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당/죽임의 문화를 부추기는 사람들

인도네시아 지하벙커에 잠자고 있는 인류의 유산입니다

▪살림문화재단▪ 2014. 9. 8. 23:44

 

 

 

 

반세계화님이 새로운 사진 8장을 추가했습니다.(페이스북)

 

추석선물입니다.

인도네시아 지하벙커에 잠자고 있는 인류의 유산입니다.

이차대전 후에 세계평화와 인류복지를 위하여 전세계 로열패밀리들의 자산을 모아 Global Collateral Accounts라는 담보용 기금을 만들어 이의 관리인으로 로얄패밀리와 혈연관계가 있는 인도네시아의 초대대통령 스카르노를 임명합니다. 그러나 한국전이 발발하고 미소 간의 냉전이 지속되어 이를 이용하지 못하다가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비동맹회의에서 이의 이용을 처음으로 논의하였다.

 

1963년 케네디대통령은 미국연방준비은행을 소유한 유태인그룹(카발이라고 함)의 세계정복음모(신세계질서 또는 세계화)를 막기 위하여 미국연방준비은행을 페쇄하고 미국정부 주도의 달러를 찍기 위하여 스위스 제네바의 Green Hilton Hotel 에서 스카르노를 만나 Global Collateral Accounts에 있는 금 14만톤을 담보로 새로운 달러를 찌기로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Green Hilton Memorial Agreement 라고 부르는 합의문이다.

그러나 이 합의문에 서명한 후 10일만에 케네디는 미국연방준비은행을 소유한 유태인그룹의 하수인인 CIA에 의해서 암살을 당하고 수카르노는 홀로 유태인에 대항하여 싸우다 CIA의 조종을 받은 수하르토에게 쿠데타를 당하여 실각을 당한다.

 

그 이후 이 자산은 Elders라 불리우는 인도네시아 각 부족의 원로들에 의해서 지켜져 왔는데 유태인들은 이 자산을 자기 것인 마냥 이를 담보로 화폐를 무진장 찍어 세계의 금융 에너지 식량 군수 제약 의료 교육 언론을 독점하여 인류를 세계화란 미명 아래 노예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런 사실은 전세계 역사책에도 빠져있는데 그것이 바로 유태인들이 저지르는 역사 왜곡이다.

즉 실물 자산은 인도네시아 지하벙커에 있는데 유태인들이 이것을 네다바이하여 돈을 마음대로 찍었던 것이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게시하면 머리가 아프니 이쯤에서 그만합니다. 즐거운 한가위를 보내시고 세월호 유가족분들도 힘을 내셔서 같이 진상규명을 합시다.

 

첨부

반둥비동맹회의에 대한 자료입니다
미·소가 주축이 된 냉전 블록에 가담하기를 거부하고 대신에 자신들의 국가이익 또는 집단이익에 입각하여 상호간의 일체성을 모색하는 외교. 신생국 정치지도자들이 국가형성과정에서 비동맹외교정책을 채택한 이론적 근거는 비동맹외교정책이 권력의 집중화 현상인 동맹정책보다 자국의 안전을 보장하고 세계평화를 유지하는 데 더 효과적이라는 신념과 동·서 양진영 간의 분쟁에서 객관적·중재자적인 역할을 하고자 하는 데 있다.

 

비동맹회의는 1961년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최초로 개최되었으나, 비동맹운동의 연원은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개최된 반둥 회의에서 찾아야 한다. 그 이유는 첫째, 처음으로 비동맹정책이 논의되고, 둘째, 의제와 결의 내용이 비동맹운동의 기본정신이 되었으며, 셋째, 반둥회의 참가국의 대부분이 베오그라드회의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반둥회의에서 채택된 단독 또는 집단적 자위권 외에 강대국의 특수이익을 위한 집단 방위협정 배제 등의 원칙은 비동맹주의와 관련되어 있다. 한편 1961년 베오그라드 비동맹정상회의(Conference of Heads of States and Chief ministers of Non-aligned Nations)에서는 비동맹회원국 자격요건을 정식으로 채택했다. 그 내용을 보면 첫째, 공존과 비동맹주의에 기초를 둔 자주적 정책, 또는 그와 같은 정책을 지지하는 경향을 가진 국가, 둘째, 민족독립운동을 지지하는 국가, 셋째, 강대국 분쟁에 관련하여 체결된 다자간(多者間) 군사동맹에 가입하지 않는 국가, 넷째, 강대국 분쟁에 관련하여 체결된 쌍무군사동맹이나 지역적 집단방위조약에 가입하지 않는 국가, 다섯째, 강대국 분쟁에 관련하여 군사기지를 타국에 제공하지 않는 국가 등이다.

 

이들 국가들이 동·서의 어느 블록에도 가담하기를 거부하게 된 실질적인 이유는 첫째, 냉전 블록에 가담하여 강대국과 동맹관계를 형성하게 되면, 자기들의 독립을 확보·과시하는 데 지장이 초래될 수 있다, 둘째, 자기들마저 냉전 블록에 가담하게 되면 국제적 긴장이 더욱 고조되어 인류를 공멸하게 할 핵전쟁이 발발할 위험이 높아진다, 셋째, 냉전 블록에 가담하게 되면 미·소의 세력대결의 무대가 되거나, 종주국 대신에 핵공격을 받을 위험이 있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동서분쟁의 문제는 베오그라드 회의에서 본격적으로 토의되었으나, 사실상은 식민지문제에 더욱 관심을 보였다. 그후의 비동맹회의는 동서분쟁의 문제보다는 남북문제(제3차 비동맹정상회의, 1970, 잠비아 루사카)를 본격적으로 토의하기 시작했으며, 제6차 비동맹정상회의(1979, 쿠바 아바나)에서 극빈국의 문제, 자원보유국과 자원희소국 간의 갈등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비동맹운동은 동서분쟁에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자국의 독립을 유지하고 나아가서는 세계평화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자국의 독립보존과 경제발전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문제, 즉 식민지 해방과 남북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비동맹운동의 관심사가 변함에 따라 비동맹회의 참가국의 성격도 변화를 가져왔는데, 반둥회의에는 친서·친공을 막론하고 모든 아시아·아프리카 독립국이 참가했고, 베오그라드 회의에는 친서·친공 국가는 불참했으며, 카이로회의(제2차 비동맹정상회의)부터는 아프리카 국가가 비동맹회의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루사카 회의부터 정회원으로 참가하기 시작했다.

 

비동맹외교정책은 중립을 표방하지만 전통적인 중립주의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엄격한 의미의 전통적 중립주의라는 것은 국제적 세력균형과는 관계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과정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반면 신생독립국가들이 주장하는 비동맹정책은 힘의 균형과정에서 고립되거나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이고도 유연한 행동을 통해 미·소를 중심으로 한 동·서 양진영의 세력균형을 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동맹외교를 추진하는 국가들은 국제체제에 있어서 독립적이지만, 지역 내에서는 군사적·이념적·경제적으로 동맹관계에 있을 수 있다. 또한 오늘날의 국제적 환경에서는 거의 군사적인 문제에 한정되고 있다.

[페이스북에서 반세계화님의 글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