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문화재단/다석류영모(多夕柳永模.1890~1981)

多夕 류영모의 하루[ 하루 살이][펌]/다석채플

▪살림문화재단▪ 2012. 8. 30. 05:34

 

 

인생이 꿈이라 하면 꿈 같기도 하다.

그러나 꿈이란 무엇이냐? 꿈도 주관적인 사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주관적 현상 뿐이요, 객관적이 아닌 것은 사실이라는 말로  일컫기 어렵다.

그러나 사람의 일생에는 잠이 삼분의 일을 차지하고 정(精)적인 수면 속에서 

(動)적인 정신현상인 꿈이 간혹 있으므로 꿈은 잠과 한가지고 인생 자체의 내적인 사실이라 할 수 밖에 없다.

 

꿈을 꾸게 되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꿈에라고 기쁨이 기쁨이 아닐 것 아니오,

슬픔이 슬픔아닐 것 아니다. 꿈을 헛되다 함은 변천하야 지나감이 빠르다 함이겠으나 

빠르나마 그 당하는 삶의 그 자리(꿈 속)에 당할대로 당하는 것은 사실이다.

무론 전인격(心身)이 충실 건전하야" 노루잠 자고 개꿈 꾼다"는 속담이 잇거니와 심신을

어지럽히는 꿈을 없앨 수 있는 것은 마치 온 사회가 건실하면 짐승이나 악마같은 못된 짓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일이 없게 되는 것과 같다.

또 꿈에는 무가치하고 허황된 꿈만 있는 것이 아니요, 

상상 이상으로 가치있는 통관적(洞觀的), 선지적(善知的)인 꿈 도 있다.

곧 미래의 사물을 여실하게 꾸는 꿈이다.

이 글을 쓰는 사람과 이 사람의 친구 가운데는 후자에 속하는 꿈을 꾼 일이 있다.

처음부터 꿈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꿈도 사실이라는 말만으로써

꿈에 대한 말은 그만 두고 다만 사실을 사실로 보고 가자는 것이다.

꿈같은 세상이거나 깼을 때 같은 꿈이거나, 과거를 꿈꾸는  것이든, 현재 급한 일이거나

방금 앓는 소리거나 꿈-깸, 잠-쉼, 일-놂이다. 한가지로 인생의 이 곳, 이 때, 나의 당장당장 겪는 사실이니

모든 것을 사실대로 대하자, 바꾸어 말하면 내 삶으로 살자.

 

"인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인생은 꿈이다"라고 말하여 왔다.

인생이 꿈일지 모른다. 아니 꿈이다. 그러나 꿈까지도 내 삶의 사실임도 또한 사실이다.

내게는 인생이 사실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 삼에 충실하여 당자의 사실을 사실로만 대하여

총명하고 팔팔하게 생활한다면 몽환적인 사실은 신속히 지나가고 진실스런  사실만으로 채워질 것이다.

사실을 진실로 채운다는 그 지극한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말하면 오늘살이(今日生活)에 있다. 오늘(今日) 여기(此處) 나(自我)라는 것은 

동출이어명(同出而異名)이라 이름만 다를 뿐이다.

이 셋이야말로 삼위일체라 할 것이니 오늘이라 할 때엔 여기 내가 있는 것은 물론이요,

여기라 하는 곳이면 오늘 내가 사는 것이 분명하고 나라 하면 오늘 여기가 전제되어 있다

무수한 지점에 광겁한 시간에 억조의 인생이 살더라도 삶의 실상은 오늘 여기 나에서 볼 뿐이다

어제라 내일이라 하지만 어제란 오늘의 시호(諡號)요, 내일이란 오늘의 예명(豫名)일 뿐 거리라 하지마는

거기란 거기 사람의 여기요, 저기란 저기 사람의 여기가 될 뿐이다. 

그이라 저이라 하지마는 그도 나로라하고 살고 저도 나로라하고 살 뿐 사 사람은 다 나를 가졌고

사는 곳은 여기가 되고 살 때는 오늘이다.

 

오늘 오늘 산 오늘! 어제의 나와 거기의 나는 죽은 나가 아니면 남이 된 나다.

나는 오늘 여기서 사는 나를 낳은 부모라고는 하겠으되 어제의 나는 아니다.

내일의 나와 저기의 나는 없는 나가 아니면 남이라 할 나니 오늘 동안에 내가 길러 내놀 자식이라고는 하겠으되

이제의 나는 아니다. 과거의 그 곳을 보모나 친척같이 사모 할 수 있고 미래 저곳은 자손이나 벗들같이

희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여기의 나와는 일체(一體)가 못 된다.

나라하면 오늘 여기서 사는 사실됨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이에 산다는 것을 생각하건데 첫째, 나와 물건과의 관계다.

먹고, 입고, 쓰고, 보고, 찾고, 알고, 기르고, 거느리려 통틀어 말하면 

누리려하는 욕망으로 좇아 활동하는 작업이다.

둘째, 나와 남과의 관계다. 

이상의 작업에 대하여 혹은 힘을 합하여 뜻을 아우르며, 혹은 잘잘못을 겨루며 일을 한다.

구경(究竟) 산다는 것은 때와 곳을 옮기면서 곧 내 생명을 변증하면서 일을 하는 것이니 나와 남과 물건 세편이 

연결하는 가운데 생명이 소통하면서 진리는 나타내며 광명(光明)이 따른다.

 

생명력은 내게 있으니 오늘 여기 내가 살게 된 것은 오늘 일을 위하여 생명력을 발휘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생명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자지러지는 생명이 많다. 이는 그들이 오늘상이에 충실치 못해서다.

혹은 과거가 많은 것을 자랑하나 과거의 나는 이미 죽었으며 남이다.

오직 오늘 이 생명력을 길러낸 과거로서만 뜻이 있으되 만일 오늘 나의 생명력을 실용(實用)치 않으면 그 뜻조차 사라진다.

혹은 앞길이 멀다고 자안(自安)하나 미래란 기약할 수 없으며 또한 남이다.

오직 오늘 내 생명력을 할 수 있는 데까지 발전시켜 미래의 나를 이룩하는데서 비로소 의미가 있다.

그러나 오늘살이에 무심한 사람은 그 의미조차 없다.

어제를 돌아보거든 오늘은 어제보다 낫게 살겠다는 뜻으로나 반성해야 한다.

만일 어제 잘못된 것을 회한(悔恨)하는 일로 오늘을 허비한다면 그것은 마치 남의 잘못, 죽은 것을 한탄하다가

나의 잘 살 것까지 잊어버리는 셈이다.

내일을  생각하려거든 어떻게 하면 내일을 위하여 오늘을 진선(盡善)하게 살까하는 맘으로나 할 것이요,

너무 내일만 허망하다가 오늘을 무료히 보내게 되면 이것은 나지도 않은 용마를 꿈꾸다가

집에 있는 망아지까지 먹이지 않는 격이다. 산 것은 사는 때의 산 것이요, 결코 나기 앞서나 죽은 뒤의 것이 아니니

산 오늘을 죽은 어제같이 보거나 산 오늘을 나지 않은 내일만 여기지 말라.

산 오늘은 살게 써서 산가 싶게 살아야 한다.

 

어제의 슬픔은 어제 속에 장사하고,

내일의 즐거움은 내일 가서 누리기로 하고,

오늘은 오늘살이게 전력(專力)하야 맛보고,

갈고, 씹고, 삼키고, 삭히어 내 몸과 마음의 일용할 양식으로 삼고 말 것이다.

즐거우면 즐거운 일의 참 맛과 뜻을 알아야 말며 슬프면 슬픔의 참 이치나 값어치를 찾아볼 것이다.

또 구태여 큰 일 귀한 일망을 찾지 말자.

나의 생명이 큰 일 귀한 일을 볼만하게 자라나면 큰 일 귀한 일이 그 날과 한가지 또 나와 한가지로 나타난다.

모처럼 큰 일 귀한 일을 만난다 할지라도 그 큼과 귀함을 알아보지 못하면 그 크고 귀한 뜻이 어디 있겠는가.

또 아무리 크고 귀하게 생각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나 오늘 내가 하여야만 할 일이면 그 일이 참 큰 일이요, 참 귀한 일로 아는 것이 옳다.

한 학과의 익힘이나 한 이랑 짐을 맬지라도

크도다 나여! 귀하도다 오늘이여!

거룩하도다 일이여! 신성하도다 오늘 내게 일로 살게 됨이여!

 

어제는 이미 죽었으니 선조이요 내일은 아직 안왔으니 후생이다.

어제도 나였었고 내일도 나라 할 것이면 내 선조도 나요 내 후손도 나라.

우리 조상들도 '오늘 오늘' 하면서 살았고 우리 자손들도 오늘 오늘 하면서 살 것이니

전만고(前萬古)도 오늘이요 후만고(後萬古)도 오늘이어라.

무슨 일이고 한가지 일에 몸이 매이면 같은 시간에는 그 밖에 천만(千萬) 사물(事物)에 대하여 나를 없이 한다.

 내 지금 이 그을 쓰노라고 이 곳에 앉았음에 내당에 잇는 가족들과는 사별(死別)한 것과 다름없이 아무 상관이 없다.

더욱이 한 방에 잇는 아우까지도 극언(極言)하면 별세계에서 산다 하겠다. 저가 내 이 시간에 이 글을 쓰기 위하여

전 생명력을 들이는 줄을 알 바 없겠고 나 또한 저의 생명력이 흘러나가는 방향과 진상을 살필 길이 없다.

 

내가 오전에 시골에 사시는 어떤 아는 어른께 글월을 닦아 올렸으니

오늘 내 생명력의 한 부분은 그 어른을 사모하는 일로 드린 것이다.

그 편지가 지금 어떤 우체국원의 생명력으로 취급을 받을지를 모르겠고

일간(日間)에는 또 그 어른께서 그 편지를 받으시어 내 오늘 생명력으로 지은 바 세계에 드시어

잠시동안이라도 나와만의 관계 곧 내가 쓴 글월을 대하여 보시는 일로만 그 어른의 생명력이 쓰시게 될 것이다.

벌써 한나절 이상이나 걸려서 노을 내 생명력으로 개척하는 이 글의 세계에는 어느 날이고

또 어떤 독자가 그 귀한 생명력을 가지고 들어와서 오직 나하고만 사귀어 통하리로다.

아! 사람이 하루에도 열 가지 일을 잡으면 십세계(十世界)에 전생(轉生)한다고 할 수도 있고

십종(十種)  회생(回生)이 된다고 할 수도 있다.

 

거룩하다 일이여! 이 붓, 이 종이도 식물과 동물의 목숨음 물론 필공(筆工) 지공(紙工)의 목숨과 피땀으로 된

별세계에서 나온 물품이로다. 부녀(婦女)는 족히 부엌 일과 바느질로 3천세계를 벌릴 수 있고

서생(書生)은 족히 글방이나 서재에서 대천세계(大千世界)를 가를 수 있다.

일의 참 맛을 알 것이면 따라 분망한 일 고적(孤寂)한 일이 없을 것이다, 업(業)에 귀하고 천함이 또한 없을 것이다.

산 나는 산 오늘의 산 일 뿐이다. 천만 가지 일에 천만 가지 취미가 있고 진리가 있고 도리가 있으니

능히 그 맛을 보고 그 진리를 살펴 잇고 그 도리를 밟아 행하면 족(足)하다.

하루 동안에도 열 백세계가 갈릴 수 있고 하루라는 것은 늘 오늘이라는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안다면

오늘에 자족(自足) 아니할 수 없고 자활(自活) 아니할 수 없다. 만반(萬般) 사물(事物)로 인연이 닿는 대로

만나는 사람사람 열리는 세계세계에 오직 오늘 신성한 오늘 나의 진여(眞如)한 생명력을 지성으로 발휘하면서

한갖 나를 대하게 된 그들의 생명력과 투합(投合) 일치하기를 바란다.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죽어도 좋다.(논어)

사람의 생명은 호흡간에 있나니다.(불경, 42장경)

내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오,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성경, 마태복음)

 

[ 1918년 4월 5일 최남선 발행 (청춘) ] 多夕 류영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