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문화재단/다석류영모(多夕柳永模.1890~1981)

다산 유영모 선생의 사상 / 살림도방 다석채플

▪살림문화재단▪ 2012. 8. 16. 12:38

 

 

19세기 말 조선조에 태어나 한학자로 서구의 민주정신, 과학정신,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여 동양적 한국적 사상과 영성을 추구하였던 다석 유영모 선생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불교와 도교, 유교 및 여러 철학 사상을 관통하는 한국적 기독교신앙과 사상을 펼쳤다고 합니다. 참고로 함석헌 선생이 이 분의 제자입니다.이 분의 사상을 강의하신 박재순 박사님의 글 중에 김박사님의 정기신 강의 내용 및 여러 도담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들도 있어 일부를 발췌하여 여기 올려봅니다.


精力과 氣와 神

   다석은 정력(精力)을 바꾸어 단(丹)을 이룬다는 도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 “도교에서는 精氣神이라 하여 정에서 기운이 나오고 기운에서 신이 나온다고 생각했다.”(남녀. 1,865-8)  다석은 여러 가지 장생법과 양생법을 실험해 보고 나서 “몸과 마음을 곧게 하는 것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입 다물고 몸과 마음을 곧게 하면 숨이 저절로 깊어지고 숨이 깊고 고르면 몸과 마음이 성하다.”(진2. 41)


'거룩한 생각의 제사' -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이 열리는 것을 표현한 것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새 피가 깊은 허리 기둥뼈 안쪽으로 굳게 달린 콩팥에 가서 알짬 샘물로 되어 잠근 동산 덮은 움물로 간직된다. 또 그 움물 가에서는 알짬샘물[精力]이 구름 피우듯이 온 몸 우로 떠오르도다.” 사람의 얼은 그 떠오르는 구름으로 살이 찌고 살이 찐 얼은 “다시 거룩한 생각의 구름을 피여 올린다.” 다석에 따르면 피여 오르는 거룩한 생각의 구름이 “한우님께로 올라가는 기름이요 빛”이다. 그것은 “참 목숨의 기림빛...빛난 기름”이다. 이것은 “참 받으실 만한 목을 드림이다.”


숨 : 생명의 실올 (웃음/우숨/위를 쉬는 숨은 하나님과 통하는 숨이라고 하네요. 위를 쉰다는 숨은 백회혈 호흡을 말하는 건가?)
  다석은 숨을 생명 줄로 본다. 사람의 목숨은 맨 처음부터 이어온 생명의 실올이다. ‘바른 목숨’이란 글에서 “한바람 목숨실올을 바로 세웨지이다.”(4,89)고 말한다. 숨쉬는 일은 속알이 밝아지는 일로 그리고 하늘 나라를 찾는 일로 이어진다. 숨 줄은 내가 지금 살아가는 줄이고 살아갈 줄이다. 큰 숨이 자라 나라가 이루어진다.
다석은 숨에는 세 가지 목숨, 말숨, 우숨(웃음, 위를 쉬는 숨)이 있다고 보았다.(다1,28) 목으로 쉬는 숨, 말씀으로 쉬는 숨(소통), 위 하나님과 통하는 숨. 숨은 삶의 꼭대기(위이 없는 첫 자리)에서 한얼(절대령)과 통하고 밑이 없는 빈탕까지 채우고 남는 깊은 힘을 싣고 있다.(제소리. 1. 903)


삶을 위한 살림 - (너무나 가슴에 와닿는 말씀입니다. 살림을 위해 삶을 희생하는 어리석은 우리...)
  다석은 삶과 살림을 구별한다. “삶은 숨이 위주요 살림(집, 솥)은 먹는 게 위주다. 삶은 하늘이 주신 풍부함을 감사해야 한다.”(1,642-3) 다석은 “삶을 위한 살림은 가하나 살림을 위한 삶은 애초에 없는 것이다.”라고 단언한다. 살림은 지상에서 삶을 평면으로 넓고 크게 펼치자는 것이고 삶은 숨을 깊게 쉼으로써 정에서 기로, 기에서 신으로 더욱 높이 솟아오르자는 것이다. “살림만 크게 하랴다가는...살림에 치어죽는다. 전에도 그랬고 후에도 그렇다. 쌀 속에 묻혀 죽는 생쥐와 같이.”(1,647) 지상에서 평면적인 살림을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사람은 살림에 치어 죽는다고 한다.


 

‘제사: 빈탕 한데서 노는 삶’ - (제가 처음 도방을 방문하여 삶이 무엇인가 여쭈었을 때 박사님은 삶은 그저 한바탕 놀이라고 하셨지요.)

  이런 자유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제사 드리는 사람이 누리는 자유이다. 제사는 자아를 불살라 허공, 빈탕한데 하늘에 올리는 일이다. 다석은 제사(祭祀)를 ‘놀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서 “세상 일은 사실 다 놀이라고 볼 수 있다. 자고 일어나고 활동하는 것 모두가 다 놀이다. 하나님 앞에서 한 어린아이로서 이 세상을 지낸다면 그거야 말로 참 놀이가 될 수 있다.”
꾸 밈없이 자유롭게 놀려면 “빈탕한데 얼(魂)이 연락되어야 한다....(번쩍거리는 세상물건에)...우리의 얼을 덜다가는 정말 ‘얼빠진 나’가 되고 만다...우리는 묶고 묶이는 큰 짐을 크고 넓은 ‘한데’에다 다 실리고 홀가분한 몸으로 놀며 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종당에는 이 몸까지도 벗어버려야 한다...다 벗어버리고 홀가분한 몸이 되어 빈탕한데로 날아가야 한다.“(빈탕한데 맞혀 놀이. 1,889-898)


(한 세기 전에 이 분이 생활하시던 모습 중에 현대의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들이 보입니다.)

  소식(하루 한끼), 새벽 일찍 일어나기(3시), 찬물 수건 몸 문지르기, 시간 약속 잘 지키기, 늘 걸어다니기, 늘 꿇어앉음을 실행했다. 경어쓰기, 남에게 잔 심부름 안 시키기, 한복입기, 시계 안 차기, 차 음료수 안 마시기, 얼음과자 안 먹기 (앗, 수정 도반, 앞으로 하겐다즈 금지네...^^), 음식점 안 가기, 약 잘 안 먹기, 비싼 과일 안 먹기, 부채질 안 하기를 했다. 새벽에 일어나 한 시간 가량 몸을 푸는 체조를 했다.마치 하루를 영원처럼 알고 하루가 일생인 듯이 살았다.


(그리고 이 분도 체조를 하루 30분 씩 열심히 하셨다고 합니다. 도인체조와 비슷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 다석의 체조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두 다리를 나란히 앞으로 뻗는다. 1) 두 팔을 어깨 폭과 높이로 들어 올린다. 2) 두 팔을 어깨 높이로 가슴껏 뒤로 벌린다. 3) 두 팔을 안으로 오므려 굽히면서 두 손등끼리 몸통 앞뒤로 부딛친다. 4) 두 팔을 앞으로 뻗치면서 두 팔을 붙인 채 손바닥으로 위로 향하게 하여 밖으로 비튼다. 5) 그대로 머리 위로 손을 넘겨 두 손바닥으로 뒤 잔등을 소리나게 친다. 6) 두 팔을 앞으로 돌려 어깨 높이로 나란히 든다. 7) 허리를 굽히며 두 손을 뻗친 발바닥을 잡을 수 있도록 힘껏 엎드려 뻗친다. 8) 같은 자세로 한번 더 허리를 굽혀 두 손으로 각각 발바닥을 잡고 힘을 준다. 9) 허리를 바로 하며 두 손으로 앞으로 나란히 뻗는다. 10) 두 팔을 두 다리 위에 내려놓는다. 이상의 몸놀림을 30분 이상씩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해야 한다.


신통 : 궁신지화- ('스스로가 하나님이다' 라는 박사님 말씀과 일치)

  신을 탐구하고 인간의 바탈을 탐구해서 신과 바탈에 통해야 한다. 신과 인간과 자연에 두루 통하는 것은 말씀이다. 생각은 말씀을 사르는 것이고 말씀은 두루 통해서 한통누리를 이루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주에 찼다. 우주가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말이 통하고 이치가 통하고 신이 통하여 한통 누리를 이루어야 한다.”(속알. 1,861-4)
“마음이 뚫리고 앎음알이가 뚫려야 정말 속알이 엉큼 엄큼 자라게 된다.”(속알. 1,861-4) “입에 밥이 통하고 코에 공기가 통하고 귀에 말이 통하고 마음에 신이 통한다...우주와 지구를 통째로 싸고 있는 호연지기가 나다.”(속알. 1,861-4) ‘나’는 우주를 싸고 있는 호연지기이고 신은 “없이 계신 분이다.” 생각해서 호연지기와 통하고 빈탕한데 계신 신과 통하면 시원하다. 다석은 “(없이 계신) 신은 언제나 시원하다.”(밀알1. 1,817-20)고 말한다. 신에 통하면 영생에 이르고 “죽음은 없다.”(밀알1. 1,817-20)

생각하는 주체의 성숙과 해방

  서구의 계몽철학이 타율적 전통과 비합리적 권위로부터, 다시 말해 타자(타인, 자연, 하나님)의 지배로부터 인간 자아의 해방을 추구했다면 다석은 더 나아가서 자아로부터 타자를 위한 삶, 자아와 타자가 귀일되는 삶에로의 해방을 추구했다. 성숙한 사람은 생·사를 넘어서고, 이·해(利害)의 시비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생각하는 존재로서 성숙한 인간은 자아로부터 자유로운 존재, 타자를 위해 열린 존재이다.


  신을 탐구하고 인간의 바탈을 탐구해서 신과 바탈에 통해야 한다. 신과 인간과 자연에 두루 통하는 것은 말씀이다. 생각은 말씀을 사르는 것이고 말씀은 두루 통해서 한통누리를 이루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주에 찼다. 우주가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말이 통하고 이치가 통하고 신이 통하여 한통 누리를 이루어야 한다.”(속알. 1,861-4) 
  “마음이 뚫리고 앎음알이가 뚫려야 정말 속알이 엉큼 엄큼 자라게 된다.”(속알. 1,861-4) “입에 밥이 통하고 코에 공기가 통하고 귀에 말이 통하고 마음에 신이 통한다...우주와 지구를 통째로 싸고 있는 호연지기가 나다.”(속알. 1,861-4) ‘나’는 우주를 싸고 있는 호연지기이고 신은 “없이 계신 분이다.” 생각해서 호연지기와 통하고 빈탕한데 계신 신과 통하면 시원하다. 다석은 “(없이 계신) 신은 언제나 시원하다.”(밀알1. 1,817-20)고 말한다. 신에 통하면 영생에 이르고 “죽음은 없다.”(밀알1. 1,817-20)


한글과 십자가의 만남 (예수의 십자가와 겨례의 뿌리 단군을 오묘하게 결합하였네요.)
   한글의 기본모음은 ㅡ ㅣ 는 예수의 십자가 나무 막대기를 나타내고 (하늘)와 ㅡ(땅)을 잇는 나무 막대기 ㅣ(정신)는 겨레의 뿌리인 단군, 다시 말해 나무 등걸과 ‘둥글’ 나무(朴)를 나타낸다. 막대기는 세상을 뚫고 솟아오르는 십자가와 겨레의 얼과 뿌리를 나타낸다.
십자가의 곧음(기독교)과 나무의 동글암(겨레 얼)이 결합되었다.


  다석은 요한 8,12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빛으로 왔다. 빛을 얻어라.”고 한 말씀이 “참 적극적이다...속죄는 너무도 소극적이다.”(1,817-20)고 했다. 속죄는 십자가를 믿고 수동적으로 구원얻는 것을 말한다면 “그리스도가 빛이니 빛을 얻어라.”는 요한의 말씀은 믿는 사람이 적극적, 능동적으로 빛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수행을 통하여 빛이 되겠지요?)


  다석이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를 나와는 다른 존재로 신격화 우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지 않는 생명임을 알기 위해서 믿는 것이다. 내가 하늘에서 온 씨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도 씨요 나도 씨다. 예수가 처음 익은 열매요 나도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어야 한다. 나를 믿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다.” 다석에게는 예수 믿는 것이 결국 나의 문제가 된다. 다석에게 나의 문제는 하나님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서 다석은 주체의 문제로 돌아간다. “나는 생각의 주체고 하나님은 생명의 주체다. 나, 예수, 하나님은...보이지 않는 주체다...주체이기 때문에 절대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생각하는 것이 있다는 증거다...내가 있으면 신도 있고 예수도 있다.”


 “예수·석가는 우리와 똑같다...유교·불교·예수교가 따로 있는 것 아니다. 오직 정신을 ‘하나’로 고동(鼓動)시키는 것뿐이다.” (다석어록. 진다2. 383)


다석사상의 핵심: 귀일(歸一)

   다석 사상의 핵심은 ‘하나로 돌아감’(歸一)에 있다. ‘위로 솟아오름’, ‘가온찍기’도 하나에 이름이다. 그가 늘 말하는 ‘고디 곧게’(貞)도 몸과 마음의 하나됨을 뜻한다. 위, 하늘도 하나이고 한가운데도 한 점이고 허공도 ‘없음’도 무극(無極)도 하나님도 하나이다. 다석에게 ‘빔’과 ‘없음’의 절대세계는 나뉠 수 없는 하나이다. 다석에 따르면 예수가 이루려 했던 하나님의 뜻은 “우주전체(宇宙全體)의 생명(生命)이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이 되게 하시랴는 아버지의 뜻”(요한복음 17장 22-3절)이다.(유1, 663)

  다석은 한사상을 바탕으로 ‘한’을 추구했다고 본다. 1964년 12월 25일에 천부경을 옮겼다. ‘한’을 근원과 밑둥으로 보았다. 첫 귀절 一始無始一을 “한 비롯 없는 비롯 하나”로 옮겼고 끝 구절 一終無終一을 “한마침 없는 마침 하나”로 풀었다.(다일4. 497) 한문을 그대로 우리 글로 옮겼으나 ‘한’이 근원과 밑둥임을 잘 드러냈다. [신익섭님의 좋은글 나누기에서 퍼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