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조형연구소 한뼘미술철학겔러리/종교미술철학겔러리 S'ART

회상/오미아관장

▪살림문화재단▪ 2013. 1. 11. 14:17

아침부터 사무실 앞이 차들로 꽉꽉 막힌다
밤이 붐비는 곳 홍대에서 아침이 붐비는 일은 드는 일인데 오늘은 참 이상타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이 졸업식이란다
하계 졸업식장으로 가는 차들로 도로는 꽉 막혔고, 손에 손에 꽃을 들고 줄지어 가는 인파들로 거리는 축제 분위기다
아무상관 없는 나도 기분이 들떠서 창문 밖을 하염없이 내다보게 된다
이 설레임은 꽃 때문일까
꽃빛과 하늘빛이 참 예쁘게 어울린다
날씨도 여름을 졸업하는 것 같다

대학 캠퍼스를 떠난지 몇해 되지 않는데 아득히 먼 일로 여겨진다
학생에서 사회인으로 차원 이동을 한 것처럼 다른세계로 들어와 버린 느낌이다
십여년이 넘도록 몸 담고 있던 곳인데 이렇게 낯설어 질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문득 그 때를 기억해 본다
내 젊음과 열정이 무엇을 향해 있었는지를 되짚어 본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나는 철학을 공부했다
다른 사람들이 이러 저러 하더란 말은 옮길 수 있겠지만 내가 자신있게 말 할수 있는 것은 없다
십여년 공부로 안다고 한다면 그 또한 말이 안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세상 사는 일에 이러 저러한 시각이 도움이 되더란 말 정도는 할 수 있을텐데 안타깝게도 더욱 혼란스럽기만 하다

“전공이 뭐세요” 라는 질문을 받으면 참 난감했었다
“동양철학 전공입니다” 라고 대답 하고 나면 이후 반응은 다양하다
점 봐 달라는 사람, 도를 아느냐는 사람, 동서양의 철학을 왜 구분 하느냐는 사람 등 나름의 편견으로 곤란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이 내가 궁금한 것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미학’ 전공이라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후 반응은 단순하다
고서화나 도자기 감정을 의뢰 하지만 않는 다면 크게 논쟁 할 것이 없다
그저 나만이 중압감을 느낄 뿐이다
그 중압감이 나를 이렇게 단절된 세계로 밀어 냈는지도 모르겠다

학부시절 거리에서 철학을 논하던 때부터 치면 참 오랜 기간 치열하게 짊어지고 온 화두인데 너무도 허망하게 남은게 없다
소화 되지 못한 지식들이 일거에 설사로 정리가 되어 버린 듯하다
오바이트로 세상을 더럽히기는 것 보다는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고 자위 하면서 부족한 내 자신을 되돌아 본다

학부 1학년때 너무도 창피했던 수업 시간이 기억 난다
처음 맞는 대학 수업은 낯설고 설레었다
부푼 가슴으로 맞은 첫 수업은 지워지지 않는 수치심으로 남았다
그래도 장학금 받는 과대표로서 공부 꽤나 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 수업 이후 자존심은 여지 없이 무너졌다
선생님은 나를 호명하여 대학 교재를 소리내어 읽도록 하셨다
고등 학교 때도 예습이란 걸 해보지 않은 내가 미리 책을 들춰 봤을 리가 없다
일어서서 책을 읽어야 하는데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읽을 수 있는 글짜는 은는이가와 같은 조사와, 했다 이다 습니다와 같은 말미사 뿐이었다
교과서도 못 읽는 학생이 되어 장승처럼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 후로 한문이라는 언어의 벽을 넘어서기 위해 몸부림 처야 했고 읽어 내지 못하는 책들과 씨름 하면서 학부를 보냈다
아픈 기억을 보상이나 하듯 내가 강사가 되어 진행하는 학부 1학년 수업은 교과서 소리내어 읽기부터 시작한다
몇 년을 해 본 결과 이 방법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책을 읽을 수 있을 때부터 공부는 시작 되는 것이니까

불과 50년 전 문헌들을 읽을 때에도 한문이라는 외국어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으니 이전의 글들은 외국어를 넘어 그림 판독을 하듯 읽을 수 밖에 없다
한문 읽기가 어려워서 영어로 된 번역본을 놓고 고심 했던 기억이 새롭다
한국 철학을 해보겠다는 포부는 한문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쳐서 유교 불교 도교의 강을 건너 중국 서양 일본의 역사를 넘어서야만 겨우 당도 할 수 있는 철옹성 앞에서 좌절하게 된다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철학자는 진정으로 세계를 읽어내는 철학적 사유를 갖고 있다
그래서 한국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세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정체성을 찾아 나갈 수 밖에 없다
예를들어 원효를 살펴 본다면 그의 저술들이 가지는 불교사적 위상부터가 범상치 않다
불교에서 부처님의 말씀은 경으로 기록되어진다
부처님에 준하는 새로운 경계를 펼친 이들의 글에 론을 부여한다
그리고 경과 론에 대해 인증을 할 수 있는 해석에 한하여 소라 칭한다
원효는 ‘십문화쟁론’ ‘대승기신론소’등 론과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즉 부처님 이후 성불한 경계의 인물임을 불교사적으로 인증 받은 것이다
여기에 후학의 아픔이 있다
십문화쟁론을 읽으려면 당시 십문으로 표현되는 다양한 논쟁을 알아야 원효가 정의한 화쟁론의 의미를 파악 할 수 있다
대승기신로소 또한 대승기신론을 알아야 그 해석의 의미와 지향점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대승시신론소는 유교 도교와의 비교 분석으로 불교의 일심을 해석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기에 유교 도교에 대한 기본 지식을 알아야만 그 해석의 의미을 이해 할 수 있다
일심이 만물의 주추가 된다는 원효의 기본적 핵심은 나아가 실천의 장을 열어 정토종을 개창하기에 이르니 책만으로도 알수 없고, 맘 공부도 ?은 범인인 나로서는 그저 존경의 마음으로 경배할 뿐이다

성리학의 대가 퇴계의 학문도 심히 접근 하기가 어렵다
성리학이라는 학문자체가 복잡다단하다
공자님 맹자님 말씀이 중국의 지난한 역사를 거쳐 성리학이라는 학문으로 자리매김 하기까지 수많은 투쟁과 화합을 이뤄 왔고, 그중 절묘하게 체계화된 성리학은 그 모두를 아우르는 거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남송 시대의 주체성 확보라는 역사적 당위 위에 정초된 주자학은 당송을 지배 했던 불교를 넘어선 신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감당한다
공맹의 인본주의적 사유 기반안에 도교의 우주론과 불교의 학문체계를 차용하여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 거대 구조에 대한 보완과 반박이 이어지면서 양명학이라는 새로운 심학으로의 진전이 이어졌고, 주자학은 여러 학파로 나뉘어 해석이 분분해 졌다
조선은 이 과정에서 주자학을 수용 하였고, 수용 된 주자학은 조선의 실정에 맞게 조선의 성리학으로 발전 되어 갔다
왜 하필 주자학이었을까
남송의 고민이 조선의 고민으로 이어진 것일까
조선 500년을 이끌어 온 성리학은 성공한 혁명의 산물로 성공한 이데올로기이며 구체적인 세계관이었다
퇴계의 학문은 이 지점에서 중국 주자학을 정리 하고 중국 양명학과 변별 되는 새로운 성리학적 패러다임을 제시 한다
퇴계의 ‘주자서 절요’는 당시 분분한 주자학의 해석에 대하여 명쾌히 분석하여 주자 철학의 요점을 밝혔다
이러한 퇴계의 학문은 역으로 중국에 영향을 주어 ‘퇴계 평전’이 출간 되었고 주자학 입문서로 ‘주자서 절요’가 필독화 되었다
더욱 심화된 퇴계의 심학은 조선 성리학의 부흥을 이루었고 이러한 퇴계의 성리학은 이후 일본 성리학의 근간이 된다
퇴계의 가장 멋진 매력중 하나는 그의 학문이 해를 거듭 하면서 발전하고 변화해 간다는 점이다
퇴계의 학문은 그 방대한 양의 논술을 시기적으로 분류하고 분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퇴계의 학문을 한마디로 정의 하는 것 자체가 무식한 노릇이다
퇴계는 학문적 엄밀성을 중요시 하였으나 누구보다 개방적인 자유정신의 소유자였다
환갑을 넘긴 퇴계는 약관이 갓 지난 율곡과의 치열한 논쟁을 통하여 자신의 이론을 수정하고 이를 공인화 한다
지금 우리시대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일이다
중국 조선 일본 철학의 추뉴가 되는 퇴계의 철학은 이후 주자학의 다양성을 열어 가는 핵심 키워드가 된다
그 키워드를 역사성과 지역성을 토대로 해석 해야만 그의 철학에로 접근 할 수가 있다
내가 공부를 시작할 때는 이러한 연구가 일본에서만 진행 되어 있어서 일본 학계의 도움을 받아 퇴계의 철학을 연구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더욱 모호해지고 혼미해져서 그 관점을 극복 하는데 만도 많은 시간이 소모 되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장황해졌다 아직도 직업병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나 보다
하여간 한국철학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거쳐야 하는 난관들은 호락호락 하지가 않다
쉽게 ‘우리의 것은 좋은 것이여’ 라고 우길 수도 없고 알팍하게 서양 철학적 관점에서 모호하다고 비판하고 모른척 할 수도 없었다
그 답답함을 넘기 위한 몸부림으로 나의 학창 시절은 채워졌 던 것 같다

분노할 일이 많았던 대학시절 젊은 뜨거운 가슴을 안고 도서관 자리를 지키는 일은 불가능 했다
강의실 보다는 술집에서 도서관 보다는 거리에서 더 많은 지식을 얻었던 기억이 난다
공부하는 직분의 학생이 공부를 놓아야 하는 상황 속에서 진정한 공부란 무엇이가를 고민 해야만 했다
자신의 근저를 송두리째 뒤집고 헤쳐서 들춰 내는 일
내가 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고 또 묻는 일

 


그것이 나의 공부였다
학문에 대한, 시대에 대한, 내 자신에 대한 답답함을 안고, 최소한 비겁하지 않기를 희망했었던 뜨겁던 열정이 지금 그립다

도제식 수업의 마지막 세대로 지냈던 대학원 시절도 제대로 공부를 하지는 못했다
성실함에 익숙치 못한 나로서는 성실한 선생님의 배려가 버거웠고, 늪처럼 느껴졌던 학문의 수렁에서 제대로 가닥 하나 잡아내지 못했다
안타까울 뿐이다
아침 6시 기체조, 아침 8시 한문 강독, 이후 수업,그리고 저녁 세미나
종교 집단처럼 석사 10학기를 보내고도 앞서 밝힌 입문 조차 어려웠다
천재가 아니면 천치가 하는 일이라고 투정도 해보지만 결국 내 자신에 대한 회의만 쌓일 뿐이었다
그래도 몰두할 대상이 있어서 참 행복 했던 것 같다
낙오 하지 않고 따라 가야 된다는 강박 관념에 세상 잡념 없이 메달렸다
몰입만큼 매력적인 것을 찾기는 힘들지 않을까
사랑도 학문도 종교도 마약처럼 몰입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무엇에 대한 몰입이든 간에 나를 넘어서는 일 임은 분명 하다

나라와 학교에서 배려한 온갖 특혜를 누렸던 박사 과정은 더욱 후회가 많다

BK21의 특혜를 받으면서 돈 받고 공부하는 베짱이가 되어 몇해를 보냈다

BK21은 당파의 본고장 명륜당 기숙사에 온 세계 석학들을 데려다 놓고 먹이고 재우면서 한국철학 연구를 하도록 장을 마련했다

나를 포함한 박사과정 4명은 이들의 뒷수발을 맡았다 

나라에서 30억, 삼성에서 30억 총 예산 60억을 쓰게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버드대의 두웨이밍 교수, 북경대의 장립교수,동경대 하이델베르그대 베를린대 파리대 교수 등

책에서나 보던 교수들을 코앞에 두고 같이 생활 하면서 언어의 장벽을 넘지 못해 얼굴만 익히며 보내야 했다

인사말 한마디 건네고 나면 더이상 나눌 대화가 없는데, 학문에 관한  대화는 내게 꿈같은 일이다

영어가 안통하니 한문책을 놓고 옥편을 뒤적이며 같이 헤메다 보면 하루에 한줄을 읽기도 어렵다

한글자를 가지고 십여개의 사전을 뒤적이다 보면 한나절이 후딱 지나고 밥먹고 또다시 펼쳐 보면 이전에 찾았던 글들이 아득해지지만 끝내 한문장에 대한 합의를 도출해 내면 너무도 뛸듯이 기뻐서 말이 안통해도  일배 부일배 밤새 술을 마시기도 했다

세계적인 석학들은 대충이라는 것이 없었다

끝까지 집요하게 알아내고 합의를 도출해 내야 성이 풀리는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엄밀하고 열정적인 사람들이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한, 빨리빨리 대충대충 해서는 경쟁력을 가질수 없다

뒷수발 삼년동안 내가 배운 최고의 공부였다

내가 유학하고 온 이들을 직원으로 채용할때 그들을 믿지 않고 또 그들을 믿는 것은 이 경험에 근거한다

 

똥개도 자기 안마당에서는  한수 접고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언어가 짧아도 한국철학을 한국에서 논하는 마당에 있다 보니 주인 의식을 갖게 된다

주인의식을 갖고 공부를 하다보니 배우는 학생의 입장이었지만  같이 경쟁하는 상황처럼 느껴져서 지기 싫은 마음에 우겨서라도 뜻을 이루려는 의지가 생긴다

그들이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서 다른 논리를 펴게 되더라도 우리 마당안에서 만큼은 그들도 우리의 의지를 이해 하길 바랬다

그들의 인정을 이끌어 내기까지 하나의 이슈를 가지고 수십가지의 근거를 찾고  수백가지의 예증을 들어 경우마다 비판의 여지 없이 설명을 해내야 했다

무엇보다도 엄밀함이 필요한 일이었다

큰 욕심을 부려서도 안되고 쉽게 타협해서도 안되는 일이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언어의 벽이었다

걸음마가 안되는 사람이 뛸려고 하니 자기발에 걸려 넘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화병에 과로로 몇해 버티지 못하고 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일생 일대의 기회를 제데로 활용하지 못했던 것이 끝내 아쉽다

 

BK덕에 온갖 사치를 누리며 공부를 했지만 정작 학문적인 업적은 미비했다

돈 낭비란 비판을 면하기는 어렵다고 생각 되지만 학문적 업적 이상의 경험을 얻은것은 사실이다

문화의 힘이 어떤것인지, 문화적 연대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어렴풋이 나마 알게된 것이 축복이다

힘을 가지고 펼치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진다

사대주의던 식민주의던 힘의 논리는 있기 마련인것 같다

힘의 논리,비단 학문에서 뿐이겠는가

돈은 있고 볼 일이다  


학교를 나온 후에도 답답함은 색깔을 달리하여 이어진다
그러나 그 답답함은 내 열정을 지피는 불씨이기도 하다
세상에 대하여 경솔하게 속단하지 말고, 남의 업적에 기대지 말자고,
타자에 대한 이해와 세상에 대한 견해를 넓혀가자고 다짐해 본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세상에 대하여 어떠한 말을 걸고 있는지,그 말은 진정성이 있는지 내게 묻는다
원효가 그랬듯이 퇴계가 그랬듯이 그들만큼의 성과가 아니라 그들이 가졌던 열정과 진정성을 가지고 살아가길 희망한다

몇일 후면 신입생들로 캠퍼스가 채워질 것이다
졸업과 입학이 이어지고 세대와 시대가 이어지고 역사와 역사가 이어질 것이다

내 공부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사는게 공부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