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문화재단/다석류영모(多夕柳永模.1890~1981)

이사람의 수행법 | 다석 유영모 | 살림도방

▪살림문화재단▪ 2012. 8. 11. 02:36

 

이사람의 수행법 | 다석 유영모

글 : 박영호

 


멸망의 생명 주고 영원한 생명 받다.

다석은 하루를 곧 일생처럼 살았다. 아침은 봄이니 꿇어앉아 동서의 고전을 보며, 낮은 여름이니 열심히 열음질(농사)을 하고, 저녁은 가을이니 겸허하게 갈무리(식사)를 하고, 밤은 겨울이니 깊은 잠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는 한번 앉으면 몇 시간이고 정좌를 하고, 평생 차를 타지 않고 걸어만 다녔으며, 하루 한 끼만 먹었다. 그에게 있어 ?오늘?은 언제나 ?오! 늘(영원)? 이었다.


다석 류영모(1890~1981)는 91살(3만2천일)까지 살았다. 류영모의 장수한 생애도 영원에 비기면 별똥별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찰나에 지나지 않지만 촌각에 비기면 파란만장한 대장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일왕불래一往不來의 이 삶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류영모의 생애와 사상을 통해 한번 돌아볼 수 있을 듯 하다.


서른살을 넘기기 어렵다 했지만

류영모의 형제 자매는 스무살 이전에 요절하였고, 영모, 영철 두 형제만 환갑을 넘겼다. 류영모는 요절하는 동기들의 모습을 보면서 일찍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류영모 자신도 서른살을 넘기기 어렵다는 말을 의사로부터 들은 터였다. 그래서 류영모는 죽음이 언제나 그림자처럼 자신의 뒤를 쫓고 있는 것을 의식하면서 살았다. 키에르케고르는 7형제 가운데 5형제가 요절하고 남은 두 아들도 허약하였는데, 류영모에 비견할 바가 못된다. 키에르케고르는 단독자單獨者가 되어야 한다는 우수憂愁의 철인이 되었고, 류영모는 생사를 초월한 참사람이 되었다.

죽음은 어느 누구의 뒤도 다 쫓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의식하지 않은 채 죽지 않을 것처럼 살고 있다. 그것은 자신을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이다.

류영모는 ?이 몸생명은 거짓 나이다. 우리는 참나인 얼생명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할 일은 참나인 얼나를 찾는 것이다. 거짓 나인 몸나는 죽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거짓 나인 몸을 섬기고 연명하는 일에만 골몰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헛일에 지나지 않는다. 몸만을 위해 살다가 죽으면 정말 억울할 것이다. 그러니 밥 먹고 똥 누고 하는 이 일을 오래 해보자고 애쓰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우리가 이렇게 할닥할닥 목구멍으로 숨을 쉬어야 사는 몸나는 참 생명이 아니다. 언젠가는 조만간에 죽고 만다. 얼(성령)을 숨쉬는 얼나가 참 생명이다. 얼나는 나지 않고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깨달았다면 몸이야 언제 죽어도 좋은 것이다?(다석어록)라고 하였다.

이러한 말은 나서 죽는 몸생명에서, 나지 않고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솟난 체험이 없는 사람은 할 수 없는 말이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얼나를 깨달은 이는 몸나의 생사에는 초연할 수 있다. 이러한 구경각究竟覺에 이르는 것을 석가는 해탈解脫(moksha)이라 하고 예수는 자유自由라고 하였다. 그래서 석가는 죽음을 앞두고 말하기를 ?이 세상(三界)은 무상無常한 것이다. 항상 근심이 있고 이 몸은 괴로움의 덩어리다. 나는 이것을 여의고 참나를 증득證得하여 이미 모든 고통을 벗어났다. 그러므로 참나로는 늙음도 없고 병도 없으며 죽음도 없고 수명壽命이 다 함도 없다(불반열반경)?고 하였던 것이다.


얼나는 죽음이 없다

예수는 죽음을 앞두고 말하기를 ?내 말을 듣고서 (각자) 제게로 (하느님이) 보내신 이(얼나, 성령)를 믿는(깨달은)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멸망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몸생명)에서 생명(얼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 5:24)?고 하였다.

류영모는 죽음(사망예정일)을 앞두고 말하기를 ?얼나로는 죽음은 없다. 그런데 얼나를 깨닫지 못한 이들은 죽음을 무서워한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육체적 생각을 내던져야 한다. 몸으로 죽기를 무서워하여 육체에 매여 몸의 종노릇을 하는 모든 이를 놓아주려 하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다.(다석어록)?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엇보다 먼저 이루어야 하는 것은 몸나에서 얼나로 솟나는 생명의 전기轉機인 것이다. 석가가 보드가야에서, 예수가 광야에서, 톨스토이와 류영모가 52살에 이룬 깨달음이 바로 이 생명의 전기를 말하는 것이다. 생명의 전기를 맞기 전에는 건강하다 안하다는 말할 자격도 없는 것이다. 조만간 죽어버릴 몸의 건강이 참 건강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몸이 좀 튼튼하다고 뽐내는 것은 그야말로 눈감고 아웅하는 자기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레슬링의 박치기왕 김일이나 권투계의 무적의 황제 알리의 현재 건강 상태가 어떠한가.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몸이 건강한 것은 소건강小建康이다. 이 몸뚱이를 벗어버리고 얼나로 돌아가는 것이 대건강大建康이다. 이 몸은 얼마 전에 어쩌다가 부모님의 정혈精血로 시작되어 조만간 비누거품처럼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다석어록)?

참나眞我인 얼나(靈我․法身)를 깨달은 류영모에게 몸은 짐승으로 얼나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짐승인 몸나는 적당하게 길러서 부려먹어야지 지나치게 섬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몸에 대한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만이 아니라 비도非道이다. 요즘 몸을 위해 좋은 음식을 너무 먹이고 뿌린 것을 거둬 먹지 않고 게으름을 피워 비만증에 걸린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짐승도 너무 먹이면 자귀에 걸려 병신이 된다.



류영모는 1901년 부터 민족정신의 메카 오산학교에 부임해 과학을 가르쳤다.

 

 

(몸은 얼나의 심부름꾼

류영모는 ?몸 사람으로는 호기심에 살맛(肉味) 입맛(口味)을 찾아 다니는 짐승이다. 그래서 몸의 본성은 악을 저지르려고 한다. 하느님의 아들인 얼 사람으로는 하느님께로 나아가려고 한다. 짐승을 기를 때는 우리가 쓸만큼 사랑하고 길러야지 더 이상 정성을 들일 필요가 없다. 참나(얼나)를 위해 내 몸을 길러야지 이 몸을 지나치게 사랑하고 여기에다 삶의 전 목적을 두어서는 안된다. 하느님의 얼이 어째서 이 짐승 속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느님의 얼을 기르고 받들기 위한 한도 안에서 내 몸을 건강하게 해야지 몸을 전 목적으로 해서는 안된다. 본디 짐승을 기르는 목적은 부리고 쓰기 위해서이다. 얼나는 항상 하느님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오관五官 사지四肢로 된 몸나 밖에 모른다. 우리가 이 육근六根에 붙잡히면 이 짐승(몸)에게 잡아먹혀버린다. 이 짐승을 따르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이 몸을 다스리고 부려야 한다? 다석어록)고 하였다.

김유신 장군이 사나운 야생의 용마를 길들여 타듯이 얼나는 몸나의 짐승 성질을 다스려 부려야 한다. 짐승 성질의 3요소는 탐욕貪欲 진에瞋 , 치정痴情이라는 삼독三毒을 가리킨다.

탐貪 (avarice)은 짐승의 먹기(feeding)이다. 아이가 젖을 빠는 것에서부터 공직자들이 뇌물을 먹는 것까지가 몽땅 탐욕이다. 사람들은 먹자판(잔치)이 벌어졌다하면 장터처럼 몰려든다.

진瞋(anger)이란 성내어 싸우는 것이다. 아이들의 따돌리기에서부터 국제 전쟁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진이다. 사람들은 싸움판(경기)이 벌어졌다면 또한 구름처럼 몰려든다. 치痴 (lust)는 남자 여자의 교합(sex)이다. 철없는 남녀의 풋사랑에서 색마들의 엽색행각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치이다. 음란외설물이라면 서로 보려고 불티가 나게 마련이다. 오늘날 이 사회를 혼란케 하고 인류의 역사를 암담케하는 것은 절제되지 못한 사람들의 수성獸性 때문인 것이다.

이 수성을 잘 다스리는 얼나의 능력을 예수는 권능(에크수이아, authority)이라 하고, 중용에서는 중절中節이라 하고, 석가는 삼학三學이라고 한다. 류영모는 ?사람은 분명 짐승인데 짐승의 생각이나 노릇을 하지 않음이 얼나로 솟나는 우리의 길이다. 우리는 날마다 탐진치 삼독과 싸워야 한다?(다석어록)고 말하였다.


탐진치를 잊은 일일일식의 삶

류영모는 탐욕을 이기기 위하여 일일일식一日一食을 하였다. 그리고 사회의 병리현상인 부귀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농촌으로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 몸삶은 겨우겨우 살면 된다는 것이다. 진에를 버리기 위해 성내는 것을 버렸다. 류영모는 다른 사람들과 다투는 일이 없었지만 가족들에게도 노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마음 속에 언제나 진리의 기쁨이 샘솟았다. 이것을 류영모는 ?누김의 기쁨?이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치우痴愚를 범하지 않기 위해 아내와 해혼解婚을 하고 성생활을 끊었다. 그 전부터 외도라고는 몰랐다.


 

다석유영모는 견성한 목사 김흥호 교수와 함석헌 선생의 스승으로 잘알려져 있다.

 

 

류영모는 이렇게 적게 먹고, 성내지 않고, 늘 기쁨으로 살며, 성생활을 끊고 금욕생활을 하였다. 그는 의사가 서른 살을 넘기기 어렵다고 하여 젊어서부터 나름대로 건강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우리나라 전래의 건강서적과 일본의 책을 읽었다. 그래서 스무살 전후부터 냉수마찰을 하고, 무릎 꿇고 앉기를 하고, 단전호흡을 하고, 걷기 운동을 하였다. 그리하여 감기에 걸리는 일조차 없이 약국이나 병원을 모르고 살았다. 거기에 일일일식, 금욕생활, 널판 위에서 잠자기, 기쁨으로 노하지 않는 것이 보태어졌으니 류영모의 91살 장수가 결코 우연만은 아니다. 류영모는 건강을 자신의 장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알리는 데 쓰고자 하였다.

왜소하여 허약한 체격을 가진 그는 스포츠라고는 몰랐다. 거대하며 강인한 체격을 가진 김교신은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두 사람은 11살의 나이 차이를 떠나 문경지교刎頸之交로 사귀었다. 그런데 김교신은 44살을 살았고, 류영모는 91살을 살았다.

얼나를 깨달은 이가 예수나 간디처럼 박해를 받지 않았을 때는 대개 장수하였다. 남의 집에 가서 빌어먹고 살은 석가는 80살을 살았고, 이 나라 저 나라로 떠돌아 다녀 앉은 자리 데울 겨를이 없었다는 공자가 73살을 살았다. 톨스토이가 82살을 살고 슈바이처가 91살을 살았다. 류영모가 자신이 오래 살게 된 데 대하여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 몸이란 멸망할 물질이지만 건강하면 영원생명 비슷하다. 이 몸도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만나면 꽤 부지해 간다. 어쨌든 위(하느님)에서 쓴다면 나처럼 오래 간다. 이게 내가 잘해서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건지 분간을 못한다. 어디까지나 위(하느님)에서 하는 것이지, 어디까지가 내가 하는 것인지 나는 모른다?(다석어록)

사람이 참되게 살자면 재물을 바로 쓸 줄 알고, 건강을 바로 쓸 줄 알고, 시간을 바로 쓸 줄 알고 생각을 바로 쓸 줄 알아야 한다. 유명한 탈옥수 신창원의 체력을 출중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 건강한 체력을 올바르게 썼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의 건강을 도모하기에 앞서 나의 건강을 바르게 쓸 정신을 길러야 할 것이다.



 

글 박영호

현재 성천문화재단 다석 사상연구위원으로 있는 박영호 선생은 1959년부터 1981년까지 20여 년 동안 다석에게 배워 졸업장을 받은 유일한 제자이다. 저서로 <다석 유영모의 생애와 사상> <다석의 생각과 믿음> 등이 있다. 류영모는 1901년부터 민족정신의 메카 오산학교에 부임해 과학을 가르쳤다. 다석 류영모는 스무살 전후부터 냉수마찰을 하고, 무릎 꿇고 앉기를 하고, 단전호흡을 하고, 걷기 운동을 하였다. 거기에 일일일식, 금욕생활, 널판 위에서 잠자기, 기쁨으로 노하지 않는 것이 보태어졌으니 그의 91살 장수가 결코 우연만은 아니다. 류영모는 건강을 자신의 장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알리는 데 쓰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