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울림을 찾아서
나에게 작은 울림이 시작되던 때
수년전의 일이다. 선배가 인도를 다녀와서 볼펜을 선물한 적이 있는데 옆면에 'My message is My life'란 글이 담겨 있었다. 훗날 알고 보니 간디가 했던 말이다. 신념이 드러나는 삶, 그 삶이 세상에 주는 메시지는 강렬했으며 그 강렬함은 울림을 남긴다.
그 후로 내 삶 또한 신념이 드러나는 삶이되길 바라는 소망으로 수첩에 늘 적어두고 다닌다. 그렇게 간디는 내게 울림을 주었다. 그리고 또 수년이 지났다.
삶과 운동에 대한 고민이 예리함을 잃어가던 즈음에 이 책(울림)을 접했다. 아직 영글지 못한 신앙 때문인지 숱한 물음과 세속화된 교회에 대한 실망감이 새로운 신앙을 갈망하고 있던 그 즈음이었다. YMCA 운동에서 'C'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나의 삶과 활동에서 어떻게 'C'를 담아내야 하는지에 대한 혼란이 시작된 즈음이기도 했다. YMCA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80% 부족한 그 뭔가가 눈에 보일 듯 말 듯 한 바로 그 즈음이었다.
『울림』이 내게 준 가장 큰 공명은 삶을 통해 드러낸 그들의 사랑이었고 뜨거움이었다. 민중의 가랑이 사이로 기는 것을 소명으로 받아들인 섬김이었으며 평생을 그리 살다 간 시종일관이었다.
그래서일까 어려운 시대, 이 땅의 가장 낮은 곳에서 성심을 다해 사람을 섬기고 받들며 살아온 그들을 가졌기에 우리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꿈꾸는지 모른다.
한국 교회를 생각하며
무엇이 그들의 삶을 그토록 담대하게 만든 것일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고 그의 제자 되기를 각오한 결단과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기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기독교가 처음 한국에 뿌리내리던 시절로부터 한 세기가 지났다. 이제는 슈퍼마켓보다 더 많이 보이는 것이 철탑위의 십자가라 할 정도로 수많은 교회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교회의 양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대한 사회적 존경과 신뢰는 날로 추락하고 있다. 무엇 때문일까
그 원인은 한국 기독교가 뿌리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구한말의 선각자들이 기독교를 선택한 이유를 기독교 자체보다 그 시대와 사회, 기존 종교의 실상에서 찾고 있다. 기존 종교가 왕족과 양반들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여 사람들을 핍박하는 수단이 되고 있을 때 기독교는 소외된 민중의 편에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나누고 있었다. 또한 기독교는 일제의 강압적 속박에서 벋어나고자 힘썼던 선각자들에게 독립의 혼을 불러일으켰다.
즉 한국의 기독교는 소외된 민중의 편에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전하며 한국의 역사적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실천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그 첫 마음을 잃고 맘몬의 교회, 권력화한 교회로 전락하고 있고 역사적 현실을 외면하고 교회의 세력 확장에만 여념하며 실천의 메시지를 잃어가고 있다.
더불어 오르는 하나님 나라
세상사람 다 두고라도 나만 천국가면 된다는 자기구복적 신앙관은 교회와 세상을 분리시키고 오직 교회 안에 갇힌 신앙으로 전락시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가장 큰 가르침은 ‘세상에 대한 사랑’이다. 나환우의 썩어가는 손 위에 촛농 같은 눈물을 떨구던 방애인의 사랑, 자신의 병 때문에 살날이 며칠 남지 않은 날 새벽에도 산골 마을로 찾아들어가 까막눈의 아이들과 아주머니들에게‘가갸 거겨’를 가르쳤던 최용신의 사랑이다.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따라 배우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박제화된 신앙일 뿐이다. 따라서 자기만이 가는 천당, 죽어서 가는 천당을 위해 기도하기 보다는 세상 사람들이 보다 행복한 세상,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사랑으로 넘치는 세상이 되도록 노력하는 삶이 그리스도의‘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이라 할 수 있다. 채희동 목사의 말처럼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하늘의 자리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와 가난한 이들과 병든 세상을 돌보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우리 또한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억눌린 이들을 돌보며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 사랑이 가득한 나라를 이루며 모두가 함께 천국 백성으로 하늘에 오르는 그런 날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비워야 채워지는 삶
참 신앙은 끊임없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에 있다. 특히 요즘처럼 소비가 미덕인 물욕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많은 것을 가지면서도 더 가지지 못해 아쉬워한다. 더 가지려 하든 말든 그것은 순전히 개인사일 뿐이라며 회피할 수도 있지만 만성적인 기아인구 8억 명, 이 중 매년 기아로 인한 사망자가 1200만명에 이르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살고자 하는 우리에게 내 몫 이상을 쓰는 것은 벌써 남의 것을 빼앗는 행위라는 권정생의 말은 숙연함을 갖게 한다. 세계 비만 인구 12억 명.
우리의 무지와 성찰의 빈곤은 우리도 모른 사이에 남의 것을 빼앗는 삶에 일조하며 맘몬의 사회에 동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우리에게 있어 자발적 검소함을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 더불어 모두 행복한 삶을 위해 비워야 할 것들을 과감하게 비울 줄 아는 결단은 우리의 영성을 더욱 맑게 하고 하나님이 주신 이 땅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채움이다. 권정생은 다 쓸어져가는 어눌한 집에서 골골한 몸을 이끌고 평생 모은 5,000만원을 북한 어린이에게 보냈다. 채희동은 2천만원짜리 좁은 전셋집에서 곤궁한 삶을 살면서도 '샘'이라는 계간지 발행을 놓지 않았으며 장기려는 평생 집한 채 없이 부산복음병원 옥탑에서 살면서 가난한 환자들의 치유를 위해 애썼다. 한국 기독교를 일깨운 지도자들의 스승 유영모는 농사를 짓고 벌을 치며 전깃불도 없이 살면서 하루에 한끼만 먹으며 잠도 널빤지에서 자는 고행의 삶을 살았다.
사람들이 볼 때 그러한 삶을 고행이거나 궁상맞은 가난으로 볼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스스로 걸레가 되고자 했던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지시대로'혹은 '깨달은 그대로'살아가는 정행(正行)이었다. 우리는 이들의 정행이 있었기에 세상에 참과 거짓을 가르는 기준을 갖게 되었다. 가장 강력한 비전, 가장 분명한 기준이란 바로 '내가 그렇게 사는 삶'이다.
알듯 모를듯
솔직히 『울림』은 술술 읽어지기도 하고 어떤 대목에서는 깊이 생각하게 한다. 마치 한권의 책을 읽으며 수십 번의 고개를 오르내리는 기분이다.
권정생이 말한 것처럼 무슨 일이든 관성적으로 '하나님 의 뜻'에 갖다 붙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습성은 옳지 않다. 분명 그것은 인간이 한 것이며 그에 대한 책임 또한 인간이 지어야 한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러한 자유의지를 허락한 것일까. 아직은 혼란스럽지만 아마도 인간의 선택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지극한 사랑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우리가 혼란에 빠질 때 하나님은 이현필을 통해, 최흥종을 통해 우리에게 정형을 보여주시는 것으로 그분의 목소리를 대신하신다.
다석 유영모의 이야기는 읽을수록 너무 심오해서 그 말씀을 십분의 일도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예수 혼자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얼의 씨를 키워 로고스의 성령이 참 나라는 것을 깨달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얼의 씨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참 어렵다. 다만 육체는 참 나가 아니며 참 나를 찾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얼의 씨를 키워야 한다는 말을 이해할 뿐이다. 함석헌은 인간과 자연이 구별되는 생명의 본질은 '스스로 함'에 있다고 했다. 사람이 더욱 사람다워지려면 내 안에 있는 생명력을 키워야 한다. 즉 '저절로 됨'이 아니라 삶에서 수많은 의미들을 찾아내고 이를 이루고자 하는 '스스로 함'이 있어야 한다. 적어도 내게 다석 유영모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 뜻을 찾고 그 안에서 '스스로 함'을 키워온 가장 참 생명에 가까운 분이다.
스스로 길이 된 사람
그 밖에도 내게 수많은 알듯 모를 듯 한 물음들이 있다. 물론 몇 페이지의 기록들로 이 분들의 영성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을 통해 내가 얻은 가장 큰 감명은 '내가 그렇게 살아서 스스로 길이 된 사람들의 참 울림'이다.
그럭저럭 좋은 말들은 세상에 넘친다. 하루에도 수많은 명문장과 명언, 이론과 학설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은 실제 그리 사는 삶을 통해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감동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산 삶'만큼 우리에게 강한 울림은 없다. 우리는 광주YMCA에서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함께 배우고 훈련하며 역사적 책임의식을 계발하고 사랑과 정의의 실현을 위하여 일하며 민중의 복지 향상과 새문화 창조에 이바지 함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려는 사명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간사가 되었다.
오늘 내가 살아야 할 삶의 주소, 내가 비워야 할 군더더기와 내가 채워야 할 충만함이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눈을 감고 간절한 마음으로 손을 모은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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