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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천지신명, 도(道), 아무렇게나 불러도 상관없다고 하더라!>-위의환

▪살림문화재단▪ 2014. 7. 23. 10:24

 

 

 <하느님, 천지신명, 도(道), 아무렇게나 불러도 상관없다고 하더라!>-위의환

텅 빈 도(道)가 오히려 통역자를 통한 왜곡된 신보다 앞서 있다

道沖而用之, 或不盈.....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도는 텅 비어 있지만 작용하니..... 나는 그것[道]이 누구의 자식인지 알지 못하나 아마도 상제(上帝: 조물주)보다 앞서 있는 것 같다.)

 

어제의 도법자연(道法自然)에 이어 잘못된 통역자, 중재자, 전달자 등을 통해 전달된 신은 본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런 신을 본받거나 믿느니 차라리 노자가 제시한 텅 빈 도를 본받고 따르는 것이 훨씬 인류구원과 자연과 공생하는데 앞서 있다는 것이다.


어제의 도법자연(道法自然)과 오늘의 상제지선(象帝之先)은 공자가 예(禮)를 물었다는 춘추시대의 노담(老聃) 노자가 전한 말씀이다. (전국시대의 태사담(太師儋) 노자가 따로 있다.)


예법에서 가장 중요한 예법이 상제(上帝)께 올리는 제사이다. 때문에 노담은 상제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또한 노담은 주왕실의 도서관 사서(司書)를 지냈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서를 잘 아는 사람으로 박제된 상제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의 상제를 잘 아는 사람이다. 달리 말하면 신의 통역자들이 어떻게 통역을 왜곡했는지도 잘 아는 사람이다.


지배자와 그에 빌붙어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신을 왜곡하여 그들의 권력과 사리사욕을 채워 넣었는지를 잘 아는 노담은 과감하게 “도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지 못하나” 하면서 곧 도의 어버이를 알 수 없다는 말로 이는 곧 도가 최초의 어버이라는 명제로 상제(上帝: 조물주) 자리를 대신 제시했다.


<성서> 요한복음 1장 1절의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는 구절을 <노자>를 빌어 말한다면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도가 있었다.”로 요한이 전한 말씀이나 노자가 전한 도가 별반 다른 뜻은 아니고 서로 상통한 뜻이라고 볼 수 있다.
요한은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고 했듯이 노자도 “도는 상제와 함께 계셨고, 상제와 똑같은 분이셨다”고도 충분히 말할 수 있지만 신의 통역자, 중재자, 전달자에 의해 왜곡된 상제를 보고서 과감하게 상제보다 앞서 있는 것이 도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노자>의 원문에 나오는 상제(象帝)는 상제(上帝)가 아닌 독립된 단어인 상(象)이다. 象을 우리는 코끼리 象으로 읽지만 여기에서 뜻은 비슷하다, 의문스럽다는 부정이나 의문을 나타내는 말이다.
한문에서 실제로 보지 못해 추상적으로 그려보는 모습, 정확한 모습을 형용하지 못할 할 때 코끼리 象을 빌려 쓴다. 그 까닭은 중국의 천자가 천하의 진귀한 물건은 모두 도성으로 진상하게 하여 보았지만 오직 코끼리는 말만 들었지 실제 실물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코끼리 象을 빌려 형용하게 되었다.

 

코끼리는 남방의 물건이다. 그리고 무게가 엄청나가고, 사료로 풀을 먹는 양도 엄청나다. 남방으로 파견된 사신이 천자가 있는 도성으로 코끼리를 가져오려다 여러 번 실패하니 천자는 사신에게 본 코끼리의 모습을 화공에게 말하게 하여 실제 코끼리가 아닌 사신이 전한 모습을 화공이 그린 그림으로 코끼리를 보았기 때문에 실제로 보지 못한 것을 어렴풋이 형용할 때는 象을 쓰고, 실물을 정확하게 보고 정묘하게 그린 것은 사람 人자를 붙여 像으로 쓴다.


그러기 때문에 진실의 像을 전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허상으로 상제(上帝: 조물주)와 GOT를 왜곡하여 전한 말은 따라서는 안된다. 나는 그런 말을 따르니 노담이 전한 “도는 텅 비어 있지만 작용하니..... 나는 그것[道]이 누구의 자식인지 알지 못하나 아마도 상제(上帝: 조물주)보다 앞서 있는 것 같다”는 도를 따르겠다.


특히나 부자 종교와 종교인이 전한 말은 더더욱 믿을 수 없다. <노자>의 주석가 왕필(王弼)은 “도는 비어 있으면서 작용하나 그 쓰임은 무궁하다. 가득 채워져 있는데도 더 채우려하니, 더 채워지면 넘치게 된다. 그러므로 비워있으면서 작용하고 또 다시 채우지 않으니 그 무궁함이 이미 지극하다.”고 했듯이 세속의 물질과 권력이 가득 채워져 있는데도 더 채우려 하는 종교와 종교인들의 욕심은 언제 멈추려는지 모르겠다. 또한 그들이 채우다 넘치는 것을 주어 먹으려는 외형만 거룩한 상거지들이 우굴 거리는 현실을 상제(上帝: 조물주)와 GOT이 보면 참 좋아 하겠다.


나는 남의 종교로 말하지 않겠다. 내가 소속된 종교로 돌직구를 날리겠다. 추기경이라는 높은 계급을 달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이라는 사람과 염이라는 사람은 비우기는커녕 무엇이든 넘쳐 나는데도 더 채우려는 엉터리 빵터리 통역자, 중재자, 전달자이다. 이번 교황방한 때 이 두 사람 교황 옆에 서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수복선생의 페이스북에서]

*국담 : 선생님 안녕하시지요?

중국식 '하느님'의 표기는 '옥황상제'라고 합니다. 식자들의 '하느님, 천지신명, ... 등등' 다양하게 표현은 식자들 사고에서는 일통하여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민중이 같은 뜻으로 이해한다고 생각할 지는 알 수 없습니다.

'메시지'의 속성으로 판단컨데 발신자는 수신자의 언어로 표현되어야 전달도 빠르고 또 정확하게 이해되어 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