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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2천년史] 각종 기록들

▪살림문화재단▪ 2013. 2. 11. 23:54

 

 

교황 2천년史 각종 기록

연합뉴스 | 입력 2013.02.11 23:25

 

 

(뉴욕 AP=연합뉴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전격 퇴위를 발표하면서 2천년에 걸친 교황의 역사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유구하고 신비로운 가톨릭 역사 속에 드러난 교황의 갖가지 진기한 기록들을 되짚어본다.

AP통신은 참고서적으로 리처드 P. 맥브라이언의 `교황들의 생애'(샌프란시스코 하퍼출판사간) 등이 활용됐다고 밝혔다.

- 초대 교황= 성 베드로.

- 최장수 재위= 성 베드로, 첫 순교교황으로도 기록.

- 2번째 장수 재위= 비오 9세(1846-1878), 32년. 요한 바오로 2세(1978-2005)는 세번째 장수 재위.

- 최단기 재위= 우르바노 7세(1590), 12일간 재위, 선출 당시 말라리아에 걸려 즉위식을 갖지도 못함. 1978년 선출된 요한 바오로 1세의 재위기간 역시 33일에 불과하지만 역대 최단기 10위 내에도 들지못함.

- 부친으로부터 직접 승계한 처음과 마지막 교황= 이노센트 1세(402-417), 아나스타시오 1세의 아들.

[부친 성.아나스타시오 1세는 막시무스의 아들로서, 로마에서 태어난 그는 399년 11월 27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이노센트 1세는 로마 감독의 승인과 찬성 없이는 서방 교회가 독단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규칙을 만들었다. 그는 로마 감독을 ‘감독들의 머리이자 정점’이라고도 언급했다. 그는 로마 교회가 사도전승의 보호자이며 모든 서방 기독교의 모체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로마 감독이 세계적 지배권을 가진다는 주장까지 펼쳤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로마 교회가 베드로의 수위권(首位權, primatus, primacy)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로마 감독이 다른 모든 감독들에 대한 우위권을 가지고 사도적인 전통을 보호 관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베리우스 교황(536)은 부친 호르미스다스 교황이 선종한 후 13년후 재위에 오름. 931년 재위에 오른 요한 11세는 세르지우스 3세의 서출로 알려짐. 호르미스다는 로마 교회의 대부제였으며  그가 교황으로 선출될 당시 아들 하나를 둔 홀아비였으며 이름으로 보아 페르시아이나 동방 계열 출신이고 모계의 영향을 받은 이름인 듯하며 그의 아들 실베리오도 후에 교황이 되었다.]



- 전임 교황을 직접 살해한 처음이자 마지막 교황= 세르지우스 3세(904 또는 905년).

- 재위중 살해된 첫 교황= 요한 8세(882), 독살된 채 곤봉으로 맞아 살해됨. 재위중 살해된 8명의 교황 가운데 첫 사례.

- 자진 퇴위한 첫 교황= 폰티아누스(235), 로마의 기독교도 박해 당시 감옥에 수감된 후 사임.

- 자진 퇴위한 두번째 교황= 셀레스티노 5세(1294)가 취임 5개월만에 스스로 물러남.

- 자진 퇴위한 세번째 교황= 그레고리오 12세(1415), 유럽교회의 대분열을 종식시키는 협상에서 자진 퇴위.

- 교황 이름으로 첫 개명= 요한 2세(533), 이교도 신 머큐리란 이름을 지녔기 때문.

- 10대에 선출된 처음이자 마지막 교황= 요한 12세(955), 18세 때 선출.

  [955년 교황 아가피토 2세가 선종하자 당시 산타 마리아 인 도미니카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이었던 옥타비아누스가 955년 12월 16일에 후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5]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요한이라는 이름을 선택하여, 교황 요한 12세로 명명되었다. 그는 세속 문제를 처리할 때는 본명인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으로 지시한 반면에 교회와 관련된 문제인 경우에는 요한 12세라는 이름으로 지시하였다.[]

- 첫 평신도 출신 교황= 레오 8세(963), 교황에 오르기 위해 먼저 주교로 임명돼야 했음.

  [963년 12월 로마 교회회의는 교황 요한네스 12세를 부도덕한 행위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에 대한 무장봉기를 선동한 혐의로 폐위하여 추방했다.

오토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해 들어온 뒤 로마 교회회의를 소집했고, 이후 당시 평신도였던 레오를 교황으로 선출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오토가 떠나자 요한네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로마로 돌아와 964년 2월에 교회회의를 열어 레오를 폐위시켰고 레오는 오토에게 도피했다. 그러나 요한네스는 964년 5월에 갑자기 죽었다. 로마인들이 오토가 추천한 후보자 레오를 무시하고 베네딕투스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자 화가 난 오토는 다시 로마로 와 964년 6월에 베네딕투스를 추방하고 레오를 그 자리에 앉혔다.

어떤 학자들은 오토가 그를 강제로 교황에 앉히기 전까지 그를 대립교황으로 간주하며, 다른 학자들은 레오나 베네딕투스를 대립교황으로 간주한다.]

- 추기경이 아닌 신분에서 마지막으로 선출된 교황= 우르바노 6세(1378), 그의 실정이 유럽교회의 대분열을 초래.

- 콘클라베가 시작될 당시 주교가 아닌 신분에서 마지막으로 선출된 교황= 수도사 출신 그레고리오 16세(1831년).

  [1831년 2월 2일 64일간 진행된 콘클라베에서 모두의 예상을 깨고 카펠라리 추기경이 교황 비오 8세(1829–1830)의 뒤를 이어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될 수 있었던 계기는 당시 가장 유력한 교황 후보였던 자코모 주스티니아니 추기경을 스페인의 페르난도 7세 국왕이 반대했던 데다가 기타 유력한 후보들이었던 엠마누엘레 데 그레고리오 추기경과 바르톨로메오 파카 추기경을 놓고 교착 상태가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교착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추기경들은 결국 카펠라리 추기경을 주목하고 그에게 표를 던지게 되었다.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당시, 카펠라리 추기경은 아직 주교품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교회 역사에서 주교 서품을 받지 못한 몸으로 교황으로 선출된 마지막 교황으로 기록되었다.[1] 추기경단의 주재로 주교로 서임된 카펠라리는 자신의 교황으로서의 새 이름을 그레고리오 16세라고 명명하였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20년 동안 첼리노 언덕의 산 그레고리오 수도원의 아빠스로 지냈기 때문이었다.]

- 왕관을 쓴 마지막 교황= 바오로 6세(1963), 요한 바오로 1세(1978)가 이 관행을 폐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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