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문화재단/다석류영모(多夕柳永模.1890~1981)

다석 유영모 선생의 예수관 / [정양모신부]/다석채플

▪살림문화재단▪ 2012. 8. 30. 04:57

 

다석 유영모 선생의 예수관

[마태복음 11:25~30]



정양모 신부




1. "예수가 제일 좋다."

다석 유영모 선생(多夕 柳永模, 1890∼1981)은 동서고금의 성현들을 다 존경했지만 그 중에서 예수를 가장 높이 받들었습니다. 선생은 1942년 1월 4일 중생체험을 하고 나서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한 6,68)라는 표제 아래 시편 11수를 빚어『성서조선』158호(1942년 3월호)에 기고하셨는데, 그 첫 머리에서 타종교를 깎아 내리고 예수를 치켜세웠다. 노자신(老子身), 석가심(釋迦心), 공자가(公子家)는 죄다 신심이 부족하고 오직 "인자(人子) 예수" 홀로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오롯이 받든 하느님의 독생자시라고 갈파하셨습니다.

"말씀으로 몸 이루고 뜻을 받아 맘하시니
하늘 밖엔 집이 없고 걸음걸인 참과 옳음
뵈오니 한나신 예수신가 하노라!"

유교가 부자유친을 가족 범위에 한정한 나머지 하느님에게 효도하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라고 선생은 단정하셨습니다.

"사람이 한아님에 대한 효를 잊어버린 지 오래이다.
아버지를 하늘 같이 아는 것을 효라 한다. ... 부모보다
한아님 아버지(天父)가 먼저라야 한다. 천명(天命)에 매달린 유교가 망천(忘天)을 하여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서 유교가 맥을 쓰지 못한다."
(『다석어록』, 홍익재, 1993, 227쪽)

언젠가 애제자 박영호가 홀로 선생을 찾아가 뵈었을 때, 유교, 불교는 하느님을 향한 부자유친 신심이 없기 때문에 미흡한 사상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예수가 제일 좋다. 부자유친(父子有親), 한아님 아버지와의 부자유친이 기독교다. 유교를 제치고 한아님 아버지와의 부자유친을 세웠다. 한아님 아버지께 유친하자 드리덤벼야 한다. 불서(佛書)는 사고무친(四顧無親)이다. 한아님 아버지와의 부자유친은 신약전서에 나타나 있다."
(박영호, 『다석 유영모의 생애와 사상』, 홍익재, 1985, 313쪽)

하느님은 오관으로 포착할 수 없는 초월자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노상 신비에 싸여 계십니다. 고맙게도 예수는 하느님을 깊이 깊이 체득하고 맑게 맑게 보여주신 까닭에 살과 피를 지닌 예수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다석은 적었습니다. 예수는 마치 하느님을 반사하는 거울과 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라 천만번 불러야 대답하신다더냐.
한마디도 말삼이사 아니하시는 한울님이시다.
날 본인 아바 보왔단 아멘 아멘이시매."
(김흥호 풀이, 『다석 유영모 명상록』, 성천문화재단. 1998, 1권 248쪽)

방금 인용한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습니다."(요한 14,9)라는 예수의 말씀은 어쩜 붓다의 말씀과 똑같을까요! "법을 보는 자는 나(붓다)를 보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보는 것이다." (南傳 니카야)



2. 예수는 하나의 그리스도일 뿐 하느님은 아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얼(=성령=성신)을 따라 삶으로서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것, 하느님의 얼을 따라 살면 누구나 그리스도가 된다는 게 다석 선생의 지론입니다.

"기독교 믿는 자는 예수만이 그리스도라 하지만 그리스도는 예수만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인 한아님으로부터 오는 성신(聖神)이다."
(『다석어록』, 344쪽)

선생은 1958년 12월 21일자 일지에서 기독명의(基督名義)란 제하의 칠언절구 한시를 남기셨는데, 김흥호는 우리말로 다음과 같이 옮겼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뜻은 정말 알기 어렵다. 정의를 어떻게 내릴 수 있겠는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뜻이라면 소아(小我)가 믿고 쫓아 갈 목적이 될 수 있고 성령의 부으심을 받았다 하면 대아(大我)가 성장하는 길이 될 것이다." (김흥호 풀이, 『다석 유영모 명상록』, 2권 164∼165쪽)

"우리는 모두 여래의 모태 혹은 씨앗을 품고 있어서 이를 일깨우고 키우기만 하면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대승불교 유식학파의 여래장 사상이 다석의 얼 사상에 영향을 끼쳤는지 궁금합니다. 선생은 예수 신성 사상을 단연코 배척했습니다. 오늘날 역사비평 방법론, 해석학 방법론을 따르는 신학자들은 요한계 문헌의 예수 신성신앙, 니케아 공의회(325년)의 예수 신성교리, 칼케돈 공의회(451년)의 예수 양성교리를 신화적 발상 또는 신앙고백적 발상으로 평가하곤 하는데, 다석 선생은 예수 신성신앙을 분명히 배격하셨습니다. 다석은 동양의 도인으로서, 사람을 지나치게 공경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와 우리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경천애인 의식과 실천 정도에 차이가 있다는 게 다석의 생각이었습니다.

"사람을 숭배하여서는 안 된다. 그 앞에 절을 할 분은 참되신 한아님뿐이다. 종교는 사람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 한아님을 바로 한아님으로 깨닫지 못하니까, 사람더러 한아님 돼달라는 게 사람을 숭배하는 이유이다. 예수를 한아님 자리에 올려놓는 것도 이 때문이고 가톨릭이 마리아를 숭배하는 것도 이 까닭이다." (『다석어록』, 287쪽)

"예수하고 우리하고 차원이 다른 게 아니다. 예수, 석가는 우리와 똑같다. 예수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고 하였다고 우리보다 월등한 것은 아니다." (『다석어록』, 300쪽)



3. 예수의 죽음은 의인의 죽임이지 대속죄 죽음이 아니다.

신약성서 전승자들과 필자들은 거의 다 예수의 죽음을 대속죄적 죽음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루가는 신명기적 사관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은 전에 하느님이 보내신 의인들과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듯이 이제 의인인 예수를 처형했다고 보았습니다.(사도 7.2∼53, 특히 7,52∼53) 다석은 의식적이었는지 무의식 직감이었는지 예수의 죽음을 루가처럼 풀이하여 예수는 의롭게 사신 결과 비명횡사하셨다고 보았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린 꽃다운 피가 꽃피(花血)이다. 한 마디로 의인이 흘린 피다. 아무리 흉악한 세상도 의인이 흘린 꽃피로 씻으면 정결케 된다. 세상을 의롭게 하는 것은 의인의 피뿐이다. 의로운 피를 흘리는 것이 한아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그것이 성숙의 표다. 성숙이란 한아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한아님의 아들이란 몸의 죽음을 넘어선 얼의 나다."
(『다석어록』, 165∼166쪽)

"예수가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린 것을 믿으면 영생한다고 믿는 것은 나와 상관없다." (『다석어록』, 343∼344쪽)

"우리가 이땅에 있을 동안은 어쩔 수 없이 땅에 부딪친다. 그러나 예수가 위로 오르신 것처럼 나도 올라감을 믿는다. 예수와 나는 이 점에서만 관계가 있다. 그밖에 속죄니 하는 건 믿지도 상관도 없다."
(『다석어록』, 368쪽)



4. 예수를 본 받자

다석은 1959년 8월 23일 일지에 옛 말투로 예수추종, 예수모방을 강조했는데 다음과 같이 요즘 우리말로 다듬어 봅니다.

"언니, 임이 되신 내 언니를 따라가기만 하며 됩니다, 되요! 아바 계신 우리 고향으로 가는 따위 일도 예수는 잘 아신다! 이대로 우리를 올리면서 아바께 돌아가신 예수를 머리에 이는 것 뿐이다."
(『다석 유영모 명상록』, 제2권, 275∼276쪽 참조)

그럼 예수의 어떤 면을 본받을까, 묻게 됩니다. 예수 마냥 모름지기 하느님의 얼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의 경천애인(敬天愛人)을 본받아 마땅하다고 다석은 보았습니다.

"사람의 본연의 모습은 섬기에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 가운데서 참으로 한아님을 섬기고 사람을 섬김에 가장 으뜸가는 목숨은 그리스도가 아닐까. 한아님과 인류를 섬김을 자기의 생명으로 삼으신 이가 그리스도다. 온 인류로 하여금 그리스도인 영원한 생명으로 살도록 본을 보이기 위해서 섬김에 섬기신 이가 그리스도다. 이에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기리고 찬미하는 거이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다석어록』, 39쪽)

우리가 피상적으로 예수를 본받아서는 안 되고 하느님의 얼을 따라 산 예수의 참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고 다석은 말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의 신령한 모습, 영험한 모습, 영검한 모습을 본받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따르고 그를 쳐다보는 것은 그의 색신(色身)을 보고 따르자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내 속에 있는 속알, 곧 한아님의 씨가 참 생명임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므로 먼저 내 속에 있는 속알에 따라야 한다. 그 속알이 참 예수의 생명이요, 나의 생명이다. 몸으로는 예수의 몸도 내 몸과 같이 죽을 껍데기지 별 수 없다." (『다석어록』, 308쪽)

예수를 본받음에 있어 예수에게 머물지 말고 예수를 바탕으로 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다석은 주장합니다. 예수를 익힌 다음(溫故)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知新). 요즘 말로 하자면 역사비평에 머물지 말고 해석학적 성찰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참으로 마지막까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훌륭한 스승을 가리는 택덕사(擇德師)에도 마찬가지다. 내 선생이라고는 예수 한 분밖에 없다. 그런 예수를 선생으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나는 선생이라고는 예수 한 분밖에 모시지 않는다. ...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 있다. 묵은 것에 익숙해야 새 힘이 나온다. 스승의 말을 녹음해 놓은 것을 듣기만 한다는 것이 아니다. 듣고 배워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것이 사제관계가 되고 여기에서 인도(仁道)가 새로 서게 된다." (『다석어록』, 138쪽)

"일반적으로 선생을 하늘과도 같이 대단하게 생각하는데 대가(大家) 선생이라고 모순이 없는 것은 아니다. 원고를 마치려면 마침내 한아님이 마칠 것이다. 그것은 왜 그러냐하면 시작이 한아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사람은 한아님의 빛의 끄트머리 또는 붓의 끄트머리로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 예수가 말하기를, 이 다음 너희가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라 하였다. 이것이 알 수 없는 말 같으나 예수 당신이 해놓고 간 것이 미정고(未定稿)이니까, 이것을 계승하는 후대의 사람이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당신이 가까이 하신 '하나'의 존재를 후대가 더 가깝게 마침내 보고 이르는 견지(見地)까지 갈 것이라는 말이다."
(『다석어록』, 257쪽)

예수의 육신이 이승을 떠나신지 어언 2천 년. 그분보다 더 위대한 분은 좀체로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진실히 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들을 하게 될 뿐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요한 14,12)라는 말씀 따라 예수보다 더 큰일들을 할 분은 언제 어디에 출현할까요? 혹시 다석이 그런 분 아닐까 하는 물임이 앞으로 제기되곤 할 것입니다.

이제 강론을 마무리하면서 감히 선언합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그리스도교계의 화두로 등장한 신앙의 토착화와 현대화, 종교간의 대화와 종교다원주의에 관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위대한 영성가 다석을 비켜갈 수 없을 것이다. 다석은 직감으로 인생과 신앙의 핵심을 꿰뚫어 본 해석학의 도사였다고 여겨집니다. "동방에서 빛이 비친다."(Lux ex oriente)는 표어를 체현이라도 하듯이, 동방의 횃불로 활활 타오르는 큰 스승이 바로 다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