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문화재단/다석류영모(多夕柳永模.1890~1981)

多夕 柳永模의 宗敎思想 . 姜敦求

▪살림문화재단▪ 2013. 4. 15. 22:05

 

多夕 柳永模의 宗敎思想

姜敦求


1.머리말


본 논문은 多夕 柳永模(1890-1981)의 종교사상을 살피고,그것이 한국종교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의의를 밝히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유영모는 지금까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종교사상가나 동방의 聖人으로 알려져 있는가 하면,한편에서는 기독교의 이단으로 신비주의적인 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는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가 남긴 저작물이 그다지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게다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에 매우 어려운 체재와 내용을 지니고 있어서 유영모의 종교사상에 접근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뒤 咸錫憲,金興浩,朴永浩 등 그의 제자들에 의해 유영모의 사상이 서서히 일반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일기인 ꡔ多夕日誌ꡕ가 1990년에 네 권으로 간행되었다. 그리고 박영호는 1994년과 1995년에 걸쳐 문화일보에 「多夕 柳永模의 생각과 믿음」이라는 제목의 글을 연재하여 유영모를 일반인들로부터 주목받게 하였다.

최근에 유영모는 비록 기독교 신학계에 국한되기는 하였지만 학계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유영모의 종교사상을 다룬 논문이 수 편 발표되었다.1) 이들 논문은 대체로 유영모가 기독교 이외의 타종교에 대해서도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끝까지 기독교 신자로 남았던 인물이었다고 지적하고 그를 다원주의 신학(pluralistic theology)의 선구자로 평가하고 있다.

유영모는 이들 천주교와 개신교 신학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그를 기독교의 테두리 안에서만 이해하고 평가하기에는 그의 사상의 폭이 보다 넓다. 물론 현금의 기독교 다원주의 신학자들도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 일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유영모는 기독교 이외에도 동양의 전통종교인 유교,불교,도교는 물론이고 서구철학과 인도사상에 대해서까지 폭넓은 지식을 겸비하였다. 따라서 유영모는 기독교의 테두리 안에 가두어 놓기 보다는 오히려 동양종교사상사,또는 한국종교사상사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

필자가 유영모를 접하게 된 것은 함석헌을 통해서이다. 함석헌은 스스로 자신의 스승 두 사람을 꼽는다면 우찌무라 간조우(內村鑑三)와 유영모를 들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필자가 함석헌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金敎臣의 무교회운동을 통해서이다.

김교신의 무교회운동은 우찌무라의 일본 무교회운동에서 비롯하였다. 주지하다시피 일본 무교회운동은 예를 들어서 재림 메시아가 일본에 출현할 것이라는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 민족주의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한국기독교 교회사학자들은 김교신의 무교회운동이 한국 민족주의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지적해 왔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일본 민족주의의 성격을 지닌 우찌무라의 일본 무교회운동에서 비롯한 김교신 등의 한국 무교회운동이 어떻게 한국 민족주의의 성격을 지닐 수 있을까?

처음에 필자는 김교신의 한국 무교회운동은 일본 무교회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이루어졌기 때문에 김교신의 무교회운동의 한국 민족주의의 성격은 일본 민족주의라는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 형성되고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았다.2) 그러나 나중에 한국 무교회운동은 종교적 성격의 측면에서는 일본 무교회운동을 따르고 있으나 민족주의적 측면에서는 일본 민족주의와 상관없이 한국 민족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3)

김교신,함석헌,內村鑑三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이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인물로 유영모라는 인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영모는 일본에 있을 때 우찌무라의 무교회 집회에 참석하였고,나중에 함석헌을 통해서 김교신과도 친분을 유지하였다. 유영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신앙이 무교회 운동의 그것과 다르다는 점을 수차례 지적하고 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유영모에 대해 직접 살펴볼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4)

그러던 중 존 매쿼리((John Macquarrie)가 쓴 ꡔ20세기의 종교사상(Twentieth-Century Religious Thought)ꡕ5)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은 원서의 부제인 ‘철학과 신학의 경계’(The Frontiers of Philosophy and Theology,1990-1980)에서 볼 수 있듯이 철학적 신학,즉 철학과 기독교 신학의 경계 영역에 관한 책이다. 이 책에서 직접 다루고 있는 20세기 서구의 사상가는 정확히 156명이다.

이 책을 보면서 필자는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하였다. 첫째,서구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철학만 알아도 안되고 기독교 신학만 알아도 안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우리 학계의 현실은 철학자는 철학만을,그리고 기독교 신학자는 기독교 신학만을 알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두 학문의 밀접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두 학문간의 교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다만 기독교 신학계에서는 철학 쪽에 일말의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그러한 관심을 종교철학이라는 분야에서 해소하고 있을 뿐이다.6)

그러나 우리의 철학계는 기독교 신학 자체를 학문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습성이 있다. 이로 인해 서구의 철학과 신학은 분명히 밀접한 관련을 맺고 전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계는 그러한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우리 학계의 이러한 경향은 철학과 기독교 신학 양 분야의 발전에 결코 바람직한 결과를 초래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둘째,우리나라의 경우 20세기 종교사상가로 손꼽을 만한 사람이 있다면 누구를 꼽을 수 있겠는가라는 문제이다. 비록 우리나라에 수용된 서구종교와 서구철학이 비교적 서로 관련성을 맺지 않고 전개되어 왔다고 하더라도 금세기 한국의 종교사상가로 손꼽을 만한 인물은 전혀 없는 것인가? 있다면 누구를 꼽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문제가 자연스럽게 제기되었고,이때 유영모라는 인물이 필자의 머리에 떠올랐다.

이때 또 하나의 논문이 필자의 머리에 떠 올랐다. 이 논문은 영국 에딘버러 대학의 종교학과 교수 훼일링(Frank Whaling)이 쓴 「종교학의 세계화」7)라는 논문이다. 훼일링은 이 논문에서 당시까지의 종교학이 서구 중심의 종교학이라고 지적하고 앞으로 종교학은 비서구 학자들의 참여 속에 진정한 의미의 세계적인 학문으로 도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비서구권의 종교가 비서구권 학자들에 의해 정당히 이해되고 그것이 세계 인류의 종교사의 맥락에서 올바로 자리매김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서구의 종교학자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비서구권의 학자들을 소개하였다. 그가 열거한 학자들은 쿠마라스와미(Ananda Coomaraswamy),라다크리슈난(Sarepalli Radhakrishnan),스즈키(D.T.Suzuki),부버(Martin Buber),나스르(Seyyed Hossein Nasr),움비티(John Mbiti),윙치찬(Wing-Tsit Chan)이다.

이 논문을 읽으면서 필자는 우리나라의 종교사상가나 종교학자들 가운데 훼일링이 열거한 비서구권의 인물들과 견줄 만한 사람이 있다면 누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이때 필자의 머리에 떠오른 인물이 역시 유영모였다.

유영모는 한마디로 종교적 지성인이었다. 사실 우리 시대는 유영모와 같은 종교적 지성인을 필요로 한다. 특정종교를 신봉하면서 그 종교에 관한 지식만을 소유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고 오히려 당연시 되는 분위기는 현재 우리의 종교 상황에 적절하지 못하다. 특정종교를 신봉하면서도 타종교에 대한 지식을 아울러 겸비하고 타종교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스스로의 신앙을 보다 잘 키워 나갈 수 있는 그러한 분위기가 우리에게는 절실히 필요하다. 아울러 특정종교를 신봉하지 않더라도 종교 일반에 대한 지식은 인간,사회,문화를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유영모라는 종교적 지성인은 여러 각도에서 연구될 수 있다. 첫째,그의 사상 을 밝혀내 일반인과 학계에 알리는 연구가 가능하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여타 다른 사상가들과 대비하여 유영모의 사상을 검증하고,또한 그의 사상을 재해석,발전시킬 수 있다. 그리고 나아가서 이러한 연구를 기반으로 유교,불교,기독교계 등 현실의 종교계를 향해서 나름대로의 발언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는 지금까지 유영모의 제자인 朴永浩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둘째,특정 종교의 신학이나 교학의 입장에서 유영모의 사상을 연구하여 자신의 신학이나 교학을 새로운 각도에서 재조명하는 연구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현재 기독교계 일부에서는 유영모의 사상을 종교다원주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그것이 다원주의 신학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측면에 주목하는 연구가 있어 왔다.

셋째,유영모의 기독교 이해,불교 이해,유교 이해,도교 이해 등이 각 종교의 본래 의미와 상이하다는 점을 밝히는 연구가 가능하다. 아직 유영모의 사상이 학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아직 그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알 수 없다. 만약 그에 대한 첫째와 둘째 시각에서의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면 셋째 시각에서의 연구도 병행될 수 있을 것이다. 사도신경과 예수의 代贖信仰을 부인하는 유영모의 사상을 기독교계가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단사냥’을 개시할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구시각들은 기독교신학을 비롯해서 불교학,유학은 물론이고 철학에서 많이 행해지는 인물 연구와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 본 논문은 이러한 시각과 다른 각도에서 유영모의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 논문은 우선 유영모의 사상의 형성과정과 내용,그리고 그것이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내용을 유영모의 사상 내부에서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그의 사상이 한국종교사에서 어떤 의의를 지니는지 그리고 그것이 현재와 미래의 한국종교 상황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예측해 볼 것이다.

본 논문이 추구하는 넷째의 시각도 결국 유영모라는 특정인물에 대한 연구이기 때문에 여타 학문에서의 인물연구와 같은 방법 아래 진행될 것이다. 유영모가 직접 남긴 글은 비교적 적은 편이다. 그나마 그가 남긴 글 가운데 상당 부분이 詩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종교사상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유영모의 사상을 더듬기 위해 다음의 순서대로 논지를 이끌어 나갈 것이다.

제2장에서는 유영모의 생애를 살펴보고 그의 사상을 살필 수 있는 자료들을 개략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제3장에서는 그의 사상의 형성과정을 살피기 위해 그가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톨스토이와 간디,그리고 內村鑑三의 종교사상 가운데 유영모의 사상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들을 살펴볼 것이다. 제4장에서는 그의 종교사상을 몇몇 핵심적인 주제를 중심으로 정리해 보고 제5장에서는 그의 사상이 咸錫憲과 朴永浩를 중심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제6장에서는 유영모의 종교사상이 한국종교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중요성을 지적하고 본 논문을 마무리지을 것이다.



2.유영모의 생애와 자료


가.유영모의 생애

유영모의 생애 91년은 보통사람들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그런 생애였다. 그는 30살도 되기 전에 이미 나이를 햇수로 세지 않고 산 날을 셈하는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의 일기를 보면 맨 처음에 연,월,일,요일,날씨를 적고 그 옆에 00000이라는 다섯 자리의 숫자가 있다. 이 숫자는 그가 태어나서 그때까지 산 날자 수를 말한다.

그는 51살 때부터 하루에 저녁 한끼만을 먹는 一日一食을 하였고 같은 시기부터 부인과 성생활을 하지 않고 잣나무 널 위에서 자는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21살에 오산학교 교사로 있을 때 오산학교의 초대 교장이었던 백이행으로부터 맨손체조를 배웠는데 이 맨손체조가 그의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었다.8)

그의 이러한 독특한 삶의 방식에도 불구하고 유영모의 생애는 그다지 화려하지도 요란하지도 않았다. 그의 아버지가 피혁상점을 경영하였기 때문에 유영모는 비교적 어렵지 않은 집안에서 자랄 수 있었다. 그는 한때 아버지가 경영하는 피혁상점에서 일하기도 하였고,1928년부터는 아버지가 차려 준 製綿所를 경영하여 스스로도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은 생활을 하였다.

그는 그 당시 유복한 가정의 자녀들과 마찬가지로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하였고 소학교도 다녔다. 16세 때인 1905년에는 金貞植에 의해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김정식은 게일 선교사와 함께 우리나라에 처음 기독청년회를 창립하고 초대 총무로 시무하였던 인물이다. 유영모는 그 당시 연동교회,새문안교회,승동교회가 시차를 두고 예배를 보았기 때문에 하루에 세 교회의 예배에 모두 참석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1905년 11월부터 1년 반 동안 일어학교에서 일어를 공부하였다. 이후 그는 신학문이나 서구사상에 대한 지식은 주로 일본어 책을 통해서 습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07년 9월부터 약 1년 반 남짓하는 동안 경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경신학교를 졸업도 하기 전에 이승훈에 의해 오산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갔다. 이승훈은 그 때까지 기독교신앙에 접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였으나 유영모를 통해 기독교에 접하게 되고 그로부터 오산학교도 기독교 이념에 의해 운영되었다.

1911년 동생 영묵이 죽자 유영모는 죽음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를 전후해서 그는 톨스토이에 심취하고 노자와 불경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교회와 예수와의 거리’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결국 기독교 정통신앙에서 탈피하여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오산학교 교사를 그만 둔 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물리학교에서 1년 반 정도 공부하였다. 이때 그를 기독교에 입문하게 한 김정식이 동경에 있는 한국기독교청년회의 총무로 있었다. 김정식은 內村鑑三과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유영모는 內村鑑三의 무교회 집회에 참석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영모는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빨리 무교회 신앙에 접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일본에서 귀국한 뒤인 1915년에 김효정과 결혼을 하였고,1917년에는 ꡔ청춘ꡕ에 「農牛」,「오늘」 등의 글을 발표하여 崔南善을 비롯하여 鄭寅普,文一平,玄相允 등과 知友가 되었다.

그러다가 1921년 9월에 그는 조만식의 뒤를 이어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으나 일제가 1년이 넘도록 교장 자격을 인정하지 않는 바람에 그 자리를 떠났다. 이때 함석헌이 오산학교 학생으로 재학하고 있어서 유영모와 함석헌의 역사적인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1928년에 그는 YMCA 총무 현동완의 주선으로 YMCA 연경반 모임을 시작하여 현동완이 죽은 1963년까지 계속하였다. 이 모임은 그 명칭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수녀,승려,유학자들까지도 참석할 정도로 특정종교의 성격을 이미 벗어나 있었다.

유영모가 金敎臣을 알게 된 것은 함석헌을 통해서였다. 함석헌은 일본에 유학할 당시 內村鑑三의 무교회 모임에서 역시 한국인 유학생이었던 김교신을 알게 되었다. 김교신은 1927년 귀국하여 자신이 주축이 되어 ꡔ聖書朝鮮ꡕ을 창간하고 무교회 모임을 주도하였다. 유영모는 일본에서 귀국한 함석헌을 통해 김교신을 알게 되었고,1928년에 김교신의 무교회 모임에서 처음으로 강연을 하였다. 유영모는 김교신의 신앙을 정통신앙이라 하고 자신의 신앙을 비정통신앙이라 하여 김교신과 자신의 신앙이 상이하다는 사실을 누차 언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영모는 김교신을 매우 가깝게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ꡔ성서조선ꡕ에 여러 차례 기고를 하였고 1942년에는 성서조선 사건9)으로 인해 두 달 가까이 구금되기도 하였다.

유영모는 1933년 아버지가 죽자 3년상을 마친 다음인 1935년 그의 나이 45살에 7년 동안 경영하던 제면소와 자신의 집을 팔고 구기동으로 이사하였다. 농사짓는 생활은 그가 일본에서 귀국할 때부터 지니고 있었던 꿈이었다. 그의 이러한 꿈은 톨스토이로부터 받은 영향이었다.

그는 1941년부터 一日一食을 하기 시작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부인과 성생활을 하지 않겠다는 소위 解婚宣言을 하고 실행에 옮겼다. 이때부터 그는 보통사람이 하기 힘든 금욕적인 생활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다져 나갔다.

一日一食과 解婚을 한 뒤 대략 1년이 지난 다음인 1942년 1월 4일에 그는 신앙생활의 轉機를 맞이하는 체험을 하고 이 날을 ‘거듭난 날’이라고 하였다. 이 때의 체험을 그는 「부르신지 38년만에 믿음에 들어 감」이라는 시로 써서 ꡔ성서조선ꡕ10)에 실었다.

김교신은 이 시를 ꡔ성서조선ꡕ에 실으면서 ‘놀라운 入信의 光榮’이라는 자신의 글을 앞부분에 덧붙였다. 김교신은 이 글에서 “표범의 變皮를 보고저 원하는 이들아 多夕齋 선생의 入信한 전말을 詳讀해보라. 돌같이 차고 죽었던 理知의 塊가 무르녹아 생명에 躍動하는 신앙의 光榮을 와보라”라고 하여 유영모가 머리로 생각하는 신앙생활에서 가슴으로 믿는 신앙생활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유영모 자신도 이 체험의 내용을 ‘破私歸天’11)이라고 표현하였다. 그의 이러한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이때 자만심을 완전히 버리고 신에게 복종하는 신앙생활을 새로이 시작하였다.

유영모는 1946년에 전라도 광주에 있는 금욕적인 수도집단인 동광원을 알게 되어 이후 그곳을 수 차례 방문하였다. 그는 그 당시 동광원의 금욕주의적인 신앙생활에 매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광원의 소위 기독교 정통신앙의 입장과 자신의 입장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유영모는 결국 그 곳과의 교류를 단절하고 말았다.

1955년에 그는 1년 뒤 특정일에 자신이 죽는다는 사망 예정일을 선포하여 세인의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 해부터 1974년까지 계속해서 일기를 써 나중에 이 일기가 그의 제자 金興浩에 의해 ꡔ多夕日誌ꡕ로 묶여 영인되었다.

그의 생애를 돌아볼 때 그가 가장 창조적으로 생각하고 활동한 시기는 대략 194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의 30 여년의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는 그의 나이가 50대에서 70대까지의 시기이다.



나.유영모에 대한 연구 자료

유영모는 학계에 비교적 최근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유영모의 사상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1차 자료와 2차 자료들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유영모의 사상을 연구할 수 있는 1차 자료는 유영모가 남긴 일기,그리고 그가 YMCA에서 한 강의를 제자들이 정리한 것과 그가 ꡔ성서조선ꡕ,ꡔ청춘ꡕ 등에 기고한 글들이다.

유영모는 1955년 4월 26일 사망 예정일을 선언한 날부터 1975년 1월 1일까지 그의 나이로 65세에서 85세까지 일기를 썼다. 김흥호는 그의 스승 유영모가 남긴 일기를 세 권으로 영인하였다. 그리고 김흥호,박영호,서영훈은 다시 여기에 유영모에 대한 참고자료를 첨가하여 ꡔ多夕日誌ꡕ12) 네 권으로 간행하였다. 유영모는 일기를 쓰기 전에 일기 형식이 아니라 비망록 형식으로 글을 남겼는데 이 글은 ꡔ다석일지ꡕ 제4권에 실려있다.

그가 YMCA에서 행한 강의는 제자들의 노력에 의해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다. 김흥호는 1956년부터 1957년까지의 강의 내용을 속기사를 시켜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이것을 다시 정리하여 자신의 개인 잡지인 ꡔ思索ꡕ에 연재하였고,이것을 다시 ꡔ제소리ꡕ13)라는 책의 제2부 「버들푸름」에 32개의 주제로 나누어 실었다. 그리고 유영모의 강의 내용은 ꡔ제소리ꡕ에 실려 있는 것에 다시 송기득 등이 정리한 강의 내용이 추가되어 ꡔ다석일지ꡕ 제4권에 46개 주제와 ‘與空配享’이라는 제목의 글로 나뉘어 실려 있다. 1960년과 1961년의 강의 내용은 그 당시 서울대학교 학생이었던 주규식이 정리하였다. 그것은 ꡔ多夕語錄ꡕ 제3부와 제4부에 실려 있다.

유영모가 ꡔ聖書朝鮮ꡕ 등의 잡지에 기고한 글들 가운데 중요한 것은 김흥호가 펴낸 ꡔ제소리ꡕ의 제3부 「글월」에 실려 있다. 그리고 여기에 ꡔ靑春ꡕ 제14호(1918년)에 실렸던 「오늘」이란 제목의 글이 첨가되어 다시 ꡔ다석일지ꡕ 제4권에 실려 있다.

대체로 이상이 유영모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 참고할 수 있는 1차 자료들이다. 아래에서는 유영모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 참고할 수 있는 1,2차 자료들을 출판 연도별로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


-김흥호,ꡔ제소리ꡕ,풍만,1983

김흥호는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와 校牧을 역임한 인물로 일찍이 일본에서 유학할 때 무교회주의에 심취하였다. 그러다가 귀국해서 유영모를 만난 이후 무교회주의를 떠나 유영모로부터 배운 인물이다.

이 책에는 ꡔ다석일지ꡕ에 실려 있는 우리말 시 80수에 대해 김흥호가 해설한 제1부 「말씀」,유영모가 1956년에서 1957년까지 YMCA에서 강의한 내용 가운데 32개의 주제를 선택해서 실은 제2부 「버들푸름」,그리고 유영모가 ꡔ성서조선ꡕ 등에 발표한 글 13편이 제3부 「글월」에 실려 있다.


-朴永浩,ꡔ多夕 柳永模의 生涯와 思想ꡕ,弘益齋,1985

이 책은 유영모가 생존해 있을 때 그의 傳記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박영호가 그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와 유영모의 제자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서 박영호가 쓴 책이다. 이 책은 유영모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입문서로서 가치가 있다.


-朴永浩,ꡔ씨의 말씀-多夕思想精解(卷一)ꡕ,弘益齋,1989

이 책에는 유영모가 1958년에서 1960년 사이에 쓴 시 열 네 수,그리고 1955년과 1971년에 쓴 시 각각 한 수씩 도합 열 여섯 수가 실려있다.14) 박영호는 이 책에서 열 여섯 수의 시를 우선 유영모 식으로 우리말로 바꾸고 그 시의 뜻을 자기 나름대로 풀이하였다. 따라서 이 책은 유영모의 사상과 박영호의 사상이 융합되어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박영호는 이 책에서 유영모의 사상을 정리하면서 한편으로는 그의 사상을 동서고금의 사상가들을 동원하여 검증해 나가는 방법을 이용하고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유영모 못지 않게 박학다식한 박영호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유영모가 ꡔ多夕語錄ꡕ에서 언급하고 있는 서구사상가들로는 피타고라스,스토아사상가,데카르트,칸트,아담 스미스,페스탈로찌,마르크스,엥겔스,아인슈타인 등이다. 박영호는 ꡔ씨의 말씀ꡕ에서 유영모가 언급한 사람들 이외에도 르낭,키에르케고르,헷세,슈바이처,불트만,야스퍼스,카시러,토인비 등의 서구사상가들을 언급하고 있다. 박영호는 이들도 유영모와 유사한 사상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 책에서 박영호는 기독교의 목사들이 바이블의 한 귀절을 중심으로 설교를 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유영모의 시를 중심으로 유영모의 사상과 자신의 사상을 피력하였다.

 

-ꡔ多夕日誌ꡕ,제1권-제4권,弘益齋,1990

이 책은 유영모가 죽은 뒤 김흥호에 의해서 상·중·하 세 권으로 영인되었다가 홍익재에서 1990년에 총 네 권으로 다시 간행되었다.

제1권에는 1955년 4월 26일에서 1961년까지의 일기가 실려 있는데 이 가운데 1957년 12월 6일에서 1958년 10월 8일까지의 일기는 누락되어 있다. 제2권에는 1962년에서 1970년까지의 일기가 실려 있다. 그리고 제3권에는 1971년에서 1975년까지의 일기가 실려 있는데 이 가운데 1972년 3월 17일에서 1973년 4월 13일까지의 일기가 누락되어 있다.

제1권에서 제3권에는 유영모가 친지를 만난 일,지방에 여행을 갔다 온 일,관심있는 신문 기사의 스크랩 등을 제외하면 거의가 종교의 경전들에서 발췌한 기록이나 또는 자신의 시 등이 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지럽게 실려 있다.15)

제4권에는 유영모의 자필 이력서와 비망록 형식으로 남아 있는 1955년 이전의 기록이 실려 있다. 1955년 이전의 기록 가운데 눈에 띠는 것으로는 우리나라 주요 도시의 위도,우리나라가 정오일 때 다른 나라의 시각,김교신과 이승훈의 태어난 날과 죽은 날,유영모의 8대까지의 족보와 선조들의 묘의 위치를 그린 그림,陶淵明의 「勸農」이라는 漢詩와 張橫渠의 「西銘」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제4권에는 ꡔ道德經ꡕ과 「般若心經」의 우리말 옮김,유영모가 편술한 ꡔ메트로ꡕ(開成社,1928년),유영모가 YMCA에서 행한 강의 속기록과 강의안 일부,그리고 ꡔ청춘ꡕ,ꡔ동명ꡕ,ꡔ성서조선ꡕ,ꡔ새벽ꡕ 등에 기고한 유영모의 글이 실려 있다.


-박영호,ꡔ에세이 노자 - 빛으로 쓴 얼의 노래ꡕ,무애,1992

유영모는 YMCA에서 처음 강의를 할 때 주로 「요한복음」과 ꡔ도덕경ꡕ을 가지고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6) 그리고 그는 ꡔ도덕경ꡕ을 완역한 1959년 그의 나이 69세 때부터는 ꡔ도덕경ꡕ을 집중적으로 강의하였으며,기독교의 바이블 다음으로 ꡔ도덕경ꡕ을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7)

이 책은 유영모가 번역한 ꡔ도덕경ꡕ을 풀이한 책이다. 이 책에서 박영호는 유영모가 번역한 것과 원문을 81개의 章으로 제시하고 각 장마다 자신의 생각을 제시하였다. 이 방식은 박영호가 이미 ꡔ씨의 말씀ꡕ에서 사용한 방식이다.


-박영호 엮음,ꡔ多夕語錄ꡕ,弘益齋,1993

이 책은 유영모가 1956년과 1957년,그리고 1960년과 1961년에 YMCA에서 행한 강의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1956년과 1957년의 강의 내용은 김흥호가 속기사를 시켜 기록한 것을 정리한 것이고,1960년과 1961년의 강의 내용은 당시 학생이었던 주규식이 노트에 적어 놓은 것을 다시 정리한 것이다.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유영모의 강의 내용은 김흥호의 ꡔ제소리ꡕ와 ꡔ다석일지ꡕ 제4권에도 실려 있다. ꡔ제소리ꡕ와 ꡔ다석일지ꡕ 제4권에 실려 있는 유영모의 강의 내용은 특정 제목 아래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ꡔ다석어록ꡕ은 맨 앞의 차례에는 내용을 알 수 있는 소제목들이 나열되어 있으나 책의 안에는 파스칼의 ꡔ명상록ꡕ이나 간디의 ꡔ날마다 한 생각ꡕ의 형식을 연상시키듯이 짧게는 서 너 줄,길게는 열 줄 넘을 정도까지의 내용이 계속해서 나열되어 있다.

이 책은 1950년대 중반 이후 4년 정도의 강의 내용을 수록하고 있기 때문에 유영모의 사상의 전개과정이나 전모를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자료이다. 그러나 ꡔ제소리ꡕ와 ꡔ다석일지ꡕ 제4권,그리고 ꡔ다석어록ꡕ에 실려 있는 내용은 우리가 유영모의 사상을 직접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박영호 엮음,ꡔ동방의 성인 다석 유영모ꡕ,무애,1993

이 책은 2부로 되어 있다. 1부에는 유영모에 대한 추모문과 유영모에 대한 글들이 실려 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글들은 유영모의 제자인 함석헌,김흥호,박영호 등과 김교신,송두용 등 무교회주의자들,그리고 유영모가 생존해 있을 때 그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썼다. 이 글들을 통해서 우리는 유영모의 개인적인 인품,삶의 모습 등을 살필 수 있다.

2부에는 박영호,김흥호,이성담의 글 네 편이 실려 있는데 이 글들은 논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논문들은 유영모를 학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 주고 있다.


-朴永浩 編,ꡔ오늘ꡕ,성천문화재단 출판부,1993

이 책은 유영모의 글들 가운데 일부를 뽑아 실은 비교적 적은 분량의 책이다. 처음에 실려 있는 「오늘」이라는 글는 유영모가 1918년 4월 5일자 ꡔ청춘ꡕ에 기고했던 글로 ꡔ다석일지ꡕ 제4권에는 누락되어 있는 글이다. 이어서 金貞植과 文一平이 죽은 뒤 유영모가 쓴 추모문,유영모가 번역한 「天符經」을 박영호가 풀이한 글,그리고 유영모가 YMCA에서 강의한 내용과 ꡔ성서조선ꡕ에 실린 글들이 수 편 실려 있다.

이 책은 박영호가 일반 대중을 위해 유영모의 글 가운데 접하기 어려운 것들을 편집해서 내놓은 책이다.


-박영호,ꡔ中庸 에세이 - 마음 길 밝히는 지혜ꡕ,성천문화재단,1994

유영모는 1960년대 후반 광주 무등산에 있는 제자 金正鎬18)의 목장에 머무는 동안 ꡔ中庸ꡕ을 우리말로 완역하였다. ꡔ中庸ꡕ은 유교 경전 가운데 유영모가 유일하게 완역한 경전이다. 이를 통해 그가 ꡔ中庸ꡕ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책은 유영모가 번역한 ꡔ中庸ꡕ을 풀이한 책이다. 이 책에서 朴永浩는 유영모가 번역한 것과 원문을 각 장별로 제시하고 각 장마다 자신의 생각을 제시하고 있다. 이 방식은 박영호가 이미 ꡔ씨의 말씀ꡕ과 ꡔ에세이 노자ꡕ에서 사용한 방식이다.


-박영호,ꡔ多夕 柳永模의 생각과 믿음ꡕ,문화일보,1995

박영호는 1994년에 「다석 유영모의 생각과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ꡔ문화일보ꡕ에 유영모를 소개하는 글을 연재하였다. 이 책은 ꡔ문화일보ꡕ에 연재되었던 글을 다시 묶어서 출판한 것이다. 이 책은 신문에 연재된 것인 만큼 일반 대중들이 유영모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입문서이다.


-박영호,ꡔ多夕 柳永模의 기독교사상ꡕ,문화일보,1995

이 책은 앞의 책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판되었다. 전체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첫째 부분은 ‘다석사상에서 본 예수’라는 제목 아래 유영모가 예수를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박영호가 설명한 부분이다. 둘째 부분은 유영모가 번역한 요한복음 17장을 각 절별로 박영호가 풀이한 부분이다. 그리고 셋째 부분은 유영모가 번역한 기독교의 주기도문을 중심으로 박영호가 풀이한 부분이다.

이 책은 유영모의 종교사상이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리와 어떻게 다른지를 알게 해 준다.


-박영호,ꡔ多夕 柳永模의 불교사상ꡕ,문화일보,1995

이 책은 유영모가 번역한 「般若心經」을 중심으로 유영모의 불교사상을 박영호가 풀이한 책이다. 이 책은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유영모가 이해한 불교사상과 박영호가 이해한 불교사상의 차이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이 책의 서술방식은 ꡔ에세이 노자ꡕ와 ꡔ중용 에세이ꡕ의 그것과 동일하다.


대체로 위에서 제시한 책들이 유영모를 연구하는 데 참고해야 할 자료들이다. 유영모는 나름대로 일관성과 정합성을 지닌 종교사상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많은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그나마 그의 저술들은 그의 제자들 조차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형식과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유영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박영호를 비롯한 제자들의 글인 2차 자료들까지 참고할 수 밖에 없다.



3.톨스토이,간디,內村鑑三 그리고 유영모


본 장에서는 톨스토이,간디,內村鑑三의 종교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유영모의 종교사상에 앞서 톨스토이,간디,內村鑑三의 종교사상을 먼저 살피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이유는 유영모가 이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종교사상의 형성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이다.

제2장에서 지적하였듯이 유영모는 15세에 기독교 신앙에 접한 뒤 처음으로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했을 당시까지는 소위 정통 기독교신자로 자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산학교에 재직하고 있으면서 그는 內村鑑三,톨스토이,간디에 접하게 되었다. ꡔ다석일지ꡕ나 ꡔ다석어록ꡕ을 보면 유영모는 이들 세 사람에 대해 다른 어느 사람들보다도 많이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에서부터 우리는 유영모가 이들 세 사람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유영모가 가장 많이 영향을 받은 인물이 톨스토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간디로부터 받은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비록 그가 內村鑑三을 정통 기독교인으로 규정하고 자신과 톨스토이를 비정통 기독교인으로 간주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가 內村鑑三으로부터 받은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이들 세 사람의 종교사상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유영모의 종교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보다 좋은 여건에 놓이게 될 것이다.

둘째 이유는 유영모의 종교사상이 전혀 근거가 없는,다시 말해서 황당무계한 종교사상도 아니고 유영모의 종교사상이 세계 最高의,그리고 세계 唯一의 종교사상도 아니라는 점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특정의 종교사상가를 이해할 때 흔히 두 가지 오류에 빠지기 쉽다.

첫째 오류는 그의 종교사상이 황당무계하고 전혀 근거가 없다고 쉽게 간주하는 오류이다. 우리는 톨스토이,간디,內村鑑三의 종교사상을 일별하면서 그들의 종교사상과 유영모의 종교사상이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톨스토이,간디,內村鑑三은 이미 세계가 인정하고 있는 종교사상가들이다. 이들의 종교사상과 유영모의 종교사상이 여러 면에서 서로 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했을 때 우리는 유영모의 종교사상을 전혀 근거가 없다거나 또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둘째 오류는 특정의 종교사상가를 세계 最高의,그리고 세계 유일의 사상가로 쉽게 간주하는 오류이다. 우리는 톨스토이,간디,內村鑑三의 종교사상과 유영모의 종교사상을 대비해 보는 방법을 통해서 유영모의 종교사상을 좀더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세 사람 각각의 종교사상을 다루는 것만으로도 방대한 작업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들 각각의 종교사상 가운데 유영모의 종교사상과 상통성이 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부분만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가.톨스토이의 종교사상

유영모가 톨스토이에 대해 알게 된 경위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톨스토이가 1910년 11월에 죽자 오산학교에서도 톨스토이의 추도식이 있었는데 당시 톨스토이에 심취해 있던 이광수와 함께 유영모도 참석하였다.19) 그리고 최남선은 4행 한 수로 72수나 되는 긴 弔詩를 그가 발행하는 ꡔ소년ꡕ20)에 실었다. 약간 뒤의 일이기는 하지만 기독교 계통의 신문에도 톨스토이와 간디에 관한 글이 실리기도 하였다.21) 따라서 톨스토이와 간디는 그 당시 지성인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유영모가 톨스토이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었다.

게다가 유영모는 1911년 그의 동생 영묵이 죽자 죽음의 문제에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노자와 불경을 읽었으며 아울러 톨스토이에 심취하였다.22) 이렇게 해서 유영모는 톨스토이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고 점차 정통기독교 신앙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유영모의 종교사상을 살피고 톨스토이의 종교사상을 살펴보면 두 사람의 종교사상은 거의 같다고 할 정도로 유사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삶의 방식도 매우 유사한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23) 아마도 혹자가 유영모를 톨스토이안이라고 하더라도 유영모는 이러한 지적에 결코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톨스토이는 중년의 방황을 처음에는 러시아정교회의 신앙을 통해 극복하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당시의 러시아정교회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스스로의 신앙을 정립해 나갔다. 그의 나이 51세가 되던 해에 ꡔ교회와 국가ꡕ라는 글을 시작으로 톨스토이는 종교에 관련된 많은 글을 발표하였다. 그는 1880년에 착수한 ꡔ참회록ꡕ을 1882년에 발표하였고,1884년에는 ꡔ나의 종교ꡕ24)를,그리고 1887년에는 ꡔ참회록ꡕ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ꡔ인생론ꡕ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그는 1901년에 소설 ꡔ부활ꡕ로 인해 러시아정교회로부터 정식으로 파문을 당하였다. 톨스토이에 대한 러시아정교회의 파문은 톨스토이에 대한 찬반 양론으로 나뉘어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이에 곧 톨스토이는 여러 사람이 즉각적으로 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입장을 신문에 공개하였다.25) 이어서 그는 1902년에 ꡔ종교란 무엇인가,또한 그 眞髓는 어디에 있는가?ꡕ26)라는 제목의 책을 발표하였다. 아래에서는 이러한 책들을 중심으로 톨스토이의 종교사상을 일별해 보도록 하자.

톨스토이의 종교사상은 먼저 당대의 시대적인 상황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한다.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보자


인류는 승려계급에 의해서 결박되어 있는 최면술의 세계와 학자 제현들에 의해서 인도되고 있는 최면술(과학만능주의,과학이 종교를 대체한다는 생각)의 세계로부터 탈피함으로써만 모든 재액과 불행으로부터 구원될 수 있다.27)


톨스토이는 이와 같이 당대의 과학과 위선적인 종교가들로부터 인류가 피해를 당하고 있다는 인식 아래 종교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그리고 그는 한편으로 당대의 종교인 러시아정교회가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적인 입장을 개진하였다.

예를 들어서 그는 다른 교파들에 대한 배타적인 행태와 번잡한 儀式에 대해 거부감을 표시하였고28),기독교의 주요 교리인 삼위일체론29),원죄론,예수의 동정녀 탄생설 등을 부인하였다.30) 그리고 그는 종교의 타락은 모두 ‘①성직계급(중재자), ②기적에 대한 믿음, ③경전에 대한 믿음’에 기인한다고 하고,31)참된 신앙은 결코 비합리적이지 않고 현대적인 지식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32)

당대의 종교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인 인식 아래 톨스토이는 모든 종교는 근본적으로 동일한다는 종교일치사상과 함께 종교의 요점을 아래와 같이 제시하였다.


만물의 本源으로서의 신의 존재는 절대적이고 유일하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이 본원으로서의 신의 소부분이 구비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은 각자의 생활방법 여하에 따라 자기 내부에 살고 있는 神的 本源의 일부분을 증대시킬 수도 있고 감소시킬 수도 있다. 이 본원을 증대하려고 원한다면 각자가 자기의 욕정을 억압하고 자기 내부에 사랑을 증대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 목적을 달성하는 실제적 방법은 자기가 남에게서 도움을 받기를 원하듯이 남에게 먼저 그것을 행하라는 한 가지에 있다. 이것이 모든 참된 종교의 주의강령의 요점이다.

이러한 주의강령은 바라문교에도,유대교에도,유교에도,기독교에도,이슬람교에도 모두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다. 비록 불교가 신의 定義를 부여하지 않는다 해도 어쨌든 역시 인간이 그것에 융합해서 하나로 되는 본원,열반에 이르면서 자기의 小我를 잊어버리는 본원,그러한 본원을 인정하는 데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인간이 열반에 달함으로써 하나로 결합되는 곳의 본원은 유대교나 기독교,이슬람교에 있어서 신으로 인정되고 있는 본원과 결국 같다.33)


‘사람의 마음은 신의 불을 켜는 촛대이다’라고 헤브라이의 속담은 말한다. 그렇다. 마음 속에 신의 불이 타지 않는 한 인간은 불행한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이 불이 타기 시작하는 그 날에는(이 불은 종교에 의해서 開眼을 얻은 마음 속에서만 불타는 것이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로 된다. 그리고 이것은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이럴 경우에 인간의 내부에서 행동하는 것은 본인의 힘이 아니고 신의 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것이야 말로 참된 종교이고,또 眞髓이다.34)


이상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톨스토이는 인간을 무한의 일부로35),그리고 이 우주를 이 무한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것으로 보았다.36) 그리고 그는 신은 靈인데 그 신의 발현이 우리들의 내부에 살고 있고,우리는 각자의 생활에 의해서 이 신령의 힘을 증대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37) 그는 그러기 위해서 인간이 동물적 자아가 요구하는 개인적인 행복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38),자신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다른 존재를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9)

이러한 톨스토이의 종교사상이 유영모의 종교사상과 어떻게 상통하는지는 제4장에서 구체적으로 알게 될 것이다.



나.간디의 종교사상

유영모는 일기에 자신의 생년월일과 함께 간디,內村鑑三,함석헌의 생년월일을 함께 적어 놓기도 하였다.40) 그는 이들 세 사람에 대해 남다른 감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예를 들어서 “간디는 1869년 10월 2일에 출생해서 1948년 1월 30일 인생을 졸업하였으니 올해(1957년)로 9주년을 맞는다”41)라든가,또는 “간디주의라고 할까 하는 것은 眞理把持 이것이었다. 眞理把持는 참(眞理)을 꼭 붙잡는다는 뜻이다”42)라는 등 YMCA 강의 도중 간디에 대해 자주 언급하였다.

유영모가 간디로부터 받은 영향은 톨스토이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유영모가 간디의 삶의 방식으로부터 받은 영향이고,둘째는 간디의 종교사상으로부터 받은 영향이다.

유영모가 一日一食을 한 것은 간디로부터 받은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43) 간디는 자기 아들 삼형제에게 학교교육을 일부러 안시켰는데 유영모도 자식에 대한 학교교육에 반대하였다.44)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영모는 간디의 금욕주의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간디는 금욕생활을 하는 데 중요한 것으로 ‘①마음의 결심과 기도, ②먹는 것의 절제, ③부부가 각각 다른 방을 쓰는 것’을 지적하였는데 유영모도 이와 비슷하게 ‘①하느님에의 복귀, ②하루 한끼 먹기, ③널판지 위에서 잠자기’를 실천하였다.45)

주지하다시피 간디는 톨스토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톨스토이는 러시아정교회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도교와 불교 등 동양종교에 대해서까지 알고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간디도 힌두교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기독교,이슬람교,불교,조로아스터교 등 여러 종교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톨스토이가 ‘악에 대한 무저항’에 관심을 가지고 이타적인 사랑을 강조하였듯이 간디도 비폭력 정신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간디는 “진정한 종교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에게 봉사하고 모든 사람을 친구로 삼는 것이다. 친구에게 친절하기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적으로 간주되는 사람을 친구로 삼는 것이 진정한 종교의 본질이다”46)라고 까지 말하였다.

간디의 비폭력은 정치적인 목적만을 지닌 것이 아니었다. 톨스토이의 사랑이 종교적 목적을 지닌 것이 듯이 간디의 비폭력은 초월적인 자아,즉 아트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47) 간디는 비폭력이 동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정신으로서의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하였다. 동물로서의 인간은 폭력적이지만 정신으로서의 인간은 비폭력적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48) 간디의 이러한 생각은 또한 인간이 동물적 본성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톨스토이의 주장과 서로 통한다.

톨스토이는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모든 종교의 근본적인 교의는 공통적이라고 하여 종교일치사상을 주장하였다. 간디도 이와 비슷하게 유일한 신에 대한 신앙이 모든 종교의 초석이고49),모든 종교는 인간 안에 있는 신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서로 같다는 종교일치사상을 주장하였다.50)

톨스토이는 인간에게 신의 소부분이 구비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와 비슷하게 간디도 신과 인간의 관계는 거대한 대양과 한 방울의 물방울의 관계와 같다고 하여,신과 인간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였다.51)

그러나 간디는 인도의 종교적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상가답게 톨스토이에 비해 각 종교의 독특성을 보다 많이 강조하였다. 예를 들어서 그는 형체가 없는 신 못지 않게 형체가 있는 신도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비록 神像에 대한 기도를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상에 대한 기도를 금지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사람에게는 신상에 대한 기도가 어울리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신상에 대한 기도가 어울리지 않을 뿐이며 이 두 가지의 기도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던 것이다.52) 이와 같이 간디는 각 종교의 독특성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종교의 통일보다는 종교의 조화,다시 말해서 다양성 속의 일치(unity in diversity)를 주장하였다.53)

간디의 이러한 종교사상은 톨스토이의 그것과 함께 유영모의 종교사상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다.內村鑑三의 종교사상


유영모가 일본에서 체류하고 있던 1912년에서 1913년 사이에 金貞植이 동경에 있는 한국 기독청년회 총무로 있었다. 그런데 김정식은 內村鑑三과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 아마도 유영모가 內村鑑三의 무교회 집회에 참석하게 된 것은 이러한 배경을 통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54) 그때부터 유영모는 內村鑑三에 대해 잘 알게 되었으며,그가 출간하던 무교회 잡지인 ꡔ聖書之硏究ꡕ를 구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영모가 기독교신학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갖게 된 것도 바로 ꡔ聖書之硏究ꡕ를 통해서였다.55)

유영모는 오산학교에서 교장으로 근무하던 1920년대초 수업 시간에 內村鑑三에 대해 자주 언급하였다.56) 그 영향으로 나중에 함석헌도 일본에 유학할 당시 內村鑑三의 무교회 집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유영모는 함석헌을 통해 무교회주의자였던 김교신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유영모는 內村鑑三의 무교회와 자신의 신앙을 구분하고,오히려 자신의 신앙을 톨스토이의 그것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였다.57) 유영모는 內村鑑三이 예수의 代贖信仰을 끝까지 고수한 것과 동양종교의 중요성을 간과한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유영모는 끝까지 예수를 단지 인간으로만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영모는 분명히 內村鑑三의 무교회주의로부터 일정 부분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만약 유영모가 內村鑑三의 무교회주의를 완전히 거부하였다면 그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던 김교신과 교분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을 것이며,김교신이 발행하던 ꡔ聖書朝鮮ꡕ에 기고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內村鑑三(1861-1930)은 일본(Japan)과 예수(Jesus)라는 두 개의 ‘J'를 동시에 강조하여 일본을 위해서는 기독교가,그리고 기독교를 위해서는 일본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그는 일본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예수의 복음이 일본이 간직해 온 목표를 달성하는 데 긴요하다는 점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는 이미 國家神道를 중심으로 국가적인 체계가 정립되는 시기였기 때문에,그리고 일본의 기독교적 사명을 강조하는 것이 기독교의 보편성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인해 內村鑑三은 사회와 기독교계 양 쪽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內村鑑三의 기독교는 ‘무교회주의’와 ‘일본적 기독교’라는 용어로 정리해 볼 수 있다. 먼저 그의 무교회주의는 ‘제2의 종교개혁’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로마 교황과 결탁한 것과 마찬가지로 루터는 독일의 봉건제후의 세속적 권위와 결탁했으며,바이블의 권위를 교회 위에 둔 것은 올바른 일이었으나 바이블을 존중한 나머지 ‘바이블 숭배’를 초래했다고 비판하였다.58) 이로 인해 교파주의와 종교분쟁이 발생했는데 그는 이러한 현상을 치유하기 위해서 루터의 개혁에다 사랑을 첨가한 새로운 개혁이 필요하다고 하였다.59)

교파주의를 배격하고 무교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그는 구체적으로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다. 첫째,그는 제도와 건물로서의 교회를 부정하였다. 그에 의하면 에클레시아(Ecclesia)는 제도적인 교회나 교회당을 의미하지 않는다. 에클레시아는 본래 ‘규칙에 의하지 않고,법률에 의하지 않으며,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정하는 자발적인 인식에서 나오는 사랑의 신앙을 기초로 한 그리스도 특유의 靈的 會衆’60)이다. 따라서 진정한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사랑에 의해서 결속된 영적 교제의 단체여야 하며,인위적,기교적,제도적 교회여서는 안된다.

둘째,그는 교회의 성례전을 부정하였다. 기독교인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이 외의 모든 것은 구원에 관한 한 무의미하다.61) 이와 같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성례전을 행하는 것보다 오히려 바이블을 연구하는 것이 보다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 內村鑑三의 입장이다.

셋째,그는 교회의 聖職을 부정하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진정한 교회가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按手禮를 받은 목사나 전도사는 필요가 없다.62)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의 힘에 의해서’ 모든 사람이 司祭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특정한 교직자는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內村鑑三의 이러한 교회조직이나 儀式에 대한 생각은 그대로 유영모에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영모의 종교사상과 內村鑑三의 무교회주의와 관련해서 무엇보다도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그의 宗敎觀과 소위 ‘萬人救援論’이다.

그의 종교관을 살피기 위해서는 그 당시 일본의 종교적 상황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명치유신 이후 國家神道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불교는 서서히 위축되어 갔다. 기독교는 서구문화의 수용 통로로 근대론자들에 의해 각광을 받으면서도 세력 면에서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기독교는 교파로 분열되어 있으면서도 우리나라와 달리 선교사들의 영향권에서 벗어 나려고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유교는 도덕적인 면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神道는 敎派神道와 민간신앙으로 존재하면서 한편으로 국가권력과 관련을 맺으면서 국가 통합의 상징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內村鑑三은 일본의 문화와 도덕이 기본적으로 유교와 불교,그리고 神道에 터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른 종교들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적은 불교가 아니고 불교의 적은 기독교가 아니라고 하였고63),다른 종교들과의 관련 속에서 기독교의 위치를 파악하는 여유를 지니고 있었다.64)

그리고 그는 아시아의 전통종교들이 긍정적인 측면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면서,한편으로는 서구식의 제도화된 기독교는 배척하였다. 그리고 그는 탈서구화된 기독교가 아시아의 정신의 총체인 武士道와 결합될 때 그것이 진정한 종교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가 주창한 무교회주의가 쉽게 타락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무교회가 만약 고정된 규칙이나 정형화된 형식에 얽매이게 되면 무교회의 종교체계 자체가 목표로 되고 그렇게 되면 무교회의 진정한 목표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가능성을 의식하고 끊임없는 정신적 혁명과 ‘과거의’ 무교회를 지속적으로 부인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65)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이 무교회를 계속해서 재창조해 나갈 것을 촉구하고 자신의 무교회가 또 다른 교파로 전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內村鑑三의 무교회주의의 또 다른 특징은 그의 ‘萬人救援論’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바이블에 小數救援論의 근거가 되는 귀절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66) 그러나 그는 小數救援論의 필연적인 결과는 편협,배척,자기 찬미이고 이것으로 인해 수많은 종교전쟁이 일어났다고 지적하였다.67) 신은 부분보다는 전체를 사랑하고,신의 사랑이 무한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小數救援論보다는 萬人救援論이 적절하다는 것이다.68)

유영모는 內村鑑三과 마찬가지로 제도와 건물로서의 교회를 부정하고,성례전과 聖職를 거부하였고 교파주의를 배격하였다. 그리고 특히 종교조직의 운영에 대한 유영모의 견해는 內村鑑三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內村鑑三이 자신의 모임을 정기적인 강연 중심으로 이끌어 나갔듯이 유영모도 자신의 모임을 주로 YMCA 연경반 모임을 중심으로 이끌어 나갔다.

內村鑑三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젊을 때는 노인에게서 독립해야 하고,늙어서는 젊은이에게서 독립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에게서나 독립해야 하며 오직 하느님에게만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한다”69)라고 하여 제자들에게 독립심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內村鑑三은 이미 자신이 주창한 무교회가 고정된 규칙이나 정형화된 형식에 얽매이게 될 가능성을 의식하고 끊임없는 정신적 혁명과 ‘과거의’ 무교회를 지속적으로 부인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마찬가지로 유영모는 제자 박영호에게 “나는 제자들을 모으지 않고 흩어서 모두가 제 노릇하기를 바래요. 박형도 나를 찾아올 생각도 안나야 하고 편지 쓸 생각도 안나야 됩니다. 이를 斷辭라고 하지요”70)라고 하여 제자들의 독립심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유영모는 “무슨 철학,무슨 주의,무슨 종교 따위가 완결을 보았다고 하는데 아직도 완결을 못 보았다는 것이 옳은 말이다....이같이 모든 것이 미정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가지 뚜렷한 것이 있다. 그것은 모든 기존 이론에 묶이거나 매달리지 말고 맘을 맘대로 하는 것이다”71)라고 하여 신앙의 고착화를 누구보다도 염려하였다.



4.유영모의 종교사상


톨스토이,간디,그리고 內村鑑三은 동,서양종교들에 대해 비교적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특정종교를 고집하거나 다른 종교들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지니지 않았다. 유영모는 이들에 비해 기독교,유교,불교,도교 등에 대해 비교적 깊은 지식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과 유영모가 살았던 종교적 상황은 분명히 달랐다. 따라서 비록 이들,특히 톨스토이와 간디의 종교사상과 유영모의 종교사상이 부합되는 점이 많다고 하더라도 세부적인 면에서는 분명히 차이를 보일 수 밖에 없다. 본 장에서 우리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유영모의 종교사상의 요점을 드러내 보도록 할 것이다.



가.비교 종교연구


柳承國은 1993년 5월 1일 유영모를 추모하는 모임에서 “다석 유영모선생님은 유교의 큰 스승님도 되시고 불교의 큰 스승님도 되시고 기독교의 큰 스승님도 되시고 도교의 큰 스승님도 되십니다”72)라고 말하였다. 유영모의 종교사상이 유교적이고,불교적이고,기독교적이고,도교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종교에 대한 그의 입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영모는 각 종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결국 하나라는 기본 전제에서 출발하였다. 겉으로 보기에 각 종교는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모든 종교들이 말하고자 하는 진리는 결국 하나라는 것이 유영모의 기본 생각이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예수교,불교,유교는 다 다른지 모르나 진리는 하나 밖에 없는 것을 얘기하니 이보다 더 좋은 낙이 어디 있겠는가?73)


유영모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종교의 존재 의의를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은 “선생님 말씀이 ‘비유하면 어디를 찾아 갔는데 한 방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한 방에는 부처님이 계시고 한 방에는 공자님이 계시다면 나로서는 세 분 다 찾아뵙고 인사를 드린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74)라고 유영모를 추모하는 말을 하였다.

물론 유영모가 현존하는 기독교,불교,유교를 그대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유영모는 현재의 기독교,불교,유교는 예수,부처,공자가 본래 가르친 진리와는 거리가 있으나 예수,부처,공자가 본래 가르친 진리는 똑 같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同也者異也,즉 같은 것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다. 이단이라고 헤프게 부르지 말라”75)라고 하여 특정종교를 이단으로 매도하는 것을 싫어 하였다. 그리고 그는 여러 종교 가운데 어느 종교가 더 참된 종교인가를 비교하는 것에 반대하였고76),특정 종교에 대해 편견을 가져서는 못쓴다고 말하였다.77)

유영모는 이와 같이 각 종교의 교조들이 말하는 진리는 같은 것이고,각 종교는 모두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당연히 특정 개인이 특정 종교를 믿는 것은 그 개인의 자유이며,특정 개인이 어느 종교를 믿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그 개인에게 달린 문제라고 하였다.78)

유영모는 이렇게 각 종교의 존재 의의를 모두 인정하고,또 각 종교가 지시하는 진리는 같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러 종교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여러 종교를 비교 연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래와 같이 언급하였다.


알긴 무엇을 아는가. 우리는 아는 것이 없다. 예수교 믿는 사람은 유교를 이단시하고 불교를 우상숭배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예수를 비난한다. 유교를 나쁘다고 한다. 유교에서는 불교를 욕지거리하고 무엇을 안다고들 하는지 모르겠다. 남을 모르면 자기도 모른다. 자기가 그이(君子)가 되려면 다른 그이(君子)도 알아야 한다. 지금은 참 멍텅구리 시대다.79)


여러 종교를 비교 연구할 때 유영모는 여러 종교의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을 찾아내는 일에 힘을 쏟았다.80) 그는 여러 종교의 공통점에서 여러 종교가 지시하는 하나의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유영모는 단순히 강단 종교학자가 아니었다. 따라서 그가 이와 같은 방법을 통해 여러 종교를 비교 연구한 것은 종교 연구 그 자체에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여러 종교의 비교 연구를 통해서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하나의 진리를 찾아내는 것을 그의 인생 목표로 삼았다.

그는 “종교는 자유인데 자기가 어떻게 믿든 자기가 분명한 것을 믿으면 된다. 남의 말 듣고 믿으면 그게 무엇인가. 한 마리의 개가 의심이 나서 짖는데 다른 개들이 따라 짓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81)”라고 하거나,또는 “어떤 인생관도 제 인생관이지 남에게 꼭 주장할 수는 없다....그저 밤낮 남에게 얻어서 살려는 생각,그것 못쓰는 것이다”82)라고 하여 종교에 대한 남의 주장을 비판없이 그대로 수용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또한 그는 “나 유영모가 예수를 이야기 하는 것은 예수를 얘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공자를 말하는 것은 공자를 말하자는 것이 아니다. 예수처럼,공자처럼,간디 같이,톨스토이 같이 하느님의 국물을 먹고 사는 것이 좋다고 해서 비슷하게 그 짓하려고 말한 것뿐이다”83)라고 하여 스스로의 개인적인 종교적 삶을 추구하려고 노력하였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유영모의 종교사상가로서의 진면목을 살펴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여러 종교들을 비교 연구하여 각 종교들에서 말하는 공통되는 하나의 진리를 찾아내고 다시 그 진리에 맞추어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고자 하였던 것이다.



나.신관


유영모의 신관을 ꡔ다석어록ꡕ만을 통해서 일관성 있게 정리해 내는 것은 쉽지 않다. ꡔ다석어록ꡕ에 신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ꡔ다석어록ꡕ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신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비교적 적은 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가능한한 ꡔ다석어록ꡕ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신에 대한 언급만을 추출하여 유영모의 신관을 재구성해 보도록 하자. 유영모의 신관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내용은 그의 인간관과 구원관을 살피는 부분과 제5장에서 다시 살필 기회가 있을 것이다.

유영모는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느님이 계시느냐고 물으면 나는 ‘없다’고 말한다. 하느님을 아느냐고 물으면 나는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이 머리를 하늘에 두고 산다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사람의 마음이 절대를 그린다는,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 몸의 본능인 성욕이 있는 것이 異性이 있다는 증거이듯이 내 마음에 절대(하느님)를 그리는 형이상적인 性慾이 있는 것은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바라고 흠모하는 거룩한 존재,이 존재를 나는 하느님이라고 한다.84)


유영모는 이와 같이 종교학에서 마치 모든 인간을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으로 규정하듯이 모든 인간에게 절대를 그리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다는 사실에서 신의 존재를 추론하였다.

그러나 유영모가 믿었던 신은 전통적인 의미의 기독교의 신과는 그 속성이 달랐다. 그는 창조주로서의 신을 거부하고 다음과 같이 바이블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사실이 아니라 신화로서 이해할 것을 촉구하였다.


창세기에 적혀 있는대로 창조주의 하느님을 믿는다 안믿는다는 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다. 나는 하느님을 생명의 근본으로,진리의 근본으로 하여 믿는거지 창조주로서 믿는 것은 아니다. 창조는 무슨 창조인가. 창조주로서 믿는다든지 그것을 부정하든지 하는 것은 대단한 것은 아니다. 하느님에게 창조에 대한 시말서를 받아본 것이 창세기다. 이건 그때에 사람들이 그렇게 해서 되었거니 하고 생각해 본거다. 그러나 이건 그때 사람의 생각이고 요새는 이걸 누가 믿어. 이것 가지고는 통하지 않는다.85)

유영모는 이와 같이 창조주로서의 신은 거부하면서 “하느님은 자연계를 다스리는 데 보이지 않는다. 하느님은 일을 하시는 데 통히 나타나지 않고 저절로 되게 하신다”86)라고 하여 主宰者로서의 신은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신을 우주의 절대 의식,절대 인격으로 생각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유일신만을 생각하는 나머지 우주 만물을 하나의 죽은 물질로만 취급하는 사람이 많은데 나는 우주가 단순히 죽은 물질이라고 푸대접할 수는 없다. 내 몸의 살알(세포)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것처럼 우주만물은 하나하나가 산 것이며 이 우주에는 절대 의식,절대 인격이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하느님을 섬기라는 것은 만물을 무시하라는 뜻은 아니다.87)


이상의 몇몇 인용문만을 통해서 우리는 유영모의 신관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유영모가 믿고 있는 신의 속성들이 얼핏 보기에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느낄 정도로 각기 상황에 따라서 달리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유영모의 신관이 단순히 절충적(eclectic)이라거나 설득력이 없다고 매도해 버릴 수는 없다. 우리는 예를 들어서 기독교 신의 속성이 단순하지 않으며 시대에 따라 다른 속성이 강조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유교의 天에 대한 관념이나 가까이는 동학의 신관념 등이 우리에게 쉽게 포착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유영모가 믿었던 신은 기독교의 신,유교의 天,도교의 道,그리고 나아가서 불교의 니르바나88)와 각각 통하는 개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유영모의 신이 전통적인 의미의 기독교의 신,유교의 天,도교의 道,불교의 니르바나와 똑 같은 것은 아니다.

기독교의 경우 유영모의 신은 화이트헤드(A.N.Whitehead)에서 비롯한 과정신학에서 말하는 신과 유사하다.89) 과정신학에서 말하는 신은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이다.90) 그리고 이 신은 세계에 영향을 주면서 동시에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는다.91) 이러한 신관을 하트숀(C. Hartshoune)은 인류 고등종교의 최고 발달 상태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凡在神論(panentheism)92)이라고 하였다.

유교의 경우 공자가 믿었던 天에는 분명히 主宰的 속성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주자를 중심으로 한 성리학에서는 天의 理法的 속성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유교의 天을 主宰的 속성만을 지녔다거나 또는 理法的 속성만을 지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유교의 天은 主宰的 天이면서 동시에 理法的 天이다. 그리고 유교의 天은 초월성(上帝,神)과 내재성(太極,道,理)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인격적이면서 동시에 비인격적이기도 하다.93) 유영모의 신은 유교의 이러한 天과 통한다.

도교의 경우 道는 인격신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氣로 나타나기도 하며,無나 虛로 이해되기도 한다.94) 물론 유영모의 신은 도교의 이러한 道와 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불교의 경우 궁극적 실재는 本際,本覺,實際,第一義,眞諦,空,眞如,如如,一心,眞心,涅槃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95) 박영호는 불교의 궁극적 실재를 나타내는 용어로 이 가운데 열반,즉 니르바나를 선택하였는데 유영모의 신은 이러한 불교의 궁극적 실재와도 서로 통한다.

유영모의 신관을 일부에서는 汎神論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유영모와 박영호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범신론이 잘못된 신관이 아니라는 소극적인 대처를 하고 있다. 그러나 유영모의 신관은 현재로서는 종교철학에서 말하는 범재신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신관을 凡在神論으로 한마디로 규정해 버리는 것은 그의 신관을 이해하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유영모의 신관을 범신론으로 규정하고 이해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범재신론으로 규정하고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



다.인간관


유영모의 신관에 대한 이해는 그의 인간관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보완될 수 있다. 왜냐하면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유영모에 의하면 신은 인간 안에,그리고 인간은 신 안에 있어서 신과 인간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유영모의 인간관은 우선 그의 예수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접근할 수 있다. 유영모에 의하면 예수 만이 신의 아들이고 그리스도가 아니며,인간은 누구나 다 신의 아들이고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씨’96),또는 ‘독생자’97)라고 불렀다. 그가 말하는 하느님의 씨나 독생자는 불교에서 말하는 佛性이나 유교에서 말하는 性과 다르지 않다.98) 유영모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다 하느님의 아들을 맡아 가지고 있는데 이 씨를 꼭 지켜서 키우는 것이 인간의 목표이다. 바로 이 점에서 유교와 불교,그리고 기독교가 유영모의 종교사상에서 함께 만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될 수 있다.

그리고 유영모는 예수,석가,단군,아담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은 똑 같다고 생각하였다. 예수,석가,단군,아담이 중요한 것은 이들이 모든 사람의 본보기가 되기 때문일 뿐이다.99) 그는 아래와 같이 聖人을 숭배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종교는 사람 숭배하는 것 아니다. 하느님을 바로 하느님으로 깨닫지 못하니까 사람더러 하느님 돼달라는게 사람을 숭배하는 이유이다. 예수를 하느님 자리에 올려 놓은 것도 이 때문이고 카톨릭이 마리아 숭배하는 것이 이 까닭이다.100)


따라서 예수가 우리에게 의미있는 것은 단지 그가 하느님의 씨를 우리보다 먼저 싹티워 완성하였다는 점에 있을 뿐이다.101)

유영모의 이러한 인간 이해는 그가 인간을 육체와 정신으로 구분해서 보는 철저한 이원론에서 비롯하였다. 그는 “나는 육체가 아니다. 생각하는 정신이다. 정신은 밖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정신은 영원하다....정신이 육체를 쓴 것이 사람이다”102)라고 하여 육체는 단지 정신(영혼)을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정신을 키우고 단련시키기 위해서 육체를 훈련시키는 금식이나 금욕을 무엇보다 중요한 수행 방법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정신과 육체를 이와 같이 이원론적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유영모에게 죽음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그것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의미없는 일이었다.


종교의 핵심은 죽음이다. 죽는 연습이 철학이요,죽음을 없이 하자는 것이 종교다. 죽음의 연습은 생명을 기르기 위해서다. 斷食,斷色이 죽음의 연습이다.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고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다. 산다는 것은 육체를 먹고 정신이 산다는 것이다. 밥을 먹듯이 육체를 먹는 것이 단식이다.103)


이와 같이 유영모는 인간은 누구나 다 신이 될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꽤 유교적이고 불교적인 인간 이해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인간 이해가 완전히 유교적이고,불교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짐승은 인간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여 불교와 유교의 인간 이해와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하느님의 씨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이 몸은 짐승이다. 짐승과 다름없이 멸망하고 만다. 그런데 하느님의 씨를 주신 게 다른 짐승과 다르다. 내 속에 있는 하느님 씨가 있어서 이것을 깨달으면 좋지 않겠는가?104)


그리고 그는 여전히 신의 인격성에 대해 곳곳에서 언급하고 있어서 불교와 유교의 입장과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유영모가 인간을 ‘하늘방송 듣는 수신기’105)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하늘방송을 보내는 절대자의 意志를 부인한 것은 아니다. 바로 이 점에서 유영모의 신과 인간에 대한 이해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예수에 대한 유영모의 이러한 이해는 물론 소위 정통 기독교의 입장과는 상이하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유영모의 이러한 이해를 단지 이단적인 사상으로만 매도할 수는 없다. 정통 기독교에서 유영모를 이단자라고 규정한다고 해서 그의 종교사상의 가치가 저하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루터가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톨스토이가 러시아정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했다고 해서 루터와 톨스토이의 종교사상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106)



라.구원관


유영모의 구원관은 이미 그의 신과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는 먼저 예수나 미륵불을 기다리는 것을 헛 일이라고 하여,예수 재림의 지상천국이나 미륵불의 불국정토,공산주의에서 말하는 유토피아와 같은 이상세계의 존재를 단호히 거부하였다.107)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보자.


옛날에 이상의 시대가 있었다는 사상도 미래에 이상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사상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추측한 범위 내에서는 옛날에 좋은 때도 없었고 차차 내려오면서 언짢아졌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는다. 앞으로 천국이 온다고 하여도 거기서는 정신적으로 얼마나 키가 커지겠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보겠는가. 뭣이 이상적으로 될 것인지 몸뚱이를 가진 이상 그대로 바로 되리라고 믿어지지 않는다.108)



그리고 유영모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原罪를 소위 정통 기독교와 달리 해석하였다. 그는 “아담과 해와가 무엇을 따 먹어서 그의 자손이 이같이 되었다고 자손들에게 죄다 뒤집어 씌우는데 그 따위 말이 어디 있는가. 그것은 일종의 신학으로 그렇게 생겨나온 것이다”109)라고 하여 모든 인간이 原罪를 지니고 있다는 기독교의 교리를 부인하였다.

이어서 그는 원죄에 관한 바이블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인류가 色慾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당위성을 아래와 같이 제시하였다.


창세기에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라고 한 것은 분명히 우리의 생식기를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뱀이라고 말은 하나 뱀의 꼴이 마치 남자의 생식기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아담은 해와가 유혹했다고 하고 해와는 뱀이 유혹했다고 했지만 아담의 생식기가 해와를 유혹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110)


그리고 그는 원죄를 오히려 불교에서 말하는 三毒(貪瞋痴)에 가까운 개념으로 이해하였다.111) 그에 의하면 인간은 三毒에 의하여 정신세계에서 하느님과 연락이 끊어졌고,그리하여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고 짐승으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이 짐승의 상태에서 다시 사람으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야만 한다.112) 다시 말해서 유영모는 이 三毒의 원죄를 피하여 생명의 실권자인 참 아버지와 그의 아들인 참 나를 깨닫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선천적인 절대 사명이요,절대 목적이라고 하였다.113)

우리는 다음의 인용에서 유영모의 신과 인간에 대한 이해와 함께 그의 구원론의 특징을 적절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독생자 로고스로 하느님의 아들인 것을 알고 이것에 매달려 줄곧 위로 올라가면 내가 하늘로 가는지 하늘이 내게로 오는지 그것은 모르겠지만 하늘나라는 가까워지고 있다. 영생을 얻는 것이 된다. 하느님의 씨인 로고스,성령이 하늘나라요,영생이다. 사람마다 이것을 깨달으면 이 세상은 그대로 하늘나라이다....자기 속에 하느님의 씨가 독생자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누구나 몸으로는 죽어도 독생자인 얼로는 멸망치 않는다.114)


유영모에게 구원은 결국 거짓 나인 自我로는 죽고 참 나인 신으로 솟아나자는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곧 신이 되어 신의 자리에 가는 것을 의미한다.115) 따라서 유영모에게 구원 과정은 가슴 속에서 순간순간 그리스도를 탄생시켜 끊임없이 成佛해 나가는 과정이며116),무한히 발전해 가는 인격 완성의 과정이다.117)

그렇다고 해서 유영모가 구원을 인간의 의지로서만 가능한 것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인간 구원을 위한 절대자의 의지를 부인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구원관을 자력구원이나 타력구원으로 일방적으로 유형화할 수는 없다. 구태여 말한다면 그의 구원관은 자,타력 병행 구원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구원관은 유교나 불교,그리고 기독교의 그것과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마.종교관

유영모를 단순히 종교사상가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그는 종교사상가이면서 한편으로 ‘종교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대개의 종교의 이름은 자신이 붙이는 것이 아니고 남이 붙여서 된 이름이 많은데 나를 보고 ‘바른소리치김(正音敎)’이라 해준다면 싫어하지 않겠어요”118)라고 하여 자신의 사상을 ‘正音敎’라고 부를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집 대문에 ‘참을 찾고자 하거던 문을 두드리시요’119)라는 글을 써 붙이고 있을 정도로 종교사상가이면서 한편으로는 종교가로서의 면모도 보이고 있다.

宗敎儀式과 종교조직,그리고 경전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 유영모의 종교는 소위 ‘求道者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유영모는 구도자답게 아래와 같이 여타 사상은 물론이고 자신의 사상까지도 완결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무슨 철학,무슨 주의,무슨 종교 따위가 완결을 보았다고 하는데 아직도 완결을 못 보았다는 것이 옳은 말아다...톨스토이의 사상도 도중에 미결된 것이지 완결한 것은 아니다. 이같이 모든 것이 미정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가지 뚜렷한 것이 있다. 그것은 모든 기존 이론에 묶이거나 매달리지 말고 맘을 맘대로 하는 것이다. 맘에 따라서 未定稿를 이어 받아 완결을 짓도록 노력을 하는 것이다.120)


그에 의하면 이러한 求道의 과정도 어느날 갑자기 완결되는 것이 아니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이러한 求道의 과정은 끝임없이 지속될 것이며,개인의 경우에도 소위 頓悟만이 아니라 漸修가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유영모 자신에게도 똑같이 해당된다.


聖神을 받고 頓悟를 하면 한꺼번에 다 될 줄 알아도 그렇지 않다. 석가도 단번에 모든 것을 다 알은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頓悟 뒤에도 漸修를 해야한다. 頓悟도 한번만 하고 마는게 아니다. 인생의 길이란 꽉 막혔던 것 같다가도 탁 트이는 수가 있고,탁 트였다 싶다가도 또 꽉 막히고 그런 것이다.121)


이와같이 유영모는 자신의 사상이 결코 완결된 사상이 아니라 계속 발전해 가는,다시 말해서 미완성의 사상이라는 점을 언급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아래와 같이 자신의 신앙이 正道를 걷고 있다는 점을 확신하였다.


내가 성경만 먹고 사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유교경전도 불교의 경전도 먹는다. 살림이 구차하니까 제대로 먹지 못해서 여기저기에서 빌어먹고 있다. 그래서 희랍의 것이나 인도의 것이나 다 먹고 다니는데 그렇게 했다고 해서 내 맷감량(飽和量)으로는 소화가 안되는 것도 아니어서 내 건강이 상한 적은 거의 없다. 여러분이 내 말을 감당할는지는 모르나 참고 삼아 말하는데 그리스도교의 성경을 보나 희랍의 철학을 보나 내가 하는 말이 거기에 벗어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이 말의 옳고 그름의 판단은 하느님이 하여 주실 것이다.122)


유영모의 이러한 주장에서 우리는 다시 그의 종교가로서의 측면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유영모는 자신의 사상을 종교로까지 충분히 전개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宗敎儀式을 싫어 하였으며,무엇보다도 종교의 교단화나 조직화를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으로 생각하였다. 이것은 그가 內村鑑三으로부터 받은 영향이다. 그가 종교사상적으로는 무교회주의와 자신을 분명히 구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金敎臣 등의 한국 무교회주의자들과 교분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만약 그가 무교회주의에 접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였다면 아마도 그는 신종교의 다른 교조들과 비슷한 활동을 하였을지도 모른다.



바.종교비판


유영모는 현재 상태의 유교,불교,기독교를 그대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석가,공자,예수의 사상을 나름대로 이해하고,그러한 이해를 근거로 기존의 종교전통들이 교조들의 사상으로부터 일탈해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우선 그는 모든 종교전통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사람 숭배와 기적에 대한 믿음을 철저히 비판하였다. 예를 들어서 그는 예수,석가,공자,성모마리아를 숭배하는 것을 못마땅히 생각하였으며123),예수의 부활같은 기적을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로 간주하였다.124)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기존의 종교전통 가운데 자신의 사상에 부합하는 사상이나 학자,그리고 경전 귀절을 동시에 부각시켰다.

유영모가 불교와 도교에 대해 직접적으로 비판한 내용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유영모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종교는 주로 유교와 기독교이다. 유교의 경우 유영모는 육친의 아버지에 대한 孝를 강조하는 입장을 무엇보다도 크게 비판하였다.


사람이 하느님에 대한 孝는 잊어버린 지 오래이고 아버지를 하늘같이 아는 것이 효라 한다....부모보다는 하느님 아버지(天父)가 먼저라야 한다. 天命에 매달린 유교가 忘天을 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서 유교가 맥을 쓰지 못한다.125)


그리고 그는 “산소 치레나 하고 족보 타령이나 할 때가 아니다. 송장은 안보이게 치우면 되고 선조는 그 이름이나 적어 놓으면 된다”126)고 하여 유교의 가족주의를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불교에서 「반야심경」을 생각하듯 유교에서는 張橫渠의 「西銘」을 알아야 유교를 잘 아는 것이라고 하였다.127) 가족주의가 아니라 大同主義를 보이고 있는 장횡거의 「서명」을 유교의 眞髓를 나타낸 글로 높이 평가하였던 것이다.128)

기독교의 경우 유영모의 비판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유영모는 개인적인 영혼불멸은 희랍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기독교 본래의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였다.129) 둘째,그는 “기독교 믿는 자는 예수만이 그리스도라 하지만 그리스도는 예수만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인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聖神이다”130)라고 하여 예수에 대한 기존의 교리를 부인하였다. 셋째,그는 “예수가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피 흘린 것을 믿으면 영생한다고 믿는 것은 나와 상관없다”131)라고 하여 예수의 代贖信仰을 부인하였다.

기독교에 대한 유영모의 이러한 비판은 그가 제시한 종교가 기본적으로 ‘求道者의 종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서 있는 유영모가 현재의 기독교인들에 대해 “지금 교회에서 믿는다는 이들은 진짜 종이다. 종 노릇만 하고 있다”132)고 말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유영모의 종교사상을 ꡔ多夕語錄ꡕ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ꡔ다석어록ꡕ은 1950년대 후반 몇 년간 유영모가 YMCA에서 강연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긴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을 중심으로 그의 종교사상 전부를 이해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의 종교사상을 직접적으로 일별할 수 있는 자료로는 현재까지 이 책이 유일하기 때문에 주로 이 책에 의존해서 그의 종교사상을 살펴보았다.



5.유영모,함석헌,그리고 박영호


유영모의 종교사상에 대한 이해는 함석헌과 박영호 등 그의 제자들의 종교사상에 대한 이해를 통해 보완될 수 있다. 왜냐하면 유영모의 종교사상은 그의 제자인 함석헌과 박영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유영모는 함석헌을 가장 아끼는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함석헌도 內村鑑三과 함께 유영모를 자기의 두 스승 가운데 한 사람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초 함석헌의 失德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유영모는 함석헌을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도 유영모는 끊임없이 함석헌이 다시 제자로서 돌아오기를 고대하였다. 그러나 이미 유영모와 함석헌은 건널 수 없는 다리를 건너버렸다.

혹자의 말대로 유영모는 소승적인 종교인이고 함석헌은 대승적인 종교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혹자의 말대로 유영모는 완숙한 사상가였고 함석헌은 미숙한 사상가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유영모의 종교사상과 함석헌의 종교사상은 거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종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유영모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다.

박영호는 앞에서 지적한대로 먼저 함석헌의 제자였다. 그러다가 1960년대초 함석헌을 떠나 유영모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비록 비교적 늦게 유영모의 제자가 되었지만 유영모로부터 졸업장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었고,유영모가 일생동안 보던 신약성경을 물려받을 정도로 유영모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현재까지 유영모의 사상을 학계나 사회에 알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혹자의 말대로 박영호의 책을 보면 어디까지가 유영모의 말이고,어디까지가 박영호의 말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의 사상은 동전의 앞 뒤 면과 같다.

여기에서는 유영모의 종교사상에 한걸음 더 접근하기 위해서 함석헌과 박영호의 종교사상을 일별해 보도록 하자.



가.함석헌의 종교사상


함석헌이 죽은 지 수년 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학술논문이 이미 여러 편 발표되었다.133) 이 가운데 金敬宰는 함석헌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하였다.


개신교 역사 100년 만에 함석헌이라는 정신의 최고봉에 도달한 종교사상가를 한국 근대사는 배출하였다. 그는 한국개신교 100년이 낳은 최고의 종교사상가일 뿐만 아니라 동양종교사상을 몸으로 깊이 체득하면서도 서양사상과 기독교사상을 동시에 깊이 체득한 산 혼이다. 동서 종교사상을 한 몸안에 융섭한 위대한 혼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하고 궁금해할 온 세계 종교학자들과 사상가들이 연구해 볼 하나의 진주와 같다. 왜냐하면 함석헌이라는 한 큰 마음 안에서 동과 서가 만나고,불교와 기독교가 만나고,노장의 자연주의와 성서적 자연주의가 만나고,종교적 신비주의와 합리적 과학주의가 만나고 있는데 단순한 병존이나 갈등이나 천박한 습합이 아니라 인류 미래 종교의 어떤 방향을 암시하는 실증적 범례를 만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134)


함석헌은 한마디로 말해서 동양과 서양의 종교사상을 융합하여 한국적 기독교를 주창했다는 것이다.

함석헌은 1950년대에 무교회운동으로부터 완전히 탈퇴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함석헌은 1952년에 「흰 손」135),그리고 1953년에 「대선언」136)을 발표했다. 그는 이 글들에서 무교회를 포함한 이미 있는 모든 종교들로부터 탈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그는 「말씀모임」이라는 글에서 “오산에 있을 때만 해도 우찌무라의 테두리를 벗지 못했다”137)고 하여 그가 오산을 떠난 1940년대초부터 이미 內村鑑三으로부터 멀어져 갔음을 밝혔다.

함석헌의 이러한 언급을 통해서 대체로 그의 종교관은 1940년대까지는 무교회신앙이,그리고 1950년대까지는 유영모로부터 영향을 받고 동양종교에 심취한 것으로,그리고 1960년대 이후에는 퀘이커교에 기울어 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함석헌에 대한 연구가 대체로 기독교 신학계에서 이루어 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함석헌은 기독교적인 사상가로 평가되고 있다. 그가 1960년대 이후 퀘이커교에 몸담은 사실도 그를 기독교적인 사상가로 이해하는 구실을 마련해 준다. 함석헌 자신도 “노자도 있고 장자도 있고 하지만,내가 정말 내 주님으로 택한다면,예수님 내놓고 달리 있을 수 없다”138)는 고백을 하여 친기독교적인 색채를 띠기도 하였다.

물론 유영모도 “내가 잘못할 때 나에게 잘하라고 責善하는 벗이 意中之人이다. 내게 責善을 하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다. 내가 참으로 마지막까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내게 선생이라고는 예수 한 분 밖에 없다. 예수를 선생으로 하는 것과 믿는다는 것과는 다르다. 나는 선생님이라고는 예수 한 뿐 밖에 모시지 않는다”139)라고 하여 친기독교적인 색채를 보이기도 하였다. 함석헌의 위의 고백은 유영모의 이러한 고백과 유사하다.

그러나 아래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함석헌을 기독교적인 사상가로만 평가하기에는 그의 사상이 소위 정통 기독교의 테두리를 많이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따지고 들어 가면 결국 하나이다.140)


이 단계에서 인류가 생각할 것은 다원적으로 하면서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나 하는 것이 우리의 하느님이 원하는 바일 거요. 생명의 목표가 그런 거니까. 그렇지 않고 하느님은 하나 밖에 없는데 이게 무슨 소리냐,노자가 다 뭐냐 한다면 통쾌한 것 같지만 하느님이 너무 조그마 해진단 말이야.141)


따라서 학계 일각에서는 함석헌을 인도종교 전통과 연관시키려는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다.142) 유영모가 간디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구태여 구분을 한다면 유영모는 톨스토이를,그리고 함석헌은 간디를 보다 더 선호하였다. 함석헌이 누구보다도 간디를 더 선호하였다는 사실은 그의 사상을 기독교의 테두리 안에서만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함석헌의 종교사상에 대해서는 기존의 연구가 많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유영모와 함석헌의 종교사상의 상관성을 보여줄 수 있는 귀절을 하나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새 종교는 어떤 것일까? 이처럼 궁금한 것은 없지만 알지 못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새 종교가 나오지만 그것은 나오는 때까지 알 수 없다....미래의 종교는 절대 알 수 없고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해산하는 날이 도적같이 임하여 어머니도 아들도 알 수 없으나 그러나 그것을 槪算을 할 수 있고 그것으로 인하여 産褥의 준비를 할 수는 있는 것같이 역사에 있어서도 새 종교가 어떤 것이요,언제 어디서 나타나게 될지는 전연 알 수 없으나,그러나 또 그 대개는 추산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것으로 새로 오는 말씀을 받을 준비를 할 수 있다.143)


미래의 종교에 대한 함석헌의 이러한 견해를 통해서 우리는 다시 유영모의 종교관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나.박영호의 종교사상


박영호의 약력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는 발견할 수 없다. 여기에서는 필자가 박영호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어느 때인가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6.25를 겪으면서 죽음의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일본어판 톨스토이 전집을 읽고 톨스토이의 사상에 심취하였다.

그는 그뒤 ꡔ사상계ꡕ를 통해 우리나라에 자기 말고도 함석헌이라는 사람이 톨스토이에 심취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함석헌은 1956년부터 ꡔ사상계ꡕ에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박영호는 함석헌이 지방 강연을 할 때 그를 찾아가 만났다. 그리고 그는 함석헌이 1957년 鄭萬洙 장로의 희사로 천안에서 ‘씨농장’을 경영할 때 그 곳에 합류,함석헌의 제자가 되었다.

함석헌은 1960년초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한 여성과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박영호는 함석헌의 제자이기를 포기하고 유영모의 제자가 되었다. 박영호는 유영모가 이미 70살이 넘어서 그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늦게 유영모의 제자가 된 셈이다.

박영호는 함석헌의 제자로 있다가 유영모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이 두 사람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박영호는 유영모로부터 개인적인 졸업장을 받았는가 하면 유영모가 평생 지니고 있던 신약성경까지 물려 받을 정도로 유영모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그는 1967년에 ꡔ새 時代의 信仰 - 立體的인 새로운 神觀ꡕ(基文社)을,그리고 1970년에 ꡔ새 時代의 信仰(續) - 입체적인 새로운 神觀ꡕ(基文社)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이 책은 박영호의 사상의 추이를 살필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바울이 예수의 사상을 세상에 알리는 데 공헌한 것 처럼 박영호는 유영모의 사상을 세상에 알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만약 바울이 없었다면 예수는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을 지도 모르는 것처럼 박영호가 없었다면 유영모도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유영모의 종교사상을 세상에 알리는 데 박영호가 기여한 공로는 대단히 크다.

또한 박영호는 유영모의 사후 ‘다석사상연구회’144)를 조직하여 매월 첫째 일요일에 개인 모임을 갖고 유영모의 사상을 전파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박영호가 단지 유영모의 사상을 전달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유영모가 알지 못했던 동,서양의 또 다른 사상가들을 섭렵하면서 유영모의 사상을 검증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는 예수,석가,노자,공자,장자,맹자 등 유영모가 자주 인용하였던 인물들 뿐만 아니라 플로티노스,에크하르트,스피노자,베르자에프,헤르만 헷세,슈바이처,토인비,브루노,샤르댕,朱子,陸象山,王陽明,崔致遠,栗谷 등 동서고금의 사상가들을 통해 유영모의 사상을 검증하고 드러내는 작업을 하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는 유영모의 일견 난해한 사상을 일반인들이 알기 쉽게 풀이해 나갔고,또한 유영모의 사상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자신의 사상을 덧붙이는 일까지 하였다.

유영모는 정통 기독교의 기준에 의하면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그에게서는 분명히 친기독교적인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유영모의 친기독교적인 면모가 그대로 함석헌에게도 전달되었다. 그러나 박영호에게서는 친기독교적인 면모를 결코 찾아 볼 수 없다. 박영호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보도록 하자.


필자(박영호)는 스승 유영모의 제자로서 스승의 사상에 이견이라고는 없이 사상적으로 완전히 일치한다. 그런데 꼭 한 가지 스승의 불교관에 대해서 이견 아닌 보완의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스승 유영모는 ‘예수는 공자가 못한 하느님 아버지와 父子有親을 하였다. 그런데 석가는 四顧無親이야’라는 생각이었다. 돌아갈 때까지 이 생각에는 달라짐이 없었다. 이는 공자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못하였고 석가는 하느님 아버지를 입에 올리지 아니하였으며 예수만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사랑하였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유영모는 크리스천이었다. 그런데 필자는 석가의 니르바나가 하느님인 것을 알게 되었다.145)


유영모는 니르바나를 불교의 스님들이 설명하는대로 法悅이나 죽음을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박영호는 유영모와 달리 니르바나를 절대자,즉 하느님으로 이해하였다. 이와 같이 박영호가 불교의 니르바나를 절대자,즉 하느님으로 이해한 것은 유영모의 종교사상을 진일보시키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박영호가 니르바나를 절대자로 이해하기까지에는 사상적으로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니르바나는 허공과 같이 일체의 곳에 두루차서 있기 때문에 실로 볼 수는 없으나 일체의 사람에게 자유롭게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다”라는 ꡔ열반경ꡕ의 한 귀절에 착안하여 니르바나를 절대자로 인식하게 되었다.146)

박영호가 니르바나를 절대자로 이해한 것을 전혀 자의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불교에서 궁극적 실재는 本際,本覺,實際,第一義,眞諦,空,眞如,如如,一心,眞心,涅槃 등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147) 그리고 涅槃(니르바나)이라는 개념도 불교 전통 속에서 매우 다양하게 이해되어 왔다.148) 따라서 박영호가 니르바나를 절대자로 이해한 것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으로 일축할 수는 없다.

박영호는 석가가 브라만과 아트만을 부정하였으나 나중에는 절대성을 갖춘 브라만 격인 니르바나를 말하고 아트만격인 다르마(佛性)을 말하였다고 확신하였다.149) 그는 이러한 확신을 토대로 유교,불교,도교,그리고 기독교를 회통시키는 작업을 해 낼 수 있었다.

우선 그는 하나의 절대자를 힌두교는 브라마,석가는 니르바나,노자는 天道,예수는 하느님 아버지라고 하였다고 주장하였다.150) 그리고 그는 예수는 초월해 있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하고 내재해 있는 하느님을 하느님 아들이라 하였으며,석가는 초월해 있는 하느님을 니르바나라 하고 내재해 있는 하느님을 다르마라고 하였고,中庸에서는 초월해 있는 하느님을 天이라 하고 내재해 있는 하느님을 性이라 하였다고 주장하였다.151) 박영호가 주장한 神과 人間의 관계를 도표로 그리면 아래와 같다.



<종교별 神人 關係>

종교별 구분

유교(中庸)

불교

도교

기독교

기타

니르바나

天道

아버지

人間

佛性

하느님 아들

스승

공자,맹자

석가

노자,장자

예수

톨스토이,간디

 

물론 이러한 회통사상이 유영모에게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영모의 유교,불교,도교,기독교의 회통사상이 박영호에 의해 비로소 보다 분명하게 정리될 수 있었을 뿐이다.

끝으로 박영호가 신과 인간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설명한 내용을 인용하여 유영모의 종교사상의 특징을 다시 이해해 보도록 하자.


몸이 전구요,맘이 필라멘트라면 얼은 전력이다....하느님 아버지는 수억만 kw의 대전원이라면 그리스도라 부처라 진인이라 하는 전등불의 전기는 지극히 낮은 전압의 전기다. 전기로서는 아버지와 같으나 전압으로서는 아버지는 크시고 아들은 낮다. 예수나 석가도 몸의 사람으로는 톨스토이나 간디와 같은 전구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明度가 높은 좋은 전구였을 뿐이다. 예수나 석가도 얼사람으로는 톨스토이나 간디와 같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전기다.152)


유영모의 신과 인간,그리고 종교에 관한 견해가 박영호의 이 비유적인 설명에의해 보다 확연히 이해될 수 있다.



6.유영모 종교사상의 한국종교사적 의의


앞에서는 함석헌과 박영호의 종교사상을 통해서 유영모의 종교사상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여기에서는 유영모의 종교사상이 한국종교사상사에서 지니는 의미를 四敎 會通思想,종교 간의 대화,종교다원주의로 각각 나누어 밝혀보도록 하자.


가.四敎 會通思想

유영모의 종교사상은 동양 종교전통이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제시해 왔던 宗敎會通思想 가운데 하나로 유교,불교,도교,기독교의 四敎 會通思想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의 종교사는 대체로 서로를 구분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정통적인 것으로 정립해 가는 역사였다. 따라서 서양의 종교사는 소위 정통과 이단의 갈등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양의 종교사에서도 각 종교간이나 종파간의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동아시아의 종교사 속에서 유교와 불교의 갈등,도교와 불교의 갈등,유교와 도교의 갈등,천주교와 유교의 갈등,그리고 각 종파간의 갈등을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동양의 종교사는 서양의 종교사와 달리 각 종교간의 갈등이 노정되는 가운데에서도 끊임없이 각 종교간의 회통을 주장하는 사상사적인 전통을 지니고 있다.

동양의 이러한 종교회통사상이 불교를 통해서 인도로부터 동아시아로 전래된 것인지 또는 동아시아 본래의 것인지 단언하기는 쉽지 않다. 인도의 경우 BCE 10세기경 리그 베다에서 단일신 개념이 등장하고,BCE 8세기경 우파니샤드에서 만물의 근원이며 본체인 브라만 개념이 형성되었다. 우리는 이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 문헌 가운데 하나인 리그 베다에서 하나의 實在를 賢者들은 여러가지로 표현하고 있다는 귀절을 찾아볼 수 있다.

훨씬 후대로 내려와서 라마크리쉬나(1836-1886),비베카난다(1863-1902),타고르(1861-1941),간디도 모든 종교는 하나의 진리에 이르는 서로 다른 길,즉 하나의 목적지에 이르는 여러가지의 길이며,단일한 神性의 다양한 顯現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모든 종교는 끊임없이 낡은 형식을 버리고 성장해야 할 불완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153)

이와 같이 인도는 역사적으로 힌두교와 불교,조로아스타교,시크교,이슬람교,기독교가 서로 갈등을 보여오는 한편,종교의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을 추구하려는 종교회통사상을 연연히 이어왔다.

중국에서는 불교가 전래된 직후부터 儒佛道의 三敎 交涉이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隋와 唐을 거쳐 宋 때에 와서 유불도 三敎調和論이 정립되었다. 南宋의 孝宗은 불교로 마음을 닦고 도교로 몸을 다스리며 유교로 세상을 다스리면 三敎가 각각 서로 의존해서 하나로 통한다고 하였다.154) 효종의 이 말에서 우리는 삼교조화론의 한 예를 살필 수 있다.

宋의 이러한 삼교조화론은 金에 와서는 三敎合一論으로 전개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王重陽(1112-1170)과 李純甫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왕중양은 유교와 불교,그리고 도교가 서로 통하고 三敎는 같은 원리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였다.155) 그리고 이순보는 聖人의 가르침이 道를 닦아 性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모두 같기 때문에 敎는 서로 다르나 그 근본은 같다고 주장하였다.156)

明의 경우에 다시 우리는 이러한 예를 林兆恩(1517-1598)과 감山(1546-1623)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임조은은 신유교가 이론에는 강하나 실천에는 약하고,불교와 도교는 실천에는 강하나 이론에는 약하다고 주장하였다.157) 나아가 그는 유교적인 세계관을 기반으로 불교와 도교의 실천을 종합하여 養性을 목표로 하는 사상을 새롭게 주창하였다.158) 비록 그는 治病에도 대단한 관심을 보이기는 하였지만 養性을 위한 수련으로 아홉 단계를 제시하였으며,나아가 유불도가 모두 면모를 쇄신하여 진정한 유교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유불도 삼교가 모두 夏라는 절대 존재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三敎 사이에 우열을 가리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159)

임조은이 유교를 기반으로 삼교를 회통시켰다면 감산은 불교를 기반으로 삼교를 회통시키고자 한 인물이었다. 감산은 明을 대표하는 승려로 능엄경,기신론,법화경,원각경,능가경 등 불경은 물론이고 춘추좌전,중용,노자,장자 등 유교와 도교의 경전에 대해서도 주석을 내는 등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는 석가가 불법 전파를 위해 미리 길을 닦아 놓도록,그리고 사람의 집착하는 마음을 날카로운 창으로 미리 부수고자 공자와 노자,장자를 자신의 출세에 앞서 파견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불교를 중심으로 유교와 도교를 포용하는 소위 포괄주의의 입장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는 “춘추를 모르면 세상일을 두루 섭렵할 수 없고,노자와 장자를 알지 못하면 세상을 잊을 수 없으며,몸으로 직접 참선하지 않으면 세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160)고 하여 三敎가 모두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각 종교의 배타적인 태도를 아래와 같이 신랄히 비난하였다.


사람들은 大道의 묘를 깨닫기는 커녕 스스로 안과 밖에 장벽을 굳게 새운다. 道에 어찌 그런 구분이 있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자기 학설을 지키기 위해 울타리를 굳게 친 자는 그의 이론이 여기에 있으면 저것은 外道라 비난하고,자기 주장이 저기에 있으면 이것은 이단이라고 맹렬히 단죄한다.161)


중국의 이러한 삼교조화론,또는 삼교 회통사상의 전통은 우리나라의 사상사 속에서도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崔致遠은 스스로 儒者라고 하면서도 불교와 도교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유불도 三敎의 조화론이나 회통사상을 구체적으로 전개시키지는 못하였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 당시 중국이 唐의 때였기 때문에 중국에서 아직 유불도 삼교 조화론이나 회통사상이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한국종교사상사에서 유불도 三敎에 정통하면서 유불도 三敎의 가치를 똑 같이 인정하였던 최초의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162)

金時習은 “三敎를 닦아 나감에 길은 각각 다르나 필경에는 敎旨가 동일하다(三敎進修異 畢竟同一旨)”163)라고 하여 三敎가 서로 같음을 이야기 하였다. 그는 승려의 생활을 하면서 유교의 義를 지켰고,도교를 수련하여 仙人이 되고자 하였던 인물로 당시 지성인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西山은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비록 불교를 옹호하려는 입장을 보이기는 하였지만 불교의 중심 개념인 心을 중심으로 유불도 三敎를 회통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특히 서산의 心에 대한 아래와 같은 설명은 유영모가 이해한 절대 존재를 상기시켜 주고 있다


어떤 물건이 모든 것을 모아 하나가 되어 천지에 앞서 생겼으니 지극히 크고 지극히 묘하여 지극히 비고 지극히 신령하여 한없이 넓고 한없이 분명하되 방위로도 그 장소를 정할 수 없고 겁수로도 그 수명을 헤아릴 수 없어서 나는 그 이름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억지로 이름을 붙여 마음이라 한다.164)


우리는 이와 같이 동아시아 종교전통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三敎 調和論이나 三敎 會通思想의 맥락에서 유영모의 종교사상을 새롭게 평가해 볼 수 있다. 동아시아의 종교사상사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회통사상은 최근까지 삼교 회통사상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유영모는 유불도 三敎에 기독교를 포함시켜 四敎 會通思想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유영모의 이러한 四敎 會通思想은 결코 피상적인 절충주의(eccleticism)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앞에서도 지적하였듯이 유불도와 더불어 기독교는 물론이고 동양사상 일반과 서양사상 일반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이러한 지식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그의 전생애는 소위 求道를 위한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四敎 會通思想은 단순한 절충주의(eclecticism)가 아니라 나름대로 一貫性(consistency)과 整合性(coheran- ce)을 지닌 사상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나.종교간의 대화


유영모의 종교사상은 종교간의 대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 사상적인 단초를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평가받을 수 있다. 현대세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지구촌화(globalization)라고 종종 지적된다. 지구촌화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세계에서 각 종교전통들 사이에는 과거와 달리 활발한 교섭이 진행되고 있다. 현대세계에서 다른 종교전통들에 대해 배타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종교는 이제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과거로부터 있어왔던 유교와 불교 등의 동양종교와 기독교라는 서양종교가 거의 비슷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각 종교전통들 사이의 이러한 상호 교섭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다.

종교 간의 대화와 협조는 대체로 정치적인 상황이나 사회적인 상황에 의해 비롯된다. 다시 말해서 종교 간의 대화나 협조는 종교적인 요인보다는 오히려 비종교적인 요인에 의해 이루어진다.165) 우리는 이러한 예를 3·1운동에서 적절히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와 같이 단일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나라의 경우 종교 간의 대화나 협조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각 종교전통들이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니는 것이 필요하다.166) 왜냐하면 각 종교전통의 공통분모는 종교적인 교리보다는 각 종교전통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사상적인 면에서 각 종교 사이의 상호 교섭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유교와 불교의 교섭은 고려말 이후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다. 金時習과 西山의 경우 유교와 불교의 교섭은 사상적인 면에서 꽤 진척된 단계에까지 도달하였다. 조선 후기 西學의 전래 이후 유교와 천주교의 상호 교섭도 비록 갈등의 양상을 종종 보이기는 하였지만 꽤 활발히 이루어져 왔다.167)

약간 후대로 내려와서 崔炳憲과 尹聖範에게서 유교와 기독교의 교섭을,邊鮮煥에게서 불교와 기독교의 교섭을,그리고 柳東殖에게서 기독교와 巫敎의 교섭을 살필 수 있다. 근대 이후 각 종교전통 사이의 교섭은 이러한 예들에서 볼 수 있듯이 대체로 기독교가 주축이 되었으며,또한 기독교와 특정 종교 하나 사이의 교섭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각 종교전통들 사이의 교리적인 공통점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한 유영모의 종교사상은 각 종교전통들 사이의 사상적인 측면에서의 상호 교섭을 가능하게 해준다. 교리적인 공통점을 중심으로 한 각 종교전통들 사이의 상호 교섭은 우리나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들이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닐 때 종교 간의 대화가 가능하다는 지적은 우리나라라는 특정국가에만 해당한다. 그러나 교리적인 공통점을 중심으로 한 각 종교전통들 사이의 상호 교섭은 시공을 초월해서 적용될 수 있다.

또한 유영모의 종교사상은 기독교 등 특정종교를 주축으로 하지도 않기 때문에 각 종교전통들이 똑 같은 여건에서 상호 교섭을 할 수 있게 해준다.



다.종교 다원주의


유영모의 종교사상은 종교다원주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고,또한 종교다원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공헌할 수 있다는 점에서 평가받을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기독교 신학계에서도 충분히 지적되었다.

유영모의 종교사상은 종교다원주의의 대표적인 주창자인 존 힉(J.H.Hick)의 종교사상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존 힉은 영국의 다원적인 종교상황으로부터 체험한 내용을 기반으로 기독교가 앞으로 예수 중심주의에서 實在(Reality) 중심주의로 코페르니크스적인 전환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受肉(incarnation)과 삼위일체의 형이상학적인 교리가 기독교라는 인간의 전통에 속하는 것이지 결코 예수 자신의 가르침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168) 그리고 그는 하나의 세계종교라는 것은 있을 수 없어도 하나의 세계신학으로 접근해 가는 가능하다고 하고169),인간의 구원에 대해서도 아래와 같이 언급하였다.


신에 의한 구원이란 인간이라는 동물에서 ‘신의 아들들’을 만들어 가는 점진적인 신의 창조적 활동이다. 인간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본성 속에 잠재해 있는 모든 가능성을 실현함으로써 충분히 인간답게 되는 것이 구원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순간의 사건도 아니고 또 이기고 지는 승부도 아니다. 그것은 점진적인 성장이며 이 성장을 위해서는 이 세상 수명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구원은 완만하고 다면적인 과정을 겪는다. 따라서 저 사람은 구원받았는가라고 묻기보다도,저 사람은 구원의 길에 있는가라고 묻는다든가,혹은 진실한 인간이 되고 있는가라고 묻는 편이 한층 적절하다.170)


나아가서 그는 實在가 하나이고 그를 이해하는 모습이 종교적으로 다양한 것이기 때문에 각 종교전통들은 각자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다는 ‘상보적 다원주의(complementary pluralism)'를 제창하였다.171) 존 힉의 이러한 주장은 유영모의 종교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폴 니터(P.F.Knitter)는 존 힉과 비슷한 맥락에서 통일적 다원주의(unitive pluralism)를 제창하였다. 그에 의하면 통일적 다원주의는 공동의 핵을 발견하기 위해 종교들 사이의 역사적인 모든 차이점들을 제거해 버리려는 제설혼합주의도 아니며 또한 하나의 종교가 다른 모든 종교들을 정화하고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종교적 제국주의도 아니다. 통일적 다원주의에 대한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보도록 하자.


통일적 다원주의란 각 종교가 자신의 개별주의(자신의 분리적 자아)의 일부는 상실하지만 자신의 인격성(관계성을 통한 자기 인식)을 강화시키게 되는 통일성이다. 각 종교들은 자신의 독특성을 계속 유지하지만,그러나 이 독특성은 상호적 의존 속에서 다른 종교들과 관계함으로써 발전하고 또 새로운 깊이를 얻게 될 것이다.172)


물론 그는 이러한 통일적 다원주의의 기본적인 전제가 모든 종교들이 동등하게 타당하거나 타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173) 그리고 그는 이어서 앞으로는 서로 다른 종교에 동시에 참여하는 개인들이 등장할 것이라고 예견하고,이미 현재에도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낌새를 엿볼 수 있다고 하였다.174)

존 힉과 폴 니터가 서양의 대표적인 종교다원주의자라면 유영모는 동양의 대표적인 종교다원주의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동양의 종교적인 전통과 상황이 서양의 그것과 다르듯이 동양에서 제기된 종교다원주의와 서양의 그것도 상이할 수 밖에 없다. 또한 동,서양에서 각기 제기된 종교다원주의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 아직은 알 수 없다.


 


7.맺음말


우리는 지금까지 유영모의 종교사상을 정리해 보았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의 생애와 그를 연구하는 데 참고할 자료들을 검토하였고,이어 유영모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톨스토이,간디,內村鑑三의 종교사상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유영모의 종교사상을 비교 종교연구,신관,인간관,구원관,종교관,종교 비판으로 나누어 일별하였고,또한 그의 사상을 재천명 내지는 보완한 인물로 함석헌과 박영호의 종교사상을 개괄하여 유영모의 종교사상을 이해해 보았다. 그리고 끝으로 유영모의 종교사상의 종교사상사적 의의를 四敎 會通思想,종교 간의 대화,종교다원주의의 맥락에서 각각 고찰해 보았다.

유영모는 특정의 교단이나 경전,교리,의례를 만들지 않았다. 그는 특정 종교의 교조가 아니라 지성인이었다. 그는 한마디로 현대 한국의 ‘종교적 지성인’이었다.

지성인은 어떤 이유에서이건 종교에 대해 무지해서도 안되고 종교에 대해 혐오하지도 않는다. 종교를 혐오하거나 종교에 대해 무지한 사람일수록 지성인에 가까운 것처럼 처신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지성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나아가 종교적 지성인은 특정 종교에 대한 지식만을 소유해서는 안되고 종교 전반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소유해야 한다. 유교는 알면서 불교는 모르고,불교는 알면서 유교는 알려고 하지 않거나,儒佛은 알면서 기독교를 모르거나,기독교는 알면서 儒佛은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종교적 지성인이 될 수 없다. 유영모는 儒佛道基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겸비했던 인물이다.

또한 종교적 지성인은 특정 종교에 대한 신앙을 전통적인 방식대로 그대로 답습하지 않으며,스스로 주체적인 사상을 형성해 나가고 주체적인 신앙생활을 해 나간다. 유영모는 기독교인이면서 기독교인이 아니었고,유교인이면서 유교인이 아니었으며,불교인이면서 불교인이 아니었다.

세계가 변해가고 있는 만큼 종교도 변해가고 있다. 동,서양의 종교가 거의 같은 비중을 차지하면서 존재하는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종교적인 면에서 말 그대로 종교 다원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런 상황을 결코 찾아 볼 수 없다. 서양의 종교 다원적인 상황은 아무래도 기독교 중심적이다. 그리고 일본의 종교 다원적인 상황은 아무래도 불교 중심적이다. 기독교 중심의 서양종교와 유교와 불교 등의 동양종교가 함께 어우려져 있는 상황은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다. 따라서 혹자는 미래의 종교사상은 우리나라에서 생길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한다. 이런 예견에 반드시 동조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우리나라에는 종교적 지성인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결코 없을 것이다.

과거의 우리 선조들은 유,불,도에 대한 지식을 함께 겸비한 인물이 많이 있었다. 스스로를 유학자로 부르는 인물 가운데 불교와 도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소유한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崔致遠이다. 불교적이면서도 유교적이고 그러면서도 도교적인 인물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金時習이다. 불교의 승려이면서 유교와 도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인물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西山이다. 조선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가운데 한사람인 栗谷도 불교 승려와 불교에 대해 논할 수 있을 정도로 불교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175)

조선 후기에 西學이 들어 오자 비록 서학을 비판하기 위해서이기는 하지만 서학 자체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 李瀷,愼後聃,安鼎福 등이 바로 그들이다.

개신교가 들어온 뒤에는 본래 한학에 조예가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인 崔炳憲(1858-1927)은 개신교뿐만 아니라 이슬람교,유교,인도교 등 세계종교에 대한 지식도 함께 겸비하여 「교고략(四敎考略)」,ꡔ聖山明鏡ꡕ,ꡔ萬宗一ꡕ 등을 저술하였다.

李能和(1869-1943)도 본래 불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물론이고,유교,도교,기독교,무속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각 종교에 관한 서적뿐만 아니라 각 종교를 서로 비교하는 ꡔ百敎會通ꡕ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근래에도 비록 개신교인에 국한되기는 하지만 尹聖範,柳東殖,邊鮮煥이 각각 유교,무속,불교와 개신교를 연결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개신교 이외의 타종교에 대한 연구를 진행시키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여러 종교에 관심을 기울인 종교적 지성인들이 여럿 있었지만 이들은 대체로 자신이 믿고 있는 특정종교를 변증하거나 護敎하려는 의도를 어느 정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유영모는 기독교,불교,유교,도교 등 여타 종교들에 폭넓은 관심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특정종교를 변증하거나 호교하려는 의도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다른 종교적 지성인들과 분명히 달랐다.

종교적 지성인이 되려면 우리는 우선 유영모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유영모는 종교적 지성인이 걸어야 할 길을 우리에게 제시한 흔치 않은 인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