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명칼럼니스트/관찰과 상상력 대표
[살림칼럼]만나자. 무조건 만나자
김 예 명 / 관찰과 상상력 대표
중년이 된 여인이 몸에 장신구 하나 걸치지 않은 경우는 드물다. 내 몸을 아름답게 치장하기 위해서라고 간결하게 이유를 말할 수도 있지만, 얼굴과 목, 손에 주름이 잡히면서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급격히 떨어지면 귀고리도 하고 싶고 목걸이도 하고 싶고 알 박힌 반지도 하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것은 또한 내가 이만큼 열심히 살아왔는데 이 정도도 하나 못 해?하는 오기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금속 공예를 전공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돋보였다. 주로 은을 소재로 귀고리, 목걸이, 반지, 팔찌, 브로치 등을 만드는 그녀는 자기에게 어울리는 장신구들을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알았다. 깔끔하게 정리된 작업실에서 나로서는 처음 보는 도구들로 장신구를 만드는 그녀의 모습은 정숙한 매력이 있었다.
그런데 발길이 잦아지면서 새로 발견한 그녀의 모습이 있었으니, 그녀가 별로 웃지를 않는다는 것이고 머리는 처음 본 그대로 늘 숏 컷트며 ‘나는 그런 게 싫어.’ 와 같은 부정적인 표현을 자주 쓴다는 점이었다. 옷도 주로 흰색, 검정색, 파랑색 위주로만 입었다. 어느 날 내가 진분홍색 운동복 차림으로 작업실을 들렀더니 머리가 어지럽다고 할 정도로 그녀의 색감은 편협했다.
그녀의 장신구들만큼 화사한 아름다움이 그녀에겐 없었다. 내가 그녀에게서 고독의 냄새를 맡기 시작할 무렵부터 술자리를 함께 할 만큼 친분이 생기자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남편하고는 말하기가 싫어요. 각 방을 쓴 지 오래 됐어요. 내가 그 인간 때문에 참고 살아온 게 억울해요...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치장을 위해 장신구를 만들며 지극한 몰입을 할 줄 알았던 그녀였지만 정작 남편하고는 고립된 사이라고 했다.
그리고 최근 그녀는 유방암 판정을 받고 말았다. 애써 의연한 척 태연한 척하며 그녀는 작업실을 정리했고 긴 투병에 들어갔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 보다 딸의 가슴에 슬픔의 독을 남기게 되는 게 두렵다고 했다. 딸을 위해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노라 다짐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틀렸다. 누구를 위해 참고, 누구를 위해 살아야겠단 말인가. 그녀는 오로지 나 자신을 바라보아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편안한 것, 내가 행복한 것들을 찾아나가야 한다. 나를 위해 살다가 죽을 때는 나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질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이 위태로워졌다면 누군가를 위해 견디는 것은 한계가 있다. 표현하고 배설하지 못 한 내 마음은 꽉 막힌 밀폐 공간이 되어 언젠가는 유독 가스로 가득 찰 수밖에 없고 결국 폭발하고 말 것이다.
내 안에는 다양한 내가 있다고 했다. 성인이라 해도 그 마음 안에는 개구쟁이 같은 아이, 물고 빨면서 보살펴주는 엄마, 달콤한 사랑을 주는 애인, 함께 놀 수 있는 친구, 가르침을 주는 선생님 등 많은 인물이 들어 있다. 내 안의 이 다양한 인물들이 언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잘 헤아려 볼 일이다. 또한 내 안의 다양한 감정들을 적재적소에서 자유자재로 끄집어내어 표현할 일이다. 나 자신과 평화롭게 만나는 이 기술은 일찍 배울수록 나의 ‘숨통’이 된다.
우리는 인생길을 ‘시지프스의 형벌’에 비유하곤 한다. 기껏 산 위로 끌고 올라간 바윗돌은 올라간 순간 굴러 떨어지고 시지프스는 또 다시 끙끙대며 바윗돌 올리기를 반복하는 이 형벌. 산 위에 선 시지프스는 매 번 허무하다. 그래도 멈출 수 없는 반복의 고통. 프랑스의 실존주의 작가로 알려진 알베르 카뮈는 작품에서 이 시지프스의 형벌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한편에선 이런 주장을 하였다. “ 인생은 부조리하다. 그러므로 자살하는 게 낫다. ” 여기에서 끝냈다면 카뮈가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유명한 작가는 아니 되었을 것이다. 이어서 그는 말했다. “ 죽음은 문제에 대한 도피다. 인간은 어떻게든 살아서 당당하게 세상과 대항해야 한다. ” 이것이 카뮈식 ‘반항’이다. 멋지지 않은가? 반항이 일탈이나 거부가 아니라 부조리한 세상과 한 판 ‘맞짱뜨기’라는 사실이. 시지프스의 형벌이 반복의 고통이 되지 않는 길도 여기에 있다. 허무해하지 않기. 산 위에 올려놓은 바윗돌이 다시 굴러 떨어진다 해도 굴려 올리는 그 과정에 의미를 두고 정상에 섰을 때 보람을 느낀다면? 더 이상 형벌일 리가 없지 않은가.
금속공예가인 그녀는 남편과의 오랜 갈등 속에서 스트레스가 심하다보니 유방암에 걸렸다고 짐작했다. 그녀는 그러한 갈등에 아무런 의미 부여도 못 했던 걸까? 부조리한 세상에서 나 자신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 한 미성숙한 성인끼리 만나 사는데 어떻게 순탄할 수가 있겠는가. 부부 각자가 나를 만나는 노력을 함께 했다면 몸속의 암세포에게 ‘반항’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니, 우리 이제 만나자. 무조건 만나자. 내 안의 다양한 인물들을. 내 마음을 바람과 공기가 통하는 열린 공간으로 만들어보자.
[원문 바로가기]http://blog.daum.net/yiwoosong/13483433
e-mail: munch-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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