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문화재단/다석류영모(多夕柳永模.1890~1981)

몸나를 버리고 얼나로 거듭나는 길 | 다석채플

▪살림문화재단▪ 2012. 8. 11. 03:30

 

다석 류영모(多夕 柳永摸)
몸나를 버리고 얼나로 거듭나는 길
글│박영호(성천문화재단 다석 사상 연구위원)  (2000 년 9 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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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모는 스스로가 밝힌 것처럼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가르친 말씀대로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솟난(거듭난)사람이다.

 
몸나에서 얼나로 솟난이

  예수가 바리새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로부터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요한 8:23)고 하였다. 여기서 아래로 났다는 것은 어머니의 하문(下門)으로 났다는 뜻이다. 위로부터 났다는 것은 하느님의 생명인 성령으로 났다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도 어머니 마리아의 하문으로 나왔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 자신은 위로부터 났다고 하였을까?
  어머니의 하문으로 난 몸뚱이인 자아(ego)를 참나로 알고 사는 이는 아래로 난 사람이다. 자아(ego)를 가졌으나 자아가 참나가 아님을 깨닫고 하느님의 성령을 받아 얼나(soul)로 솟난 이는 위로부터 난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 자신은 몸을 지녔어도 위로부터 났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얼나는 하느님의 생명인 성령이라 하느님에게 속했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에 속한 것은 나지 않고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지만 세상에 속한 것은 나서 죽는 멸망의 생명이다. 예수가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요한 18:36)라고 한 것도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짐승인 자아(自我)로 짐승 성질인 탐(avarice) 진(anger) 치(lust)로 사는 사람들은 예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한국 사람이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데, 멸망의 생명인 짐승이 영원한 생명인 하느님 아들의 말을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가 나는 진리를 증거하러 왔다고 하자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 (요한 18:38)고 물었던 것이다. 예수가 말한 진리란 하느님의 생명인 성령(얼나)을 말한 것이다.
  류영모가 말하기를 “몸사람은 호기심으로 살맛(肉味)을 찾아다니는 짐승이다. 그러나 하느님 아들인 얼사람은 하느님 아버지께로 올라가려고 한다. 짐승인 자아로만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모른다. 하느님의 성령인 얼나가 영원한 생명이다. 예수 석가에게 나타났던 영원한 생명이 나에게도 나타났으니 영원한 생명이 시간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다석어록』)고 하였다. 류영모는 스스로가 밝힌 것처럼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가르친 말씀대로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솟난 (거듭난) 사람이다.
  
나라가 멸망하자 예수교에

  조선왕조가 멸망한 것은 국력이 약해서 멸망한 것으로 알면 잘못 아는 것이다. 진리정신, 도덕정신이 땅에 떨어졌기 때문에 멸망한 것이다. 진리정신 도덕정신이 살아 있으면 국력이 약해지지도 않는다. 진리정신 도덕정신이 나라의 기초이다. 기초가 흔들리고 무너지는 데 나라가 어찌 버틸 수 있겠는가. 조선왕조는 공자(孔子)가 되라는 군자유(君子孺)가 되지 못하고 되지 말라는 소인유(小人孺)가 되어 당쟁만 일삼다가 멸망한 것이다.
  1905년 류영모가 15살 때 강제로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으로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러자 백성들은 의지할 곳을 찾아 기독교 신자가 되거나 천도교 신자가 되었다. 그때 기독교와 천도교 신도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5살의 류영모도 나라가 멸망하는 공포와 불안의 분위기에 휩싸여 서울 종로기독청년회관(YMCA)에 애국지사들의 연설을 들으러 다녔다. YMCA 한국인 초대 총무인 김정식(金貞植)의 연설을 듣는 가운데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였다. 나라가 없어졌으니 하느님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류영모는 땅의 나라를 빼앗기고 하늘나라를 얻은 셈이 되었다.
  그래서 류영모는 신앙은 시련과 고난에서만 얻어진다고 말하였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른다. 진리정신은 거저 깨어나지 않는다. 가난과 고초를 겪은 끝에 정신이 깨어난다. 세상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만 하느님이 걸어온다. 하느님은 우리들에게 하느님을 알고싶은 생각을 일으켜준다. 정신생명을 얻기 위하여 육체생명을 버리는 것이 바른 신앙에 들어가는 것이다. 세상을 미워하고 세상을 버려야 한다. 식욕과 정욕을 미워해야 한다. 모든 탐욕을 버리는 것이 세상을 버리는 것이다.” (『다석어록』)
  류영모가 말하기를 “어머니 배에서 나온 나(自我)는 참나가 아니다. 겉(몸)사람은 흙 한 줌이요 재 한 줌이다. 하느님이 보낸 성령인 얼나가 참나다”(『다석어록』)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류영모의 육신의 아버지 어머니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몸나의 아버지는 서울 종로에서 사업을 한 상인이었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남긴 그 유산으로 류영모는 일생 동안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석가의 아버지가 성주이면 어떻고, 예수의 아버지가 목수이면 어떻고 공자가 사생아이면 어떻단 말인가?



“류영모는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자기가 만든 간단한 요가 동작을 1시간 정도 했다.

그리고 하루에 한끼 만 먹는 생활을 40년 넘게 이어왔다.

1981년, 아흔 한살의 나이로 소풍을 끝내고 우주로 돌아갔다.”




23살에 정통신앙을 버림

  류영모가 말하기를 “나는 아는 목사들하고는 성경이야기는 안 했다. 신앙은 서로 다른 대로 같다. 괜히 교리문제로 서로 충돌하여 남들이 잘 믿는 신앙을 흔들어 놓을 필요가 없다. 나도 만 15살에 예수교에 입신하여 만 22살까지는 십자가를 부르짖는 십자가 신앙이었다. 일본의 우치무라는 외국선교사에 반대하여 사도신경의 정신에 입각한 성서 본래의 정통신앙을 세웠다. 우치무라나 무교회(無敎會)는 정통신앙 그대로지만 나나 톨스토이는 비정통이다”(『다석어록』) 라고 하였다.
  류영모가 그렇게 열렬하게 믿던 정통신앙을 버리게 된 데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기독교 신앙생활을 만 6년을 하였다면 기독교가 무엇인지 그 정체(正體)를 알았을 것이다. 류영모가 신앙을 버리고 타락의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앙적인 업그레이드(Upgrade)가 일어난 것이다. 노자(老子)가 이르기를 “돌이킨다는 것은 성령이 움직이는 것이다(反者道之動)” (노자 40장)라고 하였다.
  류영모의 신앙이 맹신(盲信)에서 각신(覺信)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제까지 교회의 도그마(교의)에 맹종하던 류영모에게 이러한 생각이 나왔다. “나에게 오라. 나의 신조만이 여러분을 구원하고 여러분의 사는 길일 것이다. 이는 마치 마호메트가 한 손에 코란을 한 손에 칼을 들고 권유하듯 한다. 이런 짓이 다 자기가 미정고(未定稿)라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무엄하게도 하늘 자리까지 뺏어 앉겠다는 것이다. 예수가 말하기를 이 다음 너희가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알 수 없는 말 같으나 예수 당신이 해놓고 간 것이 미정고이니까 이것을 계승하는 후대의 사람들이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당신이 가까이 하신 하나(하느님)의 존재를 후대가 더 가깝게 마침내 보고 이르는 견지(見地)까지 갈 것이라는 말이다. 개 한 마리가 달을 보고 짖으면 동네 개들이 따라서 짖듯이 남의 말을 따르는 것이 신앙이 아니다.”(『다석어록』)
  류영모가 6년 동안의 교회생활 끝에 2천년 동안 외우기를 강요해 온 사도신경을 버리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기독교가 사도신경을 가지고 정신적 독재를 해온 것은 하느님의 진리가 아닌 교회의 권위를 과시하려는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칭함)에 지나지 않는 짓이었다.
  사도신경을 믿는 자유가 있듯이 믿지 않는 자유도 있는 것이다. 아무리 진리라 하여도 이것을 안 믿으면 죽이겠다는 식이 되면 그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을 대변한 예수도 그런 짓은 안 했다. 그 버릇을 아직도 못 고치고 사도신경을 안 믿으면 이단이라는 따위의 억지 소리를 하고 있다. 공산당이 자기들에게 동조하지 않으면 반동분자라며 박해한 것과 무엇이 다른가?
  류영모가 정주(定州) 오산학교에 정통신앙을 전도하고 자신은 비정통으로 돌아섰다. 이 신앙적인 아이러니의 수수께끼를 풀어 볼만하다.
  첫째, 두살 아래의 아우 영묵이가 스무살의 나이로 급서(急逝)하였다. 영묵이는 형 류영모 못지 않게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 교회에서 말하는 대로 하면 축복 받아 잘 살아야 할 영묵이가 죽었으니 교회의 축복 받는다는 주장에 회의가 생겼다. 둘째, 춘원 이광수가 일본에서 가지고 온 톨스토이 저서를 읽고 교회신학의 허구를 알게 되었다. 셋째, 그때 오산학교에 머물고 있던 단재 신채호와 시당 여준의 권고로 노자와 불경을 읽게 되었다. 그리하여 류영모의 정신적인 성장이 감히 교회 2천년의 세속적인 전통을 부인하기에 이른 것이다. 첨언할 것은 류영모는 인문 (철학)적인 사고력이 우수할 뿐 아니라 과학적인 사고력도 뛰어났다. 류영모는 오산학교에서 수학 물리 화학 천문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일본 동경에 유학을 가서도 물리를 전공하였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들이 지나친 욕심을 가지고 있다. 신선(神仙)이 되어 영생불사하기를 바라는가 하면 예수를 믿으면 예수가 내려와서 죽지 않고 살려서 하늘로 구름 타고 올라간다는 걸 믿고 바란다. 이 땅에서 몸 쓰고 영생한다느니 신선이 된다느니 하는 것은 기독교 불교 도교 할 것 없이 멸망시키는 일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자꾸 이것을 구하니 인간이란 짐승이 어찌 된지 모르겠다. 지극히 높은 데 계신 완전한 아버지께로 가자는 게 예수의 인생관이라고 생각된다. 나도 이러한 인생관을 갖고 싶다. 이런 점에서 예수와 나와 관계가 있는 거지 이 밖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밖에 속죄니 하는 것은 나와 상관도 없고 믿지도 않는다.”(『다석어록』)
  
52살에 구경각을 이룸

  류영모는 52살에 최고의 깨달음인 구경각(究竟覺)을 이루었다. 거짓나인 자아(自我)로 죽고 참나인 얼나로 솟나 얼나로는 하느님과 하나인 것을 알았다. 곧 시공(時空)으로 영원 무궁한 하느님이 참나임을 깨달은 것이다. 무시무종(無始無終)한 성령인 하느님이 참나인데 몸나의 나고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깨달았다. 류영모는 말하기를 “예수는 간단하게 말하였다. 영원한 생명이란 죽음을 부정하는 거다. 죽음이란 없다. 이 껍데기 몸이 죽는 거지 참나가 죽는 게 아니다. 몸이 죽는 것을 무서워하고 싫어할 까닭이 없다. 보통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 껍데기 몸이 픽 쓰러져서 못 일어나는 것 밖에 더 있는가. 이 껍데기가 그렇게 되면 어떤가. 진리의 생명(얼나)은 영원하다.”(『다석어록』) 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구경각을 이루고는 곧 단식·단색에 들어갔다. 몸나를 죽이는 길은 식색(食色)을 버리는 것이다. 완전히 먹기를 끊으면 죽기 때문에 하루에 한 끼씩만 먹었다. 그리고 가족들 앞에서 해혼(婚解) 선언을 하고 부부로 살되 성생활을 끊는다고 하였다. 이것이 몸이 지닌 짐승성질인 탐진치(貪瞋痴)를 버리는 일이다. 1960년에 류영모가 이렇게 말하였다. “하루 한 끼 먹는 지가 한 20년 된다. 새해 2월 18일이 꼭 20년이다. 다른 것은 모르지만 일중(日中 : 一日一食)하는 건 호기심으로 사람들이 물어본다. 또 나는 51살까지 범방(犯房)을 하였는데 그 뒤로는 아주 끊었다. 아기 낳고 하던 일이 꼭 전생(前生)에 하던 일같이 생각된다. 정욕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다.”(『다석어록』)
  류영모는 몸과 맘으로 된 자아(自我, ego)가 거짓나이고 얼나가 참나임을 알고 나니 모든 경전의 뜻이 저절로 풀리었다. 류영모는 예수 석가도 자기처럼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깨달았던 것을 알았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고 석가가 부처가 된 것은 그 얼나 때문임을 알았다. 하느님의 성령인 얼나를 깨닫기 전에는 예수 석가도 우리와 다름없는 범인(凡人)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하느님의 생명인 얼나를 깨닫고 나니 예수 석가의 개체적인 구별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얼나로는 모두가 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석가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내 맘속에 얼나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생명인 얼나에 개체가 있을 리가 없다. 공통의 생명이요 하나의 생명인 것이다.
  류영모는 말하기를 “예수를 따르고 예수를 바라보는 것은 그의 몸(色身)을 보고 따르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내 맘속에 있는 하느님의 성령인 얼나가 참나임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므로 먼저 내 맘속에 있는 얼나를 받들고 따라야 한다. 그 얼나가 예수의 참 생명이요 나의 참 생명이다. 예수의 몸도 내 몸과 같이 죽을 껍데기지 다른 게 아니다. 예수 석가에게 나타났던 영원한 생명(얼나)이 나에게도 나타났으니 영원한 생명은 시간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만은 틀림없다. 영원한 생명을 깨닫고 나니 밥 먹고 똥 누고 하는 이 일을 얼마나 더 해보자고 애쓰는 것은 참 우스운 일이다.”(『다석어록』) 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종교들이 서로 배척하고 비난하는 일은 진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인들의 영토분쟁이나 인기경쟁에 지나지 않는 것임이 분명해진 것이다. 예수 석가 공자가 얼나로는 한 생명인데 다툴 일이 무엇인가. 불교신문이나 기독교 신문을 읽어보면 종교적인 세력 싸움을 하고 있음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 참선을 어떻게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류영모는 통탄하기를 “알긴 무엇을 아는가. 우리는 아는 것이 없다. 예수교 믿는 사람은 유교를 이단시하고 불교를 우상숭배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예수를 비난하고 유교를 나쁘다고 한다. 유교에서 불교를 천시하고 기독교를 백안시한다. 그리고서 무엇을 안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유교 불교 기독교를 서로 비추어 보아야 서로 서로가 뭔가 좀 알 수 있게 된다.”(『다석어록』) 고 하였다.
  
1년 뒤 나 죽는다

  류영모는 52살에 구경각을 이루고부터 바로 널(棺) 한 감을 사서 밑 칠성판만 방안에 들여다 놓고 낮에는 그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고 밤에는 그 위에서 잠을 잤다. 그러니 무덤 속에서 사는 고려장 살이나 다름이 없었다.
  류영모는 말하기를 “우리는 날 때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다. 형무소에서 죄수를 사형집행하는데 죄수들을 사형집행장에 데리고 와서 죄수가 모르는 결에 서있는 마루청이 떨어지면 목이 졸려 죽게 된다. 우리도 그와 같이 마루청이 떨어지지만 않았지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그러한 형편에 있다. 이 사실을 잊으면 쓸데없는 잡념에 시달리고 욕망에 끌려다니고 교만에 빠진다. 사람은 죽음을 가깝게 생각할 때 생각이 깊어져 얼의 나라와 뚫린다.”(『다석어록』) 고 하였다.
  류영모는 하루살이(一日一生)로 살았다. 예수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태 6:34)라고 말한 것도 하루살이를 하자는 것이다. 이미 자아(自我)로는 죽었는데 그리하여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1년 뒤에 죽는다는 말은 사실은 쓸데없는 소리였다. 그런데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은 죽음을 잊어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깨우쳐 죽음 공부를 시키기 위해서였다.
  1956년 4월 26일에 죽는다고 1년 전 서울 YMCA 연경(硏經) 모임에서 선언하였다. 사람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류영모는 깜짝 놀라게 하고자 하는 일이었다. 1956년 4월 26일을 죽는 날로 잡은 것은 김교신의 죽음과 관계가 있다. <성서 조선> 발행인 김교신은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조국의 광복을 못 본체 1945년 4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나이로 보나 신체로 보나 류영모가 죽었으면 죽었지 김교신이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김교신은 류영모보다 11살 아래인 44살이었다. 그리고 김교신은 체격이 건장하였다. 양정고보의 지리교사였지만 마라톤 선수 손기정을 지도하였다.
  죽음 공부를 하여온 류영모에게도 김교신의 죽음은 충격이었다. 부음(訃音)을 듣고서 자신의 죽을 날을 더듬어 보았다. 김교신이 자신보다 11년 뒤에 왔는데 먼저 갔으니 자신은 11년 뒤에 죽을 것인가. 이렇게 하여 1956년 4월 26일이 죽을 날로 정해진 것이다. 1945년 4월 25일에 정한 사망가정일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가 10년 지난 1955년 4월 26일에 사망가정일을 선포한 것이다. 다른 사람 같으면 잠시 그런 생각을 하였다가도 10년이 지나면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류영모는 잊어버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공개하였다. 그만큼 언제나 죽음을 잊지 않고 살았다는 증거인 것이다.
  류영모가 죽음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키에르케고르가 죽음을 잊지 않았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류영모는 죽음에 자유(초월)하는 사람이었다.
  죽음을 맞이하는 데 3가지 유형이 있다. 연애를 하다가 기쁨으로 시집을 가듯 죽는 사람, 또 중매 결혼을 하여 서먹서먹하지만 불안 반 기대 반으로 시집가듯 죽는 사람, 마지막으로 보쌈 당해 시집가듯 억지로 죽는 사람이 있다. 이왕이면 사랑하는 님에게 시집가듯 죽어야 한다. 하느님은 진·선·미한 영원한 님이시기 때문이다. 물질의 개체에서 성령의 전체로 돌아가는 만큼 기쁘고 영광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류영모가 실제로 세상을 떠난 날은 1981년 2월 1일로 아흔 한 살을 살았다. 류영모가 사는 동안 많은 인재(人材)들을 만났다. 춘원 이광수·육당 최남선·호암 문일평·위당 정인보 등이 류영모의 절친한 문우(文友)들이었다.
  그리고 함석헌·김교신·류달영·현동완·인현필·김흥호·염낙준·김정호 등이 그를 스승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류영모를 바로 알아준 사람은 드물었다. 아니 한 사람도 없는지 모른다. 류영모는 말하기를 “죽은 사람 앞에서 통곡할 것은 이 사람도 아무도 못 만나고 갔구나. 나도 누구 하나 못 만나고 갈 건가 하는 생각이다. 누가 남의 속을 아는가. 부부 사이도 부자(父子) 사이도 서로 모르고 지낸다. 알아주는 사람 하나도 못 만나고 거저 왔다 간단 말인가.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하느님만 나를 알아주면 그만인 것이다.”(『다석어록』) 라고 하였다.


글쓴이 박영호
현재 성천문화재단의 다석사상 연구위원으로 있으며
성천아카데미에서 다석 사상과 함께 노장(老莊)사상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 및 엮은 책으로는 『다석사상전집』(7권),『중용 에세이』
『다석 추모문집』『노자(老子)』『장자(莊子)』
『다석 류영모 명상록』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