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핌 안에 구원이 있다
며칠전 문안을 드리기 위해 한 노스님을 찾아뵌 일이 있다. 한동안 뵙지 못해
안부가 궁금했고 의논드릴 일이 있어, 산중의 암자로 찾아갔었다. 그날은 눈발이
흩날리는 영하의 날씨였는데 노스님이 거처하는 방안이 냉돌처럼 썰렁했다.
왜 방이 이렇게 차갑냐고 여쭈었더니 노스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요즘 세상에서는 한뎃잠 자는 사람이 부지기수인데 시주밥 먹고 사는 중이
어찌 방안을 따뜻하게 할 수 있겠는가.”
▼썰렁했던 노스님의 방▼
산중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땔감을 두고도 일부러 군불을 조금밖에 지피지
않아 썰렁한 방안. 노숙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팔십노인의 그 꿋꿋한 의지에
나는 더 할말이 없었다. 그날 그처럼 썰렁했던 노스님의 방이 요즘의 내게는 화두
처럼 가슴에 걸려 있다.
겨울의 문턱에 들어선 이때, 일터를 잃고 실의에 빠져 거리를 헤매는 실업자
가 2백만명에 가깝고 집을 나와 한뎃잠을 자는 노숙자 또한 적지 않은데 이 겨울
을 어떻게 견디어 낼지 암담하고 우울하다. 이런 일에는 정부만의 힘으로는 한계
가 있기 때문에 뜻있는 이웃들이 거들면서 우리 시대의 어려움을 함께 이겨나가는
길밖에 없을 것 같다.
어둠 속에도 빛이 있듯이 어떤 최악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우리들의 삶에는
잠재적인 의미가 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실직과 노숙에서 오는 고통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서게 될 것이다.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 아래서도 능히 견디어 낼 수 있다.
이 세상을 고통의 바다라고 했듯이, 산다는 것은 즐거움과 함께 고통이 있게
마련이며, 살아 남는다는 것은 고통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아내는 일이다.
나는 외람되지만 내가 살아온 길목마다 내 등뒤에서 나를 속속들이 지켜보는
‘시선’이 있음을 굳게 믿는다. 그 시선은 이대로 내가 게으름을 피우거나 엉뚱
한 생각을 할 때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때로는 꿈속에서그목소리가 나를 불러
깨울 때도 있다. 그 시선은 지금 살아계시거나 이미 돌아가신 우리들의 어머니나
아버지일 수도 있고 할머니나 할아버지일 수도 있다. 혹은 사람마다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는 수호천사일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부처님일 수도 있다. 무어라고
부르든 이름에는 상관없이 그 시선은 늘 나를, 그리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삶의 가치척도 반성을▼
그 시선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고통을 비극적인 모습이 아니라 자랑
스럽고 꿋꿋하게 이겨나가는 모습으로 보고 싶어 할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난해 이맘때 나는 네팔과 인도 히말라야의 가난한 산촌을 여행하고 있었다.
현재 우리들의 생활수준과 견준다면 겉으로는 말할 수 없이 열악한 수준 이하의
삶을 이루고 있었지만, 그들은 도시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따뜻한 인정과 맑은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그들은 나에게삶의가치 척도를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
것인지를 두고두고 생각케 했다.
귀국하기 위해 뉴델리에 들렀을 때 숙소의 텔레비전 화면에서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이 거덜난 나라살림을 국제구제금융에 호소하는 뉴스를 보고 나는 온몸에
열이 나고 몸살기운이 번졌었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자탄하게 되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이 세상 일은 돌발적으로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
라 제 손으로 뿌려서 제 손으로 거두는 인과관계의 고리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새로운 씨를 뿌려서 새로운 열매를 거둘 수 있다는 논리다.
그동안 물신(物神)에 현혹되어 빗나간 우리들의 인성이, 오늘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제 자리로 돌아오려면 먼저 삶의 가치가 새롭게 정립되어야 한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다운 삶인지, 근원적인 물음
앞에 마주서야 한다.
▼이웃고통 함께 나누길▼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나누는 것이다.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는 일이야말로 사람의 도리이고 인간이 도달해야 할 궁극적
인 목표다.
우리들에게 구원이 있다면 추상적인 신이나 부처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웃에
대한 따뜻한 보살핌을 통해서, 그리고 그 보살핌 안에서 이루어진다.
겨울의 문턱에서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