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선통권 55호【이사람】『 죽음에서 건져올린 참 생명 - 서호승신부 (5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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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병찬 - |
<<이 사람>> 욥은 어느 날 재산을 모두 잃었다. 가족도 잃었다. 친구들도 떠났다. 그리고 몸에 병도 얻 었다. 그는 천천히 그러나 가장 확실하게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었다. 그는 모든 걸 잃었지만 하느님에 대한 믿음만큼은 잃지 않았다. 그에 비해 대한성공회 전주 희망교회 서호승 신부에게 불행은 어느 날 갑자기 전면적으 로 찾아 왔다. 벌써 3년여 년 전의 일이다. 목숨을 정면으로 겨냥하고 찾아온 불행이어서,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 와중에 그는 내 안의 하느님을 만났다. 그때 그가 몸서리치게 겪었던 좌절과 절망은 지금도 선명하다. “2000년 10월이었죠. 눈이 침침하고 광대뼈가 붓길래 안과엘 갔더니 ‘별 것 아니라’며 돌 려보내더군요. 그러나 상태가 좋아지질 않아 종합병원엘 갔죠. 이비인후과 담당 의사는 사진을 보더니 대뜸 그러더군요. ‘상악동암 3기입니다. 안구에까지 전이됐군요.’ 의사는 솔직하고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정신이 아뜩해졌습니다. 늪 속으로 깊이 빠 져드는 것 같았고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의사도 보이지 않고, 책상이며 의자며 방안의 집 기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벌건 대낮이었는데. 그때 내가 앉아있던 그 높은 의자에서 어 떻게 내려왔는지, 병원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지금도 나에겐 아무런 기억도 없습니다.” 수술날짜는 한달 뒤로 잡혔다. 눈앞이 캄캄한 날들은 계속됐다. 그저 죽음만 오락가락할 뿐이었다. 고작 나오는 말이라곤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였다. 그런데 이 말이 씨가 되어 나 자신을 성찰하게 됐다. 나는 누구일까. 평화와 자유를 설교하던 나는 과연 평화롭고 자 유로웠는가. 교회의 규모를 늘리고, 신도를 늘리고, 좀더 이름을 알리기 위해 얼마나 안달 했던가. 그 집착은 어디서 온 것일까. 보름쯤 지나서 정밀진단을 받기 위해 엠알아이 촬영 을 하게 됐다. 그 시끄러운 소음 속에 가만히 누워 있을 때 문득 이 한 마디가 떠올랐다. “내 생명은 내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것일 뿐이다.” 그때부터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밥도 잘 먹었다. 보름 뒤 수술하기 위해 체중을 쟀더니 3kg이나 늘어 있었다. 나의 것이라 고 하는 모든 것들을 탁 놓아버린 탓이었다. 나의 생명은 바다에서 이는 파도와 같다. 파 도는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없어지는 게 아니라 바닷물로 돌아가고, 다시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파도로 되살아난다. 그러니 죽은들 어떻고 다시 산들 어떠랴. 그건 바다의 뜻이 고 하느님의 뜻이다. 모든 걸 손에서 놓으니, 아니 하느님께 맡기니 수술이나 치료과정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금 그에겐 한 쪽 눈이 없다. 단순히 실명한 게 아니라, 왼 쪽 눈 안구 자체가 없다. 빈 자리는 반창고로 가려져 있다. 왼쪽 광대뼈(상악동)도 없다. 입 속의 왼쪽 어금니 등도 없다. 코 왼쪽 부분이 움푹 패어 있다. 사실 그는 오래 전부터 병들어 있었다. 제 마음이 평안해야 신도들도 편하게 할 텐데 그 의 마음은 언제나 불안했고 불편했다. 교회 식구가 늘지 않는 것도 걱정이었고, 다른 교회 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커가는 것이 부끄럽고, 교회 규모가 매양 그렇고 그런 것도 착 잡했다. 그러면서 그 원인을 밖에서 찾았다. 교인들의 신심이 부족하다느니, 교단이 도와 주지 않는다느니 따위가 그것이다. 게다가 생뚱맞은 진단일지 모르나 음식을 얼마나 잘 못 먹었는가. 음식은 생명이다. 식사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행위고, 생명의 창조 행위이 다. 밥상에는 생명의 창조와 유지와 성장 이 모든 것이 올라있다. 그러나 이 밥상과 음식 을 얼마나 소홀히 했던가. 풀과 곡식보다는 고기, 적당한 양보다는 폭식을 즐기지 않았던 가. 지금 그는 하루에 밥 반공기씩 2끼, 입 줄기 뿌리를 가진 5가지 생야채를 매끼마다 먹 는다. 비록 몸무게는 50kg 밖에 안 되지만 몸은 물론 마음이 날듯이 가볍다. 얼굴의 1/3을 도려내는 수술을 끝낸 뒤 1년간 휴직하며 그의 성찰하는 삶은 계속됐다. 자 신에 대한 성찰이 깊어질수록 자신의 본 모습을 가려왔던 찌꺼기들이 걷혔다. “그동안 나 는 가짜 주인에게 휘둘려 살았습니다. 자존심이나 위신이나 체면 따위가 나를 지배했던 거죠. 그것의 지배가 강할수록 나는 부자유스러웠고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본질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었습니다. 나는 없습니다. 공한 존재죠. 마치 가을 하늘과 같은 것입 니다. 구름이 가려있다고 푸른 하늘이 사라지거나 바뀌는 게 아닙니다. 하늘은 언제나 거 기에 그대로 있는 것이죠. 본래 모습 즉 비어있음을 드러낼 때 하늘나라는 나타납니다. 예 수님께서 말씀하신 ‘네 가운데 있다는 그 하늘나라’가 말입니다. 불가에선 그 찌꺼기를 걷 어내는 행위를 수행이라고 하는데 우리에겐 피정이 있지요. 불교 용어로 말하면 하느님 을 보는 것이 견성입니다. 제 마음의 원래 모습을 보게 되면 성불한다고 하듯이 내 마음 속 하느님을 보면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에게 복음서는 수행의 지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나의 삶을 반성하고, 나의 본 질을 바로 보고, 생명의 참 모습을 살피게 하는 화두라는 것이다. 그가 즐겨 신도들과 함 께 듣는 성경 말씀은 ‘너희가 진리를 알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너 는 어디에 있느냐’(창세기) 등이다. “예수가 세상에 온 것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고 얽매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런 데 왜 믿는 사람들마저 마음이 항상 불편하고, 부자유한 걸까요. 문제는 안에 있습니다. 밖에 있는 게 아니죠. 우리가 비어있는 존재임을 깨닫고 세상의 모든 집착과 자만을 놓아 버리면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죄 짓고 숨어버린 아담과 하와에게 던 진 ‘너는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은 단순히 장소를 묻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실존적 상황 을 돌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너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이죠.” 밥을 바라본다고 배가 불러지지 않는다. 먹어야 한다. 하느님도 그저 바라만 본다고 내 삶 이 달라지지 않는다. 하느님과 내가 일치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성서에서 말씀을 받아 부단히 내 마음의 밭을 일굴 때 이루어진다.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예수 믿고 천당 가자’ 고 말한다. 그러나 부산이나 광주에서 서울에 오려면 기차든 버스든 혹은 걸어서든 주어 진 길을 가야 하듯이 천당에 가려면 가야할 길을 가야만 한다. “내 마음엔 우물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이 겪게 되는 불안과 초조 등의 목마름 을 씻어줄 샘물이 솟는 우물입니다. 그러나 세상 욕심과 집착과 허명으로 우물은 메워져 있습니다. 그것을 파내는 도구가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성탄이든 부활이든 그것은 예수의 것에 머물러선 안 된다. 나의 성탄과 부활을 이뤄야 한 다. 예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몸으로 와서 성탄과 부활을 이룸으로써 세상 사람도 할 수 있는 것임을 증거했다. 그것이 거듭남이고 깨달음이다. 하느님은 바라보는 대상이 아 니다. 내가 도달할 경지이고, 내가 깨달아야 할 본성이다. 예배를 드리는 것도 하느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다. “전능한 하느님에게 예배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때문에 그는 예배를 최대한 간소하게, 신도들을 중심으로 집행한다. 신도들을 교회에 잡 아두고 선교하도록 독려하고, 헌금 많이 내도록 유도하는 일체의 행사를 없앴다. 예배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본래 모습을 성찰하는 시간이고, 교회는 하느님 안에서 모 든 것을 놓고 쉬고 가는 곳이란 생각에서다. 일주일 내내 사회의 일에 찌들어 있을 텐데 교회에서까지 부담을 줘서야 되는 걸까? 그는 대신 주일예배가 끝나면 수행 시간을 뒀다. 화두로 성경 말씀을 간단한 해제와 함께 던져 주면 신도들이 각자 편한 자세로 묵상하는 시간이다. 1년에 4차례(부활절 성탄절 감사절 수련회) 정도 토요일 오후에 모여 1박 2일 동안 묵상에 잠기는 행사도 갖는다. 1시간 정도 주어진 말씀에 대해 설교하고 나머지 시간 은 신도들로 하여금 온전히 그 구절을 곱씹게 한다. “교회는 소리 없이 수행하고, 수행의 방편으로 소리 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곳입니다. 교인 들로 하여금 사회생활에서 졌던 짐을 내려놓고, 수행을 통해 상처 난 마음을 치료하고, 수 행을 통해 얻은 영적인 힘으로 사회에서 맡은 일을 더 잘 해내도록 부촉해주는 곳이죠. 사 회적 일이란 단순히 생계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웃과 사회를 섬기고 상생을 위해 협력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봉사활동이다 뭐다 하여 일을 벌이기보다는 사회에서 맡은 일을 잘 하는 게 봉사이고 섬기는 일입니다.” 전주 희망교회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전북지역 운동가들이 일을 논의하고 벌이던 중심 이자 쉼터로 기능했던 곳이다. 그러나 교회 규모는 참으로 작다. 매주 교회에 나오는 신도 가 어른 30여명, 아이들 10여명이다. “성철스님이 포교를 열심히 해서 한국불교를 중흥시킨 것은 아닙니다. 산속 깊은 곳에서 철저하게 진리를 향해 수행하고, 진리 속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저나 우리 신도가 종교 인으로서 제대로 사는 게 중요하지 규모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한국교회의 병은 바로 그 수행을 게을리 한데서 비롯됐다고 그는 사족을 덧붙였다. 서 신부는 지난 89년 수품했다. 음성나환자촌 성생원을 운영하는 경기도 남양주 성당에 서 처음 목회활동을 시작했고, 부산 주교좌성당을 거쳐 지금의 희망교회로 왔다. 그는 최 근 니고데모의 참회라는 책을 내어 자신의 경험을 담았다. 니고데모는 백성의 지배자라 는 뜻의 이름으로, 유대인 지도자였다. 정교 일치 사회에서 돈과 명예를 쥐고 율법가로서 심판까지 하는 막강한 권력자였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깊고 그윽한 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예수를 찾아간다. 병들어가는 마음을 고칠 수 있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그는 예수 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자존심과 체면을 차례대로 모두 내려놓고, 내면의 불안을 털어놓 게 된다. 그리고 교만과 위선으로 가득 찬 삶을 참회하게 된다. 니고데모는 수술하기 전 자신의 자화상이자 우리 시대 목회자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서 신부는 말했다. 곽병찬 / 편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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