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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理)을 타야(과학) | 살림도방 다석채플

▪살림문화재단▪ 2012. 8. 11. 04:11

 

 

올(理)을 타야(과학)

 

▶대낮처럼 밝은 게 한없이 좋긴 하지만 그 대신 잊어버리는 것이 많

게 된다. 더구나 굉장한 것을 잊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건 다름이 아

니라 얼의 삶과 맘의 삶을 잊어버리게 된다. 사람들은 낮을 좋아하고

밤을 쉬는 줄 알고 있기 때문에 밤중에 저 깜박이는 별들이 영원(하느

님)과 속삭이는 것을 모르고 있다. 하느님은 영원, 무한, 절대의 얼이다.

   천문학자에게는 낮이란 별로 가치가 없다. 우주의 신비를 캐려는 사

람에게는 어떻게 하면 저 태양을 가릴 수 없을까 하여 낮이 없기를 바

란다. 별의 영원과의 속삭임을 더 많이 듣고 알고 싶어서일 것이다. 영

원(하느님)과 늘 같이 있고 싶은데 낮이 있으므로 해서 단절되곤 한

다. (1956)

 

▶인제라는 말은 이제와 같은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인제를 하느님을

머리에 인 저라는 뜻으로 인제를 말한다. 인자는 한글을 처음 만들 때

있었다는 동그라미(이응)위에 한 금을 그은 인자가 좋다. 겸손하게 머

리에 무엇을 이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란 사람이 여러 가

지 조건을 머리에 인다는 표시다. 인제란 과거를 우리의 머리에 인 오

늘의 제(나) 곧 나를 가리킨다. 나아가 영원무한의 하느님을 머리에 인

나이다. (1956)

 

▶흘러가는 물에 두 번 다시 같은 물에 발을 적실 수 없고 흘러가는

시간에 오늘은 두 번 다시 살아 볼 수 없다. 다시 없는 이 순간을 지나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1956)

 

▶요사이처럼 상대세계(相對世界)가 확실한 때가 없다. 모두가 상대적

이다. 동양에서는 음양(陰陽)을 말하면서 동정(動靜)을 말한다. 움직임

속에 정지가 있는 정지는 상대적이다. 운동이 따로 있고 정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기차는 달리고 있지만 기차 안에서는 정지이다. 다

소 움직임이 있지만 대개 가만히 앉아 있다. 운동과 정지는 상대적으로

규정 된다. (1956)

 

▶세상이 있다는 것은 줄곧 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정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일도 다 그렇다. 자꾸 지나가고 있다. 우리가 시

간 공간 하지만 그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세상 안의 시공간(時

空間)이다. 모든 것은 변하고 있다. 물른 나 자신도 변하고 있다. 그런

데 사람들은 나 자신이 변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리하여 변화

를 무시하려고 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밀이 (密移)라는 말을 쓴다. 빙

하(氷河)처럼 은밀하게 움직여 옮겨진다는 뜻이다. 자신이 늘 그대로

있는 것 같지만 자기도 모르게 달라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참으로 밀

이(密移)이다. (1956)

 

▶사람들은 흔히 대낮에는 살림(生活)을 위해서 일하고 배우고 다니고

놀고 밤에는 그것을 위해 쉬고 잠자고 꿈꾸는 것으로만 안다. 낮에는

정신을차려서 살고 밤에는 잠이나 자면 되는 것으로 안다. 이것은 대

단히 위험한 잘못된 생각이다. 밝은 낮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러한 위

험한 면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밤중에 희미한 빛으로 태양광선을

거치지 않고 나타나는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영혼(얼나)의 통신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것을 망각하고 그저 잠이나 자고 있다. 한낮에만

사는 것이 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 없는 소리다. 밤과 낮을 가리

어 살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956)

 

▶내가 사는 데를 여기라고 한다. 그제 저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다. 사는 때가 이제이다. 사는 때가 이제, 사는 곳

이 여기이다. 이어 이어 내려와서 여기가 된 것이다. 하느님이 나를 이

어 주고 나는 하느님과 이어지고 다시 이어 이어 여기 온 것이 '나'라

는 것을 생각한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을 때도 이제 나왔고 운명할 때

도 이제 숨을 거둔다고 한다. (1956)

 

▶우주는 늘 움직여 나가는 가운데 있다. 이제라고 할 때도 이제의

 '이'는 벌써 말 떨어지자 나가버린다. 시간의 현재.미래.과거라는 것

이 확실히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있다면 그놈의 이제를 꼭 한번

붙잡아 보았으면 무슨 수가 있겠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도무지

잡을 수가 없다. (1956)

 

▶우리들이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산다는 것인가? 내 맘대로 시간과 공

간을 골라 가지고 나온 것이 아니다. 내가 사는 이 시간이 임시(臨時)

라 우리가 임시로 살고 있다. 시대(時代)라고 해서 좋은 시대니 나쁜

시대니 말하지만 이것은 주관적인 생각이다. 죽을 때 죽고 살 때 사는

것은 똑같다. 자기가 나온 때를 좋은 때라고 하겠지만 그제나 이제나

모두가 임시 (臨時)이다.

   또한 무엇인지 똑딱똑딱 깎으며 나간다. 깎아 점찍고 나아간다. 쉴

새 없다. 반짝반짝 깎아가고 있다. 자꾸만 까다로운 점을 찍고 나가는

것이 우리 사람의 생각이다. 때 때, 임시임시 사는 것이 각점지(刻點

之)하는 것이다. 삶이란 임시로 각점하며 가는 것이다. (生也 臨時刻點

之) (1956)

 

▶우리가 참되게 살려면 참고 살아야 한다. 참음이 참이다. 참고 참다

가 말을 하여서 사랑(仁)이 되었다고 한다. 사랑은 성령이요 인(仁)이

성령이다. 하느님 아버지와 하느님 아들의 관계를 이 상대세계에서도

바르고 참되게 하자는 데서 이루어진 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1956)

 

▶요사이 나는 평생 가고 있는 것이 실은 내가 있는 곳에 오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이 생각은 내가 23살에 일본에 갔을 적에 체험한 것

이다. 저녁에 부산을 띠나 밤새 배를 타면 날이 밝아서야 시모노세끼

(下關)에 도착하게 된다. 밤새껏 배를 타고 가는 것이 마치 밝은데 오

기 위한 것 같았다. 자다가 아침을 맞으면 그렇지 않겠지만 밤새도록

어둠만 보다가 날이 밝는 것을 보면 꼭 밤새 배를 타고 밝은 데로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찬가지로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것은 요즈음 밤새 어둠을 걷다가 해

있는 밝은 곳에 온 것만 같은 느낌이다. 아침이 되면 해가 찾아온다고

하는 것이 옮지 내가 해 있는 곳에 찾아간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할

지 모르나, 자기 그림자를 밟고 가겠다는 생각처럼 나의 생각의 불꽃은

자꾸 그렇게 타고 간다. 그렇게 가는 것이 이렇게 오는 것이다. (1956)

 

▶가고 오고 죽고 사는 것이 같기가 + (플러스), - (마이너스)와 같다.

+와 -는 원점을 두고 좌우의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반대쪽에서 보

면 -가 +로 보인다. 가는 것이 +이고 오는 것이 -인지, 오는 것이

+이고 가는 것이 -인지 모른다. 정부(正負),음양(除湯), 생사(生死)

가 이와 같다. 가는 것이 섭섭하고 오는 것이 반갑다고 하는 것은 모두

거주(居住)사상에 잡혀 있기 때문이다. (1956)

 

▶빛은 우리가 보지 못한다. 흔히 광선이라 하지만 빛에는 선(線)이

없다. 빛의 줄을 보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빛(光)을 본 사람은 없다.

빛에는 빛깔(色)이 없다. 그래서 빛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빛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머리카락 하나만 가지고도 몇 만 점의 빛

점이 부리나케 달려서 내 눈 속에 꺼져서 그 머리카락이 희다 검다하

게 된다.

   빛은 일초에 지구를 일곱 번 반을 도는 그 속도로 잠깐의 순간에 몇

천 몇만 번인지 간에 나에게 알려 주고 사라지는 것이 빛이다. 빛은 우

리가 모르는 사이에 심부름으로 전보만 부쳐서 받게 해주고 어디로 갔

는지 보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빛을 알지 못한다고 할 수밖에 없다.

광선이 있다면 밤이 되어 달이 뜰 때 해에서 달로 건너가는 햇빛을 우

리가 볼 것이 아닌가?

   이전에는 빛이 선(線)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암실(暗室)에 구

멍을 뚫어 놓고 구멍으로 들어오는 빛을 보이고 이것이 광선이다 라고

가르쳤다. 그것은 틀린 거짓말이다. 그게 무슨 광선인가? 빛이라는 것

이 쪽 지나가는데 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광선이라고들 한 것이다. 원

래는 가닥가닥 끊어진 것이고 하나하나의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시각의

착각으로 선으로 보일 뿐이다. 빛의 한점 한점의 끝이 계속 들어오는

것이 착각으로 선처럼 보인 것이다.

   그리고 암실의 구멍에 비친 빛도 공기에 먼지가 없다면 빛이 보이지

않는다. 먼지로 인해 반사되는 빛으로 우리 눈의 시각에 보고가 된 것

이다. 일직선으로 달아나는 빛에 수많은 먼지들이 서로 부딫치며 삥삥

돌고 있는 것이다. 빛은 실제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낮에도 먼지

가 없으면 빛이 안 드는 구석진 곳은 캄캄하리라 생각된다. 해뜨는 것

조차 보이지 않을지 모르겠다(1956)

 

▶우리가 사는 상대세계에서는 기껏해야 정신을 차린다는 것이 인과

(因果)관계에만 그치는 것이다. 인과율(因果律)에 대해서만 정신을 차

리고 있다. 과학이니 물리니 하는 것은 인과율이다. 인과율이 지배하는

상대세계 너머 계시는 하느님에게까지 이르는 과학이 되어야 참 과학

이다. 그러나 새로운 발견과 발명을 할 때에 얻는 쾌락을 위하여 과학

을 한다거니 , 과학을 위한 과학을 한다는 그따위 소리를 하고 있는 것

이 요새 과학이다.

   물리를 연구하고 그 물리에서 과학을 발달시켜 그것을 이용하면 참

기쁘고 좋은 것이다. 기쁘고 좋은 것이 자기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것이다. 대부분의 학문이 과학인데 그

결과는 모두가 인과율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소위 학문이라는 것이 말

이나 생각하는 이치가 인과의 굴레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또 살아

가는데 사람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발전시키고 이용할 가치가 없는

것이라면, 또 탐지한 결과가 아무것도 아니고 그게 참을 수 없는 괴로

움에 어쩔 줄 모르는 것이라면 학문연구를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문명이라든가 생존에 대한 맛도 모른다고 하더라도 인과율의

작용으로 대개가 끝장이 난다. 이 세상에 인과율이 아닌 것이 어디 있

는가? 그러나 영원한 생명인 진리는 인과율 너머에 있다. (1956)

 

▶우리들은 지금 너무나 좋은 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원 하늘의

시계를 잊은 지 오래다. 한 백 년 전 이 사람이 사는 자하문 밖 늙은이

들은 하늘만 쳐다보고는 시장에 나가는 시간을 알아 맞추었다. 오늘날

시계는 편리하지만 우주를 잊어버리게 했다. 따라서 하느님을 멀리하

는 일이 되었다. (1956)

 

▶자연에게는 애착이란 없다. 나올 때 나오고 들어갈 때 들어간다. 자

연의 능수능란함을 알아야 한다. 자연은 절대로 더듬지 않는다. 완전히

준비되면 저승으로 가는 것뿐이다. (1957)

 

▶물성(物性)을 알아서 그것을 온전히 이루도록 해주는 것이 격물치지

(格物致知)다. 물건은 내가 탐내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있도

록 완성시켜 주는 것이다. 소유가 아니고 존재이다. (1957)

 

▶이제는 참 신비이다. 우리가 알 수 있을 것 같은 신비가 이제이다.

그 이제에 목숨을 태우는 우리 인생은 역시 이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신비이다. 이제에 숨쉬는 이는 한 숨이 들어가면 살고 뱉으면 죽는다.

영원히 숨을 뱉거나 그치면 죽는다. 이 찰나에 구십생사(九十生死)가

있다는 인도사상은 분명히 신비 사상일 것이다. 이제라도 이 할 때 이

제는 이른 것이다. '이'할 때 실상은 이미 과거가 된다.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이제이다. 이 이제를 타고 가는 목숨이다. '이'의

계속이 영원이다. (1957)

 

▶사람이 보통 수로는 알 수 없는 일을 무당 같은 영한 사람에게 알아

보려고 무척 애쓴다. 거의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 아무리 그가과학에

능한 사람일지라도 어떤 경우에는 특별한 신앙이 있고 특별한 신조가

있다 해도 그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 예를 들면 몹시 궁핍할 때와 절

망상태에 가서는 그 짓(점치는 일)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러할

때 그런 꾀임에 빠지게 된다. '알 수 있다니 한번 해볼까?' 이렇게 된

다. 이것이 다른 나라는 몰라도 우리 동포 마음속에는 제오열(五列:

사교)을 해먹을 수가 있다. 제각기 그러한 알 수 없는 것을 알려고 하

는 것이 가슴속에 있기 때문에 곧잘 속아 넘어 가기 쉽다. 겉으로 보면

똑똑하여 상당한 과학적인 지식과 무슨 주의의 신념이 있다고 하는 신

앙인들도 그 모양이다. 우리는 이같이 미물(微物)에 지나지 않는

다. (1957)

 

▶어떤 의미에서 보면 사람은 손을 쓸 수 있는데 그 특징이 있다고 하

겠다. 손을 쓸 줄 알기 때문에 문화도 가지게 되고 서로 돕고 살 수도

있고 심지어 전쟁을 하기도 한다. 손을 쓸 줄 몰랐다면 사람은 아무것

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손을 쓰는데는 파악(把握)을 잘해야 한

다. (1957)

 

▶등잔불 밑이 어두운 것은 알지만 해 아래가 어둔 것을 잘 모른다.

해 때문에 해 없는 밤에 보이는 별들이 안 보인다. 태양은 방안의 등잔

불보다 큰 등잔에 지나지 않는다. 해 아래는 어둡다는 것을 나아가 해

조차 어두운 것을 모르는 사람의 지혜는 혼미(昏迷)할 수밖에 없다.

미신(迷信)은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먹을 줄은 모르고 밥(쌀)만 먹

고사는 것으로 아는 것이다. 입에 풀칠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미신에서

빠져나와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참나(얼나)를 깨달아야 한다. (1957)

 

▶실상 물건이라는 것이 나에게 와서 점심(點心)이 되는 것은 물건이

내 맘에 와서 점을 찍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면 매사를 잘 살펴 진물성

(盡物性)을 해서 물건을 알아주는 것이 우리의 점심이다. 일을 당하게

되면 나에게 다 책임이 있다. 일의 실정을 경험하지 않고는 모르기에

고루고루 경험을 해서 몬(物)을 심판해야 한다. 우리는 몬(物)에 대한

심판관이다.

   우리는 태양이 전등(電燈)으로 걸려 있는데서 점심(點心)을 하게 된

다. 그러면 불을 켜서 점심을 하게 되는데, 점심을 하고서 '예' 할지

 '아니오' 할지 제 머리로 가리어야 한다. 곧 우리의 처지가 점두(點頭)

하는 데 있는 것이다. 물질세계는 아니요 하느님만이 예이다. 다시 말

하면 우리의 처지는 무엇이냐 하면 점등(點燈) 점심(點心), 점두(點

頭)를 잘해야 할 처지다. (1957)

 

▶길이란 우리가 움직여 나가는 데는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길이 없

다면 우리는 꼼짝할 수가 없다. 공간(空間)은 죄다 이 길을 위해 있다.

원자(原子) 세포 사이의 공간도 이 길을 위한 것이다. 길(공간)이 없다

면 원자나 세포도 제 구실을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분간(分間)한다는

날말도 공간을 전제하고 있다. 모든 이치가 다 분간할 줄 아는 데 있다

면 이치는 곧 길이 아니겠는가?길(道)이 곧 이치인 것이다. 도(道)라

는 것은 길을 말한다. 허공(虛空)이 진리라는 말도 이런 점에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도(道)라는 글자나 이 (理)라는 글자는 같은 뜻이

다. 참 이치가 곧 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법(法, Dharma)도 이러한

이치와 길을 가리킨다. (1957)

 

▶처리하고 처리하는 모든 문제는 상대세계의 일이다. 절대세계에는

분열이 없고 문제가 없고 조건이 없다. 거기는 영원한 평화만이 깃들이

는 영원한 그늘(안식처)이다. (1957)

 

▶영원한 생명을 빛이라고 한다. 생명 자체를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

고 설명하기가 어려워 좀 근사한 표현을 쓴다는 것이 빛이라고 한 것

이다. 영원한 생명(얼나)을 우리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빛은 모든 것을 보는 것 같다. 모든 데 들어가 모든 것을 알아보는

것 같다. 빛이 없으면 무엇을 보는 것도 없고 무엇을 알 것도 없다.따

라서 할 일도 없다. 그런데 빛은 자신을 누구에게 보이거나 듣게 하거

나 알리지 않는다. 빛은 통성명(通姓名)해서 자신을 남에게 알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빛을 보고 있지 않느냐고 말을 하는데 그것

은 만물에 반사되는 빛깔을 말하는 것이지 빛은 아니다. 빛깔(色)은 빛

(光)이 아니다. (1957)

 

▶빛이 무엇인지 모르는 바에야 물질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된다.

우리가 보고 있는 물건은 빛의 반사로 보는데 빛을 모르고 물질이 무

엇인지 알 수 있는가?물질 그것도 무엇인지 볼 수 없는 것이다. 요새

는 과학이 발달되어서 물질을 나누어 보기를 분자, 원자, 전자까지를

말한다. 전자(電子)를 빛이라고 할 수 있고, 벼락이라고 할 수 있다.

조히 질서를 잡을 수 없는 것이 빛의 성질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정도

가 되었다. (1957)

 

▶맨(만)들었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맨으로 들어냈다는 뜻이

다. 하느님이 이 우주를 맨드신 것이다. 곧 맨손으로 들어내 놓았다.

진작 맨들었다는 뜻도 있다. 사람이 한 것은 창(創)이다. 한쪽에 칼질

을 해서 상처를 낸 것이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만든 것이 아니

다. 이 땅(지구)은 이 우주는 하느님께서 버린 것이다. 이렇게 버려 두

신 것은 우리에게 위임한 것이다. (1957)

 

▶서양에는 자연을 정복해야 잘 살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이 있는데 동

양에서는 그따위 소리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을 자연의 한 부분으

로 생각한다. 자연은 자연대로 되게 하는 것이지 이를 사람이 되게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맘은 맘대로 몸은 몸대로 되게 해야 한다. 부족

한 것이 있어도 부족하려니 하고 그냥 놔두는 것이다. 맘이란 물건에

걸리지 않으면 언제든지 맘 제대로 있다. (1957)

 

▶빛깔(色)이라는 것은 물질을 말한다. 자연이라는 물질세계는 빛으로

되어 있으며 요망한 것이다. 우주간에 있는 물질이라는 것은 한낱 하잘

것없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무서워할 것 없다. 눈이 멀어서 빛깔이

곱게 보여 요망한 것들이 좋게 보일 때 미혹으로 색(色)을 사랑하게

된다. 좋은 것은 많은 값을 치러서라도 사려고 한다. (1957)

 

▶쓸데있는 것으로써 비처럼 못 쓸데가 없다. 어떠한 때는 우리들 마

음에 비가 지나치게 와서 객수(客水)라고까지 말한다. 자기 소견에 쓸

데가 없지 다 쓸데가 있는 것이다. 도시 사람들은 365일 비가 안 와도

좋다고 할 것이다. 날마다 나가서 벌어먹는 사람도 비가 왜 그렇게 오

느냐고 비 오는 것을 원망한다.

   제게 긴요하지 않으면 객수(客水)라고 까지 말하지만 두 달만 객수

가 오지 않으면 식수(食水)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노아의 홍수'같이

는 안 되겠지만 객수란 없다. 노아의 홍수도 한번 시원하게 씻어 내릴

것 씻어버리니 쓸데없는 비란 어디 있겠는가? 아닌게 아니라 지금 개

천에는 장마가 한 번 져야 사람의 손으로 치우지 못하는 쓰레기를 없

애 준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으로는 쓸데가 없는 것이란 없다. 툭하면

자연 그대로 놓아 두자는 말은 하면서도 자꾸 자꾸 서로간에 제한하고

구속하려고 한다. 그러지 말고 자연 그대로 두고 모두가 맞을 님 맞고

서 삶을 마치는 것이 좋을 것이다. (1957)

 

▶나는 아침 해뜰 무렵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면 베드로가 저 소리를 듣

는 것과 똑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닭이라고 하는 것은 여

기 닭이나 저기 닭이나 모양은 다른 닭이지만 정신은 한 정신이다. 닭

이 무엇을 아는가?닭이 새벽마다 '꼬끼오' 하고 울 때 아침까지 하느

님을 멀리는 하지 않았느냐고 이것을 일깨우고 각성시키기 위해서 닭

이 우는 것 같다. 2천 년 전의 닭소리나 지금의 닭소리나 나는 똑같이

들린다. (1957)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모두 양식으로 생각된다. 입으로 먹는 것

만이 나의 양식이 아니라 예수가 한 일을 적어 놓은 성경이 나의 양식

이 되었다. 이것이 나를 가장 많이 보양해 주었다. 지난 해 여름 10일

간 단식을 마치고 날씨는 무척 덥고 목이 칼칼한데 창 밖에서 들어오

는 새로운 바람이 내 볼을 스쳐 지나갈 때 그렇게 달고 시원할 수 없

었던 기억이 난다. 이같이 입으로 먹는 것만이 양식이 아니라 피부의

감촉이, 눈으로 보는 것이, 귀로 듣는 것이 모두가 양식이 될 수 있

다. (1957)

 

▶나눔(分)이 있으면 웬통 하나는 모르게 되고, 자기 분수만을 알면

웬통 하나를 잊어버리게 된다. (1957)

 

▶우리의 삶은 너무 눈이 높아서도 입이 높아서도 안 된다. 아무리 양

반 나라라 해도 겸손할 줄도 알아야 한다. 간이생활(簡易生活, Simple

life) 운동을 해야 한다. (1957)

 

▶불교에서는 사람의 몸은 흙.물.불.바람(地水火風)이 모여서 되

었다고 한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을 쪼개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물은 우리를 시원하게 해주고 불은 우리가 어는 것을 막아준다.

그러나 물 불은 언제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그냥 지나가고 만다.

수고를 혼자하고 나에게 요긴한 공(功)을 이뤄 놓고는 신임(信任)이나

치사를 받으려 하지 않고 그냥 가버린다. 어떠한 의미로 보면 물불은

천사(天使)이다. 천사 아니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부모도 나에게는 물.불과 같이 은혜를 입히고는 지내간다. 나를 맡

아 길러 주고는 공치사도 없이 그냥 가버린다. 자손이 철이 나서 부모

를 공경하여 볼까 하는데 기다려 주시지 않고 그냥 가고 안 계신다.

   제일 요긴한 것은 목숨이다. 숨을 들어 마시고 내뿜어야 한다. 산소

가 들어가고 탄산가스가 나오는 것인데 다 바람이 드나드는 것이다. 대

기(大氣) 자체이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볼 때 지.수

화.풍은 한가지로 고요한 은혜이다. 너무나 고귀해서 그 은혜를 갚지

못한다. (1957)

 

▶그믐에는 해가 지면 달도 진다. 낮에 달이 있고 밤에 달이 없다. 달

과 해가 겹쳐 있다. 그래서 밤은 캄캄하고 달이 없다. 그와 반대로 보

름은 달은 뜨고 해가 진다. 해가 지고 달이 뜨며 해가 뜰 때 달은 넘어

간다. 그래서 보름달은 지샌다고 한다. 해의 반대쪽에 달이 있는 것이

다. 음력 8일의 달과 23일의 달은 반쪽 밖에 보이지 않아 상현(上弦)

하현(下弦)이라 한다. 이 달을 따라 (바다) 물이 자꾸 들어온다. 그래

서 그믐은 그믐사리 보름은 보름사리라 하여 물이 가장 많을 때가 된

다. 사리란 물이 자꾸 살아 나온다는 뜻이다. 그믐사리에 물이 제일 많

은 것은 해와 달이 합쳐서 계속 당겨주기 때문이다. 보름에는 해와 달

이 한쪽 한쪽에 있어 물이 없을 것 같으나 그믐사리 다음으로 물이 많

다. (1957)

 

▶인사(人事)는 순서에 따라 이치에 좇아서 하면 그것이 곧 인도(人

道)가 되고 도의(道義)가 된다. 모든 처리는 순서에 의하여 이치를 타

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치(理致)를 타면 저 하늘 위를 날아도 떨어

지는 일이 없고 바닷속에 들어가도 숨막히는 일이 없다. 비행기 그리고

잠수함이 바로 그것이다. 이치를 알고 이치를 타고 가면 하느님의 아들

노릇도 한다. (1957)

 

▶몬(物)은 몬(物)대로 절로 되게 놔두어야 한다. 너무 치우치면 독이

되고 중용을 걸으면 약이 되는 수도 있다. 몬의 작용, 이치, 원칙이 이

러하다. 사람은 사람 노릇 하고 몬은 몬이 절로 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

다. 우리는 만족을 느끼고 저절로 되는 것을 보고만 있으면 절로 만족

할 만한 세상이 온다. (1957)

 

▶햇빛이 우리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왔다. 빛은 거짓이다. 태양(太陽)

의 양(陽)이 거짓양으로도 쓴다. 양동(陽動)이 그 뜻이다. 햇빛이 내게

너무 가까이 다가와서 하늘이 내게서 저절로 멀어졌다. 저 태양이 우리

를 근시(近視)로 만들어 낮에는 멀리 있는 별을 볼 수 없다. 낮이라고

별이 잠자러 어디간 것이 아니다. 있어도 햇빛 때문에 눈이 어두워져

못 본다. 대낮(白晝)이 우리로부터 영원을 제거시켰다. 낮이 생기는 것

은 작은 먼지.티끌이 얽혀 반사해서다. 이 낮이란 현혹케(어둡게)하여

참을 못 보게 한다. 빛의 장막을 쳐서 우리를 어둡게 하고 있는 것이

다. (1960)

 

▶아들을 낳으면 좋고 딸을 낳으면 싫다는 생각이 있으면 남녀평등이

니 어찌니 해도 틀린 것이다. 왜 그렇게 쉽게 값을 매길 수 있는가?과

학이나 철학 같은 것도 참으로 어려운데 더구나 종교의 형이상학을 제

맘대로 맘에 드는 것만 가려 들으니 그게 어찌된 노릇인가?(1960)

 

▶오늘날의 물리 (物理), 화학(化學)이란 바뀌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

다. 주역의 역(易)도 변화한다는 말이다. 점(点)치는 것을 나는 미워한

다. 불교에서 신통력을 부린다느니 기독교에서 기도로 초능력을 얻었

다는 것을 나는 미워한다. 미신(迷信)도 미신인줄 모르고 정말로 믿으

면 효과가 있을 수 있다. 자기를 속이지 않고 무엇이든지 참으로 하면

가짜에서도 참이 나온다. (1960)

 

▶수(數)란 셈치자고 나온 게 아니다. 통히 사람들이 수에 아름다움을

느꼈기 때문에 수가 나왔다. 3이라 7이라면 아무래도 거룩한 것 같다.

삼각형의 화(和)가 2직각 그게 직선이 되는 것은 참으로 기이하지 않

는가?(1960)

 

▶우리는 빛의 사상이 있지만 이런 햇빛이 아니고 참빛이 있다. 성경

에는 참빛 사상이 있다. 옳게 오르자는 건데 이 대낮의 멀정한 빛을 가

지고는 못 올라간다. 이 햇빛을 떨쳐 버려 홀리지 말아야 옳게 오른다.

 '제계(절대계)' 가면 볼 것 다 보고 들을 것 다 듣고 알 것이다. (1960)

 

▶지구는 못돌(坤)이다. 먼지 하나 버리지 않고 모아서 돌아간다. 땅

(지구)이 안 움직인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어떻게 보드랍게 움직이는

지 움직이는 걸 모르도록 보들하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비행기가 지

구이다. 우리는 이 우주선 비행기를 타고 우주 여행을 하고 있다. 새삼

스럽게 우주선을 만들어 타고 우주 여행을 한다고 야단할 것 없

다. (1960)

 

▶금(金)이나 백금(白金)을 귀히 여김은 그 물질 자체가 귀해서만은

아니다. 그저 남보다 잘 하려는 경쟁심 때문에 왜 귀한지도 모르고 덮

어놓고 귀하다고 한다. (1960)

 

▶우리나라에서 지게 지는 건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중국에서는 바퀴

를 일찍 만들었는데 우리는 바퀴를 안 만들었다. 이게 불순종이다. 고

맙지만 미욱한 것이다. 바퀴는 스위치나 핸들을 조금씩 만져 가면 된

다. 이게 우리 마음의 이치에도 적용해야 한다. 심법(心法)에도 억지함

없이 해야 한다.

   내버려둔다는 것은 위임이란 말인데 두레박 둘을 매놓고 씀은 지구

중력에 위임하는 거다. 두레박 하나만 갖고 지구 중력에 대항하는 것은

불순종이다. 저절로가 좋다. 억지로 하려고 말아야 한다. 자연을 저대

로 살게 두어서 무리를 말아야 한다. 자연을 제 돌아가는 대로 두어두

고 그것을 조금조금 매만져 가야 한다. 과학자는 무리를 안 한다. (1960)

 

▶사람들은 누구든지 인과(因果)라는 데 붙잡혀 있다. '원인, 결과'이

게 병이다. 무슨 원인으로 이런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 제가 도장을 하

나 꾹 찍어 뭐가 되면 어깨가 으쓱해서 좋은 결과를 맺었다고 한다. 제

게 긴요하면 좋은 결과라 하고 제게 싫으면 나쁜 결과라 하는 것처럼

싱거운 게 없다. 열매 실(實)자를 진실, 성실에 갖다 붙이는 것은 잘못

이다. 열매가 뭐 대단해서 이런 데 붙이는가?(1960)

 

▶증기기선이나 화약이 발명 안 됐을 때에 인류가 더 행복했다. 원자

분열을 안 했다면 더 행복할 것인지 모르겠다. 사망률이 적다느니 편리

하다느니 하는 걸 무슨 굉장한 복지인 것같이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

런 게 복지가 될 까밝이 없다. 우리가 단단히 속고 있는 거다. 신경과

민이 다 되어 버렀다 약을 모르고 사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1960)

 

▶이와 인을 가려야 한다. 이제라야지 인젠은 안 된다. '나도 인젠 잘

하겠다' '인젠 그러지 않겠다'는 것은 속이는 것이다. '이제 해야 겠

다'고 말해야 한다. '인제 일어나야지' 하면 속는다. '이제 일어나야

지' 해야 일어난다. 이제를 확 붙잡지 않으면 게으름 피우다가 다 흘러

버린다. (1960)

 

▶1960년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1960년 12월 31일에 가야 온(來) 해

다. 꼬리까지 와야 다 온 것이기 때문이다. 온(來) 해면 이미 간(去)

해이다. 온 해라고 축하하자 하면 망년회밖에 못 한다. 이 생명의 시간

이란 게 모두 이렇다. 시간은 일찍 미리 해야 한다. (1960)

 

▶동지(冬至), 하지(夏至)라고 하는데 밤낮의 길이가 얼마만큼 짧아졌

고 또 얼마만큼 길어졌나를 상식적으로 알자고 해서 이렇게 5시간 10

분 차이라고 썼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이 지구가 해와 달의 숨바꼭질

틈바구니에서 이 원(元) 시계를 한 번 보자고 이렇게 (한시로 표현) 해

본 것이다. 책도 원서를 보자는데 시계도 원시계를 보아야 하지 않겠는

가?(1960)

 

▶일양래복(一陽來復)이란 짧아졌던 해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한다는

광복(光復)이란 말이다. 4 19의거 때 돌아간 아우들은 정의(正義)의

일양(一陽)이다. 4 19 혁명은 참 좋다고 보는데 젊은 대학생들은 끊

이지 않고 잇달아 오니까 붕래(朋來)이다. (1960)

 

▶맛이란 그쪽을 향하라고 사탕을 조금 칠해 놓은 것인데 그렇게 못

잊고서야 맛이 맛일 수 있는가? 맛이란 조금만 보고 잊어야지 맛을 델

수 없으면 맛이 아니라 독이다. 사실 이 세상은 맛만 보란 것이지 거기

들어붙어 버리란 것은 아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 세상 맛을 찾아 얼마

나 많은 정력으로 헤매는가? 맛볼 때 보고는 잊어버리고, 맞을 것 맞

아 마치자고 하는 것이 인생이다. 이것이 나의 인생관에서 나온 주장이

다. 또 맞이가 중하지만 맞이를 막는 마지막(終了)을 알아야 한다. 마

지막을 그토록 모르고야 마침을 알까?(1960)

 

▶하늘로 둔 머리요 땅을 딛고 선 발이다. 여기 이 내가 섰지만 이 선

자리가 기가 막히게 묘한 자리다. 머리를 번쩍 들고 이 두 발로 곧이

서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이 두 발로 딱 서서 염불하면 성불(成

佛)할 것이고 예수 믿으면 구원 얻을 것이다. 발이 아래에 있다고 무시

함은 머리가 머리로 안 된다. 머리는 머리대로 발은 발대로 제 노릇을

잘해야 한다. 밖에 것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外物不可必) 자

유는 내 맘에 있다. 이것이 그리스의 스토익 사상이다. 밖의 물건이란

기약할 수가 없다. 마음은 마침을 알아야 한다. 마친다는 것은 잊어버

린다는 것이다. 이 땅 위에서 몸으로 영생한다는 것은 미신이요 욕심이

다. (1960)

 

▶잠과 죽음은 같은 것이다. 조금만 잠자도 맛있는데 영 잠들면 좀 맛

이 있겠는가?(1960)

 

▶한 찰나에도 영원히 살림을 살 수 있다. 이 찰나에 영생을 느끼지

못하면 그 사람은 영생이 없다. 정신적이란 그렇게 된 거다. 얼나의 정

신은 시간.공간과는 무관한 것이다. (1960)

 

▶시간은 미리 준비가 있어야 그 시간을 잘 쓸 수 있다. 그 시간이 되

면 시간은 이미 넘어가 버린다. 시간은 올 것을 가지고 산다. 다시 말

하면 일찍 사는 것이요, 미리 사는 것이다. 온 뒤에는 시간은 이미 가

버렸다. 경사(경巳)년이 다 왔다면 이미 다 가 버린 것이다. 날(日)은

날(刀)이다. 날은 없어 안 뵌다. 이제는 붙잡히지 않는다. 이제만 바로

붙잡으면 부지런할 것이다. 시간은 신비다. 시간은 하느님의 명령이다.

하느님의 명령이 아니면 이렇게 자꾸 계속할 리가 없다. 명령이 그치면

시간이 계속 안 될 것이다. (1960)

 

▶우리 맘속에는 더러운 게 많이 들어 있다. 그런데 우리 속을 하느님

의 성전이라고 했다. 이것은 모순중의 모순이다. 이게 우리의 착각인

것 같다. 하느님의 성전은 저 위의 나라인데 이 맘속에 반영(反映)되

어서 그렇지 우리 맘속에 정말 있는 게 아닌 것이다. 반영(反映)을 우

리가 착각을 해서 이 맘속에 있는 것 같다. 하늘을 쳐다본다면 목이 아

플 터인데 밑에 거울을 한 개 두면 편하다. 우리 사람의 꾀도 그러한데

하느님께서 어련히 그리하셨겠는가?(1960)

 

▶크리스마스를 지내는 이는 소강절(邵康節)을 청해야 한다. 나는 으

레 동짓(冬至)날이 되면 소강절의 동지시를 안 외우고는 못 견딘

다. (1960)

 

▶참으로 고운 것은 아무도 안 보는데 있다. 자연(自然)의 아름다움은

누구에게 보이려고 생긴 게 아니다. 사람이 아름답게 하려는 것은 남에

게 보이고자 한다. 달과 별도 아무도 안보는 겨울에 더 반짝여서 좋다.

참으로 아름다운 자연은 사람이 살지 않는 북극에 많다. (1960)

 

▶우리는 낮에 이렇게 서서 걸어 다니는 게 빚을 지는 것이다. 그러니

한 열시간 뒤에는 잠자야 한다. 그게 빚 갚은 거라 어쩔 수 없다. 낮의

빚을 갚자고 자는 거다 우리는 마지막에 아주 큰 빛을 갚게 된다 몸

뚱이는 땅에다 주어 빛을 갚고 그 속에 있는 얼은 하늘나라로 올라간

다.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상대세계는 둘이다. 둘인 이(二)는

의(疑)다. 상대세계는 둘을 못 버린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이다. 상대세

계는 둘을 떠나지 못해 고독(孤獨)을 못 견디어 짝을 찾는다. 그러나

참 삶의 길은 둘을 떠나 하나로 솟나야 한다. (1960)

 

▶보석 반지의 빛은 맘의 눈을 멀게 한다. 보석의 반짝이는 빛에 갇혀

그만 눈이 멀어진다. 우리 눈앞에 해가 바짝 들이대니 우리가 그만 빛

깔(色)에 갇혀 버려 문명(文明)하게 되었다. 이 문명이란 우리를 속이

는 거짓이다. 성경 불경을 보면서 태양을 빛이라며 바라보는 것은 틀

린 것이다. 요새는 과학의 발달로 배 안에서나 지붕 위에서나 천문(天

文)을 관측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하여 자기가 직접 원대한 것을 볼

필요가 없어진 것은 참으로 섭섭한 일이다. 점점 영원한 생명(얼나)에

서 멀어져 가는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별에서 오는 소식을 읽으려면 맘에서 나오는 손가락

눈을 통해 봄으로써 점자를 읽는다. 이렇게 표현한 말들은 내가 30년

전부터 해온 말이다. 그간에는 단편적으로밖에 띠오르지 않았던 것이

일간에 '맘손가락 눈으로 내밀어'라는 이 말이 분명히 잡혔다. (1960)

 

▶우리는 분명히 빛깔에 갇혀 있다. 광막(光幕)에 갇혀 있다는 말이

다. 햇빛은 우리를 자꾸 좁은 데로 떠미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원대

한 것을 생각할 수가 없다. 이것은 나의 70평생 산 경험에서 나오는

한마디다. (1960)

 

▶이런 좋은 날 집에 있을 수 있나 하고는 꽃에, 계집에 촛불에, 네온

사인에 빠지는 것도 다 태양에 유혹받는 것이다. 달빛에 유혹받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태백 같은 똑똑한 이가 달빛에 홀려 강물에 빠져 죽

었다고 한다. (1961)

 

▶하느님을 찾으라고 우리를 내 놓으셨다. 한 시간을 주는 것도 그 시

간 동안에 당신을 찾으라고 주신 거다. 하느님이 나의 나인 참나라 찾

지 않을 수 없다. 우리를 살리는 동안에 하느님에게 다다라야 한

다. (1961)

 

▶우리가 밝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지평선을 넘어가 버리면 그만인 해

(日)를 요구하는 게 아니다. 밤낮을 떠나 한결같이 있는 맘속의 빛을

찾는 것이다. 우리가 밝은 빛을 찾는 것은 거짓 빛을 심판하는 것이

다. (1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