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문화재단/다석류영모(多夕柳永模.1890~1981)

다석 유영모 추모담 [살림도방.채플]

▪살림문화재단▪ 2012. 11. 29. 02:17

 

다석 유영모 스승님 추모담

 

 

김흥호- 함선생님 말씀하시지요.

함석헌- 내가 먼저 말씀 드리지요. 아마 내가 먼저 말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은 선생님(유영모)영 앞에 또 여러분 모이신 앞에서 내가 화해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내가 잘못한 것을 솔직히 그대로 인정하고 여러분이 풀어주시는 말씀을 하시든지 혹 안하시더라도 그러시길 바래서 그래서 왔습니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는지는 몰라도 내가 지금 이날까지 내가 제일 선생님을 가까이 본래 모셨던 사람으로 알고 또 나 스스로 거기 대해서 책임 있는 사람으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러 해 동안 아주 막혀서 지냈습니다. 그것은 1960년대 시작 된 것은 아니지만(1960년판 「예언자」 서문) 내말로 하면 이때까지 모래위에 쌓아놓은 탑이 무너졌다고 온통 무너졌다고 나 스스로 고백했던 모양으로 그 일이 터졌던 그건데, 거기에 대해서 자세한 말씀은 여기선 안 드릴랍니다. 피차에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도 있고 그러니까 그것은 사람의 예의상으로 그럴 수가 없고 다만 그저 한 마디로 내가 잘못했다는 걸 말씀드리고도 선생님(유영모)께서 살아 계실 때 그런 말씀을 분명히 말씀 드렸어야 하는건데 물론 수년전에 와서 말씀 드리기는 하였습니다만 그때는 선생님의 정신이 옛날처럼 그렇게 맑지 못하시던 땝니다. 그러니까 내가 남은 한(恨)이 있지요. 그래 올해에는 여러 가지 생각하다가 내가 아주 일대 결심을 하고 여기에 온 겁니다. 나는 이제 앞에 남은 날이 몇날 안되는데, 언제 갈지 모르지만 그러니까 죽기 전에는 마태복음(5장 23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그대로 “예배를 드리러 가려고 할 때 형제가 너에게 원망하는 생각이 있는 줄 알거든 가서 그것부터 먼저 풀고 와서 예배를 드려라”하는 말 그것은 어느 때에도 못 잊고 오늘날까지 온겁니다. 푸는 것이 늦긴 늦었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도 푸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아시고 그저 제 말은 무조건 내가 잘못한 것을 인정하니까 그렇게 아시고 될수록 완전히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죽을 때 언제 죽을지 그 시간이 언제 올는지 모르지만 나도 마음에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마음을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는 말입니다.

선생님이 내게 마지막 오셨을 때 말씀을 그렇게 많이 하는 선생님이 아니신데 글로 간단히 써 가지고 오셨어요. 「인을 찾아 살아온 지가 육십년이 되었는데 오늘 문득 아주 멀쩡히 사람 하나 가고 말았나」 「벗이여 갔는가? 오랜 벗이여 아주 갔는가? 다시 돌아올 길은 없는가 한사람 봤구나더니 본 첨 잘못이던가?」그건 선생님이 대단히 마음이 아프셔서 한 말씀입니다. 물론 선생님은 다시 없이 가깝게 모시는 선생님이지만 또 저는 저대로 사람이니까 하나님과 저하고 둘 사이에서만 얘기 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해도 알아듣기 어려운 또 그런 점이 있지요. 그렇지만 하여간 거기에 대해선 제가 다 이러고 저러고 말씀을 드릴수가 없지요.

선생님께서 첫 번 오산학교에 와서 계실 때는 저는 못 모시고 제가 어릴 때이고 그러고 둘째번 오산에 오셔서 교장으로 계실 때 제가 그해 처음으로 오산학교 입학하던 때 제가 21살 땝니다. 선생님이 32살 때고 일 년 동안 교장이라 그러고 계시다가 그때 일제 때 교장자격 없다고 안된다고 해서 1년을 하고 돌아가셨는데 가시는 그날 그게 오산에선 마지막 길일겝니다. 선생님 나가시는걸 일부러 전송하잔 생각도 아니었는데 전송을 하였습니다. 지금 다 잊어버려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그때 학교 심부름하면서 공부하는 강효국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 등에 짐을 지우시고 그때 부모님께서 살아계실 때니까 그래 아마 서울로 가져오신 줄 아는데 정주가 해변이니까 생굴을 지워서 가지고 오시면서 그걸 나도 들어서 따라 나갔는지 선생님 뒤를 따라 나갔는데 선생님께서 얘기를 하시면서 길을 걸었는데 그때 하신 다른 얘기는 다 잊어버렸어도 절보고 하는 말씀이 “아마 내가 오산(五山)을 왔던 건 함(함석헌)을 만나러 왔댔나 봐” 그러고 말씀하신 걸 내가 일생에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선생님을 모신다면 내가 당연히 누구보다도 책임지고 모셔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 왔었는데…… 내 잘못으로 자연히…….

선생님께서 박승방씨를 보고 다른 사람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박승방씨를 만나서는 내가 그렇게 되기 전에 평양에 있다가 감옥에(신의주 학생사건) 들어간 다음에 “내가 이때까지 소리 내서 하던 기도를 그쳤다가 함석헌이 감옥에 들어간 다음부터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다.”하고 그러리만큼 생각하시는 선생님이었는데, 아마 그 때 제 일을 보고 많이 마음이 아프게 무슨 생각을 했을겁니다.

그런데 저는 본래 어드랬냐하면 선생님의 그 말씀하시는 걸 그 말씀하시기 전에라도 그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못 알아듣는 것도 아니지만 맘이 무척 약한 사람입니다.

선생님이 처음 오산(학교)에 오셨을 때 내가 21살 때에요. 나도 19살에 만세 부르고 그런 뒤 학교도 못가고 두해동안 (집에서) 마음이 썩고 그러다 오산에 갔었는데, 그러니까 무얼 저도 모르게 찾는 맘이 있었어요. 선생님 처음 뵈었을 때 “말로 하지는 못했어도 뭔지 믿는 데가 있었지요. 선생님께 말씀드릴까 했지만 계신 방안 문밖에 가서 문고리를 쥐었다가 놓았다가 몇 번을 그러다가 끝내 못 들어가고 만 사람입니다. 반드시 무서워서만도 아니고 내 맘이 본래 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저 그러다가 말았는데, 그랬어도 저 혼자만은 그래도 어느 때고 잊잔 생각 없었고 지금 생각을 해봐도 만일 내가 선생님을 뵙지 못했더라면 선생님이 안계셨더라면 아마 오늘 이 자리에 이만큼이라도 잘못된 점도 많이 있지만 이만큼이라도 못됐을 거라는 걸 속이는 말 아니고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마음이 약해 그러고 상처가 아물어야 펴 보이지 아물기 전에 어떻게 남에게 펴 보일 수 있나? 저로서는 그런 생각에 그러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아마 그래 못 견디어 하셨던지 제 얘기를 해준다고 그래서 점점 더 나올 길이 막혀서…… 어떻게 맘엔 잊어버린 거 아니지만 또 제 생각으로 선생님이 너무하신다 한다든지 반드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들어갈 데도 어디 있을 데가 없어서 그래 몇 해를 지내다가 아주 늦게 늦게 와서야…….

그러니까 자연히 여기 이렇게 나오는데도 다 어색해져서 그렇지 않다면 위 선생님이 임종을 하는 때에 제가 없었을 리가 없는데, 그렇게 못했고.

또 그것만이 아니고 이상하게 되어서 본래 마음에 스스로도 불효하던지 그럴라고 생각도 안하는 사람이지만 아버지의 임종도 못했고 어머니의 임종도 못했고, 또 집안에 내 아내가 떠날 때도 못 보았고 어쨌건 우연이라고 생각이 안됩니다. 그래 작년에는 하필이면 선생님이 떠나실 때 난 또 허리를 다쳐 드러누워서 못 왔고 그런 것이 다 자격이 없으니까 그러게 되는건가? 뭐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 봅니다마는 하나 하나가 다 내 마음속에는 깊이 깊이 아픈 것이 새겨지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런데 더구나 우리가 피차 서로 같이 선생님을 따른다고 하고 같이 말씀을 드릴 수가 없고, 가까이 한자리에 앉기가 어려워졌고, 그렇게 된건 돌아가시기 전도 그렇지만 지난해 그때부터(선생님과 사모님 별세 초상) 마음에 참 안됐더군요. 그래 그러다가 이번에 아주 생각하다 참 내가 잘못한 사람이다 그럴 수가 있나? 부끄럽고 뭐고 그런 것 이제 이 이상 더 미룰 수가 없고, 무릅쓰고 나와서 여러분한테 내가 잘못되었다는 걸 말씀 드리고 이제 늦게나마라도 풀어야지 그런 생각으로 오늘 이 자리에 왔습니다.

김흥호- 그런데 (함)선생님이 동경에 갔을 때, 그 때는 (유)선생님하고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나요. 오산학교에서는 지금 (함)선생님이 말씀 하셨는데요.

함석헌- 아마 그때는 그러니까 1921년에 선생님이 내려 오셨다가 (오산에) 22년 여름쯤? 오신 다음해 가을인가? 내가 졸업하기 좀 전에 이구하라는 이가 선생님대신으로 교장으로 왔고 그해 여름에 올라오신 것이(서울로) 마지막일거예요. 그리고 그 다음에도 이제 동경에 가는 길 오는 길에(선생님 댁에) 들리곤 그랬지요.

그리고 동경 가 있는 동안에 생각은 본래 이제 말씀 드린대로 내가 마음은 있으면서도 내몰성이 부족한(內向的)사람이 돼서 말을 못했드랬는데 동경 가서 진재(震災)를 겪고 나니까, 거기서 죽지 않고 살아남으니까 나도 마음이 달라져서 이것이 어디 사람의 살림이냐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서울 선생님께 글월을 보냈어요. 이제는 그때 썼던 걸 다 잊었습니다. 대충 내용이 생각납니다. 「원래 오산에 있을 때에 내가 선생님한테 자세한 말씀을 드리고 또 말씀을 듣고 했어야 할건데 이렇게 늦었습니다.」그랬더니 그때 선생님 말씀이(회답)「원래(原來) 라고 그러지만 원래가 어디 있느냐? 그저 지금 이 시간이 있는거지」라고 하면서 그때 마침 영천에 큰 수해가 나서 사람들이 죽은 일이 있고 미국 대통령이 음식 잘못 먹고 죽은 일을 말씀하시고 회개하지 않으면(일본을 마음에 두시고)모두 그렇게 망한다는 예수님 말씀을 들었어요(누가 13장 2절- 5절) 그것이 기억이 나는군요. 그러군 왔다 갔다 할 때 그저 들리고 그랬었고.

무교회 모임 사람한테 선생님 말씀 드린게 물론 나고 그래 김교신에게 말했고 송,정(송두용, 정상훈)에게 말했고, 그래서 선생님도 그 모임(무교회)에도 가보시고 또 남강 선생님을 무교회 사람한테 소개 한 것도 내가 소개를 해서 그랬더니

그 때부터 남강선생이 날 보고 돌아가시기 조금 전에 오시더니 “서울에 있는 친구란 사람이 「성서조선」 잡지를 한다는데 그 사람이 어떤 사람들이냐? 내가 서울 가 볼란다” 그래 말씀을 드리고 했더니 그 사람들이 찾아가기 전에 선생님이 먼저 찾아가셔서 그럴 때 대개 유선생님이 같이 가시고 모두 그렇게 돼서 거기서 알게 되었지요.

김흥호- 그러면 선생님이 동경서 돌아오셔서 바로 성서조선을 곧 시작하셨나요?

함석헌- 그건 돌아오기 조금 전에 그러니 그 전해 겨울에 그때 김교신이 함흥영생학교에 취직을 하였는데 거기 무슨 사건이 일어나서 그때 김선생님의 집안에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갔고, 삼촌들이 후견을 했는데 재산에 무슨 그런 문제가 있었나 봐 그 때 김교신의 말로 하면 “아휴 거기 있으면 사람 살인치겠더라 그래 도망해 왔노라” 하고는 그래서 그날 하루 저녁 동경에서 우리 여섯이 모여서 울면서 철야하고 그러고 한 일이 있지요 잡지 하자고 결정한 것은 그 전인가 후인가 잘모르겠습니다마는 계간으로 낼려고 하기를 거기(동경)있는 동안에 작정이 됐더랬지요. 그리고 처음에는 정상훈이라고 하는 이가 그때 신학교를 하기 때문에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겨서 우리가 했는데 그이가 남해가 집인데 가지고 갔다가 잡혀서 못 올라오고 말았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다가 서울에 있고 또 제일 잘하는 김교신한테 맡겨서 김교신이 맡아서 하게 되었지요.

김흥호- 그 때 김교신 선생이 양정학교에 계실 때인가요?

함석헌- 양정에 계실 때죠.

김흥호- 그럼 그 때 함선생님도 서울에 계셨나요?

함석헌- 아닙니다. 난 오산학교에 있었죠. 난 나오자마자 곧 오산으로 갔으니까

김흥호- 그럼 김교신 선생님이 서울에서 주간하시면서 각처에 계시는 선생님들의 원고를 모아서 편찬을 하셨나요?

함석헌- 그렇죠. 처음에는 돈도 같이 부담을 하고 원고도 내고 그래하다가 자연 비교적 마지막까지 있었던게 나고 또 나는 중간에는 다른 생각, 그때는 이런 내 잘못이나 그런 문제가 아니고 다른 것으로 해서 서울에 사는 그 사람들과 한동안 내가 글쓰기를 중단하고 했지만 마지막까지 같이 쓴 사람도 나고 그렇지요. 43년 잡혀들어 갈 때까지 했지요.

김흥호- 김교신 선생님이 언제 세상을 떠났죠?

함석헌- 45년 4월 28일 그러니까 해방 120일 앞두고 간거요.

김흥호- 유선생님은 자신이 67세에 죽는다 그러실 때 67이란 수가 어떻게 해서 나왔느냐는 말에 어떤이(소강절) 백에서 30을 빼는 70이고 70에서 3을 빼면 67이라 그랬는데.

함석헌- 내가 알기는 그런 것이 아니고 생각 나오는 대로 말씀 도중 하시고 그랬어요. 그랬는데 말씀 하신 것이 그게 김교신 때문에 난 일이요 김교신이 먼저 갔단 말이야. 그때 이제 내 날짜도 있지만 김교신 날짜도 계속해서 아마 적어오고 그러셨나봐, 그러다 김교신과의 관계일로 앞으로 3천일인가 더 산다면 한 것이 그렇게 된 것이지요. 그렇게 해 놓고 보니 남강선생의 일생과 날짜가 그렇게(비슷하게) 되더라는거야요. 한참 그 말이 있을 때 그날 유아무개가 돌아갈줄 알았는데 돌아갈 줄 모르더라 라고 그런 말이 돌아가니까 선생님 말씀이 “사람이 살아가노라면 예산이 세우잖아? 예산을 냈다가 꼭 되지는 않지만 살림은 예산을 세운 살림이라야 하잖아 그런 생각으로 그날이다 하고 살아보자는 거지 뭐 맞치긴 누가 맞치고 누가 꼭 맞치겠느냐 그날은 한뭏님만 아시는거지”

김흥호- 김교신 선생님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 때문에 자기는(유선생)(死는 예정일로) 4월 26일로 정했다고 하셨는데 지금까지는 그것이 내게는 숙제였어요. 왜 4월 26일로 정하셨나?

함석헌- 선생님이 저보다는 4017일 앞섰고요 김교신은 나보다 36일 떨어진 사람이니까, 그걸 넣으면 날짜가 뭐 그렇게 되겠는데 김교신은 나기를 4월 18일에 났고 돌아가기를 4월 25일이고

전병호- 내가 알기론 어떤이가 선생님께 얼마나 사시기를 원하시냐고 물었을 때 예순 여덟 쯤 살면 되지 한데서 시작이 되었다고 해요. 남강선생이나 친아버님이 그 나이에 돌아가셨지요.

함석헌- 김교신이 먼저 간 그것 때문에 생각을 하신 것이 틀림없어요. (정리자註, 1939년 6월 25일 김교신 선생님의 18,000일 기념 선물로「조선어 사전」을 선물한 적이 있는데 김교신 선생 사후에도 김교신 선생이 나신 날(4월 18일) 돌아가신 날(4월 25일)이 되면 늘 추모하였는데 마침 그 조선어 사전에 서명한 김교신 선생의 필적을 본 날이 김교신 선생간지 약 3천 날이 된 때이고 욕심으로 내가 앞으로 3천 날정도 더 살면 김교신 선생 간 날인 4월 25일과 비슷한 4월 26일이 된다는 데서 수적인 어울림에 끌리어 그렇게 정하셨고 정하신 후에 살펴보니 남강 선생 사신 날수와 같은 것을 발견하시고 수첩에 적어 넣으시니

김교신 일생

1901. 4. 18. 목요 16079일
辛丑. 2. 30. 병인 2297週
1945. 4. 25. 수요. 545朔
乙酉, 3. 14. 갑자. 45歲

유영모 일생(死亡 예정일 기준)

1890. 3. 13 木曜 67歲
경인. 2. 23 818朔
1956. 4. 26 木曜 3450週
병신 3. 16 癸亥 24151日

남강선생 일생

1864. 3. 25. 금요 24151日
갑자. 2. 18. 乙丑 3450週
1930. 5. 9. 금요. 818朔
庚午. 4. 11. 을미 67歲

전병호- 돌아가신다는 날 나는 선생님 사시는 집으로 가봐야겠다고 해서 이곳으로 왔지요. 그래서 선생님보고 선생님 돌아가신다는데 기념 될 만한 것을 갖고 싶다고 하니 선생님 글을 선생님 아우님이 돌에 새긴 돌 인장을 주셨어요. 그것을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함석헌- 저 두 벽이 다 무너졌다는 얘기 압니까? 모르시면 몰라도 괜찮고 잡지사 기자들이 선생님께 와서 말씀하실 때 남강 선생님도 그랬고 나도 그랬고 두 개의 양 벽이 무너졌다는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그건 왜 그러냐 하면 남강 선생님이 이제 안도산 강연 듣고 결심하시고 머리 깎고 숫제 담배까지 끊으셨는데 만년에 오다가 왜 그리셨는지 담배를 많이 피시는건 아닌데 이따금 피게 되셨어요. 그것을 아시고 선생님이 직접 남강 선생님보고 “선생님 왜 끊으셨던 담배 다시 피십니까?”고 물으셨다는 거에요.

또 남강 선생님은 감옥에 들어가 계신 동안에 부인되시는 사모님이 세상을 떠나셨고 나오셔서 몇 해 있다가 평양 기독병원에 계시는 동안에 간호하던 늙은, 그때 노처녀로 계시던 사람을 알게 되어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만년에 결혼 하신건 선생님은 많이 섭섭하게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그걸 남강선생님께 대두고 물으신거에요. “선생님 왜 그전에 끊으셨던 담배를 왜 다시 빠시며 또 이제 만년에 뭘 또 재혼하시고 그럽니까? 그거다 다 기운이 모자라 부쳐서 그러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남강선생이 “용타 참 놀랍다” 하시며 “자네 말이 옳아 다 옳아” 하시며 잘못을 자인하시더라는 거에요.

김흥호- 남강 선생님과 유영모 선생님과는 나이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요?

함석헌- 그야 남강선생이 아버님과 연배이시지. 그전부터 다 잘 아시고 연동교회 장로였었지 그래 오산에 처음 선생님을 선생님으로 모셔가고 그러던 것도 어르신과 서로 아는 사이니깐 난 그렇게 알고 있는데.

김흥호- 남강 이승훈 선생님이 장사 차 서울로 왔다 갔다 하실 때.

함석헌- 서울로 왔다 갔다 하셨죠. 그런대 그 전에도 한창 젊으실 때 장사하실 때 인천 부근을 왔다 갔다 하고 그랬습니다마는 그전에 선생님 선친하고 아셨는지 그건 모르겠어요. 그것까지는 나도 듣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두 분이 잘 아시고 지냈고.

그때 생각으로 하면 반드시 졸업을 한다는 것보다 조금 더 많이 배운 사람은 자기보다 좀 못한 사람을 가리켜 주는 것이 급하다 그렇게 되어서 그 때 우리나라 중학교에서 물리, 화학 실험기계를 둔 학교는 경신학교 밖에 없었대요. 선생님은 경신학교 3학년까지 하셨는데 그래서 아마 의논을 하고 졸업 못하더라도 그만치 알았으니 오산 내려가서 가르쳐주면 좋지 않으냐해서 가르쳤다는데 이제 그때에 이렇게 상투를 틀고 학생들이 공부를 했다는 거에요. 그 때 선생님 나이가 21살이나 20이나 그렇게 되지요.

김흥호- 21살 20살 (선생님) 그때는 상투를 그냥 틀고서 학교에 다녔었는지?

함석헌- 아니 선생님이야 안그랬지. 거기 학생으로 오는 사람들이 다 어른들이 오니까 그런데 그때 거기 있던 한사람이 말하는데 선생님 스물인가 스물한 살의 나이로 오산에 가 있을 때 선생님으로 가 있을 때의 말인데 그 때 선생님이 요한복음 강의를 하셨는데 놀라웠다거야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내가 이제 선생으로 가 있을 때 들은 말인데.

김흥호- 선생님 스무살 때?

함석헌- 예 선생님이 이광수씨보다 한 살 위지요. 이광수 선생님은 한해 아래인데 같이 계셨거든 그때.

김흥호- 그럼 맨 처음 선생님으로 갔다가 교장으로 가신 것은 나중에 또 가셨겠지요.

함석헌- 그렇지요. 다시 가신 것이지요. 처음에 오산학교에 가 계시다가 오신 후 동경물리학교에 가셨다가 그건 뭐라고 분명한 말씀은 안하시고 그저 생각이 달라져서 돌아왔다고 하셨어요. 선생님은 의외로 그 생각이 과학적이고 수학적이시거든 아주 그래요. 그래서 그런지 물리학교에 가셨다가 그만두고 오셨죠.

김흥호- 오산 가셨을 때 머리는 어떻게 하셨는지?

함석헌- 처음은 난 못 봤고 우리가 볼 때는 빡 빡 깎으셨죠. 그저 옷은 한복이시고 처음엔 모르지만 교장으로 오셨을 때는 의자에도 안 앉으셨어요? 작은 평상 같은 것을 교실의 책상 앞에 놓고 거기에 올라앉아 딱 꿇어 앉으셨지.

김흥호- 선생님의 머리 언제 길렀지요?

함석헌- 생각 안나는데.

이상호- 아 한번 길렀어요.

김흥호- 머리 기르고 찍은 사진이 하나 있는데.

이상호- 부스럼 때문에 깎았어.

함석헌- 아 그래요.

김흥호- 머리는 언제 길렀어요. 해방 전에 길렀나요.

함석헌- 해방 전에 내가 동경서 졸업을 하고 나올 때인가 오니까 적선동에 사실 때인데 부스럼이 이렇게 나서 그걸 그이가 누구지 정누구라는 이가 그때 붕산수를 데워서 자꾸 씻어드리는 것을 본 기억이 있어요. 그리고 「메트르」라는 책을 낸 것을 모르셔요?

김흥호- 「메트르」라는 책이 있었어요.

함석헌- 그때에 일본사람들이 메틀법을 실시하자고 해서 굉장히 장려하던 때인데 그래서 매틀 환산법을 왜 선생님이 늘 하시는데로 수를 재미있는 말귀절로 만들어 따로 외우기 쉽게 한 것인데 그렇게해서 모처럼 책자가 되고 그걸 내놓고 그 출판사 이름을 열 개(開) 이를 성(成) 개성사인데 주역에 나오는 글귀에서 따온 것인데 그때 일본사장출판사가 판권이 침해라고 소송을 걸어서 그래서 팔지도 못하고 그렇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책이 참 과학적이었어. 혹 그 책이 도서관에 있을는지.

아마 그 책이 이만할까. 그 안에 메트르의 유래가 노래로 지어 실었어요. “세상 많은 자 벌레가 제각기들 재는데”로 시작해서 재는 뜻이 깊었어요. 불란서 혁명 때 학자들이 모여서 의논한 결과 지구 둘레의 4백만분지 1을 표준으로 하자해서 메트르가 나왔다는데 그걸 노래로 쭉 했어요.

김흥호- 그 책을 어떻게 구할 수 없을까요?

홍일중- 그것 좀 알아봐야겠어요.

이상호- 그런데 함선생님 말씀을 들었는데요. 우선 함선생님 맘을 풀어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일동이 좀 풀자고 하시는건데 유선생님 영혼이 들으시고 푸셨을거라고 생각해서 함선생님을 위해서 대단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뭐 나중에 한 말씀 드렸으면 좋겠는데 또 이렇게 차례가 와서 말씀인데 뭐 저도 모르긴 모르지만 함선생님 다음으로 꽤 일찍부터 여러 해를 모시고 지냈어요. 제 생각으로는 선생님이 가지신 사상 학식 덕 생활을 고대로 물려받았으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자주 선생님을 찾아뵙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올시다. 그런데 선생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많은 가르침을 받았지요.

세검정 교회가 있어요. 그 옆에 이영기 목사 사택이 있었어요. 거기서 밤 12시까지 7-8인 내지 5-6인이 선생님 모시고 공부를 했어요. 그 때 재미있게 느껴질 것이 주역 풀이 말씀이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잊지 않고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말씀이 있는데 선생님 말씀이 “비유하면 어디를 찾아 갔는데 한방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한방에는 부처님이 계시고 한방에는 공자님이 계시다면 나로서는 세분 다 찾아뵙고 인사를 드린다.”는 말씀이었어요. 그 말씀이 그 때 절실히 제 생각에 새겨져 오늘날까지 그런 생각으로 지내오고 있습니다. 요즘도 교회에 다니지 않고 나는 내 식대로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서영훈- 저는 유선생님을 처음부터 찾은 것이 아니었어요. 그러니 함선생님께서 원효로로 이사 가신 직후인가 봐요. 함선생님을 찾아가니 선생님이 안 계시고 사모님 말씀이 선생님 한테 가셨다고 하셨어요. 그 때 나는 선생님의 선생님이 누구신지 모르죠. 그래서 나는 사모님께 물었지요. 선생님의 선생님이 누구십니까 하니 사모님 대답이 유영모 선생님이라고 했어요. 그 때 처음으로 유선생님 성함을 들었어요. 그래서 유선생님이 누구십니까 하니 아 유선생님을 모르십니까 돌아가신 사모님이 놀라워하셔요. 그러면서 유선생님께서 YMCA에서 강좌를 오랫동안 해오시는데 거기에 강의를 들으려 가셨다고 하셨어요. 속으로 함선생님이 또 강의를 듣는 그런 선생님도 계시는구나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나는 YMCA로 갔었지요. 그 때는 피난 수복 후라 조그만 판자 강의실에 나무판자 의자에 한 십여명이나 될까요. 함선생님은 제일 뒷자리에 앉아 들으시고 계셨어요. 나는 함선생님께 그저 인사만 올리고 그 옆에 앉아서 같이 선생님 말씀을 들었어요. 강단도 변변찮은데 말씀은 처음 갔으니 별로 듣지 못하였지만 직감적으로 오는 느낌이 이것은 지식이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할지 참 어지간히 저 높은 진리 가까이 가신 분이구나 그렇게 생각되었어요. 마침 그 때는 그렇게 여러 날 금식을 하시고 나오셨는데 피부로 바람이 솔솔 들어온다는 그런 말씀을 하시고 인상 깊었던 얘기가 더러 있습니다마는.

그 뒤 하루는 사상계사에 들렀더니 거기에 함선생님이 계셨어요. 그런데 함선생님께서 유선생님께서 입원해 계신데 같이 안가겠느냐 떨어져 낙상하시어 서울대학병원에 계시다는 거예요 그래서 같이 걸어서 가 뵈오니 부상하시고 일주일이 지났는데 의식이 회복되지 않았다고 그리고 고무 호수로 호흡을 하시는데 굉장히 호흡이 깊이시고 아프시다는 표시를 많이 하시는 것을 뵈었습니다. 그 후 27,8일 만에 처음으로 의식을 회복하셨다고 하니 그 뒤는 회복이 빨라 곧 퇴원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어요.

그러다 젊은 제가 직장에서 젊은이를 많이 상대하게 되는데 대학생들이 자꾸 오게 되자 저로서는 감당할 힘이 없고 또 제 직장이 적십자사이기 때문에 함선생님을 모시고 싶어도 함선생님께서 뭐 정치에 관여가 된다는 걸로 세상에 알려져 자꾸 모실 형편이 못되고 그래서 좀 답답해서 그러던 중 생각 끝에 유선생님의 말씀을 청하기로 하고 선생님을 찾아 선생님께서 깨달은 것을 가지고 인생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를 말씀해 주실 것을 요청했어요. 처음 생각은 서 너달 들을 생각이었어요. 장소는 적십자사 강단에서 할까 하다가 또 강단에서 하면 아침 저녁시간이 어렵고 해서 그래서 저희 집으로 했어요. 방이 한 20여명 모일 수 있어요. 처음에는 저녁에 모였죠. 늦은 봄인가 시작을 했는데 여름이 되니까 더워서 말씀을 듣다 졸기도 하고, 선생님께서 낙상하신 후는 처음 함선생님을 쫓아가서 듣던 때와는 다른 것 같고, 말씀이 자꾸 길어져서 한 시간 정도로 말씀을 드렸는데 두세시간씩 말씀하셨지요. 또 한가지 어려웠던 것은 젊은 사람들 앞에 놓고 강의를 하시면서도 한숨을 쉬시며 인간이 희망이 없다 인간은 구제하기 어려운거다. 이런 말씀을 자꾸 하셔서 민망스러웠던 일이 있었어요.

조경묵- 선생님께서는 불경과 노장사상 유교사상 등 이 모두 통틀어서 구약적으로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 사상에서 귀결이 되는 것이다는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높은 정신계에 이르셨고 또 이 세상에서 주역 등을 풀어서 일깨워 주려고 하신 그런 어른이신데 이 세상에 지극히 미미한 것을 등한히 안하시는 데 제가 놀라고 감탄했습니다. 선생님은 지극히 형이상적이면서도 지극히 형이하적이십니다. 1973년, 7, 8일 한 복중인데 저 관악산 계곡에서 일곱사람이 모여서 이른바 주지운동 발기 창립총회를 할 적에 선생님께서 거기로 오셨습니다. 돈 만원을 가지고 오셔서 내 놓으셨습니다. 그 때 송아지 한 마리가 사만원 정도 할땐데 지금 70만원이 됐으니 그 만원이란 돈이 오늘날 얼마마한 돈인지 여러분이 계산해 볼 수 있겠습니다. 지금 일본에는 소작인도 없고 지주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는 아직도 자작농이 37%밖에 안됩니다. 정부에 아무리 의뢰해도 정부에서 영세농을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태평양 바다에 몸을 던지는 심정으로 이일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삼백만원 현금을 삼년 저금해서 어느 청년 한사람을 자장농으로 육성하겠다는 그것을 이달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이것을 선생님 영전에 고해드리면서 감사드리며 제말은 마치겠습니다.

이성범- 잠깐 몇마디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뵈온 것은 해방 후입니다. 저는 경상도 출신인데 유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기독교는 아닌데 김교신 선생님 말씀을 먼저 들었어요. 함선생님 유선생님 이야기를 듣고 기회 있으면 찾아뵈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종로를 지나다가 YMCA에 선생님 강연하시는 광고를 봤어요. 그래 들어가서 선생님 말씀을 처음 들었어요. 아마 아까 말씀하신 서선생님과 동기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말씀을 듣고나니 서선생님 말씀대로 유교나 불교나 노자장자 여러 가지 말씀이 나오고 저도 역시 그런 방면에 좀 배운 것이 있고 해서 그 말씀이 대단히 좋았어요. 교회에 가서 듣던 말씀하고는 질이 다른 그런 말씀 같았어요. 그래서 이분이 대단한 분이구나 생각이 되었어요. 그 다음에는 가급이면 나갔지요. 직장이 허락하는 한 나가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제 직장이 강원도 화천에 옮겨져서 지금부터 14, 5년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 유선생님 모시고 이틀밤인가 사흘밤인가 주무시면서 말씀 들은 일이 있었어요. 글도 하나 써주신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 낙상하실 땐 그 땐 저는 몰랐습니다. 나중에 차도가 있을 때 제가 찾아와 뵈었어요. 그리고 그 다음 제가 서울로 직장이 옮겨지고 혹 무슨 문제가 풀리지 않고 속이 답답한 때는 등산코스 겸해서 선생님댁을 찾으면 선생님께서 집안터라 하는데로 내려가시어 말씀해 주셨어요. 그리고 여러해를 지냈지요. 그리고 차츰차츰 연세가 많아지시니까 말씀이 적어지시고 이 근년에는 와도 그저 알아보실 정도로 오히려 선생님보다도 사모님이 더 반기셨어요. 얼마 전에 뵙는데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줄은 몰랐고, 그런 관계로 해서 기독교만이 아니고 저는 유교 불교 광범위한데 제가 여러 가지 배운 점이 많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 모시고 있는 동안에 자주 못 와 뵌 것을 지금 참 많이 후회를 하고 좀 더 근실하게 배웠더라면 뭔가 더 얻은 것이 많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늘 하시는 말씀이 이 땅 보다는 저 하늘을 뚫고 솟나라는 말씀이 가장 잊혀지지 않아요.

전병호- 저는 일군입니다. 일생을 망치 들고 일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보통 사람은 말과 행동이 다른데 선생님은 일치합니다. 선생님의 소박하고 서민적인 생활태도가 저와 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성함을 처음 듣기는 가나안 농군학교를 하는 김용기 장로에게 들었습니다. 그러나 찾아뵙지는 못하였는데 하루는 해방 후 종로를 지나는데 YMCA에서 내촌감삼(內村鑑三) 기념 강연회에서였습니다.

고봉수- 저는 유선생님과 함선생님을 동시에 알게 되었습니다. 해방 다음해인가 김교신 선생님 추도강연을 YMCA에서 있었는데 연사는 함선생님, 송두용선생님, 유달영선생님이 하시는데 세분 가운데 송선생님이 앞서 하시고 유달영선생님이 하시는데 제목이「조선과 김교신」이라고 쓴 것을 임석 경찰관이 찢어버리고 강연을 못하게 하자 많은 청중이 일제히 하시오라고 고함을 치며 분이 여기는데 다음 함선생님이 나오셔서 서울 사람은 옥수수라 하고 지방사람은 강냉이라 하고 미국사람은 콘이라고 하지만 씨앗자체는 하나이듯이 마찬가지로 조선이나 한국이나 자체는 하나이니 내가 조선이라고 하거든 여러분은 한국 하시고 들으시오. 이 말씀에 장내에는 폭소가 일고 사건은 진정되었어요. 그 때 어느 분이 주일날 오후 두시에 유영모 선생님과 함선생님 말씀이 소강당에서 있다는 것을 알려 주어 가끔 다니며 말씀을 들었어요. 6.25가 터진 후 겨울에 부산에 피난 가서는 선생님들 소식은 감감하고 전 그때에 22살의 아이를 잃고 슬픔으로 제정신이 아닌 때인데 누가 일러 주기를 함선생님은 연세대 가교사에서 주일 오후 2시에 말씀 하시고 유영모 선생님은 부산 광복동 일본사람이 지은 기독청년회관에서 오후 7시에 말씀하신다고 하여서 그 곳으로 찾아가서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서울 수복 후 서울에 와서 다시 선생님들 소식을 듣지 못하였는데 서울대학 약국을 경영하는 이철우씨가 연구실에서 오후 두시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다고 일러주어서 찾아 갔어요. 7월 마지막 주였어요. 듣는 사람은 6, 7명밖에 안되었어요. 선생님께서 칠판에 둥근 원을 그려놓으시고 말씀하신 것이 지금도 기억됩니다. 막대기를 들어 칠판의 동그라미를 치시며 “내가 하누 종일 부르고 부르짖으나 난 너를 안다고 안하시니 난 너를 안다고 안한다” 하고 하셨어요. 이 말씀이 제 마음에 와 닿아 괴롭고 답답하든 마음이 가라앉고 새로운 사람을 다시 시작하는 힘이 되고 거듭남의 기쁨을 맛보았어요. 그 날도 세 시간정도 말씀하셨어요. 그 다음주일은 장소사정으로 그 장소에 모이지 못하고 정릉계곡으로 가게 되었어요. 절 앞에 모였어요. 선생님은 그때 굵은 베잠방이를 입으시고 밀집모자를 쓰셨어요. 스님이 나와서 법당 앞이니 모자를 벗으라고 하니 모자를 벗으시고 마루에 걸터앉으셨어요. 그러자 스님이 법당 앞이라 걸터앉지 못한다고 하므로 선생님께서 얼른 무릎을 꿇고 앉으시니 주지스님이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여 모두 방으로 들어갔어요. 선생님께서 불교의 오계와 십계를 말씀하셨어요. 그때까지 저는 불교는 미신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선생님 말씀을 듣고는 기독교나 불교나 입신이다 방언이다 절을 하고 세상적인 복을 구하는 것이 미신이고 근본은 한 진리요 생명임을 알게 되어 그만큼 불교와도 가까워졌어요. 그리고는 다시 정릉 계곡을 올라갔어요. 그때는 더울 때라 목욕하는 사람이 많아 그대로 산을 넘어 자하문으로 왔어요 돌다리를 건너는데 까지 선생님이 일행을 따라 오셨어요. 선생님 댁이 이 근처인가 하였더니 벌써 지나왔다고 하시었어요. 선생님은 그렇게 인자 하셨어요. 그 뒤도 YMCA 천막집에서 판지집으로 추운 때나 더운 때나 선생님 말씀을 들으러 다녔어요. 오늘까지 선생님의 말씀을 안들으면 사람의 뜻을 잃어버리는 것 같았어요. 제가 68년도에 서울에서 다시 강원도로 가게 되어 선생님께 이사 가게 된 것을 말씀드리니 선생님께서 본래 서울로 온게 잘못이라고 하시었어요. 그래서 제가 서울에 안왔으면 선생님을 못 만났을 것 아니냐고 대답하니 선생님께서 크게 웃으셨어요. 73년도 언제인가는 선생님 말씀이 하도 그리워 강원도에서 막차로 떠나 아침 일찍 서울에 도착하여 선생님 댁을 찾으니 아무도 없고 선생님 혼자 계시어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씀 드리고 돌아 나오는 길에 김(흥호)목사님이 오시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어요. 다시 가자고 해서 김목사님과 함께 선생님 말씀을 듣게 되었을 때 그 기쁨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강원도로 간지 얼마 후에 선생님께서 강원도 저의 집을 찾아 주셔서 참 반가웠지요. 그 후 적십자사 서영훈 선생님부부가 원주까지 오셨다가 횡성에 들려주시어 참 고마웠습니다. 지난주(이대 주일모임) 김흥호 목사님이「부활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부활은 하나님 만나는 것이다」라고 하신 선생님 말씀과 같아 감격하였습니다. 저는 선생님들을 만나는 게 부활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것이 건방진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서완근- 저는 천원군 광덕이 고향입니다. 선생님께서 그곳에 산을 사놓으셔서 내왕이 있어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을 경모하는 마음에서 벼르고 벼르다 구기동 이곳 선생님 댁으로 찾아 오게 되었습니다. 대문에 이런 글이 써붙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참을 찾고자 하거던 문을 두드리시오」

그 글을 읽고 나니 제자신이 더욱 부끄러워졌습니다. 내가 과연 참을 찾을 마음이 있는 사람인가 대문 앞에서 머뭇머뭇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집으로 내려갈까 망설이다가 죽을 결심으로 용기를 내어 대문을 열고 들어가 선생님을 뵌 일이 새삼스럽습니다.

염낙준- 저는 해방 후 종로를 지나다가 조그마하게 써붙인 집회광고를 보고 들어간 것이 선생님을 뵙게 된 시초입니다. 저는 그 전에 교회에 한 십년 다닌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닐수록 교회에서는 삶의 참 뜻을 찾는 핵심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회의를 느끼던 중 선생님을 만나게 되어 교회와는 인연을 끊고 선생님의 말씀으로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선생님의 말씀가운데 가장 기억이 남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극치는 하루에 한끼 먹는 일이다. 바르게 얻은 음식이란 뜻의 상의극치일정식(嘗義極致日正食)이라는 것입니다. 또 한말씀은 사람의 깊고 깊은 정신 활동을 그리신 강석삼천장상하통기심(腔錫三千杖上下通氣甚)입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공자(孔子)는 덕불고(德不孤)라 하였지만 덕(德)은 외롭다고

홍일중- 내가 선생님을 처음 뵙기는 여기 계시는 함선생님께서 전에 1957년인가 세브란스 에비슨관이라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거기서 두 분 선생님말씀을 듣게 된 때입니다. 그 때 저는 대학을 막 들어간 어린나이였습니다. 그것이 처음 유영모 선생님을 뵙고 유영모 선생이라는 존함을 듣고 알게 된 처음입니다. 그 때 선생님께서 지으신「마디 고디 굿세시 얼을 살린다」는 시를 소개해 주셨어요. 저에겐 그것이 일생에 굉장한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그 앞서 함선생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제마음속에는 회오리바람이 일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그 때 선생님을 알게 됐고 선생님에 대한 생각을 더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거기서부터 제방향이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고등고시 준비하다가 던져버리고 그 외 뭐 뭐 하다가 다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나니 세상을 사는게 점점 어려워졌어요.

오늘 제 가슴이 생수를 마신 듯 시원하고 통쾌합니다. 지난날 선생님 뵈러 오곤 하는데 오면 함선생님 말씀이 나왔었고 그럴 때마다 저는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좋을지 몰랐어요. 저는 늘 여기(구기동)도 오고 함선생님 댁에도 가고 이렇게 하면서 제나름대로 괴로운점이 있었습니다만 오늘 탁 트여서 참 시원합니다. 선생님 영이 이제 구김살 없는 맘으로 함선생님과 함께 대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다음으로 선생님에 대해서 잊을 수 없는 것은 그 때 무슨 일이 있어서 제가 꼭 그 일을 해야겠는데 해야 될까 안해야 될까 제 나름대로 고민을 하다가 그 때 선생님을 찾아 뵀어요. 제 말을 듣고 선생님께서 저의 손을 꽉 잡으시고 애기 웃음을 웃으시며 하시는 말씀이

「모름지 모름지기를 지키는 사람이 모름지기다.」

그 말씀을 듣고 모름지기 감히 나로서 모름지기가 돼 낼 수 있을까? 그래 그 때 그 일을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모름지기란 말의 깊은 뜻만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 쓰고 있는 홍일중(洪一中)은 선생님께서 1973년 2월 22일 제가 선생님을 모시고 온종일 여기서 머무르며 말씀을 드리고 듣고 하였어요. 그 때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그 때부터 제 이름으로 쓰고 있습니다.

제가 또 선생님께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한글 문제입니다. 저는 우리말을 순 우리말로만 써 나갈 수 없을까 그렇게 되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한글로는 개념화가 안되고 한자 조어로 된 말이라야 개념화가 된다 뭐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유영모 선생님께서 우리말 그리글에 뜻을 불어 넣으신 가장 훌륭한 분이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게는 선생님이 존경이 되고 잊을 수없는 선생님이십니다.

박영호- 우리 사람들은 금강산 같은 훌륭한 절경을 보게 되면 시인은 시로 읊고 싶을 것이고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싶을 것이고 사진사는 사진을 찍고 싶을 것입니다. 정신적인 우리의 금강산인 선생님의 인격을 대한 지금 솜씨 없는 무딘 붓이나마 한번 스케치를 해보고 싶은 것은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어떻든 준비는 해보자는 생각으로 한 15년동안 내 나름대로 자료를 정리해 왔습니다. 그중에 중요한 것은 김흥호 선생님께서 주로 하시어 전 그저 보조역할을 합니다마는 이제까지 힘닿는 대로 조사하고 수집해 왔습니다.

자료를 정리하면서 생각되기를 우리나라는 지금 중진국이 되고 선진국 대열에도 끼게 되었다느니 하지만 가난하기로는 흥부같이 가난한 나라인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어여삐 보시어 정신적인「참」의 박씨를 하나 주시어 거기에 박이 여러개 주렁주렁 열렸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 참의 박은 기성교회 기성종교를 극복하는 사상, 신앙사상이라 생각합니다. 유영모 선생님, 함석헌 선생님, 김교신 선생님도 한줄기에 달린 박이라 하겠습니다. 그 가운데 나는 유영모 선생님 박을 내 무딘 자성의 톱이지만 톱질을 해 박을 켜보려는 것입니다. 켜기만 하면 정신적인 보화가 쏟아질 것을 확신합니다. 문제는 우리나라로나 세계로나 정신빈곤이 문제입니다. 이 정신적인 빈곤을 해결하는데 미력이나마 바치고저 합니다. 지금까지 생애 편은 거의 완성이 되었는데 사상 편을 여러모로 분석하고 종합하고 있습니다마는 역시 사상편이 어렵고 어렵습니다. 다루기에 제 실력이 부치는 것을 통감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이오 하나님의 허락하시면 완성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김흥호- 저는 대학다니기 전까지는 일반교회에 다녔고 평양에서는 남산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일본 가서 비로소 우치무라(內村鑑三) 선생님의 제자들 되시는 분들이 거기서 강의를 해서 쓰카모토 도라지(塚本虎二) 선생,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선생 이런분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차차 무교회에 재미를 붙였는데 그때 노평구선생 고병려선생 이런분들하고 같이 쓰카모토 도라지(塚本虎二)선생 집회에 나갔습니다. 그 뒤 돌아와서 나도 의례 그 사람들 그룹에 끼여들터인데 유영모선생님 때문에 그 그룹에 못 섞이고 말았어요. 노평구 선생한테 말도 들었습니다마는 그분들 하는데 보다는 유선생님께 맘이 끌려 유선생님 집회에 나가고 그리고 또 세브란스 에비슨관에서는 함선생님 말씀도 듣게 되었습니다. 거의 그렇게 지내왔습니다. 그래서 저도 유영모 선생님 하신 말씀을 조금이라도 다른 아는 사람들에게 연결을 시켜줄까 해서「사색(思索)」이라는 개인잡지를 만들었어요.

둘째면에「말씀」이 선생님 말씀이고 맨 뒤에 늙은이(老子)가 선생님께서 옮기신 글입니다. 버들 푸름이라는 것은 선생님께서 일년동안 강의 하신 것을 속기한 것을 가지고 있어요. 그것을 송기득씨가 간추려서 실었어요. 그래서 이 사색지를 12년동안 계속하기로 했어요. 앞으로 7, 8개월 더 남았어요.

먼저 다석일지에 빠진 선생님 노-트와 성서조선 또 아까 말씀하신 최남선 선생이 발간한 잡지에 실리신 글 새벽지에 글이 있다니 그 글을 모아서 다석일지 별권을 지금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께서 자료를 가지고 계신 것을 내 주셔서 이번에 수록이 될 수 있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지금 박영호 선생님이 선생님 전기를 준비한다고 아까도 말씀했는데 그게 언젠지 빨리 오기를 바랍니다. 송기득 선생이 자기가 유영모 선생 평전을 쓰고 싶다고 그런데 유선생님의 말을(전용술어) 모르니까 말을 좀 알아야겠다고 그래서 제가 일년동안 모았던 속기록을 주었어요. 그걸 보고서 간추려가면서 선생님 말을 자기가 알아서 해보겠다고 그랬는데 그건 어느 정도까지 진전이 있는지 평전이 나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평전이 나오면 좋을거고 못나오게 되더라도 박영호 선생님의 전기는 나오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하고 지금 우리의 기대는 박영호 선생님 수고에 달려 있다고 보겠습니다.

 

다석일지 4권 1990년 6월
저작집30; 없음
전집20; 없음

1982.2.3 유영모 선생님 자택(서울 종로구 구기동 150)에서 1주기
함석헌, 김흥호, 전병호, 이상호, 홍일중, 서완근, 박영호, 서영훈, 조경묵, 이성범, 고봉수, 염낙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