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태학(divine saminary)/인문학 세미나

[서민의 어쩌면]29년 후 |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살림문화재단▪ 2015. 3. 22. 13:30
 
[서민의 어쩌면]29년 후 |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2044년 4월, 한국 국민들의 눈이 뉴스 화면으로 쏠렸다. 아나운서가 흥분한 목소리로 인양 장면을 생중계하고 있었다.

 

 

“네, 드디어 선체가 인양되고 있습니다. 오랜 수색에도 찾지 못했던 실종자의 유해가 배 안에 있을지, 또 침몰 원인도 규명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2014년 304명의 희생자를 내며 침몰했던 세월호는 그 뒤 무려 30년간을 차가운 바닷속에 있다가 햇빛을 봤다.

“할아버지, 당시엔 인양 기술이 없었나 봐요? 이제야 배를 꺼내는 걸 보면.”

14살 손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해줬다. “그렇지 않아. 기술은 충분했단다. 다만 당시 정부가 인양에 적극적이지 않았어.”

손자가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아니, 왜요? 배를 꺼내야 사고 원인을 규명하지 않나요?”

손자의 당연한 질문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래. 하지만 정부는 진상규명을 원하지 않았던 모양이야. 오히려 세월호 사고를 그저 교통사고쯤으로 축소하려고 했으니까.”

손자가 되물었다.

“할아버지 생각은 어떤데요? 그게 정말 교통사고인가요?”

“세월호 침몰 자체는 교통사고로 볼 수도 있지. 그런데 말이다, 달리던 버스가 사고가 났는데 운전자는 물론이고 그 뒤에 온 경찰이 승객들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았다고 해보자. 그 뒤 버스가 폭발해 모두 죽었다면, 그걸 단순한 교통사고라고 불러도 될까?”

손자는 어이없어했다. 그게 도대체 말이나 되느냐고.

“세월호 사고가 바로 그랬어. 사고 당시 선장과 선원들은 학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만 반복했거든.”

손자가 바로 반박했다. “정말요. 선장이 판단을 잘못한 모양이네요. 하지만 해경이 왔을 거 아니에요. 그들은 왜 승객들을 대피시키지 않았죠?”

“믿기 어렵겠지만.” 난 차 한 잔을 마신 후 말을 이었다. 당시 사고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해경 구조선은 배에 들어가 승객들한테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그 대신 조타실로 가서 팬티 차림의 선장과 선원들만 구조했다고. 날 닮아 작은 손자의 눈이 일반인 수준으로 커졌다. “선원들만 구조했다고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그뿐이 아니야. 국방부 자료를 보면 해경은 해군의 최정예 잠수요원인 SSU 대원과 해군 특수부대(UDT) 요원이 도와주겠다는 걸 거절해. 또한 사고 직후 미군 소속 헬기 2대가 돕겠다고 왔지만 역시 해경의 거부로 그냥 돌아가지. 그뿐이 아니야. 구조작업을 돕는다고 전국에서 민간 잠수사들이 몰려들었지만, 그들의 도움 역시 거절해.”

손자의 얼굴이 분노로 바뀌었다.


“해경은 도대체 왜 그랬대요? 세월호 승객들을 구하지 말아야 할 이유라도 있었나요?”

“이것도 믿기 어렵겠지만.” 난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그 시절의 법은 사고가 났을 때 민간업체가 구조를 담당하도록 돼 있었어. 배가 침몰하면 회사가 구난업체를 선정해 구조를 부탁하는 것이지. 구난업체는 구조를 해야 돈을 버는데, 그 당시 해경은 ‘언딘’이라는 업체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단다. 그래서 해경은 언딘이 오기 전까지는 다른 누구도 구조에 뛰어들지 못하게 했던 거야.”

그 뒤 이 말을 덧붙였다. 마땅히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할 대통령은 “인명구조에 최선을 다하라”는 지시를 내린 뒤 무려 7시간여 동안 행적을 감췄다고.

“그럼 국민들은요?”

말도 안 된다면서 혼자 분을 삭이던 손자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런 걸 가지고 교통사고로 우기는 정부를 그냥 보고만 있었나요?”

국민 얘기를 하려니 갑자기 가슴이 갑갑해졌다.

“슬프게도 우리 국민들은 세월호 유족들을 적대시했어. 죽은 자식을 이용해서 한몫을 챙기려 든다고. 사실 유족들이 원한 것은 진상규명이었는데 말이야. 세월호 사건 후 한 달 반 만에 지방선거가 치러졌거든? 거기서 여당이 압승을 해요. 그 후에 있었던 재·보선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이에 자신감을 얻은 정부는 유족들을 대놓고 무시했지. 한 번만 만나달라고 사정해도 대통령은 듣지 않았으니까. 진상규명 특별법도 마지못해 통과시키기는 했지만, 아무 의미도 없었어.”

손자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니까 지금 세월호가 30년 만에 인양이 되는 것은 35년 만에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탓도 있는 거네요.”

난 씁쓸히 웃었다.

“그렇지. 그나마도 인양비를 국민성금으로 모았으니 망정이지, 세금으로 한다고 했으면 쉽지 않았을 거야. 그래도 다행이지. 내 살아생전 세월호가 인양되는 광경을 볼 수 있어서. 저승에서 그 학생들을 만나도 조금은 덜 미안할 것 같아.”

손자는 내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