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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늦게 남기는 김지하씨의 죽음에 바치는 조사

▪살림문화재단▪ 2013. 7. 19. 15:38
뒤 늦게 남기는 김지하씨의 죽음에 바치는 조사
김지하씨의 죽음에 바치는 조사


                                       강 행 원 (화가/시인)

70년대 민주화의 상징이라 불리던 김지하씨의 영혼이 죽음을 맞은 지 수개월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몸담았던 진영에서는 장례식도 조사도 없이 방치한 채 관심도 없다. 그렇지만 한 시대의 상징인물인데 그냥 두고만 볼 수가 없어서 그 조사라도 남기고자한다.
김지하씨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독재에 맞서던 이름은 국제적으로 한국의 민주화상징이자 그 꽃이라고 불리던 명예로운 이름이 아니던가? 지금은 그가 싸웠던 박정희의 독재유신은 부하의 총탄에 쓰러져 역사 속에 조용히 잠들어 있다. 청춘을 다 받쳐 죽음을 불사한 채 유신독재를 반대했던 그가 독재자 딸의 품에 다시 않긴 것이다. 그리고 그 품이 대권까지 거머쥐었으니 얼마나 영화를 누릴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 곳에서나마 행복하기를 바란다.

대권경쟁에서 지려고 해도 질 수 없었던 자리를 내준 결과를 지켜보면서 땅에 떨어진 김지하씨의 불명예에 값하는 당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박근혜 당선자는 정부 인수위의 대변인 내정부터 오점을 보였다. 거칠고 공격적인 입을 가진 이중인격자로 알려진 윤창중씨를 박 당선자의 최 측근들조차 문제 삼아 스스로 사퇴압력을 종용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국민성이 2주일이면 다 잊어버리고 조용해 질 것이라며 굴욕을 버리지 않았다. 이 때 김지하씨도 그 말에 공감한 것인지 인수위의 대변인은 그런 강력한 입이 절대 필요하다고 윤창중씨를 살려냈다. 이 역시 공생하는 길이 아닐 수 없으며 당선자 멘토로서의 힘이 실린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대 사상가로 추앙받던 문호가 이데올로기의 변절이라는 어이없는 일을 저지른 것은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 한 아이러니 한 일이다. 독재자의 끝없는 욕망에 맞서다가 죽임을 당하려했던 그가 자신의 사상을 부정하고 유신에 뿌리를 둔 그 길을 다시 선택한 것은 분명 가치관 오류이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동지가 되고 오늘의 동지가 다시 적이 되는 필요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바뀌는 비인간화에 매몰된 무리들이 많다. 그러나 문예인으로서의 사상가들은 다르다. 정신문화의 가치관을 이끄는 선도자이기 때문이다. 식자들은 이런 김지하씨를 두고 카오스적인 사고자라고만 말 할뿐, 진보문인들 조차 그 기둥이나 들보들은 무슨 영문인지 말이 없다. 왜 이렇게 조용한가? 라는 필자의 질문에 도종환 시인은 김지하 선배가 환자라는 것이며, 지금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음을 시사했다. 아직 육신은 주검이 되지 않았다는 뜻인지 알 수 없다. 아무래도 이렇게 조용한 까닭은 그의 영예스러운 사상이 이젠 일고의 가치도 없음을 암시하는 증거이다. 그 숭고했던 정신의 죽음을 애도할 사람이 한사람도 없는 침묵이나 무관심은 버림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변절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치매라는 억측을 붙인 거짓 환자일 뿐이다. 그는 90년대 들어 정치 민주화를 위해 젊은이들의 분신자살이 이어지자 “저주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며 좌파의 몰 이성을 비판했다. 이로 인해 자신을 따르던 후배들의 질타가 이어져 상심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명예를 먹고 살던 인기에 소원함이 시작 되었으며, 진보의 야단에 놓인 자유로운 자리가 어정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MB정부 들어 황석영 문인의 변절을 두호하고 나서면서 그는 문학인이 좌, 우로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지론을 폈다. 이러한 실마리들의 연장선에서 그의 궁핍을 MB가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정도였다는 후문도 있다.

궁핍은 문둥병보다도 무섭다더니 민주화의 영예로운 이름도 인내의 한계가 있었단 말인가? 일련의 파장이 된 변절의 변은 쑥부쟁이에서 시작된다. 공격적인 언사로 무장한 논리에 백낙청 문인이 심하게 상처를 입었다. 이러한 변절을 가장 좋아 할 사람은 이문열 문인일 것이다. 대조적이었던 이들이 같이 만나서 정신성을 어떻게 풀어갈지 궁금하다. 대문호들이 정치권의 멘토가 되어 권력을 지녀보자는 욕망은 망령에 불가한 짓이다. 명예를 빛나게 하는 일은 살신성인하는 마음수행이 절대 필요한 진리이다. 성자의 도에 빗대는 민주화의 상징이자 ‘영예의 깃발’을 짊어진 자가 철학도 없이 한갓 필부의 영웅 심리에 불가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가 사상적으로 영근 철학적인 이데올로기는 그의 시 오적에 붙인 개 견(犭)자가 자신의 명예 뒤에도 처신하기에 따라 그렇게 따라붙을 것임을 예견했어야 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영예에 값하는 만만한 일이 있을 리 없다. 어떻든 그는 진보의 한길로 선구를 달리던 길을 부정한 것이다. 진보의 길이 가시발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인지? 분명한 것은 뒤늦게라도 개견자의 멍에를 짊어지고 유턴하기로 작정 한 것이다. 그의 방황은 한 동안 단학수련 단체의 패권자가 되고자 하는 욕심을 내기도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깨달음의 길이라는 것이 자신의 수행력에 따라 그 영원성이 결정된다. 선배시인 미당 서정주의 교훈에서도 잘 드러난 예다. 전두환 정권의 413호헌에 찬동했다가 친일까지 더하여 힘에 빌붙는 치욕자로써의 낙인된 점이다. 보편적인 생각으론 그것이 무슨 죄라고 보겠는가. 그렇지만 역사의 이성적인 심판을 피하지 못한 불행을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 오히려 김지하 자신이 더 단죄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미당(未堂)은 고향에 새워진 시비마저도 수난을 당하는 독자들의 짓궂은 보복이 잘 드러나 있다. 미당의 未(미)자 윗획을 길게 쪼아 末(말)자로 고쳐 말당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고도 직성이 풀리지 않았던 것인지 우리언어로는 더 진화해 말똥으로 비화하여 똥보다 못한 인격으로 전락케 했던 아픔을 지켜보지 않았던가?

우리의 변화무쌍한 삶 속에 만상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섭리로부터 영원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것들이 바람서리 눈보라 속에서도 변치 않는 것이 있음을 시사한 공자의 가르침이 있다. 이것이 논어의 자한편에 나오는 송백후조의 교훈이다. 날씨가 추어진 뒤에라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나중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 後凋)는 예기다. 날씨가 따뜻해서 모든 잡목들이 함께 섞여 푸를 때는 차별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가 필부라면 힘을 따라 빌붙는 것이 무슨 죄가 된단 말인가. 그가 문호로써의 명예를 지닌 명사라는 점에서 절조의 다른 모습을 기대 했기 때문이다.

김지하라는 문호가 갖게 된 명예역시 마찬가지 이다. 문호다운 사상가는 그 절조가 필부와 다른 것인데 인기를 먹고 지탱했던 명예의 외로운 고갈이 그 정체를 드러나게 했으니, 그 인내를 안타깝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지금까지 짊어지고 다닌 명예에 정비례 한 무개만큼 고통이 따랐던 것인지, 길을 바꾼 그 깨달음의 진정한 속내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남은여생 명예의 무게를 내려놓게 된 대가보다 더 값진 영화가 있을지도 미지수다. 그는 이제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 버렸다. 마음을 비우지 않고도 명예마저도 내려놓게 된 도박행위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의 양심일진데 중생심을 벗어버리고 보살 마음으로 화하는 그런 길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비유하면 금강경에서 행해지는 ‘예류과에 속하는 수다원’의 예이다. 불가에서는 속습(俗習)의 가던 길을 청산하고 예류하는 것은 그야말로 육경(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물들지 않고 성자의 길로 바꾸어 가는 길을 의미한다. 이제 인생이 그렇게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노욕의 찌꺼기들을 다 비워내고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를 돌아봐야 한다. 중생들 속에 얽힌 시비 밖으로 나와서 보면 그 근본 바탕에는 허물도 죄도 존재하지 않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런 수다원의 길이 진정한 갈 길이며 이곳은 어디에 한 점 걸림 없는 대 자유가 기다릴 것이다. 대문호다운 마지막 넘보는 궁극의 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13. 1.17.
윤산 화선재 우거에서

 

[원문/우리힘 닷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