통찰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앞으로 통섭의 관점이 계속 중요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물론이다. 이제는 피할 수 없다.생물체는 물론 비행기나 철도체계처럼 현대 기술문명이 만들어낸 복잡한 시스템은 몇 차례 시험해보았다고 해서 확인했다고 할 수 없다. 시스템적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지않고서는 검증이 불가능하다. 그동안 과학이 거둔 놀라운 성과들을 바탕으로 다양한 학문들이 새로운 통합으로 나아가고 있다.”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
'한 우물만 파지 말라‐ 학문도 퓨전시대'
21세기 경쟁력은 통섭에서 나온다.
에드워드 윌슨의‘통섭’이 우리말로 번역되어출 간 된 것 이 2005년 4월이니 아직 3년이 채 못되었다. 그리 길지 않은 이 기간 동안‘통섭(統攝)’은 어느새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는 보편적인 개념어가 되었다.‘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가 제안한‘문화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통섭은 상당히 성공적인 밈(meme₩전승을 되풀이하는 문화 구성요소)이다. 나는 통섭이 이처럼 성공적인 밈이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사회적 배경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기업들은 컨버전스와 M&A를 겪고 있었고, 문화는 온갖 종류의 하이브리드를 만들어내고, 미식가들은 퓨전 레스토랑을 찾고 있었다. 피가 섞이고 문화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나는 그래서 우리 시대를 혼화(混和)의 시대라고 규정한다. 혼화의 시대에 등장하는 사회현상들은 거의 대부분 복잡계 수준의 문제들이다. 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홀로 풀어낼 수 없는 문제들이라는 말이다. 이 같은 사회 변화를 인식하고 일찌감치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한 곳이 미국 뉴멕시코주에 있는 산타페연구소(SFI: Santa Fe Institute)이다. 그곳에는 물리학자, 생물학자, 인문사회학자들이 한데 모여 생명의 기원과 합성을 탐구하고‘생물학적 뉴턴의 법칙’을 모색하며 인간사회의 갈등과 협동에 관한 모델링을 통해 문명의 역동성을 분석하고 시장의 혁신을 도모한다. 1984년 많은 학자들의 우려 속에 문을 연 산타페연구소는 이제 21세기 학문활동의 전형으로 우뚝 섰다. 1933년 하버드대학에 세워진 명예교우회(Society of Fellows)는 지식의 통합은 서로 다른 분야의 학자들 간의 격식 없는 토론, 즉 잡담에서 시작된다는 믿음을 실천에 옮긴 기관이다. 철학자 콰인이 노벨상 수상 신경생물학자 데이비드 휴벌과 마주앉아 인간의 뇌를 들여다보게 된 곳이다. 스키너, 촘스키, 윌슨 등이 그곳을 거쳐간‘젊은 학자(junior fellow)’들이다. 1970년에는 미시간대학에도 명예교우회가 만들어졌고 나는 그곳에서 1990년대 초반 주니어펠로우로 꿈같은 3년을 보냈다. 그 3년이 내 학문의 주춧돌을 놓아주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자연과학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인문사회학의 경계에 기대어 있는 듯한 생물학은 가장 화려한 변신을 거듭한 학문 분야이다. 20세기를 거치며 분과 학문시대의 표상처럼 수 없이 많은 학과들로 쪼개져 있던 생물학은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주립대학에서‘통합생물학과’로 거듭난다. 부분만 들여다보아서는 결코 복합적인 생명현상의 전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시작된 통합의 바람은 이제 하버드대학에서 시스템 생물학으로 진화하고 있다. 물리학,화학, 컴퓨터과학, 공학 분야의 전문가들이 학문의 벽을 허물고 최근 폭발적으로 늘어난 유전자 정보를 바탕으로 생명현상을 진화된 시스템의 관점에서 새롭게 분석하고 있다. 지구촌은 이제 하나의 거대한 과학기술 메타문명으로 묶여 있다. 그 속에서 온갖 형상의‘문화바이러스’들이 자신들의 전염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전염성이 강한 문화바이러스는 당연히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통섭이 풍요롭게 일어날 수 있는 토양에서 자란다. 21세기 경쟁력은 외곬 전문성이 아니라 전문인들 간의 유기적인 통섭에서 나온다. 통섭은 이제 선택사항이 아니다. 새로운 문명의 원동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