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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이 지금 ‘종북 장부’ 꺼낸 이유는[한겨레 정치기사]

▪살림문화재단▪ 2013. 8. 29. 01:18

 

국가정보원 수사관들(오른쪽)이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실을 압수수색하려고 우위영 보좌관(앞줄 왼쪽)에게 서류봉투에 든 영장을 제시하며 협조를 요구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진보당 수사’ 국정원 다른 뜻 없나
‘조직 축소’ 위기몰린 국내파트·수사국 탈출구 필요
이석기 ‘종북 낙인’ 손쉬운 대상…3년여 내사 거친듯
박 대통령 ‘개혁’ 발언 이틀뒤 ‘전격’…시점도 묘해

“시점이 참 오묘하지 않으냐. 자신들이 개혁 대상으로 지목돼 수술대에 오를 상황에서 ‘내란음모’라는 무시무시한 죄명을 들고나왔으니….”

 

이석기 의원 등 통합진보당 인사들에 대한 국가정보원의 ‘공개수사’가 시작된 28일 야권의 한 인사가 한 말이다. 국정원이 이 의원 등의 ‘말’(녹취록)뿐인 혐의를 문제 삼아 ‘국토 참절, 국헌 문란, 폭동’을 준비했다며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으로 밀고 들어온 시점과 의도를 놓고 여러 정치적 해석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최근 원세훈 전 원장에 대한 공판 과정에서 검찰은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국정원이 벌인 댓글 달기 등 국내 정치 개입 의혹을 ‘신종 파시즘’이라고 규정했다. 그에 앞서 열린 국회 국정조사에서는, 비록 제한적이긴 했지만 국정원의 국내 정치 개입의 실상이 텔레비전을 통해 공개됐다. 직원들 스스로 사사로운 자리에선 “어디 가서 국정원에서 일한다고 말도 못 한다. 일할 의욕이 나지 않는다”고 할 정도다.

 

 

국정원은 9월 정기국회에서 수술이 예약돼 있다. 이른바 ‘셀프 개혁안’을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지만, 여야는 큰 범위에서 국정원 개혁에 공감하고 있는 상태다. 새누리당도 국정원 조직의 일부 축소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고, 민생법안 처리 등에서 야당의 협조가 절실한 만큼 국회 논의 과정에서 민주당 쪽 개혁안을 일부 수용할 가능성이 있다. 조직·인원 감축, 위상 급락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더욱이 제1야당이 국정원 개혁을 내건 원외투쟁을 이어가고, 종교계·학계의 시국선언과 일반 시민들의 촛불집회가 계속되는 상황이다. 국정원 개원 이래 가장 큰 위기라는 말이 지나치지 않은 국면이다.

 

 

이 때문에 국정원이 국면 전환을 통한 위기 탈출을 위해 언제든지 걸면 걸 수 있는, 통합진보당과 경기동부라는 ‘손쉽고 약한 고리’를 겨냥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국정원 내부를 잘 아는 한 인사는 “이석기 의원은 이미 ‘오픈’된 인물로 국정원이 대공수사를 벌이기에는 너무나 손쉬운 대상이다. 가장 핵심이 되는 국내 파트, 수사 파트의 축소·폐지를 막기 위한 국정원의 ‘존재 증명’ 성격이 강한 수사로 보인다”고 말했다.

 

 

국정원의 ‘행동’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6월24일엔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무단으로 공개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임명한 남재준 원장은 나중에 “야당이 자꾸 공격하니까 국정원의 명예를 위해서 (대화록을 공개) 했다”고 했다. 박 대통령이 지난 26일 “국정원 개혁을 반드시 이뤄낼 것”이라고 밝힌 지 이틀 만에 이번엔 대대적인 압수수색이 이뤄졌다. 그것도 1980년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이후 한번도 적용된 적이 없는 죄명이 동원됐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자체 개혁안 발표 직전에 국정원이 박 대통령 앞에서 ‘우리의 기능을 인정해 달라’고 일종의 무력시위를 하고 있다는 해석도 한다. 국내정보 수집, 대공수사 등 국정원의 힘을 떠받치는 핵심 조직들의 존재를 각인시켜 개혁 필요를 희석시키려는 의도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실제 국정원은 지난 3년간 이 의원 등을 내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오래전에 주요 혐의를 확인하고도 이제야 공개수사에 들어간 점은 설명이 필요한 대목이다.

 

 

이에 대해 하경준 국정원 대변인은 “이런 수사는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공개수사에 착수할 때는 (혐의를 입증할 내용들을) 다 확보해 놓고 한다. 우리가 국회 청문회까지 다 받았는데 수사 시점이 애매할 이유도 없다”고 했다. 자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국정원이 혐의 입증에 확신이 있어 보인다”면서도 “실제 재판에서 결정적 증거가 나오지 않으면 정치적 의도를 의심받을 수 있다”고 했다.

 

 

국정원은 정확히 5년 전인 2008년 8월27일 탈북자로 가장한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공작원이 군 장교들과 사귀며 정보를 빼내 북한에 건넸다는, 이른바 ‘여간첩 원정화 사건’을 발표했다. 일부 관련자에 대해 법원에서 무죄가 나온 이 사건은, 이명박 정부 첫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와 뒤이어 불어닥친 공안정국 와중에 터졌다. 일부에서 이번 사건을 ‘데자뷔’(기시감)라고 하는 이유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