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당/차 한잔의 여유

오래전부터 마음으로 이어져 내려온 신령스러운 동물이 우리 민족의 상상력으로 다시 한번 다듬어져 태어난 것

▪살림문화재단▪ 2013. 4. 15. 22:57

 

고정 음률을 가진 악기로 금부(金部)에 속하는 대표적인 아악기로 한 단에 8개씩 두 단의 나무틀에 16개의 종을 매달아 놓고 각퇴(쇠뿔)로 쳐서 소리낸다. 종의 크기는 모두 같고 두께에 의해서 음높이가 결정되는데, 종의 두께가 얇으면 소리가 낮고,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그 소리가 높아진다.



위의 그림에서 보시다시피 틀은 2단으로 구성되어 위아래로 8개씩 종을 매달게 되는데 아랫단 오른쪽으로 갈수록 낮은 음을 내고 윗단 오른쪽으로 갈수록 높은 음을 낸다. 소뿔 끝을 잘라 자루를 달아 만든 각퇴(角槌)로 하나씩 쳐서 소리를 낸다.

이 악기는 본래 중국 고대의 대표적인 악기로 고려시대(예종11, 1116년)때 송나라에서 들어왔으며 그 후 계속 수입해 써오다 조선 세종(15세기) 때부터 (경기도 남양에서 무늬가 아름답고 소리가 많은 경돌을 발견한 후에는) 주종소(鑄鐘所)를 두고 직접 만들어 사용하였다. 두 개의 방대 (方臺) 위에 목사자(木獅子) 한 쌍을 앉히고 그 위에 종을 달 나무틀[架子]을 세워 양편에 용두(龍頭)를 조각하고 틀 꼭대기에는 다섯 마리의 목공작(木孔雀)을 세워 장식하였다.

고려시대에 송에서 들어왔을 때는 정성(12율 4청성)과 중성(12율)이 있었으나 조선 이후 현재에 전하는 것은 모두 정성에 속한다.
당시에 중국계 아악에 편성되던 편종과 편경 등의 악기는 12율(c-b) 4청성(c', c'#, d', d'#)을 가진 정성과 12율만 가진 중성의 두 종류로 나뉘어 있었다. 정성의 편종은 16반음이므로 16개의 종을 가졌고, 중성의 편종은 12반음을 가졌으므로 12개의 종을 가진 악기이다.
조선조 세종 때까지는 이 정성과 중성의 악기를 다 썼으나, 성종 이후 현재까지 사용된 편종은 이 가운데 정성에 속하는 악기이다.

제례에 쓰는 편종은 장식없이 순검질박(純儉質朴)하게 만들고 조회(朝會)나 연향(宴饗) 에 쓰는 편종은 화사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썼다.

종묘제례악, 문묘제례악, 제향악, 낙양춘, 보허자, 해령 등의 연주에 쓰인다.
귀신 쫓는 해태 '元祖'는 사자/ 중앙일보.1997.3.29.

서울 광화문 앞에는 해태상이 있다. 경복궁이 처음 지어질 때 세워진 것이 아니라 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중수되던 1894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해태는 옳고 그름과 선하고 악함을 판단하는 상상의 동물로,이미 고대사회때부터 등장해 봉건군주의 기강과 위엄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자리를 잡았다.

시선을 옮기자면 경주의 분황사탑에선 돌사자가 보인다. 돌사자는 여러 문물과 마찬가지로 서역으로부터 중국을 거쳐 전해진 것인데 불교의 전래와 시기를 같이한다.그런데 왜 어디는 해태고, 어디는 돌사자인 것일까.

조선 시대에 이르러 유교가 국가 통치이념으로 채택되면서 불교문화는 조금씩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에 따라 사자의 모습도 조금씩 변화하게 되었고,전형적인 사자 모습과는 다른 해치(해치)또는 해태라는 동물이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는 우선 궁중에서 사용하던 여러 기물과 사찰에서 쓰이던 의식구(儀式具)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성종 24년(1493년)에 편찬된'악학궤범'을 보자. 아다시피 그것은 악기의 종류를 모아 정리하면서 제작방법을 그림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편종에 나타난 받침동물의 변화상


왼쪽부터 악학궤범ㆍ경모궁의궤의 사자ㆍ자경전 진작정례의궤


왼쪽부터 순조기축진찬의궤ㆍ국립국악원 소장의 해태ㆍ광화문앞 해태상

여기에 나와 있는 편종(編鐘:서로 다른 16개의 종을 2단의 나무틀에 매단 타악기 일종)의 모형도에는 온몸이 긴털로 뒤덮인 사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아마도 편종의 웅장한 소리를 사자가 포효하는 소리로 상징화함으로써 궁중의식에서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려는 벽사(피邪)의 의미를 강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정조 18년(1794년)에 정조가 사도세자에게 존호를 바치고 그의 사당을 경모궁으로 격상한 내용을 기록한 경모궁의궤(景慕宮儀軌:의궤는 조선시대 국가와 왕실 큰 행사의 진행과정을 기록한 것)에도 편종 그림이 있다.

편종의 받침대 동물은 목갈기가 뚜렷한 사자지만 악학궤범에서의 사자 모습과 비교하면 몸체가 전체적으로 두루뭉실해진 느낌이다. 결정적인 변화는 순조 27년(1827년)에 제작된 자경전진작정례의궤(慈慶殿進爵整禮儀軌)에서 찾을 수 있다. 효명세자가 부왕 순조 내외에게 존호를 올린 것을 기념하는 진작정례를 묘사한 이 책자에서 편종의 받침동물은 온몸이 점으로 얼룩진 해태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두해 뒤에 제작된 순조기축진찬의궤(純祖己丑進撰儀軌)의 편종 받침동물 역시 진작정례의궤와 비슷한 해태다. 요컨대 1493년의 악학궤범에는 목사자(木獅子)가 등장할뿐 해태는 없다. 그것은 경모궁의궤에서도 마찬가지다. 이후 1827년과 1829년에 편찬된 의궤에서는 사자가 해태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근대작으로 현재 국립국악원에 남아있는 편종 받침동물은 매화꽃무늬가 온몸에 그려져 있고 목에는 방울을 단 푸른색의 해태 모습이다. 이같은 변화는 18세기 이후에 일어난 우리 문화의 변동을 말해주는 특수한 예에 해당한다.

갈기털을 휘날리는 사자와 해태가 모두 벽사와 수호의 의미를 나타내는 동물이기에 이들은 서로 거부감없이 모습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아니면 오래전부터 마음으로 이어져 내려온 신령스러운 동물이 우리 민족의 상상력으로 다시 한번 다듬어져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을 것같다.

이재열<경북대 미생물학과 교수.고미술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