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태학(divine saminary)/인문학 세미나

살림도방을 열며 선생님을 생각합니다 [ 오미아 박사]

▪살림문화재단▪ 2012. 11. 29. 23:06

 

 

 

 

살림도방을 열며 선생님을 생각합니다.

판교 운중동으로 이사를 오면서 생할의 기쁨이 하나 생겼다

아침이 열리는 때를 맞춰서 커튼을 걷으면 눈앞으로 햇살이 마중 나오고, 코가 뻥 뚤리는 듯한 상쾌한 공기를 가슴 가득 담고 나면 삶이 충만한 느낌, 생명이 움트는 느낌이 든다

또다시 시작된 하루를 감사히 받아들고 책을 펴서 읽다보면 어김 없이 배꼽 시계가 울린다

밥상을 차리고 가족을 불러 모아 서로의 입속으로 밥이 들어가는 모습만 보아도 영혼의 배가 불러오는 것 같다

아침을 함께하는 기쁨.

하루를 일생처럼 살아야겠다는 겸허한 마음이 드는 순간이다.

맑은 아이의 눈빛 속에 끝까지 함께 할 수 없는 아쉬움을 남기지 말아야지.

할아버지의 손길이 분주하게 움직일 때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잊지 않는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형식적인 인사말에도 진심이 담겨져 있다.

사랑하기에 너무도 사랑하기에 차마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내게 내일이 허락되지 않더라도 후회 없이 살 수 있기를 희망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살림이 별거인가 싶다가도 아침을 먹는 이 순간이 생명을 살리는 살림이며, 숭고한 행위임을 인정하게 된다.

죽임의 반대말 살림

그 살림을 잘 하는 방법은 다 살리기 위해 각자의 것들을 조금씩 덜어내는 것이다

내 아침 시간을 덜어서 모두의 식사를 준비 하는 일, 내 욕심을 덜어서 가족의 세간살이를 마련하는 일, 나만의 공간을 타자와 나누고 공유하는 일, 모두가 작지만 다 살리기 위한 큰 일 들이다.

더 나아가서 모두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버리고 견뎌야 하는 일들은 너무도 많다

나를 키워서는 절대로 실을 수 없는 큰 짐들이 내 앞에 버티고 선다.

인간의 의지만으로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나를 넘어서는 일은 죽음을 넘어서는 일만큼 힘든 일이다.

저절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된다.

아침마다 정한수를 떠 놓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또 비는 어머님의 간절한 기도가 세상을 살리는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간절함으로 하루를 견디고 일생을 이어가는 것이 아닐까

충족되는 않는 간절함이 있기에 인간은 다른 아침을 기다리고 다른 삶을 꿈꾸지 않을까

살림문화재단을 만들고 운영하게 된 계기도 이와 다르지 않다

다른 새날을 꿈꾸고 다른 세상을 만들고 싶은 간절함을 담았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설레이며 함께 할 날을 기다려 왔다

준비 모임을 하기 위해 지인들이 모였다

한국학연구소 방향으로 오라고 전하고는 주소를 알려준다

한국학연구소가 이전에 정신문화 연구원이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정신문화 연구원라는 말에 내심 깜짝 놀란다

젊은날 장난 삼아 “거기 정신병원이죠” 하며 장난전화를 했던 부끄러운 기억도 떠오른다.

정신문화연구원 원장을 겸하고 계신 선생님 덕분에 일주일의 반을 이곳에서 수업을 했다.

대학원생이라 해도 차편도 없고 길도 시원찮아서 올 때마다 불평이 산처럼 쌓이는 곳이었는데 산전벽해가 되서 이제는 새로운 신세계가 펼쳐져 있다

정문연에서 들었던 수업 내용 중에 이곳의 풍수지리가 말굽형으로 부자터가 될 것 이라고 하신 최창조 선생님 강의가 생각났다.

그때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들리던 이야기가 현실이 되어 내 눈 앞에 펼쳐진 것을 보니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돈 있으면 이곳에 땅을 사 두라시던 말씀을 안들은 것이 끝내 아쉽다.

땅값이 똥값이었어도 믿음이 없어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게 되는 어리석음에 가슴을 치는 일이 비단 이 일 뿐이겠는가

또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선생님의 말씀을 믿고 부자가 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내가 선생님이 되어서 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지금, 학생들은 나의 말을 얼만큼 신뢰하고 따를 수 있을까 반문해본다.자신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의 삶에 고민 한자락 덜어주기를 희망할 뿐이다.

 

그 시절 정신문화 연구원은 유물론에 대한 부정한 정부의 몸부림처럼 느껴졌다

유물론으로 무장된 젊은이들에게는 정신문화가 악의 축처럼 여겨졌다.

유물론에서 부정되는 전통적인 종교, 지식인들의 사상과 문화, 동아시아의 특수성 등이 구중심처와 같은 정신문화 연구원의 교정에서 박제화 되어가고 있었다.

정신문화연구원이 한국학연구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꾸준히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지금은 이시대의 화두처럼 그 명제들이 새로운 이념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 또한 상전벽해다.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서 정신문화가 중요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정명의 중요함을 일깨우는 사례가 아닐까 여겨진다.

얼마 전 다석유영모 선생님의 책이 출간되어서 반갑게 펼쳐보다가 낯익은 얼굴을 접하고는 한참동안 멍하니 있었다.

시경에서 유신이라는 말을 해석해서 나라에 바치고, 정신문화 연구원을 만드시는데 일등 공신이었던 우리 선생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판교 이곳이 나라의 기틀을 세울 수 있는 터라고 주장하셔서 국책대학원인 정신문화연구원을 세우고, 교통이 불편해서 오갈 수 없는 곳에 학생들을 기숙하면서 연구에만 전념하도록 가두는 제안을 하셨던 분이시다.

이곳으로 수업을 오면서 선생님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선생님께 반항하고 급기야 이곳을 정신병원 취급을 하며 장난 전화를 일삼는 치졸함도 서슴없이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마음 한자락에는 선생님의 진심이 담긴 말씀이, 눈물어린 열정이 학문에 대한 경외심이 또다시 발걸음을 돌리게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대적 양심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선생님으로서의 권위와 존경심을 느끼게 되는 것 또한 부정 할 수 없는지라 무척 혼돈스럽고 힘든 나날들 이었다.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제자분들 사진에서 그런 나의 선생님의 얼굴을 뵙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당시 어린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선생님의 뜻이 가슴으로 깨닫게 되고 맥락으로 이해되는 순간이다.

‘그 말씀이셨구나 그래서 그러실 수 밖에 없으셨나보다’ 하고.

뒤 늦은 깨달음을 얻었으나 이미 선생님의 부고를 접하고 해를 넘긴 후라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이 먹먹하다.

돌아가시기 몇해 전 우연히 음식점에서 뵙고 달려가 인사를 드리고 안부를 여쭈는 기회가 있었다.

90을 앞두고 계셨지만 여전히 열정적으로 후학을 가르치시고 계셨고, 더 공부 할 것이 많아서 하루가 바쁘시다는 푸념을 어린아이처럼 하시고는 한번 들리라고 주소를 주셨는데 이후에 찾아뵙지 못했다.

오래전 제자를 기억해주셔서 감사했고 여전히 존경스러운 학자의 모습으로 계서서 더더욱 감사했다.

살아계셨다면 제일 먼저 달려가 다석도방을 열었다고 알려드리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더욱 안타깝다.

아픈 제자를 찾아 오셔서 함께 침을 맞으시며 가족처럼 걱정해주시던 모습도, 아침 점심 저녁 식사를 챙겨 주시며 하루 반나절 이상을 함께 책을 읽어 주시던 모습도, 여자가 공부를 해야 나라가 부강해진다고, 여자가 세상을 지배하는 세상이 온다고 편애하시며 나를 불편하게 하셨던 모습도 이제는 뵐 수 없지만, 부족한 제자가 뒤늦게 선생님의 뜻을 깨닫고 부끄럽지만 이제라도 다시 공부를 하려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하늘이 내게 주신 명을 알고 그 명을 따르는 일, 지식과 경계를 넘어서 인간이 가야 할 길이 있음을 알려주셨던 선생님의 말씀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갑골문을 뒤지고 고문헌을 파헤쳐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얼이 우리가 알고 있던 좁은 유교가 아니고 우리가 생각하는 좁은 종교가 아님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선생님께 자랑할 일도 생겼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함께 공부할 동반자가 생겨서 선생님 흉도 보고 선생님 자랑도 하면서 밤을 세운다는 말씀도 드리고 싶은데 그 사람이 그때 함께 인사드렸던 신부님이라고 알려드리고 싶은데 방법이 없어서 혼자 말로 중얼거려 본다.

‘다석채플과 살림도방이 함께 살림을 차렸습니다. 한 가족을 이루고 각자의 역할을 하면서 함께 꾸려 나갈 겁니다.

선생님 꼭 지켜봐주세요’

갑자기 긴장이 되고 어깨가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아픈 환자는 병을 자랑해야 병이 낫고, 살을 빼고 싶은 사람은 다이어트 중이라고 외치고 다녀야 보는 눈이 무서워서 몰래 먹는 버릇이 고쳐진다고 했다.

선생님께 혼잣말이라도 운을 떼었으니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살림도방은 ‘차이와 다름을 넘어서 큰 나를 찾아가는 동반자들의 모임’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그에 걸맞게 방법을 제안하고 함께 궁리하자고 부르짖어야 하겠다.

그래야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내가 원하는 것이 진정 필요한 일인지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살림도방이 뭐하는 곳이냐고 물어 오면 서슴없이 함께 공부하는 곳이라고 말해야겠다.

살아내는 일이 가장 큰 공부임을 우리는 다석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미 배운 바가 있다

나만 사는 길이 아니라 다 살리는 길을 찾는 공부를 하는 곳이 살림도방이다

다방은 차가 중심이지만 도방은 도담이 중심인 공간이다

함께 수다를 떠는 곳이고 자연스레 차도 마시게 되겠지만 자기 생각을 강요하지 않고 일 없이 버리는 훈련을 하는 곳이 되길 바란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 말도 많고 탈도 많을 것이지만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일은 없는 법이다

가족을 다 살리고자 하는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처럼 살림도방이 운영되길 기원한다.

멀리서 선생님께서 도끼눈을 뜨시고 ‘이 놈’ 하실 것 같아서 딴 짓도 못 할 것 같다.

 

(살림문화재단 이사 / 디바인세미너리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