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담방/불가의 도담방

설법 : 청화 큰스님

▪살림문화재단▪ 2011. 8. 15. 09:49

 

영생해탈의 길

 

 

                                                                                       淸華큰스님



   아함경(阿含經)에 "영생해탈(永生解脫) 의 길은 분명히 있고, 영생해탈을

가르치는 나도 있고, 그러나 중생(衆生)들이 어리석어서 가고 안가고 하느

니라"하는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오늘은 다 아시는 바와같이 부처님의 열반절 (涅槃節)입니다. 부처님이

열반(涅槃)하실 때, 부처님을 25년동안이나 모셨던, 그 총명(聰明) 하고 성

실(誠實)한 아난존자는, 부처님이 가시는 장엄스러운 부처님의 열반에 즈

음해서 자기 (自己)를 가누지 못하고, 통곡(痛哭)해서 오열 (嗚咽)해 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불교를 배울 때, 보통은 불교(佛敎) 라하는 것은 "생사(生死)를 초

월한다" "본래( 本來) 생()도 없고, 죽음도 없다"하는 그런 가르침으로 일

관(一貫)되어있는 것인데, 하물며 부처님을 25년동안이나 모신 아난존자가

그와 같이 자기의 감정을 가누지 못해가지고서 오열에 잠겼단 말입니다.

   어째서 그러했던 것인가? 아난존자가 열반이라하는 지극한 높은 뜻을 모

를리가 만무합니다. 우리는 오늘 열반절에 당해서, 열반의 뜻을 우선 좀 간

단히 새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열반(涅槃) 그러면 「신지구멸(身智俱滅)」 이라 - 몸도 멸하고, 또는 의

식(意識)도 멸한다 - 는 말입니다.

   물론 부처님 열반도 그와 같아, 부처님의 몸도 화장(火葬)되어서 응당 멸

해버릴 것이고,또는 부처님의 의식활동도 없어져 버립니다.

   따라서 마땅히 열반 뜻 그대로 신지구멸이라 , 부처님 몸과 의식(意識)이

소멸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느끼고 또는 좋아하고 기뻐하고, 그런 차원에서 본

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은 분명히 몸도 사라지고 또는 - 부처님의 그런 식

()도 - 의식(意識)도 조금도 자취가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참다운 가르침은 무량(無量) 으로, 보고 느끼고 하는 현상

세계(現象世界)를 초월(超越)한 세계에가 있읍니다.

   따라서 열반의 뜻도 이른바 소승열반(小乘涅槃)이 있고, 그런가하면은

대승열반(大乘涅槃)이 있습니다.


   아난존자가 그와 같이 부처님을 흠모하는 부처님을 추모하는 그런 자기

감정을 가누지 못 해가지고서, 슬피 울고 한 것은 - 아난존자가 소승열반의

뜻은 분명히 잘 알았을 것이고 또는 대승열반의 뜻도 알지만은 - 대승열반

의 뜻과 완전히 계합(契合)이 못됐단 말입니다.


   우리는 불교 가르침에서 구분해야할 것은 해석한다는 "풀 해()자" 와

"깨달을 오()자"라 하는, 해오(解悟) 단계의 그런 법문(法門)과 또는 우리

몸으로 마음으로 증명한다 하는 - 우리 마음도 바꿔지고, 우리 생리(生理)

도 바꿔져서, 오염(汚染)된 자기가 전환되어서, 청정무비(淸淨無比)한 참다

운 자기로 전환되어 버리는 - 그러한 단계가 아니면은 "부처님의 법을 증명

한다" "우리 진여법성(眞如法性)을 증명한다"하는 그런 증오(證悟)를 얻지

를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난존자는 유감스럽게도 부처님을 그렇게 오랫동안 모시고, 법

문은 소승열반도 충분히 알고 대승열반도 알지만, 대승열반(大乘涅槃)자리

- 몸이 사라지고 또는 우리가 사고(思考)하는 의식활동(意識活動)도 사라

진다 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 영생불멸(永生不滅)의 자리 - 를 미처 체험하

지 못했기 때문에, 그와 같이 슬픔을 이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열반소식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 이 소승열반을 떠나서 대승

열반에 있습니다. 참다운 열반은 대승열반에 있습니다.


   원래 경() 풀이하는데는 강사(講師)가 있고, 또는 법문 잘 하는데는 법

사(法師)가 있습니다. 저같은 사람은 강사도 법사도 아니고, 참선(參禪)하

는 선사(禪師)이기 때문에, 선사가 말하는 말은 참, 딱딱하고, 거두절미해

서, 그냥 알맹이만 말하기 때문에 참,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몽둥이로 텅텅 울리는, 그런 방()도 하고, 또는 할()로 그때

그때 고함을 지르고 한단 말입니다.


   참선소식은 「대기대용(大機大用)」이라, 본체(本體)만 가지고 이야기

하기 때문에, 문자를 떠나고, 헤아림을 떠나 있습니다. 이런 소식들은 그야

말로 고함을 지른다거나 또는 방을 친다거나 그렇게 않고서는 할 도리가 없

단 말 입니다.


   그래서 중국 당나라 때 석두 희천(石頭希遷) 스님이라 - 스님은 굉장히

당대의 위대한 선지식 입니다. 마조도일(馬祖道一) 스님과 더불어서 당대

의 중국 선계(禪界)를 주름잡은 분입니다.- 석두 스님한테 법문을 청하니

까, 법상에 올라와서, 그냥 눈만 끔벅끔벅 몇 번 하고서, 내려와서, 자기 방

장으로 가버린단 말입니다.


   저같은 사람도 그만한 선지식(善知識)은 못 되지만은 참선(參禪)하는 사

람인지라, 그렇게 간단히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한 시간 동안 말씀 해달라

고 하시니까, 한 시간 동안 무슨 말씀인가 해야 쓰겠지요.


   대승열반(大乘涅槃)은 대체로 어떤 것인가? 이것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생사(生死)가 없는 도리(道理)" 우리 중생의 안목에서는 분명히 내가

있고, 너도 있고 또는 죽음도 있지만은「대승열반의 경계」에서는 그러한

것 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열반경(涅槃經)에 보면은 열반사덕(涅槃四德)이라 - 열반경계에서 네가

지 덕()이 있다고 말씀했단 말입니다.


   열반사덕(涅槃四德)이라. 어떤것인고 하면은, 이것은 상주부동(常住不

)이라.


   우리 생명(生命)이라하는 것이, 중생(衆生) 차원(次元)에서 불 때는 분명

히 생사(生死)가 있고 또는 서로 만남과 헤어짐이 있고, 선악( 善惡) 시비

(是非)가 있읍니다만은, 본래면목(本 來面目) 자리. 우리 참다운 불성(佛性)

자리에서는, 그것이 없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해서 절대로 죽음이 없

습니다. 따라서, 우선 그와 같이 죽음이 없다는 자리, 영생한다는 자리가 이

것이 열반 자리입니다.


   또 한 가지는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 중생 세계에서는 고통도 있고, 안락

도 있고, 여러가지 그러한 상대적인 것이 있읍니다."만은, 열반자리, 참다운

우리 본래면목 자리 또는, 우주의 본바탕 자리, 이 자리에서는 고통은 조금

도 없고, 정말로 안락무구(安樂無垢)한 영원한 행복만 존재합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상락(常樂)이라 - 상주부동해서 우리가 영생불멸하고

또는 안락무구해서 행복만이 있단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대아(大我)라. 우리 범부 중생 같이 욕계나 색계나 무색계나

그러한 삼계에서 얽매인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 욕계나 색계나 무색계을 초

월해서, 이것도 역시 영생불멸(永生 不滅)함과 동시에 일체공덕(一切功德)

을 갖춘 그러한 참다운 나 - 「참다운 진아」를 우리가 충분히 체험하고,

진아(眞我)를 발휘한단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청정무애(淸淨無碍)」라 - 청정해 조금도 번뇌(煩惱)의 흔

적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참다운 열반이라 하는 것은, 우리 중생이 필경 돌아가야 할

「마음의 고향(故鄕)」입니다.


   이런 자리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80평생을 살으시다가 많은 중생을 제

도하시고 가셨다 하더라도, 신지구멸이라 - 부처님의 허망 무상한 색신과,

부처님께서 쓰시던 의식활동은 다 잠 자버렸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참다운

생명자리, 부처님의 참다운 법성(法性) 자리는 조금도 훼손이 없습니다. 죽

음도 없고 또는 조금도 이그러짐이 없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참다운 열반이고, 따라서 아까 제가 허두에서 말씀드린

바와같이 열반은 어느 누구한테나 존재하는 영생불멸한「마음의 고향」자

리 입니다.


   영생해탈의 열반은, 이것은 어디에서나 누구 한테나 있는 것이고, 또는

이 자리를 가기 위한 가르침도 분명히 있습니다. 다만, 중생이 게을러서 못

간단 말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공부할 때에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고 하면은 「자굴

심(自屈心)」이라 - "스스로 자()자" "굴욕이란 굴()자"입니 다. 자굴심

은 무엇인고 하면「자기비하심(自己卑下心)」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

다. 석가모니는 성불(成佛) 하셨지만, 우리는 그렇게 못된다."는 자굴심을

가지면, 자굴심을 여의지 못하면, 이것은 참다운 불교신앙(佛敎信仰)이 못

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와 나와 더불어서, 달마대사와 나와 더불어서, 우리한테 갖추고

있는, 생명(生命) 자체는 조금도 흠이 없습니다.


   아난존자도, 이러한 가르침 정도는 알으셨겠지요. 여기 계시는 사부대중

- 우리 불자님들도 충분히 알으시겠지요.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능엄경(楞嚴經), 열반경(涅槃經)등을 읽

을 때는,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거니" 이런 정도의 법문(法門) 은 다 알으

십니다.


   그러나 어느 경계(境界)에 부딪치면은, "아! 나 같은 것이 어떻게 할 것인

가?" 이렇게 자굴심을 품는단 말입니다.


   어째서 그러는 것인가?

 

   우리의 업장(業障)이 아직은 정화(淨化)가 안되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아

무리 많이 안다 하더라도, 똑같은 반야심경(般若心經) 한편을 우리가 공부

한다 하더라도, 업장(業障)이 가벼운 사람은, "아! 그렇구나, 모두가 다 제법

공( 空)이구나! 내 몸도 텅텅 비었구나!" 이렇게 잘 느끼지만은, 업장이 무거

운 사람은, "아! 어째서 공()일 것인가?" 하고 공도리(空道理)를 못느낌니

다.


   "분명히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사랑도 있고 미움도 있는 것인데, 왜 공()

일 것인가?" 하고 아직도 공도리(空道理)를 여실히 못느끼신 분들은 자기스

스로 자기성찰(自己省察)을 깊이 하셔야 쓰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은, 아까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영생불멸하는 열

반의 4가지덕인, 그런 「상덕(常德)」이란 말입니다. 또는 안락무구(安樂

無垢)한 행복(幸福)만이 존재하는, 그런 「낙덕(樂德)」이라. 또는 모든 선

공덕을, 진여공덕(眞如功德)을 다 갖추고 있는 「아덕(我 德)」이란 말입니

다. 우리는 대아(大我)라고 하는 참다운 진아(眞我)의 소식을 분명히 느끼

고, 우선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하고, 모든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를

완전히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한테는 분명히 원만구족(

滿具足)이라 - 원만히 갖추고 있습니다.


   자기한테 갖추고 있는, 그런 원만한 덕성(德性), 이것을 못느끼면은 참다

운 불자가 못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리한테, 그런 덕성을 먼저 알으키

고, 그런 덕성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우리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또는, 청정무애(淸淨無碍)라. 조금도 번뇌가 없단 말입니다. 이런 소식을

알려면은 먼저 반야지혜(般若智慧)라 - 제법(諸法)이 공()한 도리(道理)

를 분명히 알으셔야 씁니다.


   어째서 공()인 것인가?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모아진 것은, 이것은

존재(存在)라고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그때그때 이루어지는

하나의 법성(法性)을 우리의 욕탐(慾貪)으로 인해서, 중생(衆生)의 무명(

)으로 인해서 잘못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대승(大乘) 법문으로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天地宇宙)가 조금

도 흠축이 없는 원만한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인데도, 우리 중생(衆生)들

이 잘못보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잘못보는 것인가? 탐욕(貪慾) 때문에 또는 분노(憤怒) 때문에 이

그러져서 잘못보는 것입니다.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것은, 이것은 분명히 공()입니다.

다만 한동안도, 고유(固有)한 존재(存在)가 못되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변화(變化)해 마지않습니다. 순간순간 변화해서 마지않은 것은

공간성(空間性)도 없는 것이고, 공간성이 없기 때문에 시간성(時間性)도 없

습니다.

   이런 도리를 우리 중생들은 업장이 무거우면 잘 못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은 이러한 것을 분명히 증명(

)하고 있습니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모든 은하계(銀河系)의 각 성수(星宿)나

또는 태양계(太陽系)에 있는 것, 화성(火星)이나 목성(木星)이나 우리 지구

(地球)나 모두가 다 산소(酸素)나 또는 수소(水素)나 더 미세한 전자(電子)

나 양자(陽性子)나 중성자(中性子)나 이런 것이 합해서 안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일체 존재의 근원적인 미세한 알맹이 이런 것이 전자나 양자나 중성자라

생각할 때 이런 것은 어떠한 것인가?


   이런 것은 알 수 없는 「우주(宇宙)의 장()에너지(energy)」이른바

「전자기장(電磁氣場) 」이란 말입니다.


   알 수 없는 우주의 장에너지에서, 그때그때 적당히 물리적 원칙이라든가

또는 화학적 변칙이나, 이런걸로 해서 진동(振動)하고 있는 조그마한 상태

를 전자요 또는 중성자요, 양자요 그러는 것입니다.

   고유한 전자, 고유한 양성자가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하나의 과정적(過程的)으로 존재(存在)하는 에너지(energy)의 그러한 진

동(振動), 운동(運動)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모여서 태양이 되고 또는 달이 되고, 지구가 되고, 우리 몸이

되고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조금도 한 순간도 그대로 머물러있지 않단 말입니다. 다

만 중생들은 업장이 무거워서, 이렇게 형체(形體)가 이루어진, 사람같은 모

양을 보고, 또는 나무 같은 모양을 보고 해서, 이것은 나무요, 이것은 사람

이요, 너요, 나요 하는 것이지만은, 정말 우리가 양자나 중성자나 그런 차원

(次元)의 것을 볼 수 있는 현미경(顯微鏡)을 쓰고 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그렇다고 생각 할 때는 사람도 안보이고, 집도 안보이고, 이렇게 아름다운

꽃도 안보이고, 모두가 다 양성자나 전자나 중성자나, 이런 것들 만이 꾸물

꾸물 운동(運動)하고 있을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청정법안(淸淨法眼)」이라 - 청정법안은 번뇌(

)를 다 떼내버린 순수(純粹)한 생명(生命)만 본단 말입니다. 부처님의 안

목(眼目)은 순수한 생명만 보는 것입니다. 일체만유(一切萬有)가 다 비어있

는,제법 공(諸法空)의 자리를 분명히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법은 사실은 현대물리학에서 다 증명하듯이, 마음을 깨달은

도인(道人)들은 청정법안(淸淨法眼)이나 혜안(慧眼)이나 불안(佛眼)이나,

그런 참다운 맑은 눈으로 본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육안(肉眼)으로 보는 것이니까, 이렇게 밖에는 안보이지만

은,가사 우리가 하늘사람이 볼 수 있는 천안(天眼)으로 본다고 생각하십시

다. 천안을 가지고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중생이 이렇게 안보인단 말입

니다.


   미운 사람이 그렇게 미웁게 보일 수도 없는 것이고, 지극히 좋아하는 사

람이 꼭 좋아하게시리 보일 수가 없단 말입니다. 또 나아가서 법안이요, 혜

안이요, 불안이요, 이런 눈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이렇게 안보인단 말입

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보는 이러한 여러가

지 경관(景觀)이나, 이러한 것은 모두가 텅텅 비어 있단 말입니다. 텅텅 비

어있으니까,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제법공(諸法空)이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반야심경(般若心經) 도리(道理)를 알고 있습니까? "반야심경

도리"를 모르면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이

라 - 영생불멸하고 또는 행복만이 존재하고, 모든 공덕을 갖춘 대아(大我),

진아 (眞我)라 또는 청정무애(淸淨無碍)라, 조금도 번뇌(煩惱)가 없는, 그런

맑은 자리, 이런 자리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열반공덕(

槃功德)은 우리가 얻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이라.

   중생이 그냥 거짓 것을 보고서, 사실을 사실대로 모르고서, 잠시간 존재

하는 거짓 것을 - 그림자를 보고 사실로 생각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는, 우리 몸뚱아리는 지금 분명히 있는 사실

로 봅니다. 우리 마음은 안보이는 것이니까. "아, 몸이 실존이고, 우리 마음

은 그림자이겠지" 그러나 실지로 해서는 그 반대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주인공(主人公)인 것이고, 우리 몸은 마음 따라서 - 주인공

따라서 거기에 이루어진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산소나, 수소나, 질소나, 탄소나, 그러한 것이 잠시간 우리 마음의 업장

(業障) 따라서, 운동(運動)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보고

"나"라고 우리가 고집(固執)을 하는 것입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쓴 책 가운데서, 『죽음에 이

르는 병』이란 저서 (著書)가 있지 않습니까.


   "죽음에 이르는 병"은 무엇인고 하면은 실지로 있는 우리 마음, 우리 주인

공(主人公)을 외면하고서, 실지로 있지 않은 그림자에 불과한 내 몸뚱아리,

또는 권력(權力)이나, 또는 돈이나, 의식주(衣食住)나, 이런 것에 생명(

)이 있다고 보는, 이런 것은 정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에 불과하다고 말

했습니다.


   자기 몸뚱아리만 제아무리 아끼고 다듬고 화장(化粧)을 한다 하더라도,

몇 십년 살다가 결국은 죽고 말지 않습니까? 지위(地位)도 마찬가지 입니

다. 현상(現象)에 있는 것은 모두가 다 종당에는 죽고마는, 생사(生死)의 법

()을 떠나지 못하는 - 인과(因果)의 범주(範疇)에 꽁꽁 매여있는 것에 불

과 합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다 이것은 "죽음에 이르는 것" 밖에 안되는 것

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법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법(), 하나

가 자굴심이라!


   자기가 본래(本來)는 분명히 상락아정(常樂我淨)을 갖춘 - 대열반의 공덕

(功德)을 갖춘- 항시 영원히 존재하고, 또는 무한(無限)의 행복(幸福)을 본

래 갖추고 있고, 또는 불교(佛敎)말로 하면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요새, 우리 스님네들이나, 어느분들이 그런 신통자재(神通自在)하는 말

씀을 드리면, "아, 그것은 부처님 당시나 있는 것이고, 그것은 신비적인 어

떠한 방편(方便)에 불과하다."이렇게 말씀들을 합니다만은, 삼명육통 같은,

그러한 부처님 신통묘지(神通妙智)는 어떤 누구나가 다 분명히 또는 완벽

히 갖추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10대 명호 가운데서, 명행지(明行智)라 - "밝을 명()자" "행할

행()자" "지혜 지()자" 명행지 - 라는 그러한 법문이 있습니다. "여래(

)" 또는 "정변지(正遍智)"요, 하는 부처님의 10대명호 가운데서 하나의 이

름이 명행지란 말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다 통달무애(通達無碍)한 부처

님의 지혜란 뜻입니다.


   조금 더 구체화 시켜서 말씀 드리면은 숙명통(宿命通)를 통해서, 무시이

래(無始以來)의 끝도 갓도 없는 과거를 훤히 내다보고 또는 천안통(天眼通)

을 통해서, 미래(未來)를 다 훤히 내다보고 또는 현상적인 모든 것을 내다

보고, 또는 누진통(漏盡通)을 통해서 우리의 번뇌를 다 없앤 지혜, 이것보

고 「삼명(三明)」이라합니다. 이러한 삼명을 다 얻음과 동시에, 행족(

)이라! - 6바라밀(六波羅蜜)을 다 온전히 행()한단 말입니다.

   이런 지혜(智慧)가 부처님한테는 분명히 계십니다. 이런 지혜를 우리도

분명히 다 갖추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분명히 다 믿어야, 자굴심을, 자기비하심을 우리가 면할 수 가

있는 것이고, 참다운 불심(佛心)이라고 할 수 가 있습니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증상만(增上慢)이라.- 더할 증()자" "웃 상

()자" "거만할 만 ()자" 증상만이라!


   부처님 공부를 하시는 분들이 자굴심은 조금 총명해서 면했다 하더라도

증상만을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증상만은 무엇인고 하면은 미처 자기가 참다운 도리를 모르면서 알았다

고 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주의해야 씁니다. 참선(參禪) 한철도 공부도 않고, 기도도 백일

(百日) 동안 한번도 못해본 분이, 아, 좀 무엇이 빳닦(반짝)하고, 조금 무엇

이 기묘(奇妙)한 것이 보이며는 공부를 다 했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더

러 있습니다. 이런 것이 증상만 아니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난존자 같은 분도 25년간이나 부처님을 모셨

거니, 참선(參禪)도 꽤 많이 했고, 염불(念佛)도 많이 하고, 공부도 많이 하

셨겠지요. 이런 분도 부처님 열반드실 때에 자기를 가누지 못해가지고서,

마음이 동요가 되고, 비탄에 잠긴 것은 미처 열반성(涅槃性), 참다운 자기

를 체험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적에, 참선 공부를 한둥 만둥하고, 또는 기도좀 한둥 만

둥 해가지고서 부처님의 참다운 가르침을 다 안다고 할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미처 증명(證明)하지 못하고 증명했다 하는 것을, 또는 깨닫지 못

하고 깨달았다고 하는 것을, 이것 보고 증상만 또는 상만 그럽니다.


   우리는 지금 증상만에 젖어있습니까? 안젖어있읍니까? 나라는 정도가 지

금 어떤 정도인가?


   내가 지금 부처님의 무량대비(無量大悲) 무량대자(無量大慈)를 분명히

믿는가? 나한테도, 지금 그러한 것이 조금치도 흠축없이 갖추어 있다는 것

을 분명히 믿는가? 분명히 믿어야, 자굴심을 면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조금 했다 하더라도 "깨달음의 경계"라는 것은 우선 이치(理致)로

아는 해오(解悟)가 있는 것이고, 또는 체험(體驗)해서 아는 증오(證悟)가 있

는 것이고, 증오를 했다 하더라도 - 증명을 좀했다 하더라도, 우리 번뇌의

습기(習氣)를 다 뽑아서 없애버리는, 참다운 구경각(究竟覺)까지 가야, 그

래야 공부를 마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증상만을 깬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처 못가고 갔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고 또는 부처님을 속이는 것입

니다.


   그러나 근세(近世)에 와서 이러한 분들이 없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재가

불자(在家佛子)도 그렇고, 출가불자(出家佛子)도 그런 분들이 상당히 있던

것으로 우리는 압니다. 참다운 깨달음, 참다웁게 증명을 못하고, 증명 했다

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리를 증명 한다는 것은, 그렇게 꼭 특수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다라표」라는 한 수행자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분 말씀

을 할 때 마다, 이분에 관한 여러가지 기록을 불 때 마다, 마음으로 감격을

느낍니다.


   다라표 이분은 14세에 출가 했습니다.그래서 16세에, 단 2년동안에, 삼명

육통(三明六通)을 다 하신 분입니다.


   삼명육통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부처님

이 할 수 있는 모든 신통지혜(神通智慧)를 다 몰아서 삼명육통 그럽니다.


   과거에 통달하고, 미래에 통달하고, 또는 자기 번뇌(煩惱)에 조금도 흠이

없이 다 단진(斷盡)해서, 번뇌의 흔적이 없단 말입니다. 그래 가지고서 여

섯가지 신통(神通)을 다 한단 말입니다.


   14세에 출가해서 16세에 삼명육통을 다 한 다라표가 어떻게 했는고 하면

은 나중에는 자기가 원력(願力)을 세워서, "아! 내가 대중(大衆)들의 뒷바라

지를 해야쓰겠구나." 그래서 대중들이 많이 오면, 자기가 일일이 침구도 운

반도 하고, 음식도 운반도 하는 시중을 들었습니다.


   「삼명육통」을 한 분이기 때문에, 더러 어슴푸레할 때에 객승들이 오는

경우는 왼손을 척들어서 화광삼매(火光三昧)라 - 광명(光明)을 낸단 말입

니다. <이때 큰스님께서는 왼손을 척들어 보이셨다.>


   우리 불자님들! 신통지혜하는 힘이 우리한테도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다

만 우리가 참다웁게, 우리 육신(肉身)이 - 우리 생리(生理)가 - 정화(淨化)

가 못되고, 우리 번뇌(煩惱)가 정화가 못되어서 발휘를 못하는 것이지, 우

리한테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더불어서 조금도 흠이 없는 신통묘지(神通妙

)를 원만히 갖추고 있습니다.


   다라표 이 스님은 왼손을 척 들어서 화광삼매(火光三昧)라 - 빛을 내는

삼매에 든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훤히 비추겠지요. 그래 가지고 오른손으로

는 침구도 들고, 또는 음식도 들고, 해가지고서 객승들을 안내 한단 말입니

다.


   다라표 수자만이 할수 있는것이 아닙니다. 이와같이 우리 몸 가운데는,

우리 마음 가운데는 조금도 흠이 없이 모든 지혜공덕(智慧功德)이 다 갖춰

져 있습니다. 어떤 공덕(功德)인가?


   한말로 말하면은 지혜광명(智慧光明),자비광명(慈悲光明)이 갖춰져 있습

니다.


   전자(電子)나, 양자(陽性子)나, 또는 중성자(中性子)나 모두가 다 하나의

방사광선(放射光 線)입니다. 우주(宇宙)에는, 우주 밑바닥에는 조금도 빈틈

이 없이 영원한 광명(光明)이 충만 (充滿)해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다행히 날이 좋아서 이와 같이 청명합니다. 그 위에 이렇게 또 전

기(電氣)가 밝으니까 더욱더 광명에 빛나는 것 같이 보이겠지요.

   이런 광명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 다만 물리적인 조작에서만 오는 것인

가?

   무()에서 유()는 못나옵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에는 근원적으로 광

명(光明)이 충만(充滿)해 있는 것입니다. 무슨 광명(光明)인가? 부처님의

지혜광명(智慧光明), 부처님의 자비광명(慈悲光明)이 충만 (充滿)해 있습니

다. 정말 우리 불자님들이 부처님 법()을 - 그냥 구두선(口頭禪)으로, 말

로만 "아, 그렇구나! 정말 열반경계(涅槃境界)에는, 참다운 대아(大 我), 참

다운 진아(眞我)에는 영생불멸(永生不滅)한 지혜(智慧)가 갖추고 있구나!"

이렇게만 생각하실 것이 아니라, 정말로 진지하게 공부를 하신다고 생각하

실 때는, 공부하는 정도에 따라서 -거기에 비례해서 영원한 우리 생명(

)의 본체(本體)에 있는, 그런 광명(光明)을 우리도 체험도 하고, 보기도

하고, 음미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 공부가 깊어지면 깊어진 만치 그런 광명(光明)은 더욱더 빛나는 것

입니다. 정말 온전히 깨달아 버리면, 온전히 확철대오(確徹大悟)하면, 그

때는 천지우주가 다 광명세계(光明世界)로 화()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

부가 심오(深奧)한 경계까지는 미처 못간다 하더라도, "천우만다화(天雨曼

陀華)"요! "천고자연명(天鼓自然鳴)"이라!


   "하늘에서는 광명의 꽃비가 내리고,......."


   법화경이나 또는 화엄경이나 능엄경이나 다 그런 법문(法門)이 있습니

다. "천우만다화라 - 하늘에서는 광명의 꽃비가 내리고, 천고자연명이라 -

하늘의 북 소리는 자연히 울리도다."하는 그런 법문이 있습니다.


   이런 영원적인, 영생불멸하고 무한한 공덕이 원래 법성에 갖추고 있다는

소식은, 잘 모르는 사람은,"아, 이런 것은 방편이겠지" 합니다만은, 실지로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그런 묘음(妙音)들이 - 음악 소리가 우주에는 항시 갖추어져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맑으면 맑을수록 그런 소리도 더욱더 기묘(奇妙)하니 맑

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변(二邊) 소식을 떠나기 위해서 불교를 믿습니다.


   너무나 남을 미워하는 고통, 너무나 좋아하는 고통, 또는 그때 그때 구해

서 얻지 못하는 고통, 이런 고통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저같은 사람이 이렇게 산에서 서울을 나오면, 그냥 눈이 으리으리 합니

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가운데서, 어떻게 살 것인가? 신경 쇠약이 안될 수

가 없는 것이고, 정말로 긴장 가운데서 우리가 정상적으로 생활하기가 과연

어렵구나!"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이런 가운데서 어떻게 자기를 가누어야 할 것인

가?


   이것은 이렇게 천차만별된 복잡다단한 이런 세계에서 살기 위해서는, 그

러한 것의 본체(本體)가 되는「나나 너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원래는 나

와 남이 둘이 아닌 도리(道理), 또는 밉고, 사랑하는 그런 마음이 있다 하더

라도, 밉지도 않고, 사랑할 것도 없는, 그런 자리!」이런 자리를 우리가 분

명히 알고 체험(體驗)해야 만이, 이렇게 복잡하고, 갈등이 많이 있고, 분열

 

스러운, 이런 세상을 바르게 살 수 가 있습니다.


   그래야 만이 비로소 인생고(人生苦)라는 것을 우리가 제거할 수가 있습

니다. 불교(佛敎)는 한말로 말하면 인생고를 떠나는 가르침이 아니겠습니

까?


   그러나 우리는 인생고를 떠날려고 몸부림은 치지만은, 정말로 인생고를

떠나있는 자리 이것은, 본래면목 자리, 또는 진여불성 자리, 대열반자리, 열

반공덕 자리인데, 그런 자리로 갈려고는 별로 노력하지 않습니다.


   "이만쯤 하면 되겠지" 그런걸로 해서는 부처님의 진여불성 자리, 공덕은

맛을 못보고 맙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인간의 재미는, 그저 세간에서 오욕(五慾)이라. 서로

"나"좋은 사람끼리 만나고, 또는 음식이나 잘 먹고, 잘 입고 또는 지위가 높

고, 이런 것을 추구 합니다만은, 이런 것은 사실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또는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바와같이 "죽음에 이르는 병"에 불과

합니다.

   이런 것은 우리 행복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알으셔야 씁니다. 이런 것은 죽음의 길인 것이지 참다운

영생(永生)의 길은 절대로 못되는 것입니다.


   싫든 좋든 우리는 영생의 행복 -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간고를 떠나는

그 자리 - 그 자리를 갈려고 생각할 때는 "제법(諸法)이 공()이요""제행(

)이 무상(無常)이요"하는 이런 자리를 분명히 알아야 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반야사상(般若思想),반야지혜(般若智慧)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영생해탈(永生解脫)」의 자리에는 못갑니다.


   내가 분명히 빈 것인데, 너라는 것도 분명히 빈 것인데, 나라는 상(), 너

라는 상(), 중생(衆生)이라는 상(相), 또는 시간(時間)이 짧다 길다 하는

그런 상(), 이른바 금강경(金剛經)에서 말하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이런 상()이 있는 한()에는 절대로 영

생행복(永生幸福)의 극락(極樂)이나, 영생 행복의 해탈(解脫)은 맛을 못봅

니다. 우리는 너무나 안이(安易)하니, 안이하게 부처님을 구해서는 안됩니

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은 생명(生命)의 광명(光明)입니다. 우

주(宇宙)에는 부처님의 무량광명(無量光明)이 충만해 있습니다.

   그러기에 대체로 아시는 바와같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아

미타불(南無阿彌陀佛)도 뜻 풀이로 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청정하

다 해서 청정광불(淸淨光佛)이라, 상대가 없다 해서 무대광불(無對光佛)이

라, 또는 끝도갓도 없이 바로 우주(宇宙)에 충만(充滿)하다고 그래서 광박

신여래(廣博身如來)란 말입니다.


   또는 행복 뿐이다 그래서, 행복만이 존재한다고 그래서 감로왕여래(甘露

王如來)라 - 감로수 같이 맛이 있는 그러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영생(永生)하게시리 하는 참다운 맛이 있는 것이 감로수 인데 - 감로수

같이 맛있고, 행복스러운 그런 부처라 고해서, 감로왕여래라!


   그런것이 모두가 다 우리 자리, 우리 참다운 면목인 동시에, 우주에는 그

런것이 충만해 있습니다. 다만 어리석게도 우리 중생이 가고 안가고, 보고

못보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 해탈의 길은, 죽음을 면하는 길

은, 어떠한 길도, 현상적인 내 몸에 집착(執着)하고, 또는 자기가 느끼는, 그

런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사고(思考)에 집착하고, 모양에 집착하고, 권

리에 집착하고, 재물에 집착하는, 이러한 모양에 집착하는, 이른바 상()

에 집착하는, 이런 것에서는 절대로 우리 인생의 참다운 행복이 없습니다.


   석가모니 가르침도, 예수의 가르침도, 또는 마호멧의 가르침도, 이런 것

()에는 없습니다.


   모두가 다 상을 거두어서, 영생해탈(永生解脫)의 길! 참다운 진리(眞理)

의 길! 영원히 죽지않는 길로 인도하는 가르침입니다.


   우리 부처님을 믿으신 분들은 단호허니 자기 스스로를 축소해야 쓰는 것

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어야 할 것인가?

   나의 참다운 행복, 내 가족의 참다운 행복,- 우리 인간들이 진리에 배반

된 생활, 진리(眞理)를 떠난 생활은, 물 밖에 난 고기 같이 절대로 행복이 못

됩니다.- 참다운 자유(自由), 참다운 민주화(民主化), 모두가 다 진리와 더

불어서만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이라 하는 것은 "나"나, 모든 존재의 근본

생명(根本生命) 자리인 동시에 순수한 자비광명(慈悲光明) 또는 지혜광명

(智慧光明)입니다.


   이러한 것이 우주에는 어디에나 빈틈도 없이 충만해 있습니다. 따라서 우

리 마음도 역시 부처님을 정다웁게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이러한 자리를 우

리가 분명히 느껴야 쓰는 것입니다.


   안보인다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은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거짓말이 아

니고 참다운 말씀입니다. 에누리 없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분명히 이 자리

를 믿고서, 이 자리를 여의지 않는 강인한 의지로 이렇게 모두가 하나의 자

리, - 일원적(一元的)인 하나의 참다운 진여불성(眞如佛性)의 광명(光明) -

이 자리를 떠나지 않는 데서 우리의 참다운 공부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열반은 영생불멸한 상락아정이라, 상락아정(常樂我淨)을 분명

히 느껴야 부처님의 열반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가셨다 하더라도 부처님은 절대로 가시지 않았습니다.


   본래면목 자리, 본래 참다운 진여불성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석가

모니가 오신 흔적도 없고, 석가모니가 가신 흔적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도 역시 똑같이 본 바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가지 않고 오지 않고 낳지

않고 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불생불멸(不生不滅)이요, 불구부정(不垢不淨) 아니겠습니까?


   기독교에서 기리는 부활절(復活節)도 이제 얼마 있으면 돌아옵니다 만은

- 예수님이 부활했다 하는것이, 기독교 교리 가운데서 중요한 교리의 하나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 불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예수님만 부활한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다 부활하는 것이고, 또는 부활이라는 뜻 보다 훨썩 더 높은 뜻

으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 본래 죽지 않고, 낳지 않았단 말입니다. 죽

지 않았거니 어디 새삼럽스게 부활을 말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죽지 않고 낳지 않는, 이런 도리을 분명히 알어야 쓰는 것입니다.

내가 분명히 죽고, 나하고 친한 분도 분명히 죽는데, 왜 죽지 않는 것인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헛것인, 그림자인 우리 몸만 그때 그때 사라지

는 것입니다.


   생명 자체는 절대로 죽음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에 어느 분이 인연이 다

해서 금생(今生)의 목숨이 끊어진다고 합시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분의 목

숨은, 생명 자체는 조금도 흠축이 없습니다.

   다만 그 사람이 얼마만큼 업()을 지었는가? 업장 따라서, 지금 죽어 있

는 그 상태가 안락(安樂)스러울 것인가, 또는 고통(苦痛)스러울 것인가, 하

는 그 차이 뿐인 것이지, 죽음자체는 절대로 없습니다.


   천안통(天眼通)을 통한 분들이나, 천안통을 미처 못 통했다 하더라도, 귀

안(鬼眼)이라 - 귀신의 안목만 두고 본다 하더라도, 죽어서 가는 영혼(靈魂)

들이 분명히 다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부활 뿐만 아니라, 영생불멸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참다운 자기 주인공이고, 참다운 마음이라고 할 때,

우리가 두려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한테 갖추고 있는 근본적인 진여불성자리, 일체공덕을 갖춘

그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그냥 쉽게 얻을 수 가 없습니다.


   그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마치「이집트」의 신화(神話)에 나오는 불사조

(不死鳥) 같이 - 자기 몸을 태워서 재로하고, 재 가운데서 다시 생명을 소생

시키는 불사조 같이 되어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참다운 영생의 자리를 얻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그렇게 쉽게

얻을 수 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 불교가 사는 것도, 자기 개인적으로 참다운 해탈(

)을 얻는 것도, 또는 우리나라가 참다운 동방(東方)의 빛이 되기 위해서

도, 또는 지금 혼란스러운 각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풀기 위해서도, 영생해

탈의 길을 우리 스스로 분명히 믿고 체험하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

다.


   우리 인생은, 우리 앞에도, 뒤에도, 또는 좌우도, 모두가 다 죽음의 길, 우

리를 죽음으로 인도 하는 그런 것 밖에는 사실은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자기 몸도 결국은 죽고 있습니다. 나날이 밭아가는(말

라가는) 조그마한 웅덩이에 있는 고기나 똑 같습니다. 불에 뛰어드는 부나

비나, 우리 인간 존재나, 생명 자체는 똑 같습니다.


   어느 것도, 세상에 우리 인간이 보이는 상()이 있는 모든 것은, 또는 가

짜 이름의 모든 것은 - 우리 영생 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학문을

안 배웠다 해도, 우리는 슬퍼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자기가 지금 장애자라

하더라도 조금도 비굴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작년(1990년)에 왔다 간 영국의 호킹 박사는

자기 몸을 자기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 아닙니까? 말도 잘못합니다.

그래도 그 사람 표정 보십시요. 조금도 흐림이 없습니다.

   우리 행복은 절대로 모양에 있지 않습니다.

   영생불멸한, 죽지 않고, 늙지 않고, 또는 병들지 않는, 영원히 변치 않는

무량한 공덕을 갖춘 그 마음 자리에 있습니다.


   그 마음 자리를 우선 우리가 느껴야 쓰는 것입니다. 느끼는 정도도, 업장

이 무거우면 잘못 느낍니다.


   "나한테 무슨 그런 달마와 같이, 또는 석가모니와 같이, 또는 서산대사(西

山大師)와 같이, 그러한 마음이 있을 것인가" 합니다만은, 조금도 흠이 없는

것이 분명히 들어 있습니다."천만번 되뇌어도 이런 자기가 무량한 공덕을

갖추고 있다." 이런 것을 우리가 확신(確信)해야 쓰는 것입니다.


   염불(念佛)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


   "우리한테 부처님 같이, 무량한 공덕이 갖춰져 있다." 이런 것을 확신하기

위해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   불이불(不二佛)」이라 - "아니 불()자" "두 이()자" "부처 불()자"

-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다는 뜻을 되새기기 위해서 염불(念佛)을 하시는

것입니다.


   또는 불리불(不離佛)이라. 우리가 업장(業障)이 무겁기 때문에 "아, 부처

와 나가 둘이 아니겠지 느낀다 하더라도" 금방 딴 생각이 나온단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다" 라는 그 생각을 떠나지 않기 위해서, "아

니 불()자" "떠날 리()자" "부처 불()자" 불리불(不離佛)이란 말입니다.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닌 것을 재확인하기 위해서, 확신하기 위해서, 염불을

하시는 것이고, 그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꼭 참선(參禪)을 해야쓸 시대입니다.


   어째 그런고 하면은, 참선을 해야만이 참다운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를 증명(證明)하고, 이렇게 해야만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가 있

는 것이고, 참다운 스승, 참다운 어버이가 될 수 가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

입니다.


   참선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세상에 참선하기가 제일 쉬운 것입니다. 어

찌 쉬운 것 인고 하면은, 참선은 우주의 도리(道理)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

다.


   진리(眞理)라는 것은, 역시 진리(眞理) 대로 움직이는 것인데, 우리 지구

를 제아무리 파괴헐래야, 파괴할 수 없는 것이고, 또 제아무리 오랫동안 버

틴다 하더라도, 한번 지구가 소멸할 때가 오면, 소멸 안될 수 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삼천대천세계 - 달이나 또는 태양이나 목성이나 모두가 다, 천

지 우주의 진리에 따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진리에 따르면은, 순풍에 돛단 배 같은 것이고, 진리에 못

따르면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데, 참선(參禪) 이것은, 우리 인생이 사는 길

가운데서, 가장 올바르게, 가장 합리적으로 진리에 따르는 길입니다.

   순풍에 돛단 배와 똑 같습니다.


   원래 우리가 원만무결한 부처거니, 부처가 결국은 되고마는 것입니다. 나

한테 원래 갖추어 있고, 종당에는 부처가 될 것이 우리 중생입니다. 다만 빨

리 될 것인가? 또는 더디 될 것인가? 하는 그 차이 뿐입니다.


   부처님 말씀 따라서, 부처가 되는 것이 제일 편한 것입니다.

   남을 때리기 보다도, 안 때리고, 남을 도와주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욕을

하기 보다도, 욕설 않고, 좋은 말로 해서, 부드러운 말 하는 것이 훨씬 쉽습

니다. 인상을 찌푸리는 것 보다도, 자비스럽게 미소를 띄우는 것이 훨씬 쉽

습니다. 고기를 먹는 것 보다도, 안먹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망상(妄想)하는 것 보다도 자기 본래면목자리자기 본래 주인공 자리 우

주가 본래 훤히 빛나있는 진여불성이고 부처님이거니, 부처님 자리을 생각

하는 것이 제일 쉽습니다.


   화두(話頭)나 주문(呪文)이나 염불(念佛)이나 모두가 다, 자기 본래의 고

향 자리, 자기가 떠나오고, 다시 돌아갈, 그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생각 하는 것, 이것이 화두요, 염불이요, 주문인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는, 우리 피도, 우리 정신도 순간순간 맑아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건강이나 우리 공부나 둘이다고 봅니다 만은, 우리 건강과 공

부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원래 둘이 아니거니, 일체(一切)

가 유심조(唯心造)거니, 정말 우리 마음으로, "아! 내 몸뚱아리 이것은 물질

은 텅텅비어 있고, 있는 것은,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 광명(光明)뿐

이구나. 지금 당장에 미운 사람이 앞에 있어도, 저 사람도 바로 보면 모두가

다 진여 불성광명이 충만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할 때는, 그 순간 우리 가

슴도, 머리도, 눈도 시원한 것입니다. 가장 건강한 생활 - 정신 건강과 우리

생리적인 육체적 건강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참선은 무엇인고 하면은, 그러한.......

   에누리 없이 방편을 떠나서, 우리 중생이 있다 없다하는, 나다 너다하는,

그런 자리를 떠나서 부처님 말씀 그대로, 실상(實相) 그대로, 생명의 실상

그대로 본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가상(假相)만 봅니다.

   생명의 실상(實相) 그대로, 성자(聖者)가 보는 그대로, 우리가 그렇게 느

끼고, 그 자리를 지킨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는 몸도 마음도 가볍고, 또는

우리 판단도 정확한 판단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그 자리, 우리 주인공자리, 진여불성 자리를 지키면서

염불 하면은, 그 선()이 바로「염불선(念佛禪)」인 것이고 말입니다. 또

는 그렇게 하면서 주문을 외우면, 그 자리가 바로 「주문선(呪文禪)」인 것

이고, 그렇게 하면서 화두하면, 그 자리가 바로 「화두선(話頭禪))」이고

말입니다.또는 화두나 염불을 안한다 하더라도, 그 자리만 딱 지키고 있으

면 그것이 바로 「묵조선(默照禪)」 입니다.

   공부하기 참, 쉬운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음식을 너무 많이 자십니다.

   꼭 주의하셔야 씁니다. 이 몸뚱아리가 무엇이건데 말입니다. 몸뚱아리에

너무 많은 옷을, 비싼 옷을 입힙니다.

   죽을 수 밖에는 없는 것, 결국은 내 것도 네 것도 아닙니다. 금생에 잠시

간 쓰다 버릴 이런 허망한 자기 몸입니다. 함부로 해서는 안되겠지만, 음식

은 너무 많이 먹으면은 절대로 몸에도 이롭지가 않습니다. 또 따라서 우리

마음도 그만큼 혼탁한 것입니다. 인간이 시초에 나올 때는「광음천(光音

)」에서 나온 것인데, 광음천에서 나올 때는, 그 때는 우리 몸이 광명신

(光明身)입니다.


   그 때는 음식을, 질료, 물질을 안 먹는단 말입니다. 오염(汚染)되고, 오염

되고 해가다가 종당에 와서, 이와같이 물질을 많이 먹고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는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일종식(一種食)인지라."

삼세(三世) 부처님 모두가 하루 한끼 자신단 말입니다.


   우리 출가한 비구나 비구니가 계()받을 때는 맨 처음에 `사미십계"라,

계() 받을 때도 역시 중후불식(中後不食)이라 - 오후불식(午後不食)을 지

켜야 한다. 이렇게 계를 받는단 말입니다.


   인도에나 필요했고, 우리 한국에서는 필요하지 않는 법이 아닙니다. 단호

하니 우리는 믿어야 쓰는 것입니다. 하나의 몸뚱아리를 유지하는데 그렇게

많은 칼로리가 필요치 않는 것입니다.


   현대 생리학(生理學)은 우리 마음이 주인공(主人公) 인지를 모르니까."우

리 몸에는 꼭 몇 칼로리가 필요하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 우리 생명 자체

는 진여불성 자리가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 낳지 않고 영생불멸 하고, 아프지 않는 그 자리, 진여불성, 이

것이 바로 우리 주인공 입니다.


   따라서, 그 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딱 머물게 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사실

은 적게 먹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 먹기 때문에, 그 비용, 그 시간이 얼마

나 듭니까.


   삼세제불이 일종위주라. 삼세제불은 당신만 하고 일반 사람들은 안해도

좋다.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삼세제불은 자기도 하고, 모든 중생이 당

신을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에는 육재일(六齋日)이라.- 음력으로 8일, 14일, 15

일, 23일, 29, 30일 - 육재일 동안에는 재가 불자님들도 역시, 우리 출가 승

려 비슷하게, 그에 따라서, 절에 못간다 하더라도, 자기 집에서라도, 하루

일종을 다 지키시는 것입니다.

   재가 불자도 하루 일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한달에 엿새동안 일종을 하고, 정말로 청정한 생활를 해 보십시요. 우리

생활이 얼마나 맑아지고, 가정 분위기가 얼마나 좋을 것인가?


   우리는 그냥 구두선(口頭禪)으로 해서 `아! 생사(生死)가 없다. 모두가 진

여불성이다. 우주는 화장세계다" 이런 말 하기는 쉽습니다. 만은, 「증명」

을 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어느 분들은,"아, 스님네가 도시(都市)에 많이 나와서 계실 것이지, 산중

 

(山中)에서 그냥 중생(衆生)을 외면한다" 하나, 제가 생각할 때는 너무나 많

이 도시에 나와 있습니다. 이런 때는 꼭 우리 출가 수행자(修行者)가 부처

님 자리, 진여 불성 자리, 생사가 없는 자리를 분명히 증명(證明)할 수 있는

분들이 많이 나와야 쓰는 것입니다.


   어째 그런고 하면은, 불교(佛敎)가 사는 길도 또는 국가(國家)가 사는 길

도, 세계에서 갈등 되어있는 그런 모든 혼란스러운 문제, 이런 문제가 있을

때는 참말로 증오(證悟)한 분들이 많이 나와야 쓰는 것입니다.


   부처님 10대 제자 가운데서 「마하 겁빈나」라. 그 분은 왕자인데 부처님

께서 "이제 저 사람을 제도해야 쓰겠구나"생각하셔서, 시절인연(時節因緣)

이 당도했다고 보셔가지고서, 그 마하 겁빈나 왕자보고 오라고 불러 놓고

서,그 왕자 앞에서, 저 공중에 솟아 올라가서 십팔신변(十八身變)이라 - 부

처님께서 신통으로 십팔신변을 나투었단 말입니다. 그 왕자도 물론 선근

(善根)이 있으니까 그렇겠지만은, 그 십팔신변을 나투신 부처님의 「신통

묘지」를 보고서, 그 자리에서 그냥 발심(發心)했단 말입니다.


   지금 같이 혼란스러운 때에, 지금 같이 불신(不信)의 시대에, 이런 ?, 정

말로 부처님 당시 같이 또는 부처님 뒤에라도 위대한, 정말로 참다운 삼명

육통을 통한 도인들이 많이 나온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 길을 안믿는 분

들은 참 희귀(稀貴)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같이 현대 물리학도 역시 제행이 무상이요. 또는 모두

가 다 허망무상(無常)하고, 공()이요, 고()요, 무상이요, 이런 것을 안단

말입니다. 물리학도 오히려 알거든, 생사해탈의 문중(門中)에서 공부하는

우리 불자님들이, 고도 모르고 또는 무상도 모르고, 또는 내가 없다는 소식,

무아(無我)도 모르고,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

니다.


   정말로, 내 본성품(本性品)이나, 우주의 본성품은, 진여불성 자리, 훤히

빛나는 광명만 존재하는, 생명의 광명만 존재하는 진여불성자리입니다.


   그 자리을 놓치지 않고서 기도도 모시고, 참선도 하고, 염불을 한다고 생

각할 때에 우리 마음은 걸음걸음 정화(淨化)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마음이 정화된 정도에 따라서, 우리 마음은 차근차근

부드러워 집니다.


   본래 불성자리는 나와 남이 없거니, 불성자리에 접근되면 될 수록 부드러

워 지고, 원만해 지고, 자비러워지는 것은 사실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서 정말로 그때는 진여불성의 광명이 우리한테 비추어 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환희지(歡喜地)라 - 환희지란 말입니다. 그때 느끼는 행복만이

참다운 행복인 것입니다.

   참선(參禪)하기가 가장 쉽습니다. 우주(宇宙)의 도리(道理)에 따르기 때

문에 가장 쉬운 것입니다.


   석가모니나, 또는 공자나, 노자나, 예수나, 모두가 다 성인들은 깊고 옅은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우주의 도리에 따른 분들입니다. 우주의 도리에 따

라야만이 공산주의를 하나, 또는 자본주의를 하나, 어떤 주의를 하던지간에

중도(中道)를 놓치지 않고서, 참다운 중정한, 중정공정(中正公正)한 정치도

할 수 가있는 것이고, 자기 행동도 그렇게 할 수 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부처님의 열반절(涅槃節)」을 당해서, 부처님의 열반 - 소승열반

이 아니라....  소승열반은 부처님의 몸이나 마음이 그대로 사라져 버리고,

영원한 공()가운데 사라져 버리는, 그런 정도로 생각하는 열반, 이것이

소승열반인 것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열반은 그것이 아니라. 영생불멸하는 무량한 공덕을 - 아

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같이 상락아정이라. 상주부동해서 영생불멸하고, 또

는 가장 완벽한 행복이고, 또는 일체 신통묘지를 갖춘 대아 또는 진아의 자

리고, 또는 조금도 번뇌가 없는 청정무애한 자리고, 이런 자리 - 상락아정

(常樂我淨)의 자리를 분명히 우리가 스스로 느끼고 또는 우리 스스로 체험

하는 그 자리, 이것이 대승열반입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 - 영생(永生)하고, 또는 안락(安樂)스럽고, 또는 모

든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를 다 갖추고 또는 번뇌(煩惱)의 흔적이 없는 그

자리!


   그 자리를 오늘 부처님 열반절을 당해서 마음으로 간직하시고, 성불(

)하기 위한, 참다운 대승열반(大乘涅槃)을 얻기 위한 가장 쉬운 길, 이것

이 참선(參禪)의 길입니다.


   어느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고 또는 이것은 에누리 없는 참다운 대승적

(大乘的)인 수행법(修行法) 입니다.


염불(念佛)하면 염불선(念佛禪)이요,

화두(話頭)하면 화두선(話頭禪)이요,

묵조(默照)하면 묵조선(默照禪)이요 또는,

주문(呪文)을 외면 주문선(呪文禪)이요.


   그러나 다만 문제는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 마음이 나나 너나, 일체존재

(一切存在), 일체만유(一切萬有)의 근본(根本)자리인 영원히 빛나는 그 자

리, 영원히 빛나는 자성(自性)자리, 이 자리를 꼭 지키고 하셔야 씁니다.


   이렇게 하셔서 금생에 꼭, 대열반(大涅槃)을 증명(證明) 하셔서 무한(

)의 행복(幸福)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법문을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


<덧붙이는 글>


   불교방송국 주최 부처님 열반절 특별 법회가 불기 2535년, 서기 1991년 3

월 30일 오후 3시 BBS 3층 공개홀에서 열렸읍니다.


   이번 법회에 전남 곡성 태안사(泰安寺)에 주석하고 계시는 석 청화(釋 淸

) 큰스님께서 설법하신 귀중한 법어(法語)를 방송국에서 직접 녹음한 테

이프를 입수, 녹음 그대로 여기에 글로 옮김니다.


   큰스님 육성 그대로, 법의 향기를 그대로 전하기 위해서 원음(原音) 그대

로 실었습니다.


   이 법문은 진리(眞理)를 노래하시는 한편의 대 서사시(敍事詩)이며, 범부

중생(凡夫衆生)을 위한 간절한 절규(絶叫)이시며, 불교의 진리를 간결하고,

명료하게 보여주신 법문입니다.


   잘못된 부분은 전적으로 녹취자(錄取者)의 책임임을 밝혀둡니다.


                                          불기2535년 5월 10일


                                            대한불교 금륜회 합장


◇◇◇◇◇◇◇◇◇◇◇◇◇◇◇◇◇◇◇◇◇◇◇


영생해탈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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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991년 6월 22일 발행

설법 : 청화 큰스님

발행 : 대한불교 금륜회

광주직할시 동구 호남동 3-2.

전화 : (062) 224-0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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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공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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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취자 : 本淨 김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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