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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의 죽음에 대한 이해와 장례예식에 대한 고찰,

▪살림문화재단▪ 2013. 9. 30. 17:56

 

 

(발표2)

가톨릭의 죽음에 대한 이해와 장례예식에 대한 고찰,

그리고 사목적 모색

 

 

 

윤종식(신부, 가톨릭대학교)

 

 

 

 

1. 들어가는 글

 

   현대 한국사회는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정보화 사회라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다. 그러면서 전통적인 가치들은 빠르게 사라지고 새로운 가치체계는 아직도 구체적으로 자신의 철학적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사회와 문화에 대한 가치기준은 과학과 경제의 발전에 따른 삶의 질적 향상으로 인하여 근본적으로 변화되고 있으나 그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새로운 해답은 아직 보편타당한 명제로써 제시되고 않고 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질문들 중에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것이 자리하고 있다.

   최근에 유행하는 용어들 중에 ‘웰빙’(Well-being), ‘힐링’(Healing) 그리고 ‘웰다잉’(Well-dying)이 있다. 어떻게 보면 상업적 의도를 지니면서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요즈음 사람들의 관점분야를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는 데 보다 잘 살고 싶어서 웰빙을 말하고, 살아가면서 받는 많은 상처들을 치유받고 싶어서 힐링하는 방법을 찾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죽음’이라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려는 긍정적인 노력인 웰다잉을 연구한다. 이 세 가지는 죽음보다는 삶에 더욱 무게를 두고 삶을 더욱 잘 꾸려나가려는 노력임에는 확실하다. 그러나 삶을 포기하는 자살이 각 나라마다 사회문제화 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는 2010년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 1위라는 안타까운 결과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있다.1) 한편에서는 삶을 육체적, 정신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면서 또 다른 한편에서는 삶의 희망을 잃고 사회적, 가정적 소외감으로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 있다. 인간 사회는 이러한 양면성을 지니며 삶과 죽음에 대한 많은 질문을 계속해오고 있다.

   이러한 질문들에 어느 정도 길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 바로 종교이다. 종교는 보이는 것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말하고 삶의 희망과 활력을 내적, 영적으로 불어넣어줄 수 있다. 특히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라는 사후세계에 대한 질문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지닌 근본적인 물음일 것이다. 사후세계에 대해 체험한 사람들의 체험담들을 모은 책들도 있지만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음의 세계로 떠나보내는 경험들을 통해서, 그리고 인간 본성으로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다가오는 실재임을 알고 있다. 이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맞아들이느냐? 에 대한 관점과 이해는 각 종교마다 다르다. 그리고 각 종교의 죽음에 대한 이해와 대하는 태도에 따라 죽은 이를 대하는 방식도 다르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한국사회는 도교, 불교, 유교가 역사적 변천 과정에서 각각의 특성을 지닌 문화로 표출했고 분리, 전이, 통합이라는 과정을 통해 한국인의 심성과 생활에 스며들어 있다. 거기에 그리스도교 요소까지 가미되어 서로의 특성들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다양한 종교적 문화의 혼재 또는 상호보완이 내재되어 있는 한국사회에서 가톨릭은 죽음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해왔고, 또 죽은 이와 그 유가족들을 어떻게 대해 왔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가톨릭에서의 죽음의 의미를 성서적 바탕 위에서 가톨릭교회 교리서에서 언급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교회역사 안에서 변천되어온 장례예식과 의미변화를 간략하게 고찰하려 한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장례예식에서 사목적으로 보완해야 할 몇몇 부분들에 대해서 알아보고 대안을 모색하려고 한다.

 

 

2. 죽음에 대한 신학적 성찰

   가톨릭에서 죽음은 두려운 실재이면서도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넘어야 할 사건이기도 하다.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사건인 죽음을 사람들은 멀리하면서도 죽음 너머의 세상에 대한 기대감도 가지고 있다. 또한 죽음은 왜 인간이 꼭 맞이해야 하는 가?, 죽음은 왜 이 세상에 들어왔는가?,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는가? 등등의 질문을 품고 있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질문들에 대해 답하려는 가톨릭의 신학적 성찰을 살펴보겠다. 여기서의 죽음은 영적이거나 정신적인 죽음이 아닌 생물학적인 죽음을 다룬다.

 

2.1. 죽음은 모든 인간과 관련된 피할 수 없는 사건이다.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인 카알 라너(Karl Rahner, 1904~1984)는 “죽음은 모든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라고 말하면서  성서가 인간조건을 가리켜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는 이들’(루카 1,79)이라고 표현한 것도 의미가 없지 않다고 강조한다.2) 이러한 ‘죽음의 그늘’에 대한 언급은 20세기에 우리 인류가 겪은 두 번의 세계대전과 그 밖의 수많은 전쟁들, 한반도는 동족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라는 역사적 체험을 통해 증명되었다. 곧 죽음은 첫째로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 것이며, 둘째로 평범하지 않은 충격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장례의식을 행하는 동물”이라고 표현한 바에서도 확인되었으며, 볼테르 역시 “인간은 자기가 죽으리라는 것을 아는 유일한 종(種)으로서, 그들은 경험을 통하여 죽음을 인식한다.”라는 말을 통해 증명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은 죽는다’라는 죽음의 보편성은 인간의 직관적 인식에 진리로 자리하고 있다.3) 또한 이는 우리 신앙의 절대 명제이다. 구약성서 전반에서는 죽음의 보편성과 아울러 죽음과 연관된 인생의 허무함을 말하고 있다. 인간은 죽음의 때를 알 수 없으며(시편 39,5), 인간의 공통된 운명인(욥 30, 23) 동시에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1열왕 2,2; 사무 14,14; 집회 8,7)이다. 그리고 인간은 반드시 죽기 마련이니 땅바닥에 쏟아져 다시 담을 수 없는 물과 같으며(2사무 14,14),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존재로서(창세 3,19; 89,3; 104,29), 한낱 입김이고(시편 39,6.12) 도살되는 짐승과 같다(시편 49,13.21).4) 이렇듯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보편성과 불가피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죽음의 보편성과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가톨릭교회는 죽음을 ‘지상생활의 마침’이라고 한다. 이는 시간의 제한을 받는 인간존재의 한계에서 기인한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가기에 우리의 삶은 “시간으로 계산되며, 그 시간 안에서 우리는 변하고 늙어가므로, 지상의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죽음은 생명의 정상적인 끝마침으로 보인다.”5)

2.2. 죽음은 육신과 영혼의 분리이다.

   육신에서 영혼이 떠나는 것이 죽음이라는 서술은 성서에서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지는 않다. 그러나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코헬 12,7)라는 서술은 육신이 먼지로 돌아간다고 한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부여하신 “생명을 주는 능력”을 거두시면 사람은 무덤으로 들어간다는 그 이상의 뜻을 담고 있지는 않다.6)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하고 이 몸을 떠나 주님 곁에 살기”(2코린 5,8) 위해서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죽음을 부활을 위한 전제처럼 서술한다. 이는 “육신과 영혼의 분리인 죽음으로 사람의 육신은 썩게 되지만 그의 영혼은 하느님을 만나, 영광스럽게 된 그 육신과 다시 결합되기를 기다린다.”(997항)라고 하면서 2세기와 3세기 교부들의 설명을 되새기고 있다.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 이레네오(Irenaeus, 130-200년경) 그리고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60-220)와 같은 교부들은 살아있는 인간 몸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확실히 그것을 새로운 형태로 다시 만들 수 있으며, 또한 육신과 물질적 세계의 가치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의식, 그리고 육신과 영혼을 통합하려는 그들의 매일의 노력이 의미와 지지를 발견하는 것은 오직 부활에 대한 희망뿐이라고 힘차고 열정적으로 주장했다.7) 이러한 육신과 영혼에 대한 전통적 종말론적 개념과는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현대 신학자들에 대해서 신앙교리서은 종말론에 관한 몇몇 질문에 대한 서한 “Recentiores eoiscoporum synodi” (1979)을 통해서 전통적인 ‘육신’과 ‘영혼’의 개념 사용을 확인시켜 주었다.

 

“교회는 의식과 의지와 더불어 부여된 영적요소가 죽음 이후에 살아남아 존재하며, 그래서 ‘인간 자신’(ego humanum)은 비록 당분간은 그 몸의 완전성에서 빼앗겨지긴 했지만, 존속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 요소를 지칭하기 위해, 교회는 성서와 전통에서 그 사용이 받아들여졌던 ‘영혼’(anima)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용어가 성서에서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교회는 그것을 거부할 정당한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교회가 하나의 매개체로서 어떤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지속시키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한다.”8)

2.3.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인간은 죽음이 없이 계속해서 삶을 지속하고 싶은 원의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왜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는가? 라는 죽음의 기원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된다.

   지혜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2,23-24)라고 했고, 사도 바오로는 죄 때문에 이 세상에 죽음이 왔다고 가르친다(로마 5,12).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인에게 죽음과 내세에 대한 깊은 관심과 함께 죽음을 하나의 죄악이며 파멸, 공포의 실재로서 제시하고 있다.9) 죽음은 원조의 죄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육신의 죽음도 없었을 것이다”10)라고 교회는 아쉬움을 드러내면서도 “인간이 자기 죄로 잃어버린 구원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구원자께서 다시 회복시켜 주실 때에 죽음은 패배를 당할 것이라고 그리스도교 신앙은 가르친다”11)고 죽음을 넘어선 구원에 있어서 구원자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죽음은 원조의 죄로 인해서 들어온 죄의 결과이며, 이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구원자가 오셔서 구원할 때 가능하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은 죽음을 원치 않으셨으며 아예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지혜 1,13)는 것이다.    

 

2.4. 그리스도로 인해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 죽음

   그리스도교 신앙은 죽음의 실재를 부인하지 않고 죽음 앞에서 인간 실존의 수수께끼가 절정에 이르고, 죽음 자체가 영원한 소멸에 대한 공포를 주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는 죽음이 불멸의 영혼과 썩어 없어질 육신과의 분리 상태이므로, 영혼은 심판을 받아서 영원한 삶으로 나아가고, “지상생활 동안 선을 행하였거나 이를 소홀히 한 일의 궁극적 결과”12)에 따라 지복직관을 누리거나 끝없는 벌을 받는다고 가르친다.13)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덕분에 죽음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찾는다. 사도 바오로는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필립 1,21),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2티모 2,11)라고 함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다시 살 것이라는 부활신앙을 고백한다. 이러한 부활을 위한 죽음의 긍정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다. 교회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본래의 인간 조건인 죽음을 겪으셨다. 그러나 죽음에 직면한 공포에도, 그분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자유로이 순종함으로써 이를 받아들이셨다. 예수님의 순종은 죽음이라고 하는 저주를 축복으로 변화시켰다”14)라고 하며 죽음의 의미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환되었음을 말한다.  

   인간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파스카 신비를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므로 죽음은 하나의 통과의식이며, 부활을 위한 전초적인 단계인 동시에 죽음 후의 심판과 부활하기 위한 하나의 시작 단계로서 외에는 큰 의미를 제시해 주지 못한다. 그래서 부활사상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이루고, 또한 그리스도를 통한 죽음의 극복과 승리를 나타냄으로써 죽음은 죄 또는 악이며 인간에게는 원수로만 이해되기에 죽음의 이해는 성서적 이해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겠다.15) 곧 죽음은 극복 대상이지 그 자체가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죽음을 넘어선 그리스도의 부활에 우리도 동참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죽음이 긍정적인 것이다.

 

 

3. 가톨릭의 장례예식 고찰

 

   원시시대부터 인류는 죽음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했으며, 누군가 죽으면 반드시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죽은 이를 저 세상으로 보내는 경건하고 정성스런 의식을 치렀다. 장례와 제사는 죽은 이에 대한 공경심과 두려움이 어우러져 시공을 초월한 각 민족의 대표적인 전통문화로 자리매김하였고, 인간의 생활풍습 가운데 가장 끈질긴 전승력을 보여주는 관습이 되었다.16) 그래서 장례 풍습을 보면 문화가 보인다.

   모든 종교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생로병사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며 그에 따른 고유한 의식들을 가지고 있다. 특히 죽음은 체험불가능성과 불가피성, 보편성으로 인해서 인간에게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 되어서 일찌감치 상례의식을 통해 죽음에 대한 전망을 보여준다. 미국의 인류학자 A. W. 멀레피트는 자신의 저서인 『종교와 문화』(Religion and Culture)에서 죽은 이에 대한 의례를 사자의례(cult of the dead)와 조상숭배(ancestro cults)로 구분하였다. 그에 따르면, 사자의례에서는 장례절차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단지 시신을 처리하는 데 머무른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죽은 자의 영혼을 육체와 분리하여 가능한 한 빨리 이승을 잊어버리고 저승에 머무르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사자의례에서는 장례에 많은 돈을 들여 시신을 처리하는데, 이는 죽은 이가 이승에서 쓰던 물건들을 빨리 없애고 그 이름이나 기억을 빨리 잊도록 하려는 것이다. 반면에 조상숭배는 장례에서 일정한 격식과 절차를 거친다. 또 가급적 죽은 이와 이승의 산 자들을 연결시키려고 한다. 죽은 이들이 지녔던 물건들을 소중히 간직할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을 자꾸 드러낸다. 또한 죽은 이의 영혼이 이승에 머물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하며, 그를 기념할 여러 방법을 동원한다.17)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의 장례예식은 사자의례와 조상숭배 중에 어디에 속할까?  

   그리스도교는 구세사를 완결하는 예수님의 강생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통해서 모든 인간이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삶을 하느님에게서 선물로 받았음을 선포하는 계시종교이다. 그래서 죽음은 삶의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옮아감이며18) 운명이 끝나는 날이 아니라 새로 태어나는 날(dies natalis)이라고 기도한다.19)

 

3.1. 성서의 장례에 관한 증언

   장례와 관련한 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하느님의 백성은 죽은 이들을 특별한 주의와 정성으로 묻었다. 집회서에서 “죽은 이에 대한 호의를 거두지 마라”(7,33)라고 하였으며, 죽은 이를 매장하는 일은 원칙적으로 선한 행위로 이해하였다(토빗 1,18; 2,3-7; 12,12 이하). 그리고 사형에 처해진 사람도 그 사람이 생겨났던 땅에 묻힐 권리가 있으며 그날로 묻혔다(신명 21,22 이하). 그러나 죽음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에서부터 분리되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상태로 표현되기도 한다(시편 88,6).

   구약시대의 장례예식풍습은 대강 다음과 같다. 죽은 이의 눈을 감기고(창세 46,4; 토빗 14,15), 고인과 입맞춤하며(창세 50,1) 시신을 씻기고(참조: 사도 9,37), 기름을 바르고, 아마로 싼 노끈으로 향기나는 약초와 함께 시신을 묶었다(요한 19,40; 참조. 마르 15,46; 16,1; 요한 11,44; 마르 14,8). 시신은 안치하고(참조: 사도 9,37) 애도가가 시작되며(창세 23,2 이하; 50,3; 예레 9,16) 마침내 시신은 대부분 죽은 날에(사도 5,6) 관도 없이 들것 위에서(참조: 2사무 3,31; 루카 7,12.14) 무덤으로 내려놓는다. 많은 경우 기름과 발삼을 섞어 향료로 사용한다(2역대 16,14). 묘지로 가는 길에서와 장례 때 애도가를 노래한다.20)

   신약에서에서 죽음은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을 통해서 새로운 차원을 지니게 된다. 예수는 죽음을 뛰어넘는 자신의 능력, 곧 죽은 이를 일으켜 세우는 일을 이미 지상의 삶에서 보여주신다(루카 8,40-42; 요한 11,38-44). 바오로의 세계신학의 이해에 따르면 죽음은 새로운 차원을 가진다(로마 6,4; 콜로 2,12; 2티모 2,11).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예수의 부활 신앙에 대한 희망으로 인하여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21) 구약이나 신약성서에서는 장례와 관련된 어떤 전례적인 형태나 기도를 찾아볼 수 없다.

 

3.2. 초대교회에서의 장례예식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대다수는 히브리인이었으므로 장례예절도 히브리적 관습을 그대로 유지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유다인들의 거주지역에서 이방인의 지역까지 그리스도교가 널리 전파되면서 이방인들의 다양한 문화와 관습에서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히브리적 관습에 대한 연구는 초대 그리스도교 장례연구의 바탕을 마련한다. 유다인들은 먼저, 죽은 이의 눈을 감기고, 몸을 가지런히 하고 수의를 완전하게 입힌다. 그리고 죽은 이의 가족과 장례식에 참석한 이들은 자신들의 아픔을 외적으로 표현하였는데, 그 방법은 공적인 재앙이 닥쳤을 때, 또는 참회의 시기에 행하던 관습을 따랐다. 또한 죽은 이의 가족은 단식을 하기도 하였고 커다란 고통을 표시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곡을 하였다. 그리고 죽은 이의 친지와 친척들은 위로의 빵과 위로의 잔을 가져와서 상을 당한 가족들을 위로하였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히브인들의 장례관습에서 중요한 요소는 슬픔의 표명과 위로로 보여진다. 반면에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부활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 장례식에서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22) 140년경의 교부 아리스티데스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장례식에서 슬픔과 비애감을 표시하지 않아야 하며, 오히려 주님께 감사드리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왜냐하면 세상을 떠난 그 형제가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복된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3) 초기 그리스도교는 장례의 형식과 찬가와 기도문 등을 유다이즘에서 차용하였으나 부활신앙을 중심으로 한 파스카적 예식을 거행하였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관할권에서 확장하였기에 자연스럽게 고대 로마의 장례 문화를 만나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토인비(J.M.C.Toynbee)에 따르면, 고대 로마에서는 임종하는 사람이 자신의 가족들을 불러 모아 죽기 전에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24) 이 관습은 초대교회에서 임종자를 위한 밤샘기도를 연상시킨다. 사람이 죽으면 로마인들은 시신을 정리하였는데 우선 눈을 감기고 죽은 이의 이름을 부르고, 수의를 입히며 입안에 동전을 넣어 주었다고 한다.25) 이것은 임종 직전에 성체를 노자성체의 전통으로 변화되어 남게 되었다고 추정된다. 로마인들의 관습에서 죽은 이의 집에서 묘지까지의 장례행렬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장례식을 일컫는 ‘Exsequiae’, ‘Prosequi’는 이 행렬을 “뒤따른다”는 의미에서 유래했을 정도이다. 로마관습에 시신을 매장한 후에 ‘Silicernium’이라고 하는 장례 후 음식나눔이 있었다. 이 관습은 정해진 날, 즉 기일에 음복의 형태로 거행되었다.26) 그리스도교는 ‘Refrigerium’이라고 부르는 음복관습으로 차용되었다.27) 죽은 이를 기념하는 기일관습은 처음에 순교자들에게 적용되어 장엄한 성찬례와 함께 거행되었다가 후에 모든 죽은 이에까지 적용되었다. 이 관습이 위령미사로 발전하게 되었고 2세기부터 미사가 봉헌되었다는 흔적을 아리스티데스의 호교론과 외경인 요한행전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28) 2세기 말경에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도 매장한 날과 기일에 드리는 미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29)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고백록(9,12)에서 로마 근교 오스티아에서 거행한 그의 모친 장례식에서 어머니를 묻은 후 이어 성찬례를 거행했다고 전한다. 장례미사가 일반화된 것은 6-7세기 이후부터이다.30)

   초대교회에서의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들을 전해주는 문헌들로서는 4세기 중엽에 형성된 이집트 Thuuis의 주교 세라피온의 기도서(Euchologion), 사도헌장(Constitutiones Apostolorum) 제8권, 5세기 말에 저술되었다고 추정되는 위-디오니시오(Pseudo-Dionysius Areopagita)의 작품으로 알려진 교계제도(De ecclesiastica hierarchia) 등이 있다.31) 여기서 위-디오니시오의 교계제도에 나오는 당시 교회의 장례예식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독서와 시편으로 이루어진 말씀전례와 중심예식이다. 중심예식은 대부제에 의해 예비자들을 돌려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서간낭독과 보편지향기도는 각각 죽은 이를 포함시킨 가운데 전례의 정점으로 이끈다. 이와 관련하여 집전자와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행하는 시신에 대한 입맞춤과 도유로 작별예식을 시작하는 것은 의미가 깊다. 집전자는 개회(영접과 감사기도)와 마찬가지로 장례예식의 마침 부분에서 축복을 하고 이어서 공동체를 시신을 매장하는 곳으로 파견한다.32) 집전자는 주교이고 부활을 통한 죽음의 조명이라는 관점을 잃지 않고 참석한 공동체 구성원이 죽은 이와의 친교를 입맞춤으로 표시하며, 도유는 병자도유가 아니라 세례로 다시 태어남의 의미를 띤다는 것이 파스카적 의미를 드러낸다.

 

3.3. 중세의 장례 예식

   중세 초기의 장례미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도문은 지금까지 발견된 성사집으로는 최초인 「베로나 성사집」에서 죽은 이를 위한 기도인 “Super Defunctos” 6개를 찾을 수 있다. 속죄와 참회의 기도와 함께 파스카의 내용을 상기시키는 기도문들이 있다.33) 「젤라시오 성사집」은 중세 초기 교회의 위령 미사 기도문을 다양하게 전해준다. 이 성사집의 3권 91부는 죽은 이를 위한 기도(Orationes post obitum hominis)로 꾸며져 있다.  이곳에는 영혼을 맡기는 기도(Commendatio animae, 1626-1627항)인 고별식도 있다.34)

 

3.3.1. 로마 예식 49권(Ordo Romanus 49)

   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포함한 온전한 장례예식 전체를 전해주는 장례예식서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로마 예식 49권」으로 7-8세기의 장례예식을 전해준다. 이 예식서는 예절 지시문(Rubrica)을 중심으로 쓰여졌으며, 이 예절 지시문을 통해서 장례예식의 구조와 성격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예식서에서 나타나는 두 개의 행렬이 예식의 성격을 명확하게 밝혀준다. 망자의 집에서부터 성당까지, 그리고 성당에서 미사를 거행한 후 묘지까지의 행렬이다. 이 행렬 중에 참석자들은 시편과 후렴을 노래한다. 이 시편에는 파스카적 성격을 지닌 시편인 113편, 117편이 들어 있으며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무리를 지어 나아가는 이스라엘 민족을 연상시킨다.35)

   이 예식서에서 드러난 당시의 장례예식은 파스카적 여정으로 파스카 탈출의 완성으로 죽음을 표현한다. 죽은 이는 아직 살아있는 공동체가 동행하는 가운데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의 사자들인 천사들의 호위 속에 영원한 왕국의 문으로 들어간다고 시신을 묘지로 옮기는 행렬 중에 부르는 시편의 후렴에서 드러낸다.36)

 

3.3.2. 파스카적 요소에서 속죄와 탄원의 요소로 전환

   죽음이 부활의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 중에 있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파스카적 성격은 어느덧 사라지고 속죄와 참회의 신학이 발달하여 하느님의 심판 때에 징벌을 피하기 위해 하느님의 자비에 호소하는 쪽으로 장례예식의 중심이 옮겨지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죽은 영혼을 위한 속죄의 표시로서의 위령미사가 집전되기 시작하였고, 장례예식 안에서도 파스카의 기쁨은 죽은 영혼의 죄를 씻는 속죄적인 성격으로 대체되고 말았다. 속죄의 정신은 죄 때문에 받게 될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낳았고, 마침내 죽음 앞에서 파스카적인 기쁨보다는 심판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느끼게 하는 것은 「그레고리오 성사집」에서부터 보여졌고,37) 멘데의 주교였던 두란두스(G. Durandus 1230-1296)이 전한 클뤼니 수도회의 장례예식들에서 두드러지게 확인할 수 있다.38) 이에 따르면 먼저 임종이 가까이 온 것을 느낀 수도자는 아빠스나 원장 신부를 불러 자신의 임종에 대해 알린다. 이어서 공적인 죄의 고백과 병자의 도유, 노자성체가 시편을 노래하는 가운데 집전된다. 임종의 순간이 오면 임종자에게 재를 뿌린다. 그리고 성인호칭기도를 바치는 데 후렴은 “그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Ora pro eo)라고 한다. 임종 후에 곧바로 위령성무일도가 성당에서 거행된다. 성무일도는 저녁기도에서 아침기도까지 계속되는데, 이 성무일도가 끝나면 장례미사가 이어지고 미사 후에 곧바로 묘지까지 행렬하여 시신을 묻는다.39) 여기서 죄를 고백하고 재를 뿌리며 죽은 영혼을 위한 성인호칭기도는 죽은 영혼의 속죄와 죽은 후의 심판과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강조되어 생긴 예식이라 하겠다.

 

3.4. 트리엔트 공의회의 장례예식(1614년 로마예식서)

   1614년 예식서는 죽음을 둘러싼 예식들을 여러 개 수록하였다. 노자성체예식, 병자방문과 병자성사예식, 그리고 장례예식을 “De Exsequiis”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고 위령성무일도(Officium defunctorum)가 뒤따른다.

   장례예식은 모두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죽은 이의 집에서 성당으로의 행렬을 중심으로 하는 첫째 예식과 성당 안에서 하는 예식(위령성무일도, 미사, 사도예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묘지로 향하는 행렬을 포함한 표지에서 하는 예식 등이다.

   1614년 로마 장례예식의 성격을 말한다면 예식의 간소화일 것이다. 이전 예식들이 지니고 있던 많은 시편들을 생략했고(시편 113; 24; 114; 131; 41 등), 중세까지 남아 있었던 많은 파스카적 성격을 띠는 기도문들의 숫자를 줄였다. 반면에 “하느님의 분노”(Dies irae)나 “나를 구하소서”(Libera me)40)와 같은 속죄의 성격을 띤 기도문, 시편, 후렴 등으로 가득 채웠다. 또 초대교회의 장례의 색은 부활을 상징하는 흰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614년 예식서는 검정색을 장례예식을 상징하는 색으로 규정하여 검정색 제의와 제구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또 이 예식서는 사도예절(赦禱禮節, Ritus Absolutionis)을 장례예식의 중심에 놓았다.41) 결국 1614년 예식서는 파스카적 성격은 대부분 잃어버리고 대신에 죄에 대한 속죄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 구원에 대한 불안을 강조하는 시편, 기도, 예식으로 가득 채웠다.

   이러한 강조점의 전이현상에는 연옥교리의 교의사적 발전이 큰 역할을 했다.42)

 

3.5.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른 새로운 장례예식서(1969년 장례예식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헌장”(Sacrosanctum Concilium)에서 장례예식의 개정에 대해서 언급한다.

 

“장례식은 그리스도인 죽음의 파스카 성격을 더욱 명백히 드러내야 하며, 각 지역의 환경과 전통에, 또한 전례 색상에 관한 것에도 더 잘 부응하여야 한다.”(81항)

 

   이 언급에서 세 가지 특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로는 그리스도인 죽음을 파스카 성격으로 파악해야 하고 장례예식에서 그것을 분명하게 드러내야 할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둘째로는 트리엔트의 장례예식이 굉장히 획일적이고 중앙집권적이라면 이제는 지역적 특성과 문화적 전통에 대해 고려를 통한 다양성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셋째로는 조금은 구체적인 전례 제구의 특성으로 전례 색상에 있어서도 파스카 성격이 잘 드러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이 지침에 따른 장례예식서는 1969년에 인가가 되어 출판되었다. 이 예식서에는 지침과 해설이 서두에 배치되어 있어서 공의회가 강조한 파스카의 의미와 그리스도의 죽음을 연결시키면서 장례예식에 대해 설명하고 지역풍습을 포괄적으로 고려하여 예식을 집전할 수 있도록 지역 주교회의에 많은 권한을 위임을 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3.5.1. 새예식서의 구조와 내용

   새 예식서는 초상 직후부터 무덤까지의 하관예식까지 장례절차를 3가지 유형의 예식으로 제시함으로써 지역교회가 각국의 관습에 맞는 예식을 채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제1양식(이탈리아, 프랑스 유형)은 세 장소에서 거행되는 장례예식으로서 죽은 이의 집, 성당, 묘지에서 각각 예절을 집전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제2양식(독일어권)은 두 장소, 무덤 경당과 묘지에서, 제3양식(아프리카, 유럽 지역)은 죽은 이의 집 한 곳에서 모든 예식을 집전할 수 있게 하였다.43) 또한 예식서는 미사 중에 사순시기가 아니라면 알렐루야를 노래할 수 있도록 하였고 미사 후에 거행하던 1614년 예식서의 사도예절을 고별식(Ultima Commendatio et Valedictio)으로 대체하였다. 고별식은 더 이상 영혼의 정화와 속죄를 위한 예식이 아니라 죽은 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하느님께 죽은 이의 영원한 생명을 청하는 기도로 꾸며진 예식이다.44) 예식서는 장례미사와 장례예식 안에서 성서말씀을 풍부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으며, 이 성서말씀들은 파스카적인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들이다.45) 또한 예식서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반대하는 이유가 아니라면 지역적 풍습에 따라서 신자들도 화장46)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고 장례예절을 집전하는 데 사목자의 사목적 배려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47) 또한 어린이 장례미사를 세례 받은 어린이와 세례 받지 않은 어린이로 구분하여 수록하였다.48)

 

3.5.2. 새 예식서의 위령미사신학

   우선, 장례의 파스카 성격을 회복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비록 통일된 장례예식서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그리스도교적이며 파스카적인 장례예식인가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시편과 찬가를 노래하면서 파스카의 기쁨을 표현하였고, 인간적인 슬픔과 고통을 참아내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그리스도교적 희망을 고백했던 것이다. 이러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부활신앙을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서 회복할 수 있었고 장례예식에서도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49)

   둘째로는 토착화(Inculturatio)와 적용(Adaptatio)을 위한 개방성이다.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은 각 지역별로 독특한 문화와 관습 아래서 형성되었으므로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다양성들이 죽음에 대한 파스카적 의미를 표현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받아들일 수 있고 그러한 권한을 지역주교회의에게 많이 넘겨주었다. 지역주교회의는 표준예식서가 제시한 3가지 양식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유한 특색을 지닌 장례예식을 만들기 위한 여러 가지 적용을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예식 중에 부를 찬가나 전례의 색깔 등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50)

   셋째로는 집전자가 행해야할 위로자로서의 역할에 대해 강조이다. 죽은 이의 가족과 친지들을 위로해야 하는 집전자의 역할을 예식서는 해설과 지침에서부터 설명하고 있다. 사제는 그리스도인의 죽음의 의미를 설명함으로써 죽은 이의 가족과 친지들을 위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로자의 역할에서 자연스럽게 파스카의 신비가 강조된다. 이 파스카 신비를 통하여 죽은 이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옮아갔음이 이 위로를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집전자의 위로의 역할을 드러내고 있는 기도문을 예식서에서 다수 찾아볼 수 있다.51) 이 기도문들을 통하여 집전자와 공동체는 유가족과 살아남은 모든 이를 함께 기억한다. 왜냐하면 파스카를 통해 주어질 저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시 누리게 될 새로운 삶에 대한 신앙과 희망을 교회공동체가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밤샘기도나 묘지축복, 미사 없는 장례예식은 사제가 함께 할 수 없는 경우 각 주교회의는 평신도에게 그 집전자격을 줄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배려도 결국은 위로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52)  

 

 

4. 나오는 글 – 현 한국천주교회의 장례에 대한 사목현실과 제언

   현재 한국천주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례개혁이 현실화된 장례예식서를 사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공의회가 구현하려고 노력했던 장례의 파스카 성격의 강조, 토착화와 적용이라는 다양성에 대한 개방, 위로자로서의 집전자 역할을 구체적으로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다.

 

4.1. 장례 예식의 토착화와 적용이라는 측면

   한국천주교회는 초기 그리스도교처럼 박해를 많이 받았다. 박해의 이유들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조상과 부모에 대한 효행의 표본인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해시대 내내 조선정부에서는 제사를 거부하며 조상에 대한 효심을 저버린 신자들을 ‘사람 낯바닥에 짐승마음[人面獸心]을 가진 불효한 집단으로 매도했다. 이 때문에 국가에서는 천주교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양반사족의 반열에 끼워주지 말라고 명령했다. 당시 교회에서 제사를 금지한 까닭은 조상신에 대한 숭배로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교황청이 1939년 조상제사문제를 다시 검토해서 동양사회에 이를 허용했다. 또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서 다른 종교와 문화에 대한 교회의 이해도 심화되었다.53) 그래서 한국천주교회도 조상공경의 제사에 대해서 심도있게 다루고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실로 2003년에 「상장예식」 개정판을 출간했고, 하였다. 주교회의 이름으로 성서말씀과 기도를 중심으로 한 천주교식의 제사양식을 마련하여 2012년에「한국천주교 가정제례예식」라는 이름으로 발행하였다.54) 상장예식에는 유교식 전통을 어느 정도 따른 임종과 운명, 위령기도「연도」, 염습과 입관, 장례, 우제(虞祭), 면례(緬禮), 성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55) 이러한 노력이 있었지만 여전히 장례의 토착화에 대한 부분에서 부족한 점들이 있다.

   현재 한국천주교회에서 거행되고 있는 상장례예식을 장례예식서가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본당에서 연령회를 중심으로 상장례예식을 거행하고 있는데, 「상장예식」을 중심으로 예식을 거행하고 있으나 이 내용들이 「장례예식서」에 들어와 있지 않아서「장례예식서」는 미사와 고별식 때만 사용되고 있다. 앞부분과의 연장선상으로 그리스도교 신자이긴 해도 이미 불교문화와 유교적 관습이 함께 어우러져있는 한국인의 종교심을 현행의「장례예식서」는 전혀 표현하지 못하는 현실이다.56) 현재는 「상장예식」이 부족한 점들을 많이 보완하고 있지만 토착화된「장례예식서」는 필요하다.

 

4.2. 죽은 이와 유가족에 대한 사목적 노력

   천주교회는 성사를 통해서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에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선사한다. 죽은 이와 연관된 성사로는 병자성사가 있다. 심한 중병에 걸리거나 중대한 수술을 앞둔 신자들에게 도유와 안수, 기도를 통하여 영적, 육체적 치유를 기원하며 주님이 함께하심을 느끼도록 한다. 그리고 장례가 나면 상가를 찾아가 위로를 하며 함께 연도를 바치거나 입관 예절에서 기도로써 인도한다. 장례미사 집전을 하며 유가족과 참석한 모든 이에게 파스카 신비를 깨우쳐주고 세상을 떠난 이들과 남아있는 이들의 통공을 기원하며 진심어린 위로를 전한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교처럼 묘지까지 사제가 따라가서 예식을 집전해주는 못하는 현실이다. 이유를 댄다면 장지가 멀고 신자수가 많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즈음에는 사제가 묘지에 함께 가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의식이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제주교구의 경우에는 당연히 본당 사제가 묘지까지 함께 하여 예식을 집전한다고 한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당연히 묘지까지 함께 가야 한다는 의식이 사목자에게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이 죽으면 누구나 당황한다. 대개는 연령회와 선종봉사회가 전반적인 장례절차를 안내를 하고 상의를 한다. 그런데 봉사자마다 안내하는 방식과 내용이 달라서 혼선을 일으키는 경우들이 있다. 그래서 유가족과 유가족 가운데 비신자들을 위해서 천주교 장례의 참된 뜻과 절차, 그리고 그 해설을 담은 간단한 안내서를 본당이나 교구 단위로 만들어 유가족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좋다.57)

   서론에서도 말했지만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다양한 이유로 세대를 불문하고 자살은 증가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도 자살은 해마다 증가 추세에 있다. 인터넷에서는 자살을 도와주고 방법을 제공하는 불법사이트가 상업화되고 있다.58) 교회의 교리에는 생명존중에 대한 내용이 강조되어 있고 자살은 큰 죄라는 엄포도 놓고 있건만 자살하는 사람은 늘어가고 있다. 이에 대한 교회 전체의 대책이 필요하다. 생명의 소중함과 죽음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확대와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 대한 상담을 강화할 필요가 대두되고 있다. 예식적 차원에서 자살자에 대한 본당 사목구 주임의 사목적 배려가 요구된다.

 

4.3. 위험할 수 있는 사목적 배려

   언제부터인가 설이나 한가위 미사 때, 제대 앞에 제사상을 차려놓은 본당이 생겼고 지금은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한 신학적 반성이 없는 채 집에서 제사상 차리지 못하는 신자 가족들을 위해서 사목적 배려 차원에서 함께 조상제사를 드리면 좋지 않나! 라는 선한 의지에서 생겼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유일한 희생제사로서 주님께서 주례하시고 주님이 흠없는 제물이 되는 성찬례와 조상께 효행의 의미로 드리는 제사와 같은 격으로 놓을 수 있는 위험이 있음은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참으로 유일한 제사인 미사의 의미를 살리면서 가정에서 제사를 드리지 못할 상황이 되는 신자들을 배려한다면 제사상은 다른 곳에 마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무리 본당 주임이 주님께 드리는 희생제사와 조상공경의 제사의 의미를 구별하여 설명한다고 하여도 제대 앞에 놓인 제사상을 보는 사람들은 미사도 드리고 조상제사도 드리는 일석이조라는 생각이 더 돋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고려해야 하는 것은 천주교회에 없지만 한국의 상제례 문화에서는 당연히 여기는 49재에 대한 것이다. 불교의 윤회사상에 기원한 49재는 다시 생을 받기까지의 상태인 중유(中有)의 기간에 출생의 조건을 만나지 못하면 다시 수차례 죽고 태어나는 식으로 여러 7일을 경과하게 되는데, 그 최대기간이 7·7일이라고 하여 사람이 죽은 후 중유에 머무는 기간은 최소한 7일, 최대한 49일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데서 기인한다.59) 그리스도교는 삶, 죽음과 부활이라는 직선적 역사관을 지니고 있는데, 윤회설에 기반을 둔 49재를 지키는 것은 신앙의 근본이 흔들리는 일이다. 죽은 이를 주님께 보내드리고 유가족들이 일상으로 돌아가게 하는 탈상의 의미를 49재에서 그동안 찾았다면, 그리스도교의 전통 안에 있는 성령강림의 50일을 활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미 몇몇 본당과 교구에서는 이것을 교육하고 실행하고 있다고 한다. 성령강림은 12제자가 참된 사도(파견된 이)로 거듭나는 계기가 된 사건으로 유가족들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죽은 영혼이 주님 품에서 안식을 얻으리라는 믿음을 가지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에 대한 신학적 연구는 계속해야 할 것이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그리스도교 장례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모든 성사, 특히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은 하느님 자녀의 마지막 파스카가 그 목적이다. 마지막 파스카는 죽음을 통해 하느님나라의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때에는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하고 신앙과 희망으로 고백하던 것이 이루어진다.”(1680항)

 

   곧 그리스도교 장례는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희망을 고백하는 장이라 하겠다. 한국이라는 상황과 문화에서 이런 그리스도교 장례의 의미를 구현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논평2)

 

 

 

죽음 -목회적, 사목적 접근 을 읽고

발제자의 글을 읽고 느낀 점과 질문

 

 

 

홍경만(목사, 남부루터교회)

 

 

 

 

1. 김기석 목사님의 발제를 읽고

 

   <7. 남은 자들>에서 “그의 죽음이 남은 이들을 더 나은 존재로 이끌도록 하는 것은 남은 이들의 몫이다”(16쪽)라는 주장은 죽음의 문제에 있어 한국교회의 목회•사목적 측면에서 나아갈 방향을 분명하게 이끌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김 목사님은 발제의 <6. 장례식 절차>에서 소속 감리교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 가족, 친지, 조객 등 남은 자에게 주는 평안과 위로를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죽음신학의 핵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가 “이미지, 상징, 신화는 마음이 아무렇게나 만들어놓은 창조물이 아니다. 이것들은 어떤 필요성에 응하고 있으며, 어떤 기능을 다하고 있다. 그 기능은 존재의 가장 내밀한 양상을 숨김없이 드러내주는 데 있다”60)고 했습니다. 교회는 신자의 장례식에서 “이제 그 도성에는 저주받을 일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어린양의 옥좌가 그 도성 안에 있고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 얼굴을 뵈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하느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요한의 묵시록 22:3-4, 공동번역개정판)는 말씀처럼, 망자에게 내세에 관해 성서가 제시하는 상징적 내용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목사님은 발제 <5. 죽음의 자리에서> 티벳 불교가 죽음의 순간을 영적 발전의 기회로 삼는 점을 언급하면서, “평소에 그가 좋아하던 찬송가를 아주 조용하게 불러주고, 그가 늘 암송하던 성경 구절을 읽어준다”(13쪽)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래전부터「바르도 토에돌」(Bardo Thoedol) 또는 다른 말로 「죽은 자에 관한 티베트인의 책」(Tibetan Book of the Dead)은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에까지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망자는 죽음의 세 단계 바르도(Bardo, 죽음의 상태)를 통해 다시 환생하거나 영원한 해방이라는 궁극적 자유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분야를 연구한 이정용은, 이때 망자는 첫 번째 바르도에서 환각경험(LSD trip)61)과 유사한 경험, 즉 칼 융이 말하는 것처럼 집합적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과 연합하게 되는데, 소위 즐거운 환상과 무서운 환상에 따라 110가지나 되는 신들을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즉 죽은 자의 110가지 정신상태가 여기에 반영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힌두교 사제 구루(guru)는 “오 귀하게 태어난 분이여(망자의 이름을 부르고)…… 이제 당신은 바르도 상태에서, 그의 실존 속에서, 그것을 경험하려는 찰나입니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텅 비어 있는 것 같고, 구름 없는 하늘과 같으며, 벌거숭이의 티 한 점 없는 지성은 원형의 천장이나 중심이 없이 투명한 진공과 같습니다……"62)라고 말해줌으로써 망자의 영혼이 영원한 해방에 이르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교도 남은 자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상장예식에서 망자의 내세적 삶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봅니다. 이에 대해 혹시 목사님께서 목회 중 경험하신 예를 통해서나 또는 평소의 갖고 계신 생각을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 윤종식 신부님의 발제를 읽고

 

   무엇보다도 죽음과 장례예식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파스카 신비를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22쪽)라는 내용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한국천주교가 전래 초기부터 지금까지 토착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지도 이해하며 고무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신부님은 발제 서두에서 “현대 한국사회는 산업화 물결 속에서 정보화사회라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18쪽), “삶의 희망을 잃고 사회적, 가정적 소외감으로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 있다”(19쪽)면서 양면성을 지닌 인간사회의 삶과 죽음에 대해 “어느 정도 길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 바로 종교이다”(19쪽)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에 대해서는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날 목회현장에서 너무나 뼈저리게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es)는 “죽음을 맞이할 사람만이 죽은 자들의 존재를 감지한다는 사실이다”63)고 말하였는데, 즉 유령이나 환영을 죽음의 예고로 봅니다. 그는 추가적 설명에서 중세인들은 이 죽음예고를 꼭 자연적인 일과 초자연적인 일로 구분하지는 않았지만,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있는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개척교회의 어느 목회자의 경험입니다.

 

   교회에 21세 된 한 남자청년은, 그가 다니던 대학교에서도 전교우수생일 정도로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았다. 한여름 어느 날, 그렇게 낯가림하던 형수에게 칼국수를 해달라고 보채어 먹고선, 그날 밤 휴가 나온 친구 집에서 화재를 만나 그 친구를 구하러 들어갔다가 그만 질식사로 죽고 말았다. 그의 형들과 누나들은 동생을 잘 돌보지 못한 죄책감으로 돌아가신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어, 선산에 동생의 묘지를 쓰지 못하고 화장한 유해를 강물에 떠나보냈다. 장례 후 그의 형수가 유품을 정리하던 중, 그가 죽던 날 칼국수 끓이고 있을 때, 그가 볼펜으로 써놓은 노트를 발견했다. 그 노트에는 “산 아래 외딴 집 / 외로운 새 한 마리 / 강물 따라 저 넓은 세상으로 나아간다 / 오 자유여, 영원이여, 내게로 오라 / 나를 데려 가다오.”라고 적혀 있었다. 죽음이 그의 꽃다운 청춘을 앗아간 그 집은 산 아래 외딴 집이었고, 그의 유해는 강물을 따라 드넓은 저세상으로 흘러갔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죽음의 예고를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목회자로서 그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며, 그의 영혼을 어떻게 위로해야 하며, 유가족들에게 이 일을 어떻게 정리하고 위로해야 할까?

 

   이런 의인사(義人死) 외에도, 이 세상은 매 시대마다 역사적 현장에서 즉 일제의 강탈에서 해방과 독립을 위해,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를 위해, 군부독재시절 민주화를 위해, 산업경제현장에서 노동자들의 삶을 위해, 배척받고 소외받는 민중을 위해 등등, 사회 곳곳에서 죽음을 맞이한 다양한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혹시 이들이 죽음의 예고로서 유령이나 환영을 목격하고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 길을 간 것은 아닐까요? 마치 예수님께서 미리 죽음을 알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들은 단순히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맞닥뜨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들은 김기석 목사님의 발제 서두에서 보여준 “죽음의 승리”를 부르는 해골의 두려움을 몸으로 마주하면서 살아간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교회는 죽음의 예고를 만나고 있는 두 가지 종류의 죽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특별히 이 관심은 목회•사목적 차원에서 신자만을 대상하는 다루는 일을 넘어 선교적 차원에서 비신자에게까지로 즉 전체 사회로 뻗어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첫째는 숱한 의인(義人)들의 죽음을 발견하고 돌봐야 한다고 봅니다. 이들은 의를 위해 각종 죽음의 유령과 환영의 두려움과 맞닥뜨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죽음의 길을 갔습니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 자기 몸을 죽음에 내어준 사람들, 도시개발에 밀려 공권력과 맞서다가 죽어간 사람들 등입니다. 둘째는 각종 산업현장의 피해자로서 죽어간 무명의 사람들들입니다. 이들은 집단따돌림으로 죽어간 사람들, 연예계 등 전문 직종에서 죽어간 사람들, 한국으로 결혼이나 산업연수생 등으로 이주해 와서 온갖 구타와 박해로 죽어간 사람들, 납치와 유괴 등으로 생매장되어 죽어간 사람들, 전쟁터와 산업현장 등에서 시신이 사라진 사람들, 오늘날 더욱 더 심해지고 있는 고독사 현장에서 발견되는 사람들 등입니다. 이들은 현재 죽음의 예고자인 유령과 환영의 두려움과 싸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죽어간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일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사회 한 구석에서 유령과 환영과 싸우고 있는 이런 사람들을 발견해내고, 그들이 그것들을 물리치고 희망찬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구체적인 리스트를 만들고 돕는 실제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것이 종교다원화와 사회다원화에서 화합하면서 생명을 창조하는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의 유형들 중 하나로서, 신부님은 발제에서 특별히 자살에 대해 큰 관심을 나타내 “생명의 소중함과 죽음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확대와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 대해 상담을 강화할 필요가 대두되고 있다. 예식적 차원에서 자살자에 대한 본당 사목구 주임의 사목적 배려가 요구된다”(32쪽)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현대 사회에서 죽음의 유령과 환영에서 망인이 된 고인들과 현재 만나고 있는 사람들을 벗어나도록 도와야 한다고 봅니다. 혹시 이 일을 위해 교회가 전통 상장문화나 토착화 부분에서 갖고 올 수 있는 것들이 있다면 예를 들어 설명해주실 수 있는지요? 아니면 평소 생각하시는 점을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논평3)

 

 

 

 

죽음 -목회적, 사목적 접근 을 읽고

                             

 

 

                                   박태식(성공회 장애인센타 ‘함께사는 세상’ 원장신부)

 

 

 

 

   두 분 목사님과 신부님의 발표를 잘 들었습니다. 깊이있는 숙고를 거쳐 상당한 필력으로 죽음 문제를 풀어나가셨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넘겨받았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상장예식이 있습니다. 고인과 고별을 어떤 방법으로 행하여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고인을 예를 갖춰 보내드리고, 어떻게 해야 고인을 기억하는 이들과 아름다운 작별을 나눌 수 있을까? 이 문제는 비단 그리스도교가 아니더라도 모든 종교에서 핵심으로 다루는 주제일 겁니다. 두 분의 글을 통해 개신교와 가톨릭에서 상장예식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온 흔적을 발견했고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1. 우선 김기석 목사님께 드립니다.

   목사님이 쓰신 글 중에 요한복음을 인용하면서 “결국 부활은 죽음 이후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삶이 문제인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에 어떻게 살 것인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물론 삶은 누구에게나 미완성이다. 완성이란 그분의 품 안에 안길 때 이루어진다.” 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부활은 죽음 이후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삶의 문제라는 데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미완성의 불안한 삶이 그분의 품 안에 안길 때 완성이 이루어진다면 과연 그 삶들, 죽 목숨이 붙어있을 때의 삶과 숨이 끊어진 이후의 삶을 과연 같은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죽음 후에도 여전히 지속되는 ‘나’란 누구입니까?

 

2. 윤종식 신부님께 여쭈어 봅니다.

   신부님은 “그리스도교는 삶, 죽음과 부활이라는 직선적 역사관을 지니고 있는데, 윤회설에 기반을 둔 49재를 지키는 것은 신앙의 근본이 흔들리는 일이다. 죽은 이를 주님께 보내드리고 유가족들이 일상으로 돌아가게 하는 탈상의 의미를 49재에서 그동안 찾았다면, 그리스도교의 전통 안에 있는 성령강림의 50일을 활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는 주장을 하십니다. 잘 알다시피 1939년에 교황청은 가톨릭에서도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 말은 비단 제사형식만 허용한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동양 전통에서 조상에 대해 오랫동안 내려온 공경의 예를 존중한다는 뜻일 겁니다. 49제를 50일로 바꾼다면 결국 그리스도교 신학을 잣대로 동양전통의 표준인 제사를 가톨릭에 맞게 재단하겠다는 말로 들립니다. 이리 되면 교황청의 의도와 어긋나는 것 아닙니까?  

 

   두 분 글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