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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웅배달 홍산문화

▪살림문화재단▪ 2010. 3. 28. 02:24

 

신석기시대

오랑캐 천산문화 bc9600~bc6200

흥안령 산맥 서북의 화산지대인 우란카이 고원 호수 주변에서 신석기 시대 문명이 발견되었다.
그들이 남긴 100여점의 인물 조각상들을 분석하면 해부학적으로 아직 무릎이 곧게 펴지지 못한 고동북족古東北族이다.

이는 옥조상 중 2개인 “항아리를 머리에 인 여인상” 등으로 증거되는데, 항아리의 존재는 신석기 시대를 가리키고, 반면에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무게를 지탱하는 자세에서 무릎이 구부러진 것은 해부학적으로 침팬지 등의 영장류와 더욱 가까운 인류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들의 후예로 보여지는 홍산 유적이나 우하량 유적지 석곽에서 발굴된 유골들도 이들처럼 무릎이 펴지지 못해 저절로 굴신장이 되어 있다.

이들 초고대 문명 유적지가 발견된 지역명 우란카이(烏蘭蓋)는 우리 민족의 고유어인 오랑캐다. 뒤에는 오환선비족 또는 월희족이라는 이름이 훗날 족속명으로 남았었다.

 

 

청나라 대에 쓰인 몽고유기《蒙古游記》에 의하면 아로과이심기현(阿?科?沁旗)현의  천산진(天山鎭) 서북 140리에 오환산이 있었다. 지금의 서한산(西罕山)이다. 이를 지도에 표기하였다.

아로과이심기 천산진은 거란족 요나라 황제가 환웅시대 전통대로 신단수를 심어놓고 제사 드리던 곳이다.

오환산은 본래 한산인데 흉노에게 패한 동호족 일부가 오환산으로 도망쳐서 오환선비라고도 하였고 지금은 서한산, 새한산(西罕山=塞罕山=白山)이라고 한다.
이 흥안령산맥 서한산에서는 흑수(黑水=자칸무렌)가 발원하는데 그 최상류에 요나라 경주慶州가 있었다.

<요사>에서 이 지역은 경주(慶州, 현재 지명 소부리카소목索夫里)에 속한 광제호廣濟湖였다. 대염락大鹽樂이라고도 했는데 소금을 캐서 외부로 팔았다.

오랑캐호수 서편의 도시는 현재 지명 동오주목심기현인데 예로부터 울리아스타이(uli-astai)라고도 했고 이는 아사달이라고 보여진다.
동오주목심기현에서는 그들이 동호東湖 지역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또한 부여왕 해부루 정권이 곤연의 금와왕에게 넘어갔는데, 금와왕의 출신지였던 곤연(昆淵)으로도 해석된다.

[한단고기]에서 환인이 천해 동쪽의 파나류波奈留 산밑에 살았다고 하는데, 波奈留는 일본어에서 하나류로 읽고 이는 하늘의 연음에 해당하며, 즉 하늘산이다. 천해 동쪽에 우리말로 하늘산, 한자로 천산이 있었던 것이다. 
천해는 대개 바이칼 호수로 보는데 우라카이 고원 호수일 수도 있다. 바이칼 호수의 동쪽이든 우라카이고원 호수의 동쪽이든 결국 환인의 천산은 지금의 새한산(塞罕山)이 된다.

오랑캐 고원에서 최근 석기시대 유물들, 특히 옥조각상이 함께 채집되고 있다. 이들이 남긴 옥기 문화는 홍산문화의 옥기 문화와 형식과 주제가 거의 같은데 홍산문화에서는 채색하지 않은 자연 색광의 옥이고, 이들이 남긴 것은 옥표면 위에 흑색을 착색하였다. 흑색의 원료는 철 등 광물성이었는데 현재까지는 어떤 방법으로 흑색칠이 이루어졌는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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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옥기 문화를 만들어 오랑캐 고원에서 번성한 문화는 현재 자취를 감추었고 유목민들의 초원만이 남아있다.

이 오랑캐 신석기인들의 문명 연대를 필자 나름으로 추적하면 bc6200년(지금부터 8200년전) 이전이다.
이들 흑색 옥기 문명을 만든 신석기인들이 바로 전설의 환인국의 선조인 나반과 아만이 만나서 이루었던 문명으로 고려된다.
 <환단고기-삼성기>에 환인족의 선조인 "나반那盤"과 "아만阿曼"과 아이사타에서 만나 환인족의 조상이 되었다. 이는 환인국의 형성 전이다.
"나반"의 "나"는 나르, 즉 태양의 의미를 가졌고 이는 쿠르드 언어에 남아있다. 이집트의 태양신은 "라"이다. 우리말에서는 "날. 낮"이 그 파생어다. 또한 드라비다어로서 누반은 기장쌀이다. 노란색의 어원이 태양 나일 것이고, 태양의 노란색과, 건조 기후에 적합한 기장쌀의 노란색 때문에 기장쌀은 태양빛 곡물로서 이름을 누반이라고 했을 것이다.
한편 "아만"은 몽고어로서 "하나"라는 의미다. 첫 번째라는 뜻도 된다. 즉 나반과 아만의 만남은 O그룹의 드라비다어와 C그룹의 몽고어가 만난 것이고, 한반도에서 올라간 만주의 농사족이 시베리아의 수렵족 중에서 에웬키족과 만나 그들을 농사족으로 바꾼 것이다.
이들 에웬키족의 유전자에 관한 추정은 앞에 있다.

 

당시 기후의 변화표를 그린랜드에서 채취한 얼음 시료로서 분석한 표를 보면 아래와 같다.

 

12700년전(bc10700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북극의 빙하가 녹고 천년의 혹한기가 찾아왔다. 이때 대륙의 동물과 식물 자원의 몰락은 인류의 급격한 감소를 초래하였다. 이후로 인류는 이동 채렵생활에 의존해서는 겨울에 살아남을 수가 없고, 농사를 지어 수확하고 저장하는 생활을 알았던 종족만 살아남게 된다.

한편 천년의 혹한기 끝에 단 10년 동안에 걸쳐서 무려 10도 이상의 급격한 기온 상승이 있었다.

지난 천년동안 해안 가까이 살면서 혹한에 적응했던 인류로서는 기온 상승도 적응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이때 더위를 피해 인류는 고원으로 피난하여 살았을 것이다. 그것이 11600년전(bc9600년)이 된다. 

그후 bc6200년경에 다시 200년의 혹한이 찾아왔다. 더워서 고원으로 향했던 인류는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고원에서 다시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오랑캐고원 문명의 시기는 자연환경적으로 bc9600~bc6200년전으로 제한된다.

환인 하늘산 선홍산문화 bc4800~bc3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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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문명 예맥구려 사해 문화 bc6200~bc4000

1. 예맥구려穢貊九黎의 발생지 사해문화            2. 동아시아 최초 촌락유적지 흥륭와문화

 

우리 민족의 선조는 예맥濊貊 민족이며, 지금부터 8000년전 신석기시대에 만주와 시베리아, 한반도, 산동반도 등지에서 빗살무늬 토기 문화와 석기 예술의 정수인 옥기 문화를 오랑캐문화로부터 받아서 이어갔다.
“예穢”라는 글자는 이십사절기를 알고 농사를 짓는 민족이라는 의미가 있고, 맥貊은 호랑이나 표범 꼬리를 머리에 매고 다녀서 얻어진 이름인데 예인은 호랑이를 숭상했다.
곰이 아니다.

단군왕검 신화에서 환웅에게 밀려난 민족이 바로 예족이기도 한데 한반도의 토템이 역시 호랑이, 산군山君이다.

[후한서後漢書]와 [위지魏志]의 <예전濊傳>에서 기자조선箕子朝鮮이 언급되는데, 마지막 왕 조선후朝鮮侯 기준箕準까지 무려 40여세를 전한 국가로 적고 있다. 비록 고조선古朝鮮을 언급하지 않고, 고작 고조선의 변방인 중국계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기록했지만, 이 고조선이나 기자조선의 중심 민족도 바로 예맥족이다.

[후한서]에, 예국濊國에서는 현재 압록강鴨綠江가의 궁간목弓幹木에 의한 강력한 활인 낙랑단궁樂浪檀弓이 만들어졌고, 조기班魚가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설문說文]에서는 예야두국?耶頭國에서 참조기?魚를 수출한다고 했다.

조기는 발해 연안에 알을 낳고 회귀하는 물고기이다. 이로 인해, 낙랑군 동쪽 예국 위치는 한반도 동해안이 아니라, 요동반도 동해안으로 고증된다.

 

한편 [후한서]에서는 부여국에 대해서 본래 예의 땅本濊地也이라고 기록하였고, 예성濊城도 있고,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는 국새國璽가 있었다. [진서晋書]에서 벼 화禾변의 예穢자가 출현하며, 만주를 다스리던 백제 담로제의 지방관직으로 추정되는 임예태수臨穢太守 관인官印이 요동반도 신금시新金市에서 발견되었다. 신금시는 백제 국모 소서노가 세웠던 어하라於瑕羅 영역이고 뒷날 대방백제의 영역이다.

[위서魏書-두막루전豆莫婁傳]에서도 송화강 북쪽 두막루땅이 구북부여舊北夫餘의 후손이고 본래 예穢의 땅이라고 했다.

[후한서-구려전句麗傳]의 구려는 맥궁貊弓을 사용하던 일명 맥이족貊夷族, 소수맥족小水麥族인데, 고구려의 기저 바닥 세력이고 이 역시 예맥인이다. 구려句麗는 구려九黎이기도 하다. 맥麥은 보리, 려黎는 좁쌀을 의미하는데 좁쌀이 먼저 재배되었다. [신당서新唐書-발해전渤海傳]에서는 모란강 동경성 일대가 예맥고지다. [삼국사기]에서 신라 남해왕 때에 북명北溟(= 강원도 강릉) 사람이 예왕濊王 도장을 주워서 바쳤다. 위만衛滿 침략 때에 예군濊君 남려南閭 등의 이십만호는 서남으로 이주하여 중국 천진시天津市 남쪽의 창해군蒼海郡에 옮겨갔다.

 

이 모두를 종합하면 예맥인의 영역은 만리장성 동쪽의 요녕지방, 길림지방, 흑룡강지방과 한반도가 다 포함되고 일본 열도의 원주민도 되며 이는 빗살무늬토기문화권과 같다.

 

 

지금부터 8000년전, 신석기시대에 예맥인은 황해 연안을 따라서 만주와 시베리아, 한반도, 산동반도, 중국 동남해안에서 빗살무늬토기 문화권을 일으켰다. 북방 지역은 기장쌀黍에 의한 농경이 발달하였고 화북 지방은 지금보다 따뜻하여 벼禾농사를 지었고, 양자강 이남은 오늘날의 아프리카 열대림처럼 미개척지였다.

그 당시 만주는 따뜻했으며, 마지막 남은 털코끼리와 코뿔소를 사냥했다. 예맥인은 돼지나 개 가죽 옷을 입고, 코뿔소 가죽은 귀족들의 전투용 갑옷卒이었으며, 호랑이나 표범 꼬리로 머리를 장식했다.

이때 부족 사회가 연합한 왕권 체제가 생겨났는데, 이 예맥 문화의 모습은 내몽고 적봉시赤峯市 오한기敖漢旗 흥륭와문화興隆窪文化와 요녕성遼寧省 부신시阜新市 사해문화査海文化에서 보이는 선홍산문화先紅山文化다.

두 유적지 중에서 화려한 것은 부신시 사해문화인데 왕권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사해문화에서는 왕권의 상징인 용토템이 출현하는데, 이 지역을 고대에 구려(句麗 =九黎)라고도 하였다. [전한서]에서 중국이 현도군을 설치하고 이를 구려의 서북이라고 하였는데 당시 현도군은 부신시 북쪽에 있었고, 그 동남의 사해 문화 유적지가 바로 고대 구려로서 구려九黎의 중심이었다. [사기]에서는 청동무기로서 중국에 진출한 치우천왕을 구려九黎의 왕이라고 하였다. 아홉 부족을 의미하는 구려에는 창려, 옥려, 부려, 무려 등이 속했었다.


예라고 불리운 곳 종합

부신시阜新市 사라향沙拉鄕 사해촌?海村 천수구泉水溝에서 방유적지房址가 발굴되었고 지금부터 8000년전 유물이다.

사해문화의 도기는 황갈색이고 지자문之字?이 많고 뱀과 두꺼비를 숭상했는데 용과 함께 농경문화를 의미한다. 도기에서 용龍무늬가 발견되었고 또한 2003년에는 바위에 새겨진 20 미터 길이의 대형 용조각이 발굴되었다. 농사를 짓는 민족은 비를 뿌려주는 용龍과 한발旱魃(=가뭄의 신)을 잡아먹었다는 전설의 호랑이를 숭상한다. 그중에서 용은 이 시대에 왕권王權의 출현을 의미한다. 아울러서 20여건의 옥기가 발굴되었고 옥비玉匕, 옥부玉斧, 옥분玉?, 옥관玉管, 옥주玉珠 등이다.

 

 

 

 


용조각 빗살무늬토기


19.7m에 달하는 용의 조각

 

옥부와 옥환

빗살무늬토기와 생활 도구

빗살무늬 토기는 bc6000년전에 시작되었다. 이 토기는 산동반도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bc5000 -3000년)와 한반도, 압록강 집안, 요동의 대련반도 소주산문화素珠山文化 심양의 신락문화新樂文化(bc5500년) 길림시吉林市 서단산문화西丹山文化와 장춘시長春市 좌가산문화左家山文化, 그리고 서요하西遼河 상류, 내몽고 적봉시 홍산문화紅山文化(bc5500년)까지 고루 발견된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바다가 훨씬 작았던 황해를 둘러싸고 예맥의 문화가 퍼져나간 흔적이다.

그러나 11600년전 이후의 더운 날씨로 인해 내륙은 사막화가 되고,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서 발해 바다가 50m 이상 차오르고, 바다 주변은 차오른 물로 인하여 예전보다 더 추워졌다. 8200년전에 일어난 지구 냉각기 200년의 사건이다.

그중 중심이 되는 bc6000년의 부신시 사해문화査海文化와 오한기 흥륭와문화興隆窪文化는 심양의 신락문화新樂文化보다 1000년 이상 빠르고, 적봉의 홍산문화紅山文化보다도 2000년 정도 이르므로 선홍산문화先紅山文化라고 한다.

 

옥도끼玉斧는 석병石兵 시대에 신권神權을 상징하는 새로운 옥병玉兵 시대를 열었다. 더욱이 옥도끼는 빛을 발함으로써 당시의 어떤 무기보다 무서운 역병을 일으키는 귀신들을 내쫓는 효험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월절서越絶書]에 신농, 혁서 때에는 석병石兵을 쓰고, 황제시대(bc2700년)에는 옥병玉兵을 쓰고, 하우夏禹(bc2100년) 시대에는 동병銅兵을 쓰고, 그 후에 철병鐵兵을 썼다고 한다. 예맥 문명에서 옥병의 출현은 중원보다 빠른 bc6000년이다. 

중원의 옥기 문화는 흥륭와문화, 사해문화로부터 대문구문화를 거쳐 태호太湖의 양저문화良渚文化에서 가장 꽃피는데 bc3000년 이후다.

 

2절 촌락유적지 흥륭와문화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촌락은 내몽고 오한기 흥륭와興隆窪 지역으로서 지금부터 8200년전의 촌락이고 사각형의 반지혈식半地穴式 방이 150개, 묘장이 10개, 탄갱이 12개가 있으며, 촌락 주위에 방어호圍壕가 만들어져 있다. 신석기 시대의 정주定住 민족의 모습이다. 따라서 유목 기마 민족의 도래 이전이다. 이와 같이 성을 쌓고 혈거하는 것은 축성혈거築城穴居라 하여서 [위서魏書-물길전勿吉傳]에 소개되어 있는데, 당시 장춘시長春市 동북방 송화강가 유수시楡樹市 부근에 있던 물길국은 본래 숙신肅愼의 후예라고 했다. 마한馬韓 말갈靺鞨, 물길勿吉, 숙신肅愼, 여진女眞이 결국 모두 같은 뿌리이다.

  

흥륭와 유적지에서는 소형 옥기장식 3개 귀걸이 등(아래 사해문화의 옥기 사진 중 오른쪽 옥결 귀걸이와 거의 비슷)이 발굴되었으며 이는 중국 최초의 옥기이다. 그외 화강암으로 만든 67cm, 40cm의 돌조각 여인상 2개도 발굴되었다.

질그릇은 회색이 많고, 기하문 토기의 모든 것이 나타나는데 주로 요현문凹弦紋(회전시키면서 파내어 새기는 줄무늬)이 기본적으로 있고, 더하여 물결무늬나, 돗자리무늬를 덧새기기도 했다.

 

 

우리 한반도인의 직접적인 조상이 되는 이들 예맥인들은 모계사회 농경민족이었으며, 이미 개와 돼지 등의 가축을 길렀고 흙과 함께 살고 죽었다. 산군山君 호랑이를 섬기는 한반도의 풍속은 예맥인들의 고유한 것이다. 환웅의 도래로 웅족, 즉 부여족에게 밀려난 적도 있지만 결국은 융합한다.이 예맥문명은 황해 주변의 모든 신석기 문화지에 펼쳐져 양자강 아래 광동성까지 퍼져나갔다.  

오래된 때를 가리키는 우리말 “옛-날”은 바로 신석기시대 우리나라 “예”의 “날”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옛날옛날 고리적에”라는 말은 즉 “예의 날”, “고구려의 날” 등 오래된 때를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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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시대

환인 하늘산 선홍산문화 bc4800~bc3898

       
                                                  환인 환웅시대 강역도

환인(桓因)에 대한 기록은 7세 3301년, 혹은 63182년이라는 기록이 발해 때에 만들어진 《조대기朝代記》라는 책에 있다고 전한다.
1대 안파견(安巴堅) 환인 2대  혁서(赫胥) 환인 3대 고시리(古是利) 환인 4대 주우양(朱于襄) 환인 5대 석제임(釋提壬) 환인 6대 구을리(邱乙利) 환인 7대 지위리(智爲利) 환인 등이다.

이 이름들은 거의 지명이다. 안파견은 우리말로 속신과 같은 말로서 지금의 아로과이심기 천산 지역이고, 

혁서는 환웅의 신시(神市)에 해당하고 여기서 시市를 불市로 읽으면 신시는 우리말로 검불이 된다.), 

고시리는 요양이고, 주우양은 백제의 동계이니 한반도의 치양성이고,

석제임은 압록강의 환인현 지역으로 추정되고, 구을리는 의무려산의 구려이고, 지위리는 장춘 서북쪽의 실위다.

환인 시대에 위에 소개된 7 지역을 정복하여 연방으로 삼은 것이다.

 

환인시대가 63182년이라는 기록은 당시 문명이나 언어의 발전 상태로 보아 믿기 어렵다.  환웅의 개천이 bc3898년경이므로 환인시대를 3300년으로 잡으면 그 개시 시기가 bc7198경이 되는데 역시 믿기 어렵다. 고작 7분의 환인이 1000년 이상을 다스렸다는 주장이, 환웅시대 18분의 1565년에 비하여 터무니없는 것이다.  문명은 소멸되기도 한다. 전국의 힘이 결집되어 건설되는 수도는 나라가 망하면 유지되지 않는다. bc6200년의 200년 추위로 파나류산 아래 동서남북 사방으로 각각 흩어져 내려갔던 오랑캐족이 다시 파나류산(한산)을 중심으로 결집한 것이 bc480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곳 시라무렌강(西遼河) 남북에서 밭농사가 활발해지고 증가하는 인구와 좋은 농토 확보싸움이 일어나기 시작해서 시라무렌강 북쪽의 환인세력이 시라무렌강 남쪽의 구려까지 포함하여 한반도까지 속방으로 삼은 것이다. 이후 예맥구려를 통합한 새로운 환인시대가 약 1000년동안 존재했을 것이다. 그때 신석기시대부터 예맥인들은 오랑캐를 두려워했고, 그것이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었을 것이다.

 

적봉시赤峰市(원이름은 울란우데) 오한기敖漢旗 조보구문화지趙寶溝文化址는 홍산문화보다 조금 빠른 bc-4800년전 유적이다. 이들은 회갈색이나 홍갈색도자기 위에다가 오랑캐문명의 특징이었던 검은 칠을 가져다가 그림을 입혔는데 그 주제는 녹수신수鹿首神獸, 돼지머리용猪頭龍, 오수신금烏首神禽, 우각거수牛角巨獸 등 4가지 영물 등이 있다. 그외 같은 시대 문화로 고려되는 봉황도자기가 있는데 옹우특기현 해방영자진에서 출토되었다.

 

회색 도자기의 아랫부분 검은칠 회화를 펼쳐보면 아래와 같이 영물들이 그려져 있다.

 

 

그후 bc 4000년에는 황해 바다의 해수면이 bc16000년경 이래로 가장 높아졌다. 당시 황해바다는 얕은 수심 때문에 대륙붕이 완전히 노출되어 육지의 상태였으며 털코끼리가 뛰어다녔고, 기후는 차고 건조했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빙하기가 끝나고 지구가 더워지기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135m나 높게 현재의 해수면처럼 서서히 차오른 것이다. bc5000년에서 bc4000년 사이에만도 해수면은 6.5m가 차올랐다. (단, bc2000년과 ad0년경에는
지금보다 약 3 m 낮았다. 러시아 쿠르간 문화유적지 토양보고서에 의하면 bc2400년부터 약 400년간 심한 가뭄과 강풍으로 추운시기가 있었다.)
한편 bc4300년에는 일본 규슈(九州) 남부 앞바다에서 거대한 화산폭발이 있었다. 세인트헬레나 화산의 150배의 위력에 달하는 초화산(supervolcano)이었고, 지난 만년동안 단 세 번밖에 없었던 비슷한 규모의 1815년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 폭발 때를 보면 1년동안 여름이 없이 추웠고, 900km거리에 1cm의 화산재가 덮혔다.  
bc4300년의 규슈 남해안 키카이 화산 폭발 때는 1700km  떨어진 북해도에까지 화산재가 쌓였다. 규슈 폭발 때에 서요하 끝도 역시 북해도와 같은 1700km 거리다. 편서풍 외에 바람 방향이 어떠했는지, 화산재가 한반도를 넘어 서요하에도 날아갔는지는 모른다. 이후로 규슈 남부는 생명체가 몰살하고 수백년 동안 불모지가 되었다.

이러한 해저 화산의 폭발이 11600년전에도 바다를 덥히고, 지구 기후를 급격히 올렸을 것이며, 이때도 그러하여서 bc4000년에는 북극 빙산이 최고로 많이 녹아서 현재와 마찬가지인 해수면 높이로 상승되었던 것이다.
한편 해수면의 상승과 바다의 확장은 주변 연안의 기온을 떨어뜨렸을 것이다. 즉 발해만 주변과 황해 주변은 오히려 바다 확장 전보다 기온이 떨어지고 내륙인 서요하변도 역시 울창한 숲에서 건조한 초원으로 환경이 변하여갔다. 

이때 환인국의 파나류산 위치는 천해의 동쪽인 바, 지금의 파림좌기(巴林左旗) 북쪽 부하진 (富3898河鎭)으로 추정된다.

파나류산이 있던 부하진과 파림좌기(=임동, 거란국 요나라 수도)와 천산진(요나라 황제의 신단수) 북쪽의 부하진인데 인류 최초의 복골(卜骨)이 출현한 유적지가 있다. bc3300년의 유적이라고 밝혀졌으니 은나라의 복골은 이보다 1000년 뒤의 것이다. 또한 주변 고성터의 흔적을 보면 bc3300년 이전의 유물과 유적 발견도 기대된다. 뒤에 흉노에 패망한 동호족이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오환산, 혹은 선비산이라고도 하였다.

부하진 동남에서 복골이 나왔는데, 그 남쪽으로 남산투, 해력도, 사방성, 호박구 등의 고성터가 의심된다.
복골은 사슴이나 양의 어깨뼈를 사용했다. 아래는 부하진 노야동老爺洞의 풍경이다.

환인의 하늘산은 지금 한산(罕山 1929m), 혹은 서한산이라고 부른다.
 오환산이라고도 했다.
사이한산의 정상에는 평지가 있고, 그 중앙에는
홍지수(泓池水)라는 연못이 있는데 천지(天池)라고도 불렀다. 홍지수가 홍익인간의 뿌리런가?
태백산에는 조천지(朝天池)가 있다고 했는데 지금 백두산 천지로 생각할 수 없다. 백두산 천지는 기원전 200년의 폭발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사이한산(罕山, 1929m) 환인의 파나류산 모습이다.

사이한산의 서남쪽에  흥안령 산맥의 남단 최고봉인 황룡강(黃龍岡, 2029m)이 있는데 부근에 아사하도(阿斯哈圖)가 있고 이는 험산(險山)이라는 의미로 알려져 왔다. 단군 색불루의 녹산 아사달이었다.

환인 시대 12국이 있었다는 기록은 객현한국(客賢汗國)의 존재 때문에 인정하기 어렵다. 객현은 중국에서온 손님인 기자를 가르키는 것이 명백하고 그가 있던 곳이 오늘날도 객라(客羅; 객좌현의 옛이름)다. 따라서 7분의 환인과 같이 7국 연방 정도로 고려된다.

파린좌기 신시 경치보기

이 시기에 세계 인류의 발전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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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시대

환웅 배달국 홍산문화 bc3898~bc2333

1. 환웅시대 개설      2. 신시 아사달의 고증    3. 홍산 유적지      4. 홍산문화의 특징

환웅은 기마 목축 민족으로서 태양을 숭상하고 각종 새를 숭상하며, 또한 구려문화의 전통가치인 용과 거북 등을 숭상했다.

태양에 사는 새인 삼족오三足烏(태양 흑점의 형상)와 부엉이나 매 등 여러 새를 숭상했는데 새를 영혼의 전령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제 용으로 대표되는 토착적 물의 문화와, 새로 유입되었던 태양의 문화, 불의 문화가 융화되어지는 것이 환웅시대다.

          

    1. 환웅시대 개설

고고학계에서는 홍산문화를 대략 bc3500년부터라고 알려져왔는데, 우리나라 고기록에 의하여 단군시대와 환웅시대를 더하면 bc3898년이 된다.
안함로의 <삼성기三聖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환웅씨는 천신의 부름을 받들어 백산, 흑수지간에 내려와 천평에 자정여정을 뚫고 청구 땅에 궁지를 구획하였다...나라 이름을 배달이라 하고 신시에 도읍하였다. 桓雄氏 繼興 奉天神之詔 降于 白山 黑水之間 鑿子井女井於天坪 劃井地 於靑邱. .......立都神市 國號倍達
<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는 <삼성기>보다 더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배달은 환웅이 정한 나라 이름이고 도읍은 신시다. 뒤에 청구국으로 수도를 옮겨 18세 1565년을 누렸다.  倍達 桓雄定有天下之號也 其所都曰神市 後徙靑邱國 傳十八世 歷一千五百六十五年
1세 환웅은 거발한居發桓,
  2세 환웅은 거불리居佛理,  3세 환웅은 우야고右耶古,  4세 환웅은 모사라慕士羅,  5세 환웅은 태우의太虞儀 6세 환웅은 다의발多儀發 , 7세 환웅은 거련居連,  8세 환웅은 안부련安夫連,  9세 환웅은 양운養雲, 10세 환웅은 갈고曷古 또는 독로한獨盧韓, 11세 환웅은 거야발居耶發, 12세 환웅은 주무신州武愼, 13세 환웅은 사와라斯瓦羅, 14세 환웅은 자오지慈烏支 또는 치우蚩尤, 청구국으로 옮겼다. 徒都靑邱國, 15세 환웅은 치액특蚩額特, 16세 환웅은 축다세祝多世, 17세 환웅은 혁다세赫多世, 18세 환웅은 거불단居弗檀 등이다.

안함로의 <삼성기>와 <신시역대기>로 보면 1세 환웅은 먼저 백산과 흑수 사이의 청구에 내려와 천평에 도읍하고, 환인국을 점령하여 신시에서 개천하고, 그후 다시 청구로 되돌아와 18세를 전하였다. 15세 치우환웅에 이르러서는 청구국이라는 이름으로 산동반도 용산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따라서 환웅 18분 중에 4분은 중국에 있게 된다.

환웅이 3000인을 거느리고 서요하로 들어와서는 가장 높은 산 위에 올라서 사방을 둘러 보았을 것이다. 이 홍산문화권에서 가장 높은 산은 난하灤河와 서요하西遼河의 북쪽 가지가 발원하는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으로서 높이는 2067m다.

서쪽으로 나가는 난하 이외에도 대광정자산에서 북쪽으로 서요하의 가지인 백분하百汾河가 발원하여 케스케덴克什克腾旗을 지나고, 대광정자산에서 동쪽으로는 등롱하燈籠河가 발원하여 옹고트翁牛特旗를 지나고, 동남쪽으로는 음하陰河가 발원하여 적봉시 홍산紅山을 지나는데, 난하를 뺀 나머지 모두는 다시 동북방으로 흘러들어 모여서 옹고트를 남과 북으로 각각 지나면 서요하로 합친다.

[요사지리지고遼史地理志考]에 의하면 옛 요락수饒樂水인 지금의 영금하英金河가 하북성 위장(圍場 =하북성 위장현)의 도태산都呼岱山에서 나온다고 하였으니 도태산이 곧 대광정자산이고 환웅의 태백산이다. 도태산徒太山을 태백산太白山, 또는 불함산不咸山이라고도 하였다.

<삼한관경본기三韓觀境本紀>에서 태백산太白山은 비서갑斐西岬의 경계에 있다고 하였다. 또 대일왕大日王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인데 천왕이 순수하던 곳이라고 하였다. 그후 웅녀군熊女君이 세습하였다고 하였다. 대일왕大日王은 웅녀군과 대비되는데 대일왕을 지명으로 찾아보면 오늘날의 대일한산(大日罕-山, 達爾汗山)을 의미한다. 케스케덴 서부 지역 달라이누얼, 즉 달일호수達爾湖水변의 화산火山이다. dalihu라고도 한다.

태백산 비서갑은 대일왕의 대일한산이고, 달리호수에 의해서 비서갑의 하백여신河伯女神이 있었다.

백두산은 bc 180년 전후에 폭발하여 오늘 같은 칼데라 호수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의 백두산 칼데라 호수는 서기 1000년 전후에 만들어졌고 발해 멸망 원인과도 관련없다. 환인, 환웅, 단군 시대 백두산은 역사의 변방이다. 2세기에 기록된 [산해경山海經]에서 대황북경大荒北經 중에 숙신국肅慎氏之國에는 불함산不咸山이 있다고 하였다. 숙신씨는 천산에서 bc2300년경에 장춘으로 이동하였고 그때 불함산이라는 이름도 같이 옮긴 것이다.

 

 

 

 

환웅의 첫 수도는 백산白山과 흑수黑水 사이에 있었다고 하는데, 백산은 대광정자산이었고 흑수는 지금의 노합하老哈河로서 마우산馬盂山(=1729m)에서 발원한다. 마우산은 옛 우이산隅夷山이면서 고대에는 흑산黑山이어서 흑수黑水라고 하였을 것이다. 흑수는 뒤에 도하都河와 토하土河를 거쳐 노로하老魯河라고 불리게 되는데 노로하는 나라하, 즉 낙랑하에서 비롯된 말이다. 환웅의 배달국은 백산의 물과 흑산의 물이 만나는 적봉시 동북에 있었던 것이다.

 

적봉시 홍산紅山의 동북쪽 동팔가석성東八家石城은 신석기시대에 출현한 석성石城으로서 남북이 160m, 동서가 140m인데 불규칙한 장방형 모양이다.

적봉시 녕성현에서는 팔가八家를 몽고말로 보리가“布日嘎”라고 이중으로 표기했다. 즉 팔가는 팔씨네 집이 아니고 보리가의 음독을 비교하여서 “발가”라는 우리말의 차음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석성의 석石까지 당겨서 읽으면 발가달성이 된다. 즉 밝달성, 배달성이다.

주위에는 신정新井, 상정上井, 삼안정三眼井, 동삼안정東三眼井, 동신정東新井 이도정二道井 삼도정三道井 사도정四道井 등 정井자 지명이 매우 많으니, 환웅은 이곳에 정착하기 위하여 우물을 중심으로 정착촌을 만들어 자정子井, 여정女井 등을 획정劃井하고 3000인을 살게 한 것이다.
물이 성읍 건설의 중심이 되는 것은 확실하게 농업 위주 문명 시대인 것을 의미한다.

 

 

동팔가석성을 지나는 물이름은 대광정자산의 음하陰河에서 비롯되는 영금하英金河다. 음하나 영금하는 둘 다 우리말 임금과 관련되는 임금하의 차자다. 음하를 중국 발음대로 “인하”로 읽으면 인금하의 인하가 되는 것이다. 음하 상류 삼좌점三座店 부근에 청동기 시대 석성이 20여좌, 왕가점王家店 부근에 5좌, 초두랑진初頭郞鎭 부근에 12개좌 석성이 있다. 그중에 지가영자池家營子 석성이 최대의 원형석성으로서 면적이 약 10만㎡다.(지름 350m?)

 

영금하를 후대에는 요락수饒樂水라고도 하고 또 낙수樂水라고도 했다.

적봉시 북쪽 영금하 변에는 “지주산蜘蛛山”이라는 홍산문화 유적지도 있다. 지주산은 우리말로 거미산이고 이는 고미산, 곰의산, 즉 곰산이 어원이다. 부여어 계통인 일본말로는 신神이 “가미”라서 고미산을 신산神山으로 볼 수 있다. 곰산의 또다른 차자는 금산金山이다. 백제 웅진성의 곰강이 금강錦江으로 쓰인 것이다. 영금산은 즉 잉곰산이었다. 영금하의 또다른 상류 가지는 고도하古都河라고 한다. 즉 영금하, 임금하와 마찬가지로 도하都河 역시 영금하가 고대 도읍지의 물인 것을 의미한다. 도하都河가 후에 토하土河로 바뀌었다.

 

고도하古都河 부근 서도촌西道村 강변에 고구려 성의 특징인 점장대点將臺 유적이 외롭게 남아있다. 그 서쪽에는 판축토성版築土城인 송주성松州城(1000m x 500m)이 남아있다. 당나라가 거란에 설치했던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가 있던 곳이다. 그래서 이 도하都河는 송강松江, 또는 송산하松山河라고도 불렀다.

적봉 남쪽에 팔리포八里浦가 있는데, 적봉이나 홍산은 우리말로 “붉은달”이며 “밝달”이고, 팔리포는 “밝성”의 “밝”포로 고려된다. 적봉 동쪽의 우미려하 동고성에도 고구려 성의 흔적인 점장대가 남아 있다.

 

서요하의 남쪽 발원지인 흑리하黑里河(=노하老河의 최상류)가 흐르는 영성현寧城縣 팔리한진八里罕鎭의 팔리한하八里罕河를 보면 “팔리한”은 발한發桓의 차음借音이다. 간혹 파이한巴爾罕으로도 기록하니 역시 발한의 차음이다. (팔리의 리里를 앞글자의 받침으로 보는 것은 <단군세기> 23세단군 아홀阿忽 기록에서 몽골을 몽고리蒙古里로 기록한 것이나 똑같은 경우다. 비서갑 달리한성의 리도 마찬가지다.)

1세 환웅의 이름이 거발한居發桓인데, 고구려 고국천왕故國川王이 고국천에 묻힌 것처럼 거발한 환웅은 발한하發桓河, 즉 팔리한하에 묻혔을 것이다. 즉 발한성에 묻힌 것인데 이는 영성현의 남산근 유적지와 관련된다.

 

환웅시대 첫 도읍 청구국 천평성인 동팔가달성과 거발한 환웅이 묻힌 팔리한진 발한성의 거리는 120km내외다.

종합하면 환웅 세력은 천산의 신시로부터 태백산의 청구 땅 배달국으로 내려온 세력이며 예족을 구축하고 웅족으로 대신하였다. 마늘과 쑥으로 은유되는 대기근이 웅족의 남진을 초래하였을 것인데, 배서갑은 해발 1000m의 고지고, 적봉은 해발 500m 정도다.

 

2. 신시 아사달의 고증

배달국 신시 아사달은 단군 왕검이 조선을 세워 천제와 즉위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단군세기檀君世紀>에서 신인 왕검王儉이 800명과 함께 단국檀國으로부터 아사달阿斯達의 단목지허檀木之墟로 와서 국인들의 추대로 천제가 되었다.

[삼국유사]에서 단군 수도는 백주白州 무엽산無葉山이라고 했다.

극시극등기克什克腾旗(=케스케덴)의 아시하도阿斯哈图(=2029m)는 흥안령산맥의 남쪽 최고 봉우리로서 과거에 목엽산木葉山이라 불렀다. 

또한 아로과이심기阿魯科爾沁旗 동남쪽 천산진의 천산天山(=685m, )도 요나라때 목엽산이었다.

물론 단군 왕검의 수도였던 요녕성 창무彰武시 위가자 아래에도 무엽산葉茂臺의 흔적인 엽무대가 있다.

[단기고사]에서 3세 단군 가륵嘉勒이 동생 가록嘉祿을 신시 아사달에 책봉하고, 사달왕斯達王이라고 불렀다. 이후 진번후眞番候라고도 하였다.

왕검의 손자 가록왕으로 비롯되는 “가록산嘉鹿山”이 요나라 때 왕족 야율습열耶律習涅 묘지墓志가 발견되어 그 위치가 고증되었다.

가록산은 지금의 소한산小罕山(=1497m)인데, 파림좌기巴林左旗와 아로과이심기阿魯科爾沁旗사이에 있다. 지도에 표시된 천산의 동북에 있고 지도에 표시된 신시의 서북쪽에 있다.

따라서 가록산의 아래인 아로과이심기의 천산진天山鎭(=지도에서 신시)이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치러 가면서 하늘에 제사를 올린 목엽산木葉山이며, 이 천산진 아래는 백성자白城子가 있으니 신시라고 부르던 백악산아사달의 흔적이고 또 사달왕과 관계될 수 있는 시달목소목柴達木-蘇木도 있다. 만주말 시달목을 한어로 번역하면 백락白濼이라 한다. 백락은 흰 물이며 동시에 밝다는 뜻의 대웅大熊으로 보면 환웅산이 된다.

대웅大熊을 몽고어로 파라이巴賴라고 한다. 우리말로 빛을 낸다는 의미의 “밝”이다. 백락도 대웅도 곧 우리말 밝을 의미한다. 현재 지명의 파림기도 대웅에서 유래된 것이다.


환웅의 신시 아사달 위치와 성터, 백악산아사달이라고도 한다. 옆에는 해모수 북부여성터가 있다

 

백성자를 요나라는 영주永州라고 했는데, 여기에 의미있는 기록이 남아있다.

상경도 영주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영주 목엽산에는 거란시조 기수가한묘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인이 백마를 타고 마우산(지도의 흑산)에서 토하를 따라 내려오고 천녀가 푸른소가 끄는 마차를 타고 평지송림에서 황하潢河를 따라 내려와서 목엽산에 이르러 토하와 황하 두 강이 만나니 서로 결합하여 8명의 아들을 낳아서 8부를 두었다. 有木葉山,上建契丹始祖廟,奇首可汗在南廟,可敦在北廟 繪塑二聖並八子神像。相傳有神人乘白馬,自馬盂山浮土河而東,有天女駕青牛車由平地松林泛潢河而下。至木葉山,二水合流,相遇爲配偶,生八子。其後族屬漸盛,分爲八部

마우산馬盂山은 요나라 야율종耶律琮과 진진대장공주秦晉大長公主 묘지 발굴로 인하여 확증되었는데 팔리한 고성 서남쪽의 서요하 발원지인 마우산으로서 높이는 1729m이다. 즉 신인神人은 신시를 세운 환웅인데, 토하를 따라 말을 타고 가서 천녀, 즉 웅녀를 만나서 결합한 것이다.

여기서 황수는 거란 상경임황부의 물로서 상경 동쪽을 흐르는 물이다. 이는 소한산, 즉 가록산의 동쪽에서 비롯되며 지금은 오이길목륜하烏爾吉木淪河라고 한다. 평지송림은 상경의 동쪽 40리 지점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곳으로 호교胡嶠의 [함요기陷遼記, 946~953년]에 기록되었다.  

거란 8부족을 만든 거란 시조로 추앙되는 기수가한奇首可汗이 언제 때 인물인지 알 수 없다.

가돈, 즉 천녀의 묘가 기수가한의 묘보다 북쪽인 것으로 보아서 우하량 유적지처럼 여제사장이 있던 모계사회 시대 전설로 고려된다.

 

가한이라는 말의 최고 기록은 <번한세가>의 2대 번한 낭사가 세운 가한성可汗城이다. 여기서 가한은 단군 아래로 보이지만 처음부터 아래는 아니다.

거란족은 북부여의 패망 이후 천년 이상 역사를 잃어버렸고, 신인 환웅의 사당을 다시 발견해서는 그들이 아는 가장 성스러운 이름으로 신인을 기수라 하고 환웅을 가한이라고 호칭했을 수 있다. 고구려가 5부, 부여가 6가제였는데 단군시대는 [규원사화] 기록에서 호가, 마가, 우가, 웅가, 응가, 노가, 학가, 구가 등 8가제다. <신시본기>에서 8괘를 만들어 복희역을 만든 복희가 태어난 곳이 신시라고 하는데 이 천산진 북쪽 부하문화 유적지에서는 가장 오래된 복골이 나왔다. 그 복골이야말로 복희역의 출발점인 것이다.

 

요나라 때 이 목엽산에서 요나라 황제와 황후가 직접 절하고 천제天際를 지냈다. [요사-예지]에, 이 천산의 목엽산 한가운데에 왕이 되는 군왕수를 동쪽으로 향해서 중앙에 심고 그 아래에는 신하 나무를 조례 하듯이 세우고

군왕수 뒤에는 배우목으로 두 나무를 심고 이를 신문神門이라고 불렀다.

신문神門은 신목神木, 즉 신단수神檀樹다.

祭山儀:設天神、地祗位於木葉山,東鄉;中立君樹,前植群樹,以像朝班;又偶植二樹,以爲神門。

황제 황후가 이르러서 백마, 흑소, 백양을 잡는데 복신이 기를 흔들고 북을 울리며 희생을 잡고 신단수에 매어단다. 

皇帝、皇后至,夷離畢具禮儀。牲用赭白馬、玄牛、赤白羊,皆牡。僕臣曰旗鼓拽刺,殺牲,體割,懸之君樹。

무당이 술을 붓고...황제, 황후가 와서 군왕목 앞에서 하마하고 남단에 올라 어탑좌에 앉는다. 이하 생략

太巫以酒酹牲。禮官曰敵烈麻都,奏「儀辦」。皇帝服金文金冠,白綾袍,絳帶,懸魚,三山絳垂,飾犀玉刀錯,絡縫烏靴。皇后御絳溗,絡縫紅袍,懸玉珮,雙結帕,絡縫烏靴。皇帝、皇后御鞍馬。群臣在南,命婦在北,服從各部旗幟之色以從。皇帝、皇后至君樹前下馬,升南壇御塌坐。下略


이제 1) 단군 가륵의 동생 사달왕 가록의 가록산의 고증과 가록왕의 신시 아사달, 2) [삼국유사]의 단군 수도 백주 목엽산,

3) 옛 백성자에 남아있는 환웅과 웅녀의 만남 전설 등과 더불어, 4)목엽산에서 행해졌던 신단수 제사법의 유일한 기록에 의해서 1세 거발한 환웅과 단군 왕검의 개천 도읍 신시는 아로과이심기 천산진 남쪽 백성자로 확정된다.

 

거발한 환웅은 태백산에 내려왔다가 신시 목엽산에서 웅씨족과 결합하고 그곳에 수도 아사달을 두고 시장을 열어서 문물을 모이게 하였다. 그러나 환웅의 도성은 다시 남쪽 청구, 그의 처음 개척지로 옮겨갔다.

그 웅녀족의 피를 직통으로 받은 단군족에게는 환웅이 강림했던 성산이지만 환웅에게는 그가 사냥하고 순수했던 여러 지역 중의 하나였던 셈이다. 왜냐하면 이 지역의 도자기는 갈도褐陶로서 홍산문화의 전형인 채도彩陶가 아니다. 즉 환웅이 강림하여서 웅녀와 결합까지 하였으나 정착하지 않고 돌아간 것이다. 웅녀조차도 환웅을 따라서 남천하여 능원현凌源縣의 우하량牛河梁에 자리잡고 그곳에 살던 기존의 예穢족을 밀어낸 것으로 보인다.

 

3세 단군 가륵은 신지神誌 고글高契에게 신시 배달의 역사를 기록한 배달유기를 기록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신지 고글契의 후손은 바로 글안契丹, 즉 거란족이다. 배달국 신시가 거란족 요나라의 발생지인 것은 이런 연유다. 신시의 신단수 제례 풍습을 시행하고 또 기록하여 남겨두기도 했다. 마한 풍속에서도 대목大木에 방울을 걸어서 신을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대웅大熊을 몽고말로 파라巴賴라고 하며 우리말로 “밝”이다. 웅熊의 훈에 “불꽃처럼 빛나는 모양”이 있다. 대웅이 한웅桓熊(⇀桓雄)이고 훈이 밝인데 신시였던 천산의 백성자를 의미한다. 그 동남쪽 시달목소목의 시달목柴達木은 몽고어로서 본래는 박락白濼(蒙名 柴達木)이라 하는데 파라巴賴와 같다.

환웅 전설속의 신단목神檀木이 시달목柴達木으로 기록된 것으로 고려되는데 시달은 마고 전설의 실달實達성과도 관련될 수도 있다. [삼국유사]에서 말한 단군 조선의 수도 백주 무엽산은 바로 여기 천산진이다.

 

한편 단군 이후 거란족의 역사 기록이 천년이나 끊겨서, 거란족이 다시 거란국 역사를 편찬할 때는 조상의 신성한 만남이 이름도 잘 모르는 전설이 되어, 환웅-웅녀의 기록이 빠져버렸다. 그 대신에 중국 역사를 빌려다가 [요사-영위지] 앞머리를 만드니 거란 스스로 제 조상인 치우천황을 작란作亂한 인물로 욕했다.

3. 홍산 유적지

1) 나리사대 유적지

가록산(소한산)의 서쪽 한산罕山(=1936m) 또는 새한산賽罕山은 흑산이라고도 했는데, 소한산의 서쪽 골은 흑수黑水라고 했으며 이 흑수가 서요하로 들어가는 길목에 나리사대那日斯臺 유적지가 있다. 나리사대문화 유적지에서는 옥도끼와 더불어서 마노瑪瑙로 만든 석도石刀도 등장한다. 옥기 조각이 매우 다양화 되며 각종의 옥패식이 등장한다. 구름형옥대, 옥구, 물고기형 옥패식, 용형 옥결, 부엉이형 옥패식, 옥관 등이다. (그림 15 참조)

도기는 빗살무늬 토기가 여러 첨가 기법으로 다양해지면서 뱀무늬의 채도문도 등장한다.

나리사대 문화의 가장 주요한 발굴로서 남자와 여자의 돌조각이 각각 하나씩 있는데 남자는 35cm 높이에 미간까지 보호하는 투구(투구 재료가 청동인지 코뿔소 가죽인지 알 수 없다.)를 쓰고 의자에 걸터앉아 있다. 여자는 높이 19cm에 안면을 머리칼로 팔자 형태로 가리고 머리 위에는 3층의 족두리 장식을 얹었으며 두 손을 합장하고 무릎을 꿇었다. 여자상과 함께 발굴된 석수상石獸像은 높이 9cm, 남은 길이 14cm의 작은 곰의 형상이다. (아래 그림)

환웅, 웅녀의 만남은 이미 반만년전에 실재로 존재했던 사실이 이 나리사대 돌조각품으로 증거된다. 이 석조물들처럼 곰 부족의 여자가 소원하여 환웅의 씨를 얻어서 득세를 하고 호랑이족 예穢의 영역을 획득해나간다. 그리고 그 서쪽의 임서현林西縣 쌍정雙井 백음장한白音長汗 유적지에서는 35cm 높이의 임신한 여신상生育女神像이 나왔다. 고구려까지 모시던 부여신扶餘神일 수도 있다.

       

나리사대에서 발굴된 환웅-웅녀, 곰 조각상

 

나리사대에서 발굴된 옥기

 

웅녀족이 환웅과 함께 예맥의 땅을 빼앗아 옮겨간 곳으로 신석기 홍산문화의 정수격인 요녕성 능원시凌源市 우하량牛河梁 유적지가 있다. 유적지 최상단의 여신묘를 중심으로 반경 5km 안에 6개 지점에 걸쳐서 약 20개의 대형 적석총과 제단 등이 있다. (그림 16 참조)

남쪽에 금자탑金字塔이라는 제사 건축지는 3단 원형 제단으로서 아랫단의 직경이 60m, 윗단의 직경이 40m에 이르고 그 위에 봉토를 하였다.

그리고 북쪽에는 200m X 200m 규모의 신석기 석성 터가 남아있다.

 

2)우하량유적지

우하량 적석총에서 발굴된 유물은 거의 홍산문화 유물이며 청동기는 일체 없지만 제단의 규모, 왕릉의 규모가 개세적이라서 중국 역사학계에 역사적 쇼크를 주었다. 우하량 적석총 홍산문화는 시기적으로는 약 5500년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 왕릉들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중국에서는 이 우하량 지역을 웅산熊山이라고 고려하면서 유웅씨有熊氏와 그 후예인 황제黃帝 헌원公孫軒轅, 그리고 황제의 손자 고양왕 전욱顓頊등의 조상으로 고려한다. 그리고 최상부의 여신묘는 복희와 부부였던 여와신女媧神이라고도 해석한다. 그러나 여와신은 복희와 함께 뱀으로 형상화되기는 했어도 곰은 아니었다. 이곳 여신묘에는 특별하게도 곰의 턱뼈가 부장되어 있었다. (그림  참조)
그래서 이 홍산문화 적석총의 주인은 환웅과 웅녀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홍산문화 특유의 적석총 묘제는 요동반도와 압록강의 적석총, 서울 송파의 적석총, 경주의 적석총으로 이어진다.

우하량유적지는 유적지의 분포가 넓고 많다. 우하량 유적지는 20여개 지점이며 그중에 5개 지점의 적석총군이 대표적이다. 적석총 2지점은 150 x 80m 규모다. 2지점의 제단은 3층 원형의 돌제단이며, 4기의 춘추시대 적석총과 여러개의 석곽묘가 있다. 적석총 3지점은 2지점의 북쪽 200m 거리에 있는데 적석총 1기와 8개의 석곽묘가 있다. 적석총 5지점은 3지점으로부터 서쪽 882m 지점이고 2기의 적석총과 발굴하지 않은 석곽묘가 있다. 4지점은 3지점으로부터 577m이다. 미발굴이다. 또한 3지점 1000m 북쪽에는 여신묘(女神墓) 건축유적이 있고 여신묘 북쪽에 규모가 작은 적석총 6지점, 7지점, 8지점, 9지점이 있다. 5지점 남쪽에는 금자탑(金子塔)으로 불리는 직경 100m의 3층 원형 토단(土壇)이 있다.  

우하량은 홍산문화의 보통 석곽묘(石槨墓)제에 더하여 최초로 적석총(積石塚)으로서 산릉(山陵)을 쌓았다. 

여신묘 건축지로서 진흙으로 만든 여신상과 더불어 곰의 머리뼈가 출토되어 곰 토템과 여제사장으로서의 웅녀를 강력하게 시사한다. 여신의 두상에는 옥으로 눈을 만들었고 그외 작은 여신상, 생육여신 (生肉女神)상도 있다.

진흙 여신상과 곰 턱뼈

 금자탑(金子塔)은 3층의 대형토돈(大型土墩)으로서 윗층은 반경 40m이고 하층 외곽은 반경 60 - 100m에 이르는데 각층마다 8-15m 높이의 석축을 쌓고 중앙을 흙으로 채웠다. (약 bc. 1500년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금자탑은 중국 동남해안, 양자강 하류와 태호(太湖) 부근의 양저문화(良渚文化)의 제단 및 옥기류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양저문화는 치우 청구국의 산동반도 이주로 인해 영향을 받아서 옥기가 번성한 문화다.

우하량에서는 홍산문화의 최정수라고 할수 있는 각종 옥기들이 최다량으로 발굴되었다. 옥조룡(玉彫龍)이 대표적으로 많고, 구름무늬 옥패(玉牌), 옥벽(玉璧), 쌍련옥벽(雙聯玉璧), 삼련옥벽(三聯玉璧), 옥종형기(玉琮形器), 옥탁(玉鐸), 옥완(玉瑗), 옥비식(玉臂飾), 옥고(玉[]),  옥고형기(玉[]形器), 옥거북이, 새조각, 수면형(獸面形) 옥패식 등이다.




                                                                우하량에서 발굴된 옥기

우하량의 도기는 용린문(龍鱗文) 흑도(黑陶), 홍도(紅陶), 자도(紫陶) 등 채도가 많이 나오는데 종합하면 매우 강력한 신권 국가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가까운 객좌현
(客左縣)에서도 제사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객좌현성에서 서쪽으로 3.5km 지점의 흥륭장향 장경여자촌 대릉하 서안의 동산취 후량 정상부에서 네모난 돌을 쌓아올린 돌담벽과 쌍두룡옥황 , 녹송석 조각 새 등 장식과 형체특이적 채도기가 대량 발굴되었다.
유적지 남부에서 직경 8m의 원형제단이 발굴되었다. 제단 주변은 석판을 대고 안에는 크고 작은 돌을 덮어 쌓았다.  
즉 , 북부는 네모 방형이고 남부는 원형이니 전방후원고분에 대응된다. 탄소측정 연대는 대략 5000년전이다.
여성나체임부조각상, 대형임신부좌성이 발굴되어 생육신상이라 한다.
그외 타격석기, 돌도끼, 세석기, 뼈화살촉 등이 나오고 홍도편, 채도편, 흑도편, 지자문 위주 질그룻이 많았다.

3)부하구 유적지

5세 태우의 환웅의 막내아들이 복희伏犧인데, 점복술로 인하여 여와복희의 전설을 남겼다. 그는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를 세습하고, 뒤에 청구, 낙랑을 거쳐 진陳으로 갔는데 산서성을 다스리다가 산동성으로 갔다.  

내몽고 오이길목륜하烏爾吉沐淪河 유역 파림좌기巴林左旗 부하구문화富河溝文化는 약 5300년전에 시작되었는데, 촌락의 방이 원형인 것이 추가되고有方形、圓形兩種 방 중앙에 화로 구덩이有灶坑가 나타나고 불을 피워서 추위를 막고 음식을 끓여 먹었고, 그외 뼈를 불에 구워서 점을 치는 복골卜骨이 나왔다. 이는 중국 최초의 복골이며 은허의 복골 문화가 본래 홍산문화 신시의 복희로부터 전래된 것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즉 은나라 은허 문명은 바로 홍산 문화와 용산문화의 후손이다. 동시에 은나라 갑골 상형 문자도 여기서 발생하여 전래된 것이다. 한자漢字도 중국인들의 독자적인 문화가 아니라 동이민족이 홍산문화에서 개발한 기호로서 만들어진 양의 문자이다.

 

4. 홍산문화의 특징

1) 홍산문화의 첫 번째 특징은 소위 빗살무늬 도자기 시대였던 선홍산문화인 예맥시대의 단순 기하문의 질박한 회색, 혹은 황색 토기에서, 홍색 토기에 검은 무늬의 새로운 문화 세력이 이입된 것이다.

2) 홍산문화의 두 번째 특징은 다양하고 정교한 옥기다. 용, 돼지용, 물고기, 거북이, 매미, 부엉이 등과 같은 다양한 토템, 그리고 옥벽玉壁、옥환玉環、구름무늬장식勾云纹佩飾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3) 홍산문화의 세 번째 특징은 돌무덤이다. 돌을 쌓은 적석총積石冢도 나타나고 석곽石槨 무덤과 석관石棺 무덤도 나타난다.

석관무덤은 요녕성 우하량牛河梁, 하북성 평천平泉 위장圍場 당산唐山 적봉시 홍산紅山과 하가점夏家店, 영성寧城 등에 존재한다.

4) 네 번째 특징은 화로를 이용한 난방과 역시 불을 이용한 복골의 출현이다.

5) 다섯 번째 특징은 암각화의 기록이다. 태백산이었던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서요하의 지류인 케스케덴克什克騰旗 백분하百岔河 계곡를 따라서 신석기 시대부터 암각화가 발달해 있다. 강안을 따라서 100리에 걸쳐서 약 140개의 암벽에 가지가지 주제로 벽화가 남아있다.

여러곳의 암화와 비교하여 이곳의 암화 주제 중에 사슴이 유독하게 많다. 부여가 원래 사슴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 반면에 부루는 늑대를 가리킨다는데 단군 부루가 산동에 세운 낭사군 낭사대琅邪臺도 늑대의 낭狼이다.

케스케덴克什克騰旗 백분하 암각화 모음 

 

백분하 암각화에는 수렵화, 부엉이형 인물화, 군무화群舞畵, 생식화生殖畵, 천체성수화星宿畵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토성자에서도 사냥 기마도 같은 암화가 보인다. 대부분은 청동기 시대 예술로 추정하지만 일부는 신석기 유적지에서 발현되어 신석기에 암각화가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주제가 주로 사냥과 목축이므로 유목민족의 생활이기에 환웅이 도래한 홍산문화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고려한다.

 

홍산문화의 범위는 동쪽으로 요하遼河 유역, 서쪽으로 하북성 장가구시張家口 남쪽으로 북경北京과 천진天津 북으로는 서요하西遼河 북쪽까지 광할한 지역이다. 홍산문화는 대략 bc4800년에서 bc2200년까지인데 [한단고기韓檀古記-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 기록상의 환웅시대인 bc3898년에서 bc2333년까지와는 하한下限이 거의 일치한다.

 

웅녀족과 같은 곰 토템을 현재도 가진 에벤키鄂溫克, ewenki 민족은 퉁구스tungus, 또는 색륜索倫, solong 등으로 불려왔는데, 그들은 지금 내몽고의 흑룡강 가까운 최북부 하이라얼시와 몽고, 소련 바이칼호변, 그리고 예르니아강 퉁구스카, 사하공화국 야쿠트공화국까지 퍼져 사는 겨우 수만명의 희소 종족이다. 이들은 아직도 사슴을 키우고, 곰, 멧돼지를 사냥하는 유목민이며, 지야지신(치우기?)을 경배하고 또 산신과 불의 신, 그리고 곰을 숭상한다. 또한 그들 사회에서 무당은 신분이 높은데 이들로 인해 샤만 연구가 생겨났다. 아무튼 이들의 유목 생활 풍습이 백분하 계곡의 암각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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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구려치우 용산문화 bc2800~bc2300

        1. 소하연문화 부호문자  2. 하가점 하층 청동문화  3. 청동기 도입 용산문화

             

1.  소하연문화 부호문자

 

소하연문화小河沿文化는 내몽고 오한기敖漢旗 소하연향小河沿鄕 백시랑영자촌白斯朗營子村과 옹고트翁牛特旗 해방영자향解放營子鄕 석붕산石棚山의 77좌 고묘장에서 나타났는데 그 시기는 약 4900년 전이다. 즉 환웅시대 말기로서 치우가 치하淄河로 청구국을 옮겨가기 직전의 만기晩期 신석기문화다.

     

3000년전 하북성 중산국왕의 도끼에 나타난 부호글자와  4900년전 내몽고 옹고트 석붕산 도자기에 나타난 부호글자

 

적봉시와 가까운 옹고트 해방영자향 석붕산 고묘에서 원시적인 부호문자符号文子가 사슴 그림과 섞여서 출현한다.

그중 한 도기에서만 7글자의 부호가 나왔는데 부호로서 田, 卍 이외에 비飛, 연燕, 부斧, 기己, 을乙 등의 고어체가 있다.

만卍형 글자에 대하여 진혜陳惠는 [문물춘추文物春秋, 1992]<내몽고 석붕산 도문시석內蒙古 石棚山 陶文試釋>에서 백적白翟의 부족 족휘族徽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5000년전 환웅시대 내몽고의 도자기에 새겨진 부호와, 3000년전의 백적족 중산국中山國(하북성 석가장시石家莊市 평산현平山縣 영수고성靈壽古城) 도끼의 부호 문양이 일치한다. 부호 글은 상형문자 한자의 뿌리다.

백적족은 주周나라 때에 주나라 왕실과 통혼한 단군의 장수가 세운 나라다.훗날에 적翟을 적狄으로 바꾸어서 북적北狄이라고도 했다. (후단군조선은 동이족 영역에서 북적의 영역으로 진출하여 오르도스 고원에 진출했었다.)

 

이로서 신석기 말기에 환웅국이 문자를 이용한 기록이 증명된 것이다.[한단고기]에 의하면 환웅시대는 녹서鹿書, 치우시대는 화서花書가 있었다고 했다. 녹서鹿書는 백분하百汾河 계곡이나 음산 암각화에서 연구해야 할 것으로 보이고, 옹고트 석붕산의 질그릇에 새겨진 부호는 마치 꽃문양을 보는 것 같으니 화서花書로 고려된다.

홍산문화가 소하연문화로 발전할 때에 14세 환웅 치우가 산동으로 도읍을 옮겨갔다.

 

 

2.  하가점 하층 청동문화


하가점夏家店 문화지는 서요하西遼河의 남쪽 상류인 노합하老哈河의 중류에 있으며 적봉에서 동쪽 15km 지점이다.

하가점 문화지에서는 상층문화지에서 구리로 만든 송곳銅錐 4건, 동촉 2건 연주상 동식連珠狀 銅飾이 5건, 쌍미형 동식 2건 등이 있다. 하가점 문화지의 최하층에서도 구리 과립 4개가 나왔는데 이는 청동기물에서 떨어진 것으로 고려된다. 이것이 배달 청구 시대의 최초 구리 유물에 해당한다.

초기 구리 유물이 발굴되는 곳은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대성산유지大成山遺址, 내몽고 적봉시 하가점유지夏家店遺址, 적봉시 영성현寧城縣 소유수림자小楡樹林子, 영성현 대전자大甸子 등이다. (여기서 영성현 대전자 지역이 앞장에 소개된 청구국 수도 발한산 흑성 지역이다.)

 

당산시 대성산 유지에서는 초기 청동기시대의 붉은 색을 띤 순동純銅 copper의 성질을 띤 홍동패식紅銅牌飾 2개가 발견되었는데, 대략 bc20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적봉시 하가점유지에서 발견된 4과의 동련사銅練渣(제련덩어리)는 순동보다 한 단계 발전한 것으로 탄소 동위원소 C-14 절대연대가 bc1900년전후의 유적에서 나왔으며, 대전자大甸子의 소형 동기銅器가 bc2000-bc1500년간의 유지에서 출토되었다.

 

<신시본기>에서 치우는 갈로산葛盧山의 쇠를 캐어서 옹호산雍狐山에서 야금을 하였다는데 옹호산이 옹고트翁牛特旗 옛이름으로 고려된다. 현 옹고트의 북쪽 지역인 임서현林西縣에서 구리를 캐던 고대 동광銅鑛이 발굴되었다. 옹고트 서쪽 이웃인 케스케덴克什克騰旗의 천보동天寶洞과 용두산龍頭山 문화지에서는 초기 청동기물이 많이 발굴되었다.

일반적으로 하가점하층문화를 용산문화 이후로 분류하지만 하가점하층문화가 치우 용산문화의 배경이 되는 구리 도입 문화이기 때문에 먼저 소개했다.

 

 

3.  청동기 도입 용산문화

 

메소포타미아의 슈메르족이 6000년전에 청동기문화와 청동무기를 개발했다.

천년 뒤에 치우가 청동기를 중앙아시아에서 수입해와서 14세 자오지 환웅이 되고, 중국 내지로 들어가 황제 헌원을 밀어낸 뒤에, 치하淄河변에 청구국을 세워 용산문화龍山文化를 퍼뜨렸다.

치우의 치蚩에서 치하淄河가 비롯된다. 치淄가 검다는 뜻이 있는데 용산문화에는 검은색 질그릇이 등장하고 옥기에도 청동기 도구로서 귀신무늬가 새겨진다. 옥기에 새겨진 수면문獸面文도 정교하게 수면문을 새긴 도구로서 청동기 도구의 존재를 시사한다.


그림 4)  용산문화  수면문 옥규와 삼태극 옥기

용산문화 수면문 방정

용산문화가 최초로 발견된 것은 산동성 제남시齊南市 동쪽 용산진龍山鎭이다. 용산문화는 bc2800-bc2000년 사이에 하남, 섬서, 산동, 하북에 근거했다. 반월형 석도가 출현했으며, 돌삽, 돌낫 등의 출현으로 농업 기술이 혁신되었다. 가축 사육면에서 중국 앙소문화仰韶文化보다 수량도 많을 뿐 아니라, 개나 돼지 외에, 소와 양 등이 추가되었고 닭과 말도 사육되었다.

예맥, 숙신, 물길족은 양을 기르지 않았다. 환웅의 부여족이 닭과 말, 양을 가지고 온 것이다.

질그릇에서 채도는 줄고, 회색, 흑색 토기가 주로 되며 손잡이 달린 세발솥三足器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빗살무늬 대문구문화 말기인 태산 동남쪽 거현莒縣 유적에서는 원시 한자漢字가 질그릇에 새겨져 출현한다. 조早, 朝의 원형이 되는 상형 글자이다.용산문화의 옥기는 옥면에 짐승이나 매 또는 독수리의 그림을 새기고 삼태극三太極형 옥환이 나타난다.

 

종래에는 bc2100년에 세워진 하夏나라 조기에 중국 최초의 청동기 문화가 시작된 것으로 보았다. 언사偃師 이리두二里頭 문화가 바로 그 하夏나라 청동문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리두 문화보다 이른 앙소문화(bc5000- 3000년)에 속하는 서안西安 반파半坡 유적지에서 황동편黃銅片이 발견되고, 황하 상류 마가요문화馬家窯文化에 속하는 감숙성에서 청동도靑銅刀가 나오고, 청해성에서 동경銅鏡이 나왔다. 또한 용산문화龍山文化에 이르러서 잔동추殘銅錐, 동련사銅煉渣, 공작석孔雀石(구리와 탄소 결합 보석) 등등의 동편銅片이나 동액銅液 흔적, 동령銅鈴,등 다양한 청동문화 흔적이 잇달아 발굴되고 나타나서 이제는 용산문화를 하나라에 앞선 중국 최초 청동기문화의 서막으로 보게 되었다.

이 청동기가 발굴되는 용산문화 유적지의 분포는 산동성의 교현, 유하현, 장도현, 일조현 등과 하남성의 정주, 임여현, 등봉현, 산서성의 양분현 등이다.

[사기]에서 치우환웅은 동두철액銅頭鐵額의 투구 무장을 하고 탁록啄鹿에서 웅씨의 후예인 황제黃帝 헌원公孫軒轅과 싸웠다. 치우가 처음으로 청동 창과 방패干戈를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동두철액하는 수준이면 투구를 주조하는 기술도 상당하고, 또 철편을 두드려 펴는 기술도 있어야 한다.

 

치우환웅은 황제 헌원과 탁록에서 결전하여 이기고 남쪽으로 내려가 새로운 청구국을 열었다. [중국전사中國全史]에서는 하남, 하북, 산동, 산서에는 치우환웅, 섬서성 장안은 황제가 있었고 황제가 치우를 죽였다고 하는데 역사 왜곡이다.

14세 치우 환웅 이래 청구국 영역은 황하 남쪽 하남성으로부터 산동반도 일대, 양자강 북쪽의 회淮-대代 등지로 추정되는데, 서요하西遼河 남단의 청구국에서 중원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치우가 옮겨간 새로운 청구국의 중심은 하남성 개봉시 진류에서 시작하여 산동성 제하濟河, 치하淄河 유역의 임제臨濟, 임치臨淄, 임구臨丘, 청구靑丘, 안구安丘 등으로 옮겨왔을 것이다. 치우환웅이 불함산에서 옮겨간 새로운 청구국靑丘國은 산동반도 태산泰山아래였다.

 

<대변경大辯經>에서 "치우환웅은 천하를 평정하고 회대淮岱를 점령한 바 있는데, 그의 능이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에 있다."고 했다.[진서晉書-지리지地理志]에서도 동평국東平國 수장현壽張縣에 치우사蚩尤祠가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치우능이 있다고 하는 동평군 수장현은 오늘날 산동성의 황하 남쪽 운성鄆城 수장집壽張集이라는 고장이다. 현재 흔적도 없다. 같은 책에서 임제臨齊에도 치우사가 있었다.

한편 [규원사화揆園史話]에서는 치우환웅이 공상空桑에서 제위에 올랐다고 하는데 이 공상은 오늘날의 하남성 개봉시開封市다. 개봉시 동남쪽 교외에 진류陳留라는 곳이 치우가 즉위한 공상의 정확한 위치다.

 

고고학적으로 용산문화의 시작과 [사기]에 기록된 치우의 시대는 일치한다. 치우 환웅은 bc2700년에 배달 신시 문화로부터 산동반도의 빗살무늬 예맥 문명지의 하나인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에 옮겨 들어가서 용산문화를 일으킨 것이다. 훗날 상商(=殷)나라, 제齊나라로 이어진다.

 

치우가 공상에서 즉위했어도 치우가 옮겨간 청구국의 새 도읍지는 현재의 치하변淄河邊 임치 臨淄, 우산牛山 부근으로 고려된다. 임치는 과거에 영구營丘라고 하였다. 임치 주변에 제나라 도읍성, 제나라 왕이었던 환공대桓公臺, 관중묘管仲墓 등이 있는데 본래 삼황오제중 첫째인 태호복희太昊伏犧가 이미 임치에 살았다고 전한다.

태호복희는 18환웅 중의 5째인 태우의환웅의 12번째 아들인데 신시에서 태어나서 팔괘를 만들어 복희역점을 만들었는데 청구 낙랑을 거쳐 임치에 살았고 그의 능도 산동성에 있다고 한다. 복희가 태어난 천산의 신시 북쪽 부하문화에서는 가장 오래된 복골이 나왔다.

치우도 검다는 뜻이고 치하의 치淄도 검다는 뜻이다. 제도齊都의 서쪽의 치천淄川은 흑산黑山에서 나오고, 치하는 밝산博山에서 나오는데 그 사이에 제나라 도읍이 있다. 이곳이 치우의 수도 청구국의 위치로 확실하다.

 

 

치우환웅을 자오지慈烏支천황이라고도 부르는데 자오慈烏는 까마귀다. 태양신의 아들, 삼족오 까마귀 토템이 형상화된 것이다.명나라는 북경北京에 천단天亶을 세우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이 천단에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와 더불어 뇌사雷師, 즉 전쟁신이었던 치우 환웅이 모셔져 있다.

여기서 풍백, 우사, 운사 등은 단군의 부하인 삼신과도 동일한 것이다. 즉 하북의 백성들이 모두 치우 환웅의 신전을 모시고 치우 환웅이 3신을 데리고 북경으로 와서 탁록의 벌판에서 황제 헌원을 물리친 전설을 기린 것이다.

 

용산문화를 발굴하고서 이때에 중국 최초로 말을 사육한 것이 보고되었다.

 

슈메르에서는 bc4000년에 청동기시대를 열었다. bc3100년에 슈메르에서 만들어진 사자머리 독수리와 사슴이 새겨진 동패식銅牌飾은 고구려, 발해의 동물문양 동패식과 형식적으로 비슷한데 그 출현이 치우시대보다 무려 4-500년 앞선다. 따라서 치우의 청동기는 슈메르에서 전파된 것으로 본다.

 

수면문, 짐승 혹은 귀신 얼굴을 유행시킨 치우는 또한 처용과 같은 아랍계 외래인인가? 슈메르의 언어는 왜 한국어와 비슷한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인종의 섬과 같은 민족인 슈메르인의 상투는 또 무엇인가?

앙소문화에서부터 상투의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슈메르인이 동쪽으로 전진해 왔으면 응당 함께 따라와야 하는 점토판 문자가 동방에 없다. 아마도 점토판 문자 발생 전에, 바이칼호에서 서쪽으로 간 동방족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청동기를 발생시키고 그 일부가 다시 말을 타고 실위를 거쳐 돌아와서 청동기 기술을 배달국에 전달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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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단군조선 고대산문화 bc2300~bc2049
단군 왕검, 2세 부루, 3세 가륵, 4세 오사구, 5세 구을 단군

1. 단웅의 단목국 평양성  2. 왕검의 궁홀산 금미달과 고대산문화 3 장당경, 평양성, 험독성과 마한성 등

기원전 2830년, 13세 사와라 환웅 때에, 배달국의 왕비족이었던 웅녀 여왕의 후손 려(黎)가 단목국(檀木國) 왕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460년후 단목국 왕검 단웅(檀熊)이 웅씨왕녀에게서 아들 단군(檀君)을 얻으니 기원전 2370년이다.
단군은 14세에 웅씨왕의 비왕으로 임명되어 24년간 섭정하다가 웅씨 왕국 왕검에 올랐다.
그해, 2333년 단목국에 들어가 구환족(九桓族)을 통일하고, 대표 왕검인 [신한辰韓]으로 등극하였다.
신인 왕검이 800명과 함께 단국(檀國)으로부터 아사달(阿斯達)의 단목지허(檀木之墟)로 와서 국인들의 추대로 천제가 되었다.

1.  단웅의 단목국 평양성

 

<단군세기檀君世紀>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이고 어머니는 웅씨왕녀이며 bc2370년 박달나무 밑에서 태어났다.

14세가 되어 웅씨의 왕은 그를 비왕으로 삼았고 대읍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bc2333년 왕검은 단국으로부터 아사달 단목지허檀木之墟에 이르러 단군으로 즉위하였다.

비서갑斐西岬의 하백녀河伯女를 거두어 아내로 삼았다."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에서 기록은 다음과 같다.

"13세 사와라斯瓦羅 환웅의 초기에 웅녀군熊女君의 후손으로 여黎라는 자가 있어 왕검王儉으로 책봉이 되어 단허檀墟에 봉토를 받았다. 460년 뒤에 왕검 려黎의 후손에서 신인 왕검王儉이 태어나 웅씨왕의 비왕裨王이 되어 대읍을 다스리는 것을 섭정하였다. 왕검은 비왕으로 24년을 지냈다.

그후 웅씨왕이 전사하자 신인 왕검이 대신하여 구환九桓을 통일하고 단군 왕검이라고 하였다.

단군 왕검은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思達에 조선을 세워 개국하였고 국토를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통치하고 진한辰韓은 스스로 통치하셨다."

 

 

 

윗 글로서 유추하면 기원전 2830년, 13세 사와라 환웅 무렵에, 웅씨의 후손 려黎가 태어나 단목국檀木國 왕검王儉으로 임명되었다. 환웅국은 치우 환웅 때에 이르러 수도를 산동반도 태산 동쪽 용산으로 옮겨가고, 권력의 공백이 일어난 동북아시아에는 여러 소국들이 남아 있었다. 460년후, 소국중의 하나인 단목국이 커지고, 왕검 려의 후손 중에서 단웅檀熊의 아들이 단군檀君 왕검王儉으로 태어나니 기원전 2370년이다.

단목국은 아래에서 비정한 철령시鐵嶺市가 되고, 왕검은 소읍이던 청천강 마한에서 태어나 14세에 비왕이 되어 24년간 섭정하다가 부왕을 계승하여서 철령시 단목국의 왕이 되고, 마침내 천산 신시의 신시씨를 밀어내고, 만주를 재편한다.

 

또 달리호達里湖변의 비서갑을 쳐서 하백녀를 부인으로 얻고,

서남쪽의 치우 후손 치두남과는 타협하여 번한으로 삼아서 만주 통일, 구환九桓 통일의 과업을 이룬 것이 된다.

 

 

왕검의 아버지 나라인 단웅의 단목국檀木國은 342년 고구려 고국원왕때 환도성丸都城 남쪽에서 전연군前燕軍에게 패하여 고국원왕이 도주한 단웅곡斷熊谷을 단서로 추적한다. 단웅곡斷熊谷은 본래 단웅곡檀熊谷인 것이다. 

현재 조병산시調兵山市다. 동천왕이 이곳에 평양성을 세웠고, 고국원왕은 이 평양성에서 백제군에게 전사하였다.

요나라 때 이 부근에 단주檀州를 두었다가 기주淇州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이는 발해 환주桓州 기수현淇水縣과도 관련된다. <신당서>에서는 이 기수현을 구도현성九都縣城이라고도 하였다.

여기는 단목국 왕검 려나 단웅의 구택이 된다. 

한편 단군 44세 단군 구물 시대에 해성에 이궁을 지어 역시 평양海城平壤이라고 하였다. 46세,47세 단군의 수도였다.

즉 단군시대 평양이 두 개라는 것인데 하나는 해성이며 이는 지금의 조병산시인 것이다.

북부여시대에는 해성을 평양도사(平壤道使)에 속하게 하였다. 즉 또하나의 원래 평양이 부활한 것이다.

<단군세기>에서 4세 단군 오사구 때 평양성을 쌓은 기록이 있다. 이는 법고시 서북 한대산韓大山이 되며, 고구려 환도성丸都城, 발해 환주桓州에 해당한다. 즉 법고시 서북 한대산이 4세 단군 오사구때 쌓은 새로운 평양성이고, 왕검 려와 단웅, 왕검의 단목국 수도 평양은 뒤에 해성이라고 하던 조병산 위치다.

환도성 한대산 새 평양 위치와 단웅곡이었던 구도성 조병산 평양성 위치

 

환도성 평양과 해성 동천왕 평양과 단목국과 궁홀산금미달

 

 

 

 

단가구는 단목국성, 고려구는 동천왕평양성, 쇄룡구는 고국원왕증축성, 성자산이 해성 평양으로 고려된다.

2. 왕검의 궁홀산금미달과 고대산문화

구환을 통일하고, 환인의 신시 아사달에 가서 제천행사를 치르고 즉위하여 조선을 개국한 단군 왕검은 단목국 고향으로 돌아와 진한조선辰韓朝鮮의 첫 수도를 다시 만들었다.

<삼국유사>에서는 조선의 평양에서 개국하였고, 다시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思達)로 옮겨 1500년을 지냈다고 전한다. 이를 궁홀산 금미달 (弓忽山今彌達)이라고도 하였다.

여기서 평양성은 단목국 수도로서 앞에 이미 밝혔는데 법고시이다.

 

단군 왕검의 새 수도를 찾기 위해서 요나라지리의 동경도東京道 한주韓州와 상경도上京道 봉주鳳州에 주목한다.

[요사]에서 동경도 한주와 상경도 봉주는 고리국藁離國 고지라고 하였다.

이에 반하여 동경도 집주集州는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 하였다.

집주는 한나라 때 험독현險瀆縣이었고 고구려 때는 상암현霜岩縣이었다.

集州 懷衆軍下刺史 古陴離郡地 漢屬險瀆縣 高麗爲霜岩縣 渤海置州

 

비리의 비陴는 보좌의 의미가 있으므로 고리국의 속국인 것인데, 위만의 수도였으며 그 위치는 금주시錦州市 동북쪽 왕만구王滿溝이다. 왕만구는 목엽산에 의지하고 있다. 이를 요나라는 심양시 동남쪽으로 옮겼다.

 

[요사]의 비리군지陴離郡地가 서우여의 기자조선奇子朝鮮이었고 뒤에 중국 기자를 거쳐 위만의 수도가 되었으므로, 고리국藁離國은 단군왕검의 고조선 중 전단군조선前檀君朝鮮에 해당한다.

한편 [후한서-부여전]에 소개된 색리국索離國은 22세 단군 색불루索弗婁 이후의 후단군조선後檀君朝鮮에 해당한다.

즉 고리국槀離國 은 전단군조선, 색리국索離國은 후단군조선, 비리국陴離郡은 기자조선을 의미한다.

후단군조선을 무너뜨리고 색불루의 북부여를 차지한 해모수解慕漱는 본래 고리국인藁離國人이라고 하였으니, 역시 전단군조선의 후인이라는 뜻이다.

 

 

 

먼저 단군조선의 수도였던 고리국고지 한주와 봉주의 위치를 찾는데 [요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한주 동평군東平軍은 자사를 두었고 본래 고리국(왕검조선)의 옛 수도(治)였다. 한주 유하현柳河縣은 고구려 막힐부鄚頡府였고 고구려는 막鄚, 힐頡 2주를 두었고 발해는 그대로 따랐다.  韓州 東平軍下刺史 本 槀離國 舊治 柳河縣 高麗置 鄚頡府 都督 鄚頡二州 渤海因之。今廢。太宗置 三河、榆河二州。聖宗 幷二州置。隸延昌宫,兵事属 北女直兵馬司。統縣一: 柳河縣。本渤海粤喜縣地,幷萬安縣置。

이후 요나라 태종은 한주에 삼하, 유하 2현을 두었고, 성종은 다시 합쳐서 연창궁(요국 목종의 후예)에 식읍으로 주었고 군사제도는 북여직병마사(북여직병마사 본부는 요주, 당시 신민시 공주둔 요빈탑)에 속했고, 두 현을 통일하여 유하현을 두었다.

한주는 네 번이나 옮겨서 결국 동북방으로 옮겨가서 사평시四平市 이수현梨樹縣에 귀착했으나 처음 생길 때는 북여직병마사가 있던 요주 부근이었던 것이다. 세 번째 한주 위치는 금나라 한주자사韓州刺史 동경銅鏡이 발굴된 창도현昌圖縣 팔면성八面城이다. 이는 중국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이 팔면성八面城 부근에는 금나라 때에 단군왕검의 단금상檀金像이 남아 있어서 [요동행부지]에서 단군상에 공양을 드렸다. 팔면성은 44세 단군 구물丘勿의 영지였던 백민성白民城의 현재 이름이다. 팔면성 서쪽 곡가점曲家占의 흑성자黑城子(성둘레 2400m)가 바로 단군시대 백민성의 흔적이다. 흑성자와 팔면성 사이에 쌍성雙城 고성도 남아 있다. 단군 구물은 백민성(현재 팔면성)에서 기병하여 장당경을 차지하고 44세 단군이 되었다. 팔면성 동남쪽의 구가둔丘家屯은 그의 능터일 수 있다.

두 번째 한주는 내몽고 통료시通遼市 과이심좌익후기科爾沁左瀷後旗 호탄소목浩坦蘇木 격월성格月城 고성으로 주장되고 있다.  

 

아무튼 첫번째 한주 위치, 고리국 수도 위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같은 고리국 수도 위치인 봉주는 요나라 남왕부 오막이 통치했다. 鳳州 槀離國故地 渤海之安寧郡境 南王府五幙分地  

 

요나라 남왕부오막의 땅은 수주遂州도 있었는데 수주는 발해 고주高州였으며 그 위치가 단주 서쪽 200리로 드러나 있다.

遂州.本高州地,南王府五帳放牧於此.在檀州西二百里,西北至上京一千里.戶五百.
<신당서>에 의하면 발해 막힐부에 막주와 고주 두 주가 있었으니, 鄚頡府 領 鄚、高二州

한주 유하현이 본래 고구려 막힐부였다는 설명과 다시 합치된다. 

단주檀州는 훗날 요나라 기주祺州로서 기록되었고 祺州; 太祖以檀州俘於此建檀州,後更名.隸弘義宮,兵事屬北女直兵馬司

기주, 즉 단주는 요나라 소탑의 비문 해석으로 인해서 오늘날의 법고시法庫市 동쪽 화평향和平鄕 고성으로 확증되었다.

이에 수주遂州는 창무시彰武市 북쪽 사합성四合城 터로 중국학계에서 추정하고 있다.

 

위 지도에 정확한 기주성과 그로부터 항공거리 80Km지점이 표시되었다.

이 부근에서 1차 한주를 찾으면 창무시 동편에서 대덕향大德鄕, 후신추後新秋, 흥륭보興隆堡로 이루어지는 삼각형 안에 “한주韓州”의 이름 흔적이 “한가韓家”다. 그 아래 고가는 막힐부 고주의 후신인 고가高家이고 그 동쪽 봉황성이 봉주의 후신이고 마종산은 홀본성이 있었다. 그 북쪽의 목두구가 막힐부 막주성터가 된다.  단군 왕검의 수도 궁홀산금미달의 궁홀산은 위자구 서북쪽 일관수산이 되고 금미달은 봉황성이 된다.

봉황성이 봉주, 한가가 한주, 고가가 고주, 조양구가 횡주, 마종산이 마리산 홀본성, 목두구가 막힐부 막주 위치로 추정된다

[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 동북권東北卷]에서 명나라 홍주참洪州站이 있었는데 이곳 후신추後新邱(秋) 남쪽 토성자로 비정했다. 대략 사합둔四合屯 토성이다. (지도에 밑줄 표시)

1차 한주는 명나라때 홍주참이 되었는데, 홍주는 홍범구주洪範九州의 모태가 된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처음으로 가르친 단군 왕검의 수도 궁홀산금미달이었던 것이다. 하夏나라 우왕禹王이 남긴 음양오행의 요체인 홍범구주가 사실은 단군의 아들 부루扶婁에게 도산塗山에서 배워서 홍익인간弘益人間을 그대로 베낀 것인데 이는 [서경書經]으로 알 수 있다.  홍익弘益이 홍범洪範, 弘範으로, 인간人間이 구주九州로 바뀐 것은 단지 제목만 비슷한 뜻의 글자로 바뀐 것이고 내용은 똑같은 음양오행의 치세원리인 것이다.

단군 왕검이 돌아가신 궁궐 이름도 유궐柳闕인데, 지금 그곳의 강물 이름이 또한 유하柳河다. 요나라의 한주 유하현柳河縣이 훗날에 멀리 옮겨갔지만 남아 있는 그 강물 이름은 옮기지 못했으니 유하는 오늘에도 옛이름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명나라 홍주참이자 고리국고지였던 조양구 일대가 단군왕검이 돌아가신 수도 궁홀산금미달로 비정된다.

 

이 궁홀산금미달의 서쪽에 창무시 흥륭산에 평안보平安堡에서 소위 고대산문화高臺山文化 유적지가 나타난다.

고대산 문화는 처음에 신민시 고대산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 문화로 인하여 이름붙여졌는데, 적봉시 하가점夏家店에서 유명한 신석기시대 홍산문화의 채도 문화彩陶文化를 뒤엎어버리는 무문토기 홍도紅陶, 갈도褐陶 등 미송리형 단지가 나타나는 청동기시대 문화다.

즉, 적봉 중심의 환웅 배달 홍산문화를 창무의 단군왕검의 고대산문화가 대체하는 것이다.

 

흥륭산 평안보는 신민시 고대산과 매우 가까우며 도기 형태로 보아서 똑같은 고대산문화에 속하지만, 신민시에서는 미처 나타나지 않은 청동귀걸이, 청동칼이 매장되어 더욱 뛰어난 문화였다.

고대산 문화 조기 유적의 연대는 발굴 결과 1990년대 기준으로 약 4355년전 전후로서 단군 왕검 조선의 시작 시대인 4338년전과 거의 일치하며,  문화적으로는 직복直腹 형식의 세발 솥을 만들어서 적봉 등지의 홍산문화와 조양시朝陽市의 위영자문화魏營子文化 속으로 퍼뜨렸다. 즉, 이 지역은 홍산문화로부터 채도문 문화를 받기만 하다가 거꾸로 간결한 무문토기 등의 문화를 홍산 쪽으로 퍼뜨린 중심이 된 것이다.

고대산문화는 신민시 고대산보다도 창무시 평안보유지에서 더 특징적인데 삼족기三足器와 골제骨製 무기, 석제 무기, 그리고 철치형 동도凸齒銅刀와 구리 귀걸이 등이 발굴되었다. 구리 귀걸이가 나온 유적지 시기는 평안보 제3기로서 bc1700년 정도로 분석되었고, 삼족기가 출현한 시기는 평안보 제2기로서 bc2355년 경이었다.

이곳이 바로 단군 왕검이 돌아가신 봉정峯亭의 유궐柳闕 부근인 것이며 단군왕검의 새수도 궁홀산금미달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고리국고지 고조선이 막힐부 막주鄚州가 되는 것은 후단군시대에 색불루 단군이 시라무렌강의 녹산 아사달로 천도하면서 이곳에 구도에는 막한鄚韓을 두어 다스렸기 때문이다. 그후 막힐부 막주가 된 것이며 막의 의미는 마리, 머리의 의미가 있으니 마립간이 그 파생어가 된다.

 

[규원사화揆園史話]에 인용된 [진역유기震域遺記]에 의하면 단군왕검은 아들 부소夫蘇, 부우夫虞, 부여夫餘에게 각각 서쪽 의 구려句麗와 진번眞番, 부여夫餘를 주었다. [규원사화] 기록은 [한단고기]에 비하여 연대가 정확하지 않으나, 지명이 풍부하다. 진번眞番은 신시였던 아로과이심기阿魯科爾沁旗 천산天山 백성자白城子다. 신시씨의 소발굽점 흔적이 오이길목륜강 상류 부하문화富河文化 유적지에 남아있다. 소발굽점에 의해 글을 발생시키고 거란의 선조가 된다.

부여는 오르도스 고원으로부터 알유인猰猶人들의 침범을 자주 받는데 임서현林西縣의 쌍정점雙井店 아래 요주성饒州城 부근이다. 신석기시대 환웅-웅녀의 전설이 발굴된 나리사대 유적지와 부여신으로 추정되는 생육여신상이 발굴된 곳이다.

고대에 금속을 캐던 동광銅鑛도 발견되었다.

구려句麗는 [전한서]에서 현도의 동남쪽인데 오늘날의 부신시 사해문화 지역이다.

한편 노합하老哈河 중류에 위치한 오한기敖漢旗 고로판호古魯板蒿 부근에서 도기에 엤글자로 새겨진 “구택도狗澤都”라는 명문이 발견되었다. 오한기는 고구려 신성이 있던 곳이고 요나라 신주가 있던 곳이고 이곳에는 개몰리수가 있었다고 하였는데 개몰리수가 바로 구택과 관련되고 개모성과 관련된다.

따라서 교래하敎來河가 구려의 중심물이고 동쪽으로는 유하 상류, 서쪽으로는 노합하까지가 옛 구려 영역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두 개의 구려가 나타났는데 오한기 구려는 후단군시대에 부신시 구려가 옮겨간 곳으로 보인다.

 

단군 왕검은 40년 뒤 왕자 부여를 북쪽 우수홀牛首忽로 보내고,

태자 부루를 임검성任儉城(=임나任那?=장무시彰武市)에 살게 하고,

부소는 낙랑홀樂浪忽(=적봉시赤峰市 팔리한진 八里罕鎭)을 다스리게 했다. 이는 34세 단군 오루문의 수도였다.

부우에게 장당경藏唐京을 감독하게 하였다.

 

단군왕검은 웅씨족장 웅백다로 마한馬韓에 책봉하고,

치우의 후손 치두남으로 번한番韓 험독부險瀆府(=흥성시興城市 홍애자紅涯子)에 책봉했다.

별도로 치우씨 후손에게는 남서쪽 남국藍國(=난하灤河)을 주고,

신지씨 후손에게는 동북쪽 숙신肅愼(=장춘長春)을 주고

고시씨 후손에게는 청구靑邱(=적봉赤峰)을 주고,

주인씨에게는 개마蓋馬(=길림성 매하구梅河口)를 주었다.

 

2세 단군 부루扶婁는 유주幽洲와 영주營洲를 복속시켰다.

유주는 북경시北京 계현薊縣, 영주는 하북성 무녕현撫寧縣 부근이다.

 

3세 단군 가륵嘉勒은 서울을 구월산九月山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

이때 동생 가록을 신시에 봉하여 사달왕이라고도 하였다. 그래서 가록산이 아로과이심기 천산진 북쪽에 생겨났다.

 

상춘의 구월산 장당경은 뒤에 44세 단군 구물에 의해 대부여조선의 수도가 되었고 그 뒤에는 고주몽의 수도가 되었다.

고력산古歷山이라고도 했는데 고대 역사가 남겨져 있는 곳이고, 장당경은 고대 역사를 돌에 기록하여 보관하던(藏-唐) 곳으로 고려된다. <대변경大辯經>에서 44세 단군 구물의 장당경은 개원開原이고, 평양平壤으로도 불렀다고 했다. (藏唐京 今爲開原 亦稱平壤)

[한단고기-번한세가]에서 구월산 삼성묘를 상춘 주가성자朱家城子라고 하였다.

구월산은 지금의 창도현昌圖縣 하이대자향下二臺子鄕 광정자산光頂子山(532m)이다. 산 입구에 삼선묘三仙墓라는 것이 실제로 전해온다. 즉 삼성묘다. 하이대자향에는 고구려 석성도 남아 있었다.

[한단고기-고구려국본기]에서 고주몽의 도읍지 눌현訥見도 상춘 주가성자朱家城子라고 했다. 따라서 눌현과 장당경은 같은 곳이다. 주가성자는 지금의 천두진泉頭鎭 초가구(肖家口)다.

고두막한의  졸본성과 고주몽의 졸본성(눌현성), 그리고 고국원왕의 동황성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소수림왕의 초문사도 있었다.

1125년에 기록된 [허항종행정록許亢宗行程錄]에서 당시 개원인 함주의 바로 북쪽에 평양이 실재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허항종이 함주를 떠나 북으로 향하는데 그곳이 평양이라면서 동쪽으로 천산을 바라보았다고 하였다.

離咸州 卽北行 州地平壤 居民所在成聚落 新稼始遍 地宜穄黍 東望天山, 金人云彩 此新羅山

즉 장당경의 별칭인 평양이 개원 북쪽에 존재한 것이 고증되는 것이다. 여기서 천산은 광정자산의 의미다.

 

한편 왕적의 [요동행부지]에서는 함주咸州(=개원開原)의 함평현 함평숙부에 이르러서 주변의 산아래에서 심대한 고구려 폐성을 발견하고 고구려의 망국 천년한을 읊어대며 함원전含元殿을 바라본다. 폐성터의 함원전은 궁전의 흔적이니 고구려 도성 자리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고 이는 고주몽의 눌현성 위치를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개원시開原市 북쪽 창도현昌圖縣의 옛이름은 몽고어로 상달常達額勒克였는데 이는 녹색 초원의 의미다.

한민족 고대의 “상춘”이 몽고시대 “상춘달”로 변했던 것이다. 중국발음으로는 창昌, 장長, 상常이 모두 "chang"이다.

 

4세 단군 오사구烏斯丘가 살수薩水에 조선소를 세우고 또 새로 평양성平壤城과 건청궁乾淸宮을 세웠다.

살수는 사리수수薩爾滸水가 있는 심양시 혼하渾河다. 그곳에는 살수대첩을 직접 지휘한 을지문덕 장군의 직속 상관이었던 병마도원수 강이식姜以式 장군의 묘인 원수림元帥林이 남아있다.

4세 단군 오사구의 평양성은 앞에서 단목국 고증 때에 환도산 평양성으로 밝혔다.

4세 단군 오사구 때에 처음으로 동전을 만들었다.

 

5세 단군 구을은 처음으로 60갑자를 사용하여 책력을 만들었다.

단군 구을은 남쪽으로 순행하다가 서거하였는데 지금 대동강 평양시 동쪽 대박산에 묻혔다. 북한에서 자랑하는 단군묘다.

 

왕검의 어머니 나라인 웅씨국은 왕검이 태어났다는 평안북도 영변의 묘향산 단군굴 주변을 고려한다. 묘향산은 마한산이고 그 아래 대동강에 마한을 세우고 웅백다熊伯多로 마한왕을 세웠다.

 

왕검이 부인으로 삼은 비서갑斐西岬 하백녀河伯女는 수신水神의 상징으로 본다.

비서갑이 의미하는 서쪽 산줄기와 큰 물의 의미, 그리고 태백산 부근이라는 기록을 고려하면 서요하西遼河가 흐르는 케스케덴克什克騰旗 부근이 된다. 달리호변의 달리한산達里罕山이 중심이다.

 

 

단군의 중신으로 고시高矢가 있고 그는 청구국淸丘國을 맡았다고 한다. 청구는 적봉시 동북의 청구성이다.

즉 영금하와 노합하가 만나는 요나라 고주高州 위치다.

단군 시대에 고시씨는 동쪽으로 분가했다. 고시의 동생은 고수高搜라고 하는데 고수성姑嫂城이 요양시遼陽市 동쪽 교외에 있다. 고수의 아들이 요순시대 순舜임금이라 전한다.

 

고대산문화와 같은 수준의 초기 청동기 문화가 흥성시興城市 서쪽 선령사仙靈寺에서 발굴되어 동북 3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기 흔적이라고 자랑한다.  

이는 단군 왕검 때에 치우의 후손 치두남에 의해 건설된 초기 번한 수도 흔적으로 고려된다.

부근에 도하현 대극성이 있다. <통지씨족략>에서 치우씨 후손들이 대극성에 살았다고 한다. <전한서>에서는 도하에 당취수라는 물이 있었는데 번한의 수도인 탕지산湯地山에서 당취수唐就水라는 이름이 비롯된 것이다. <전한서>의 도하현徒河縣은 수도의 물이라는 뜻의 도하都河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청산 대극성은 번한 수도 탕지산 안덕향이었다.

 

 

[규원사화]에서 단군의 영역을 북으로 대황몽고大荒蒙古, 서로는 알유猰猶 즉 오르도스 고원, 동으로 창해, 남으로 해대海岱(양자강 유역)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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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백악산아사달 대전자문화 bc2049~bc1285

6세 달문, 7세 한율, 8세 우서한, 9세 아술, 10세 노을, 11세 도해, 12세 아한, 13세 흘달,
14세 고불, 15세 대음, 16세 위나, 17세 여율, 18세 동엄, 19세 구모소, 20세고홀, 21세 소태 단군

6세 단군 달문은 우가였는데 5세 단군 구을을 축출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단군 구을이 마한 땅에 나가서 묻혀야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마한 땅에서 일어난 일인데 번한에서 이 사건에 개입하여서 군사를 보내어 경호했다고 하였다. 
단군 달문은 35년 후에야 여러 제후들을 구월산에 모아서 정식으로 즉위하고 백악산아사달로 천도했는데 이는 본래 우가의 고장으로 소밀랑이라고 하던 곳이다. 그리하여 백아강(마한)은 저울그릇, 소밀랑은 저울대, 안덕향(번한)은 저울추라는 신경 예찬의 노래가 지어졌다. 

우가 달문의 새수도 소밀랑은 소의 물이라는 뜻이다. 이미 신석기 유적지중에서 우하량 유적지가 대릉하 최상류에 있으니 대릉하가 단군 시대에 소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릉하의 가지중에 망우하(牛河)가 있는데 이는 숫소물이라는 뜻이다. 내몽고 오한기敖汉旗에서 내려와 요녕성 조양시 동쪽에서 대릉하로 합쳐진다. 요나라는 여기 망우하 상류에 백천주白川州(=북표시北票市 흑성자黑城子)를 두었는데, 그 북쪽 최상류에 북천주北川州까지 두었던 것이 <거란지리도>에만 나온다. 북천주는 금나라때의 천주川州라고도 한다.


금나라 때 만들어진 거란지리도를 보면 백천주는 북표시 흑성자이고 무평주는 무안주이며 다른말로 신주인데 지금 오한기敖汉旗 소재지다.
(무안이라는 한자 말과 오한이라는 한자 말은 모두 우한으로 발음한다.) 원주는 현도군 위치다. 성주는 부신시 홍모자성이다.
이를 위성지도에 표시하면 아래와 같은데 북천주가 바로 백악산아사달이다.

이 북천주 위치인 현재의 오한기敖汉旗 대전자향大甸子에서 엄청난 고고학적 발굴 결과가 있었다. 약 4000년전부터 3000년전 사이에 만들어진 대전자에서는 참호를 판 성지 내에 백성들의 거주지와 궁전터가 발굴되었다.
아울러 800개의 묘장이 발굴되었는데, 그중에는 중국 최초의 황금 장식 귀걸이가 있었다.
그외 1600개의 도자기는 생활 도기가 아니라 매우 예술적인 것으로서 제기. 술잔 등이었고 이때 붉은 안료는 옷나무 칠로서 중국 최초로 칠기漆器를 만들기도 했다. 이 칠기 기술과 채도의 문양은 용산문화와 은나라에 계승되었다.

칠기와 금속 공예가 발달한 백악산 아사달은 최고 예술의 도시다.

그외 다양한 옥기와 청동기가 있었는데 청동기는 모두 57건이며 그중 41건은 귀걸이었는데 이들은 순동이 아니라 시라무렌에서 나온 주석을 함유한 청동이었다. 구리칼铜刀도 있었는데 이는 주조를 한 후에 단조하여 만들었다. 겉에는 주석이 함유된 철광석 안료를 사용했다. 그외 보석 마노를 이용한 잔도 있었다.
생물 부장품으로는 개머리와 돼지머리 등도 있었다. 이중 개의 유전자는 현재 일본 오키나와의 류규견琉球犬과 유전자가 완전 일치하여 단군시대의 일본교류를 증명해준다. 3세 단군 가륵 때에 동해안 두지주의 예읍이 반란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를 베었는데 그 후손 중에 협야노가 일본 삼도에 갔다고 하였다. "소시모리"는 일본서기에도 등장한다. 동해안에 정평군이 파지성이었고 함흥이 두지성으로 추측되며 그곳이 훗날 우수국이 되었다. [삼국사기지리지] 중의 고구려편에서 우수주가 바로 동해안 함흥이며 이때 이미 함흥에서 일본 시마네현으로 가는 뱃길이 있었다. 고분에서 나온 두 마리 개의 탄소측정 연대는 각각 bc1695±130年,bc1735±135年으로서 이 문화지의 연대가 4000년전에 만들어진 것을 확증시켜준다.
즉 이곳은 어느 문화지와 비교할 수 없는 대량 청동기 발굴 문화지로서 그 예술 수준은 왕도를 보여주고 있는데 중국에서도 감탄하여 세계적인 고편海内外孤篇이라고 명명하여 부른다.
이것이 바로 단군시대 천년수도 백악산 아사달이며 풍요의 도시이고 예술의 도시이다.

그러나 궁성지는 제사시설을 포함한 더 큰 산성으로 감싸여져 있다. 산성의 이름은 월명구다. 소밀랑성으로 천도한 우가 달문을 한자로 바꾼 것이 월문인데 훗날 월명으로 와전된 것으로 고려된다.
서북쪽에는 고구려 신성이었다가 요나라 무안주가 되었던 무안주성터가 있다. 무안주에는 개몰리수가 있었는데 이는 개모성을 의미한다. 그 바로 북쪽에서 구택도狗澤都라는 명문이 새겨진 도기가 출현했다. 발해는 개모성을 진주辰州라고 이름붙였다. 진주는 진한辰韓에서 유래했다고 요사에 기록되었다. 진한眞韓은 환인,환웅의 신시 아사달을 의미하며 고조선의 백악산아사달은 진한辰韓이라 했는데 우리 고어 발음에서 별 신辰이 있으니 신한으로 읽어야 옳을 것이고 그래서 고구려는 신성新城이라 했던 것이다. 한편 구택도는 전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청구의 구邱를 의미할 수도 있다. 건너편이 바로 청구성이다. 진시황 때에 남쪽의 낙랑성과 청구성까지 함락되어 진나라 만리장성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청구인들이 물러나와 만든 것이 구택일 수 있다. 환웅천왕은 중국에서 구려왕九黎王이라고 하였다. 환웅천왕이 청구성 사람들을 데리고 중국 산동반도의 청구로 옮겨가서 용산문화를 만든 것인데 남아있던 청구인들도 스스로 구려九黎, 구택狗澤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신시 현도군의 구려句麗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물론 청구의 구려인들이 현도군의 구려로 이주했을 가능성도 있다.

여기서 백악산 아사달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물이 망우하, 즉 숫소하, 소물이라서 소밀랑이다.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는 백천이라고 하였었다.
백악산아사달의 북쪽 평원은 우고토牛古土라고 하는데 우가 지역이라는 뜻이다.

한편 백악산 서북쪽에 역시 청동기 시대 산성터가 발굴되었는데 오한기敖汉旗 살리파향萨力巴乡 하라구촌哈拉沟村에 위치한 성자산城子山이다.  이곳에서는 동북 최대의 제사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산정부에 석축을 둘러 쌓은 것이다. 동쪽으로는 요나라 강성주降聖州 성이 있는데, 요나라 태조비가 신인에게 납치되어서 애를 가졌고 그애가 자라서 요나라 태종이 되었다고 전한다.
산성의 총 둘레는 1310m이고 9개의 문이 있다. 그 안에 돼지머리를 조각한 거대석이 있다.

돼지머리 조각 거대석 좌우 모습

8세 단군 때에 벼농사가 흥하였다. 이때는 밭에 심는 벼로 고려된다.
11세 단군 때에 신시아사달에 환웅을 모시는 대시전을 세웠다.
또한 이때부터 송화강에 관청을 두고 동북방을 개발하였다.
12세 단군 때에 요하 남쪽에 순수관경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는 금주시 남쪽일 것으로 고려된다.
13세 단군 때에 오성취루五星聚婁의 기록이 있다. 이는 초저녁에 수성부터,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 다 보였다는 것인데 실제 계산과 4년 차이가 있다. 아무튼  이 기록이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면 <죽서기년>에 의한 은나라 멸망 기록은 다시 <사기> 기록과 일치하는 <단군세기> 기록으로 연대를 고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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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시대

단군 색불루 녹산 아사달 부여 문화 bc1285~bc1112
22세 색불루, 23세 아흘, 24세 연나, 25세 솔나 단군


후단군시대 강역과 주변도

단군 조선 개국후 1000년이 지나서 신시 지역 북쪽에 있던 개사원蓋斯原의 욕살 고등高登이 은나라와 싸워 이기니 고조선의 서북 땅을 다 차지하고 스스로 우현왕右賢王 두막루豆莫婁라고 불렀다.
바햐흐로 철기시대가 시작되고 전쟁이 더욱 활발해졌다.
이집트 투탕카멘의 고분에서 기원전 14세기에 철검이 발굴되었다. 히타이트에서는 기원전 13세기에는 철검이 보편화되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1400년에 하북河北 고성藁城과 북경北京 평곡平谷에서 철날을 박아서 만든 구리 도끼 鐵刃銅鉞가 각각 발굴되었다. (지도참조)
이 철은 단조된 것이었으나 재료는 운석에서 얻어진 철로 분석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고성 유적지에서는 철광석을 야철하던 유적지와 철찌꺼끼가 발굴되었다. 운석과 관련되지 않은 철광석에 의한 야철이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색불루 단군 때에 남이藍夷의 남국藍國이 강성하여 남쪽으로 이동하여 은나라와 가까운 엄독홀掩瀆忽에 있었는데 지금의 석가장시石家庄市)로 고려된다.  석가장 동남 난성栾城이 바로 남국 위치로 고려되며 그 북쪽 고성藁城의 묘자리에서 철인동월이 나온 것이다. 남이국은 본래 북경시 동북 난하灤河의 난평灤平(지도표시)에 있다가 남쪽 석가장 난성栾城(지도 표시)으로 이동하였을 것이다.
석가장 서북 영수현靈壽縣(지도표시)의 고성에는 훗날 주나라 때에 마물 단군과 왕실끼리 결혼하면서 적족翟族의 중산국中山國이 세워졌다.

 
고성시 출토 청동인월과 청동제기


홍산옥기

여기서 철인동월과 함께 나온 유물을 살펴보면 색불루시대의 문화 양상을 알 수 있다. 의료기로서 외과수술용 돌칼이 나왔다. 이는 수술 뿐 아니라 침구 치료가 이미 발달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세계 최초 비단이 나왔고, 마직품麻織品이 나왔다. 홍산문화 옥조각 중에도 누에를 신처럼 모시는 여인상들이 보인다. 그리고 술을 빚기 위한 양조용 효모가 대량으로 나왔다.
고성이 은나라와 가까우니 은나라 문화일 것이며, 단군 문화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은나라 문화라면 은나라 유적지 전반에서 저와같은 유물들이 나왔을 것이다. 단군 동이족 문화이기에 중국 땅 안에서 외로운 섬처럼 세계 최초의 선진 문명이 나타나는 것이다.

 

 

부여 지역에 나타난 최초 대형 청동기물은 떡을 만드는 시루다. 신석기시대에는 쌀로 밥을 하지 못하고 떡을 만들어 먹었다. 이 지역에서 조나 보리를 주로 농사하였을 것인데, 역시 떡을 만들어 먹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이 떡 시루는 시라무렌강 부근인 천보동 天寶洞에서 발굴되었다.
따라서 단군 왕검이 그 아들 부여를 보냈던 부여성은 바로 이곳으로 확정된다.
천보동 동남쪽 10여km 지점에 용두산 석성터가 있는데 제사터가 발굴되었다. 
이곳 고분에서는 청동도끼, 청동검 등이 묻혀 있어서 천년간 대대로 전해져온 부여왕권을 상징한다. 
천보동 지역은 시라무렌강 상류로서 보통 해발 1000m인데, 이 강변은 해발 700m다. 즉 부여지역에서 일정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다.
부여성은 당시에 시라무렌강 북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시라무렌강에 성 중앙을 관통당했다.
요나라는 이곳에 요주성饒州城을 세웠다.

 


전단군시대 부여성

이곳 부여성에서 태백산까지 백분하 계곡이 있다. 백분하 계곡은 100리 화랑이라고도 하는데 암각화로 유명하다.
음산암각화도 여기서 퍼져나간 것이다.

부여성이 있던 천보동天寶洞에서는 상商나라 때의 청동기물이 4점 발굴되었다. 청동솥, 추錘, 부斧 등이다.

용두산은 토성자진 6km 남쪽으로서 동으로는 위당하가 있어 옹고트 빈수濱水와 이웃하고 남쪽에 용두산이 있다.

용두산 유적지 규모는 600m x 400m 규모로서 해발 900m이다. 제단 유적지를 비롯해 많은 유물이 나왔고 묘장은 토갱수혈묘제였다.

 

1기 유적지에서는 연병동부連柄銅斧(도끼 자루를 도끼 머리 양쪽에 매는 것)가 나왔는데 상商나라 형식과 같고 러시아의 바이칼 북쪽 앙가라고원과 예니세이강까지 퍼졌다고 한다. 공병식 직도검空柄式直刀劍과 넓고 둥근 청동 화살촉銅鏃과 가늘고 긴 두 종류의 화살촉이 나왔고, 동포銅泡, 연주連珠 장식, 대식帶飾 등 청동 장식품도 다수 나오는데 주조용鑄造用 석범石范까지 발견되어 자체 제작한 것이 된다. 연대는 bc1250년경이다.
용두산의 제단은 전방후원 모양으로서 40 x 40m 규모다. 이곳에서 사슴 문양 동패식銅鹿이 나왔다.

2기 유적지에서는 흑룡강 백금보유지의 영향을 받은 기하문 도기들이 많이 나왔다. 이는 단군 왕검 시대 전파된 것이다.
기타 제사갱祭祀坑이 7개, 순장갱 2개, 그외 72갱이 나오고 별도의 묘장은 4개가 발굴되었다.

부여 지역에 있던 개사원(蓋斯原)의 욕살 고등(高登)이 은나라와 싸우면서 은나라 서북 귀방, 지금의 오르도스 고원을 다 차지하고, 스스로 우현왕 두막루(右賢王 豆莫婁)라고 불렀으며, 고등의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우현왕을 세습하였다.
이때 상장 서우여(徐于餘)가 탕지산의 번한(番韓) 소정(小丁)을 암살하였다. 21세 단군 소태(蘇台)는 살수 땅을 주면서 서우여에게 양위하려 하였다.
b.c. 1285년 우현왕 색불루가 부여신궁(夫餘新宮)에서 스스로 단군으로 즉위하고 쳐들어왔다. 서우여가 맞서 싸우다가 패퇴하고, 마한(馬韓) 아라사(阿羅斯)도 참전하여 전사하고, 단군 소태는 물러났다.
색불루는 구월산 장당경藏唐京(=개원시開原市 창도현昌圖縣 천두진泉頭鎭, =졸본성)에서 22세 단군으로 다시 즉위하였고, 다시 녹산鹿山에 수도를 정하고 역시 아사달이라고 불렀다.
이로서 예맥구려 중심의 전단군시대 소밀랑 백악산 아사달은 막을 내렸다.

당시 개사원은 흥안령산맥 최고봉인 황강량(黃岡梁,2029m)에서 시작되어 서요하로 들어가는 임서현林西縣 가사태하嗄斯汰河로 고려된다. 임서현에는 하늘산에서 자칸무렌강査干沐淪강도 흘러내려와 가사태하와 만나서 서요하로 들어간다.

자칸무렌강査干沐淪강 서안 대정大井에서는 청동기시대 구리광산이 발굴되었다. 고대 동광이 있는 대정에서 자칸무렌강 상류에 올라가면 상류가 둘로 갈라진다. 동쪽가지 끝에는 소부리카索博日嗄라는 마을이 있는데, 요나라가 평지에 경주慶州성을 세웠다. 소부리카는 단군 색불루와 관련되는 것으로 고려된다. 소부리카 서남쪽 자칸무렌강변에 조양성朝陽이라는 지명이 있다.
서로 마주보는 두 개의 산성이 보이는데 훗날 흉노에게 망하여 피신하여왔던 오환선비족의 성터였을 수도 있다. 혹은 색불루 이전 우현왕 고등의 성이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오환선비는 색불루의 직계 후손일 수도 있다. 자칸무렌은 흑수黑水라고도 하고 새한산塞罕山, 즉 한산 罕山에서 유래한 말이다.

자칸무렌의 서쪽가지는 파이태하巴爾汰河고 하는데 바로 녹산아사달에서 흘러나온다. 녹산은 흥안령산맥의 최고봉인 황강량(黃岡梁,2029m)이다. 황강량의 북쪽 고원 지역인 아시하도阿斯哈图는 과거에 목엽산木葉山이라 불렀다. 즉 백악산이나 같다. 
황강량이 부여의 주산으로서 녹산이라 했는데 녹산의 녹鹿은 우리말로 노루산, 누루산을 거쳐 누루 황자를 써서 황산黃山으로 변할 수 있다. 고주몽의 도읍 졸본성이 다른말로 눌현訥峴이었는데 고국원왕 때 황성黃城이라 불리는 것과 같다. 
황강량 북쪽 목엽산 아시하도가 단군 색불루의 녹산 아사달로 고려된다. 지금 천합원天哈園이라는 곳인데 해발 1600m 고지대이며 서쪽 전자구展子溝가 궁성터로 고려된다. 
  
서쪽에 아사달 석림이 있다. 빙하시대 만들어진 자연조각이다.
 

 
현재 아사달이라는 이름과 무엽산이란 옛이름으로 보아서 천합영은 색불루 시대 수도성 녹산 아사달이다. 
영고탑 천도 후에는 <단군세기> 31세 단군 등올 때에 기린이 와서 놀던 상원上苑이 변하여 오늘날 천합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케스케덴克什克騰旗 동북쪽 25km의 대청산 남쪽 상점 유지에서는 패독貝禿과 채도, 활석 팔찌, 마노瑪瑙 고리, 와환蝸環, 골주骨珠 등이 발굴되었다. 하가점문화와 다른 소하연문화小河沿文化로 분류하는데 옹고트 석붕산 문화와 비슷하다. 이는 녹산아사달의 남쪽이다.

 

색불루는 마한에 여원흥을 임명하고 번한에는 개천령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서우여가 다시 좌원에서 군대를 일으켜서 스스로 기자조선이라 하였는데 기자는 태양왕이라는 뜻이다.
이에 맞서던 번한 개천령은 전사하였고, 마한 여원흥은 한반도 대동강에서 물러나와 고리국지인 궁홀산에 살며 막조선莫朝鮮이라고 하였다.
본래 대동강 마한은 번한과 함께 기자국으로 통일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여원흥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마한세가 하>는 한반도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요하 서쪽의 막조선의 기록이다. 본래 대동강마한은 서우여 기자국의 일원으로 진마辰馬, 금마金馬라고도 하였다.
막한이 뒤에 말갈족으로 변한 것이고 그래서 말갈족은 혈통적으로 구려예맥족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최치원이 마한이 곧 고구려라 한 것은 이 막한일 것이다.

한편 
색불루가 서남쪽에서 은나라와 전쟁을 하고 돌아온 와중에 후방에서 변방장수 신독의 반란으로 수도 녹산 아사달을 빼앗기기도 하였다.
색불루 단군은 잠시 영고탑으로 피난하였고 이때부터 영고탑이 북방 대성이 되었다.
다음 단군인 태자 아흘이 녹산 아사달에 돌아와 반란을 토벌하였다. 아흘단군은 은나라를 쳐서 산동 지방에 제후들을 임명하였다.

색불루 단군은 쫓아냈던 서우여를 비왕으로 삼아서 번한으로 책봉하였다.
한편 마한과 번한을 통합한 서우여는 좀더 독립적인 이름으로 기자조선을 세웠다.
그후 서우여로부터 3대인 솔귀 번한 때에 bc1122년경(죽서기년과 80년의 차이가 있는데 전통적인 것을 따른다.)에 은나라가 망하여 bc1120년에 은나라 왕자 기자箕子가 요서遼西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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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시대

단군 솔나 영고탑 문화bc1112~bc795
25세 솔나, 26세 추로, 27세 두밀, 28세 해모, 29세 마휴, 30세 내휴, 31세 등올, 32세 추밀, 33세 감물 단군

 

bc1583년 16세 위나 단군 때에 구환九桓이 영고탑寧古塔에 모여 제사지냈다. 경을 읽으며 마당을 밟는 창경답정唱經踏庭을 5일간 하였다.

이때 등불을 들고 애한가愛桓歌를 부르면서 불함산不咸山의 붉은 꽃을 노래한다. 여기서 불함산은 곧 태백산, 도태산, 현재 대광정자산이다.

bc1345년 20세 고홀 단군 때에 영고탑을 개축하고 별궁을 지었다.

bc1285년 녹산 아사달에 정도한 색불루 단군은 bc1250년 변방 장수 신독의 침략으로 녹산 아사달이 함락되니 색불루 단군이 영고탑으로 피했다.

이후 bc1237년 아흘 단군 원년에 비로소 신독을 주살하고, 녹산 아사달을 수복하여 76년을 녹산아사달에서 다스렸다.

이후 bc1112년, 25세 솔나率那 단군은 영고탑으로 천도하였다.

1981년 옹고트翁牛特旗 동남쪽 오동화진梧桐花鎭 해방영자解放營子 오포산敖包山에서 2건의 대형 청동솥靑銅鼎과 한건의 청동시루甗이 발견되었다.“옹고트翁牛特 =ONGOT”은 신성하다는 뜻이며 부여의 천신 제사인 영고迎鼓와 발음이 통한다.

이중에서 청동시루에는 두 개의 원시 한자가 새겨졌는데 하나는 고대 금문金文에서 녕寧의 약자인 녕宁이라는 글자였고, 또 하나는 아亞 모양인데 성곽의 곽郭자의 상형자가 가로, 세로로 한번더 포개진 글자다.

허진웅許進雄의 [중국고대사회]에 의하면 좌측의 것이 곽郭의 고자이며 이것이 포개져도 역시 곽郭의 옛 글자다. 그러나 영고탑의 고古 발음과 같은 고固이거나, 그 뜻은 성城 또는 나라 국國과 같은 뜻일 수도 있다.

 

 

여기 청동시루에 새겨진 영寧자는 바로 우리가 찾는 영고탑寧古塔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 지역의 옛 지명에도 사용되었다.

금나라는 옹고트에 전녕로全寧路를 두었고, 원나라는 전녕부全寧府라고 했었으니 영寧이 본래 지명자인 것이다.
옹고트翁牛特旗 치소治所인 오란진烏丹鎭 고성이 있는데 금나라, 원나라 전녕로全寧路 성이었다.

북부여왕 해모수 때에 북막北漠, 즉 흉노에 약탈당한 영주寧州이기도 하다.

 

한편 33세 단군 감물甘勿은 영고탑 서문밖 감물산에 삼성사三聖祠를 세웠다. 단군묘라고도 했다.

한편 옹고트 북쪽 삼성타라三星塔羅에서 대형 옥룡이 발굴되었다.  중국 옹우특기현의 상징이 되었는데 길이 26cm이었다.

삼성사였던 삼성타라 옥룡과 영고탑성이었던 해방영자 봉황 그릇(봉황은 bc4800년전 조보구 문화 시대 작품이다.)

삼성사가 옹구트기 북쪽이고(지도에서 별표) 영고탑은 옹우특기 동남쪽이다.

월명구와 조양구 사이가 단군 솔나시대 영고탑성이 있던 곳으로 고려된다.

그 왼쪽의 성터는 전단군 20세 고홀 때지은 영고탑성일 수 있다.

 

옹고트 오란진 북쪽에 조격온도소목朝格温都苏木이 있는데 그곳에 원석산圓石山이 있다. 우리말 온달-보름달, 둥근돌이 한어로 원석인 것이다. 오라산烏拉山이라고도 한다. 이 원석산 중에는 신비한 동굴이 있는데 그 안에 작은 등불의 빛이 시간대별로 남색, 홍색, 백색으로 변한다고 한다. 그 산 꼭대기에는 탑 받침이 남아있다. 이는 당나라 장수 위지경덕尉迟敬德이 산의 동굴에서 나오는 요기妖氣를 막기 위해 쌓은 탑이라고 전해지는데 이미 탑이 무너진지 오래다.

1971년 조격온도소목 서쪽 삼성타라三星他拉에서 40cm에 이르는 대형 옥룡玉龍이 출토되어서 이후로 옹고트를 중화제일룡이 나타난 옥룡의 고향이라고 하는데 이 삼성타라가 삼성사三聖祠였을 것이다. 최근에 삼성타라 부근에서도 암각화가 발견되었다고 전한다.

한편 옹고트에는 태백산(=대광정자산)으로부터 등롱하燈籠河가 흐른다. 등롱하 발원지에 신령스러운 등불이 있어서 매년 제야의 밤에 두 개의 신불燈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려오는데 대석문大石門에 이르러서 두 등불이 합치면 길하다고 했다. 이를 몽고말로 등노리登努日 혹은 등노리고리登努日高勒라고 했다는데 그냥 우리말로 “등燈놀이”, “등놀이 골”로 생각된다.

조격온도소목 북쪽에 포리돈布日敦이라고 하는 호수沙湖가 있다. 밝은달, 발달을 몽고어로 보리돈이라고 적는다.

경치가 빼어난데다가 호수가 C자 형으로서 용 모양이라고 하고 호수 북쪽 언덕에는 몽고족이 매년 제사지내는 제단이 남아있다.
조격온도소목의 여러 전설은 후단군의 영고탑 천도 이전의 전단군시대 16세 위나 단군 때에 창경답정하던 영고탑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옹고트 동남쪽 오한기敖漢旗 고로판호古魯板蒿 북쪽 마을인 주가지周家地 묘지는 노합하 중류의 홍산 저수지紅山水庫 끝지점 동안東岸이다.

이곳에서는 하가점 상층문화에 해당하는 54좌 묘장이 있는데, 토갱수혈묘이며 목곽장이다. 부장품은 남산근과 같은 피혁도초刀鞘와 청동도 3건인데 동물문 병도柄刀와 철치병도凸齒柄刀 등이 있다. 철치병도는 검자루 부분에 톱니 모양이 있는 것으로서 나무 자루에 매다는 것이다. 그외 구리송곳, 귀걸이, 연주聯珠형식, 동포, 원포, 쌍련포雙連泡, 방구方 , 쌍미동식雙尾銅飾, 조형식鳥形飾, 고동목걸이箕形蝸器, 녹송석, 마포麻布 등이 보인다. 
이것이 영고탑 시대의 묘장이다.

 

주가지로부터 노합하 반대쪽인 서북쪽의 옹고트 대포자大泡子 유지에서는 공병식 청동단검 2개가 부장된 묘가 발굴되었고 특히 흑룡강黑龍江 조원시肇源市 백금보白金寶 유지 형식의 도기가 나왔다. 백금보유지는 기하문幾何紋으로 유명하다.

옹고트 서남쪽 적봉시 하가점의 상층문화 유적지에서 나온 유물들이 영고탑 시대의 유물이다.


적봉시 하가점 상층문화유물

이곳에서 나오는 청동검은 북방식 청동검 중군 형식이라고 하는데  주로 창에 끼우는 것이다.공병식([]柄式; 구멍에 끼우는 형)이라 한다. 주로 노합하 영성 남산근에서 나오고 극시극등기, 파림좌기, 옹우특기, 우하량 북쪽까지 나온다. 영고탑 시대 유물로 보면 된다.

 

이때 후단군조선의 영고탑 천도는 요서의 기자와 더 가까워진 것이니, 중국인 기자가 인접해 왔으므로 단군조선이 중국쪽에서 후퇴했을 것이라는 일연一然의 추측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다. 

 

영고탑은 발해 안원부安遠府 부주府州인 영주寧州였다.

해모수 북부여시대에 영주가 북막 추장에게 약탈당한 적이 있다.

마지막 단제 고열가는 영품리왕寧稟離王(단기고사에서는 고열가 단군의 시호였다.)으로 격하되었다. 영품리왕의 시비가 낳은 딸이 동명왕이라는 전설이 [삼국유사]에 있고, 졸본부여의 고두막한 동명왕은 고열가의 후손이라는 설이 [한단고기]에 있다. <후한서> 부여전에서는 색리왕의 시비가 낳은 아들이 동명왕인데 도망쳐서 부여에 가서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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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시대

단군 오루문 낙랑 문화bc795~bc430
34세 오루문, 35세 사벌, 36세 매륵, 37세 마물, 38세 다물, 39세 두홀, 40세 달음, 41세 음차, 42세 을우지, 43세 물리 단군

1. 낙랑문화                                  2. 오르도스, 임호 등 주변문화

1. 낙랑문화

<규원사화>에서 34세 오루문奧婁門 단군은 낙랑홀樂浪忽로 천도한다.

 

부여신궁에서 봉기한 색불루 우현왕이 22세 단군이 되어서 조선의 중심인 녹산 아사달로 천도해 옮겨갔는데,
이때 장자 아흘에게 단군위를 주고, 
차자인 고불가에게 낙랑홀을 맡겼었다.  
43세 단군 물리 때에 우화충의 반란으로 낙랑 도성을 빼앗겨 단군 물리가 종묘 사직을 싣고서 배를 타고 해두海頭로 피난하는데 해두는 강평현康平縣 동북쪽의 해주海洲로 고려된다.
이후 단군 구물에 의해 낙랑 도성이 수복될 때에 낙랑성에 큰 홍수가 있었으니 낙랑홀은 강변이다.
한편 37세 단군 마물麻勿 때에 성 북쪽에 샘이 솟아서 배를 띄울 정도였다고 한다.

낙랑홀의 물로 추정되는 요락수饒樂水가 있었다. 왕망 때에 낙랑樂浪은 토지가 좋고 인민이 요락饒樂하다고 기록하였으니 낙랑은 요락수와 깊은 관련이 있다. <통전>에서 요락수는 영주 유성 관할인데 지금의 노합하老哈河다.
당나라가 거란 땅에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와 요락도독부饒樂都督府를 같이 설치했다.
요락도독부는 시라무렌강 북쪽인 임서현에 있었는데 시라무렌강이나 노합하나 모두 요락수라고 부른 것이다.
47세 고열가 단군이 북부여에게 패망할 때에 진조선眞朝鮮이 진시황에게 복속했다고 전한다. 43세 구물단군은 이미 다른 진조선辰朝鮮인 장당경으로 옮겨갔으므로 진시황 정에게 복속당한 진조선眞朝鮮은 낙랑이 된다. 이 낙랑이 진시황의 만리장성 안쪽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는 bc221년 연나라 진개의 동호 인질 생활과 동호 정벌과 관련된다. 이때 낙랑이 물러나 부여쪽으로 옮겼다가 bc201년에는 흉노의 침략으로 동호가 멸망한 것이다.

 

오루문 단군의 수도 낙랑의 위치는 우북평군의 치소인 평강현平岡縣이다.
평강현 고성은 흑성자에 있는데 그 북쪽에 남산근 유적지가 있고 이를 포함한 낙랑성이 있었다.

 

 

노합하老哈河의 상류에 많은 청동기 고대 묘장이 나타난다.

 

적봉시 영성현寧城縣 팔리한八里罕 고성의 남산근南山根 유적지는 곤도하坤都河(노합하 지류) 연안으로서 대형 석곽묘 2기 등 분묘 9좌가 발굴되고, 무려 500여건의 청동기물이 나왔다. 기물의 연대는 대략 상商(=은殷)나라 후반부터 춘추전국시대까지다.
남산근에 발굴된 청동기물을 내용적으로 보면 청동도가 9건, 청동부가 8건,

청동검이 7건, 칼집이 4건, 투구 1건, 원형 방패 1건, 청동과 3건, 청동모 3건, 등 무기와 말과 마차 기물 6건에, 짐승형 패식 14건이 있다.

그외 각문골판刻文骨板을 보면 쌍기雙騎 수레 두 대가 새겨져 있다. 이는 음산 암각화에 나오는 수레와 같은 것이고, 같은 도법圖法이다.

투구 쓴 단군이 청동검 들고 말만 타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위풍당당하게 대초원에서 수레를 타고 다녔던 것이다.

후단군조서 오루문 단군 낙랑시대 낙랑성 (녕성 남산근)의 청동기 유물은 아래와 같다.

 

 

 

 

 
남산근 유물들. 제기 등 맨 아래는 갑골에 새겨진 쌍마 수레

이 무렵에 나오는 청동검은 북방식청동검 2식이라고 한다. 주로 영성 남산근과 난하에서 나온다. 청동검 끝에 동물무늬 장식을 한 것으로서 남산근과 하북, 융화 등 난하 유역에서 나오는데 수병식(獸柄式)이라 한다.

 

bc195년에 낙랑왕 최숭이 배를 타고 이주하여 마한의 왕검성으로 건너가서 정착하였다가 bc169년에는 해성에 곡식 300섬을 받쳤다. 해성이 가까운 마한馬韓 왕검성은 마한이 아니라 막한莫韓의 오기다. 즉 막한 고리국지를 한사군 설치 때에 낙랑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다.
195년 최숭이 낙랑에서 배를 타고 떠나왔는데 이는 201년 흉노 묵돌가한의 동호 침략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동호東胡는 흉노와 못쓰는 땅 천리를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이는 달리호 주변으로 고려된다.
조무령왕에게 망하여 양성을 빼앗긴 임호가 후퇴하여 동호로 있다가 부여성에서 최후를 마치고 선비산(하늘산)으로 올라가서 오환선비가 되었다.
뒤에 다시 적봉으로 내려왔다.

2. 오르도스, 임호 등 주변문화

오르도스 주개구 문화

색불루가 녹산에서 즉위하기 3년전에 조부 우현왕 고등이 귀방(오르도스)을 멸망시켰다고 했다. 부여 군대가 은나라 서북방에 살던 귀방을 멸망시키고 부여인으로 나라를 세웠던 곳이, 은나라 역사인 은기殷紀 중의 녹방鹿方이다. 춘추시대에는 악방鄂方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오르도스 고원이다.

 

섬서성陝西城의 녹주鹿州는 지금 부현富縣이 되었는데 bc7세기에 백적白翟인들이 살던 곳이다. 백적은 흰옷을 입어서 생긴 별명이며 섬서성陜西城 연안延安에 있다가 하북성 중산국中山國으로 동천하였다. 녹주鹿州는 연안延安의 남쪽 마을이었다.

이 백적인들이 bc637년에 주周나라와 통혼까지 하였고 주나라를 위해 정나라와 싸웠고 춘추말, bc476년 이전에는 하북성에 중산국을 세웠다.

통혼의 결과는 단군 마물의 배필이 된 주나라 공주와 주나라 황비가 된 적후翟后였다. 그런데 적녀翟女는 귀씨鬼氏였다고도 전하니, 색불루 부여군에게 복종하게 된 귀방인鬼方人들이다.

 

오르도스鄂爾多斯문화의 중심인 나린탑納林塔 주개구문화朱開溝文化가 있다. <단군세기>에서 23세 단군 아흘 때에 주개周愷에서 여러 제후들이 회합했는데 혹시 주개구일 수도 있다. 나린탑은 오르도스 고원의 동부로서 황하와 가까우며 고대에는 하남河南이라고도 하였다. 탑塔은 오르도스 고원에서 마을을 의미한다.

    

오르도스 문화 스키타이 장식 ; 신수도, 씨름도 청동패, 와각식 청동검 등

 


이 오르도스 지역에서 나오는 청동검을 북방식 서군 양식이라고 하는데 위와 같다. 단 왼쪽의 방울장식, 사슴머리 장식, 오른쪽의 고리 장식 등은 요녕성의 법고시 정가방 만류가 유적지와 요녕성 흥성시 양가향 유적지, 하북성 청룡현 초도구 유적지에서도 보이는 것이다. 와각식 청동검은 길림시에도 나타난다. 즉 후기의 것이다.

 

나린탑을 비롯하여 주변에 석불탑, 백가탑白家塔, 장가탑張家塔, 백초탑白草塔 등 탑으로 끝나는 지명이 나린탑 주위로 모여 있다.

영고는 만주말로 여섯, 육六을 의미하는데 부여는 왕실과 오가제로서 육가를 이루었었고, 탑이나 타라란 이름의 마을들이 지어진 것은 부여의 흔적이다.

 

오르도스 고원의 신석기문화는 옥기도 전혀 없고 낙후되어 있었으므로 오르도스 청동기가 오르도스 고원에서 자생한 것이 아니다.

오르도스 고원은 부여의 서쪽에 살던 알유猰猶였는데 상당히 낙후되었던 알유, 즉 오르도스가 이 무렵에 부여인들에 의해 개발되는 신천지가 되었다.

나린탑에는 고성이 있었다. 성둘레는 410m x 360m 정도다.

오르도스 청동기 시대에 해당하는 주개구 문화는 중가리아准格爾旗의 나린탑북쪽 10km에서 발굴되었는데, 용산문화와 앙소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다시 스키타이scythay식 야수문野獸文을 받아들여 동방의 서요하西遼河로 전파한 것으로 해석하여왔다.

그러나 오르도스고원의 도기는 용산문화의 도기와 다르게 사문蛇文, 즉 지자문之字文에서 비롯되는 토기 형식이 발전하여서 용산문화의 채도문 도기와 큰 차이를 보인다. 또한 후기에는 남문藍文 토기가 우세해진다. 이는 빗살무늬토기가 유행한 내몽고 동부로부터 토기가 직접 전래되었던 것이다.


스키타이 양식이라고 여겨졌던 그리스 금속 동물 공예품도 오르도스에 전파되어 오기 전에 이미 오르도스식 청동 예술이 적봉시 극시극등기나 적봉시 영성에 존재하고 있었다. 즉 스키타이 예술의 씨가 나온 곳은 서요하이며 토기와 함께 오르도스 고원에 전래되어 열매를 맺은 것이다.

또한 한반도의 스키타이양식 금속공예도 그리스에서 시베리아를 돌아온 것이 아니라 서요하에서 발원한 것이 직수입 된 것이다.

그리고 스키타이 양식의 전래가 내몽고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라 내몽고 자체에서 발생하여 스키타이로 흘러간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 동쪽에 살았던 스키타이인이 내몽고에서부터 그리스 연안으로 진입해 들어갔을 것으로 고려되기도 한다.


주개구문화지는 bc18세기에 구리 팔찌, 귀걸이, 구리환 등이 보이며 청동기가 시작되고 bc15세기에 사문격蛇文隔(빗살무늬 종류)과 단검, 동도가 나타난다. 그런데 이미 이때부터 묘를 쓸 때에 양을 희생하여 매장하였으므로 목축민족이었다. bc13세기에는 양, 말, 사슴, 뱀, 용을 장식한 청동도가 출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b.c11세기에는 용이 사라지고 대신 새머리가 장식되고 춘추시기에는 쌍오회수雙烏回首 와각식蝸角式(칼 자루 끝 장식이 둘로 갈라져서 서로 마주 보는 것) 단검이 출현한다. 그외 아주 다양한 장식과 문양, 야수문 패식이 절정을 이루어가는 것이 춘추시기다.


오르도스 고원에서 나오는 북방식 청동검은 서군형西群形으로 분류되는데 적봉시 영성寧城으로부터 하북성을 따라서 오르도스 고원까지 분포한다.

나린탑納林塔은 우리말로 내린 탑이다.

하투河套 북쪽 포두시包頭市 성곽에서는 선우천강單于天降 와전 벽돌이 나오는데 이 강降이 하늘로부터 신인의 강림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린탑은 춘추시대에 악방이며, 알유의 땅이며 이제말로 오르도스다.

두막루는 우현왕에 해당하는 관직 이름이었지만 후에는 부족명이 된다.

[북사] [위서] [신당서] 등에 나오는데 [동북역사지도집]에서 제제하얼의 송눈평원松嫩平原으로 비정하였다. 금나라 대에는 포여로蒲與路라고 하였는데, 역시 “부여로夫餘路”에서 비롯된 지역명이다. 바로 이 지역은 기하문토기의 원향原鄕인 흑룡강가 백금보문화白金堡文化를 모태로 한다. 

또한 [수서]의 두막루는 스스로 북부여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색불루 이후 천년 뒤에 장당경에 대부여가 건국되고 다시 기백년 후에 옛 부여 도성에서 해모수의 북부여가 세워졌었다. 이들이 한무제의 침략 이후 궐기한 졸본부여에 의해 동북으로 이동하여 가섭원 부여라 했는데 다른 말로 동부여라고도 했다.


양성 노호산 문화 / 임호


내몽고 양성凉城의 노호산老虎山에서는 고대 성곽이 발굴되고, 또 양성 서남쪽의 오포량敖包梁에서는 23개의 석퇴石堆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제단이다.

 

석퇴의 연장 길이는 60m인데 그중 중앙 1개의 돌은 길이가 10m, 높이가 2m이고, 그 중앙에 3개의 구멍을 뚫어서 제사를 지낸 흔적이 있고, 양 옆으로 각기 11개의 석퇴가 펼쳐진 것이다. 22개의 석퇴에도 각기 중앙에 한 구멍씩 뚫려 있다.


양성凉城에는 적적인赤翟人들이 살았다. 춘추시대말에 적적인들은 하북성 무안武安에 옮겨갔다. 이 뒤에 양성에 남아서 살던 사람들이 임호林胡다.

전국시대 bc300년경 백적인白翟人의 중산국中山國, 하북성 靈壽고성을 멸망시킨 조무령왕趙武靈王에게 임호까지도 이 양성을 빼앗겼다.

임호족은 동쪽 케스케덴 토성자 천보동 부근으로 들어온 것으로 고려된다. 일부는 남천하여 하북성 난하灤河 상류인 난평灤平으로 옮겨갔다.

이때 임호, 동호의 별칭이 산융山戎이다. 연나라 때에 난하 동쪽 하북성 노룡盧龍의 고죽국孤竹國의 북쪽에 산융이 있었고 고죽국은 산융국의 제후국이었다. 그 산융국은 단군의 제후국이었다.

 

난평에는 본래 남국藍國이 있었고 남국 때문에 강 이름도 난하灤河인 것이다. [한서-지리지]에서 어양군魚陽郡 백단현白壇縣이었던 난평은 약 10개의 북방형 청동검이 발굴된 곳이며 왕묘가 남아 있다.

남국은 단군 초기부터 제후국이었고 산서성의 려국黎國 등을 세우기도 했다.

 

 음산 암각화 문화

 

        

음산 암각화 모음

부여족이 활약했던 내몽고 음산陰山 산맥의 남쪽은 하투河套라고도 하는데 황하의 최북단으로서 산서성과 섬서성의 북단이 교차한다.

 

음산문화陰山文化는 암각화巖刻畵 문화다. 음산에는 수없이 많은 암각화가 그려져 있는데 경상남도 울주군 천전리 암각화도 그 파생품이다.

암각 인물화의 특징은 부엉이형 조두鳥頭 얼굴이 있다.

호두구 문화 옥기에 다량의 부엉이 옥장식이 있었는데 이 부엉이가 부여족과도 관련 있어 보인다.


부엉이형 얼굴을 태양신의 얼굴로도 해석한다. 천명현조天命玄鳥 항이생상降以生商라는 상나라의 전설과도 이어지며, 상나라의 청동기물 중에 부엉이잔鵂尊으로 이어진다. 상인商人을 조이鳥夷로 보아서, 특히 상인의 시조신은 요순시대 순舜이고 순은 동이인이라고 주장하는데 굴원屈原의 [천문天問]을 사료로 들었다. 그리하여 태양신 숭배의 전통이 일치한다고 하였는데 음산암화의 태양도와 강소성 연운항의 태양제단 태양석의 암화가 일치하며, 이것이 동경銅鏡의 태양문, 기하문 동경으로 발전하고 옹고트의 卍자 부호로 이어진다.

 

엄주, 서주 등

 

[단군세기]에서 23세 단군 아홀阿忽 때에 박고씨博(?浦)古氏를 청주淸州에 봉하여 엄국淹國을 세우고 영고씨盈古氏를 서주徐州에 봉하여 서국徐國을 세우고 방고씨邦古氏를 회淮 땅에 봉하였다고 한다. [규원사화]에서는 박고씨를 포고씨라고 하였다. 

중국은 퉁구스족이 발해를 거쳐서, 산동반도 아래 강소성 연운항까지 내려온  결과로 해석하기도 하며 그들이 상나라를 세웠다고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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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시대

서우여 기자 험독성 문화bc1282~bc221

 

단군 조선의 서남방인 번한조선番韓朝鮮은 중국과 경계에서 항상 전쟁하면서 발전하였다.

치우가 내몽고 구려 청구국에서 태산으로 내려가서 용산문화를 만들고 중국 묘족苗族의 조상이 되었고, 발한성에 남았던 치우의 후손이 번한이 되어서, 회대까지 다스렸는데 그후 번한은 태산에서 물러나오고 들어가기를 반복했고 백제, 고구려가 뒤를 이었다.

 

우현왕 고등의 손자 색불루가 우현왕을 세습하고, 번한이 죽자 소정을 추천했는데 단군 소태가 그리하였다.

그러나 상장 서우여가 소정을 죽였다.

소태 단군은 상장 서우여에게 살수의 백리 땅을 주어 기수奇首라고 부르게 하였다. (지도 표시) 그리고 또 서우영에게 단군 자리 양위를 계획하였다.

그러자 색불루가 스스로 단군으로 즉위하고 쳐들어왔다. 이때 마한이 출병하였으나 해성(평양)에서 전사하였다. 서우여는 도망하였다.

색불루가 단군이 된 뒤에 쫓겨났던 서우여가 다시 좌원坐原에 돌아와서 색불루가 세운 번한 개천령을 전사시키니,

색불루는 서우여와 타협하여 번한으로 세운다.

그리고 마한이었던 여원흥의 후손은 대동강에서 물러나와 막한이 되어 왕검의 유택이 있는 고리국지, 즉 창무시 부근에서 40여세를 이어간다.

 

이때 막한 여원흥의 유물이 법고시 정가방丁家方 만류가灣柳家의 유적이다. 유물은 부채형 동월銅鉞, 동척銅戚, 동부銅斧 2건, 단뉴동경 등이 있고, 하북성 초도구에서 나온 것과 똑같은 영수동도鈴首銅刀, 녹수동도 鹿首銅刀, 환수동도環首銅刀 외 두 건의 동도가 있다. 이 유물들은 전단군시대 말기 무렵, 은나라 시대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고려된다.

 

색불루가 세웠던 마한은 막한莫韓, 막조선莫朝鮮으로 바뀌어서 북으로 후퇴하여 말갈의 조상이 된다.

여기서 좌원坐原은 삼국사기 고구려에도 나오는데 부신시 동북쪽 고원으로 고려된다.

대릉하의 백악산 아사달 유역(오한기 대전자진)은 당시 개성開城으로 고려된다.

이후로 번한세가의 적통이 치씨에서 서우여로 바뀌었는데 이를 기자조선奇子朝鮮이라고도 한다.
기존의 번한과 마한이 모두 서우여의 기자조선에 속하였다.

 

단군 소태가 처음에 기자 서우여에 주었던 살수薩水의 땅 백리는 무순시 고려산성이다. 요동반도 최초의 청동기가 나오는 곳이다.

무순시 망화구에서 산서성의 은묘에서 나온 것과 유사한 청동환수도가 발굴되었으므로 은나라 때에 해당하는 유적지다. 바로 단군 소태와 서우여 기자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무신시 청동도 길이는 24cm였고 모양은 위 그림중의 첫 번째의 날을 가졌으나 손자루에는 원형고리가 있다.

이후 무순시에서 초기 비파형청동검(비파의 상하가 1:1에 가까운 것)이 나왔다. 이 초기 비파검은 요양에서도 나왔다.

즉, 뒷날에도 지금의 요하 동쪽 일대가 서우여 기자조선의 배후가 된다.

 

[단기고사]에서 기자조선의 수도는 평양 왕검성이라고 하였다. 이는 번한의 왕험성을 의미한다.

전한의 요동군에는 번한성과 험독성이 있었다. 요동군 번한현에서는 패수가 색외에서 나와 서남으로 바다로 들어가므로 그 위치는 지금 중국이 험독성이라고 주장하는 태안현 손성자다.

전단군조선의 번한은 극성에 있었고 탕지산 안덕향이라고도 했으며 그 위치는 당취수가 흐르던 수중현의 홍애자 고성이었다.

서우여의 번한성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 서우여의 영역이다.

기자조선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의 영역이었다. 무순시가 기자가 책봉받았던 고향이므로 심양에서 아래와 같은 기자 시대 번한왕의 고분 발굴이 있었다.

    
    
 
심양 정가와자 유물 ; 기자 서우여 시대의 복장과 청동검, 청동검 손잡이 타격석, 다뉴동경, 쌍월식 구리돈 붕朋 , 아래 청동검은 위에 있는 것임.

서우여 번한의 특징적인 문화는 바로 비파형 청동검과 다뉴동경多紐銅鏡, 그리고 천단, 즉 고인돌이다.

은나라 동경은 고리가 하나인데 반하여 번한의 동경은 고리가 둘이므로 다뉴동경이라고 한다.

번한의 관내인 의현義縣에서는 비파형 청동검이 6개 발굴되었고, 부신시 자도대  호두구 유지에서는 3개의 비파형 청동단검 석곽묘와 석성이 발굴되었다. 대집둔 험독성險瀆城의 서쪽 오금당에서는 청동단검 4개,
또 서쪽인 흥성시 양하향에서는 은말 시기의 환수청동도 등 청동도 4개가 발굴되었다. 이는 막한의 유물과 거의 같다.

서우여의 서쪽 영역은 대릉하大凌河 상류인 객좌喀左, 능원, 우하량까지로 고려되며 동남쪽으로는 한반도까지 통할한다. 이때 고인돌이 한반도에 퍼진 것이다.

2. 비파형 청동검의 발전

철기시대이고 철검을 사용했다 하더라도 부장된 것은 청동검이다. 이는 더 강하고 오래가는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비파형 청동검의 분포 통계를 보면 총 218개 지점(비파형검의 갯수가 아님, 요서에서는 한개소의 3,4개의 검이 나옴.)에서 발현되었는데,
한반도는 7~8개소로서 전체의 3.2%다. 반면에 요서는 154 개소로서 70%, 요동과 심양이 45개소로서 21%, 길림장춘이 6개소로서 2.8%. 하북이 6개소로서 2.8%이다. 이는 서우여 기자조선시대의 중심이 어디인지 알려준다. 한반도 출토지는 평남 개천군 용흥리, 평양시 서포동, 평남 대동강면 석암리, 연안군 부흥리, 충남 예산군 대흥면 동서리, 전남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춘천시 외곽, 경북 청도군 예전리 등이다.

먼저 북방 청동검 중에서 동군(東群)이라 하는 것은 전형적인 비파형 청동검이다.  이것은 조립식 원리로 인해서 타격석에 청동검을 돌려서 끼워 사용했는데 후에는 청동으로 만든 칼자루에 끼웠다. 조립식으로 만든 이유는 기마전에서 나무 자루에 달아매어 창으로 사용할 수 있게 고려한 것이었다.
처음으로 비파형 청동검이 개발된 곳은 무순시, 요양시 등이다. 이제까지의 한쪽날의 청동도(靑銅刀)를 나무 자루에 달아서 창으로 쓰다가 양쪽날의 청동검(靑銅劍)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동군의 비파형 청동검은 난하 서쪽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동군 세력의 중심인 서우여의 패전 이후로 서우여기자조선에서만 사용되었고 그리하여 한반도와 길림으로 전파되었으며 또 진조선(眞朝鮮)에 진상되기도 하였다.

서우여 기자 번한성은 bc221년 동호에 인질로 잡혀왔던 연나라 장수 진개에 의해서 함락되었다. 이때 연나라 요동군이 되었다.
연나라와 번한의 새로운 경계는 만번한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훗날 위만의 번한성으로서 금주시 동쪽이다. 즉 대릉하를 경계로 연나라와 기자조선의 경계가 생겨났다. 그러나 진나라 만리장성을 쌓을 때에 연나라와 제나라에서 피난온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았고 그래서 상하 운장이라고 했다. 운장은 낙랑군에 있었는데, 전한서의 낙랑은 한무제 때의 낙랑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후 후퇴한 낙랑군을 가리키기도 하고 이렇게 옮겨온 낙랑을 훗날 낙도 樂都나 낙랑서현樂浪西縣, 서락현西樂縣 등으로 달리 부른 것이 된다.  아무튼 한무제의 낙랑군 설치시에는 요동군 험독현에 속했고, 후한시대에는 요동속국의 하나로서 험독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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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기후 객현한 객좌 문화bc1112~bc194

 

 

중국 은나라 기자箕子 자서여子胥餘는 은나라 왕자로서 은나라 수도 은허의 동쪽 땅 기箕에 책봉된 제후였다.

그러나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함락시키고 주나라를 세워서 본래의 기箕 땅에 주나라 왕실로서 새 제후 기자箕子를 세우니 기존의 은나라 왕자인 기자는 본래의 기 땅에서 도망나와서 북경北京까지 올라온다.

북경 유리묘琉璃墓에 기자箕子의 유물 흔적이 남아있고, 이후 기자는 요서遼西로 들어온다.

서우여 기자조선의 3세 솔귀 천왕은 45년에 은나라 망명객 기자와 그의 보좌인 강달, 궁흠 등 망명객이 요수로 들어오니, 요서遼西에 살도록 조치했다.

 

북부여는 “수유須臾 기자”라고 칭하였는데 요서의 기자가 살던 곳이 수유須臾다. 기자 자서여의 이름 서여胥xu餘yu가 수유須xu臾yu와 발음이 똑같으니, 자서여의 성이 수유성須臾城이라고 불린 것이 된다.


객좌현 동쪽 곤도영자가 수유성의 외곽이고 미안구는 그 서북인데 명이국 명성으로 고려된다. 북동촌은 청동기물 발굴지

 

기자가 정착한 곳은 [주역周易]에서 명이明夷다. 산동반도와 일본까지 퍼진 명도전明刀錢은 전국시대 철로 만든 화폐인데 그 철화폐의 앞에는 명明이라는 국호를 새겨두었다. 당시에 중국의 대읍大邑은 철로 된 화폐, 즉 철포를 만들었는데 명도전의 모양은 환수동도環首銅刀의 모습에서 발전된 환수철도環首鐵刀로서 동북지방에 독특한 것이다.

은나라가 망하기 직전 은나라 시대의 동물머리 북방 청동도가 나온 곳은 하북성 청룡현 초도구, 흥성시 양하, 법고시 만류가, 무순시 망화구 이렇게 네 곳이다. 그보다 이른 bc1400년의 철날의 청동도끼鐵刃銅鉞가 유주 계현의 평곡현에서 나왔는데 이는 서무산徐無山의 동쪽 골짜기다.

 

 

bc340년에 번한에는 수한水韓이 즉위하였다. 이듬해 연나라의 배도倍道가 안촌홀安村忽(안덕향 추정)을 공략하고 뒤이어 험독險瀆(서우여 기자의 험독성)을 노략질하였다. 이때 수유에 살던 기후箕詡가 군사를 일으켜 번한을 도왔다. 

bc323년 연나라의 해침을 받고 번한왕 수한이 죽으니 기후가 번한을 계승하여 기후箕詡는 대부여의 보을普乙 단군으로부터 번한왕으로 책봉을 받았다.

 

마침내 중국인 기자의 36세손 기후箕詡가,  41세 서우여 기자번한奇子番韓의 왕위에 올라서 자기 앞의 35명의 기씨 선조를 모두 왕으로 추존한다.

기씨의 유물이 많이 나온 백록산의 객좌현喀左縣 대성자大城子가 기후의 중심 지역으로 고려된다. 그로부터 난하, 백랑수 등을 영유하여서 하북성 노룡현盧龍縣의 고죽성孤竹城과 객좌현喀左縣의 백랑성白浪城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이때 그들이 사용한 청동기물의 수준이나 제사지낼 때 복비의 수준은 매우 높았고 당시는 구리 돈朋을 사용하였다. 명도전은 후에 나온 것이다.  

기후라고 쓰인 방정

 

 

 

기후국 객좌 출토 청동기

 

 

 

대릉하大凌河 서남 상류인 객좌현喀左縣 대성자大城子와 객좌현 15km 북쪽의 화상구和尙溝, 객좌현 남쪽 평방자향平房子鄕의 북동北洞과 산만자山灣子, 객좌현 동쪽의 노야묘老爺墓, 객좌 서쪽의 곤도영자坤都營子 등지에서 대량의 상말주초상商末周初 청동기가 발굴되었다.

화상구에는 22개의 묘좌가 있는데 A지점에서는 청동기 주전자, 향로, 귀걸이, 등이 나왔고 금팔찌도 나왔다. C지점에서는 비파형 청동단검 3건과 타격석加重器(돌로 만든 단검 손잡이), 청동도 6건, 목걸이銅項環, 동포식銅泡飾과 소, 양의 뼈가 희생되었다. 곤도영자에서는 청동 큰 솥이 나왔는데 은나라식 물건이다.

평방자향 산만자山灣子에서는 청동잔 어존魚尊(魚 글자가 새겨진 尊), 청동시루 백구(伯矩가 새겨진 甗), 청동제기 단백亶伯(단자 아랫부분을 벌레 충자로 해석했다.) 수면문 청동제기, 경부무庚父戊 청동제기, 부을父乙 청동제기, 기타 글자를 해석하기 어려운 몇개의 청동제기와 소 무늬 술독, 소용돌이 무늬 술독 등이 발굴되었다. 역시 은대와 주초의 물건들이다. 그외 청동도끼 등이 부장되었다.

노야묘老爺墓에서는 비파형 청동단검 1개와 구리 고리, 허리띠 걸쇠帶鉤 2건, 동과戈 1개, 동령銅鈴 2개가 출토되었다.

평방자향平房子鄕 북동北洞에서는 죽뢰竹罍(술독)와 대형 방정方鼎(사각 솥)이 발굴되었고 새겨진 금문을 미처 다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기후己其侯”의 명문이 새겨 있다. 이 기후 기자箕子의 명문 청동솥은 북경시 서남방 교외의 유리하琉璃河 4묘좌에서도 발굴된 적이 있다.

즉 은나라 기후가 주周나라 성립으로 북경에 피하여 살다가 더 밀려나서 결국 객좌현喀左縣으로 이동한 것이다.  


[북부여기] 기록에 수유 사람들은 매우 풍족하였다고 한다. 객좌喀左에서 발굴된 명문 기록을 보면 은나라가 한번 점치는 비용卜費이 5,6 붕朋일 때에 이 기자족들은 200붕朋을 쾌척하였으니, 인플레가 아니면 꽤나 잘살았던 것이다. 붕朋은 쌍월식 동패식으로서 화폐다. (그림 35에 구리화폐 붕이 있다.)

기준은 대동강의 평양으로 옮겨서 마한馬韓을 빼앗고 마한왕이 된다. 그러나 9세 뒤에 백제 온조에게 병합당하고 이후 기씨 마한의 후예는 평양 오석산 황룡성의 선우鮮于씨와 경기도 행주幸州의 기奇씨, 청주淸州 한韓씨 등 3파로 갈라진다.

명문 청동기

이때 소위 명도전(明刀錢)이라는 화폐가 제작되어 만주로부터 연(燕), 제(齊), 조(趙) 나라까지 유행하였고 이는 수유기자문화의 부와 무역의 상징이다. 명도전은 청동시대의 환수동도(環首銅刀)가 철기시대를 맞아 철도(鐵刀)로서 탈바꿈 한 것인데 실물 화폐로 이용되었다.  
명도전의 명(明)자에 대하여 구구한 해석이 많은데 중국식으로는 당연히 국가 이름, 또는 군의 새겨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明)이라는 중국의 고대 나라는 없었다.
하지만 [주역(周易)]에서 지화명이(地火明夷) 괘에서 기자지명이(箕子之明夷)라고 했는데 해가 땅속에 떨어지니 기자가 명이로 갔다는 말이다. 즉 은나라를 잃으니 기자가 떠나서 명이국을 건설했던 것이다. 명이국은 중국 고대 기록의 밝조선(發朝鮮)이던 번한조선의 한 지역 이름이다.
지화명이(地火明夷) 괘상(卦像)은 땅속에 해가 감추어진(地火) 것인데 그들의 곤도(坤都)에 태양을 가져간 것이다. 주역은 주문공이 편수했을지 모르나 본래는 은나라로부터 내려오던 역을 재해석한 것이고 또 뒤에 덧붙인 것이므로 기자 이야기가 들어 있다.
따라서 기자의 후예는 명(明)이라는 국호를 새긴 명도전을 만들어 무역으로서 세력을 넓히면서 자기들의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명도전은 한반도 구석까지도 나오는데 정치권보다 활발한 무역권의 영향일 것이다.

<---명도전


           명월전

 

 

기후箕詡가 41세 번한이 되어 처음으로 번한성番韓城에 살게 되었는데 전한서 요동군 패수沛水에 번한현番汗縣이 있었다. 그 위치는 태안현台安縣 손성자로 고려된다. 이는 훗날의 고구려 건안성으로 고려된다.

현재 의무려산 동록의 북진시北鎭市 서쪽 교외에 기자묘箕子廟가 생긴 것은 이 때 번한성으로 옮긴 기후箕詡의 묘로 추정된다.

 

 

46세 번한 기준箕準은 bc221년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가 쳐들어와서 2000리까지나 땅을 뺏긴다.

진개의 침략으로 연나라가 만번한滿番韓을 가졌다고 했는데 이는 뒤에 위만의 번한 험독성을 의미한다. 금주시 동쪽에 있었다.

 

이때 진秦나라의 만리장성 역사의 동원을 피해 번한으로 이주해 들어온 연燕, 제齊 사람들이 상하 운장上下雲障에 살았고,
뒤이어 한나라에서 망명해 들어온 위만衛滿에게 상하운장을 떼어주고 한나라를 막도록 하였다.

[전한서]에서 운장雲障은 낙랑군에 속했다. 그러나 한무제의 낙랑군이 아니라 임둔군, 진번군을 폐하면서 물러난 전한시대 낙랑군에 운장이 있었던 것으로 고려되고, 이는 한무제의 요동군 안쪽이다. 상하 운장은 앞에 서우여 기자의 번한성인 험독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만은 기준을 배반하고 상하운장의 중국인 이주민들을 이용해서 기준을 속이고 쳐들어와서 축출하였다. 기준은 대동강 목지국마한으로 떠났고 번한의 오가를 이끌고 대장군 탁의 무리는 월지국 마한으로 떠났다.

그후 위만은 요동군 만번한성에서 조선이라 칭하고 새로운 수도를 사용한 것이다.

 

한편 위만에 밀려나서 대동강에 들어온 기준은 마한왕이라고 하는데 이는 <마한세계>에 나온다.

마한세계
1世 무강왕 武康王(一云 哀王) 諱準 丁未(B.C 194年)移都馬韓其年薨哀王己入於都平壤四十一世則馬韓王位八世.
2世 강왕 康王 諱卓 惠帝二年         戊申(B.C 193年)立   在位 四年
3世 인왕 安王 諱龕 惠帝六年         壬子(B.C 190年)立   在位 三十二年
4世 혜왕 惠王 諱寔 文帝後元七年   甲申(B.C 157年)立   在位 十三年
5世 명왕 明王 諱武 景帝十三年      丁酉(B.C 144年)立   在位 三十一年
6世 효왕 孝王 諱亨 武帝二十八年   戊辰(B.C 113年)立   在位 四十年
7세 양왕 襄王 諱燮 宣帝本始元年   戊申(B.C  73年)立    在位 十五年
8세 원왕 元王 諱勳 宣帝神爵四年   癸亥(B.C 58年)立     在位 二十六年 甲子(B.C 57年)新羅王朴赫居世立國慶州遂界辰韓二十二年 甲申(B.C 37年)高句麗東明王高朱蒙立國成川並二府 元稽之末有後孫三人一曰乎稱鮮于氏入黃龍國一曰諒稱韓氏一曰乎稱奇氏
9世 계왕 稽王 諱貞 成帝建始元年己丑(B.C 32年)立 鴻嘉四年甲辰(B.C 17年)爲百濟溫祚所奪在位十六年人只保圓山錦峴城 新莽己巳(A.D 9年)以二城降于百濟馬韓不祀 自康王戊申至稽王己巳爲二百二年

즉 bc194년에 평양으로 이주한 기준과 그 후예는 9대를 전하였고 백제 온조왕에게 망하였다.
이들이 백제 온조왕에게 평양에서 망한 것은 기씨 족보 등에서 알 수 있다.
위 마한은 셋으로 나뉘어졌는데 
선우(鮮于)씨는 대동강 평양 서쪽의 오석산 황룡산성(黃龍山城)의 주인이 되었고, 기(奇)씨는 경기도 행주산성의 주인이 되었고, 한(韓)씨는 충청북도 청주의 주인이 되었다.

한편 1112년 요서로 들어온 기후국 중국 기자의 후손 세계는 다음과 같이 기록이 남아 있다.
1世 太祖文聖大王箕子姓子氏諱須臾又諱胥餘 商帝武乙次子 諱理子也 誕降于帝乙十七祀丙戌 五十四祀周武王己卯痛深革殷志堅岡僕 遂東出朝鮮都平壤國號後朝鮮敎民八條 變夷爲夏周成王戊午 薨在位四十 祀壽九十三 墓平壤城北王荇山負子原 俗稱兎山 三十六世 嘉德王追尊爲王
위 기록에서 36세 후손이 번한을 차지하여 자기 조상을 모두 왕으로 추증한 것을 알 수 있다. 단 평양의 기자묘는 기준 때에 옮겨온 것이다.
2世 莊惠王 諱松 周成王34年己未立 在位25年 諱仲封於于其子孫在鮮在于者食其二國因姓鮮于
3世 敬孝王 諱詢       康王22年甲申(B.C 1057)立   在位 27年
4世 恭貞王 諱伯       昭王23年辛亥(B.C 1030)立   在位 30年
5世 文武王 諱椿       穆王2年辛巳(B.C 1000)立     在位 28年
6世 太原王 諱禮       穆王30年己酉(B.C 972)立     在位  4年
7世 景昌王 諱莊       穆王35年癸丑(B.C 968)立     在位 11年
8世 興平王 諱捉       穆王45年甲子(B.C 957)立     在位 14年
9世 哲威王 諱調       共王4年戊寅(B.C 943)立      在位 18年
10世 宣惠王 諱索     懿王14年丙申(B.C 925)立     在位 29年
11世 誼襄王 諱師     孝王14年乙丑(B.C 896)立     在位 53年
12世 文惠王 諱炎     려王36年戊午(B.C 843)立     在位 50年
13世 盛德王 諱越     宣王35年戊申(B.C 793)立     在位 15年
14世 悼懷王 諱職     幽王4年癸亥(B.C 778)立      在位   2年
15世 文烈王 諱優     幽王6年乙丑(B.C 776)立      在位 15年
16世 昌國王 諱睦    平王10年庚辰(B.C 761)立     在位 13年
17世 武成王 諱平    平王23年癸巳(B.C 748)立     在位 26年
18世 貞敬王 諱闕    平王49年己未(B.C 722)立     在位 19年
19世 樂成王 諱懷     桓王17年戊寅(B.C 703)立     在位 28年
20世 孝宗王 諱存     惠王2年丙午(B.C 675)立      在位 17年
21世 天老王 諱孝     惠王19年癸亥(B.C 658)立    在位 24年
22世 修道王 諱立襄  惠王58年丁亥(B.C 634)立    在位 19年
23世 徽襄王 諱通     頃王4年丙午(B.C 615)立      在位 21年
24世 奉日王 諱參     定王13年丁卯(B.C 594)立    在位 16年
25世 德昌王 諱僅     簡王8年癸未(B.C 578)立      在位 18年
26世 壽聖王 諱翔     靈王12年辛丑(B.C 560)立    在位 41年
27世 英傑王 諱黎     敬王1年壬午(B.C 519)立      在位 16年
28世 逸民王 諱岡     敬王17年戊戌(B.C 503)立    在位 17年
29世 濟世王 諱混     敬王34年乙卯(B.C 486)立    在位 21年
30世 淸國王 諱璧     貞定王5年丙子(B.C 465)立  在位 33年
31世 導國王 諱澄     考王10年己酉(B.C 432)立    在位 19年
32世 赫聖王 諱준     威烈王13年戊辰(B.C 413)立 在位 28年
33世 和羅王 諱謂     安王17年丙申(B.C 385)立    在位 16年
34世 說文王 諱賀     烈王7年壬子(B.C 369)立      在位  8年
35世 慶順王 諱華     顯王8年庚申(B.C 361)立      在位 19年
36世 嘉德王 諱詡     顯王27年己卯(B.C 342)立     在位 27年
37世 三老王 諱娛     愼정王6年丙午(B.C 315)立   在位 25年
38世 顯文王 諱釋     赫王25年辛未(B.C 290)立    在位 39年
39世 章平王 諱潤    東周君5年庚戌(B.C 251)立    在位 19年
40世 宗統王 諱丕    初諱恤 秦王政15年己巳(B.C 232)立 在位 12年
41世 哀王 諱準        始皇二十七年申巳(B.C.221 ~ B.C.194 )立漢惠帝元年丁未燕人衛滿來侵率佐右宮人浮海南出立國金馬郡今益山改國號曰馬韓在平壤爲王二十七年自箕聖東渡己卯後凡四十一世歷年爲九百二十九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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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시대

구물 장당경문화 bc425~bc238
44세 구물, 45세 여루, 46세 보을, 47세 고열가 단군

 

 

bc426년 43세 단군 물리勿理때에 우화충의 반란으로 인하여 낙랑樂浪 도성을 포위하니 겨울에 단군 물리는 배를 타고 해두海頭로 피난하여 죽었다.

bc425년 백민성의 욕살 상장 구물이 장당경에서 44세 단군으로 즉위하여 압록 18성의 원조로서 새 단군에 즉위하고 대부여를 세웠다.

백민성은 창도현昌圖縣 북쪽 팔면성八面城이다. 요나라 때 3차 한주韓州를 두었는데, 금나라 사람 왕적은 여기에 가서 단금상檀金像에 향을 올렸다.

단군 구물의 사당이 있었던 것이다.

 

상춘의 구월산 장당경은 뒤에 44세 단군 구물에 의해 대부여조선의 수도가 되었고 그 뒤에는 고주몽의 수도 황룡성 천부가 되었다.

고력산古歷山이라고도 했는데 고대 역사가 남겨져 있는 곳이고, 장당경은 고대 역사를 돌에 기록하여 보관하던(藏-唐) 곳으로 고려된다. <대변경大辯經>에서 44세 단군 구물의 장당경은 개원開原이고, 평양平壤으로도 불렀다고 했다. (藏唐京 今爲開原 亦稱平壤)

 

[한단고기-번한세가]에서 구월산 삼성묘를 상춘 주가성자朱家城子라고 하였다.

구월산은 지금의 창도현昌圖縣 하이대자향下二臺子鄕 광정자산光頂子山(532m)이다.

산 입구에 삼선묘三仙墓라는 것이 실제로 전해온다. 즉 삼성묘다. 하이대자향에는 고구려 석성도 남아 있었다.

[한단고기-고구려국본기]에서 고주몽의 도읍지 눌현訥見도 상춘 주가성자朱家城子라고 했다.

그러나 고주몽의 눌현 황룡성과 장당경은 같은 곳이다. 주가성자는 지금의 천두진泉頭鎭 초가구(肖家口)다.

고두막한의  졸본성과 고주몽의 졸본성(눌현성), 그리고 고국원왕의 평양 동황성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소수림왕의 초문사도 있었다.

뒤에 발해 서경압록부가 개원시에 있었고 고구려고국이라고 하였다.

1125년에 기록된 [허항종행정록許亢宗行程錄]에서 당시 개원인 함주의 바로 북쪽에 평양이 실재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허항종이 함주를 떠나 북으로 향하는데 그곳이 평양이라면서 동쪽으로 천산을 바라보았다고 하였다.

離咸州 卽北行 州地平壤 居民所在成聚落 新稼始遍 地宜穄黍 東望天山, 金人云彩 此新羅山

즉 장당경의 별칭인 평양이 개원 북쪽에 존재한 것이 고증되는 것이다.

여기서 천산은 광정자산의 의미다.

 

한편 왕적의 [요동행부지]에서는 함주咸州(=개원開原)의 함평현 함평숙부에 이르러서 주변의 산아래에서 심대한 고구려 폐성을 발견하고 고구려의 망국 천년한을 읊어대며 함원전含元殿을 바라본다.

폐성터의 함원전은 궁전의 흔적이니 고구려 도성 자리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고 이는 고주몽의 눌현성 위치를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개원시開原市 북쪽 창도현昌圖縣의 옛이름은 몽고어로 상달常達額勒克였는데 이는 녹색 초원의 의미다.

한민족 고대의 “상춘”이 몽고시대 “상춘달”로 변했던 것이다. 중국발음으로는 창昌, 장長, 상常이 모두 "chang"이다.

 

 

구물丘勿 단군은 해성에 이궁離宮을 지어 역시 평양이라고 부르도록 하였다. 이는 3세 단군 가륵이 세웠던 평양과 가까운 곳으로서 단목국 수도가 있던 법고시에 세원진 평양으로 고려된다. 

46세 단군 보을은 장당경 도성에 불이 나서 해성의 이궁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단군왕검 고조선문화 참조)

 

 

사면성 서쪽 보력진寶力鎭 장발향長發鄕에서 청동기시대, 전국시대 고묘 등의 유적지가 발굴된다.

장발향에서 나온 3자루의 청동검은 여러 형식이다. 하나는 비파형 청동검에서 보는 “T”자형 청동손잡이를 달았지만 검날이 비파형이 아닌 북방식 세형동검이다. 이는 중군, 즉 서요하西遼河 상류 식이다. 또 하나는 공병식 청동검으로서 가운데에 나무 자루를 박아 넣는 원형 구멍이 있다.

이것도 중군 형식으로서 긴 창이 된다.

또하나는 검날이 육릉형이며 타격석을 끼우는 것이었다.

 

                                  

 

 

 

청동화살도 삼릉식다. 삼릉식 청동화살은 임호林胡의 근거였던 내몽고 양성현凉城縣, 포두시包頭市 등에서도 나왔다.

그외 철제 기구가 많이 발굴된다.

이 장발향 청동검과 비교되는 것이 심양시瀋陽市 정가와자鄭家窪子의 세 곳에서 발굴된 청동검인데, 청동제 가중기는 비슷하나 거기서는 세 자루의 검날이 모두 비파형이다.

 

 

 

팔면성의 어원은 그곳 성터에서 글을 판독할 수 없는 팔면능형八面稜形의 갈석碣石(=石經幢이라고도 한다)의 발굴에 의한 것이다.

최근에 발견된 수성왕 천도교서 갈석, 동천왕 양위교서 갈석, 중천왕 즉위교서 갈석 등과 같은 팔면능형 갈석은 중요한 고대 유물로 추정된다. 

팔면성은 3차 한주韓州 치소였다가 3차 한주가 이수현으로 옮겨간 뒤에는 유하현柳河縣이 되었다.

금나라 한주자사韓州刺史, 동경銅鏡과 유하현柳河縣의 기물器物이 팔면성에서 발굴되었었다.

단, 한주라는 지명은 원래 고리국藁離國 고지였던 요하遼河 서쪽 창무시彰武市 1차 한주에서부터 옮겨온 것이다.

 

금나라때 [요동행부지]에서 1190년에 이 팔면성에 단금상檀金像이 있어서 제사(妙香供旃檀金像)를 드렸다.

단금상은 단검상檀檢像의 기록으로 고려된다. 팔면성 아래 구가둔丘家屯을 보면 단군 구물丘勿이 본래 백민성 출신이라서 장당경에 도읍하고서 백민성 아래에 묻힌 것으로 고려된다.

 

대창홀아하大創忽兒河와 소창홀아하小創忽兒河가 발원하는 사평시四平市 동쪽 탑자산塔子山(=400m)에는 연원을 알 수 없는 고대 탑이 있었다. 구월산 장당경 탑이 여기도 있었는지 알 수 없다.

 

45세 단군 여루 때인 bc365년에 연나라와 제나라가 쳐들어왔고 운장에서 막았다. 

이때 번조산, 막조선, 진眞조선이 합세하여 막는데 진조선은 낙랑이다. 46세 단군초에 번조선왕이 연나라 자객에게 죽고 기후국의 기후가 번조선왕이 되었다.

bc304년 장당경이 불타니 해성의 평양으로 도성을 옮겼다. 해성은 단군 물리가 와서 죽은 곳이다.
bc296년 한개韓介가 객좌에 있던 수유의 군대를 이끌고 도성인 해성 평양을 침범하여 단군이 되려하니, 해성에 있던 단군 물리의 현손이 고열가가 일어나 물리치고 47세 단군이 되었다. 

bc 239년 북부여 해모수가 군대를 일으키더니 수유의 군대와 옛서울 백악산아사달(진한 소밀랑 대전자 문화 참조)을 차지하였다.

고열가 단군이 스스로 물러나 아사달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고 하는데, 후에 영품리왕이라고도 하였으니 영고탑으로 피신한 것으로 고려된다.

고열가도 낮춘 이름 고리의 추장(고리가)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그의 후손이 비류수에 다시 졸본부여를 세운 고두막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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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 웅심산문화bc239~bc108

 

1. 전고구려 웅심산 난변 하얼투 고도성 문화

해모수解慕漱는 2333년 47세 단군 역사 시대를 종식시켰다.

bc239년, 해모수는 본래 고리국藁離國 사람으로서 군대를 일으켜서 옛서울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하고,

웅심산熊心山 난변蘭邊에 궁실을 지었다.

또한 해모수가 태어난 곳이 고구려라고 하였다.

 

bc107년에 생긴 현도군이 bc86년에 구려로 이동하여 고구려현이라고 한다.
昭帝始元五年,罷臨屯、
真番,以并樂浪、玄菟.玄菟復徙 居句驪.

고구려 서북으로 옮겼다고도 한다. 徙郡於高句驪西北

고구려 서북에서 고구려는 나라이고 구려는 그 서북의 요동군 북쪽의 땅이 되며 여기가 현도군 고구려현이다.
따라서 이 현도군 고구려현이 해모수의 고향인 고구려로 고려된다.

 

현도군 고구려현은 소요수와 남소수가 나온다.
대요수는 [위토지기]를 인용한 [수경주]에서 백랑수의 하류이므로 지금의 대릉하다. 
[무경통요]에서도 대요수와 쇼요수가 만나는 요수현(遼隊縣)은 대릉하 의주시(義州市)에 있다.

소요수는 대요수와 합치므로 부신에서 내려가는 물이다.
즉 현도군은 부신시 동북방이 되며 남소수는 요양하(曉陽河, 조양하로도 읽는다.)가 된다.

현도군 서개마현을 지나는 고구려 마자수 압록강은 류하(柳河)가 된다.

마자수가 바다로 들어가는 하구는 요동군 서안평에 있었는데 서안평은 지금의 신민시(新民市)다. 당시는 바다가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서안평에는 소수(少水)가 있어서 소수맥 구려가 있었는데, 바로 이 현도군의 고구려현 남소수에 사는 구려족을 말한다.

 

bc87년 졸본에서 즉위한 고두막한 동명왕이 구려하를 건너서 요동군 서안평을 수복하였다.

요나라 호주(壕州)가 있던 부신시 하얼투진 지역을 서안평이라고도 했다.
즉 요양하와 류하 사이가 서안평인 것이다.

요나라 호주는 원나라 때에 의주가 되는데 (대원일통지) 그 원나라 의주의 비문이 하얼투진 탑영자고성에서 발굴되었다.

 

bc86년에 고두막한의 수복전쟁으로 해서 진번군과 임둔군이 폐지되었다.

임둔군은 낙랑군에 병합되고 진번군은 현도군에 병합되었다.

또한 현도군이 옥저 불내성(법고시 조양동산 남쪽)으로부터 부신시 동북의 현도군 고구려현으로 이동해서 설치되었다.

본래 옥저 불내성, 즉 환도성에 두었던 1차 현도군이 물러나면서 

고구려(구려) 서북으로 옮기는데, 그곳이 현도군 고구려현이다.

 

이 현도군 위치는 부신시 동북의 하얼투진(哈爾套鎭)이다.

하얼투진 동북에는 흑두산(黑頭山)이 있는데 이 흑두산에서 하얼투가 유래하였다고 한다.

요나라 때는 호주(壕州)가 그 아래에 있었고 원나라 때에 의주(懿州)가 설치되었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이 현도군 및 졸본부로 생각한 의주(醫州)가 또한 여기다.

금나라때 [요동행부지]에는 호로토(胡土虎)라 불렀고 뜻은 혼강(渾江)이라고 하였다.

 

해모수가 고리국 웅심산 난변에 궁실을 지었다.

 

이는 하얼투진 동남쪽 영평부(永平府)이다. 고구려 천부궁이 있었다.

동쪽에 조양성(朝陽城)이 또 있다.

이는 수성왕 10년에 세운 고구려 국도로서 고도성(固都城)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유래하는 효양하(曉陽河)는 자오양하(朝陽河)라고도 발음한다.  고대에는 남소수다.

 

유리왕이 고도성주 해명 왕자를 죽인 곳이 고도이고 해명왕자가 죽은 창원은 바로 동남쪽의 창토다. 고구려 창암성이었다.

고국원왕 비문에서 고국원왕이 전연국과 혁현령에서 싸워 이겨서 이 천부궁을 다시 소유하므로 해서 영주자사(營州刺史)라 칭한다.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한 성도 역시 국내 고도성이다.

연남생이 국내 고도성(故都城)에서 당나라에 투항했을 때에 당나라에서 내려준 작호가 현도군 개국남(開國男)이었다. 고도성이 2차 현도성이었기 때문이다.

동천왕 때 여러 비문을 보면 역대 고구려왕들은 국내 고도성의 보존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따라서 고도성이 2차 현도성으로 확실시되는 것이다.

 

 

bc 232년 옛도읍의 오가 공화정을 철폐하였는데 개원시에 있던 고열가의 해성 평양을 취합한 것이다.

이때 단군 고열가가 단군에서 물러나 해성 이궁 평양으로부터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고열가는 다시 아사달로 옮겼다.

이후에 영품리왕(寧稟離王)이라고도 하였다.

일부 기록에 졸본부여를 세운 고두막한 동명왕이 고열가의 후손, 또는 영품리왕의 후손이라고 한다.

고열가는 장당경으로부터 영주(寧州)인 옹우특기로 옮겨들어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그동안 화근이었던 북막(北漠)이 쳐들어와서 영주(寧州)를 유린하고 순사 목원등을 죽인다.

영주는 영고탑이 있던 옹우특기다.

 

 

bc221년에는 연나라 장수 진개가 쳐들어와서 만번한까지 차지하고 요동군을 설치한다.

대요수였던 대릉하에 연나라 요동군이 설치되어 연나라 땅이 되니 해모수는 더 이상 고구려 땅에 도읍할 수 없었다.

 

2. 흥안령 천산 북부여 문화

bc220년에 해모수는 북으로 천리나 먼 곳에 천도하여 시라무렌강 천산의 신시 아사달로 가서 새로운 천안궁을 지었다.

해모수가 옮겨가서 새로이 진한(眞韓)이 되고, 옮겨가기 전 땅은 진한(辰韓)이 된다.

이에 부여고도인 고구려현 지역은 취약해진다.

 

bc195년에 위만이 번한에 들어오고 해모수는 서거하고, 모수리 단군이 즉위한다.

위만이 번한을 찬탈하니 번조선의 준왕은 대동강 남쪽 금마마한 구월산으로 천도하고, 번조선의 탁 장군은 중마한 월지국으로 옮겨간다.

 

bc193년에 모수리 단군은 상장 연타발(延陀勃)을 보내 평양에 성책을 쌓게 하였다.

이때 부여 고도성을 위만에게 빼앗겼다.

모수리 단군은 해성(海城)을 평양도(平壤都)에 속하게 하였다.

해모수의 차자인 고진(高辰)이 평양도를 다스리며 중부여라고도 하였다.

낙랑왕 최숭이 마한의 왕검성에 이주해 왔었는데, 이때 해성에 곡식을 바쳤다.

마한의 왕검성은 집주 험독현 비리군지라고 했던 철령시 최진보 산성이다.

bc128년에 모수리 단군이 직접 위만을 쳐서 남려성(南閭城)을 수복하였다. 이는 의무려산 남쪽으로 고려된다.

 

bc120년에 즉위한 고우루 단군은 평양도사 고진을 고구려후로 삼고 서압록을 지키도록 하였다.

이 서압록은 마자수 압록강이라고 했던 유하(柳河)이다.

고진의 고구려후 위치는 마자수 동쪽 비류수변의 요나라 고주(高州)로 고려된다. 후에 졸본부여라고도 했다.

그 위치는 창무시 동북방 사합성의 토성자 위치다.

 

 

해모수는 북으로 천도하여서 환웅의 신시 백악산 아사달에 도읍한다.

부여국이 현도 북 천리에 있었는데 바로 처음 북부여 위치이고 한무제 때는 진번국(眞番國)이다.

아로과이심기 천산이 바로 북부여 수도 천안궁이다.

그 서쪽에 천왕, 천산이라는 지명이 있고 그 아래에는 달란화(達蘭花)라는 곳이 있다.

달란화는 대란하大蘭河와 같은 발음이다. 즉 새로운 난빈蘭濱의 새로운 웅심산 아사달은 이곳이다.

고대 조천지朝天池가 있던 하늘산(=사이한산)에서 내려오는 두 물 중에서 서쪽 물이 색불루 단군의 녹산 아사달을 지나는 자칸무렌강, 즉 흑수이고 동쪽으로 내려오는 물이 요나라 상경을 지나는 대란하였던 것이다.

그 대란하 하류에 신시 백악산 아사달이 있었고, 또 웅심산 천안궁도 있어서 동서로 마주본다. 아사달과 천안궁 북쪽에는 목엽산 천산진이 있어 요나라 황제가 신단수를 세워놓고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요나라 황제는 물론 사이한산 아래서도 제사를 올려서 그 터가 남아 있다.

아사달과 천안궁 사이로 흐르는 물은 달라이하達拉爾河와 합쳐지며 해하이하海哈爾河라고 하는데 각각 달물과 해물이었을 것이다.

웅심산이라고 했지만 대웅大熊을 몽고말로 파라巴賴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활”의 의태어이다.

웅熊의 훈에 “불꽃처럼 빛나는 모양”이 있다. 즉 활활 타오르는 의미다. 또한 홀승홀이나 홀한강처럼 크다는 의미가 있다. 대웅이 곧 한웅桓熊인 것이다. 천안궁 남쪽 지명은 바라치루도巴拉奇如德이니 대웅도(大熊都)라는 뜻이 된다. 즉 웅심산 수도다.

부여족은 계속 수도에 난하(蘭河)라는 이름을 붙인다. 해부루의 동부여가 대무신왕에게 망하고 옮겨간 곳에도 나린하와 난릉이 있다.

 


 
천산진 남쪽 천산구진과 천왕 이라는 곳에 있던 북부여 웅심산 천안궁, 건너편은 환웅의 백악산아사달이다.

 

해모수 말기인 bc201년에 동호東胡가 흉노왕 묵돌가한에게 멸망하였다.

34세 오루문 단군 이후 중국과의 교류는 37세 마물 단군 때 주나라 공주를 왕비로 삼은 일이 있다.

bc635년경의 일이다. 당시 <사기> 기록에는 적족翟族의 장수가 딸을 주나라 양왕의 비로 주었고 양왕은 적족의 힘으로 영토를 지켰다. 그러나 주양왕은 적비를 몰아내려 하였고 결과는 적족의 장수가 궁내로 들어와 주양왕을 축출하고 적비의 아들을 주나라 천자로 세웠다. 그러나 4년후 다시 주양왕이 돌아오고 적족은 물러났다. 

이후 진晉의 문공文公이 백적과 적적을 낙양의 북쪽에서 물리쳤다고 한다.

이후 진晉의 북쪽에는 임호와 서융인 누번이 있었고, 연나라 북쪽에는 동호와 산융이 있었다.而晉北有林胡﹑樓煩之戎,燕北有東胡﹑山戎

한편 이후로 산서성의 북쪽인 양성에 임호林胡가 있었다. 조趙의 무령왕이 bc305년경에 하북성에 있던 중산국과 임호, 누번을 물리쳤다고 한다.

또한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동호에 인질로 갔다가 돌아와서 동호를 물리쳤다. 이는 적봉시 남쪽 영성현의 낙랑홀이 함락당한 것이다.

bc221년이다.

 

bc220년에 해모수는 백악산아사달에 제사지내고 천안궁을 다시 지었다.

한편 bc201년 흉노에게 멸망당한 동호는 어디인가?

동호가 멸망후에 오환과 선비가 되는데 당시 오환산이 지금의 서한산, 즉 천산인 것이니 그 서쪽이 동호의 위치다.

<규원사화>에서 40세 단군 달음 기록에 당시 알유(오르도스)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부여인을 맥인貊人이라고 했다.

즉 호맥은 부여인이다. 이를 예인 들과 합쳐서 예맥이라고도 한 것이다.

동호는 선비와 오환으로 갈라졌는데 흥안령 산맥의 서북으로 올라간 것이다. 이때 선비는 흑룡강성 눈강의 실위 지역까지 쫓겨 올라가고, 오환은 오환산에 있었는데 색불루가 있던 녹산 아사달이었다.
실위로 도망간 선비족이 바로 중산국을 만들었던 백적족白翟族으로 고려된다. 실위는 시로위로 읽으면 일본말로 백색인데 후에 탁발선비라고도 하였다.
반면에 오환이 임호라고도 하던 적적족赤翟族이다.  따라서 동호의 망국 위치는 달라이호수 변이 된다.

bc195년에는 적봉시 영성현 노로아호하 상류에 있던 낙랑이 배를 타고 개원으로 이주하였다. 이로서 북부여의 서부는 매우 취약해진다.

 

북부여 시기 유물은 파림좌기巴林左旗 북쪽 30km 지점인 남양가영자南楊家營子 유지가 있다. 그 북쪽에는 세석기시대 부하문화富河文化가 있었다.

파림좌기는 거란국 요나라의 상경임황부가 있던 곳이다.  

그러나 남양가영자의 묘제는 거란족 선조와 차이가 크다. 거란은 보통 시체를 숲에 두었다가 3년 뒤에 뼈를 수습하여 화장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남양가영자의 묘제는 1차장이고 화장한 흔적이 전혀 없다. 또한 부장품은 동물을 희생하기도 했지만 사람을 순장殉葬하기도 했는데 순장은 부여의 풍속이었다. 남양가영자 유지에서는 20개의 묘기가 있고, 주로 철기와 동기 제품, 그리고 옥석장식은 다량으로 나오는데 시기는 육가자 유적지와 같고 다만 구리만 있고 금은金銀 제품이 전혀 없으니 왕릉급이 아닌 것이다.

 

부여의 제천행사가 영고迎鼓였고, 도성은 영고탑寧古塔이라는 말을 이미 썼는데, 영고탑을 한문으로 번역하면 육가자六家子이다.

흥안력興安嶺 산맥 동남쪽 신개하新開河 유역의 과이심좌익중기科爾沁左翼中旗 육가자六家子 유적지가 북부여 시대 주요 왕족릉으로 고려된다.

 

육가자에는 약 30개의 묘좌가 있는데 야수문野獸文의 금속 부장품이 많이 나왔다. 머리는 서북을 향하였다.

육가자의 묘제는 부여식으로서 유곽무관有槨無棺이다. 부여는 옥관을 빌려서 운구하더라도 옥관은 묻지 않았다.

부장품을 보면 금은 세공이 발달하여 금마식패金馬飾牌, 쌍금마식패, 그외 수형금패獸形金牌가 2건이고, 금팔찌 7건, 금비녀 2건, 금반지 3건, 금정침 1건, 기타 금장식 13건에 은비녀 16건, 기타 은장식 7건, 동경 3건, 구리 허리띠 장식 1건, 도금한 구리허리띠 1건 도은한 구리허리띠 1건, 기타 여러건의 구리 장식과 도금한 철제 장식이 23건이다.

그뿐아니라 옥玉과 유리琉璃로 된 장식도 30점이 나왔다. 호박琥珀, 마노瑪瑙, 녹옥석綠玉石 등을 재료로 사용했다. 이 유적지의 연대는 하한下限이 동한 시대며 대략 bc2세기까지로 본다.

금은은 부여, 고구려의 장식으로 유명하지만 동시에 흉노도 유명하다.

 

서요하 과이심좌익중기 육가자의 북부여 금은 유물(혹은 갈사국 유물)

 

이 흉노와 부여, 고구려의 금은 장식은 소위 스키타이, 야수문 양식으로 같다. 단 그리스의 스키타이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서요하西遼河에서 시작되어 오르도스 고원에서 부여족에 의해 꽃을 피우고 그리스 스키타이까지 전해진 것이다.

 

거란족은 동호의 후예로서, 흉노에 망하여서 선비산에 살다가 적봉으로 내려왔으나 위나라 조조에게 망하고 다시 요택에 살았다. 요택은 시라무렌강 상류의 부여성이다. 선비족 탁발씨의 북위 때에 적봉시의 송막松漠에 내려와 살다가, 수나라에 이르러 8부족 형성 초기에 거란족 시조인 대하씨大賀氏가 일어나 부여夫餘, 실위室位를 합병한 것으로 되어 있다. 至唐 大賀氏蠶食扶余, 室韋, 奚, 靺鞨之區,地方二千餘里。<요사 상경도>

실위는 당시에 하이라얼海拉爾, 눈강嫩江 부근이었을 것으로 고려되고, 부여는 옹고트 송막으로부터 하이라얼 실위로 이르는 도상이어야 한다. 따라서 부여 영역은 시라무렌강西拉木倫河(=서요하西遼河)가 될 것이다.

 

 

북부여 2세 모수리는 위만조선에 대비하여 bc193년 상장 연타발延佗勃을 시켜 평양에 성책을 쌓게 하였다. 평양은 환도성이 있던 법고시 한대산이다. 이듬해 해성을 평양도사平壤道史에 속하게 하고, 해모수의 차자 고진高辰으로 지키게 하였다. 도사道史, 순사巡使, 욕살褥薩 등은 관직 이름이다.

그후 4세 단군 고우루 단군 때에 다시 고진을 발탁하여 bc120년에 고구려후高句麗侯, 또는 고리군왕藁離郡王으로 삼았는데, 이 고리군 위치는 서압록하(지금의 柳河)로서 창무시였다.

 

그러나 모수리 단군 때에 위만衛滿의 손자 우거에게 해성 이북 50리까지 침략을 당하여, 다시 고우루 단군이 해성에서 우거군을 격파하고 살수까지 추격하여서 구려하 동쪽을 수복하였다. 구려하는 역시 마자수압록강이었던 유하柳河다.

 

<참고>

진나라 북쪽에는 임호와 누번이 있고 연나라 북쪽에는 동호와 산융이 있었다. 而晉北有林胡﹑樓煩之戎,燕北有東胡﹑山戎
호맥이라 하는 말이 있는데 이는 부여와 예맥이다. 부여를 예라고도 할 수 있으니 부여를 hui로 예를 역시 hui로 발음한다.
즉 조선말로는 "예"가 부여말로는 "부여"라고 할 수 있다.
즉 호맥과 예맥은 같은 말이다.
先秦時期北方民族。貊字古多作「貉」。往往與「胡」連稱「胡貊」,泛指貊和北方民族。《山海經》有貊國,近燕。《周禮》有「九貉」。可見其族類之多。西周時,貊為北國之一,周宣王命韓侯為方伯以柔撫之。《詩經‧大雅‧韓奕》言:「王錫韓侯,其追其貊,奄受北國,因以其伯。」即詠其事。此所謂「追」,學者們以為即「濊」(或作穢、薉),與貊同類,因有濊貊之稱。戰國時期,貉人猶有留居趙北者。史載:趙襄子「逾句注而破並代以臨胡貉」,趙武靈王西北有林胡地至休溷之貉,甚至秦國之北也還有「胡貉」。漢代的夫餘、沃沮等族,當時人仍以貉人稱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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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과 졸본부여bc108~bc58

1. 위만의 험독성과 우거의 조선성

2. 한사군의 위치

3. 한나라 현도군 압록강

....설명은 아래에

4. 고구려 수당전 요하는 대릉하

5. 졸본부여

 

1. 위만의 험독성과 우거의 조선성

46세 번한왕 기준箕準은 bc221년에 즉위하여 서우여의 번한성(금주시 대집둔, 요동군 험독성)에 있다가 그해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가 쳐들어와서 2000리까지나 땅을 뺏기고 요동군 패수沛水의 번한성(태안현 손성자)으로 옮긴다.

이때 연나라의 요동군과 요서군이 설치되었고 이는 진나라에 승계되었다. 연의 요동군은 대릉하에 있었고, 요서군은 육주하 서편에 있었다. 전단군조선의 번한수도 탕지산 안덕향은 연나라 요서군 도하현이 된다. 연나라 요동군 위치는 위만의 수도였던 만번한에 있었을 것이다.

이후 연나라가 망하고 진秦나라로 통일되어 진시황의 만리장성 역사를 피해 번한으로 이주해 들어온 연燕나라, 제齊나라 사람들이 상하 운장上下雲障에 들어와 살았다. <사기>에서는 상하장上下鄣이라고 하였다. 이는 전단군 번한 수도 탕지산 안덕향과 후단군 번한수도 대집둔을 각각 가리킨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그중에서 탕지산 안덕향에 연나라 유민들이 많이 살아서 뒷날 당나라 때에 연주燕州가 되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반면에 대집둔은 제나라 사람들이 많이 살았을 것이다. 

<사기>에 의하면 한나라가 흥하여 요동군이 멀어서 지키기 어려우니 다시 요동고색을 지었고, 패수로서 조선과 경계를 삼았다. 조선은 연나라에 속하였으나 연왕 노관이 반란하여 흉노로 들어가니 위만도 망명하여 천여인을 모아서 오랑캐복장을 하고 요동고색을 벗어나 패수를 건너 진나라때 땅인 상하장에 살았다. 漢興,為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為界,屬燕.燕王盧綰反,入匈奴,滿亡命,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

 

한고조 유방 때에 여황후의 전횡으로 인하여 유주자사 연왕 노관이 흉노로 망명하고, 그 부하인 위만은 요동고색을 지나 패수를 건너 요동군 험독성에 도망해 들어왔다. 이 패수는 낙랑군 패수가 아니다. 이 패수는 수중현의 구하狗河, 별칭 구려하句麗河, 또는 명수明水가 된다.

 

번한왕 기준은 위만衛滿에게 상하운장을 떼어주고 한나라를 막도록 하였다. 이때 위만은 험독성에서 조선왕이라 한 것이다.

 

 

bc194년에 위만은 기준을 배반하고, 상하 운장의 중국인 이주민들을 이용해서 기준을 속이고 쳐들어와서 의무려산 동남쪽 태안의 번한현에서 축출하였다. 기준은 바다를 건너 대동강 목지국마한으로 떠났고, 대장군 탁의 무리는 번한의 오가를 이끌고 월지국 마한으로 떠났다.

그후 위만은 연나라 요동군이 있던 왕만구에 옮겨서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이전에 연나라가 세운 요동군 위치로 고려된다. 또한 뒤에 만번한滿番汗이라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무제의 요동군 양평이 의무려산 동쪽에 설치되었을 때는 서부도위를 두었던 무려현으로 되었다. 왕만구의 무엽산에서 무려현이 유래된 것이다. 반면에 대릉하 동쪽의 지금 의무려산은 더 큰 무려산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지도1 위만의 험독성. 이는 대릉하 하구 서안과 금주시 사이에 목엽산 기슭에 있으며 요동군이었다.

 

이후 위만조선은 손자 우거에게 전해졌다. 이때 위만조선은 진번(서요하 천산)과 임둔(요동반도 서안)을 이미 복속하였다고 한다.

지도2 낙랑군 조선성은 법고시 정가방 만류가 동남쪽 조양동산에 있다.

 

bc108년 한나라 무제는 수륙양군을 동원하여 우거를 치는데 수륙양군이 모두 실패하였다. 그러나, 우거에게 불만을 가진 조선의 제후들이 반란하여 한나라는 쉽게 우거를 제거하고 한사군을 설치하게 된다.

 

2. 한사군의 위치

 

bc108년 한무제의 조선정벌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한사군이 한반도에 설치되었다는 것이 현재 중국과 우리 역사학계의 잘못된 견해다. 그 잘못된 주장에 의하면 연나라가 설치한 요동군은 요양시에 있었고, 요동군 압록강은 지금의 압록강이고 한나라 낙랑군은 지금의 평양시다.

보충하면 <후한서군국지>에서 요동군은 낙양에서 3600리, 우북평은 낙양에서 2300리다. 후한의 우북평은 난하의 노룡군이었다. 그러니까 난하에서 양평은 1300리가 된다, 낙랑은 낙양에서 5000리였으므로 양평에서 1400리이다. 한편, <무릉서>에서 임둔은 장안에서 6130리였는데 이는 낙랑으로부터로 고치면 대략 230리가 된다. 진번은 장안 7640리...낙랑에서 1740리가 된다.
(당나라 때 평주가 후한의 우북평이므로 평주로부터 장안까지가 2650리. 낙양까지가 1900리를 참조하여서 750리 차이가 난다. 후한서에서는 낙양 평주 거리 2300리다. 후한시대 2300리가 당나라 때 1900리로 줄어들면서 당나라 때 장안-낙양 차이 750리는 한나라 때 907리가 된다. 이는 당나라 때 십리가 4km이고 후한시대 십리가 3km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한시대를 기준으로 교정하면 임둔은 낙양에서 5230리, 낙랑에서 230리가 되고 진번은 낙양에서 6740리...대략 낙랑에서 1740리가 된다.)
먼저 잘못된 중국 주장을 현재 지도로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지도3

즉 한반도 전체가 한사군이었다는 주장이다.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현재 우리 국사의 토대이다. 여기에는 낙랑군 수성현에서 시작된 중국 진시황의 만리장성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현재 중국 역사책에서는 한강까지 중국 땅이라고 그려놓고 대동강에 낙랑군을 그리고 진시황의 만리장성을 그려놓았다.


지도4

중국은 많이 양보해서 경상도의 진번군을 지웠다. 그러나  사실은 어떤가? 압록강 이남에는 중국식 고성터가 일체 없다.
대동강의 낙랑고성은 원형으로서 중국의 네모반듯한 평지성이 아니다. 즉 한사군은 압록강 이남에 없었다.

실제로 진번군은 고래로 서유하 북쪽 천산에 있었다. 한반도 경상도가 아니라 저 북쪽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얼토당토 않은 일이 일어났는가?

이는 대동강의 고구려 평양이 낙랑군이었고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수도였다는 잘못된 가설에서 출발한다.

대동강은 고구려가 망국한 도성이지만 고구려 당시 평양이 아니라 한성이었다. 고구려의 삼경인 국내성, 평양성, 한성 중의 한성이었다.
이는 당나라에 항복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산의 낙양성 묘지에 나오는 글이고, 또한 대동강 평양성벽 각서에 고구려인이 기록한 한성이라는 기록을 무시한 것이다. 대동강 평양은 700년대 안동도호부 도독이 되었던 고구려 왕손 고덕무가 독립하여 세운 후고구려(ad700-820)의 새 수도로서 평양이었다. 

이미 앞에서 기자조선의 출발지는 대동강에서 천리밖인 대릉하 상류인 것을 기자의 유물로서 밝혔다.

대신에 대동강 평양에 대하여는 <원사지리지>에 그 올바른 설명이 있다. [원사元史-지리지地理志] 동녕로東寧路의 설명은 아래와 같다.

"고구려 평양성이자, 장안성은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운 낙랑 땅이다. 장수왕이 처음으로 평양에 도읍하여 살았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쳐서 평양을 뽑아버리니 고구려가 동쪽으로 이주하여 압록수 동남 천여리로 옮겨가니, 대동강의 평양은 옛 평양이 아니다."

唐征高麗拔平壤 其國東徒 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 非平壤之舊

 

따라서 장수왕의 평양성과 압록강은 현재 대동강 평양의 서북 천리에 있다. 668년 고구려가 망하고, 700년에 당나라가 다시 보낸 고구려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高德武가 후고구려를 다시 세워서 동남쪽으로 옮겨가서 120년간 도읍한 곳이 지금 대동강 평양이다.

잘못된 압록강에 관하여는 아래에서 아주 상세하게 밝히고, 여기서는 한사군의 위치만 바로잡는다.

 

우선 낙양에서 2300리 우북평은 <후한서>에서 당시 토은현土垠縣에 있었는데, 그 위치는 현재 당산시唐山市 북쪽 풍윤豊潤 위치다. 산융족의 무종국은 남수藍水변인데 이는 옥전玉田 위치다. 후단군시대 남국의 위치다.

한편 3600리 요동군 치소인 양평성은 연나라 요동성(위만의 험독성), 본래의 요동군 무려현으로 고려되고, 
3300리 요서군 치소 양락성 위치는 흥성시興成市로 고려된다. 흥성시 북쪽 흥성하 발원처에 양가장자楊家庄子가 있고 흥성하 하류 서쪽에 양안성羊安城이 있기 때문이다. 즉  양안성이 양락성의 후신일 것이다.

이때 3260리 거리의 요동속국 위치는 당시 천료天遼 또는 창료昌遼라고도 했는데 본래 요서군 부려현夫黎縣이었다. 요서군 부려현, 뒤에 요동속국도위는 흥성시 서북쪽의 포도구葡萄溝로 고려된다. 이 요동속국에는요동군의 험독현(대집둔), 방현, 무려현, 그리고 요서군에 속했던 부려현, 빈도현, 도하현 등이 속했다. 후한시대 거리가 밝혀진 요동군과 요서군의 중요한 현의 위치는 대략 아래 지도와 같다.

지도5

지도5에서 요동군 무려가 연나라, 진나라, 후한시대 요동군이고 한무제의 요동군만 전한 양평이며, 공손탁의 요동국 양평은 별도다.
<후한서>에서 요동군과 현도는 400리인데, 요동국과 현도는 200리였다.

양평은 무려 다섯군데를 옮겨다녔는데 이는 따로 다룬다.
요서군 유성은 두 곳인데, 하나는 산해관 동북으로서 전한시대 요서군 유성이고 삼류수가 흘러 바다로 들어갔다. 수나라 유성군이 되었고 당나라 영주를 두었다가 평로군을 두었으며 평로성이 있었다. 요동 신성에서 거란군에게 망한 당나라 안동도호부를 당나라 중기에 다시 세운 곳이다.

또하나의 유성은 공손탁이 요동군을 갈라서 만든 요서군의 유성인데 모용황이 전연국 수도를 세웠고 평주平州 황룡성이라고 하였었다. 북연의 수도였고 북위군에게 함락당했으며 평주 대신 영주營州를 두고 평주는 난하의 노룡현으로 옮겨졌다. 그후 조양시는 영주 유성현이라고 계속 불렀다. 그러나 수나라 건국 무렵에 북제 영주자사 고보녕이 점령하였고, 수나라가 설치한 요서군은 전한시대 유성현 위치였다.

당나라 영주도 수나라 유성군, 즉 전한시대 유성현에 두었다. 이 당나라 영주에서 도하의 연군성을 지나 대릉하(당시 대요수)를 건너서 당나라 안동도호부 양평이 있던 적도 있는데, 이는 요동신성이며 공손탁의 요동국성 양평과 같다.

전한시대 유성현과 수나라 유성군, 당나라 평로군 영주는 아래 지도와 같다.

지도6

수나라 유성군은 대루(大柳)에 전한 유성현은 삼산三山 남쪽 삼류수가 바다로 들어가는 상류구(上柳溝)에 있었고

당나라 영주이자 안록산의 평로군절도사 치소인 평로성은 로두구(瀘豆溝=盧州城) 평천영(平川營)에 있었던 것이다. 

로두구와 평천영은 평로성의 성북과 성남이다.

당나라 영주와 요수(현재 대릉하), 그리고 요동신성 안동도호부의 새로운 비정은 압록강(현재 대요하)에 있던 발해 서경 압록부(졸본성)과 고구려 수도(환도성, 구평양성 등)을 올바로 잡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준점이다. 이제까지는 공손탁의 요동국이 요동군을 갈라만든 요서군 유성, 즉 조양시를 기준점으로 하여서 많은 착오가 있었고 진나라 만리장성이 대동강에 있었다는 거짓 역사를 만들어냈다.

이로부터 새로 만들어지는 한사군 지도는 아래와 같다.

지도7

낙랑군은 본래 개원시(開原市)였다고 <원사/지리지> 함평로咸平路에서 밝히고 있다. 

<후한서>에서 요동군으로부터의 낙랑군까지의 거리가 1400리인 점을 고려하면 전한시대 낙랑군 위치인 개원보다 먼 곳이다.

후한시대는 <삼국사기/고구려기> 기록에 광무제의 살수(심양시 渾河) 이남 침략이 있었다.
<후한서>에만 등장하는 낙랑군 낙도현 樂都縣을 이때 혼하 아래에 설치한 것으로 보이고, 이 낙도현까지 거리가 1400리로 추정된다.

명나라 때 금주시에서 북진시까지가 180리였고 북진시에서 요양시까지 360리였다. 합하면 540리가 된다. 명나라와 한나라 때의 10리는 3 :5이므로 한나라 때의 금주-요양은 900리 거리다.

 

그러나 여기에 고대 해안선의 변수가 있다. 청나라 때도 대개 심양 동남이나 서북에서 대요하를 건넜는데 이 대요하가 한나라 시대는 강이 아니고 바다의 열구였을 것으로 고려되므로, 한나라 시대는 요동군에서 낙랑군 조선현을 돌아서 심양 서북에서 강을 건너 요양으로 갔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계산하면 금주시에서 북진까지 180리, 북진에서 양식목하 건너 거류하진까지 220리였다. 거류하진에서 조선성까지는 34km로서 70리에 해당하고 여기서 심양까지는 55km, 즉 110리에 해당한다. 심양서 요양까지는 120리다. 도합 700리다. 이는 한나라 시대의 1170리에 해당한다. 여기서 230리를 더가면 요즘 거리로는 140리이므로 해성시에 이른다. 해성시에는 패수 또는 어니하(於泥河)가 있었는데 낙하(樂河)에서 유래된 말일 수가 있다. 낙을 중국식으로 유로 발음하고 어를 역시 중국식으로 유로 발음하면 같아진다. 따라서 후한시대 낙랑군 낙도현은 오늘날의 해성시로 추정된다.

동시에 위나라 명제가 237년에 공손탁의 요동군 몰래 바다를 건너 낙랑군과 대방군을 밀파하여 세웠는데, 그 낙랑군이 해성시였을 가능성이 높다.

새로운 대방군은 그 서남쪽 대석교시 부근이었을 것이다.

즉 후한시대 낙랑군 낙도현은 요동군에서 1400리로서 해성시에 해당한다.

 

임둔군은 해성시로부터 230여리 즉 70km 남쪽 해안으로 잡으면 개주시 부근으로 고려된다. 

진번군은 낙랑군 조선현으로부터 고려해야 하는데 요동군이던 금주시에서 470리 정도다. 한나라식으로 780리다. 진번군은 요동군에서 3140리 내외이므로 조선현으로부터 정가방에서부터 2360리를 더 가야하는데 동북 방향으로 약 700km다.

이는 흑룡강성 하얼빈을 넘어간다. 그러나 실제로는 낙랑군과 진번군이 이웃하였을 것이므로 당시 1000리인 300km이상 멀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선 위치에서 북부여 수도인 천산진까지가 약 300k다. 또한 천산진은 단군 시대 진번군이었다.

여기서 해모수의 북부여가 해부루에 이르러 동부여로 이주한 것이 고두막한의 졸본부여에게 밀려난 것이 아니라, 한사군의 점거 때문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한사군과 동이 제민족 지도는 아래와 같다.

지도8

 

3. 한나라 현도군 압록강

 

여기서 한사군의 현도군과 요동군을 지나는 압록강이 현재의 압록강이라는 주장이 잘못된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증거 24가지를 밝힌다.

 

1. 첫 번째 증거 [신당서-고구려전]

 

고구려의 강역을 기록한 [신당서新唐書-고구려전高麗傳]의 앞머리는 다음과 같다.

 

고려는 부여별종으로서 동쪽으로는 바다 건너 신라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바다 건너 백제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요수 건너 영주에 이르고, 북으로는 말갈에 접했다.

그 왕은 평양성에 사는데 장안성이라고도 하며 한나라 낙랑군지다. 당나라 장안에서 오천리다.
평양성은 산을 따라 굴곡하고 남쪽으로는 패수에 임하고 왕은 패수 북쪽에 산다.
별도로서 국내성國內城과 한성漢城도 있다. 강물은 대요수, 소요수가 있는데 대요수는 말갈 서쪽 남산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안시성을 지난다.

소요수는 요산 서쪽에서 나와서 역시 남쪽으로 흐른다. 양수가 새외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요수와 합친다.

마자수가 말갈 백산에서 나오는데 오리머리처럼 희어서 압록수라고 부르며 국내성 서쪽을 지나서 염난수와 합치고 서남쪽으로 안시를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평양은 압록수 동남쪽에 있으며 강을 큰 배巨로 건너니 압록강은 믿을만한 방어선이다.

 

高麗,本扶餘別種也。地東跨海距新羅,南亦跨海距百濟,西北度遼水與營州接,北靺鞨。其君居平壤城,亦謂長安城,漢樂浪郡也,去京師五千里而贏,隨山

屈繚爲郛,南涯浿水,王築宮其左。又有國內城、漢城,號別都。水有大遼、少遼:大遼出靺鞨西南山,南歷安市城;少遼出遼山西,亦南流,有梁水出塞外,西行與之合。有馬訾水出靺鞨之白山,色若鴨頭,號鴨淥水,歷國內城西,與鹽難水合,又西南至安市,入於海。而平壤在鴨淥東南,以巨艫濟人,因恃以爲塹。

 

고구려 강역을 확정하기 위해 먼저 대요수大遼水를 찾는다.

[수경水徑]에서 백랑수白浪水와 요수遼水는 요동군 방현房縣 동남쪽에서 서로 합쳐서
안시
安市를 지나서 바다로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도9
압록강은 구려하였고 대요수와 함께 안시 서쪽에서 바다로 나갔고 대요수는 백랑수와 하류에서 합쳤다.

 

백랑수白浪水는 현재의 대릉하大凌河이고, 과거 대릉하와 대요수가 만나던 물길은 현재 고릉하古凌河라고 부른다.

그러면 고릉하와 대요수가 만나는 곳을 고대의 요동군 방현房縣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구방자진溝幇子鎭이 그 흔적이다.

요동군 안시현安市縣은 그 하류 해안이므로 지금의 반산현盤山縣 위치다.

 

그런데 이 안시현, 오늘날의 반산을 통해서 고구려 압록강鴨綠江이 바다로 나갔다.
즉 신의주에서 바다로 나가는 조선의 압록강은 한사군의 요동군 압록강도, 고구려 압록강도 아니었던 것이다.
대신에 지금의 대요하遼河가 고구려 압록강이었다.

 

[전한서]의 마자수압록강馬訾水鴨綠江은 “현도군玄菟郡-서개마현”을 지나 국내성을 지나 염난수와 합치고 “요동군 서안평현”으로 바다에 나왔는데 [신당서]에서는 더 남쪽의 “요동군 안시현(반산)”으로 나왔다. 바다가 육지로 파고들어온 열구裂口가 수백년의 퇴적작용으로 점점 메워진 것이다.

 

2. 두 번째 증거 [호종동순일록]

 

그런데 앞의 [신당서]를 다시 보니까  마자수압록강이 말갈백산 “馬訾水 出靺鞨之白山”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백산은 당연히 우리 민족의 성산 백두산白頭山이 아니냐 싶고,또 대요수는 말갈 서남산 “大遼 出靺鞨西南山”에서 나왔는데 이 대요수의 발원지 말갈도 상식적으로 위치가 이상하다고 질문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오해다.

청나라 강희제가 동쪽으로 순행했을 때 지금의 대요하遼河 설명을 본다. 당시 기록인 [호종동순일록扈從東巡日錄]이라는 책에 나온다.

강희제가 북경北京을 떠나와 요하遼河에 머물렀는데, 요하는 구려하라고도 부르고 요하의 서쪽은 요서遼西, 요하의 동쪽은 요동遼東이며, 원래 말갈 북쪽의 여러 산에서 나오고 도산을 지나 홍주의 애두 우가장에서 양방구梁房口(지금의 태자하와 합치는 곳)를 통해 바다로 들어간다.

駐蹕, 又名 句麗河 西爲 遼西 東爲 遼東 -句麗河-源出 靺鞨 北 諸山中 經 塗山 止洪州 崖頭 牛家莊 出梁房口 入海

 

즉 여기서 요즘의 대요하도 말갈靺鞨 북쪽의 여러 산에서 흘러나온다고 했던 것이다.

다만 바다로 들어가는 곳은 안시가 아니라 양방구로 바뀌었다. 한나라로부터 2000년이 지나니, 대릉하와 만나 삼각주 서쪽에서 바다로 들어가던 요하가 슬며시? 짝을 바꾸어서 태자하와 만나 동쪽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다. 강 하구 삼각주의 서편에서 동편으로 옮겨간 것이다.

 

 

강희제때는 요하가 고구려의 구려하句麗河라고 했다. 고구려는 지금 대요하에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현도군 고구려현 옆인 서개마현에서 출발한 마자수압록강이 이렇게 구려하가 되어 흐르는데 마자수압록강이 지금의 대요하 가지가 아닐 수 없다.  대요수도 압록강도 똑같이 말갈에서 나오고

대요하가 구려하였고 마자수압록강을 포함한다.

마자수 압록강이 발원하는 말갈 백산은 위에 실린 지도에서 현도군 북쪽의 산(현재 이름, 우란무두산烏蘭木頭山)이고 대요수가 발원하는 말갈 서남산은 현도군 동남의 산(현재 이름, 차할산察哈爾山)이다.

 

3. 세 번째 증거 [삼국유사]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구려가 도읍한 안시는 요수 북쪽이며, 다른말로 압록이라고도 불렀다.

麗時都 安市城 在 遼水之北 遼水一名 鴨淥

요나라 요수가 고구려 압록강이고 본래 구려하다....

고려승 일연이 고구려 압록강이 요나라 요하遼河라고 알고 있었는데 아마 김부식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김부식이 고구려 발생지를 지금의 요하 서쪽 의무려산 부근이라 한 것이다.

 


4. 네 번째 증거 [원사/지리지]

 

[원사元史-지리지地理志] 동녕로東寧路의 설명은 아래와 같다.

"고구려 평양성이자, 장안성은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운 낙랑 땅이다. 장수왕이 처음으로 평양에 도읍하여 살았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쳐서 평양을 뽑아버리니 고구려가 동쪽으로 이주하여

압록수 동남 천여리로 옮겨가니, 대동강의 평양은 옛 평양이 아니다."

唐征高麗拔平壤 其國東徒 在鴨淥水之東南千餘里 非平壤之舊

 

따라서 장수왕의 평양성과 압록강은 현재 대동강 평양의 서북 천리에 있다.

668년 고구려가 망하고, 700년에 당나라가 다시 보낸 고구려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高德武가 후고구려를 다시 세워서 동남쪽으로 옮겨가서 120년간 도읍한 곳이 지금 대동강 평양이다.

 

 

 

5. 다섯 번째 증거 [자치통감]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하면 당태종의 침공 때에 개전 초반에 장량張亮이 해군으로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했다.

비사성은 사면이 절벽이나 오직 서문으로 오를 수 있었는데 其城 四面懸絶...唯西門可上

정명진이 밤에 군사를 이끌고 가고, 왕대도가 먼저 올라서 5월 기사일에 함락시켰다.

程名振引兵夜至,副總管 王大度 先登, 5月己巳 拔之

총관 구효충에게 군사를 따로 주어서 압록수에 불을 환하게 밝히도록 했다.分遣 總管丘孝忠 等 燿兵 於鴨淥水

 

비사성卑沙城이 대련大連의 대흑산산성大黑山山城이라고 1537년 [요동지遼東志]에서부터 주장해왔다.

 

그러면 비사성을 함락한 날 그 밤에 압록강에 불 밝힐 수 있겠는가? 아니다.

비사성은 대련반도가 절대 아니다.  그러면 지금의 압록강인가? 군신들이 안시성에서 당태종에게 말하기를 장량張亮의 수군 군대는 사성沙城에 있으니, 부르면 이틀밤信宿(兩夜)에 올 것이라고 했다. 지금의 대요하 하구의 안시성에서부터 사성의 장량을 부르러 가고 응답하여서 군대가 정비하여 배타고 오는데 단 이틀이면 되는 압록강은 결코 지금의 압록강이 될 수 없으니 응당 지금의 요하遼河다.

 

 


6. 여섯 번째 증거  "비사목장비"

 

청나라는 요양시遼陽市에 팔기목장八旗牧場을 두었다. 그 팔기목장 중 하나인 요양시 태자하구太子河區 소기가공사小祁家公社 방쌍수자芳雙樹子 하리하목장蛤蜊河牧場에서 3쾌석비三快石碑가 나왔고, 그중 제1쾌 목장비弟1快 牧場碑에서는

“비사목장 세세거민 영위자뢰 ; 俾斯牧場 世世居民 永爲資賴”라고 했는데

이는 1775년에 기록된 것으로서 “비사목장은 백성들이 세세히 살아온 곳이지만...이제 팔기목장 설치하니까 출입하지 마라”는 팔기목장 설치 포고문이었다. 요양시 서쪽 태자하 강안에 대대로 비사목장이 내려왔던 것이다.

 

비사성과 달리 고구려 사비성沙卑城은 옥저성이 있던 발해 남해부성이었다. 요나라는 해주海州라고 했고 심양시 동쪽 무순撫順市에 있었고,

해주가 관할하는 요주耀州가 해주 서남 200리에 있었는데, 이 사령 삼한고성의 남쪽에 요주성耀州城이 남아있다.

따라서 장량의 붉 밝히는 비사성의 요병燿兵에서 요나라 요주耀州가 비롯되는 것이다.

비사성의 비사가 빛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빛성이다.

사비성은 새비사성, 새빛성일 것이다. 사비성은 발해 옥주였고 요나라 해주가 되었다. 비사성은 발해 초주椒州였고 요나라 요주耀州가 되었고 지금의 요하遼河에 있었는데 그 요하를 당나라는 압록강이라고 불렀다.

 


7. 일곱 번째 증거 / 요사[태조기/식화지]
915년 요나라 태조가 압록강에 가니 고려가 사자를 보내서 보검을 받쳤다.
915년 冬十月戊申,鉤魚於鴨淥江。新羅遣使貢方物,高麗遣使進寶劍,吳越王錢鏐遣滕彥休來貢。

 

현재의 압록강은 요나라 성종의 고려정벌 때에 처음 가서 지금 압록강에 개주를 설치한다.

 

요사 식화지 기록에 보면 916년에 요나라는 요하 동쪽의 발해 요양성을 차지한다.

神冊初,平渤海,得廣州,[三]本渤海鐵利府,改曰鐵利州,地亦多鐵.

東平縣本漢襄平縣故地,產鐵礦,置採煉者三百戶,隨賦供納.

그래서 광주를 얻는데 지금 요양의 서북방이다. 태조는 철리주라고 했고 요나라 성종이 광주로 개명합니다.

동평현은 개원시 남쪽입니다. 요서의 양평현 대장장이들을 전쟁터로 데려간 것인데 그 위치가 개원이다.

(요사지리지 동주 진안군 동평현조 참조)

즉 916년에 현재의 요하를 건너오기 전에 915년의 압록강은 요양 서쪽입니다. 

요나라는 918년에 태조가 처음으로 요양고성에 가고 동평군성을 짓게 한다.

神策 三年 冬十二月庚子朔,幸遼陽故城

四年春正 二月丙寅,修遼陽故城,以漢民、渤海戶實之,改為東平郡,置防禦使。

夏五月庚辰,至自東平郡。

요양고성을 고치고 한인과 발해인을 살게 하면 동평군이라고 이름을 고치고 뒤에 남경이라고 고치며 다시 동경이라 부른다.

 

8. 여덟 번째 증거[전요지]

 

요양시遼陽市 수산手山 남쪽 7리에 경관京觀이 있었다.[전요지全遼志]의 4권 고적편에 이 경관京觀에 대하여 요동국을 토벌한 진나라 황제인 사마의司馬懿가 만들고 당나라가 훼손했다고 적었다. 위나라 장수 사마의가 도망치던 요동국왕 공손연을 목 베고 나서 요동성 안에 들어가서 성민 7천명을 학살하고 만든 시체탑인 경관京觀을 당나라 사람이 훼손할 이유는 없고 그 시체탑을 당나라가 훼손했다는 기록도 없다.

 

수나라가 살수 대첩을 당하기 직전에, 내호아來護兒의 수군이 바다로 들어와서 평양의 나곽羅廓 즉 외성外城 안까지 들어와 약탈하다가 결국 대오가 흩어져서 고구려 복병을 만나서 떼로 죽었다. 그들의 시체를 한데 모아, 고구려 전승비를 세웠던 것이 바로 요양시 수산首山의 경관京觀이고,

당나라 초에 고구려와 서로 화해하면서, 당나라 사자 장손사長孫師가 평양에 들어와 직접 경관을 허물고 수나라 전사자들을 제사 지내주고 돌아갔다.

 

역사 기록에 238년 위나라 장수 사마의가 요동성에 경관을 세웠고, 612년 이후에 고구려가 평양성에 경관을 세웠고, 그리고 당나라 장손사가 경관을 허문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 요양시 수산 경관의 기록을 3세기 위나라 경관으로 보는 것은 절대로 틀린 것이고 7세기 고구려 경관으로 보아야 옳다.

 

9. 아홉 번째 증거[대원일통지]

 

[대원일통지大元一統志]에 의하면 요양시遼陽市 동쪽 30리에 명왕산明王山이 있고 거기에는 동명왕릉東明王陵이 있었다.

 

[대원일통지]는 [거란지契丹志]를 인용하여 부여왕 동명의 묘가 있어서 명왕산이라고 했다. 그리고 고구려왕 동명이라고도 부기했다.

30리 동쪽은 기반산棋盤山(=270m) 위치다.

지금 대동강大同江에 있는 동명왕릉만 오로지 동명왕릉인 줄 알고 있지만 요양시 동쪽 30리에도 동명왕릉이 있었다. 거기 요양시에 고구려 수도도 있었던 것이다. 평원왕의 장안평양성이다.


10. 열 번째 증거 "강이식 장군 원수림"

 

심양시 동쪽 무순시撫順市 살수수薩爾滸水 부근에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姜以式 장군의 묘인 원수림元帥林이 남아있다.

 

강이식 원수림에 남아있던 고구려 석물

 

강이식장군은 수문제의 오만한 국서에 답하여 고구려 군대를 이끌고 산동을 침공하여 수나라를 징벌했고,

수문제가 30만으로 쳐들어오니 이를 요서遼西에서 막아냈고, 그후 수양제가 다시 100만 대군으로 쳐들어왔을 때는 참모총장인 병마도원수를 맡아서 살수대첩을 치러냈으니 그의 휘하에 을지문덕 장군이 있었다.

원수림 역전驛前에 있던 강장군의 원수묘비 비석은 단재 신채호가 기록하였는데 문화혁명 때에 파괴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지금도 원수림에 가면 약간의 석물石物이 남아 있다. 신채호 선생이 보았던 대부분의 유물은 무순의 대형 댐으로 수몰되었을 수도 있지만 일부 남아 있었다.  병마도원수 강장군의 묘가 바로 살수薩水 즉, 혼하渾河를 굽어보는데 당시 고구려 평양성은 살수로부터 멀지 않으니 요양성인 것이다.

고구려 압록수는 살수 서북쪽에 있었다. 그래서 혼하 서북의 대요하遼河가 압록수였던 것이다.

 

 

11. 열한 번째 증거 [발해국기]

 

[발해국기渤海國記] 상편 국통 중 발해무황제 대무예 기록에서는 “시무왕 장서경謚武王 葬西京”이라하여 놀라게 한다.

해석하면 시호를 무왕이라 하고 서경에 장사를 치렀다는 기록이다. 이제까지 어떤 역사 기록에도 없었는데 어찌 대무예황제가 압록강 유역인 발해 서경압록부에 묻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까?

발해 2대 황제 대무예大武藝 묘비가 1900년 무렵에 흥경興京에서 발굴되어 사람들이 모여 그의 묘비문을 탁본하여 읽어보니 그를 발해 서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었었다고 전한다.

흥경興京이었던 무순시撫順市 신빈현新濱縣은 발해 압록부鴨淥府 소속이었고 이는 압록강의 가지변이 되어야 맞는데, 지금의 대요하遼河로 들어가는 물이고 대요하가 발해 압록강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묘는 신빈현 노성老城 안쪽 홀한정忽罕井 옆 사당 부근일 수도 있다.

 

12. 열두 번째 증거[신당서-도리기] 1

 

다음은 [신당서-도리기道里記] 발해 기록이다.

“압록강구에서 배를 타고 백여리를 올라서 다시 배를 갈아타고 삼십리를 가면 박작구이고, 발해 국경이며, 여기서 오백리를 올라가면 구도현성이고 고려 때 왕도였다. 구도현성에서 다시 이백리를 가면 신주다.

신주에서 육로로 사백리를 가면 현주이고 천보때 발해 수도다. 여기서 정북여동으로 600리를 가면 발해 왕성이다.”

道里記/ 自鴨淥江口 舟行百餘里 乃小舫 泝流 東北三十里 至泊汋口  得渤海之境, 又 泝流 五百里 至 九都縣城, 故高麗王都 又 東北泝流 二百里 至神州 又 陸行 四百里 至顯州 天寶中王所都  又 正北如東 六百里 至 渤海王城.  

 

그동안 이 압록강을 지금의 압록강으로 해석해 왔고, 압록강 집안集安에서 육로로 400리를 가면 대충 길림吉林 화전현樺甸縣 소밀성蘇密城인데, 이 소밀성을 발해 초기 왕도인 현주顯州라고 왜곡해왔다.

지도10 [신당서-도리기]에 의한 발해 여행로, 개원 동북 현주, 요하투 북 현주 참조

신주神州는 [요사-지리지]에서 녹주淥州로 바뀌었고, 고려고국故國이며 발해 압록부 서경성西京城인데 성둘레가 이십리라고 하였다.
淥州,鸭淥軍,節度。本高麗故国,渤海號 西京鸭淥府。
城高三丈,廣輪二十里 石城 都督 神、桓、丰、正 四州

 

그런데 집안 근처에는 고작 7000m인 산성이 남아있는데 그나마 환도성이란다.
아무튼 여기서부터 200리 물길 위에 임강臨江이라는 곳에 압록부 서경성, 광륜 20리 대성은 흔적도 없다.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는데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고구려가 그 안에 마구 꾸겨져 넣어졌다.

그런 광륜 20리의 거대 석성이 지금 압록강 임강에 흔적도 없다는 사실이 바로 고구려, 발해 압록수가 지금 압록강이 아니라는 증거다. 그 벽촌에 세워졌던 20리 거대 석성이 도시 개발도 없었는데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없다.

 

 

13. 열세 번째 증거 [호종동순일록] 2

 

강희제 때의 [호종동순일록扈從東巡日錄]에 의하면

“금나라 태조 아골타가 영강주寧江州에서 파자간산婆刺赶山을 지나 달로고성達魯古城을 지나 요나라 황룡부黃龍府(즉 장춘시長春市 농안현성農安縣城)에 이른다. 그리하여 마침내 현주를 차지했다遂克 顯州“라고 기록하였다.

 

금나라 장수가 황룡부黃龍府성을 함락하고서 요나라 현주顯州를 함락시킨 것은 2년 뒤의 일이다.
따라서 위 문장의 현주는 요나라 현주가 아니라 발해 현주다.

 

현주顯州는 당나라 천보 때의 발해 왕도다. 열한 번째 증거 [신당서-도리기]에 의하면 압록강 상류의 신주에서 육로로 400리다.

이제까지는 현재의 압록강을 기준으로 보이지 않는 성, 임강의 신주에서 북으로 400리의 화전현 소밀성으로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호종동순일록]에서는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행적을 인용하여서 발해 현주가 장춘시長春市 농안현성農安縣城 부근으로 기록된 것이다.

발해 현주성의 실상은 장춘시 장춘역 북쪽 관성구에 있는 관성자寬城子다.

 

 

14. 열네 번째 증거 [유변기략]

 

청나라 양빈楊賓이 지은 [유변기략柳邊紀略 卷1]에서

“요하투는 개원의 서북에 있고 구현주의 남쪽에 있다. 遼河套 在開原西北 舊顯州城下”라고 하였다.

 

요하투遼河套는 요하의 만곡부彎曲部를 의미한다. (투套: 河流 或山脈 轉折 彎曲的地方。하투河套; 황하의 만곡부, 음산산맥 아래..).

 

요하투는 지금 동요하가 이수현梨水縣을 통과하는 만곡부다.

이 부위를 개원開原의 서북이라 한 것이 맞는데, 동시에 또 구현주舊顯州의 남쪽이라 한 것이다.

 

구현주는 발해 신주에서 400리 육로 거리로서 천보 때 발해 초기 왕도이기도 하다.  훗날의 발해 중경성은 장춘시 관성자로서 노주(盧州)로 고려되고 그 이전의 발해 중경성 현주는 별도일 것이다. 왜냐하면 장춘시는 송화강 아래에 있고 요하투 북쪽이라고 보기 어렵다.

 

 

 

15.  열다섯 번째 증거 [요기]

명나라 때 전여성田汝成이 지은 [요기遼紀]에서 서기 1448년, 정통正統13년조에 개원開原에서 동북쪽으로 평정산平頂山 안中에 현주폐성顯州廢城, 요나라 때 중경中京이 있다고 하였다.

開原 東北 平頂山中 有 顯州廢城者 遼時中京也..肥饒之地 不下萬頃...遼河套

 

개원의 동북방에 발해 현주성이 있었다. 노주 중경성이 세워지기 중경이기도 했다. 개원 동남방의 길림시 화전현 소밀성은 발해 중경이 절대 아니다.

요나라 중경은 적봉시赤峯市 녕성寗城이고, 또 현주顯州도 아니므로 여기서 말한 중경은 발해 중경 현덕부 현주가 옳다.

 

 

16. 열여섯 번째 증거 [전요비고]

 

역시 청나라 때의 [전요비고全遼備考]에도 요하투에 관하여 같은 글이 있다.

 

요하투는 개원 서북에 있고 구 현주성 아래에 있으며 물은 달고 흙은 후덕하고 평야가 바다보다 작지 않다.

套 在開原西北 舊顯州城下 水甘土厚 平地 不下萬頃...

 

앞에 12, 13, 14를 종합하면

발해 중경 현덕부 현주는 영강주혼동군이었던 대파고성의 남쪽에 있고, 요하투의 북쪽에 있고, 그리고 개원의 동북방에 있다.

발해 첫 번째 중경성, 옛 현주성은 동요하 요하투 유역이면서 평정산平頂山 안에 있다. 동요하 유역의 평정산을 고려하면 이는 공주령시 쌍성자진과 연화산진 사이에 있는 구릉산으로 고려된다. 여기서 송화강의 가지와 동요하의 가지가 각각 발원한다.

쌍성자진 가까이에 대조양보大朝陽堡가 남아 있는데 이는 평정산중에 세워진 현주 홀한성에 연결된 마을로 고려된다.

 

대조영의 사후에 새로 지은 발해 중경성은 발해중경현덕부의 첫 번째 수주首州인 노주盧州로서 장춘시長春市 관성자寬城子다.

지금 장춘시 관성자역 북쪽에 있던 관성자성은 성둘레가 남북 4리, 동서 7리로 기록되었다. 성둘레가 무려 22리다.

요나라 상경임황부가 27리, 금나라 상경이 21.5리, 그리고 영안현 동경성의 성둘레가 28리다.

 

 

 

17. 열일곱 번째 증거 [금사-태조기]

 

[금사/태조기太祖紀]의 건국기를 보면,

금나라 태조 아골타가 처음 거병을 하였을 때, 영강주寧江州는 발해 대씨大氏 소유였는데, 영강주 사람 발해대가노渤海大家奴가 달로고부로부터 아골타를 찾아와서 보고 말하기를 “요나라를 치려고 아골타가 거병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왔는데, 우리는 누구를 따라야 할까?”물으니

태조가 대답하기를 “내 군사가 비록 적지만 (발해) 구국 땅에서 우리 여진과 너희 발해족은 이웃이었다. 마땅히 나를 따르라. 만일 요나라를 따르면 내가 가서 영강주를 치겠다.”고 말했다.

寧江州渤海大家奴 於是達魯古部實裡館來告曰 聞舉兵伐遼,我部誰從?

太祖曰 吾兵雖少 舊國也. 與汝鄰境 固當從我. 若畏遼人 自往就之.

이 직후에 발해 대가노는 아골타의 신하가 되었다. 그러나 영강주 성주 발해인 대약사노大藥師奴는 항복하지 않았다. 아골타는 한달만에 영강주를 쳐서 영강성주인 방어사防禦使 발해인 대약사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대약사노를 용서하고 풀어주면서 금나라 태조 아골타는 발해와 여진족은 본동일가本同一家라 회유하고 여타의 발해인들도 회유하고 우대하였다. 금나라 4대 황제인 해릉왕의 모후가 발해인이었다.

[신당서-도리기]에서 발해 현주, 즉 공주령시 회덕진으로부터 600리 동북에 발해 상경이 있었고, [신당서-발해전]에서는 발해 상경으로부터 300리 남쪽에 발해 구국이 있었다.

 

이때,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입으로 영강주寧江州가 발해 구국舊國이라고 말하고 기록된 것이다.

영강주는 [호종동순일록]에서 길림시吉林市 오라고성烏拉古城에서 80리 물길인데 장춘시長春市 유수현楡樹縣 대파진大坡鎭 대파고성大坡古城이다.

발해 중경 노주와 발해 구국이 모두 장춘시에 있다. 숙신고지肅愼故地가 장춘시라고 장춘시는 주장한다.

발해 현주는 공주령시 연화산진 동북 산성이다. 고구려, 발해 압록수는 바로 그 남쪽에 있다.

 

 

발해 구국 터인 대파고성 부근에서는 돈화현의 육정산 고분보다 100년 빠른 발해 초기 고분이 대량 발굴되었다. 물론 전한시대 숙신肅愼 고분도 발견되었다. 발해고지가 숙신고지였으니 당연하다.

발해 중경을 길림 남쪽 소밀성으로 보고, 발해 구국을 길림 동남쪽 돈화현 오동성으로 규정한 발해사는 다 헛것이다.

 

 

 

18. 열여덟 번째 증거 [신당서-도리기] 2

 

지도11  당나라 해로도 및 압록강변 발해 주군현

고구려 압록강이 지금 압록강이 아니라 요하遼河였으면 현재 압록강은 발해 때 무엇이었는가? 오골강烏骨江이라고 했다.

 

[신당서]에 실린 고탐賈耽의 <도리기>를 본다. 

“산동반도 등주登州에서 배를 타고 북으로 오백리를 가면 도리진都里鎭이고, 다시 동쪽으로 연안을 따라 800리를 가면 오골강이 나온다.”

登州, 東北海行 過 大謝島,龜歆島,淤島,烏湖島三百里 北渡烏湖海 至馬石山東之都里鎭二百里. 東方海壖 過靑泥浦,桃花浦,杏花浦,石人汪,橐駝灣,烏骨江 八百里

 

도리진은 대련大蓮이고 지금 압록강은 고구려 오골강烏骨江이었다. 그러나 오골강도 나중에 역시 압록강이라고도 했다.

서요하西遼河 압록수와 구별하여 동압록東鴨淥이라고도 칭했다. 

 

지금 중국에서 고구려 졸본성이라고 지정한 환인桓仁의 오녀산성烏女山城은 본래 오리고산烏爾古山이라고 했는데, 고구려 오골강烏骨江의 오골성烏骨城이었던 것이다. 고려말에 이성계가 이 오고성을 정벌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있다. 

 

 

19. 열아홉 번째 증거 [요사/지리지]

 

고구려 압록강이 지금 압록강이 아니라 요하였으면 현재 압록강 주변은 발해 때 무엇이었는가?

[요사/지리지]에 의하면 요나라는 지금 압록강 북쪽에는 개주開州, 남쪽에는 염주鹽州를 두었다.

 

지금 단동丹東의 봉황성鳳凰城에 요나라는 개주開州와 개원현開遠縣을 두었는데, 발해의 동경용원부 경주慶州의 이름을 차용하려다가 개주로 고쳐 부른 것이며 경주 부속현이 용원현을 개주 개원현으로 고치기도 했는데 아무튼 이름만 빌린 것이다.

 

개주開州의 속주 3주를 보면 이름만 빌린 것이 확실하다.개주의 속주는 염주鹽州와 목주穆州, 하주賀州 셋이다.

[요사-지리지] 염주鹽州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염주는 본래 발해 용하군이고 해양, 접해, 격천, 용하 4현이 있었는데 다 폐지하였고 개주와 140리다.

鹽州 本 渤海龍河郡, 故縣四 海洋, 接海, 格川, 龍河 皆廢 隸開州 相去 一百四十里

 

두만강가의 발해 염주에는 해양, 접해, 격천, 용하 등 4현이 있었는데, 요나라가 발해 염주 이름을 가져다가 압록강의 발해 용하군에 설치했는데, 발해 용하군에는 해양, 접해, 격천, 용하현이 있었지만 다 없앴다.

즉, 요나라 염주는 본래 발해 용하군龍河郡이었으며 해양海洋, 접해接海, 격천格川, 용하龍河 등 4현을 두었었는데 폐지하였고, 개주와는 140리이다.

용하군은 지금 북한의 용천군龍川郡이 되었는데 용천역에서 대폭발 사고가 일어났었다. 이 용천군 동남방에 염주鹽州가 남아있다.

 

다음 목주穆州의 설명을 본다.요나라 목주穆州는 본래 발해 회농군會農郡이며 회농會農, 수기水岐, 순화順化, 미현美縣등 발해 4현이 있었으나

모두 폐지하였다. 동북으로 개주까지 120리이며 회농현 하나로 통일하였다.

穆州,保和軍,刺史。本渤海會農郡,故縣四:會農、水歧、順化、美縣,皆廢。户三百。隸開州。東北至開州一百二十里。統縣一:會農縣。

발해 회농군의 위치는 개주 서남 120리로서 단동시丹東市 동구현東溝縣 고산진孤山鎭으로 추정된다.

 

 

다음 하주賀州의 설명을 본다.

요나라 하주賀州는 본래 발해 길리군吉理郡이며 홍하洪賀, 송성送城, 길리吉理, 석산石山 등 4현인데 모두 폐지하였다.

賀州,刺史。本渤海 吉理郡,故縣四:洪賀、送城、吉理、石山,皆廢。户三百。隸開州。

단, [거란지리도契丹地理圖]에서는 하주가 아니라 길주吉州라고 표시하였고 압록강 남쪽이다. 평안북도 초산군 동남에 송성고성이 있었다.

 

 

단동시가 현재 사학계의 주장대로 한나라 요동군 서안평현西安平縣이었다는 왜곡 역사 소설을 뒷받침할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한편 발해는 62주와 천정군泉井郡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여기저기서 더 많은 주와 군이 발견된다.
이는 발해 12대 대인수황제 때의 공적이다.

 

발해 남해부가 요양시遼陽市 북쪽까지 있었고, 요양시 동남쪽, 본계시 부근은 발해 삼로군杉盧郡이 있었다.

요나라 노주盧州는 발해 중경 노주의 이름만 빌려서, 발해 삼로군杉盧郡 위치에 두었고 삼로군에 발해는 5현을 두었는데, 산양현山陽縣, 삼로현杉盧縣, 한양현漢陽縣, 백암현白巖縣, 상암현霜巖縣 등이다.

요나라 노주는 재경 동쪽 130리에 있다. 이 발해 삼로군의 흔적이 본계시本溪市 삼송산성杉松山城이다.

본本을 한으로 읽는 것이 부여식 혹은 일본식이다. (日本 ; 니혼!!!    본 → 한 汗,    고구려 홀본 忽本 → 발해 홀한성 忽汗城)

그래서 본계本溪에 흐르는 강이 역시 한수여서 거기 삼로군에는 한양현이 있었다.

 

지금의 압록강 유역에는 발해 용하군, 길리군, 회농군 등이 있었다.

이는 818년 당나라에 조공한 고덕무의 [후고구려]가 본계시부터 대동강까지 자리했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819년경에 대인수 황제가 이 고덕무 후고구려를 병탄하여 임진강까지 확보하고서, 그때 새로 발해 군현이 설치되는 것이다.

 

특히 단동 봉황성은 성둘레가 10000m에 달하는데, 만주에서 제일 큰 산성山城이다. 평지성까지 치면 5위 정도다. 그러나 그렇게 성이 큰 데도 불구하고, 고구려 수도가 여기 있었던 적이 없다. 그렇다면 당나라 안동도호부 도독으로 임명받아 자립하였던 고덕무의 후고구려(699~820년) 때에 도성으로서 건설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713년 당나라가 고려대수령高麗大首領으로 인정한 고정전高定傳은 그 고덕무의 후예다. 당나라 사자 최흔은 대련 땅을 가졌던 고정전의 후고구려를 거쳐서 발해에 들어가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하고 돌아간 것이 된다.  

 

 

20. 스무번째 증거 “관구검기공비”

지도12  매구곡과 회발성, 관구검 기공비와 환도성

길림성吉林省 집안集安 판석령 板石嶺에서 발견된 관구검기공비毌丘儉紀功碑는 유주자사 관구검의 비장들이 환도성에서 동천왕을 쫓아 천리를 더 추격하여 옥저를 지나 숙신지계肅愼之界에 세운 것이었다.

 

[삼국지-위지-관구검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245년 양구대전大戰梁口(新民市)에서 승리하여 동천왕 위궁이 패주하자 위나라 장수 관구검은 환도산성에 올랐다. 수천명의 목을 쳤다.

동천왕 위궁은 홀로 도망쳤다. 관구검은 군사를 돌렸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동천왕이 압록원鴨淥原으로 도주하였고 관구검이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도륙하였고,현도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가 동천왕을 추격하니 동천왕은 남옥저로 피했다.

246년 관구검은 다시 고구려를 쳤다. 동천왕은 북옥저인 매구買溝(吉林 梅河口市)로 도망쳤다.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를 시켜 추격시켜서 옥저 천여리를 지나 숙신지계肅愼之界에 달하여 각석기공刻石記功하였다.

또한 환도산에 돌아와 又到丸都山 불내성名不耐之城이라고 새기고 돌아왔다.

 

<儉>使將軍<王頎>追之, 絶<沃沮>千餘里, 到<肅愼>南界, 刻石紀功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還. 其後, 復通<中夏>

 

<동옥저전>에서는 숙신지계가 아니라 옥저동계라고 하였다.

<毌丘儉>遣<王頎>追<句驪王><宮>, 窮<沃沮>東界

 

양구에서 패한 동천왕은 압록원을 거쳐 옥저로 도망갔고, 양구에서 이긴 관구검은 환도산에 오르고 또 부하를 옥저로 보내 천리나 추격하게 하였고

부하들은 압록강 환도성 천리밖 숙신지계에 관구검기공비를 세웠고 환도에 돌아와 불내성이라고 새겼다.

 

그런데 중국인들이 저들의 옛말인 중국말을 바로 읽지 못해서 압록강 “환도성”에서 무려 천리나 추격하여 “숙신지계肅愼之界”에 세워진 “관구검기공비”가 발견되자 이를 천연덕스럽게 고구려 “환도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나라 사학자들도 그대로 앵무새처럼 따라하고 있다.

분명히 네 글자로 숙신지계肅愼之界 혹은 옥저지계沃沮之界 라고 적었는데 이것을 “환 도 성” 이렇게 세 글자로만 읽어대니 한심하다.

 

 

21. 스물한 번째 증거 [요사 / 아고지전]

[요사/아고지전阿古只傳]은 다음과 같다.

 

요나라 장수 아고지阿古只는 북부재상이었고, 요태조를 따라서 발해 함락전쟁에 참여하여서 발해 부여성을 함락하고, 발해 노상의 삼만 군대를 기병 오백으로 앞장서서 무찔렀고, 발해를 멸망시켜 동단국으로 바꾸고서 발해의 도적들이 일어나니, 아고지는 강묵기康黙記와 토벌에 나서서 발해 압록부에서 온 유민 기병대 칠천과 만나서 한번 대전에 무찌르고 이천의 수급을 벤 후에 추격하고 진군하여 회발성回跋城을 깨트렸다.

 

阿古只,以功拜北府宰相,攻渤海,破扶余城,独將騎兵五百,敗老相軍三万。渤海既平,改東丹国。頃之,已降郡縣復叛,盗賊蜂起。阿古只与

康默記討之,所向披靡。会賊游騎七千自鸭淥府來援,勢張甚。阿古只師 魔下精銳,直犯其鋒,一戰克之,斬馘二千余,遂進軍破回跋城。

 

 

회발성은 매하구시梅河口市 동쪽 휘남현輝南縣의 휘발성輝發城이 확증되어있다. 압록부 압록강에서 나와서 쫓긴 발해 기병대가 휘발성에 피신했다가 그나마 파해된 것이다. 압록부가 만일 집안이라면 휘남에서 거기 집안의 제 집까지 물러가 내려가서 숨고 방어할 일이다. 그러나 압록부가 요하였기 때문에 거기서 밀려서 동쪽으로 피신한 발해 기병은 더 갈 곳이 없어서  휘발성에서 싸우다 옥쇄한 것이다. 그래서 발해 압록부는 휘발성의 서쪽 지금의 요하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요사/영위지營衛志]에서 휘발성이 있던 회발부回跋府와 오고부烏古府(=환인현桓仁縣 오녀산성烏女山城)와 장백산長白山府는 회홀부回鶻府와 같이 “외십부外十府”로서 요나라 직할이 아닌 토착 수령들의 독립적인 부府가 되었다. 그런데 압록부 환주, 신주 성들은 요나라 직할이다.
즉 압록부가 환인현의 오고성이나 매하구시의 회홀성보다 요나라 내지에 가까운 서북쪽이었던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동천왕이 도망친 매구여, 즉 매하구시는 대무신왕 때 복속했는데, 주몽에게 이미 망한 북옥저가 동쪽으로 이주한 것이다. 이 동천왕이 압록원을 넘어 피신한 매구여와 발해 압록부 기병이 피신한 휘발성은 같은 경로다. 동천왕 때 압록원이 발해 압록부 신주성이 되었었다.

요나라가 고구려를 칠 때에 거란군은 신의주가 아니라 집안 가까운 곳에서 청천강을 타고 쳐내려온 기록이 있었다. 지금 압록강 북쪽의 진강진振江鎭이 금나라 파사부로서 고대로부터 도강의 거점이다. 625 때도 중국인민군이 집안에서 압록강을 넘어 남진해왔다. 역사는 그렇게 자꾸 반복되니 미리 제대로 역사를 알고 올바로 대처해서 침공 길목을 정확하게 막아서 우리 미래를 굳게 지켜야 한다.

 

 

 

22. 스물두 번째 증거 “평양성벽각서”

 

고구려 압록강이 대요하였고 고구려 평양성이 요양에 있었다면 대동강의 평양은 고구려 때 과연 무엇이었는가?

 

대동강 평양에서는 6세기경에 고구려인에 의해서 현재의 평양성이 세워질  당시에 만들어진 “평양성벽 각서刻書”가 발견되었는데, 그 성벽에 평양이라는 말은 전혀 없고 대신에 오로지 “한성漢城”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고구려가 당나라에 항복했던 대동강 평양성은 본래 고구려 한성漢城이었다.

“漢城下 後部小兄...”

 

여기서 “한성하漢城下”는 고구려 한성이 고구려인에 의해 건설 도중에 잠시 백제에게 함락되었던 사실을 의미한다.

506년 백제 무녕왕武寧王 때다.

아니 본래는 백제 북한산성北漢山城이었는데 고구려 광개토왕이 빼앗았다.

이 지역에 살던 백제인들이, 일본에 가서 백제촌을 짓고, 그들의 고분 속에 평양의 밤하늘, 평양의 별자리를 그려 넣었으니, 그것이 일본 나라현奈浪(樂浪의 차자다)의 기토라 고분에서 발굴되었다. 지금 대동강 평양 땅에 한수라고 하고 한성을 짓고 백제인들이 살았던 사실을 모르는 역사학자들이, 일본 백제촌에 고구려 간첩이 스며들어 감히 고분을 만들고 게다가 고구려 하늘 별자리를 그려넣었다고 해석한다.

 

광개토왕이 뺏은 고구려 한성이 본래는 백제 온조왕이 마한馬韓에게서 뺏은 마한의 평양 한성이었고, 그래서 고구려 남평양, 혹은 하평양下平壤(/광개토왕비문)이라고도 했다. 그 남쪽에 근초고왕의 수도 한산성漢山城이 있었다.

[삼국사기-거칠부전居柒夫傳]에서 나제동맹군의 백제가 앞서 나가서 평양성을 쳤다고 했는데 대동강 평양, 즉 하평양이다.

 

장수왕의 침공으로 개로왕이 죽고나니, 공주로 천도한 백제는 지금의 황해도 예성강禮成江에 위례성慰禮城을 다시 만든다. 위례성의 물이 위례성강이고 다시 간단히 줄여서 예성강이다.

예성강 상류는 부여면의 위라천位羅川이다. 부여면 위라천과 예성강을 합치면 위례성慰禮城이 나온다. 현재 남아있는 평산의 태백산성太白山城이 그 위례성인데 충남 부여의 백제 왕궁인 부소산성夫蘇山城과 닮은 꼴로서 매우 유사하다.

또한 백제 대방태수帶方太守 장무이묘張撫夷墓가 황해도 봉산鳳山에서 발굴되었다.

이 대방태수묘는 무녕왕릉武寧王陵과 똑같은 벽돌묘로서 무녕왕릉의 모델이다.

따라서 백제는 서울 한성에 도읍한 사실史實이 없다. 그래서 서울에서는 대규모 백제 고분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벽돌로 지은 고분이 하나도 없다. 물론 사신도 같은 벽화 고분도 없다.

무녕왕武寧王 때에 공주의 백제가 고구려에 반격하여 평양과 백제 한성을 수복한다. 평양성벽각서에 의하면 한성을 쌓던 고구려가 놀라 도망간다.

백제는 이때 평양과 한성을 수복하는데, 평양은 백제의 북한산성이었고 고구려의 한성이었다.

백제 한성은 성천의 홀골산성 즉 첫 번째 위례성慰禮城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평양은 백제고지百濟故地라고 나온다.

지금의 대동강, 즉 백제 한산성의 하늘도 물론 백제 고향 하늘이었다.

 

고구려 광개토왕 이전에는, 백제가 고구려보다 인구가 더 많고 사회가 훨씬 발전되었을 것으로 본다.  특히 요양시, 평양시 벽화 고분을 보면 그렇다. 

 

백제 무녕왕 사후에 안장왕의 고구려 대군이 황해도 오곡五谷, 즉 황해도 복판 서흥瑞興으로 쳐들어온 것은 황해도가 백제 땅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백제 성왕 때에 고구려 도살성道薩城(=황해도 연산군燕山郡 도소면道所面)을 함락시키니, 고구려가 백제 금현성金峴城(=황해도 평산군平山郡 태백산성太白山城, 즉 2차 위례성慰禮城)을 빼앗는 전투가 있었는데 느닷없이 신라 이사부異史夫가 둘 다 빼앗는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는 두 성을 우두방牛頭方(=금천군金川郡)과 니미방尼彌方이라면서 주석했는데 바로 그 위치다. 그리하여 진흥왕의 신라가 예성강禮成江 하구에서 중국과 교통하게 된다.

 

이후 백제 여창餘昌 왕자(=위덕왕)가 552년에 평양을 한번 더 침공하여 고구려군을 동성산으로 쫓는다. 일본에서는 동성산을 대동강 평양의 대성산성으로 풀이하고 있다. 백제 위덕왕 여창은 북제北齊에서 동청주자사東淸州刺史라고 하였다. 동청주는 중국 산동성의 청도시淸島市를 가리키는데 백제의 교두보였다.  백제가 진晉나라 이래로 송나라, 남제국, 양나라 시대까지 백제 해군력으로 양자강 북쪽, 산동성 일대를 장악했었다. 북위北魏는 이 백제 땅을 뺏으려고 489년에 전쟁을 일으켰지만, 백제 동성왕 때에 이를 막아냈다.

고구려 고분이 압록강鴨綠江 집안에 수만 개가 있다. 신라 고분도 수만 개가 경주에 있다. 백제만 그 수만 개의 고분이 없다.

서울 송파에 몇 개...공주에 몇 개...이건 절대로 사실이 아니다...역사가 왜곡 조작된 것이다. 그 잃어버린 수만 개의 백제 고분이 대부분 대동강 평양과 황해도에 있었다. 지금까지 낙랑樂浪 고분으로 알려진 수만개의 고분들이 실상은 백제 고분이었다.

한사군은 한반도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평양성은 언제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을까? 지금 평양의 넓은 부분을 차지하는 외성은 기자정箕子井 제도로서 성안 거리가 세워졌고,

이는 당나라 장안성長安城을 모방한 것이다. 따라서 이 평양성은 당나라 장안성이 만들어진 다음에야 만들어졌고 고구려 평원왕 때 만들어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 보장왕이 당나라 장안성에 끌려갔다가, 다시 안동도호부 도독, 조선군왕으로 요동, 즉 고구려 텃밭에 복귀했었다.

그러나 곧 말갈과 내통한다는 반역의 의심을 받고 소환되어서 죽고 그 다음에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가 다시 안동도호부 도독으로 요동에 오는데, 그는 소환당하지 않고 확실하게 독립해버렸다.그가 당나라 장안에서 이 대동강 한성에 돌아와서 평양이라고 고쳐 부르면서 당나라 장안을 본 따서 평양성을 완성한 것이라고 보면 매우 타당하다. 고덕무의 후고구려는 699년에서 819년까지 무려 120년을 존속했다.

산동반도의 평로치청절도사 이정기의 제국齊國(761~818년)보다 오래다.

 

지금의 단동 봉황산성과 대동강 평양성은 이 “고덕무 후고구려” 시대의 작품이다. 평양 남쪽 정릉사 동명왕묘도 역시 고덕무의 후고구려 때에 지어졌을 것으로 고려된다. 반면에 백제 시조 온조왕이 세운 백제 한수의 동명왕묘는 대동강 동북쪽 온조의 위례성이 있던 성천 홀골산성 부근에 세워졌다.


23. 스물세 번째 증거 “천남산 묘지”

 

천남산泉男産은 연개소문 차자로서, 형 천남생泉男生을 배반하여 대막리지가 되었다가 당나라에 항복했는데 낙양에서 발견된 “천남산 묘지문”에서는

"한성漢城을 지키지 못해 왕의 신물을 가지고 항복해 왔다." 라고 적었다. 漢城不守 貊弓入獻 楛矢來王

즉, 고구려가 패망한 대동강의 마지막 평양성은 본래 고구려 한성이었다.

 

역사 연구는 그 시대에 가장 가까운 시대의 기록과 바로 그 지역의 기록을 우선한다.

고구려의 땅, 그 중에서도 수도를 잃었기 때문에 우리는 고구려 지역의 기록을 거의 갖고 있지 못하다. 500년이나 지난 뒤에 고구려의 귀퉁이 끝에서 쓰여진 고려시대 김부식의 기록, 삼국사기 고구려, 삼국사기 백제는 그래서 신빙성이 적은 것이다. 천남생, 천남산, 천헌성 묘지 등은 고구려 멸망 직후에 쓰여졌고, [삼국사기]보다 무려 500년 전에 쓰여진 것이다.

 

 

24. 스물네 번째 증거 “천남생 묘지”

 

“천남생 묘지泉男生墓誌”에서

천남생의 출생지를 요동군-평양성遼東郡平壤城이라 기록하였다.

이는 대동강의 임시 평양이 된 고구려 한성, 임시 평양과 확실하게 구별한 것이다.

게다가 장수왕이 도읍했던 낙랑군 평양성(=요양시遼陽市)과도 구별이 모호하다. 당시 중국 기록에 요동군을 가진 고구려왕에 대하여 요동왕이라고도 했으니 낙랑군 평양성 고구려왕성이 요동군 평양성이라고 잘못 기록될 수도 있다.

 

본래 하평양성下平壤(/廣開土王碑文)이나 남평양성南平壤城(桓檀古記-高句麗)이라고도 부르던  고구려 한성漢城인 대동강 평양성과 다른 것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서 김유신金庾信은 황해도 수안을 거쳐 평양으로 공격해 가는데 그 평양은 장새현獐塞縣이었던 수안遂安으로부터 거리 36000보步로서 그 기록은 분명 지금의 대동강 평양이다.

 

고구려가 대동강 평양성에서 망했지만, 그 평양성은 본래 고구려 한성이었다면, 언제부터 고구려왕이 대동강 한성에 피난하여 살게 되었을까?

당나라 태종의 645년 침입 이후, 소정방의 고구려 침략이 있던 660년 사이로 추정된다.

 

25. 스물다섯 번째 증거 [명나라 도서 그림]

명나라 초기 지도.

위에 마전도, 고사도, 득물도가 보이는데 이는 [신당서지리지]<도리기>에 나오는 압록강앞의 섬들이다.
又過秦王石橋、麻田島、古寺島、得物島,千里至 鴨綠江唐恩浦口

章潢(1527一1608年),圖書編 권 57.
沙門島解宋寨界 單山縣界 桑島馬停寨界 龜島昌邑縣界 歆末島光界
都里鎭蒲臺界 靑島利津界 黃島州界 直沽口寶低縣界 塔山盧龍衛寨界
南半洋山爲昌黎縣界 計一千二百里,

抵遼東北半. 洋山爲山海衛界 蔬萊島中前所界  牛車島中後所界 孤山中右所界 向陽島羅兒島金州衛界
石灘島左所界東雲島 黃駝島蓋州衛界 屛風山復州衛界 鳳凰山中左所界 女兒河中屯衛右屯衛界
遼河渡古寺島爲廣寧衛界
麻田島
平島爲海州衛界

湯站堡鎭遼所界
臨江義州界計一千三百餘里鴨綠朝鮮界

여아하는 중둔위와 우둔위의 경계이고
요하도와 고사도는 우둔위와 광녕위 경계이고
(우둔위는 대릉하와 고릉하 사이에 있었다. 고릉하는 대릉하와 압록강이 만나던 곳이다. 즉 요동군 방현의 위치)
즉 요하도는 대릉하에 있는 것이다. 수양제의 도요진도 그러했다.
마전도는 광녕위와 해주위계가 되는 것이다.

 

4. 고구려 수당전 요하는 대릉하

고구려 요수가 현재의 대릉하라는 증거 6가지

 

1. 첫 번째 증거 [한서-지리지]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서 요동군 망평현에는 대요수가 새외로부터 와서 남쪽으로 안시로 가서 바다에 들어가는데 물길은 고작 1250리다.

望平; 大遼水 出塞外 南至 安市 入海 行 1250里

 

현재 중국의 10리는 5km지만 한나라 때는 약 3km였다. 당나라 때는 4km 정도 였고 현재 우리나라와 같다. 따라서 당시 대요수는 400km 길이다.

 

전한시대 대요수는 현도군-고구려현을 지나고 요동군-망평현, -양평현, -요대현, -안시현”을 차례로 지난다. 대요수는 말갈 서부 남산에서 나오고 [전한서]에서 물길이 1250리다.  반면에 오늘날의 대요하遼河는 물길만도 3000리 이상이니 절대로 전한시대 대요수가 아니다.

 

이는 지도9에 자세하다.

마자수압록강馬訾水鴨綠江은 오늘날의 류하柳河 즉, 구려하句麗河, 거류하巨流河며 또 구하扣河가 된다.

그중 염난수는 고륜기庫倫旗를 지나는 구하扣河의 북쪽 가지로 고려된다.

 

낙랑군樂浪郡의 물도, 전한시대의 패수浿水는 대요하大遼河이고, 후한시대 패수는 낙도현 아래 작은 물 어니수다.

전한시대 대수帶水는 시하柴河, 열수列水는 범하汎河다.

열수列水는 분려산分黎山이라고 하던 청원현淸原縣 마리홍산摩離紅山(=莫日紅山)에서 비롯되어 북부의 진한과 남부의 마한을 나누는 경계였다.

 

살수薩水, 기수奇首는 혼하渾河로 고려된다. 그리고 태자하는 혼하渾河의 남쪽 가지였으니 고대에는 한수漢水였을 것이다.

발해 삼로군이 본계의 태자하변에 있었는데 거기에 한양현漢陽縣이 있었으니 태자하가 한때 한수漢水로 존재했었던 근거가 된다.

한편 비류수沸流水는 양식목하養息沐河, 소수小水는 부신시 세하細河다. 소수맥小水麥 구려句麗가 거기 있었다.

 

지난 몇백년 동안 대요수를 지금의 대요하로 보아온 것은 지리상으로 엄청난 비약이었다.

백랑수白浪水였던 대릉하大凌河로부터 대요하遼河 사이에 있는 양랑하楊郞河, 무량전수無梁殿水, 요양하繞陽河, 유하柳河, 양식목하養植沐河, 수수하秀水河가 모두 다 허공으로 사라진다.

이것이 왜곡된 역사의 커다란 구멍이다. 무려 500리 사이에 아무 물도 없는 것이 된다.

[한서-지리지] 기록 체제상에서 이런 허술한 기록은 절대 있을 수가 없다. 근세 역사가들의 해석이 잘못된 것이다.

게다가 마자수압록강馬訾水鴨綠江을 지금 압록강으로 보면 요동반도에 흐르는 수십개의 중간 물들이 또다시 몽땅 사라지고 만다.

[한서-지리지]의 왜곡된 해석은 만주지리를 한 점의 블랙홀 속으로 빠트린다.

[한서-지리지]에서 요동군 바로 앞의 요서군의 물은 48개다.

48개의 물을 모두 합치면 3000리가 넘는단다. 작은 물까지 무지무지 자세하다. 그런 요서군 물도 약간은 좀 이상하다.

그에 비하면 요동군, 현도군 기록은 그들이 요동군 물조차 제대로 모른다는 것을 반증하는데 하물며 낙랑군 물에 대한 기록에 과연 무슨 진실이 있고, 그 물 이름이 어찌 한반도까지 밀려 내려와 덮어질 수 있겠는가?

제 땅 요동의 물이름도 잘 모르면서 남의 땅 낙랑의 물이름을 안다는 것이 가당한 일인가? 그런데도 그들이 그때 이미 다 알았다는 식으로 역사를 왜곡하는데 실상은 그들이 전혀 몰랐다는 것을 다음 책 [당회요]에서 증언해 주고 있다.

 

 

2. 두 번째 증거 [당회요]

 

한나라 때는 지금의 대요하遼河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642년 안시성 패전뒤 2년만에

당나라 장수 이세적李世勣이 644년 영주도營州道(=조양시朝陽市)를 지나서 고구려 신성新城, 남소성南蘇城을 침범했는데,

 

[당회요唐會要]에 의하면 이세적李世勣이 파리성頗利城을 지나, 백랑白浪과 황암黃巖 두 물을 건너고서 대요하가 발원하는 요원遼源 소재를 물었다.

그러자 지금 건너온 백랑, 황암 두 물이 더 가다가 남쪽에서 서로 합쳐서 요수遼水가 된다고 대답했고 그 발원인 요원遼源은 갈 수가 없다고 했다.

이세적 군대는 백랑수의 최남단인 고릉하枯凌河와 합치는 요수遼水를 건넌 것이고, 황암수는 고릉하와 합치기 전의 요수 이름이 된다.

북녕시北寧市 서남쪽 70리에 황암사黃岩寺가 있었다.

 

이 두 물, 백랑수白浪水와 대요수는 요동군 방현房縣 동남쪽에서 만나 안시安市를 지나서 바다로 들어갔다고 [수경水經]에 기록되어 있다.

 

신성, 남소성은 백랑수, 즉 대릉하 북쪽에 있었다.  

중국은 고구려 신성新城이 무순撫順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남소南蘇는 혼하渾河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성, 남소 모두 조양시朝陽市 동북의 내몽고 지방 적봉시赤峯市 오한기敖漢旗에 있었다.
파리성頗利城은 “발”성의 차자인데 발한성이 있던 적봉시 팔리한진(전한시대 우북평군 치소)로 고려된다.

 

3. 세 번째 증거 [문관사림]

 

당나라가 고구려 침략을 시작한 통정진通定鎭은 어디인가?

[문관사림文館詞林]에서 수나라 군역軍役 기간의 차등 순서가 전방까지의 거리별로 단계적 차등을 두고 있는데

-탁군涿郡 2년

-임유관臨楡關 3년

-유성군柳城郡 4년

-노하瀘河, 회원진懷遠鎭 5년

-통정진通定鎭 7년

-도요서진渡遼西鎭 10년 이런 순서로 기록되었다.

 

따라서 노하, 회원 통정진 등은 모두 요서진遼西鎭 보다 서쪽이다.

도요서진渡遼西鎭은 마땅히 대릉하 지역이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서는 

탁군 2년 - 임유관 3년 - 유성 5년- 통정진 7년- 도요진渡遼鎭 10년 이다.

노하瀘河, 회원진懷遠鎭이 따로 없다. 이는 노하, 회원진이 유성과 가깝다는 반증이다.

수나라때 수양제와 백만병사가 요동성까지 진군한 행로를 표시하면 위와 같다. 윗 그림에서 파란색은 중국의 주장이며 틀린 것이다. 붉은색이 제대로 된 것이다. 수나라 유성군은 푸른색의 유성(당나라 영주 유성현)이 아니라 붉은색의 유성(수나라 유성군, 당나라 평로군 영주 평로성)이 맞다.

 

노하瀘河는 금주시錦州市 소릉하小凌河다. 지금의 소릉하를 노하로 보는 것은 중국학계의 일치된 견해다.

중국은 노하현을 오늘날의 금주錦州로 보는데 그보다 훨씬 상류, 즉 서쪽일 것으로 고려된다.

수나라 때에 노하현瀘河縣, 노하진瀘河鎭도 있었다.

 

회원진懷遠鎭은 금주 서북 50리의 당왕채산唐王寨山으로 고려된다.

수나라 양제가 살수대첩 후에 다시 또 쳐들어왔다가

양현감의 반란으로 군대를 되돌린 곳이라서 회원回遠진이고

당왕채산이 수왕채산隋王寨山의 와전訛傳이라면 당왕채가 곧 회원진이 된다.

그 남쪽 고당산褲襠山은 당태종이 군량을 비축한 고량산庫粱山이 된다.

 

 

중국학자들은 항상 갑자기 비약하는데 문제가 있다.

노하, 회원진에서 노하는 소릉하라고, 하면서 회원진을 갑자기 물 건너 산 넘어 또 물 건너 심양시 요중현遼中縣이라고 주장한다.

대릉하大凌河 건너 의무려산醫巫閭山 넘어 요하遼河 건너...큰 두 물과 큰 산을 갑자기 넘는다.

그리하여 중국인들은 비약에 비약을 거듭하여서 금주 서쪽 노하瀘河, 회원진懷遠鎭에서부터 다음 통정진으로 신민시新民市 북쪽 요빈탑遼濱塔으로 주장한다. 요나라 요주遼州의 요빈현遼濱縣이 있던 곳인데 그곳이 요수遼水를 건너는 곳이니 통정진은 응당 거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요빈탑에서 동쪽으로 건너는 강은 당시 대요수가 아니라 압록강이다.

[한서漢書]에 기록된 당시의 대요수는 길이가 고작 1250리, 즉 300km 남짓한 짧은 물이었고,

현재의 요하가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반면에 한서漢書의 마자수압록강은 2100리라고 했는데 지금 요하의 일부에 해당한다.

게다가 중국 역사학자들은 당시 요수가 대릉하였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유성에서 노하, 회원진이 150리 정도 되지만, 금주에서 요빈탑은 500리가 된다. 중국의 주장은 그 500리 중간에 도대체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이 왜곡된 역사의 전형적인 구멍이다. 역사의 블랙홀인데 역사 왜곡을 위해 생략한 거대 공간이었다.

통정진보다 동쪽의 도요서진渡遼西鎭, 혹은 도요진渡遼鎭이 최고 관건이다.  참고로 역사상 가장 동쪽의 요서주遼西州 위치가 대릉하 지역이다.

 

 

4. 네 번째 증거 [요사-지리지]

 

[요사遼史-지리지地理志]에서 금주시는 한나라 요동군遼東郡 무려현無慮縣으로 기록되었다.

이는 후한後漢 시대 무려현이다. 수나라가 고구려 무려라武勵邏를 빼앗아 만든 요동군은 금주시錦州市였으니, 통정진通定鎭은 의현義縣 서남쪽 45리에 비정된다.

 

수양제는 100만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땅에 쳐들어왔는데, 요동성에 진을 치고서, 그중 30만 대군이 압록강 넘어 평양성까지 갔다가

평양성밖 30리에서 회군하여서 을지문덕장군에세 살수대첩薩水大捷을 당하는데 다시 압록강을 건너 살아서 돌아온 병력은 2700명이라고 했다.

 

이후 수양제는 철군하면서 고구려 요동성은 그냥 두고, 요수 건너 편의 고구려 무려라를 빼앗아서 수나라의 요동군隋-遼東郡과 통정진通定鎭을 설치했다. 수나라 요동군은 고구려 무려라武勵邏였으니, 금주시錦州市 대무보大茂堡 위치고, 통정진은 의현義縣 서남 40리 대정보大定堡로 고려되는 것이다.

통정진은 그 이름부터가 당시 안정현安定縣이었던 고구려 요동성遼東城으로 가는 길목(通-安定)이라 통정通定진이다.

 

그런데 요나라 때 요주遼州 안정현安定縣은 의현義縣 동쪽 대유수보진大楡樹堡鎭이었던 것이 [양원부인장씨묘비梁援夫人張氏墓碑]로 증명되었다. 이는 고구려 요동성 편에 자세하다.

 

 

5. 다섯 번째 증거 [책부원구冊府元龜]

[책부원구冊府元龜 券117]에서 당태종이 말하였다.

“짐은 백랑수白浪水( = 대릉하大凌河) 남쪽을 따라서 고구려 현도의 성에 갈 것이다.”朕 然後 徑塗 白浪之右 親巡 玄菟之城

 

고구려 현도, 신성 등은 요수 건너에 있었는데, 당태종의 말처럼 백랑수를 건너가면 마주치게 되는 것이었다. 즉 백랑수가 당시의 요수遼水다.

[수경水經]에 의하면 본래 백랑수와 대요수는 지금의 고릉하枯凌河를 통해서 방현房縣에서 만나 안시를 통해 바다로 나갔다. 大遼水注, 大遼水 自遼隊來 東南過 房縣西 又會白浪水 下入安市

 

역시 [책부원구冊府元龜 券117]에서 안시성 전투를 한참 치르던 중에 당태종의 신하가 말하기를

“폐하께서 친히 요대에 오셨는데  今 陛下 親臨 遼隊...”

 

당태종이 안시성 공격을 위해 주둔한 곳은, 전한前漢시대 요동군 양평襄平의 남쪽으로서 전한시대 요동군 요대현遼隊縣이었다.

 

[수경水經]에서 대요수大遼水는 전한시대 망평望平에서 내려와 양평현襄平縣, 요대현遼隊縣을 지나 방현房縣의 동남쪽에서 백랑수와 합쳐지고 안시현安市縣에서 바다로 들어갔다. 망평현望平縣은 요나라 때 산동현山東縣이라고 했는데 북녕시北寧市 동쪽 150리였다.

지금의 유하柳河가 동남으로 향해 흘러내려오다가 서남으로 틀어지는 곳이라 무량전진無梁殿鎭 부근이다.

전한시대 양평현襄平縣은 그 서남이며 대요수와 소요수가 합쳐지는 곳의 동쪽이다.

즉 요양하繞陽河와 가 합쳐지는 곳인데, 물길이 동쪽으로 흘러야만 하지만 물길이 2000년이 지나서 현재는 약간의 변동이 있을 수 있는데 흑산현黑山縣 대호산大虎山 부근이다.

요대는 고구려 안시성 부근이 되고, 그래서 당태종이 요동군 요대遼隊에 왔었다는 것이 되고, 요동군 안시현은 본래 대릉하大凌河, 즉 고릉하古凌河가 바다로 나가는 길목이므로 구방자진溝幇子鎭에 있던 방현房縣보다 남쪽이 된다.

지금의 대요하 건너 해성시海城市 앞에 요대사遼隊寺라는 절이 있다. 이는 요나라가 한인漢人과 발해인渤海人이 반란하지 않도록 발해인은 서쪽으로, 한인은 동쪽으로 옮겨서 섞어놓은 다음에 생긴 것이다.  본래 요대현은 태안台安의 서북이다. 왜냐하면 태안에 건안성建安城이 있었는데 당태종이 건안을 지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동에 많은 당태종 전설이 있지만 거의 가짜로 고려된다. 당태종은 지금의 요하를 건너보지 못했다. 만주에서 북으로는 심양 북쪽 철령시 당왕채 전설에도 당태종이 왔다고 하였고, 남으로는 단동시 봉성에도 당태종이 왔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모두 다 사실이 아니다.

대개 이세적이나 안동도호부 도독 설인귀薛仁貴의 흔적이 와전된 것이다.

 

 

6. 여섯 번째 증거 [금주부지], [요동지]

[금주부지錦州府志]와 [광녕현지廣寧縣志]에서 본래 한나라 요서군치소遼西郡治所로서 요나라 요서진遼西鎭이 되었다고 비정된 곳은 의주義州 서西 40리다. 이는 의주 서남 40리에 위치한 대정보大定堡 정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후한시대 공손탁의 요동국에서 본래 전한시대 요동군을 다시 나누어서 만든 요서군치소 요서진으로 고려되며 기왕의 전한시대 요서군은 아니다.

 

한편 [요동지], [전요지]에서는 요서진이 의주 동東 40리라고 [금주부지]와 동서를 반대로 말했다.
그리하여 현재 대릉하 동쪽 왕민둔王民屯으로 추정하였다.
이는 요나라가 설치한 요서주遼西州 부성군阜城軍 위치다.

요서주는 본래 한-요서군지漢辽西郡地로서 요나라 장녕궁과 현주에 속했다.
遼西州,阜城軍,中,刺史, 本漢遼西郡地,世宗置州,

이 요서주는 본래 고구려 요동성遼東城 위치다. 고구려 요동성이던 첫 번째 요주遼州 안정현安定縣이 폐지되어, 신민시 북쪽 두 번째 요주遼州 요빈현遼濱縣으로 옮겨간 뒤에, 바로 그 첫 번째 요주 자리 아래에 생겨난 것이 요나라 요서주遼西州 부성군阜城軍인 것이다.

 

한편 유성군柳城郡- 노하瀘河, 회원진懷遠鎭 - 통정진通定鎭 - 도요서진渡遼西鎭 순서로 보아서 도요서진의 위치는 금주시 동쪽 대릉하성大凌河城으로 고려된다. 지금 금현錦縣 위치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서 당태종이 요수를 건넌 곳은 요돈遼頓이라 했다.

현재 대릉하성大凌河城의 설치 연원을 알 수 없다고 하는데, 바로 이 수나라 도요진渡遼鎭이고, 당태종의 요돈遼頓이었다.

 

의주義州(현재 의현義縣) 서쪽 40리거나 의주 동쪽 40리거나, 요서진遼西鎭은 대릉하大凌河에 있었다.

그런데 대릉하 요서진보다 훨씬 후방 내지인 통정진만이 느닷없이, 500리 바깥 신민시新民市 북쪽 요빈현遼濱縣이 될 수 없다.

회원진도 산넘어 물건너 요중현遼中縣까지 가지 말고 유성 부근의 노하瀘河. 현재 소릉하小凌河 주변에 바로 있어야만 한다. 그게 사실史實이다.

 

 

 

 

 

 

 

 

 

 

 

 

 

 

 

 

 

 

 

 

 

 

 

 

 

 

 

 

 

 

 

 

 

 

 

 

 

 

 

 

 

 

 

 

 

 

 

 

 

 

 

 

 

 

 

 

 

 

 

 

 

 

 

 

 

 

 

 

 

 

 

 

 

 

 

 

 

 

 

 

 

 

 

5. 졸본부여bc108~bc

졸본부여卒本夫餘는 한사군의 침략에 맞서 봉기한 고두막한高豆莫汗 동명왕東明王이 세웠다. 요동군 서안평까지 수복하였다고 전하는데 이는 낙랑군을 모두 수복한 것이다.
그래서 설치 20여년만인 한나라 소제 때, bc82년에는 진번군, 임둔군을 폐지하였고 중국의 낙랑군은 의무려산 서쪽으로 내려갔다.
고두막한은 bc238년에 해모수에게 단군조선을 빼앗겼던 고열가의 후손 영품리왕의 아들이라고 한다.

졸본성은 고주몽의 2번째 도읍 눌현성訥見城, 즉 황성黃城이었고, 고국천왕의 고국이었고, 고국원왕의 동황성이었고, 발해 서경압록부 신주성이었는데 심양審陽 북쪽 개원시開原市 창도현昌圖縣 천두진泉頭鎭이다.

 

고주몽은 [광개토왕비문]에서 비류수에 홀본성을 지어 건국하였고, 다음해 비류왕인 송양의 항복을 받고, 3년후에는 골령에 황룡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서 궁궐을 지었는데, 이 골령의 황룡성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졸본천의 졸본성이다.

졸본성은 주몽왕과 신대왕, 고국천왕, 고국원왕, 고국양왕이 묻혔다. 고국원왕 때는 황성(黃城)이라고 했는데 고주몽 때에 눌현성이라는 이름도 전하고, 이는 누루 황(黃)의 우리말에서 황성과 누루성이 비롯된다. 고국원왕이 황성으로 옮긴 후에, 고구려왕은 졸본부 행차를 할 필요가 없었으니, 장수왕의 평양성 천도전까지 졸본부 행차 기록이 없다.

[수성왕갈석비문]에서는 유리왕이 비류수의 위나암에 정도하며, 고주몽의 졸본부 황성은 천부(天府)라고 불렀다.

천부(天府)가 신주(神州)를 거쳐 천두진(泉頭鎭)이 되었다.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에서 고려고국(高麗故國)으로 기록된 발해 압록부 서경성 녹주(綠州), [신당서(新唐書)]에서 신주(神州)로 기록된 것이 고국원왕이 천도하였던 황성이며, 본래 고주몽의 졸본성이다.

그런데 발해 압록부 압록강이 현재의 요하(遼河)인 것을 모르고, 엉뚱하게 환인현 오녀산성을 오늘까지 주몽왕의 졸본성으로 잘못 알아왔다.

요나라 기록에 발해 서경성은 석성으로서 폭이 무려 20리(8km)였던 대성인데, 요나라 때 반란으로 인하여 폐지되어서, 그 뒤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금나라 때 [요동행부지]를 남긴 금나라 문사였던 왕적(王寂)이 심양시 북쪽 현재 개원시에 설치되었던 함평부에 가서, 하루는 부근에 굉장히 큰 성이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찾아가니 입구 마을 사람이 고구려 폐성이라는 했는데 직접 보니 성중에 함원전(含元殿)이 있고, (성을 세운 주몽이) 만세지계(萬世之計)을 세웠다가 당나라 장수 이세적에게 강토를 도둑질 당하여 국파천년한(國破千年恨)을 왕적이 느낀 곳이었다.

금나라 왕적이 보았던 발해 신주, 고구려 천부였던 졸본성은 대체 개원시 어디에 있는가? 위성 사진으로 탐색한 결과 개원시 북쪽 창도현 천두진(泉頭鎭) 동쪽 소가둔(邵家屯)의 굉대한 성터였다.

 


 

 

 

지도상의 천두는 고구려 천부나 발해 신주가 변한 말이다. “주”-“두”의 발음은 구개음화 이전인 고대에 혼용되었다.

황정자黃頂子는 황성자(黃城子)의 변음이고, 소가둔(邵家屯)은 [수서]에서 소열제(昭列帝)라고 불렀던 고국원왕의 시호에서 비롯된 것이며 소가남구(巢家南溝)도 역시 고국원왕 이름인 쇠(釗)의 남쪽성이란 뜻이다.

또한 초가구는 소수림왕이 세운 초문사(肖門寺)에서 비롯된다.

 

 

신주의 위치는 고구려, 발해의 압록강이었던 요하(遼河) 하구로부터 물길로 830리라고 [신당서]에 기록되었는데 천두진이 그 위치로서 대략 맞다.

일반 지도 상에는 천두진 동쪽에 소가둔이 표시되어있고, 그 남쪽에 황정자(黃頂子), 소가남구(巢家南溝)가 표현되어 있고, 그 남쪽에 초가구(肖家溝) 유원지가 있다.

이를 위성으로 들여다보면 자세하게 고구려 졸본부 황성터가 보인다.

 

이중에서 묘구가 동명왕 고두막한의 성이고 고두막한의 고분이 있을 곳이고, 황성이 고주몽의 성, 소가남구가 고국원왕의 동황성으로 고려된다.  

두 성은 합쳐서 폭이 대략 8km다. 성둘레는 20km이상이다.

고주몽이 죽어, 용산에 묻혔는데, 그 동명묘가 성의 서남쪽에 있으며 산 이름은 황룡산이며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주몽의 장지인 용산인 것이다.

황성 동남쪽에는 유리왕이 골천에 세웠던 이궁인 위원보산성이 있다. 골천은 지금의 구하(寇河)다.

동명왕묘 남쪽의 류가구는 금나라 문사 왕적이 신도비를 보러 놀러갔던 당나라 장수 류인공 7세손의 집이다. 그 바로 곁에 동명왕묘가 있었건만, 당시 왕적은 이를 알지 못했으니, 고구려 역사 유적이 요나라 이후에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것이다.

 

졸본부여는 고두막한이 세우고 bc59년에 서거했으며 그후 태자인 고무서高無胥가 즉위한다.

bc58년 고무서는 영고탑寧古塔에 순시하고 죽었다고 기록되었는데, 이는 고무서가 영고탑으로 천도한 것이다.
이후 영고탑도 부여라고 하는데  고구려 2대왕 유리왕의 출신지로 고려된다.

훗날 태조대왕의 중국 침략을 방해하였던 부여는 이 영고탑 부여로 고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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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오백년만에 다시 찾은 고구려 산하

 

명나라 초기 압록강 그림...

위에 마전도, 고사도, 득물도가 보이는데 이는 [신당서지리지]<도리기>에 나오는 압록강앞의 섬들이다.
又過秦王石橋、麻田島、古寺島、得物島,千里至 鴨綠江唐恩浦口

章潢(1527一1608年),圖書編 권 57.
沙門島解宋寨界 單山縣界 桑島馬停寨界 龜島昌邑縣界 歆末島光界
都里鎭蒲臺界 靑島利津界 黃島州界 直沽口寶低縣界 塔山盧龍衛寨界
南半洋山爲昌黎縣界 計一千二百里,

抵遼東北半. 洋山爲山海衛界 蔬萊島中前所界  牛車島中後所界 孤山中右所界 向陽島羅兒島金州衛界
石灘島左所界東雲島 黃駝島蓋州衛界 屛風山復州衛界 鳳凰山中左所界 女兒河中屯衛右屯衛界
遼河渡古寺島爲廣寧衛界
麻田島
平島爲海州衛界

湯站堡鎭遼所界
臨江義州界計一千三百餘里鴨綠朝鮮界

여아하는 중둔위와 우둔위의 경계이고
요하도와 고사도는 우둔위와 광녕위 경계이고
(우둔위는 대릉하와 고릉하 사이에 있었다. 고릉하는 대릉하와 압록강이 만나던 곳이다. 즉 요동군 방현의 위치)
즉 요하도는 대릉하에 있는 것이다. 수양제의 도요진도 그러했다.
마전도는 광녕위와 해주위계가 되는 것이다.


1.추모왕홀본성시대    2.유리왕국내성시대    3.대무신왕시대    4.태조대왕시대    5.차대왕현도성시대    6.산상왕환도성시대    

7.중천왕평양성시대    8.고국원왕황성시대    9.광개토왕시대    10.장수왕시대    11.평원왕장안성시대   12.보장왕대당전시대  13.보장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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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기원 어하라와 비류왕 수도 부여성

1. 백제의 기원 어하라bc42~bc19

연타발의 딸 소서노는 기묘년 3월(bc42년)에 패대(浿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번(辰番)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 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부를 쌓아 몇 만금이러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북쪽은 대수(帶水)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천리(즉, 오백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제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는 몹시 기뻐하시며 이를 장려하여 소서노를 어하라라고 책봉했다.
어하라 책봉후 13년 임인(-19)에 소서노가 죽었다. 

소서노의 어하라 책봉은 bc31년경으로서 유리왕의 즉위해인 bc19년보다 13년 전이었던 것이다.

소서노가 건너온 패수는 뒤에 구하(句河)가 된 지금의 요하 상류다.
낙랑군의 패수이며 고국원왕이 백제의 공격으로 죽은 평양성 패수다.
어하라의 북쪽 경계가 된 대수(帶水)는 뒤에 살수가 된 심양시 혼하다.

소서노 어하라의 중심은 어니하가 지나는 대석교시 진미산이었다.
뒤에 구대가 대방왕이 된 곳이며, 위나라 대방군의 기리영이 생겨난 곳이다.
공손탁 요동국이 설치한 대방군은 의무려산 동쪽으로서 지금의 요하 서쪽이라 서로 다르다.
훗날 백제가 망한 후에 당나라가 나당전쟁에 패배하여 한반도에서 철수하고나서 다시 대방도독부가 대석교시 남쪽 개주시 웅악현에 설치되기도 했다.
발해 때 개모성에 진주(辰州)를 두었는데 이 개모성 사람들이 거란에 밀려나 요하를 건너 이주해 들어온 곳이 개주시다. 그래서 뒤에 진번(辰番) 땅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본래 진주 개모성은 단군시대 소밀랑 수도 부근이므로 발해가 진주(辰州)라고 불렀던 것이다.

<북사>에서 백제왕어라하(於羅瑕 )라고 불렀다. 고대에는 어니하(於泥河)가 있었는데 지금의 영구시와 대석교시 사이를 지나는 물이며 해성시(海城)시에서 나온다.
대석교시 진미산에서는 낭랑묘가 있어 전통적으로 여성을 숭배한다. 즉 초기에 소서노의 행적과 관련되는 것이다. 


또한 대석교시 서북 교외에는 악주(岳州)고성이 있다.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성이다.
이는 요나라 요주성(耀州城)이라는 주장이 있어왔지만, 성의 모습이 요나라 평지성의 일반적인 형태인 사각형(方形)이 아니다.
이는 소서노 어하라의 어주성(於州城)이 어원인 것이다. 중국식 한자 발음도 어
於yu와  악岳yue은 서로 비슷하나 요耀yao는 비슷하지 않다.

북쪽에 있는 해성시 팔리진의 영성자산성도 여자가 지었다고 한다. 어하라의 북쪽 방어성이다.
 

진미산 동남쪽에는 백채향(百寨鄕)과 백자구(百子溝) 등이 있는데 모두 백제의 이름이 남은 것이다.

 

2. 비류백제의 수도 부여성

소서노가 어하라로 즉위하여서 수도로 삼은 곳은 지금의 요동반도 서남단의 복주(復州)인데 부여성이라고 불렀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346년 모용황이 정벌하여 부여왕 여현 등 5만명을 끌어간 곳이 부여성이다.

<수서> 등에 백제 수도는 오방제도五方制度인데  중방을 고사성이라고 하고 동방을 득안성, 남방을 구지하성, 서방을 도선성, 북방을 웅진성이라고 하였다. 其外更有五方: 中方曰<古沙城>, 東方曰<得安城>, 南方曰<久知下城>, 西方曰<刀先城>, 北方曰<熊津城>.

복주 부여성에도 바로 오방성이 있다. 중방은 고사타자성이고, 동방은 득리진의 용담산성이고 북방은 웅악진의 웅악성이다. 남방은 구지하라고 했는데 이는 우리말로 구슬산 밑이라는 뜻이다. 즉 금주시 옥산 아래 용왕묘에 해당한다. 서방은 고대에 설립 근거가 없는 백사주(百沙洲)가 기록으로 전해오는 곳으로서 백제 서주일 수도 있고 백제주일 수도 있다. 지금은 고려성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
또한 비류백제 수도 위치인 복주 시 동쪽에 동명산이 있는데 그 아래에 대백라가 있다. 동명산은 명나라 때에도 동명왕의 전설이 내려왔다. 즉 비류 백제가 동명왕묘를 세운 곳이다. 

지금은 명산이라고 옛 기록 상의 동명산으로 둘러싸인 대백라는 사진과 같다.

동방의 득안성은 득리사가 들어서 득리영성이라고 이름이 바뀌어 전해왔다.
 

북방의 웅진성은 지금 웅악현의 구룡지다. 당나라 군대가 한반도에서 철수하고서 698년에 대방주도독부를 두었던 곳이다.

 

남방의 구시하성은 옥산 남쪽 용왕묘다.

중요한 곳으로 보란점시 북쪽에 화얼산이 있다. 이곳에서는 임예승인(臨穢丞印)이 발견된 곳이다.
임예현은 중국 기록에 없다. 백제의 임예현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다.
현재 화얼산은 산을 다 파내어 깍아 버렸다. 예穢의 중국 발음이 후이인데 화얼산으로 변한 것이다.

어하라가 진번지간이라고 했는데 이곳 보란점이 본래는 불한, 즉 새로운 번한(番韓)이 있던 곳이다. 보란점시의 뒷산 이름이 발발산이다. 아마도 탁발산, 탁의 발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위만에게 번한을 빼앗긴 기준왕의 장수였던 대장군 탁이 무리를 이끌고 육로로 이주해 들어온 탁의 고향 월지국 마한은 바로 이곳으로 고려되며 중마한(中馬韓)이라고도 하였다. 그들은 마한에 들어와서도 불한이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했었던 것이 된다. 기준은 목지국 마한으로 이주하여 대동강에 있었다. 그런데 후한시대에는 목지국마한이 마한 56국의 중심으로서 가장 번성했고 위나라 시대에는 월지국마한이 번성했다. 그 이유는 목지국마한이 백제에 망해 버렸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으나 그보다는 마한을 정복한 백제왕이 위나라 시대에 월지국, 즉 대방고지 백제에 옮겨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 태조대왕 때에 중국 공략을 도왔던 마한은 바로 이 보란점의 월지국마한이다. 물론 예맥도 함께 하였었는데 121년 예맥거수가 중국인 요동태수 채풍에게 죽임을 당한 후에 많은 예인들이 백제 땅으로 건너온 것으로 보인다. 
보란점시 서쪽에는 중국에서 근거를 알 수 없는 횡산현(橫山縣)이 있었다. 사실은 당나라 설인귀가 쳐들어왔던 그 횡산이다.
보란점시 남쪽에는 석하가 있는데 백제 고이왕의 석천이며 그곳에 석현성(石峴城)이 있었다. 역시 설인귀가 쳐들어온 석성이며 온사문이 있던 곳이라서 지금은 온가구(溫家溝)라고 부르는 성이다. 한반도에서 찾기 어려운 온조왕의 온씨가 이 요동반도 남단에 집중되어 있다. 

요동반도 남단의 주요 강인 벽류강은 본래가 비류강이었을 것이다. 비류나 벽류나 한자만 다를 뿐 발음은 같다.
비류백제 강역도는 아래와 같다.
 

온조가 떠나고 비류가 죽은 뒤에 비류의 부여 후손은 부여성을 떠나서
1) 백제 미추홀로 가거나
2) 파저강(압록강)의 비류소국으로 옮겨가서 부이르강을 남기고,
3) 또 일부는 함흥 서남쪽에 살면서 비류강을 남겼다. 
비류의 부여성은 본래 살던 월지국마한에 복속되었고, 그들은 본래 불한, 또는 낙랑이라고도 하였다.

[신찬성씨록]에 백제에 부여 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出自百?? 扶餘地 卓斤?主 施比王也
위 가록에서 백제에 부여지가 있었고 거기에 본래 탁근국이 속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탁근국이 월지국 마한을 처음 세운 대장군 탁에 의해 비롯된 것도 확인된다.

2. 온조왕 한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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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속국 일본사

백제사와 일본사는 그래서 고대 기록과 실증에 의해서 다시 쓰여야만 한다. 현대에 왜곡된 백제의 잘못된 지리를 당대의 기록인 일본 책들과 당대 일본의 각 곳 [신사 기록]과 천황들의 [고분 묘비 연대]의 실증, 그리고 일본의 고대 비서秘書인 [수진전秀眞傳] 등의 보완으로 바로잡는다.

일본신이자나기 가야왕이진아시

세오녀 히미코 아마테라스

백제 초고대왕의 일본정복

초고대왕의 일본왕족 후손표

백제 구수대왕의 오사카 대국성

세오녀 왜여왕과 주몽검 초고대왕손 칠뜨기 신무천황 군웅할거시대 / 수정천황
초고대왕 손자 안녕천황 구수대왕 아들 의덕천황 사반대왕, 효소천황 사대주신 사반대왕 아들 효안천황
사반대왕 아들 국견 효원천황 사반대왕 손녀 일여 왜여왕 가야왕자 천일창 수인천황 부여 의려왕 효령천황 되다
부여 의라왕 숭신천황 되다 백제 걸대왕 경행천황이 되다 근초고대왕, 일본무존이 되다 걸대왕 아들 성무천황
근초고대왕 아들 중애천황 근구수대왕이 일본 응신천황 신공황후 신라정벌은 조작이다 송나라황제가 된 침류대왕
광개토왕 왕자 고진, 구주정벌 왜찬왕 다지로대왕과 전지왕릉 고구려왕자 고진, 윤공천황 신라왕자 김무 안강천황 등극
개로왕자 일본북부 왜제왕 되다 개로대왕의 웅략천황 축출 개로대왕의 중국 산동 진출 백제 곤지왕자 왜흥왕
개로왕의 죽음과 왜무왕의 복수  모도왕 동성대왕 인현천황 무녕대왕의 구주 합병

무녕대왕과 계체천황

무녕대왕 아들 흠명천황

성명대왕 아들 민달천황

혜대왕,용명천황,성덕태자,

추고천황과 의자왕자

의자대왕 서명천황과 수양제

황극천황과 제명천황

효덕천황의 반란과 부여풍장

부여풍장과 백제부흥운동

천지천황의 배신과 백제멸망

부여풍장, 천무천황 되다

 

신찬성씨록 보기

일본신사 찾기

천황능비 해석 자료1,  2,  3

일본 천황 고분 자료

일본고사기 자료

수진전(하쓰마) 해석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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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자료

 

초고대왕 후손 백제왕과 일본천황표

백제 근고초대왕 후손 백제왕과 일본천황표

개로대왕 후손 백제왕과 일본 천황 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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