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문화재단/다석류영모(多夕柳永模.1890~1981)

다석 多夕 류영모(柳永模, 1890~1981)| 살림도방 다석채플

▪살림문화재단▪ 2012. 8. 11. 02:26

 

  다석 多夕 류영모(柳永模, 1890~1981)|

         

(다석과 제자함석헌. 스승, 제자 사이인 다석과 함 선생의 생일은 3월 13일로 같은 날이다.)

 

다석 多夕 류영모(柳永模, 1890~1981)


 다석 류영모는 온 생애에 걸쳐 진리를 추구하여 구경(究竟)의 깨달음에 이른 우리나라의 큰 사상가이다. 젊어서 기독교에 입신(入信)했던 다석은 불교와 노장(老莊), 그리고 공맹(孔孟)사상 등 동서고금의 종교․철학사상을 두루 탐구하여 이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뚫는 진리를 깨달아 사람이 다다를 수 있는 정신적인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1910년대에 우리나라 3천재, 5천재의 하나라는 말을 들었고 남강(南岡)이승훈, 정인보, 최남선, 이광수, 문일평 등과 교유하면서 그들의 외경을 받았다. 다석은 평생을 오로지 수도와 교육에 헌신하면서 일생동안 ‘참’을 찾고 ‘참’을 잡고 ‘참’을 드러내고 ‘참’에 돌아간 ‘성인’이다.

   김교신(金敎臣), 함석현(咸錫憲), 이현필, 류달영 같은 분들이 다석을 따르며 가르침을 받았는데, 특히 오산학교 제자였던 함석헌은 생전에 다석을 그리며 “내가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오늘의 내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동안 묻혀 있었던 보화와 같은 다석의 사상이 다시 드러나 빛을 발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주어 큰 주목을 받고 있으며, 마하트마 간디처럼 드높은 경지에 이른 위대한 정신적인 스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학자들은 다석의 종교다원주의가 서양보다 70년이나 앞선 것에 놀라고 있다. 다석의 종교사상은 1998년 영국의 에딘버러(Edinburgh)대학에서 강의되었다.


   “선생님은 언제나 자기를 꼭 지키고 있는 분이란 것에 몸매에나 말씨에나 걸음걸이에나 늘 나타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느 순간도 마음을 헤쳐놓음(放心)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앉으면 언제나 꿇어 앉으셨고 한 번도 무릎을 세우거나 다리를 뻗거나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 선생님은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이때까지 인생을 헛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석현



다석(多夕) 류영모(柳永模) 연보(年譜)


1890년  (0세)  1890년 3월 13일(경인년 2월 23일) 서울 남대문 수각다리 가까운 곳

               에서 아버지 류명근(柳明根) 어머니 김완전(金完全) 사이 형제 가운

               데 맏아들로 태어나다.


1896년  (6세)  서울 홍문서골 한문서당에 다니며 통감(通鑑)을 배우다.

               천자문(千字文)은 아버지께 배워 5세(만 4세) 때 외우다.


1900년 (10세)  서울 수하동(水下洞) 소학교에 입학 수학하다. 당시 3년제인데 2년

               다니고 다시 한문서당에 다니다.


1902년 (12세)  자하문 밖 부암동 큰집 사랑에 차린 서당에 3년 간 다니며

              『맹자』(孟子)를 배우다.


1905년 (15세)  YMCA 한국인 초대 총무인 김정식(金貞植)의 인도로 기독교에

               입신(入信), 서울 연동교회에 나가다. 한편 경성 일어학당(京城

               日語學堂)에 입학하여 2년 간 일어(日語)를 수학(修學)하다.


1907년 (17세)  서울 경신학교에 입학 2년 간 수학(修學)하다.


1909년 (19세)  경기 양평에 정원모가 세운 양평학교에 한 학기 동안 교사로 있다.


1910년 (20세)  남강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평북 정주(定州) 오산학교(吳山學敎) 교

               사로 2년 간 봉직하다. 이때 오산학교에 기독교 신앙을 처음 전파

               하여 남강 이승훈이 기독교에 입신하는 계기가 되다.


1912년 (22세)  오산학교에서 톨스토이를 연구하다. 일본 동경에 가서 동경 물리학

               교에 입학하여 1년 간 수학(修學)하다. 일본 동경에서 강연을 듣다.


1915년 (25세)  김효정(金孝貞, 23세)을 아내로 맞이하다.


1917년 (27세)  육당(六堂)최남선(崔南善)과 교우(交友)하며 잡지「청춘」(靑春)에

               ‘농우’(農友), ‘오늘’등 여러 편의 글을 기고하다.


1919년 (29세)  남강 이승훈이 3․1운동 거사 자금으로 기독교 쪽에서 모금한 돈

               6천 원을 맡아 아버지가 경영하는 경성피혁 상점에 보관하다.


1921년 (31세)  고당(古堂)조만식(曺晩植) 후임으로 정주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 1년

               간 재직하다.


1927년 (37세)  김교신(金敎臣) 등 「성서조선」(聖書朝鮮)지 동인들로부터 함께 잡

               지를 하자는 권유를 받았으나 사양하다. 그러나 김교신으로부터 사

               사(師事)함을 받다.


1928년 (38세)  중앙 YMCA 간사 창주(滄柱) 현동완의 간청으로 YMCA 연경반(硏

               經班) 모임을 지도하다. 1963년 현동완 사망(死亡)시까지 약 35년

               간 계속하다.


1935년 (45세)  서울 종로 적선동에서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로 농사하러 가

               다.


1937년 (47세)  「성서조선」잡지에 삼성 김정식 추모문 기고하다.


1939년 (51세)  마음의 전기(轉機)를 맞아 예수정신을 신앙의 기조로 하다.

               그리고 일일 일식(1日1食)과 금욕생활을 실천하다. 이른바 해혼(解

               婚) 선언을 하다. 그리고 잣나무 널 위에서 자기 시작하다.


1942년 (52세)  「성서조선」사건으로 일제(日帝) 종로 경찰서에 구금되다.

               불기소로 57일 만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나다.


1943년 (53세)  2월 5일 새벽 북악 산마루에서 첨철천잠투지(瞻徹天潛透地)의 경험 

               을 하다.


1945년 (55세)  해방된 뒤 행정 공백기에 은평면 자치위원장으로 주민으로부터 추

               대 되다.


1948년 (58세)  함석헌(咸錫憲) YMCA 일요집회에 찬조강의를 하다.


1950년 (60세)  YMCA 총무 현동완이 억지로 다석 2만2천 일 기념을 YMCA에서

               거행하다.


1955년 (65세)  1년 뒤 1956년 4월 26일 죽는다는 사망예정일을 선포하다.

               일기(多夕日誌) 쓰기 시작하다.


1959년 (69세)  『노자』(老子)를 우리말로 완역하다. 그밖에 경전의 중요부분을 옮

               기다.


1961년 (71세)  12월 21일 외손녀와 함께 현관 옥상에 올라갔다가 현관 바닥에 낙

               상(落傷), 서울대학병원에 28일 동안 입원하다.


1972년 (82세)  5월 1일 산 날수 3만 일을 맞이하다.


1977년 (87세)  결사적인 방랑길을 떠나 3일 만에 산송장이 되어 경찰관에 업혀 오

               다. 3일 간 혼수상태에 있다가 10일 만에 일어나다.


1981년 (91세)  1981년 2월 3일 18시 30분에 90년 10개월 21일 만에 숨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