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문화재단/다석류영모(多夕柳永模.1890~1981)

다석 유영모의 사상- 을 읽고 | 살림도방 다석채플

▪살림문화재단▪ 2012. 8. 11. 02:35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보편성

                                         -다석 유영모의 사상- 을 읽고

                                           과 목 명 : 문화 신학

                                           제 출 자 : 박찬희

                                           담당교수 : 최인식 박사


    다석 유영모의 신학 사상을 접하게 된 것은 내게는 하나의 큰 충격이었으며 아울러 신학적 지평을 한 단계 넓힐 수 있었던 기회였다. 그의 사상이 정통적 신앙고백과 여러가지 면에서 다르지만  "[궁극적 실재]에 대한 가르침은 다양하지만, 그 실재에 귀일(歸一)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유일성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다석의 관점은 오늘같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배타적이라는 기독교의 이미지를 재고(再考)할 수 있는 기틀을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난 후 내게 울려오는 다석의 가르침은 마치 내가 YMCA의 연경반강좌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까지 느끼게 하였을 정도로 심도(深度) 깊은 것이었다. 그것은 다석과 내가 비록 다른 세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같은 성정을 가지고 한 분 예수를 지

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나는 다석의 사고(思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문제를 지적코자 한다. 다석을 전면 긍정할 수도 그렇다고 전면 부정할 수도 없는 어중간한 입장에서 나는 나의 무지를 고백할 수 밖에 없다.

1. 톨스토이와 다석 유영모 - 금욕주의에 관하여


    톨스토이의 다음과 같은 영육이해는 다석의 금욕주의에 영향을 끼친 것 같다.


    " … 이 일을 생각하고 정신을 인생의 모든 육체보다 상위로 생각하고 정신을 인생의 모든 외부적인 더러움에서 경계하고 육체가 정신을 압박하지 않도록 하여 자기의 생활이 육체와 일치함을 피할 것이며, 자기의 생활을 정신과 합류시켜라."


   이러한 견지에서 다석은 몸, 몸나, 육체 등은 얼, 영, 정신 등과 비교해서 매우 부정적으로 취급하는데 이는 헬라적 이원론에 가깝지 결코 동양적 사고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간에 그의 말에는 영지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다석은 이러한 자신을 간파하고 스스로를 '비정통'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가 스스로를 과감하게 비정통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당시의 정통적 신학에 '토론'을 제기하고 나서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추측이 가능한 것은 그가 '영-그리스도론'이라고 정의되는 독특한 자기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다석은 그토록 금욕적 삶을 강조하였고 그렇게 실천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그의 성실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금욕주의가 인간을 궁극적 실재에 이르게 하여 구원을 이루게 할 수 있는가?

    다석은 이 점에 있어서 "예수의 십자가가 의미하는 바 情과 慾을 죽이는 삶" 곧 '죽음에 대한 관심'이 금욕이라고 답한다. 그에게는 斷食斷色이 관심일 뿐이다.

    나는 여기서 또하나의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식욕과 색욕(몸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으면 <얼>의 삶에 이르는 온점함을 과연 이룰 수 있는가?


2. 영-그리스도론(Spirit-Christology)에 대하여


    '영-그리스도론'이란 개념의 확립은 다석이 기여한 신학적 공헌이다. 서구의 나누기 좋아하는 사고로 삼위일체를 본 것이 아니라 동양적 사고 즉 합일(合一) - 신과 인간,영과 육, 자연과 인간, 삶과 죽음 - 의 사상이 그 근저를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성령의 활동에 대한 개방성"은 '범신론적 차원'에 이를 위험이 있지만 "만물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고 있는 근원이 바로 성령"이라는 최인식 교수의 해석에서 보면 이 성령이 생명과 연관될 때 그 역할은 생명의 유지이며 더 나아가 생명이 '그리스도의 얼'곧 '참나'가 되기 위하여는 '몸'에 제한될 것이 아니라 개방되어 넓은 세계와 자연과 인간을 향해 열려야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석은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과 그 존재와 사역의 기능을 매우 개방적으로 폭넓게 이해"하다 보니 성자의 독자적 위치를 격하시키고 있다.


3. 다석의 그리스도 이해에 관하여


    "다석은 예수에게나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얼>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본다. 이는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과 유사한데 이같은 사실은 "예수만이 혼자 독생자인가, 한아님의 씨를 키워 로고스의 성령이 나라는 것을 깨달아 아는 사람은 누구나 다 얼의 씨로 독생자이다."라는 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 하에서 다석은 "기독교 믿는 자는 예수만이 그리스도라 하지만, 그리스도는 예수만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인 한아님으로부터 오는 성신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이해가 정당하다면 그 성신을 받은 자는 누구나 그리스도가 되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다석式의 개방적 사고라면 '그리스도'라는 개념도 예수 이외에 석가나, 노자나, 공자나, 여타 성인에게도 붙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석은 다른 이를 '그리스도'라 부르지 않는다. 단지 "위로 올라갔고 세상을 이겼다"고 할뿐이다.

이런 언어 활용의 불일치는 큰 문제 같지 않지만 언어란 그의 사상과 인격과 삶을 담지한다고 할 때 그 중요성은 실로 크기 때문이다.


4. 다석의 종교철학적 종교 이해에 대하여


    "특정 종교가 자신의 계시성을 운운하면서 이웃 종교와 차별성을 말하는 것은 그에게 전혀 의미 없는 주장"임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제 종교란 말씀 - 그것이 계시라는 방법으로 만들어졌든지 여타의 자연적 방법으로 되어졌든지 간에  - 을 담은 그릇"이라고 할 때 다석은 그릇이 아니라 말씀에 관심을 갖는다. 그런데 그가 그리스도교를 가장 우월하게 보고 가장 가치있게 보는 이유 곧 그리스도교의 말씀과 타종교의 말씀이 갖는 분명한 질적차이 - 그것을 나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생각 그리고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대한 칼케돈 고백적 사고에서 찾는다 - 와  왜 " '궁극적 실재'에 대한 가르침은 다양하지만, 그 실재에 "귀일"(歸一)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뿐"인지를 규명하지 않고 있다.

    단지 "예수의 이름은 오늘도 진리의 성신으로 생명력을 풍성하게 내리신다"는 '예수'의 유일성 고백이 의미하는 바 "묻은 지 사흘만에, 새생명의 싹이 나서, 다시 살아났"고 "새 천지의 개벽은 이로 좇아 시작이다. 그 뒤로 인간은 天門으로 通하게 되었다."는 선언만이 있을 뿐이다.

    노자, 석가, 공자, 예수 각 사람은 '여럿'이지만 한아님의 <얼>을 드러내는 자로서는 '하나'라는 일즉다(一則多)의 사고(思考)는 그가 궁극적 '하나'에로 이르게 하는 '실천력'과 '구원의 힘을 체험'케 하는 '참종교'로서 예수를 선택한다 할지라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구원에 관한 예수의 말씀을 직접 고백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하는 인본주의적 입장에 서고 있는 것이다.


5. 신성모독에 관하여


    다석 그리스도론이 지니는 교의신학적 문제와 종교철학적 의의를 평가하면서 최인식교수는


 "다석의 그리스도 이해에서 가장 기본적인 전제란 사람이 신이 되어 경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석은 이 원리에 따라서 석가, 노자, 공자, 예수 등의 인물이 각개 종교에서 신격화되어 있는 것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그것은 한 분이신 한아님에 대한 신성모독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는 한아님이 아닌,인간이란 주장이다."


라고 정의하였다.


    이에서 보면, 다석은 '사람이 신이 되어 경배의 대상'이 되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의 예수에 대한 이해가 우리와 얼마나 다른 지를 보여주는 일면이다.

이러한 그의 이해에 대하여 나는 또하나의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예수의 신성 곧 예수의 하나님이심을 긍정하지 않고는 성경적 의미의 구원에 이르는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6. 글을 마치며


  다석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앞으로 더욱 연구하여 이뤄져야 할 우리 세대의 과제인 것은 분명하다.

   다석 연구의 의의를, 다석의 그리스도론이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에 새로운 문제제기를 하는 계기"가 되고 "성서의 본래의 맥락"을 찾는데 있다고 보는 최인식 교수의 말은 정당하다.

    이런 견지에서 제도(system)가 규정하는 틀에서 바라보고, 판단하고, 정의하는 우리의 습관적 눈으로 다석의 깊이를 정확히 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적 교만이다.

    이것은 또한 신앙적인 면에서도 그러하다. 인간이란 "신 앞에 선 단독자"인 까닭에 아무도 한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기의 눈으로 通察할 수는 없다. 비록 외견상 그의 신앙하는 모습이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그의 진면목을 살피지도 않은 채 비난을 먼저

가한다든지 자신 이외의 다른 이들이 접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도 극구 차단하는 것은 不當하다.

    그러한 면에서 우리가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모든 이들이-  종교 다원주의를 대하는 태도는 개방적이어야 한다. 문을 열어야 밖을 볼 수 있고 밖을 보아야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있고 그것을 알아야 나의 할 일을 할 수 있으며, 때로는 대처하고 때로

는 동행하며, 때로는 그 잘못된 길에서 건져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환자의 신체 내부를 들여다 보지 않고 환자의 종양을 제거 하려 할 때 필연적으로 사고가 발생하는 것처럼, 가려지거나 편향된 시각으로 다원주의를 만날 때 우리는 복음의 본질과는 관계없는 "껍데기"만 보고 그 내용을 續斷하여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키라"는 성서의 명령에 忠直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01/ 2/20 동아일보 A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