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문화재단/다석류영모(多夕柳永模.1890~1981)

하나님의 체험[정양모교수]/다석채플

▪살림문화재단▪ 2012. 8. 30. 05:16

서구 신학자들은 이성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치밀한 분석과 날카로운 논리로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한답시고 어지간히 설쳤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창한
천주존재 증명 다섯가지 따위가 그런 것인데, 그래봤자 부질없는 짓이다.
무신론자들을 설득할 수 없을 뿐더러 유신론자들조차 설복하기 힘겹다.

숨어 계신 하는님, 없이 계신 하느님께서 스스로 당신을 계시하지 않으면 어찌
좁쌀 한톨만도 못한 인간이 그 엄청나신 분을 감지할 수 있으리.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의 신체험담(神體驗談) 여섯편을 풀이 없이 옮겨 적는다.
진솔한 신체험담이야말로 어줍잖은 신존재 증명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고
자못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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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도 바오로(서기 5~65년경)

사도 바오로는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교 전도사들이 고린토 교회에 들이닥쳐 자신의
사도직을 부정하면서 여러모로 헐뜯는다는 불길한 소식을 전해 듣고, 57년 가을쯤
에페소에서 고린토 교회로 건너가서 고린토 교우들을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이에 바오로는 다시 에페소로 되돌아와서 통곡을 하면서 고린토 교회로 편지를 써
보냈으니, 이를 일컬어 '눈물 편지'(2고린10-13)라고 한다.

이 편지에서 바오로는 본의 아니게 자화자찬을 늘어 놓는다. 예로서 적수 전도사들이
자기네는 신비체험을 하는데 바오로는 그렇지 못하다고 헐뜯자, 그는 43년 쯤에 겪은
신비 체험을 생전 처음으로 공개한다.
사도 바오로는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싫어하는 사람인지라(2고린 4,5),
모처럼 자신이 겪은 신체험 이야기를 하면서도 너무 쑥스러운 나머지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3인칭 용법을쓴다.
그의 신체험담은 이렇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십사년 전에(43년경)
몸 안에서였는지 몸 밖에서였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고 오직 하느님만이 아십니다만
어쨋든, 제삼천에까지 붙들려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또한 나는 그 사람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몸 안에서였는지 몸을 떠나서였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고 오직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그는 낙원에 붙들려 올라가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말을 들었는데, 그 것은 인간으로서는 말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2고린 12,2-4)





2. 블레즈 파스칼(1623~1662)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문인으로 천재의 명성을 누린 파스칼은
서른에 접어들면서 한편으로는 신앙에 대한 불가지론으로, 또 한편으로는 세속에 대한
환멸로 영적 시련을 겪는다.
그러다가 1654년 11월 23일 한밤중에 신체험을 하고 신앙의 길로 정진하게 되었다.
그는 일생일대 체험을 양피지에 적어서 손수 웃옷에 꿰매고 혼자 보고 살았다.
그의 누님 질베르트가 염을 하려고 옷을 벗기다가 발견했다던가,
[회상록(Memorial)]이라고 이름지어진 신체험담을 우리말로 직역해본다.

"은총의 해 1654년 11월 23일 월요일...
저녁 열 시 반쯤부터 열두 시 반쯤 사이에,
불,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로다.
확신, 확신, 느낌,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이로다.
나의 하느님이요 여러분의 하느님이로다(요한복음 라틴 인용문)
당신(예수)의 하느님은 또한 저의 하느님이로다.
하느님을 빼고는 세상 만사를 죄다 잊으리,
오직 복음이 가르치는 길을 따라서만 님을 찾을 수 있으리라.
인간 영혼의 위대함이여,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저는 알아보았나이다.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저는 당신을 떠나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생수의 샘인 나를 저버렸도다(라틴 인용문)
저의 하느님, 저를 버리시렵니까?
저는 당신을 영원히 떠나지 않으렵니다.
오직 한 분 참 하느님이신 당신을 알고 당신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게 영생이옵니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저는 그분을 떠나 살았고 피했으며 저버리고
십자가에 못박았나이다.
이제 다시는 그분을 떠나지 않으렵니다.
오직 복음이 가르치는 길을 따라서만
그분을 얻을 수 있으리라.
전적인 포기, 기꺼운 포기."




3. 수운 최제우(1824~1864)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는 1860년 음력 사월 초닷샛날에 겪은 신체험을 [용담유사](용담가)
제삼절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처자(妻子) 불러 효유(曉諭)하고, 이러 그러 지내나니, 천은(天恩)이 망극하여 경신(庚申)
사월 초닷새날에 글로 어찌 기록하며, 말로 어찌 형언할까. 만고 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
여몽여각(如夢如覺) 득도(得道)로다. 기장하다, 기장하다. 이내 운수 기장하다.
한울님 하신 말씀, 개벽 후 오만년에 네가 또한 첨이로다.
나도 또한 개벽 후 노이무공(勞而無功)하다가서, 너를 만나 성공하니 나도 성공, 너도 득의
(得意), 너의 집안 운수로다. 이 말씀 들은 후에, 심독희(心讀喜) 자부(自負)로다.
어화 세상사람들아, 무극지운(無極之運) 닥친 줄을, 너희 어찌 알까보냐.
기장하다, 기장하다. 이내 운수 기장하다. 구미산수(龜尾山水) 좋은 승지(勝地) 무극대도
닦아내니, 오만 년지 운수로다.
만세일지장부(萬歲一之丈夫)로서 좋을시고, 좋을시고 , 이내 신명 좋을시고,구미산수
좋은 풍경 물형(物形)으로 생겼다가, 이내 운수 맞혔도다."





4. 다석 유영모(1890~1981)

동방의 성인 다석 유영모는 1942년 1월4일 하느님을 깊이 깨닫고 나서
중생(重生)의 열락(悅樂) 가운데 여러 시편을 지어
[성서조선](157호 1942년2월호 33-38쪽)에 발표하셨는데,
그중 '믿음에 들어간 이의 노래'에서 하느님 체험을 이렇게 읊었다.

"나는 시름없고나
인제부터 시름없다.
님이 나를 차지(占領)하사
님이 나를 맡으(保管)셨네
님이 나를 가지(所有)셨네

몸도 낯도 다 버리네
내거라곤 다 버렸다
'죽기 전에 뭘할까?'도
'남의 말은 어쩔까?'도
다 없어진 셈이다.
님 뵙잔 낯이요
말씀 읽을 몸이라
사랑하실 낯이요
뜻을 받들 몸이라."







5. 이경식(1943~ )

암전문의 이경식은 미국에서 10 여년간 말기 암환자들을 진료하면서 현대 의학의 한계를
절감했다. 그는 암환자들이 세상을 떠날 때마다 심한 좌절감과 낭패감에 사로잡혔다.
그런 가운데서도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감명을 받아서, 그때까지
멀리했던 신앙을 되새기곤 했다. 그러다가 미국생활을 마무리하기 전해인 1980년 생전
처음으로 성령 세미나 모임에 참석해서 선교사의 강론을 듣고 크게 깨쳤다.
그후 선생은 인생관을 달리했다. 그 암울한 죽음에서 돌파구를 찾았던 것이다.
죽음은 부활에 이르는 통과의례라는 묘리를 깨쳤던 것이다.
그의 회심담은 다음과 같다.
(이경식, 암전문의 호스피스 진료수기 1권 [사랑이야기] 바오로딸 1987년 58쪽)

"강론중에 나는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으며, 내 가슴은 칼로 찌르듯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 강론이 끝나고 많은 사람이 제대 앞으로 나갈 때 갑자기
하늘 위에 있는 불덩이가 보였다. 마치 오순절에 성령의 불길이 나타나듯 내 눈앞에
성령의 불길이 나타나더니 그중 하나가 혀같이 갈라져 내 머리에 떨어졌다.(사도 2,3)
그 불길은 내 몸속에 빨려들어가듯 들어갔고, 나는 심연에 빠지듯 그 자리에 쓰러졌다.
정신은 말짱한데 몸은 가눌 수가 없었다. 주위 사람들이 나를 부축하며 의자에 앉히자
나는 흐느껴 울면서, 내 혀가 저절로 움직이며 소리내는 것을 내 귀로 들었다.
나는 '주여 제 생명을 가져 가소서' 하며 반복하여 크게 소리치며 말하고 있었다.
내 혀가 저절로 움직이는데 놀랐으나 나는 그때 내 앞에 하느님이 서 계신 느낌을
받았으며 거룩한 분의 성령이 나를 휩싸고 있음을 느꼈다. 조금 후,
내 눈앞에 찬란한 빛이 비쳐왔으므로 나도 모르게 '아 빛이 보인다' 하고 소리쳤다."







6.최종태(1932~ )

서울대학교 조소과의 최종태 교수는 1982년 10월 말경 어느날 저녁때 몰아경, 무아경,
망아경 에서 신체험을 했는데, 이를 마음속 깊숙히 홀로 지니고 있다가 비로소 공개했다.
([성서와 함께] 1995년 4월호, 4~9쪽)
최교수의 신체험담 가운데서 세단락을 적출하면 이렇다.

"(집사람과 신앙)이야기를 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굉장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놀라운 일이었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든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빛이 번쩍한 것 같기도 하고 앞에 엄청난 누군가가 딱 나타난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 순간 나의 의식세계는 끝났습니다...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일이라 할지 사건이라 할지 적당한
단어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나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큰절을 올리고 바닥에
앉았습니다. 실로 엄청난 분을 만난 것입니다.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절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또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었습니다. 절을 올리고 앉았을 때 내가 살아온 일생이 다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찰나였습니다. 필름으로 보는 영화의 장면들 처럼 또렷하였습니다.
그 찰나에 나의 전체, 나의 현재가 너무나도 명료하게 보였습니다.

'모든 것은 내가 다 잘못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한일이 없습니다.'
내 입에서 지체없이 거침없이 나온 말입니다. 어찌나 명료하게 내가 살아온 전체와 현재가
잘 나타나 있는지 변명이라는 것은 손톱만큼도 들어갈 틈도 융통성도 없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습니다. 하얀 종이에 바늘 끝으로 점 하나 찍은 그런 흔적조차
없는 것입니다. 나의 업적이란 것이, 살아온 흔적이 그렇게 완전한 무(無)였습니다.
내 앞에 그분이 계셨습니다. 설명할 수 있는 어떤 형상으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앞에 나와 마주하고 있는 분이 계셨습니다. 내 주변은 전체가 빛이었습니다.
나도 빛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육체로는 아니었습니다.
앞에 있는 식탁이나 그런 것들도 모두가 빛으로 있었습니다. 아무튼 전체가 빛으로만
있었을 뿐 물체는 없었습니다.
그분은, 지금 나와 마주하고 있는 그분은 물론 빛이었습니다. 나는 웃었습니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분이 바로 여기 계신 것을... 하는 내 직감이 웃음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눈물이 마구 쏟아졌습니다. 내가 그토록 찾던 그분은 먼데 계시지 않고
나와 늘 마주하고 계셨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여기 나와 함께 전부터 그렇게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아주 좋은 분이셨습니다. 어머니같고 아버지같고 좋은
선배같고 그렇게 편안한 분이셨습니다.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웃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여기 나와 함께 전부터 본래부터' 그렇게 계셨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이분이 늘 나와 함께 계셨는데...

빛이 위로부터 무진장 쏟아졌습니다. 굉장한, 말로 할 수 없는 밝고 맑은 빛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금빛에 가까운 빛이었습니다. 그분과 나를 볼 때는 그랬습니다.
위로부터 쏟아지는 빛은 순백에 가까운 빛이었습니다. 빛은 생명이고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의 빛이, 그 생명의 빛이 소리도 없이 무진장 쏟아지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 자체가 된 것입니다. 온 몸의 상태가 도저히 말로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이
좋았습니다. 기쁨이라 할지 열락이라 할지 말로는 그 좋은 상태를 절대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부터 사물들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풀과 나무와 집과 산과 구름들이 너무나도 경이롭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이 온통 생명에 넘치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한강철교를 지나가는 기차도 열심히 달려가는 생명체로 보였습니다. 택시를 타고 학교를
가는데 기사가 내 눈물울 볼까봐 많이도 얼굴을 감추었습니다. 길가에 서있는 전신주까지도
생명으로 활활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상태가 약 두어 달 갔습니다.
온몸이 무언가로 꽉 찬 것 같고, 무언가로 감전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정양모 / 신부 / 성공회대 종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