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조형연구소 한뼘미술철학겔러리/살림재단이 주목하는 작가

로마 유적에 한국 기둥을 세운 이 남자

▪살림문화재단▪ 2015. 3. 21. 20:15

이탈리아서 조각전 여는 박은선


	조각가 박은선.
/이진한 기자
"한국에 갔을 때 사찰에서 봤던 기둥 같네요. 세월을 머금고 쩍 갈라진 채 넉넉하게 서 있는 나무 기둥이요."

2주 전 이탈리아 로마의 고대 유적지인 '메르카티 디 트라이아노(Mercati di Traiano)' 박물관. 10t이 넘는 거대한 대리석 조각 앞에서 세계적 건축가가 감탄했다. 삼성미술관 '리움', 강남 교보타워 설계 등으로 우리에게도 알려진 스위스 출신 대가 마리오 보타였다. 대리석으로 종종 조각 작업을 하는 그를 로마까지 이끈 이는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는 한국 조각가 박은선(48·사진)이었다. 그는 지금 콜로세움 옆, 로마시대 증권거래소로 쓰였던 유서 깊은 유적지인 이곳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지극한 이탈리아에서 작가에게 역사적인 공간을 전시장으로 내주는 건 이례적이다.

최근 한국을 찾은 작가는 "20여년 옆길로 안 새고, 묵묵히 시골 마을에 파묻혀 돌 작업만 했더니 이런 영광이 찾아왔다"며 몸을 낮췄다. 그는 경희대 미술교육과를 졸업한 뒤 1990년대 초 조각 명문인 이탈리아 카라라 아카데미 조소과에서 공부했다. '좋은 돌'을 찾아 무작정 세계 최고 대리석 지대인 이탈리아의 소도시 피에트라 산타에 갔다. 인구 2만명 작은 소도시에서 20여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작업장을 오가는 작은 동양인 조각가 '파르크(Parke, 성씨 '박'의 이탈리아식 발음)'는 이미 현지의 유명 인사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옛 로마 건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야외에 대형 조각 13점을 설치했다. 차량 접근이 어려운 문화재 보호 구역이라 야간에 크레인을 올려 겨우 설치할 정도로 육중한 작업들이다. 검은 대리석과 회색 대리석을 잘라붙여 거대한 덩어리로 만든 조각, 구(球)와 정육면체를 쌓아올린 형상의 조각들이 고대 유적과 어우러져 있다. 작가는 "나는 조각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조각이 놓이는 공간의 여백을 중시한다"며 "이런 작업 스타일 덕에 유적지라는 배경을 고려해야 하는 이번 전시의 작가로 선정될 수 있었다"고 했다.


	로마의 주요 유적지 메르카티 디 트라이아노(Mercati di Traiano) 박물관에 설치된 박은선의 대리석 조각.
로마의 주요 유적지 메르카티 디 트라이아노(Mercati di Traiano) 박물관에 설치된 박은선의 대리석 조각. 한국 전통의 배흘림 기둥이 지닌 완만한 곡선을 토대로 만들었다. /박은선 제공
작가는 몸에 밴 한국적 미감(美感)이 이탈리아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동력이라고 믿었다. "우리 전통의 배흘림 기둥을 좋아합니다. 돌도 그렇게 둥그스름하게 깎아놓고 안쪽을 돌아가며 파지요. 그렇게 남아 있는 나선에서 한국의 보드라운 아름다움이 느껴진다고들 하네요." 마리오 보타가 그 한국의 선(線)을 예리하게 간파했다. 박은선의 돌 조각이 지닌 또 다른 특징은 도끼로 내리찍은 듯 금이 쩍 갈라져 있다는 것이다. "돌에 숨통을 틔워줬습니다. 깨짐으로써 역설적으로 돌의 강한 본성이 또렷이 드러나기도 하지요."

"시골이어서 오직 할 게 작업밖에 없다"는 게 마음에 들어 이탈리아 작은 산골에 들어갔다는 작가는 "이름보다는 작품이 더 알려지는 조각가가 되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