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문화재단/다석류영모(多夕柳永模.1890~1981)

[스크랩] 다석 류영모의 기독교 불교 유교 이해(홍종실목사)

▪살림문화재단▪ 2013. 4. 15. 22:19
다석 류영모의 기독교 불교 유교의 이해

Th.m 1학기 홍종실

1. 들어가는 말

다석 류영모는 기독교신앙에 기초하면서도 자유롭게 다른 종교의 경계를 넘나들며 진리와 신앙의 세계를 펼쳤다. 다석은 기독교사상을 바탕으로 불교와 유교의 이해를 넓혀갔다. 예수, 석가는 우리와 똑같다. 기독교, 불교, 유교가 따로 있는 것 아니다. 오직 정신을 ‘하나’로 고동(鼓動)시키는 것뿐이다.
이 발제에서는 류영모의 기독교 이해를 통하여 불교의 이해, 유교의 이해를 살펴봄으로 그의 종교이해를 알아보고 특히 세 종교의 구원에 대해 정리해 봄으로 그의 구원에 대한 개념을 파악하고자 한다.

2. 다석의 기독교 이해

다석 류영모는 16살(만 15살)에 입교하여 23살(22살)까지는 십자가를 부르짖는 십자가 신앙을 소유한 자로 그의 종교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에서 출발한다. 그는 “사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고린도후서 5:7)”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아서 소유하는 것 같은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산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도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바란다고 했다. 보이는 것이란 얼마만큼 보이는 것인가? 한숨의 세계에서 바랄 것이 무엇인가? 세계 밖으로 나아가 담대해야 한다. 그러면 미혹되지 않는다. 믿음으로 살아가고 보이는 것으로 안 한다는 것을 굳게 믿고 나가는 것이다.
물질이 아닌 정신으로 사는 사람은 보이는 존재에 결코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을 바란다. 믿음이란 밑바탕에서 밀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추리(推理)라는 말은 밀어서 자꾸 올라간다는 뜻이다. 밀어나가는 것이 아는 것이다. 아는 것으로 자꾸 밀어나가면 훤히 트이는 데 이른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아는 것을 더 밝게 하는 것이 추리이다. ‘밀어 믿음으로’ 하늘밑을 이 세상에서 들어 밀어서 하느님에게 닿을 때까지 올라가자는 것이 믿음이다.
다른 이들이 하느님이 계시느냐고 물으면 ‘나는’ 없다고 대답한다. 하느님을 아느냐고 물으면 나는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이 머리를 하늘로 두고 산다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또 사람의 마음이 하나(절대)를 그린다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 내 몸에 선천적인 본능인 육욕(肉慾)이 있는 것이 이성(異性)이 있다는 증거이듯이 내 맘에 하나(절대)를 그리는 성욕(性慾)이 있는 것은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바라고 그리는 전체의 거룩한 님을 나는 하느님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적어도 신구약 성경은 성경으로서 오래 가도 버릴 수 없는 진리정신이 담겨 있다고 보았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며 가는 곳마다 대접과 칭찬을 잘 받았다는 것이 영원히 사는 길은 아니다. 그런 것 다 잊어버리고 떠나가야 한다. 원칙으로 진리로, 얼나로 가는 수 밖에 다른 길이 없다.
영원한 하느님 아버지를 드러내는 데 대표할 만한 하느님 아들인 예수는 참으로 혼자 산 사람이다. 예수는 대자연처럼 아무 말 없이 십자가를 지고 간자였다. 혼인하지 않고 혼자 살아 온전한 사람 노릇을 했다.
예수가 본 길(道) 참(理) 얼(生命)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땅에 내려왔다가 다시 위로 올라가는 것을 길(道)이라 보고 그 길을 환하게 걸어감을 참이라 보고 아버지와 아들이 환한 빛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얼이라고 본 것 같다. 사람의 아들(人子)은 하늘에서 와서 하늘로 간다. 이보다 환한 길은 없다. 이 길을 틀리지 말고 곧장 쪽바로 가는 것이 참이다. 그리하여 하느님과 만나는 것이 얼나이다라고 보았다.
그는 이 세상을 죄악 세상이라 보았다. 하느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 앞에 자수(自首)해야 한다. 우리가 머리 들고 다니는 게 자수다. 자수하지 않으면 하늘 목숨(天命 얼나)을 받지 못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생명의 완성으로 보았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이 탄생하고 완성된다는 보았다.

3. 다석의 불교 이해

다석은 불교의 이해에 대해서도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 붓다(Buddha, 부처님)가 되려고 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붓다는 이 세상의 별 고생을 다했다. 붓다는 이상적인 나라의 임금이다. 세상의 임금들은 그 나라의 백성들에게 복된 세상을 만들겠다고 하여 놓고는 천하를 다 제 사유물(私有物)로 보았다. 그러나 붓다는 그것이 아니고 죄다 주고 죄다 버렸다. 나라도 내버리고 임금 자리도 내버렸다. 심지어 부모, 처자 궁궐을 다 버렸다. 그것뿐 아니라 눈을 때달라면 때주고 다리, 팔, 배, 골수까지 내준다는 것이다. 내가 그 소리를 스님으로부터 처음 들었을 때 내가 그 스님에게 묻기를 "인도의 옛날 사람들은 골수 같은 것이 다 소용없었던 게지요"라고 했더니 그 스님이 '그게 무슨 소리요'라면서 언짢아했다. 그런 말은 달라면 무조건 준다는 것이다. 준다는 것을 더 힘있게 나타내느라 인도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붓다(Buddha)는 나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니다. 불성(佛性 얼나)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몸이 아닌 불성(얼나)은 니르바나(Nirvana)님 나라에 들어간 것도 나온 것도 아니다. 붓다가 몸으로 났다가 돌아간 것은 중생을 깨닫게 하는 방편이다. 예수도 마찬가지 말을 했다. 이 몸나를 벗어 버리고 얼나로 솟나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가면 한량없는 기쁨이 있다고 했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의 빛은 더러운 빛이라 하여 참빛(니르바나님의 빛)이란 뜻으로 적광(寂光)을 말한다. 사람의 생명이나 짐승의 생명이나 이것은 참 생명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참이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다만 참을 찾는 존재이다. 우리가 참 생명(얼나)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혼돈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참(진리)으로 알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 철학이나 종교에서도 하느님을 보고 알아서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다. 오직 내가 거짓나라 참나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 참(얼)의 점(點)이 하나 찍혀 있다. 이것이 참을 찾고 빛을 찾고 하는 것이다.
앉아 있는 붓다의 모습은 참에 가까운 상이다. 인도에서는 앉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참선(Dahyana, 禪那)이 그것인데 앉아서 아주 완전에 들어가려는 것이다. 석가가 6년 수행을 끝내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밤낮 없이 앉은 채 마귀잡념과 싸워 마침내 영원한 생명인 참나(法我, 얼나)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앉는 일에 골몰하는 이는 성불(成佛)할 수 있을 것이다. 자꾸만 참나(얼나)를 깨닫겠다는 일이 붓다가 될 사람의 일이다. 성경의 가르침도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참나를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앉아서 배기는 일을 참고 배워야 한다.
유정능득(有定能得)-(대학)이란 정함이 있어야 능히 얻는다는 말이다. 정(定)은 집안에 앉아 있는 것을 말한다. 일찍 인도 사람들은 앉아 있는 것을 바로 가는 것으로 알았다. 참선의 원리가 그렇다. 참선에 들어감을 입정(入定)이라 하고 참선에서 나가는 것을 출정(出定)이라 고해서 앉아있는 상(像)을 퍽 존중한다. 정(定)의 위치는 믿는 것을 정(定)하는 것이다. 참나(얼나, 法我)를 깨닫고자 성불(成佛)의 자리를 찾겠다고 앉아 있는 것이 정 (定)이다. 그리고 그는 깨달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염불(念佛)이다. 아미타가 중생이었을 때 내가 성불(成佛)하게 되면 내 이름을 부르는 이는 누구라도 성불하게 하는 붓다(Buddha)가 되게 하겠다는 원력(願力)을 세웠다. 그래서 누구나 '나무아미타불'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게 이상한 암시요 최면이다.
나는 계(절대)서 나온 나그네다. 허공을 건너갈 나그네다. 불교는 제계(彼岸, 니르바나님)에 가야 한다고 반야바라밀다(Pajna Paramitta)라고 한다. 이 세계는 이변계(二邊界)인 상대세계다. 이게 있으면 저게 있다. 미(美)가 있으면 추(醜)가 있다. 이게 상대세계이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난 것부터가 고(苦)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의 성(性, 얼나)은 불생불멸이라고 한다. 이 말의 의미는 불교를 믿지 않으면 모른다.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불성(佛性.法身 얼나)이 내게 있음을 믿는 것이다.
그는 신업(身業) 구업(口業), 의업(意業)이라고 해서 업보(業報)로 태어난 것이 인생이라 했다. 전생(前生)에서 이 짓을 한 업보의 몸으로 이승에 나온 것이 우리이다. 이승에서 지금 잘 살고 못 살고는 전생의 업보라고 한다. 신업에는 삼악(三惡)이 있다. 살인, 음란, 도둑질인데 몸에서 그 짓이 나온다고 신업이라 한다. 신업의 근본은 의업(意業)인 삼독(三毒)이다. 탐냄(貪), 성냄(瞋), 음욕(痴) 이 세 가지가 독(毒)으로 뱃속 밑에 꿈틀거리다가 호시탐탐 삼악을 저지른다. 구업(口業)에는 거짓말, 못된 말, 실없는 말, 또 한 가지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네 가지가 있다. 신업의 3악 구업의 4악 의업의 3독을 합해서 십계명이 되어 있다.
류영모는 기독교만 말씀(로고스)이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불교도 말씀이 있다고 보았다. 불교에서는 설법(說法)이라 하는데 법 (法)이란 진리를 뜻하는 것이다.

4. 다석의 유교 이해

그는 유교의 이해에서도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정성 성(誠)은 말씀(言)이 이루어지(成)다는 글자이다. 말씀이 이루어지고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 그리스도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에게 도달한 것이 기독교이지만 유교에서는 말씀을 이룬 지행일치 (知行-致)의 사람을 성인(聖人)이라고 한다. 유교(儒敎)에는 주일무적 (主一無適)이라는 말이 있다. 하나(절대)를 님으로 정했으면 딴 데로 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만을 꼭 가지고 있으라는 말이다.
무본(務本)이란 밑둥(하느님)에 힘쓰는 것을 뜻한다. 유교의 정신은 온통 무본이다. 위에서 아래까지 백성 전체가 이 밑둥(하느님)에 힘써 나가면 가야할 곳(하느님 나라)에 거의 다다른다. 이것을 말한 것이『대학』이다.
유교에서 성(誠)은 하느님을 뜻한다. 이 참을 하려는 것이 사람의 길이다. 사람은 참 (誠)을 그리워해야 한다. 참은 하느님의 길이고 참을 그리워하는 것 사람의 길이다. 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사람이 가려면 곧이 곧장 가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아가는데 곧이 곧장으로 살아야 한다. 무엇을 하는데 곧장 쉽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러한 뜻이 아니고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곧이 곧장이다.
사람은 왜 하느님을 알려고 하는가? 하느님을 알 때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서 그대로 사람 노릇을 한번 해보겠다는 그 뜻이다. 그 뜻을 알려고 『대학(大學)』을 공부하는 것이다. 어른 노릇을 어떻게 하는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이 대학공부이다. 인생의 나아갈 길을 배우는 것이 대학공부이다.
사람이 하느님의 생명인 얼을 받은 것이 바탈이다. 하느님의 생명은 얼을 좇음이 삶의 길이다.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하느님의 생명인 바탈(얼나, 性)을 살려 낼 때 참나를 느끼게 된다. 자기의 개성이 자랄수록 사람은 오늘보다 내일에 더 깊은 바탈(얼나)을 느끼게 된다. 자기를 더 깊이 느끼게 될수록 더 깊이 자기 바탈을 찾아 내어 타고 가게 된다. 우리 사람의 사상이나 신념이라는 것은 마침내 '참' 하나를 좇아가는 것이다. 성(誠)이 참이다. 동양에서는 진리를 참이라고 한다. 성(誠)은 성경에서 아멘과 같은 뜻이다. '아멘'이란 '아무렴, 그렇지'라는 뜻이다.
유교에서 생명(生命)이라면 이 혈육(血肉)의 생명을 가리키는 것 같다. 성명(性命)이 정신생명을 가리킨다. 예수는 영원한 생명(얼나)을 생명이라고 했다. 유교철학인 유학(儒學)은 성리학(性理學)이라 하는데 사람의 성품을 연구하는 학문이며 종교이다. 유교는 훌륭한 생명철학이다. 마음이 바로 되려면 성(誠)의 뜻이 나온다. 성(誠)을 하려면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해야 한다. 곧 우주만상(宇宙萬象)의 모든 일을 잘 알아야 한다. 자연(自然)에 대해서 사람의 처지를 바로 해야 한다. 내가 이 천리(天理)에 합하고 대자연에 순응해야 하느님 아들의 뜻이 나온다. 이것이 성(誠)이다.
바탈(性)이 문제이다. 곧 성명(性命, 얼나)이 문제다. 바탈이란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서 할 것이라 하여 바탈(性)이라고 한다. 성(性)이란 글자는 요새 사람들이 쓰듯 남성 여성에만 붙일 글자가 아니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여러 사물(事物)의 이치를 뚫어지게 잘 알아서 그걸 잘 쓰자는 거다. 우리가 잘 알아야 할 것은 바탈(性)이다.
하느님의 얼 생명이 내게 와서 바탈(性)이고 그 바탈(얼나)의 뜻을 좇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길이다. 그 길이 뚫린 것을 막히지 않게 환한 그대로 두는 게 닦(修)는 것이다. 새삼스레 새 것을 닦을 것이 없다. 길은 환한 것이다. 그 길 환한 그대로 가는 게 수도(修道)이다.
유교의 성(性)은 예수가 말한 하느님이 보내신 이(얼나)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요한 6:29)라고 했다. 이 성(性: 얼나)을 찾을 수 있다.

5. 기독교 불교 유교의 구원론

1) 기독교의 구원
모든 인간은 죄인이고 구원받아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기독교에서 구원론의 핵심이다. 인간은 전적 타자이기에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르는 요소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예수가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살아나신 것을 믿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예수는 자신을 가리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자가 없다’고 단언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바쳤다. 바쳤다는 말은 밥이 되었다는 말이다. 밥이 되었다는 말은 밥을 지을 수 있는 쌀이 되었다는 것이다. 쌀이 되었다는 말은 다 익었다는 것이다. 성숙하여 무르익은 열매가 된 것이다.
예수의 생명과 하느님의 생명은 얼생명으로 한 생명이다. 예수의 얼을 씨라고 하면 하느님의 얼은 나무에 비길 수 있다. 씨는 어디서 왔느냐 하면 나무에서 왔다. 나무가 씨의 근원이다. 이처럼 예수의 얼생명은 하느님으로부터 왔다. 씨는 싹트면 나무가 되듯이 예수의 얼은 하느님의 씨다. 예수도 나도 얼로는 모두 하느님의 씨다. 씨가 싹터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느님께로 돌아간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아버지의 성령을 받아 얼나로 거듭나면 얼나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인 것이다. 다석은 얼나로는 하느님의 아들인 것을 알고 얼나를 받들고 줄곧 위로 올라가면 내가 하느님께로 가는지 하나님께서 내게로 오는지 그것을 모르겠지만 하느님 나라는 가까워지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얼나가 하느님 나라요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자기 마음속에 온 하느님의 생명(씨)인 얼나가 하느님 아버지 외아들인 것을 믿어야 한다. 영원한 생명을 얼의 나로 깨달으면 하나님 아버지 사랑을 느낀다. 그러면 누구나 몸나로는 죽어도 얼나로는 죽지 않는다. 얼나(靈我)가 참나임을 깨닫는 것이 거듭나는 것이다.
2) 불교의 구원
다석 류영모는 “사람이 귀하다는 것은 하느님(니르바나님)의 생명인 얼(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물의 영장(靈長)이 될 수 있는 것도 얼 때문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얼(法)을 하나 가지고 사는 것이다. 이 얼나가 영원한 생명인 참나다. 이 얼나에서 진리정신이 나온다.
보살은 보디사트바(Bodihisattva)의 음역이다. 보리살타로 음역한 것을 줄여서 보살이 되었다. 보디는 ‘깨달은 지혜’ 사트바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니르바나님(하느님)이 보내신 얼나를 참나로 깨달은 이나 깨닫고자 하는 이 모두를 참사람이라고 했다. 보살은 참사람이다. 보살은 이 상대세계에 삶의 목적을 두지 않고 오르지 절대세계(니르바나)에 삶의 목적을 둔 사람들이다.
다석은 이렇게 말하였다. “삶에 목적이 있다면 그 목적은 하늘(니르바나)에 있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참뜻은(眞目的) 하늘에 있지 여기 땅에 있지 않다. 삶에 참뜻은 영원한 허공인 보이지 않는데 있지 여기 이 환상세계에 있지 않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가질 목적이 없다. 이 땅에서 사람들이 참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가 상대적인 모조 참이지 온전한 참이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르지 머리를 하늘에 두고 몸뚱이를 곧게 하여 하늘(니르바나)에 가까우려고 애쓰는 것이다. 머리를 하늘에 두는 지극한 지경은 하느님(니르바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다석어록』)
금강경 32분장에 “모든 상대적 존재는 꿈이요, 허깨비요, 물거품이요, 그림자 같은 것, 이슬 같고 도 번개와도 같은지라 마땅히 이와같이 볼지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세상 모든 상대적 존재를 없이 보는 것이 이 세상 만물을 없이 계시는 니르바나님(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없이 볼 수 있는 것은 제나(自我)를 죽이는 것이다. 제나가 없어지면 모든 상대적 존재를 없이 계시는 니르바나께 들게 하는 것이 된다. 내가 제나에서 얼나로 거듭나면 만물은 저절로 없어진다. 오직 영원 무궁한 허공의 니르바나님이 존재하신다. 니르바나님밖에 존재하는 것이 없다.
다석은 말하기를 “이제 여기 이 나라는 존재는 거짓된 것이다. 우리가 아는 지식이라는 것도 하잘 것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을 다해 찾을 것은 전체인 하느님(니르바나님) 아버지이다. 이 몸은 가짜 생명의 탈을 쓴 것이다. 이 몸을 버리고 하느님 아버지(니르바나님)께로 가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인 붓다(얼나)는 나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니다. 불성(佛性)이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붓다의 몸이 아닌 불성(얼나)은 니르바나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나온 것도 아니다. 얼나가 니르바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다석어록』)라고 하였다. 예수가 하느님의 생명인 성령이 내 마음에 와 얼나(프뉴마)가 되었다고 하듯이 붓다는 니르바나님의 생명인 불성이 내 마음에 와 얼나(다르마)가 되었다고 한 것이다. 쓰는 말이 달라 그렇지 실체는 하나인 것이다. 전체가 하나인데 다를 까닭이 없다. 아버지 하느님과 얼나가 하나이듯이 니르바나님과 다르마가 하나인 것이다. 제나가 온전히 죽었다면 반드시 얼나를 체험한다. 그 얼나가 내게 온 니르바나님이다. 흔히 스님들의 말이 타력신앙은 불교가 아니고 자력신앙이 불교라고 한다. 그런데 얼나의 자력이라야지 제나의 자력이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얼은 하느님의 생명인 성령이 있을 뿐이다. 니르바나님의 생명인 다르마는 전체의 생명이요 공통의 생명이지 개인의 영혼이 아니다. 개인의 영혼이란 미신이다. 개인적인 의식은 몸나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니르바나님으로부터 온 진리만이 얼나로 영원한 생명이다. 니르바나님(하느님)과 한 생명이다.
석가와 예수가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니르바나님(하느님)의 생명을 받아서 영생한다는 것이지 개인적인 영혼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니르바나님(하느님)으로서 영생하는 것이지 개인적인 업식으로 영생하는 것이 아니다. 개체가 전구라면 얼나는 거기에 오는 전구와 같다. 전구는 달라도 전원의 전기는 하나인 것과 같다. 전구를 갈아 끼우면 등이 불이 켜지는 것은 전원에 전기가 늘 있다는 뜻이다. 개인이 전체인 니르바나님(하느님)에 닿으면 진리에 대한 생각이 나온다. 그것은 개인의 생멸과는 관계없이 니르바나님의 얼생명이 늘 있기 때문이다. 니르바나님의 얼이 진리이다. 개체적인 존재에 대한 미련을 끊는 것이 참삶이다. 진리의 전체로 돌아가는 것이 참삶인 것이다. 석가붓다가 죽어서 나머지 없는 니르바나님, 곧 없이 계시는 니르바나님에게 돌아간다는 것은 참나에 돌아간다는 말이다.
예수가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가17:21)고 한 것은 니르바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는 말과 같다. 니르바나님의 나라가 내 마음속에 온 것이 다르마인 얼나이다. 그러므로 석가붓다의 몸나가 여래가 아니고 석가붓다의 마음속에 온 얼나가 여래(오신 이)이기에 불상이 여래일 리가 없다. 여래는 내 맘속에 계신다. 우리는 제 자신이 마음속에 여래(얼나)을 모신 움직이는 법당임을 알아야 한다.
빈 마음에 온 니르바나님(하느님)의 얼이 참나다. 그래서 니르바나님(하느님)으로부터 오신 이라 하여 여래하고 하는 것이다. 여래가 니르바나님이 보낸 얼나로 참나인 줄 알면 붓다에 이른 것이다. 니르바나님(하느님)은 자신의 생명인 얼나를 받아들여 얼나로 솟는 사람을 가장 기뻐한다.
불교에서 구원은 열반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열반이란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의 한자어 음역으로서, 타오르던 번뇌의 불꽃이 ‘꺼져버린’ 상태를 뜻한다. 번뇌와 탐욕이 꺼져 버렸으니 그곳은 고요함의 세계이다. 그래서 ‘적멸’이라 번역한다.
흔히 불가에서 죽음의 대용어로 사용하는 ‘입적(入寂)’이라는 말 혹은 ‘열반에 든다’는 말은 이러한 고요함의 상태 속으로 들어갔다는 뜻이다. 물론 그것은 일단 육체의 죽음을 뜻한다. 하지만 종교적 차원에서 보면, 거기에는 육체의 한계로부터 오는 신체적 집착은 물론 일체의 정신적 집착으로부터도 자유로워졌다는 뜻이 들어 있다. 불교는 바로 이러한 열반을 추구하는 종교이다.
이러한 열반은 한마디로 붓다의 깨달음과 같은 것이며,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이다. 신화적 세계관에 따르면, ‘해탈’은 업에 따라 돌고 돌던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탈신화해서 해석하면, 그것은 살아서든 죽어서든 아무 데도 얽매임이 없는 대자유의 세계를 뜻한다. 그렇게 보면, 깨닫고 난 세계가 바로 열반이자 극락이고 깨닫지 못한 무지의 세계가 바로 지옥이 된다. 흔히 극락과 지옥을 사후 세계의 전형처럼 간주하기도 하지만, 사실 불교는 사후 세계에 대한 기대보다는 살아서 붓다의 깨달음과 같은 것을 추구하는 수행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3) 유교의 구원
유교에서 유학(儒學)하는 사람도 분명한 점은 늘 하느님을 찾았다는 것이다. 증자(曾子)시대만 하여도 천(天)이라는 말로 하느님을 찾았다. 귀신(鬼神)을 찾지 않았다. 그런데 뒤에 와서 하느님을 버리고 귀신을 찾게 되었다. 하늘에 계시는 귀신을 생각했던 것이 차차로 혼돈을 가져와서 귀신의 존재를 말하는 것은 이치(理致)를 말하는 것으로 곧 천리(天理)를 찾는 것이라 하여 유교가 유리론(唯理論)으로 추리되는 이치 시대가 되었다.
주역에서 말하기를 귀신의 덕이 왕성하다 하여, 이것을 숭덕하고자 정성스런 제사를 올리게 되어 그 끝이 오늘까지 내려온 것이다. 그래서 부모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부모의 영혼이 귀신이 되어 제사를 지내는데 오느냐? 안 오느냐? 이 문제를 가지고 논한 것이 있다.
증자는 말하기를 무슨 귀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사람 맘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성으로 제사를 지내면 사람을 통해서 돌아간 분이 다시 나와 본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말은 귀신이 객관적 존재로 있는 것을 말하느냐 하면 객관적으로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귀신(혼)이 있느냐 하면 주역에서 있다는 것을 강조하여 말하고 이것을 설명하는데 무진 애를 쓰고 있다. 그것은 공연히 애를 쓴 것이다.
유신론(有神論)을 무신론으로 만들어서 유리론(唯理論)으로 옮긴 것으로 보면 된다. 원래 유교에서 따지는 귀신은 신(神)을 말하는 것이다. 미신은 신이 아니다. 이러한 것이 나중에는 귀신이라는 것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말았다. 유교에서 해석하는 것같이 하면 유물론이 나오기 때문에 또 유리론(唯理論) 이치뿐이라는 결과가 된다. 사람은 결코 이치만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감정의 대부분이 생명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다. 유리(唯理)만 가지고 안 된다. 이러한 것에서 유교는 생명을 잃고 있다.
유교에서는 어버이에게 신종추원(愼終追遠)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먼저 하느님에게 신종추원 해야 한다. 하느님으로부터 가지고 온 것을 온전히 가지고 있다가 삶을 마칠 때까지 조심조심 삼가는 것이 참으로 신종(愼終)이다. 오늘 이 세상을 마치는데 곱게 삼갔으면 그 다음은 추원이다. 시집가는 처녀가 친정 부모에게 끝까지 잘 대접하는 것이 신종이다. 또 시집을 멀리 간다면 추원이 된다. 모르는 남의 집에 멀리 시집가는 것이 추원이다. 멀리 계시는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참 추원이다.
유교에서는 보본반시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근본을 잘 해서 시작에 돌아가야 한다. 시작한 데로 도로 돌아와야 한다. 곱게 갔다가 본 곳으로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 신종추원 보본반시는 참으로 유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항상 이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하느님께로 돌아간다. 보천반원의 길로 간다. 영원무한(하느님)의 길로 간다.
사람이 하느님의 생명인 얼을 받은 것이 바탈이다. 하느님의 생명은 얼을 좇음이 삶의 길이다.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하느님의 생명인 바탈(얼나, 性)을 살려 낼 때 참나를 느끼게 된다. 자기의 개성이 자랄수록 사람은 오늘보다 내일에 더 깊은 바탈(얼나)을 느끼게 된다. 자기를 더 깊이 느끼게 될수록 더 깊이 자기 바탈을 찾아 내어 타고 가게 된다. 땅을 파들어가듯이 자기의 바탈을 파고들어 가는데 인생은 한없이 발전해 가는 것이다. 이 바탈(얼나)을 타고 우리는 하느님에게까지 이른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듯이 우리는 바탈을 타고 하나님에게 이른다.
무극이요 태극인 태초의 지고선(至高善, 하느님)에 닿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다. 이를 궁고고라 한다. 궁(窮)은 궁신한다는 말이다. 맘과 뜻과 힘을 다해 하느님을 찾는 것이다. 이 우주현상을 보면서 하느님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궁신지화로 하느님의 사라을 더듬어 보면 일체가 변화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일체가 변화하는 것이 하느님이 지니신 능력의 조화이며 사랑이다.
유교에서는 바탈(性) 따름이 인심인데 이를 바탈이라 아니하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도심(道心)인데 이를 바탈이라 했다. 짐승에게 준 바탈을 따르지 않음이 바탈이라고 했다. 하느님의 얼생명이 내게 와서 바탈이고 그 바탈(얼나)의 뜻을 좇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길이다.
사람을 성(性)을 찾아야 한다. 성명(性命)이란 예수가 말한 영원한 생명(얼나)과 똑같은 뜻이다. 맘은 궁리하자는 것이다. 궁리한 이치를 찾는 것이다. 용심하면 궁리가 되고 궁리를 자꾸하면 품부(稟付)함을 받아서 그 바탈을 다하면 천명에 이를수 있다.
맘을 다하면 바탈을 알고 하느님을 안다. 맘을 꼭꼭 잡아서 그 바탈을 기름이 하느님 섬김이다. 맘을 다해서 성을 알면 성품을 더욱더욱 알아 태허(太虛) 기화(氣化)의 곡간을 알아 하느님을 안다. 이렇게 되면 하느님의 곡간이 내 것이 된다. 하느님의 곡간에서 영생한다. 아주 온전히 앎이 하느님 아들인 거다.

6. 나가는 말

류영모의 종교 이해는 서로 다른 종교 사상들을 하나로 꿰뚫고 통전시킬 수 있고 서로 다른 것들을 일치시키고 동화시키는 한 사상의 원리, 한민족의 정신문화적 경향과 원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다석의 기독교 구원은 하느님 아버지의 성령을 받아 얼나로 거듭나면 얼나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얼나로는 하느님의 아들인 것을 알고 얼나를 받들고 줄곧 위로 올라가면 내가 하느님께로 가는지 하나님께서 내게로 오는지 그것을 모르겠지만 하느님 나라는 가까워지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얼나가 하느님 나라요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다석의 불교 구원은 그 사람 자체의 얼이 있음을 인정함에서 시작한다. “사람이 귀하다는 것은 하느님(니르바나님)의 생명인 얼(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물의 영장(靈長)이 될 수 있는 것도 얼 때문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얼(法)을 하나 가지고 사는 것이다. 이 얼나가 영원한 생명인 참나다. 니르바나님이 보내신 얼나를 참나로 깨달은 이나 깨닫고자 하는 이 모두를 참사람이라고 했다. 보살은 참사람이다. 보살은 이 상대세계에 삶의 목적을 두지 않고 오르지 절대세계(니르바나)에 삶의 목적을 둔 사람들을 가리킨다.
다석의 유교 구원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즉 도심(道心)인데 이를 바탈이라 했다. 하느님의 얼생명이 내게 와서 바탈이고 그 바탈(얼나)의 뜻을 좇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길이라고 말한다. 사람을 성(性)을 찾아야 한다. 성명(性命)이란 예수가 말한 영원한 생명(얼나)과 똑같은 뜻이다. 맘은 궁리하자는 것이다. 궁리한 이치를 찾는 것이다. 용심하면 궁리가 되고 궁리를 자꾸하면 품부(稟付)함을 받아서 그 바탈을 다하면 천명에 이를 수 있다. 맘을 다하면 바탈을 알고 하느님을 안다.
기독교, 불교, 유교를 종합하는 뼈대는 기독교의 하나님 신앙이다. 기독교 신앙으로 불교 유교를 꿰뚫고 있는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리고 이 세 종교를 통해 진리(깨달음)를 찾으려는 그의 구도자적인 모습은 이 시대에 우리가 꼭 배워야할 점일 것이다.
출처 : 제자화선교회
글쓴이 : 신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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