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당/살림문화 도담방

죽음, 그 목회적 접근

▪살림문화재단▪ 2013. 9. 30. 17:54

 

일치포럼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일치운동을 전개하면서 서로 다른 전통을 이해하기 위하여 2000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일치운동의 역사와 중요한 교의적 이해, 그리고 삶의 영역에 이르는 다양한 대화들이 오갔습니다. 우리의 포럼은 다른 것을 찾기 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같은 모습을 찾기 위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일치를 위한 기도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아버지께 기도하신 대로

주님과 아버지께서 하나이시듯

주님을 믿는 모든 이가 하나 되기를 바라셨나이다.

저희는 같은 믿음으로 세례를 받고

같은 주님을 모시면서도

서로 갈라져

주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나이다.

이제 저희는

한마음으로 기도하며

하나가 되고자 하오니

저희를 도와주시어

미움과 불신을 버리고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하소서.

아멘.

(발표1)

 

 

 

 

죽음, 그 목회적 접근

 

 

 

김기석(목사, 청파감리교회)

 

 

 

 

1.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는 사람들

 

   16세기의 플랑드르의 화가 피터 브뤼겔의 <죽음의 승리>는 캔버스 가득 죽음의 다양한 풍경을 담고 있다. 충격적이고 무서운 장면이다. 하늘과 땅과 강조차 검붉은 색으로 변했고, 화폭 가득 긴 창과 낫을 든 해골들이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다. 해골을 가득 싣고 가는 마차, 교수대에 매달린 사람들, 처형 당하기 전에 두 손을 모은 채 기도하는 사람, 거대한 관 속으로 내몰리는 사람들. 죽음은 왕과 추기경, 귀부인, 귀족을 가리지 않는다. 해골은 왕이 모아두었던 금화를 약탈하고 있고, 또 다른 해골은 추기경의 모자를 쓴 채 추기경을 옮기고 있다. 세속의 권력이든 종교적 권력이든 죽음 앞에서는 조롱거리일 뿐이다. 죽음의 마차가 지나가는 길에 한 여인이 엎드러져 있다. 여인의 왼손에는 인간의 취약함을 상징하는 물레와 실패가 들려 있다. 여인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가위로 실을 막 자르려 한다. 삶과 죽음은 이처럼 그 경계가 모호하다. 화가는 화면의 오른쪽 구석에 삶의 흔적들을 배치했다. 흰색 테이블보 위에는 음식이 어지러이 널려 있고, 바닥에는 카드가 흝어져 있다. 죽음이 그렇게 가까이 다가왔는데도 사랑의 단꿈에 취한 연인들은 만돌린을 뜯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브뤼겔은 왜 이런 끔찍한 그림을 그렸을까? 흑사병이 휩쓸고 지나갔던 지난 세기의 참상을 기억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신구교 간의 갈등이 노골화되고 있던 그 시대의 파멸적 미래를 경고하기 위해서인가?

 

죽음은 모든 생명이 회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인간처럼 그 죽음을 깊이 의식하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죽음의 확실성을 인정하지만, 죽음을 친밀하게 경험하는 사람은 드물다. 모두가 죽음을 꺼리거나 죽음과의 대면을 연기하려 한다. "나는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그것이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두려운 까닭은 자기 삶의 연속성이 단절된다는 사실에 대한 공포도 한 몫을 할 것이다. 자기 시신을 무방비상태로 남겨놓고 간다는 사실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포도 있다.

 

물론 세상에는 삶이 너무 힘겨워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스러지고 싶은 이들도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러한 열망조차 아름다운 삶에 대한 희원이 아니겠는가? 1988년에 작고한 시인 박정만은 두 줄짜리 <終詩>를 썼다. "나는 사라진다/저 광활한 우주속으로." 처연하다. 그는 <저 無花의 꽃상여>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내 가는 길섶에는/한 송이 복사꽃도 피지 말아라./눈물겨운 새소리 하나라도/靑松 높은 가지 위에 앉지 말아라.//바람도 불지 말고/그저 앉은 채로 살아 있는 돌멩이같이/그렇게 내 생의 그림자만 보아라./산도 그냥 울지 말아라." 덧정조차 남기지 않은 채 스러지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서럽게 되짚어지는 것은, 그 또한 행복을 추구하던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은 등을 맞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기휘忌諱의 대상이다. 죽음은 물론이고 죽음의 담론조차 꺼린다. 노인 교인 한 분이 천상병 시인의 <歸天>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쥘 부채에 그 시를 정성껏 옮겨 적은 후 여러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시를 좋아하지 않더라며 참 이상하다고 말했다. 그것이 설사 시라 해도 죽음을 상기시키는 것은 애써 숨겨왔던 잠재적 공포를 끄집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말하는 기독교인들조차 죽음은 꺼림칙한 현실인 것이다. 그래서인가? 사람들은 죽음을 의례화함으로써 적나라한 죽음과의 불편한 대면을 회피한다. 자본주의 세상은 친절하게도 주검/죽음의 처리를 대행해주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죽음을 잊고 살 수는 없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수없이 많은 죽음을 경험한다.

 

 

2. 죽음의 다양한 풍경

 

   노인들에게 소망이 뭐냐고 물으면 이구동성으로 잘 죽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잘 죽는 것이 어떤 것이냐고 물으면 대개는 앓지 않고 살다가 잠자듯 세상을 떠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누구도 고종명考終命의 꿈을 나무랄 수는 없다. 자기의 죽음을 내다보며 잘 준비한 후 맞는 죽음은 아름답다. 그러나 고종명의 꿈은 가로막히곤 한다. 느닷없이 닥쳐오는 질병, 사고, 재난, 전쟁 등은 우리 삶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어놓는다. 특히 인과관계를 무너뜨리는 것 같은 현실에 직면할 때에 그러하다. 선한 사람은 편안하고 안락한 죽음을, 악인은 그에 합당한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아야 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런 기대를 배신하기 일쑤이다. 히브리의 한 시인도 악인이 누리는 평안을 보며 하마터면 믿음의 길에서 미끄러질 뻔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으며, 몸은 멀쩡하고 윤기까지 흐른다. 사람들이 흔히들 당하는 그런 고통이 그들에게는 없으며, 사람들이 으레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아예 가까이 가지 않는다."(시73:4-5) 이래저래 죽음은 낯설다.

 

기독교인들은 죽음의 독침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제거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오연한 목소리로 외친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고전15:55) 하지만 죽음의 가능성이 현실이 되어 다가올 때 사람들은 주춤거린다. 죽음을 예기케 하는 질병이 찾아올 때 사람들은 대개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이라는 다섯 단계의 반응을 보인다 한다. 물론 그 다섯 단계를 다 거치는 이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

 

누구보다도 명랑하고 천진하게 살던 이가 중병에 걸렸다. 가족들은 그의 병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숨겼다. 날이 갈수록 병은 위중해졌지만, 그는 자기가 회복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찾아갈 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자기는 병을 떨치고 일어설 것이라고 말했다. 가족들에게 그가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알리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지만 누구도 그 말을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 삶에 대한 애착이 컸던 만큼, 그는 자기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회복될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살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죽음의 공포가 한 순간에 그를 사로잡아 버렸던 것이다. 그는 가족들에게조차 한 마디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죽음의 세계로 옮겨 갔다.

 

남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고 늘 마음 쓰며 사는 이가 있었다. 오랜 세월을 교회에 몸담고 있었지만 그는 마치 그림자처럼 처신했다. 그렇다고 하여 일부러 과묵한 체 하는 것도 아니었다. 병원에서 그에게 암 진단을 내린 순간, 가족들은 그 사실을 환자 본인에게 알렸다. 환자도 그 사실을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그 때부터 가족들은 몇 달 후면 찾아올 어머니의 죽음을 내다보며 깊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기억을 치유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창조적 시간이었다. 마침내 죽음이 찾아왔을 때 가족들은 평화롭게 어머니를 보내드릴 수 있었다.

 

명문대학을 졸업한 똑똑한 아들을 둔 어머니가 있었다. 티 나게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아들의 존재는 어머니에게 무한한 자부심의 근거였다. 그러나 그는 사회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에게 쏟아지는 과도한 기대가 커질수록 그의 부적응은 심화되었다. 어느 날부터 그는 위악적으로 처신하기 시작했고, 그런 행동은 그 자신과 가족들을 더욱 큰 열패감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어떤 이는 그것을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의 탈주라고 평가했다. 자식을 앞세운 어머니의 가슴에 드리운 트라우마는 여전히 치유되지 않고 있다.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노동자들의 벗이 되어 살던 이가 있었다. 그는 자기 집을 개방하여 누구라도 와서 머물다 갈 수 있게 했다. 농촌과 도시가 연대하여 살아가는 길을 모색하던 그가 어느 날 평온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이었다. 병원으로 달려가자 그는 선선한 웃음만으로 반겨줬다. 악수조차 청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골수암 말기로 목 아래 부분이 다 마비되었던 것이다. 자각 증상이 있었지만 길벗들에게 삶의 희망을 만들어주려는 열망에 쫓겨 미처 자기를 돌볼 여유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지만 그는 늘 껄껄 웃으며 사람들을 맞이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몸을 돌이킬 수도 없는 자기 처지를 비관하기는커녕 찾아오는 이들에게 자신의 존재가 선물이 되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도 회복되기를 소망했지만 결국 '이웃을 극진히 사랑하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아름다운 마무리였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어린이나 태아의 죽음이다. 어떤 말로도 그 가족들의 고통을 위로할 수 없다. 그들의 신앙은 크게 흔들린다. 이런 일을 겪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들도 있고, 자신의 삶을 톺아보며 자책하는 이들도 있다. 박완서 선생은 장성한 자식의 때이른 죽음 앞에서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절규했다. 친밀하다고 느꼈던 하나님의 완고한 침묵 앞에서 사람은 좌절감과 아울러 무력감을 느낀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랑하는 이들과 작별해야 했던 이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죽음 앞에서 인간은 속수무책이다.

 

일본 동북부 지역을 강타한 대지진과 쓰나미,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죽어간 이들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입을 다물어야 할 때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몇 해 전 남아시아를 휩쓸었던 쓰나미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이 죽었을 때, 어느 잘 알려진 목사는 그 사태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믿음을 빙자하여 괴물로 변해버린 사람의 말은 그처럼 폭력적이다.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때 사람들은 흔히 '신의 뜻'이나 '업'이라는 말로 그 상황을 설명하려 한다.

 

죽음도 문제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죽임이다. 신자본주의 질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가장자리로 내몬다. 경쟁과 효율을 신봉하는 사회는 일부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낙오자로 만든다. 낙오자들이 느끼는 좌절감은 파괴적 충동의 못자리가 되곤 한다. 그 충동이 자신을 향할 때도 있고, 남을 향할 때도 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 왕자는 자기 별에 머무는 동안 날마다 두 개의 분화구를 청소하고, 바오밥 나무의 싹을 뽑아주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별이 결국 파괴될 수밖에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폭력적인 게임이나 영화가 그렇게 많이 소비되는 것은 그만큼 우리 속에 쌓인 무거움이 많다는 뜻이리라.

 

3. 죽음 직면하기

 

   죽음의 음침한 그늘이 우리 사회 도처에 뒤덮여 있는데도 사람들은 한사코 죽음과 정직하게  대면하려 하지 않는다. 노인들이 죽음과 친해지도록 하자는 의도로 모임을 만든 적이 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에 대해 묵상하고, 늙음을 상실이 아니라 성숙의 계기로 삼을 수 있도록 돕고 싶었던 것이다. 많은 이들이 늙음을 공포스럽게 받아들인다. 물론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치매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공포심을 유발했다. 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람들은 늙음을 잊혀짐 혹은 버림받음과 동의어로 여긴다. 생산 능력, 업적, 소유로 한 존재를 평가하는 세상이니 그럴만도 하다.

 

모임을 진행하면서 노인들 각자가 자기의 현재를 한껏 누릴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전3:11)지 않던가. 노년은 하나님과의 더 깊은 일치를 맛볼 수 있는 때이다. 젊은 날 그들을 온통 사로잡았던 욕망의 인력이 줄어든 만큼 타자를 관용으로 대하면서 더 나은 존재로 성장해 갈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삶을 감사함으로 돌아보는 동시에 부끄러운 기억 혹은 아픈 기억과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노인들은 그 모임이 단순한 친교를 위한 모임일 때는 좋아했지만, 진지하게 죽음을 대면하도록 유도했을 때는 불편해했다.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사실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죽음이 있기에 유한한 생은 권태 속에 가라앉지 않는다. 집회서 기자의 말은 참 적실하다.

 

"아, 죽음아, 자기 재산으로 편히 사는 인간에게, 아무 걱정도 없고 만사가 잘 풀리며 아직 음식을 즐길 기력이 남아 있는 사람에게 너를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아 죽음아, 너의 판결이 궁핍하고 기력이 쇠잔하며 나이를 많이 먹고 만사에 걱정 많은 인간에게, 반항적이고 참을성을 잃은 자에게 얼마나 좋은가! 죽음의 판결을 두려워하지 마라. 너보다 앞서간 자들과 뒤에 올 자들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모든 생명체에게 주어진 주님의 판결이다. 그런데 어쩌자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뜻을 거역하려 드는가? 십 년을 살든 백 년을 살든 천 년을 살든 저승에서는 수명을  따질 필요가 없다."(집회41:1-4)

 

모임에 참여하는 이들은 영화를 보거나, 노래를 함께 부르거나, 바깥 나들이를 하고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은 좋아했지만, 자기를 성찰해야 하는 시간은 꺼렸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대해 묵상을 한다거나, '자기 무덤 바라보기' 등을 통해 죽음과 익숙해지도록 하려 했지만, 대개는 마음이 무거워진다는 반응을 보였다. 자기의 삶에 대해 음미하거나 생각해 볼 여유조차 없이 살아 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들에게 제시된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젊은 날 나의 꿈은?"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시절은?"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시절은?"

  "내 인생의 노트에서 지우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던 기억은?"

  "앞으로 일주일 밖에 살 수 없다면 누구와 그 시간을 보내고 싶은가?"

  "그리고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나의 떠남을 가장 슬퍼할 사람은?"

  "남기고 싶은 말은?"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듣고 싶은 말은?"

  "생의 남은 시간 동안 이루고 싶은 일은?"

 

노자는 '삶이 스스로 잘 익어 떨어지도록 하라'고 말했다. 아름다운 교훈이다. 모두가 인생의 덧없음을 말하지만, 열매가 땅에 떨어지듯 자연스럽게 자신의 늙음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러니 몸은 쇠약해져도 내적으로는 더욱 맑아지고 깊어지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사람들에게 자기의 유언장을 작성해 보게 하는 일도 의미있는 일이다. 자기 삶의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더 소중한 가치를 꼭 붙들 수 있도록 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유언장을 쓰는 동안 자기가 맺고 있는 다양한 관계의 양상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가족들에 대한 당부, 유산의 분배,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연명 치료를 하지 말도록 할 것인지 여부, 장례식에 대한 이야기 등이 담겨야 한다.

 

 

4. 죽음은 삶의 완성

 

   노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세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첫째는 죽음을 준비하는 교육은 노년에 이르렀을 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죽음이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하여 별 거부감이나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시기에 죽음 교육을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4-50대부터 죽음이라는 현실과 대면하게 하고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도록 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죽음을 대비 혹은 의식한다는 것은 오늘의 삶을 가장 충만하게 살아간다는 말과 통할 수 있다. 죽음이라는 개인적 종말의 빛 가운데서 바라볼 때 오늘의 의미가 뚜렷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로마 북부에 있는 수비아코에는 베네딕도 성인을 기리는 수도원(Sacro Speco)이 서 있다. 그곳에서 본 프레스코화 한 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다. 멋진 옷을 차려 입은 젊은이의 손에는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물론 그 새는 '허영심'을 나타내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그런데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해골이 말을 타고 그에게 다가선다. 해골은 젊은이를 칼로 막 찌르려 한다. 해골이 탄 말 발굽 아래에는 이미 죽임을 당한 이들의 시신이 누워 있다. 그런데 말 뒤편에는 죽음을 구하는 듯한 동작의 노인들이 서 있다. 그들은 죽지 못해 살고 있었던 것이다.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 그림 속에 담긴 서사의 의미는 분명했다.

 

둘째는 노인들을 위로와 돌봄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노인을 노인으로 만드는 것은 기력의 쇠진만이 아니다. 삶의 의미 상실과 무력감이 더 큰 문제이다.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피에르 신부는 엠마우스 운동을 시작하면서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제공해주는 일에만 집중하지 않았다 한다. 그는 낙심한 사람들에게 삶의 방편만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노인들도 교회 공동체 내에서 적절한 기여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꾸만 관심의 지평을 넓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세상에 편재한 고통의 현실을 일깨워주고, 그런 세계의 치유를 위해 기도할 때 오히려 기도자들의 삶도 든든해진다. 병약한 이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위해 편지를 쓰는 일도 의미있는 실천이 된다.

 

셋째는 삶과 죽음의 신비에 대해 깊이 바라보도록 도와야 한다. 몸이 쇠약해진다 하여 삶에 대한 애착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죽음에 대한 공포가 깊어지고, 잊혀진다는 사실에 대해 노여워하는 경우가 많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던 이들도 삶과 죽음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하여 생각한다. 어쩌면 죽음을 죄의 결과라고 오랫동안 배워온 탓인지도 모르겠다. 서양미술사에서 성서번역자였던 성 제롬과 성 프란체스코는 해골과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해골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즉 죽음의 확실성을 기억함으로 속세의 재물과 명예와 권세의 덧없음을 알고 집착하지 말라는 것과, '디에스 나탈리스 Dies Natalis', 즉 새로운 차원으로 태어난 날이라는 뜻이다. 해골은 죽음과 아울러 새로운 탄생을 가리키는 오브제인 셈이다.

 

기독교인에게 있어 죽음은 영원한 결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이고 더 깊은 우주와의 접속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진 이들이 죽음과의 대면을 꺼리거나 연기하려는 것은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확신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자신을 '보내심을 받은 자'로 고백했다. 그의 말도, 그의 실천도 모두 보내신 분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그가 추구하는 영광은 보내신 분의 뜻을 온전히 행하고 보내신 분에게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에게 죽음과 영광은 틈없이 일치되었던 것이다. 삶이 충실하지 못하면 죽음도 아름다울 수 없다. 앞서 언급했던 피에르 신부는 배가 난파되어 물에 빠졌던 순간의 경험을 이렇게 들려준다.

 

"배가 리우데라플라타에서 난파되었을 때, 나는 물에 빠지는 그 순간부터 어린아이처럼 나 자신을 내맡겨버렸다. 아주 평온하게. 오직 한 가지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의 한 손이 가난한 사람들의 손을 잡을 때 다른 한 손은 하느님이 잡아주신다는 생각 말이다. 그날 이후 나는 죽음이 한 친구와의 오래 지체된 만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죽음이란 충족된 기다림이라는 것을."(아베 피에르, <피에르 신부의 유언>, 웅진 지식하우스, p.112-113)

 

기독교인에게 있어 죽음이란 하나님과의 만남이요 더 큰 생명 속으로의 진입이다. '나'라고 하는 자기 중심성이 해체되는 순간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한 확신이 있었기에 바울은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빌1:21, 23-24)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세상의 모든 부정성이 초극된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할 열망을 갖고 있지만, 아직 삶의 더 깊은 차원에 눈 뜨지 못한 이들을 위해 이 땅에 남아 있다고 말한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연상시키는 이 말을 통해 바울은 영생이란 미래에 속한 것이 아니라 현재적 사건임을 일깨우고 있다.

 

요한복음은 부활 사건의 의미를 땅에 묻히는 밀알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들려주고 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한 후 내처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요12:25)이라고 말한다. 결국 부활은 죽음 이후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삶이 문제인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 어떻게 살 것인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물론 삶은 누구에게나 미완성이다. 완성이란 그분의 품 안에 안길 때 이루어진다.

 

장례를 집전할 때마다 남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 육체에다 심는 사람은 육체에서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에다 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갈6:8) 죽음은-그것이 비록 나의 죽음은 아닐지라도-거울이 되어 우리 삶을 비춰준다. 죽음이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현실임을 자각할 때 집착하고 있던 것들의 인력이 느슨해진다. 생명을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확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웃들을 향해 손을 내뻗음을 통해 우리 삶은 확장된다.

 

 

5. 죽음의 자리에서

 

   티벳 불교는 죽음의 순간이야말로 가장 깊은 영적 발전의 기회라고 가르친다. 그 깊은 뜻은 알 길이 없지만 공감되는 바가 없지는 않다.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도록 돕는 것도 중요한 목회자의 직무이다. 임종의 자리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평안한 분위기 가운데서 생을 마치도록 해주는 일이다. 의식이 있든 의식이 없든 이제는 떠나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린다. 기독교인에게 있어 죽음이란 하나님이라는 더 큰 생명과의 합일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평소에 그가 좋아하던 찬송가를 아주 조용하게 불러주고, 그가 늘 암송하던 성경 구절을 읽어준다.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말하며 이생에서 있는 동안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으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가족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게 한다. 가족들은 한 사람씩 돌아가며 함께 지냈던 시간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 모든 일들을 얼마나 고마워 하는지 고백한다. 그 시간은 임종을 맞이하는 이에게도 소중한 시간이지만, 남은 가족들에게도 치유와 성찰의 시간이 되기에 소중하다. 경우에 따라 아름다운 시를 임종 기도문을 대신하여 읽어주기도 한다.

 

평화로운 내 마음이여, 이별의 시간을 달콤하게 해주소서.

그 시간을 죽음이 아닌 완성이 되게 해주소서.

사랑이 기억으로, 고통이 노래로 녹아내리게 해주소서.

하늘로 날아올랐다가 둥지에서 날개를 접게 해주소서.

당신의 마지막 손길을 밤의 꽃처럼 부드럽게 해주소서.

오, 아름다운 끝이여,

잠시 조용히 서서 당신의 유언을 침묵 속에서 남겨주소서.

나는 당신께 고개를 숙이며,

등불을 들어 당신 가시는 길을 환하게 비춥니다.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숨이 멎은 후에도 고요한 분위기를 해치지 않도록 찬송과 기도를 계속한다. 성급하게 장례 절차를 의논하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다. 그때는 임종의 침상 바깥으로 나가서 한다. 가족들이 준비해야 할 것들을 알려주고, 행정 절차를 어떻게 밟아가야 할지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빈소가 차려진 후 예배를 드린다.

 

 

6. 장례식 절차(<기독교 대한 감리회 새 예배서> 요약)

 

1) 임종

   갑작스런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가족이 모인 가운데 임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급적이면 의식이 분명할 때 행하도록 한다. 혹 기력이 없어서 말을 할 수 없을 때도 부르는 찬송이나 기도는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때는 본인이 원하는 성구를 낭독하거나 찬송하는 것이 좋다. 임종의 순간, 가족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과 부활의 소망으로 슬픔을 극복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2) 입관

   입관入棺은 가족들의 입회 하에 염습한 시신을 관속에 넣고 뚜껑을 덮는 것을 말한다. 염습殮襲이란 시신을 씻고 수의를 입힌 뒤 염금殮衾(시신을 싸는 홑이불)으로 싸서 염포殮布(시신을 묶는 끈)로 묶는 일을 말한다. 특별한 상황이 아닌 경우, 임종으로부터 24시간이 경과한 후에 시신을 입관하는 것이 상례다.

관을 봉한 후, 운구運柩가 편리하도록 봉띠를 묶는데, 이를 결관結棺이라 한다. 입관이 끝나면 '관棺'이라 하지 않고 '구柩'라 칭하며, 십자가 표시가 새겨진 보를 씌워 발인 때까지 안치한다. 입관예식은 빈소나 장례식장에서 가족과 친지, 그리고 교인들이 함께 모여 진행한다.

 

3) 장례

   "장례는 시신을 장지에 옮기기 전에, 고인에 대하여 추모하며 하나님께 고인을 위탁(commitment)하는 의미로 드리는 예식이다. 이는 가족, 친지, 조객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인정케 하고, 인간의 무능함과 유한성을 깨닫게 하는 좋은 기회가 된다. 따라서 장례는 유족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을 전하며, 그 자리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전도와 신앙을 결단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예식을 진행해 나아가야 한다."

 

4) 하관

   구를 내려 광중壙中(구를 묻기 위하여 파 놓은 구덩이)에 넣는 것을 말한다. "하관식은 장지에 구를 묻기 전에 행하는 순서다. 여기서 집례자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의 심판과 종말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무덤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 주의 재림 때에 모든 성도가 부활한다는 사실과, 고인은 영광과 평안의 세계로 옮겨졌다는 것을 예식을 통하여 확신케 한다."

 

나의 경우 별도의 하관식 설교 대신 다음과 같은 시를 읽어준다.

 

"땅의 길은 땅 위에서 끝나지 않는다.

땅의 길은 땅 끝에서

하늘이 시작되는 땅 끝에서

안개처럼 흩어진다.

사람은 죽으면 누구나 깃털처럼 가볍다.

인생길 그 누구라 피곤치 않았으랴.

사람은 죽어 옷을 벗고

푸른 깃털처럼 가볍게

먼지 털고 욕심 털고

모든 피곤 털어버리고

하늘에 오른다. 가볍게

하늘에 올라 악수를 한다."(작가 미상)

 

 

7. 남은 자들

 

   죽음은 당사자에게도 미지의 현실이지만, 남은 이들의 삶도 뒤흔들어놓는 경우가 많다. 프로이트는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에서 비롯되는 두 가지 감정을 '애도'와 '우울'로 요약했다. 물론 이 상실에는 죽음만이 아니라 이별 그리고 이상을 잃는 것도 포함된다. 어느 경우가 되었거나 '상실'은 근원적 체험이기에 좌절과 절망 혹은 깊은 원망의 감정에 사로잡힐 수 있다. 여기서는 가족의 죽음을 경험한 이들의 애도와 우울증에 대해서만 말하기로 한다.

 

신앙을 빙자해서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울지 말라고 권고하는 이들이 있다. '좋은 데 가셨는데 왜 슬퍼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이 폭력이 될 때도 있다. 차라리 자기의 슬픔과 정직하게 대면하도록 해주는 게 낫다. 가까운 이들의 죽음은 남은 자들의 가슴에 회한을 남기게 마련이다.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다. 침상에서 오래 누워있던 환자의 가족들은 이미 죽음을 예감했기에 비교적 평안하게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만, 유난히 슬퍼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긴 간병에 지친 나머지 속으로 '차라리 이제 그만 떠나시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고 고백하는 경우가 많다. 그 기억이 죄책감이 되어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적으로 주목받은 죽음을 맞이한 가족들이 있었다. 그들은 대중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슬픔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애도조차 의례화하는 자리에서는 진정한 애도가 불가능하다. 누구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마주 앉았을 때 그들은 마음껏 눈물을 흘렸다. 애도의 시간이야말로 정화의 시간이고,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다. 애도의 시간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그 부재의 충격에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한다.

 

상실에 대한 두 번째 반응은 우울증이다. 우울증은 상실한 대상과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여 대상의 상실을 자아의 상실로 전환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난다. 그들은 '모든 게 내 탓'이라고 자책한다. 그리고 자책의 늪 속에 잠겨든 채 타자들과 소통하기를 거부한다. 믿음조차도 그들을 우울의 늪에서 끌어올리지 못한다. 신앙공동체가 필요한 것은 이 때이다. 그들 곁에 함께 있어 주고, 그들을 격려하는 편지를 쓰기도 하고, 음식을 함께 나누기도 하면서 그의 회복을 기다려주어야 한다. 누군가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삶의 세계로의 초대가 된다. 유대교의 아름다운 전통 가운데 '북돋는 식사'(meal of replenishment)라는 것이 있다.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유족들을 위해 친구들이 식탁을 차리는 것이다. 그들이 대접하는 것은 커피와 베이글만이 아니다. 누군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움으로서 다시 살아갈 용기를 주는 것이다.

 

남은 가족들에게 권고하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라는 것이다. 고인이 떠나간 빈 자리를 사랑과 우애로 채우는 것이야말로 고인에게 바치는 마지막 정성이다. 그들이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할 때 고인은 '살아있는 사자死者'가 되어 그들 가운데 머물 것이다. 죽음은 상실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상실로만 허비해서는 안 된다. 그의 죽음이 남은 이들을 더 나은 존재로 이끌도록 하는 것은 남은 이들의 몫이다.

 

죽음은 또 다른 세계로의 진입이다. 죽음을 통해 우리는 더 큰 생명과 궁극적 합일을 이룰 수 있다. 기독교인은 그런 죽음을 내다보며 살기에 오늘을 충만하게 할 수 있다. 영생은 지금 여기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