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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운동가 박영숙 81세로 저승에서 새 삶을 시작...

▪살림문화재단▪ 2013. 5. 17. 18:48

 

여성운동가 박영숙 81세로 소천
“공적인 어머니 되겠다”
어린 시절 꿈대로 한평생 여성운동 투신

 

▲ 한국여성재단에서 여성신문과 만난 생전의 박영숙 전 이사장. 대학생 시절부터 시작해 여성· 환경· 정치 운동을 두루 거쳐온 박 이사장은 마지막 ‘운동’ 목표를 여성재단을 통해 미래 세대의 딸들을 키우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로 정해 전력투구했다. ©여성신문
17일 81세로 소천한 박영숙 전 한국여성재단 이사장의 삶은 그 자체로 한국 여성운동사다. 박 전 이사장은 시대가 요구하는 부름에 숨지 않고 결연히 나섰다. 역동적인 여성운동사가 그의 개인사에 그대로 녹아나는 여성운동의 산증인이었다. 여성운동의 고비고비에서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는 1932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과 만주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다시 평양의 정의여학교, 전라남도 광주의 전남여고를 거쳐 이화여대를 졸업했다. 모친이 말한대로 “난리통(亂中)에 태어나 난(難) 속에서 사는 아이”였던 셈이다.

박 전 이사장은 생전에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여성의식이 언제부터 생겼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데, 나는 사회적으로 활동하기 이전에는 차별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지역 분위기도 그랬지만 집 분위기도 누구를 차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호떡을 사와도 똑같이 나누고, 밥을 푸는 것도 아버지 것을 먼저 푸고 자녀들은 태어난 순서대로 했다고 한다.

박 전 이사장의 가족은 월남 후 작은 아버지의 근무처인 전남 광주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연고로 후에 평민당 부총재가 됐을 때 세간에선 “박영숙이 광주 사람이어서 김대중의 사람이 되었다”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가 9살 때 29세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책임감이 강하고 융통성보다 충실함이 내재된 사람이었다. 둘째딸이면서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족들을 책임질 의무를 어머니와 함께 지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래서 젊고 아름다운 과부 어머니를 남정네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감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화여대 영문과에 입학한 그는 멋을 내고 낭만에 잠기는 평범한 여학생은 아니었다. YWCA 활동에 열성적으로 가담하면서 민족과 민중을 가슴에 품은 열사였다.

그는 소학교 시절 친구들과 놀며 자신의 꿈은 ‘공적인 어머니’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인생에서 한번 겪을까 말까 하는 사건들 속에서 잊었을 법도 한 꿈이 심장 한 부분이 되어 숨결처럼 살아있었던 것 같다. 전쟁 중엔 YWCA 활동을 통해 전쟁고아와 피난민들을 도우며 모든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대학시절 내내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는 농촌 계몽활동을 하며 이웃사랑을 실천하곤 했는데 나중에는 아예 한 학기를 휴학하고 지역에 내려가 무료로 영어를 강의했다.

개인보다는 민중, 이웃이 우선이었던 그의 삶은 YWCA에서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활약했다. 훈련간사부터 시작해 총무, 실행위원 등 회장만 빼고 모든 직책을 다 섭렵했다. 숱한 고난과 희망의 세월을 함께 하며 박영숙을 민중의 어머니가 되게 한 남편 안병무는 박영숙의 평생의 멘토였다.그는 생전에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평생의 조언자요 울타리인 안병무 선생과 결혼한 것이고, 진정한 기도를 가르쳐준 스승이 있다면 목숨보다 소중한 아들”이라고 했다.

박 전 이사장은 YWCA에서 시작해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한국여성단체연합, 평민당 부총재, 13대 국회의원 등을 두루 거쳤다. 다양한 사회운동을 펼쳤을 뿐 아니라 유엔환경개발회의 한국위원회 공동대표, 대통령직속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한 여성 환경운동의 선구자였다. 어느 곳에서든 책상을 지키는 리더는 아니었다. 누구라도 공감하는 그의 이름 앞에 붙는 형용사는 ‘움직이는 지도자, 실천하는 지도자’다. 그의 그러한 삶의 모습은 여성정치가로서 평민당 부총재로 정계에 두각을 나타냈을 때도 한결같았다. “운동력 있고, 실천하고, 일하는 여성정치인”이었던 것이다.

정치활동의 생명은 길지 않았지만 가족법, 남녀고용평등법 개정 등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역동적인 원내 활동을 펼쳤다. 이렇듯 활기 넘치는 정치활동을 했지만 정당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있다고 말한다. 그는 여성신문 인터뷰에서 “정당에 여성들이 들어가지 못하면 계속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다. 정치를 순화시키고, 생활과 직결되는 정치, 생태계와의 조화를 생각해야 하는 앞으로의 시대에는 남성들과는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는 여성이 많이 진출해 강자 위주의 정치구조와 성격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성단체협의회 사무처장 활동 이후 1976년 민중신학자인 남편 안병무 선생이 ‘3·1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투옥된 것을 계기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남편은 민주화운동으로 감옥에도 갔고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 사람 덕에 민주화운동에도 참여했고 사명의식을 터득하게 됐어요. 사회적 약자에 대해 생각하면서 넓은 의미의 시민운동을 하게 된 거죠. 정치활동도 그 영향을 받았습니다.”(여성신문 인터뷰 중에서)

여성 지위향상 운동에서 여성의 인간화, 가족을 감옥에 보낸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어머니들과 여성노동자들, 구속학생들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여성들이 겪는 고난에 합류하면서 더 민중적인 여성운동, 더 현실적인 여성운동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1999년 한국여성재단을 창립해 여성운동의 외연을 확장시킨 것도 빼놓을 수 없다. 90년대 말 새천년을 구상하면서 여성 중진, 원로들은 후진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했었다. 그들은 먼저 4000여개의 군소 여성단체들이 재정의 어려움을 겪는 현실을 성찰했다. 이어서 정파와 이념을 초월한 120여개의 여성단체들이 당시 영부인이었던 이희호 여사를 명예추진위원장으로 옹립하고, 각계 원로 58명이 공동추진위원장으로 추대되어 재단을 설립하였다.

여성재단은 성차별이 심한 한국 기부문화의 벽을 넘어 1000억원 기금 모으기 운동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이 귀한 기부금들은 성경 속에 나오는 과부의 엽전 한닢처럼 여성단체와 여성활동가들을 위해 소중히 쓰이고 있다.

<이 기사는 여성신문에 연재된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 여성사-박영숙 편’을 기초로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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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9호 [사회] (2013-05-17)
박길자 / 여성신문 기자 (muse@women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