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문화재단/다석어록모음

몸성히(건강) | 다석도방

▪살림문화재단▪ 2012. 8. 11. 04:09

 

몸성히(건강)

 

▶먹는 것은 끄니 (끊이)로 먹어야 한다. 한참 끊었다가 먹으라고 끄니

또는 끼니라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줄곧 이어서 달아 먹으려는 것은

잘못이다. 먹음에 실컷 먹겠다는 생각을 버린 사람은 일부러 금식도 하

고 단식도 한다.

   먹을 것이 모자라서 먹기를 끊을 때는(굶을 때는) 오히려 이것을 하

느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의 뜻으로 받는다. 말씀을 바로 아는 집안에서

는 '나쁘듯 먹여라'는 말을 한다. 온당한 말이다. (1956)

 

▶증자(曾子)가 전(傳)을 쓴 사서삼경(四書三經)의 하나인 대학(大

學)의 핵심은 수신위본(修身爲本)이다. 자기의 몸은 돌보지 않고 돈

벌기에 벼슬 얻기에 자기의 전부를 바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

는 자기 몸을 학대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증자는 무엇보다도 가장 큰 관심을 쏟은 것의 하나가 몸성히(건강)

였다. 이 몸은 내 정신을 담은 그릇이기 때문이다. 증자가 이렇게 말했

다. "선비는 맘이 넓고 몸은 굳세야 한다. 그 까닭은 군자의 책임은 한

없이 무겁고 군자의 갈 길은 한없이 멀기 때문이다. 온 세상 사람을 구

원하는 일이라 책임이 무겁지 않겠는가? 죽어야 끝이 나니 멀지 않겠

는가?"(士不可以 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

巳 不亦遠乎-논어 태백편) 온 세상 사람을 다 구원해야 할 책임을

다 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육체가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건강한 육체가

건강한 정신을 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우리는 몸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내 몸을 거저 건강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할 일이 있으니까 건

강하게 가지라는 것이다. 마치 천리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이 자동차를

닦고 정비를 하듯이 온 인류를 구해야 할 책임이 있으니 우리의 몸을

잘 정비하고 닦아야 하는 것이다. 건강은 책임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아기를 위해서 앓을 수 없는 어머니처럼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앓을

수 없는 몸을 가지자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건강한 육체는 건강한

정신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1956)

 

▶사람은 비위가 좋아야 한다. 그래서 음식을 먹을 때도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어야 건강한 몸인 것이다. 밥이 더워서 못 먹겠다 식어서 못

먹겠다는 사람은 건강이 틀렸다. 자기가 병든 것을 모르고 자꾸 음식

만든 사람을 나무란다. 이것은 좋지 못한 일이다. (1956)

 

▶몸 성하면 다른 것은 바라지 말아라. 나에게 감투를 줄 터이니 병들

라 하면 나는 싫다고 하겠다. 아침 저녁으로 끙끙 앓고 있는 것은 나는

싫다. 몸 성하면 다른 것은 생각하지도 말자. 몸이 성하면 몸 성하지

않은 사람을 도와 주어야 한다. 나보다 성하지 않는 사람을 도와 주지

않으면 안 된다. (1956)

 

▶구약 모세 때는 사람이 100년 이상을 산 것같이 되어 있지만 시편

90편을 보면 역시 사람은 한 70년은 산다. 건장한 사람이라야 80여 년

산다. 이상국가가 나타나면 원자력을 이용해서 사람이 얼마만큼 오래

산다고 하는 것은 아직껏 소식이 없다. 욕심으로 가끔 125세까지는 살

수 있다고 하나 이것은 특별한 예이다. 평균 수명이 60세 이상이 아니

라 6백 년 산다고 사람이 만족하겠는가? 영원히 살아야지 끝이 나면

좋은 것이 남겠는가?(1956)

 

▶몸은 부모로부터 받았으면 다치지 말고 가야 할 것이다. 몸은 무엇

인가 하면 자기 얼을 담는 그릇이다. 그런데 간혹 사람들은 개죽음을

하는 이들이 있다. 전선에 가서 싸우다 죽을 줄도 알아야 하지만 죽지

않을 곳에 가서 죽는 개죽음은 하지 말아야 한다. 얼의 그릇을 다치면

그 얼도 온전하지 않게 된다. 음식을 담았는데 음식은 엎질러도 그릇만

상치 않으면 좋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릇도 성하고 담은 것도 성해야 그 정신행위가 올바르게 된

다. 증자(曾子) 같은 이는 일찍 이것을 안 사람이다. 우리는 증자의 정

신을 본받아야 한다. 성하게 받은 몸을 성하게 가지고 가야 한다. 남에

게 빌린 그릇을 성하게 쓰다가 성한 채로 돌려드려야 한다. 그간 썼으

니 늙어 버렸지만 될 수 있는 대로 성하게 도로 갖다 놓는 것이 옳다.

성하게란 성 (誠)의 길을 가야 한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성해야 한다.

몸성히 가는 것이 그리스도 정신이라고 본다. (1956)

 

▶아이들을 기르는 데도 그 교사가 아이들의 심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

이 있다. 사람이 자식을 기를 때는 아이를 아끼다보니 잘못하면 어리광

만 기르게 된다. 아이를 젖먹이고 기르고 가르치니 그렇게 되기 쉽다.

아이를 기르는 것도 때에 따라야 한다. 때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 예수

와 공자의 말씀이 있다고 해도 때에 맞춰 집어넣어 주어야지 때가 아

니면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된다.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길은 다 같은 것이지만 젖은 먹일 때 먹이고 뗄 때 떼

야 한다. 이 구분을 확실히 해서 진저리 칠 줄 알아야 한다. (1956)

 

 

▶우리집 자식들도 그냥 못 쓸 자식들은 아니다. 그런데 어떠한 때 보

면 갑갑할 때가 있다. 그러한 때는 더욱 내 마음이 아프다. 나는 자식

들이 맘쓰는 것을 보면 그것은 무슨 잘못이 있어서 그러려니 한다. 다

른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이 있다. 내가 혼인을 했는데 이것이 잘못이

다. 이 사람이 이 세상에 와서 그 짓 하지 않았으면 그런 일은 없는 것

이다. 인류가 없어지면 어떻거나 큰 일날 줄 안다. 사람이 없으면 없는

것이지 무슨 걱정인가?(1956)

 

▶양생법(養生法), 장생법(長生法)이라는 것이 있는데 한 때는 듣는

것 같아도 다 못쓴다. 그저 줄곧 곧이(貞)의 정신을 가지고 입 다물고

숨쉬어야 한다. 곧이(貞)를 가지면 숨이 잘 쉬어진다. 대부분 먹는 것

이 지나치면 식곤(食困)이 생겨서 잠이 많아지고 앉아도 바로 앉지를

못한다. 따라서 바로 숨도 잘 쉬지 못한다. 숨쉴 식(息)자는 코(自)에

염통(心)이 붙어 있는 회의(會意)문자다. 사람이 곧이 곧장 가려면 식

(息)이 성해야 한다. 세상 모르고 잠이 들 때도 숨은 더 힘차게 쉬니까

불식(不息)이라 쉬지 않는 것이다. 식(息)이 '숨쉬다'와 '쉰다'는 뜻이

있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다. 숨(息)은 처음부터 쉬지 않는 불식(不息)

이다. 숨길은 쉬면 안 된다. 건강하려면 식불식(息不息)해야 한

다. (1956)

 

▶사람이 어려서는 주먹을 단단히 쥔다. 건강한 어린아이일수록 참으

로 단단히 쥐려고 한다. 건강한 사람의 양력(陽力)을 표시하는 데는

악고(握固)로써 한다. 악력(握力)으로써 그 사람의 건강을 측정한다.

손이라는 것은 생리적으로 우리의 몸을 대표한다. (1957)

 

▶밥 먹고 자지 말고 밥 먹고 깨어나도록 밥을 먹어야 한다. 밥은 제

물(祭物)이다. 바울은 우리의 몸이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몸이 하느님의 성전인줄 아는 사람만이 능히 밥을 먹을

수 있다. 밥은 하느님에게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이다. 내가 먹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밥을 먹는다는 것은 예배

요 미사다. 내가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을 도적

질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배드리는 맘으로 밥을 먹

는다는 말이다.

   알찬 쌀을 쪽정이 같은 내가 먹을 자격이 있단 말인가? 중생인 부족

한 우리로서는 떳떳하게 먹을 수는 없다. 참으로 미안하기 그지없으나

그렇다고 안 먹을 수 없으니 먹는 것이다. 그러니 먹는 까닭은 구차한

생명을 연장하자고 먹는 것이 아니다. 몸삶을 연장해서는 무엇을 하겠

는가?아까운 밥만 썩일 뿐이다. 그보다는 이제라도 깨서 완전한 사람

이 되려고 깨우치는 약으로 먹는 것이다. 사람이 얼나를 깨달은 참사람

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먹는

다. 그렇게 되면 조금이나마 쌀에 대하여 덜 미안하게 될 것이 아닌

가? 내가 쌀로 하여금 하느님의 뜻을 이루게 하기 위하여 먹는 것이

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니 그곳에 욕심이 붙을 수가 없다. 식탐

(食貪)의 욕심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깨

는 약으로 먹는 것이다. 하느님께로 나아갈 길을 바로잡는 것이 인생의

사명이다.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밥을 먹어야 한

다. (1957)

 

▶우리의 몸은 점점 자라다가 어느 한계에 이르면 자라기를 멈추고 노

쇠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맘은 보이지 않게 무한히 자랄 수가 있다. 맘

이 무한히 자라는 것(얼나의 意識化)이 곧 길(道)이며 이치이며 진리

이다. (1957)

 

▶정조(貞操)는 곧이(貞)를 단단히 잡는 것이다. 체조(體操)는 몸을

반듯하게 가지는 것이다. 지조(志操)는 뜻을 바로 갖는 것이다. 이 세

가지에서 그 어느 것도 갖추지 못하거나 치우치면 균형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다. 체조를 하려면 지조(志操)하지 않으면 안 되고 지조하려

면 정조(貞操)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하나의 조(操)를 지키려면

여러 가지 것이 참여해야 한다. 몸짓을 잘 가져야 마음 놓임을 얻고,

마음 놓임을 얻어야 뜻을 얻을 수 있어 할 바를 단단히 가질 수 있다.

건강해야 진.선.미 (眞善美)를 알려하고 캐려고 한다. 뜻만 가지고서

는 안 된다.

   증자(曾子)는 이후입지(而後立志)라는 말을 하는데 무엇을 한 뒤에

뜻을 세운다고 할 때 그 무엇이란 체조, 정조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

다. (1957)

 

▶몸성히 (건강)를 위해서는 탐욕을 버려야 한다. 자꾸 먹고 싶은 욕심

을 경계하고 많이 먹지 않도록 하는 이것을 불교에서는 점심(點心)이

라고 한다. 점심을 위해서 석가는 대낮에 한 번 먹었다고 해서 일중식

(日中食)이라 했다. 24시간에 한 번 먹는다고 해서 점심이라고 하고

먹는 등 마는 등 마음에 점(點)친다고 해서 점심이라고 하게 되었다.

내가 하루 한 끼를 먹어보니 몸성히의 비결이 점심에 있다. 하루 한 끼

니만 먹으면 온갖 병이 없어진다. 모든 병은 입으로 들어간다. 감당 못

할 음식을 너무도 집어넣기 때문에 병이 난다. 사람은 안 먹으면 병이

없다. 욕심을 줄여서 한 점을 만드는 것이 점심이다. 그것은 석가가 오

랫동안 실천한 건강법이다. (1957)

 

▶파티라 연회라 하여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자꾸 권하니까 너무 먹게

된다. 배탈이나 소화제를 먹으면서도 자꾸 먹다가 배가 터져 죽으면 허

무한 인생이 끝이 난다. 먹자고 살고 살려고 먹다가 죽어 버리니 인생

이란 허무한 것이다. (1957)

 

▶내 몸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심지어 자연현상에 대해서 마음

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엄청난 망발이다. 몸이 걷겠다고 하면

걷고 쉬겠다고 하면 쉬고, 누울 때가 되면 눕는 것이 몸이다. 몸의 생

리대로 놔두어야 한다 몸에 대하여 부자연하게 간섭해서는 안 된다.

조급한 마음으로 몸에 간섭하면 마귀 생각밖에 나오지 않고 좋지 못한

행실밖에 나오지 않는다. 조급한 동기가 모두 이 불행을 자아내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모든 것이 되지 않는 원인이 자연을 자연대로

놔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저절로 되게 놔두고 보아야 한다.

스피드 시대에는 속성(速成)이 좋다고 하나 이 속성 때문에 불행한 세

상이 되고 말았다. (1957)

 

▶옛날 사람은 정(精)을 가지고 단(丹)을 만든다고 했다. 아랫배가 단

단하게 단(丹)이 박힌 사람이 도인(道人)이다. 그들의 기운은 날듯하

고 그들의 신기(神氣)는 상쾌하며 그들의 정신은 고상하다. 이러한 사

람을 절대무위한도인(絶對無爲閑道人)이라고 한다. 남녀 관계를 끊고

정신적으로 사는 사람이 도인이요 신인이다. 이들은 정(精)에서 기운

이 나오고 기운에서 신(神)이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시행한 것은 정좌(正坐)다. 깊이 숨을 들이쉬면서 배 밑에 마

음을 통일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지경

에 이른다. 자기의 형해(形骸)를 초월하는 것이다. 이것을 장자(莊子)

는 좌망(坐忘)이라고 했는데 불교의 참선과 같다. 그리하여 아랫배에

힘이 붙기 시작하면 기해단전(氣海丹田)에서 성단(成丹)이 된다. 마치

나무를 불완전 연소를 시켜서 숯을굽는 것과 같다. 밥의 알짬(精)으로

단(丹)을 만드는 것이다. 이리하여 아랫배 안에서 숯과 같은 단(丹)이

굳어지면서 거기서 나오는 열이 기운이다. 이 숲이 금강석이 되면 거기

서 나오는 지혜가 신(神)이다

   정(精)을 함부로 내어버리지 말고 아끼고 아껴서 그것을 가지고 숯

을 구어 석탄을 만들고 금강석을 만드는 것이 좌망(坐忘)이다. 이리하

여 사람은 없어지고 신선(神仙)이 된다. 사람에게 힘이 있다면 정(精)

이라는 기름을 불 때서 기관을 움직이는 것일 것이다. 기름을 아끼듯이

정(精)을 아끼는 것이 절제(節制)요 지혜(智慧)이다. 기름을 아낄 줄

모르고 함부로 하수도에 버리고 만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일로

지혜에 병이 든 것이다. (1957)

 

▶쌀을 아낄 줄 알아야 한다. 벼 한 톨이라도 아낄 줄 알아야 한다. 벼

한 톨이 싹이 트면 온 세상도 덮을 수 있는 곡식을 거둘 수가 있다. 그

런데 벼는 종자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양식으로 제공된다. 벼 백

섬을 추수했다면 종자로 쓰여지는 것은 한 말 정도이고 아흔아흡 섬

아흡 말은 모두 쌀을 만들어서 사람의 양식으로 제공된다. 종자로 쓰이

는 것은 거둔 것의 천분의 일, 만분의 일이고 대부분은 사람의 양식으

로 쓰여진다. 사람의 씨앗인 정(精)도 이와 마찬가지다. 생식(生殖)을

위한 종자로 쓰여지는 것은 극히 적은 부분이고 정(精)의 대부분은 정

신을 위하여, 문화창조를 위하여, 가치의 구현을 위하여, 하느님의 뜻

을 이루기 위하여 쓰여져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생각하고, 연구하고,

기도하는 데 쓰여져야 한다. (1957)

 

▶부부는 생식을 위해서 만나고 언제나 기름을 소모하지 않도록 따로

있어야 한다. 사람은 기름이 얼마나 고귀한 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문화를 창조하고 가치를 구현해야 할 값진 기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

다. 맛과 멋으로 사는 향락생활은 자살행위에 불과하다. 부부는 기름을

소모하지 않도록 따로 있는 것이 참 사랑이다. 남편은 아내의 도구도

아니고 아내는 남편의 도구도 아니다. 인간은 물건일 수 없다. 상대방

을 죽이는 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랑이란 살리는 일이지 죽이

는 일이 아니다. 상대방을 죽이면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

다. (1957)

 

▶사람의 행동은 목적이 있어야 한다. 돈을 써도 목적을 위해서 써야

한다. 거저 돈을 내버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자기의 생명을 나라를

위하여 바친다든가 하늘나라를 위해서 바치지 않고 동물적 자기를 위

해서 생명을 낭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자기를 위

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를 죽이는 일에 자기 정력을 소모한다면 그것은

자살행위요 자독(自毒)행위다.

   인생의 원동력인 기름(精)을 거저 하수도에 흘러 보낸다면 그 사람

이 정신 있는 사람일까? 그것은 도저히 실성한 사람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요사이 성생활을 한다는 사람은 목적 없는

실성한 사람들이다. 성생활이 아니라 실성(失性)생활이다. 사람의 정력

은 헤프게 쓰여져서는 안 된다. 정력은 생각에 쓰여지든지 생식에 쓰여

지든지, 사람을 위해 쓰여지든지, 하느님을 위해 쓰여져야 한다. 정욕

이란 지옥의 불과 같다. 눈을 감으니까 못 보지, 눈을 뜨면 지옥 불이

보일 것이다. 주지육림 (酒池肉林)이 지옥이지 지옥이 따로 없다. (1957)

 

▶남녀가 모두 정신을 차려야 한다. 서로 정력을 낭비하여 상대의 생

명을 갉아먹으면서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세상

에 죄악치고 남녀 문제가 없는 것은 없다. 일체의 범죄는 남녀 관계에

서 비롯된다. 바울도 죄의 근원을 남녀의 타락에서 찾았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도 그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세상에 이 이치를

밝혀주는 이가 없다.

   예수는 독신으로 살았으며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일이 없다. 정신

든 사람이라면 어떻게 음욕을 품을 수가 있겠는가? 음욕이란 실성한

사람들이 할 짓이다. 정신이 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음란에 젖을 까닭이

없다. (1957)

 

▶짐승들은 음란에 젖지 않는다. 저들은 생식(生殖)을 위해서만 암·

수가 만나지 생식이 끝나면 절대 만나지 않는다. 사람은 짐승보다 못하

면서 소나 돼지를 잡아먹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사람은 소와 말 같

은 짐승에게 배워야 한다. 그들은 본능대로 사는 것이다. 생식은 본능

이지만 음란은 본능이 아니라 타락이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신앙과

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마음대로 밤낮 없이 음란에 빠진다면 그것이야말로 마귀의 세상이다.

색(色)에 주려 엽색을 일삼는 늙은이가 있는가 하면 색을 쫓는 것이

인생의 전부인 양 착각하는 젊은이가 있다. (1957)

 

▶영웅호색이라고 임금이 3천 궁녀를 두는 것을 큰 대접으로 생각했

다. 그 결과는 임금치고 허약하지 않는 왕이 없었다. 단명요절(短命夭

絶)하여 사람 구실을 못한 임금이 역사적으로 태반이다. 나라의 정기

(精氣)를 모아 하수도로 쏟아 버리고 말았으니 이 민족이 그러고도 망

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임금은 나라를 위해서 혼자 살아야 할 몸이

궁전 안에 수 없이 많은 처첩을 두었다 하니 그런 제도에 얽매인 어린

왕만이 가엾게 죽어간 것이다. 이것은 물에 빠져 죽는 것이 아니라 색

(色)에 빠져 죽는 것이다. 중국에도 천자(天子)치고 제대로 사람답게

제 노릇한 이가 몇 사람이나 될까? 나라의 통치자는 독신이라야 한다.

그것이 철인(哲人) 정치다. 가정을 가지고 국사(國事)에 전념하기도

쉽지 않는데 수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무슨 정치를 바르게 할 수 있겠

는가?(1957)

 

▶옛날부터 절세미인을 사나이의 등골 때먹는 년이라고 했다. 등골을

빼먹는 것도 안 되었고 등골 빼 먹히는 것도 잘못이다. 자기의 등골을

보존하는 것이 사는 것이지 얼이 빠진데 등골까지 빠져 버리면 그것을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야말로 유황불 속에서 필펄 타고

있는 지옥이 아니겠는가?(1957)

 

▶채식주의자들이 육식을 안 하는 까닭은 짐승인들 살고자 하는 것을

어떻게 잡아먹겠는가라는 생각인데 참 좋은 생각이다. (1960)

 

▶어른이고 어린이고 여름에도 얼음을 안 먹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사람의 뱃속에는 얼음이 소용없다. 사람이 얼음을 먹으면 건강을 해친

다. 여름에도 부채가 필요 없어야 건강한 것이다. 아이들에게 얼음을

먹이면서 키우는 것은 크게 잘못하는 일이다. 불도 얼음도 다 친구가

아니다. 또한 내 원수도 아니다. 서늘한 것을 물리치려 불에 너무 아첨

해서도 못쓰고 또 더운 것을 피하려고 얼음에 너무 아첨해서도 못쓴다.

우리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 (1960)

 

▶나는 과학적으로 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나 잠은 고단해서 잔

다. 고단한 것은 내가 무식한 소리인지는 몰라도 몸 속의 노폐물이 나

가지 않아서 그렇다. 현대인이 지나치게 섭취하기 때문에 나갈 게 나가

지 못해서 고단하다. 될수록 나가야 할 것이 나가야 깨끗한 건강을 유

지할 수 있다. 나갈 게 안 나가고 모든 기관을 불결하게 하면 불건강이

된다. 순결한 생활을 한다면 고단한 게 적다. (1960)

 

▶모든 사람들이 걱정할 것은 걱정 않고 걱정 않을 데 너무 지나치게

걱정을 하고 있다. 잘 때에 자야지 낮에는 자지 말아야 한다. 일찍 자

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 낮에는 고단해도 자지 말아야 밤에 숙면을 하

게 된다. 밤에 숙면을 하고 나면 몸 속의 노폐물이 다 빠져나가정신이

밝아진다. 낮에 조는 이는 숙면을 못해서인데 생활을 바로 하지 못한

것이다. (1960)

 

▶사람이 밥 먹고 잠자는 것을 바로 알기란 어렵다. 더욱이 바로 하기

란 정말 어렵다. 밥 먹는데는 마디가 있어야 한다. 끊었다가 제 때에

먹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정한 것도 몇날 못 가

서 그만 그대로 못하게 된다. (1960)

 

▶춘하추동 네 계절은 어느 때든지 그때는 그때대로 좋아해야 한다.

어느 때는 좋고 어느 때는 싫고 하는 것은 잘못 사는 것이다. 봄을 탄

다는 사람은 불건강한 이다. 더워도 얼음을 먹어서는 못쓴다. 나는 얼

음, 담배, 술은 없어도 좋다. (1960)

 

▶안 먹으면 죽는다. 안 먹고는 못사니까 먹는다는 말은 맞는다. 그러

나 너무 많이 먹는다. 알맞게 먹으면 편히 살 수 있는데도 너무 먹고

배탈이 나서 고생을 한다. (1960)

 

▶오늘은 일어서는 것을 얘기하자는 건데 일어서는 것은 머리를 원대

(遠大)한 하나에 두는 것이다. 머리란 이 골통(頭)이 아니다. 부닥치면

뇌진탕을 일으켜 삶을 그만두게 되는 건 머리가 아니다. 무한대한 것이

내 머리다. 하느님이 내 머리다. (1960)

 

▶우리의 숨은 목숨인데 이렇게 할닥할닥 숨을 쉬어야 사는 생명은 참

생명은 아니다. 성령을 숨쉬는 얼생명이 참 생명이다. 영원한 참 생명

에 들어가면 승쉬지 않아도 끊기지 않는 얼숨이 있을 거다. 내가 어쩌

구 하는 그런 나는 소용이 없다. 석가의 법신(法身)과 예수의 하느님

아들은 같은 말이다. 숨 안 쉬면 끊기는 이 목숨은 가짜 생명이다. 숨

에 짓(行)을 맞춰 주어야만 쉬는 숨이 바로 쉬어진다. 숨은 쉬지 않고

끊임없이 쉬듯 짓도 따라서 끊임없어야 한다. 이승에서는 목숨처럼 짓

을 끊임없이 맞춰야 한다. 낮잠이나 자서는 안 된다. (1960)

 

▶병이 든 곳을 꿰매어 삶을 연장하는데 찢어진 옷을 꿰매어 더 입는

것과 마찬가지다. 밥 먹고 똥 누고 하는 이 일을 얼마 더 해보자고 애

쓰는 것은 참 우스운 일이다. (1960)

 

▶하늘에서 기(氣)가 나와 기의 일부분이 우리 하초에서 호르몬이 되

어 있는 게 정(精)이다. 이 정(精)과 신(神)이 합하여 정신(情神)이다.

성신이란 게 별 게 아니다. 기운이 동하는 게 성신(聖神)이다. 기즉명

명즉기(氣卽命 命卽氣)다. 내 요새 기운 빠져 못살겠다고 하는 것은

성신 빠져 못살겠다는 것과 같다. 이걸 달리 생각하는 게 잘못이다. 온

전히 사는 것은 죽는 거다. 죽도록 살아야 바로 산 것이다. (1960)

 

▶몸 하나 가졌으니 편할 수 없다. 몸 없는데 가서야 무슨 걱정이냐고

노자(老子)가 말했다. 그러니 이 몸둥이가 병(病)이다. 몸이 있어 병이

없는 상태가 소강(小康)상태다. 감사라면 이걸 감사해야 한다. (1961)

 

▶몸이 건강(健康)한 것은 소건강(小健康)이다. 대건강(大健康)은 이

몸둥이를 벗어 버리는 것이다. 이 몸은 얼마 전에 어쩌다가 부정모혈

(父精母血)이 만나 시작되었다. 이렇게 실없이 시작했으니 조만간 사

라져 버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1961)

 

▶기(氣)자는 하늘의 구름을 그린 그림글자인데 구름이 바람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구름 운(雲)자는 따로 있다. 구름을 움

직이게 하는 바람 또 바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기(氣)다. 사람은 기

운(氣運)이 있어야 산다. 으뜸 원(元)자의 二는 이 기(氣)를 나타낸다.

二밑에 ? 은 사람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사람이 건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원(元)이다. 충분히 숨쉴 수 있도록 사람이 앉아 머리 위에 二

(氣)를 이고 있다. 元과 氣는 서로 비슷하다. 그래서 기생지원야(氣生

之元也)라 하고 원기지시야(元氣之始也)라 한다.

   생명은 먼저 기(氣)를 요구한다. 기(氣)는 만물 생성(生成)의 근원이

된다. 米없는 기(기)가 더 좋다. 쌀(米)을 먹어야 기운이 난다하여 米

자를 붙였다. 성령도 나는 형이상학적인 바람(風)으로 본다. 바람이란

기(氣)의 움직임이다. 저 꼭대기(절대세계)에 있는 기(氣)가 흘러 내려

와 나와 통하는 것이 도(道)다. 도(道)란 달리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영

원한 생명의 길(道)이다. (1960)

 

▶이 우주에 백억천 조(兆)의 태양이 있다고 한다. 해(태양)는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 박테리아는 햇볕에 쪼이면 죽는다. 그런데 사람이 박테

리아보다 얼마나 더 큰가?지구대기에 오존층이 날로 파괴되고 있다는

데 이제 인간도 박테리아처럼 햇볕을 쪼이고 죽게 되어가고 있

다. (1960)

 

▶내가 하루 한끼 먹는 지가 한 20년 된다. 새해 3월 18일이 꼭 20년

이다. 다른 건 모르는데 일중(日中, 一日一食)한다는 건 호기심으로

사람들이 물어 본다. (1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