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문화재단/다석류영모(多夕柳永模.1890~1981)

한자와 한문의 유래/다석채플

▪살림문화재단▪ 2012. 8. 30. 05:12

 

1. 한자와 한문의 발달

1. 창힐이란 누구인가 ?
三皇五帝의 신하중에서 倉(吉頁)(창힐)이 글자를 처음으로 창제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서 예문지에 보면 창힐이란 실재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닌 가상인물이다. 倉은 창조하다이고 (힐)은 吉과 頁로 머리가 좋다의 뜻이므로 결국 머리가 좋은 누군가가 만들었다는 뜻이다. 거대한 문자 체계를 한사람이 단독으로 만들어 낼 수는 없다. 문화의 결정체라 할 문자는 더더군다나 그렇다.

小人과 君子이야기
옛날 사람들은 사람을 둘로 나누어 생각했다. 소인과 군자로. 소인은 원뜻이 작은 사람의 의미이지만 키가 작다거나 숏다리의 뜻이라기 보다는 마음씀씀이가 작은 사람 곧 쫌생원,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사람이다. 군자는 王子의 뜻이 아니라 마음이 넓은 사람이다. 소인은 상대방이 잘못을 저지르면 참지 못하고 바로 욕을 해버린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군자는 상대방이 개기고 달려들어도 욕하지 않는다. 이 인간이 오늘 뭘 잘못 먹었나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그 사람을 동정하고 용서하려 한다. 그러므로 소인의 입에서는 욕밖에 나올 것이 없지만 군자의 입에서는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고 용서하는 말들 곧 좋은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옛날 사람들은 군자를 한 마디로 요약해서 선비(士)라고 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가장 전형적인 예로, 길하다의 뜻을 가진 「吉」은 곧 선비의 말은 좋다의 뜻이다.
三皇五帝란 神農氏, 卜羲氏, 軒轅氏와 소호, 전욱, 제곡, 堯, 舜을 가리킨다. 신농씨는 글자에서 보듯이 농사를 가르친 사람이다. 그래서 그 모양이 괴물로 머리는 소이고, 그 이하는 사람(人身牛首)이었다. 火德에 의해 임금이 된 까닭에 炎帝라고 한다. 醫療, 樂師, 釀造, 交易, 商業의 신이다. 복희씨는 사람의 머리를 가졌으나 하체는 뱀을 형상하는데 뱀은 다산으로 농사와 관련이 있고 또, 복희의 업적으로는 주역의 시작인 八卦를 만들었다. 문명의 발전정도를 보여준다. 이 외에도 그물을 만들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친 사람이다. 신농씨와 복희씨의 모습이 동물의 형상을 띠고 있는 것은 농업이라는 것이 자연과 별개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龍이야기
복희씨가 뱀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 것은 용과 관련이 있다. 뱀을 아주 단순하게 그리면 구불구불한 곡선이 그려지고 하천을 단순하게 그리면 마찬가지로 구불구불한 곡선이 그려진다. 뱀의 모습은 곧 하천을 상징하는 것이고 뱀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상징을 부여해 목에 갈기도 그려넣고, 다리도 주고, 뿔도 붙이고, 입에 알사탕도 하나 물려주면 용이 된다. 서양 사람들의 Dragon은 공룡 모습에다가 불을 뿜어 사람을 해치는 동물로 나온다. 서양의 용은 성경에 나오는 바다 괴물 레비아탄의 변형으로 사람에게 해로운 사탄의 자식일 뿐이다. 그러나 동양의 용은 다르다. 바람과 구름과 비를 뿌리는 농사에 유익한 존재이다. 하천, 뱀, 용 모두 농경에 관련된 것들로 복희씨의 모습이 뱀의 형상을 지닌 것도 바로 농경신의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軒轅氏 곧 黃帝는 다르다. 온전한 사람의 모습으로 왔으며 하는 일도 위의 두 사람과 조금은 다른데, 먼저 황제는 글자를 만들게 했고, 들판에 나 있는 모든 잡초들과 나무들을 닥치는대로 보이는대로 입에 넣어 그것이 약초인지 독초인지를 구분했다. 한의대에 가면 황제내경이라는 책을 배우게 되는데 그것이 정말 황제의 저서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진짜 황제가 쓴 것이라면 수천년이 지난 현대에도 유용하게 쓰이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황제는 어느날 잠자리에서 일어나보니 몸이 뻑적지근하고 골이 띵한 게 오래 살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온 백성을 평안하게 다스려야 할 일들이 아직도 산더미같이 많은데 수명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황제는 걱정했고 곁에 있던 素女에게 물었더니 소녀는 양생법으로 방중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문자, 의료, 문화에 대한 황제의 공로는 바로 앞의 두 조상들과는 다른 문화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이었고 그러므로 동물의 모습을 가지고 세상에 나오지 않고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2. 甲骨文과 金石文

중국문화는 황하문명을 시작으로 역사적으로 고증이 가능한 최초의 문자인 甲骨文字를 사용하였다. 殷나라의 갑골문은 占을 치는 도구로 사용되었고, 몽고에는 지금도 남아 있다. 처음에 갑골은 龍骨이라 하여 한약재로 거래되었으며 우연히 옛날 殷의 글자임을 밝혀졌다. 象形文字로써 한자의 表意文字 특성을 가지고 있다. 갑골문자가 밝혀짐으로써 은대의 중국인의 생활 풍습과 당시인의 가치관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갑골문의 발견
중국의 한 관리가 황하 상류지역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홍수를 만났다. 며칠을 쉬다 관리는 다시 여행을 떠나는데 발부리에 걸리는 개 있어 주워보니 뼉다귀였다. 그런데 그것에 이상한 글자들이 써 있는게 아닌가 ? 그림같기도 하고 글자같기도 한 것이 개발새발 써있는 모양을 보고 학자는 이상히 여겼다. 주위에 그러한 것이 1,000여개나 널려 있었다. 그래서 그걸 다 주워 모았다. 해석이 불가능한 것이지만 자기는 불가능할 지라도 어느 누군가 머리 비상한사람이 그것을 해석할 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자기집 창고에 쌓아두었다. 20여년이 흐른 후 그 집을 드나들던 제자 하나가 그것을 보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공통된 요소를 뽑아 재해석하여 그것이 갑골문임을 밝혀냈다. 그래서 전설상의 왕조로 알려진 은과 일치하여 세계사는 다시 쓰여진 것이다.


酒池肉林
酒池肉林은 말 그대로 술을 연못에 저장하여 두고 나무에 구운 고기를 주렁 주렁 메달게 했다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이 술을 담는 것은 오늘날과 현저하게 다르다. 누룩을 넣고 따뜻한 방안에 장시간 발효시켜 술을 얻는 시대라면 모를까 사람이 일일이 입으로 씹어 발효시킨다면 그 술이 보통사람들은 쉽게 마실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은나라 마지막 임금 주왕이 사치가 심한 것을 알 수 있다. 고기도 마찬가지로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순전히 채소반찬 일색, 뱀나올까 두려운 잔디구장이었는데 그 보다 더 오랜 은나라시기에 고기는 그야말로 사치였다.
이런 호화판 생활에 16세가 되지 못한 미동과 미녀를 홀딱 벗겨 주지육림에 들여보내 맨날맨날 그짓만 하게 하고 자기는 이쁜 첩과 높은 망루 위에 올라 구경하며 놀았다고 한다. 이런 퇴폐스런 행위가 곧 은나라의 멸망을 가져온 것이고 당연하다는 인식을 당시 사람들에게 심어주었는데 시대가 바뀌어 갑골문이 해독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은나라 주왕의 평가가 달라졌다.
초기의 권력관계는 왕보다 무당의 권력이 더 막강했다. 무당은 합리적으로 점을 칠 수 있었다. 일년동안 백성들이 농사를 얼마나 열심히 지었는지를 보고 풍흉을 결정하고, 계절의 변화를 수년간 관찰한 것을 토대로 비가 올지 안올지를 결정하고 군대의 장비와 사기, 숫자를 보고 전쟁의 승패여부를 결정했다. 그런데 후기에 가면 왕의 권력이 대빵 쎄졌다. 왕이 전쟁을 벌일 의사가 있다면 무당은 더 이상 합리적으로 자기 일을 수행하지 못하고 왕의 권력에 굴복하고 말 것이다. 전쟁의 승패여부를 물어 무당이 "지겠는데요"라고 말한다면 무당은 모가지 댕강감이다.
갑골문을 해독한 결과 은나라 주왕은 시도 때도 없이 전쟁을 일삼았는데 점괘상에서는 항상 승리한다고 예언되었고 나가서 싸워서는 깨박 터지고 돌아왔다. 춘추시대에 제나라 환공이 왕위에 올랐다. 환공은 어렸을 때 자기 아버지에게 버림받아 외국으로 추방당하였다. 첩에게 푹빠진 아버지가 아들을 버린 것이지만 그래서 아들은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외국사람들은 환공을 인정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천대도 많이 받았는데 이웃나라가 그 버릇을 고치지 않고 계속 껄떡거리자 한번 버릇을 고쳐주고자 했다. 환공이 관중을 불러 상의하니 관중왈 3년동안 백성들을 잘 보살피고 어루만져 일치단결하게 만들면 전쟁을 벌일 수는 있지만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3년 동안 내치에 힘쓴 제환공은 관중에게 전쟁을 하고 싶다고 하자 관중왈 전쟁에 승리하고자 하신다면 앞으로 삼년을 외교에 힘써 이웃나라 임금이 백성을 가르치매 부모에게 소홀하면 그 잘못을 깨우쳐주고, 잘한 정치가 있으면 금은보화를 주어 포상하여 임금님이 나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천하의 온백성들을 위해 불의를 정벌한다는 대의명분을 쌓으시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라고 간하여 총 6년을 기다린 후에 비로소 싸웠다.
서쪽에서 오랑캐가 마침 쳐들어왔다. 환공은 온 제후들에게 찌라시를 돌려 오랑캐를 막아내자고 호소했다. 거만한 사람이 요구하는 것과는 다르게 대의명분도 확실하고 인격도 온전한 환공이 요구하는 것에 제후들이 일치단결하여 오랑캐를 몰아내자 공자는 논어에서 관중을 평가하기를 관중이 없었다면 중국은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복한 사람이 정복당한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듯이 서융이 중국을 전역을 초토화시키고 있었을 때 그것이 조금만 더 오래 끌었다면 오랑캐 스타일로 머리를 활딱 밀어버리고 문신을 하고 살았을 거라는 말이다. 그런데 주왕은 일년에도 수차례 수십년동안 전쟁을 일삼아 나라를 잃었는데 주지육림과 같은 유언비어가 널리 유포된 것은 당시 사람들이 하극상을 싫어하기 때문에 주나라 사람들이 날조한 것이다. 군대에서는 고참이 아무리 잘못했어도 하급자가 개기면 두말없이 영창이다. 당시 주는 은을 섬기는 신하의 나라로 임금의 나라를 쳤으니 그 당위는 옳다 여겼지만 마음으로 심복하지는 못했다.
어떤 사람에게 치명타를 주기 위해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악랄한 방법은 도덕성을 훼손시키는 것이다. 여러분 친구들 중에 현재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가정상 담임 선생님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23번 이 도둑놈아 우리반에서 오늘 만원을 훔쳐갔지 빨리 내놔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
도둑질이란 어렸을 때에는 용서가 되는데 나이가 들면 처벌을 받게 된다. 윤리적인 가치관이 형성되고 난 뒤에 옳고 그른 것을 명확하게 헤아릴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않는다면 당연히 처벌받는 것이다. 담임선생님이 증거가 있든 없든 23번 학생이 도둑으로 몰렸을 때 여러분들은 그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 도둑놈을 친구라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따돌릴 것이다.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일인 것이다.
선생님이 순진한 얼굴로 여러분을 대했는데 어느날 저녁 술집여자랑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장미장을 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다면 여러분은 어쩌겠는가 ? 아침 출근시간에 멀쩡한 모습으로 들어와 업무를 잘 보고 있으면 정력 끝내준다고 생각하는가 ? 아니다. 분명 순진한 척 내숭은 다 떨고 어떻게 저런 모습으로 뻔뻔하게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할 것이다. 윤리상 그럴 수 없으니까 말이다.
교장선생님이 여러분 여자친구들을 초청해서 운동장에 텐트하나씩 쳐주고 그 속에서 밤을 지새게 했다면 여러분 부모들은 어떤 생각을 갖게 되는가 ? 우리 교장선생님이 얘네들 때는 여자들이 많이 부족하다던데 미리미리 결혼할 상대를 찾아주려는 훌륭한 배려구나라고 생각하겠는가 ? 아니다. 우리 아이들을 타락시켰다고 항의할 것이다. 주지육림이 그렇다. 어린 자녀들을 성적으로 타락시킨 왕이라면 하극상일지라도 갈아치우는 것이 낳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바로 주나라 사람들도 은나라가 나라를 잃은 것이 단지 전쟁을 많이 해서 국력이 쇠약해지고 힘을 잃어 나라를 잃은 것이 아니라 도덕성에 가장 치명적인 결함이 있어 하늘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짓거리를 응징한 것으로 선전한 것이라고 한다.

3. 春秋戰國時代의 焚書坑儒와 阿房宮 放火

춘추 전국 시대의 제자백가는 학문의 발전과 인간의 복잡미묘한 감정과 사상을 표현하기 위한 언어의 발달을 가져왔다. 춘추전국시대는 중국 역사에 있어서 가장 혼란한 시기였고, 이러한 사회혼란은 諸者百家라는 수많은 사상가를 등장시켜 사회를 통제해보려 하였는데, 이때에 사상가들이 서로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자기들의 생각들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기존의 言語와 文字를 발달시켰다고 볼 수 있다.
춘추와 전국시기는 똑같이 혼란의 시기였지만 차이가 있다. 알맹이가 없으면서 형식이 지켜지는 시대가 춘추이고, 형식마저 무시되는 시대가 전국이다. 선생님이 23번 학생을 불러 세웠더니 그 학생 마음속으로 씨발씨발하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예, 그렇습니다하고 대답한다면 이는 춘추시기이다. 그런데 23번 학생이 이 씨 하면서 멱살잡고 뒤흔들면 그 시대는 전국이다.

이러한 혼란 시기는 그에 따라 안정의 시기로 되돌리려는 방식이 여러차이가 있지만 둘 다 혼란의 시기로 파악하고 생각해보면 먼저 유가는 仁을 주장하였다. 인은 사랑이다. 초등학교때 담임선생님이 부처의 자비도 사랑, 공자의 인도 사랑, 예수의 사랑도 사랑이니까 3대 성인 모두가 주장한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그런데 공자의 인도 예수의 사랑인가.
예수는 유대의 모세율법에 따르는 구약과 복음을 따르는 신약을 구분하였다. 모세의 율법은 함무라비 법전과 비슷하여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원칙을 따른다. 어떤 학생이 내 팔을 잡아 비틀어 뽑아버리면 나는 억울해서 함무라비를 찾아간다. 함무라비는 어 그래 이 새끼 이리와 하고 팔을 비틀어 뽑아 버린다. 이 학생이 내 눈을 멀게 했다면 마찬가지로 눈을 뽑는 시대이다. 그런데 예수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네 원수가 너를 해하면 열배, 백배 갚아주라고 주문했는가 ? 아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네 왼쪽 뺨싸대기를 때리면 오른쪽도 내주어라 라고 가르쳤다. 더 이상 보복이 아닌 원수마져도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곧 복음인 것이다. 그런데 이 예수의 말이 공자의 생각과 같은가 ? 아니다. 공자의 사랑은 효도이다. 효도속에는 자식이 아비에 대한 사랑뿐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사랑까지 담고 있다.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혼란을 공자는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보았고 아주 어렸을 때에 엄마에게 배우는 사랑, 부모가 베푸는 사랑을 잘 배워 점차적으로 그 범위를 형제, 친척, 마을, 지역, 국가로 넓혀가기를 가르쳤다.
주나라는 제후들을 파견할 때 아들을 보냈다. 그 넓은 영토를 혼자서 다스리기 어려워 보낸 것인데 시기가 오래되자 서로 싸움이 생겨났고 혼란이 생겼다. 이 혼란에 대한 방안은 무엇인가 ? 바로 효도이다. 천자이자 아버지인 주를 효도로써 제후가 섬긴다면 춘추전국과 같은 혼란을 안정으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이다.
도가는 무위자연을 주장하였다. 인간의 욕심으로부터 비롯되는 인간의 행위가 원인이 되어 혼란이 인다고 생각한 도가는 욕심으로 인해 생기는 인간의 행동을 하지말라고 가르쳤다. 누군가의 물건을 빼앗기 위해 행동하고 빼앗기지 않기 위해 또 짱구를 쓰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갈등은 사라지고 분쟁도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일들이 인간이 사회에 몸담고 있기 때문에 비롯되는 때문에 도가는 산속에 틀어박히자는 결론에 빠져든다. 자연속에서 자연을 벗삼아 사는 생활이 욕심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가장 적절한 상태이므로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주장하고 그 상태 욕심으로 비롯되는 일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가장 자연스런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다.
묵가는 겸애설을 주장하였다. 유가와 마찬가지로 사랑이 부족해서 갈등이 생겨나므로 묵가는 서로 사랑하자고 가르친 것이다. 유가와 차이점이라면 남을 먼저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타적인 사랑을 이기적인 사랑으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으므로 묵가는 세력이 가장 컸다. 초나라가 군대를 동원하여 송나라를 치려고 할때 묵자는 직접찾아가 설득하여 군대의 진군을 막았을 정도로 현실에 깊숙히 참여하였다. 유가의 사랑은 효도가 먼저이기 때문에 군대를 동원하는 왕을 막기 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사랑이 있는지 검토하기를 요구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면 묵가는 먼저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가장 현실적인 대처방법을 실천적으로 보여주는 사상이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입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므로 군대의 행진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묵가는 진나라 시기가 되면 사라지고 만다. 아직도 묵가의 소멸은 미스테리이다.
법가는 강력한 법으로 사람들의 갈등과 다툼을 통제했다. 거미줄이나 그물망같은 법망을 넘는 사람은 무조건 사형이었다. 길거리에 떨어진 10원짜리 주운 사람은 사형이다. 진나라 법에 남의 물건을 소지한 자는 사형이기 때문이다. 강력한 법의 통제는 이런 것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조용히 해라. 해라라고 자꾸 잔소리를 해대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어느날 이 새끼 이리와 잔소리말고 엎드려 뻗쳐. 아무런 감정도 없이 창백한 표정으로 눈에 살기가 번뜩이는데다가 팔을 뒤로 제쳐 몇 대를 후려치고 나면 내가 조용히 하라고 하지 않아도 조용히 한다. 법가는 그처럼 강력한 법을 통해 백성들에게 공포를 심고 그 공포에 의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다.
이런한 사상가들의 일군이 모여서 토론을 하게 되었다. 춘추전국시기는 혼란의 시기였지만 나라를 부국강병으로 이끌기 위해 현사들을 우대한다. 많은 월급을 주고 벼슬을 주고 공간을 제공하여 토론하는 과정속에 사상이 다른 사람들끼리 모여 토론하고 그러다 보니 언어와 글자들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진시황이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국을 통일했다. 스스로 이룬 공적이 삼황보다 위대하고 오제보다 뛰어나니 皇(황)이라고도 帝(제)라고도 부를 수 없고 황제라 불러야 한다 말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기 후손은 자기의 후광을 뒤에 없고 황제노릇하는 것이니까 2세 3세라 부르고 자신은 시황제라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자부심이 대단한 인물 시황제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일 때 어떤가 ?
시황제는 법가를 채용했다. 진나라군이 강력했던 이유 중 하나는 강력한 법에 의해 통제받는 군인들이 탈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망치면 자기만 죽는 것이 아니라 줄줄이 부모형제 처자까지 죽인다. 마징가 Z가 앞에 있다면 어떤가 ? 강력한 로켓트펀치도 무섭고 가슴에서 나가는 광선도 무섭고 한 번 발로 밟으면 개구락지 되지만 도망치지 못한다. 밟혀 죽는 것도 죽는 것, 도망쳐도 죽지만 가족까지 죽는다고 생각하면 차라리 드라이버를 들고 나사를 하나씩 빼서 쓰러트리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법가의 통제는 강력했다.
진나라의 군대는 기술적으로도 엄청났다. 당시 제후국들은 창을 주무기로 삼고 있었다. 기술적인 한계로 멀리 던져 사람을 죽인다기 보다는 그저 접병전에서만 유용한 무기였던 창. 힘이 센 사람은 세사람 네사람을 달고 몇번 휘저어 날려버릴 수도 있지만 대개는 한 사람을 요리할 정도밖에는 되지 못했다. 그런데 진나라의 병사는 서쪽 오랑캐와 친해 말 잘타는 이들을 군인으로 채용해서 썼다. 그들은 5살 이전부터 말을 타 별짓을 다 할수 있을 정도였다. 활도 쓰고 칼도 쓰고 밥도 먹었다. 그들이 말을 타고 측면을 교란했다. 쇠뇌라는 무기도 동원됐다. 서양의 석궁과 비슷한데 제후들의 활보다 사정거리가 세배나 길고 파워가 청동방패를 뚫고 심장을 관통할 정도였다. 길게 차례로 줄세워 한줄 쏘고 다음 줄 쏘고 그러다보면 전쟁은 끝나있는 것이다. 제후들의 병사들이 진나라와 접병전만 기다리며 가까이 오면 뱃대지 푹 꼿아주겠다 생각하고 기다리지만 쇠뇌살이 눈탱이에도 꼿히고 가슴에도 꼿힌 병사들을 진나라 병사는 칼로 모가지 댕강댕강 자르는 것으로 정리만 하면 된 것이었다.
게다가 진시황은 도량형을 통일시켰다. 월명동에서 수레를 끌고 가다 조촌동에서 파손되면 대장장이들이 쓰는 잣대의 규격도 틀리고 모양도 틀리고 해서 다시 월명동에서 고칠 수 밖에 없었다면 진시황은 니네들 똑같은 잣대 안쓰고 똑같은 규격의 제품 안만들면 다 죽여버린다하고 통일시켰다. 그래서 월명동에서 조촌동까지 수레를 몰고 나가 고장나도 수레바퀴만 갈아끼면 수리 끝일정도로 편리해졌다. 화폐 또한 진나라의 돈이면 어디서나 통용되므로 무거운 쌀을 지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이런 자부심 강한 황제가 법가의 사상을 채택하고 있었으므로 유가의 사상가들과 대결은 불가피했다. 묵가는 이미 사라졌고, 도가는 산속에 꼭꼭 숨어라이니까 정치에 간여하지 않았는데 유가는 달랐다. 유가는 근본적으로 법가와 다르다. 유가는 어떤 사람이 잘못하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기회를 준다면 법가는 데려다 모가지를 쳐서 다른 사람을 본을 보여주는 사상이다. 진시황의 법은 곧 유가의 반발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가는 고지식해서 선왕의 예, 요순의 덕으로 통치한 방식을 들어 피켓들고 길거리로 나와 진시황 물러가라 개겼다. 진시황은 이를 묵과할 수 없어 유가가 보는 모든 책들을 수거해서 불태우고 말깨나 하는 시끄러운 선비들을 잡아들였는데 그것이 바로 분서갱유이다.
이러한 언어의 비약적인 발전이 일시에 중단된 사건이 바로 秦始皇의 焚書坑儒이다. 당시의 지식인이란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였는데 그러한 사람을 460명 잡아죽이고 중국의 고전을 불살라버린 것은 당시의 문화적 소산을 깡그리 없앤 것과 같다. 더욱이 항우는 진나라 수도 아방궁에 보관되어 있던 서적들을 아방궁과 함께 불태워버려 한자 발달의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4. 漢나라와 漢字

한나라는 중국을 통일하고 文民政治에 힘써 유교의 지식인들을 관리로 등용하고, 太學과 學校를 설치하기도 하였으며, 유교를 국교로 삼아 학문을 권장하였다. 유방과 항우의 차이는 이렇다. 항우는 몰락한 귀족출신으로 어렸을 때 칼쓰기에 열중했다. 항우가 가장 존경한 인물 삼촌 항량이 항우를 불러 글공부도 좀 하라고 가르치자 어린 항우는 사나이로 태어나 글자는 이름 석자 쓸 줄 알면 되는 것이고 그 외에는 필요 없다고 이야기했다. 난세를 살아가는데 글이란 사람의 목숨을 지켜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유방은 부유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자라 버릇이 없는 망나니중의 개망나니였다. 하라는 공부는 않하고 사고만 치고 다녔는데 항우와는 달리 난세를 다스리는 것은 주먹과 칼이지만 난세가 언젠가 평정되어 평화로운 시기가 돌아오면 세상을 글로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참모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공부를 지지리도 안했지만 유방의 장점은 사람을 부리는 힘이었다. 사람의 심리를 정확히 읽어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줄 것은 주되 받을 것은 확실하게 받으며 매정할 땐 용서가 없고 다정할 땐 한이 없었다. 그런 유방이 천하를 잡고 나서 유교를 장려하고 학교를 세운 것이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알아서 챙겨야 하나 ? 아니다. 방향만 제시해주고 참모들을 적절히 기용해서 생각을 실현할 수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진시황제의 焚書坑儒사건으로 서적과 인재와 문화가 상당부분 소실되어 있었다. 가르칠 교사도 가르칠 교재도 없는데 학교만 세워지고 학생만 있는 꼴이었다. 유방은 찌라시를 돌려 천하에 책이란 책은 다 모으고 산속에 짱박혀 도만 닦던 학자를 발굴해냈다. 가장 똑똑한 천재형 학자들은 죽어버렸지만 10명의 바보가 머리를 맞대고 숙의하면 한 명의 천재보다 낫다고 바보들 속에서 학문이 생겨났다. 바로 訓고(言古)學이다. 훈고학은 옛날 글자를 가르치는 학문이다. 바로 잃어버린 문화의 발전과 언어의 진보, 역사의 질곡을 바로 잡기 위해 일어선 학문운동이었다. 역사가 분서갱유에 의해 그쳤다면 좌절로 끝나고 말았겠지만, 그 후에 부족한 것을 메우기 위한 훈고학은 바보들의 모임으로 시작되었지만 더 큰 걸음으로 한발 내딛는 사건이었다.


여러분들도 중학교때 잘한다는 소리를 듣다 이곳에 와서 자신의 위치를 실감하고 포기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역사속의 분서갱유로 끝나고 말겠지만 마음을 다시 먹고 다시 출발하는 의미로 노력하면 훈고학에 의해 다시 찾은 영광처럼 여러분들에게도 영광의 시기는 다시 오지 않겠는가 ?
그러므로 한자를 송나라때의 글자 송자나 명나라때의 글자 명자, 청나라때의 글자 청자라 하지 않고 한자라고 하는 것이다. 한나라때에 이미 완성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중국어하고는 틀리지만 유사성이 있어, 국어와 역사, 지리, 사회, 철학, 한의학 등을 공부하려는 사람은 한문을 모르고서는 안된다.
여러분들이 영어학원에서 원어민이 물어보았다. 학교에서 무슨 과목을 배우는가 ? 한문이라고 대답하고 싶다면 무엇이라 대답해야 되는가 ? 차이니스인가 ? 아니다. 차이니스는 현재의 중국 사람들이 쓰는 중국어일뿐이다. 현재의 중국말이 아니라 과거의 중국말을 배우는 것이므로 클래시컬 차이니스가 맞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중국인에 의해 완성된 것이지만 우리식으로 수용해서 그대로 유지하며 발전시켰으므로 한자는 순순한 우리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순전히 중국의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중국과 한국의 다른점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학문으로 교량의 역할을 통해 훌륭하게 기능할 수 있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5. 現代 漢字

한나라 이후 중국은 唐, 宋, 明, 淸나라 등 무수한 왕조가 들어서 한자의 변천이 생겨나며 사회가 점점 고도화됨으로써 더욱 변하게 된다. 현재 중국의 문자는 簡體字라고 하여 대략 6만자정도의 한자를 2천여자로 축소시킨 것이다. 간체자는 중국의 문맹률이 높은 것을 글자의 탓으로 돌린 마오쩌뚱의 문자개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달리 대만은 繁體字를 사용한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간체자와는 거리가 멀고, 대만의 번체자와 유사하나 번체자는 중국의 오랜 역사가 담긴 변화의 과정을 거친 것이고, 우리 나라의 한자는 한나라 시대로 고착된 것이다. 그래서 중국어와 한자는 사실 다른 부분이 많다. 중국인들도 자기 나라의 고어를 연구하기 위해 우리말, 일본어를 공부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