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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죽이는 두 개의 제도 / 황정산 (시인, 문학평론가)

▪살림문화재단▪ 2014. 9. 29. 13:29

 

 

문학을 죽이는 두 개의 제도

- 신춘문예와 문학상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며

 

문단에서 시인이나 작가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중 한 가지를 해야 한다. 하나는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잡지의 신인상을 받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여의치 않으면 자비로 시집이나 소설집을 출간하면 된다. 그러면 일단 시인이나 작가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 타이틀만 얻는다고 해서 우리 문단에서 이름 있는 시인이나 작가로 대접받기는 힘들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문학상을 한 두 개 받아야 한다. 그래야 조만간 문학상 심사위원이 되어 문학상 시상식이 열리면 앞 자리에 앉을 수 있다.

이렇듯 등단과 문학상 수상은 시인이나 작가 등 문학인으로 출세하기 위한 필수적인 코스가 되었다. 물론 이런 제도가 필요한 것은 이런 제도를 통해 문학이라는 상당한 수련이 필요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검증하고 힘든 노력을 요하는 문학적 업적에 대한 보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의 내용이나 표현 양식과 표현할 매체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지고 손쉬워 진 오늘날 1910년대에 시작했던 등단제도를 고수할 필요가 있을까? 또 과연 문학상이라는 것이 시인이나 작가들의 창작의욕을 북돋아주고 창작 성과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 되고 있을까?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서도 얼마 동안의 문단 생활을 해본 시인이나 작가라면 모두 아니다라는 답을 할 것이다. 왜 그럴까?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깊이 살펴보도록 하자.

 

2. 시를 쓰는 데 자격증이 필요할까?

 

선생이 제자들의 작품을 거의 대필해주는 수준으로 첨삭해주어 등단을 시킨다는 소문이 몇 년 전부터 있어 왔다. 필자도 그 교실에서 수업 받는 사람으로부터 대강의 얘기를 들은 바 있다. 그 문예교실에서의 수업 방식은 대강 이렇다고 한다. 선생이 주제를 하나 주고 학생들로 하여금 작품 구상을 하도록 한 다음 그 구상을 가지고 일차 첨삭을 해주고, 선생이 손봐준 구상에 살을 붙여 학생이 작품을 만들어 오면 다시 선생이 표현이나 형식 등을 고쳐주어 작품을 완성시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작품이 만들어지고 또 신춘문예에 투고되니 거의 비슷한 여러 작품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고 그래서 또한 표절 시비가 일어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의 일차적 책임은 그렇게 해서라도 등단하고 싶어하는 시인 지망생과 그것을 조장해서 금전적 이득을 취하는 시인 선생에게 있다. 그런 방식으로 등단한 시인이 제대로 된 시를 계속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단지 신춘문예 출신 시인이라는 허명만 얻을 뿐이다. 또한 시를 쓰고 또 가르치는 선생이 시인으로서의 자세나 철학을 가르치지 않고 등단하는 기술을 가르치고 그것만으로도 부족해 아예 대필 장사를 하는 셈이니 이 또한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이런 사람들을 시인이라 칭하면서 문단에서 시인으로 인정하고 대접해줘야 하는 것인지 범문단 차원의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문제이다.

 

이 문제에는 지금 우리사회를 통째로 불행으로 몰아넣고 있는 일등주의와 배금주의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시인은 자신의 성찰과 자신의 실현을 위해 시를 쓰면 그만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시인에게까지 성과를 내야한다고 압박한다. 베스트셀러 시인이 되거나 상을 받거나 해야 대단한 시인으로 인정된다. 이러한 성과제일주의가 시인들로 하여금 등단부터 성과를 내야한다는 압박으로 작용하고 그런 훌륭한 시인이 되기 위해 쪽집게 과외를 받아야 한다는 황당한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이다.

물론 훌륭한 성과를 낸 일등은 대접받아야 한다. 일등이 되기 위해 들였을 노력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고 그 일등이 가진 능력이 사회에 많은 유용성을 가져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이런 보답과 보상이 있기에 사람들은 노력을 하고 그에 따라 세상은 발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등만을 위한 세상은 좋은 세상이 아니다. 일등만 사람 대접받고, 일등만 기억되고, 일등만 인정되는 세상은 일등을 뺀 대다수를 불행하게 하는 지옥이고 꼴찌 사회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가 그런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 다른 사람을 짓밟고서라도 일등이 되기 위해 혈안이 되고 있다. 그래야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남보다 먼저 출세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낙오자가 된다는 강박 속에서 이 땅의 젊은이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 있었던 고려대 김예슬양의 자퇴 선언은 이런 현실에 대한 강렬한 문제제기다. 그런데 시인들의 세계에서도 바로 이런 일등주의가 만연해 있고 신춘문예가 바로 그것을 조장하고 있다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

 

그런데 어찌되었건 시인지망생들은 그 일등이 되어 등단하기 위해 쪽집게 과외라도 받으려고 한다. 시인 선생은 바로 이러한 쪽집게 과외를 통해 금전적 이득을 취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시심을 상품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더 나은 상품으로 레테르를 부여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이 팔리는 사회에서 시를 팔고 시심을 팔고 시인으로서의 이름을 파는 것이 뭐가 문제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파는 곳에서도 상도의라는 윤리가 있다. 문학을 팔 때는 그 나름의 윤리에 따라 팔아야 한다. 학생들의 문학적 능력을 키우기보다는 그것을 허위로 위조해서 공모에 응하게 한다는 것은 명백하게 부도덕한 방법이다. 돈이 윤리를 저버리는 세상의 법칙이 문학에서까지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그런데 신춘문예 논란에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먼저 우리의 등단제도의 문제이다. 시인이나 소설가나 평론가가 되려면 고시만큼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배운 나의 모국어로 작품을 쓰는데 누군가가 합격 통지서를 줘야 작품을 쓰고 발표할 수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 제도인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와 같은 등단 제도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세상에 한 곳도 없다.

 

대부분 다른 나라에서는 작가가 작품을 써서 투고하면 그 작품이 좋으면 편집자가 잡지에 게재하거나 출판사에서 책으로 출판하면 그만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된다. 무슨 고시공부처럼 많은 문청들이 몇 년을 매달려 신춘문예에 목을 매는 것은 너무도 불합리하지 않은가. 시대를 잘못 만난 예비시인들은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전에 몇 번의 좌절 끝에 포기하여 새로운 가능성이 보여주지도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일 것이고 단 한편 번듯하게 잘 만든 작품으로 등단한 후 이름 없이 사라져간 시인들 역시 수두룩할 것이다.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작품을 써야 한다고 할 때 얼마나 많은 상상력과 가능성이 포기되고 무시되고 있을지를 생각하면 아주 무서운 일이다. 우리 문단은 이런 무서운 일을 오랜 세월 동안 아무런 반성 없이 저지르고 있다.

신춘문예와 같은 등단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은 육당 최남선이다. 그가 <소년>지를 창간하고 그곳에서의 공모를 통해 이 땅의 많은 소년, 소녀들로 하여금 문학의 길을 걷게 만들었다. 당시 새롭게 시작되는 근대적 문학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하며 새롭게 제기되는 문학의 전범은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당시의 신춘문예 제도는 아주 효과적이었을 것이고 또 다름의 역사적 사명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신춘문예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 혹자는 신춘문예라는 거름망을 통해 제대로 된 시인을 검증하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금도 시인이 너무 많은데 이런 장치마저 없으면 가짜 시인으로 넘쳐나리라고 강변한다. 그런데 누군가에 의해 검증된 사람만이 시를 써야한다는 것은 권위에 의한 억압이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폭력이다. 이 억압과 폭력으로 얼마나 많은 언어들이 세상에 나오지도 못하고 사라져 갔을 것인가? 그리고 시인이 많다는 것이 무슨 문제일까? 시를 쓰고 읽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문화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부동산 업자가 많아지고 브로커가 많아지고 몸 파는 젊은 여성이 많아지는 사회보다는 시인이 많아지는 사회가 결코 나쁠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지적들에는 수준 낮은 시인들에 대한 비판이 실려 있다. 하지만 시인이라고 해서 모두 수준 높은 언어만 구사해야 할 이유도 없다. 이발소 그림에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처럼 지하철 문짝에 새겨진 상투적인 문구로도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법이다.

 

신춘문예와 같은 이런 불합리한 등단제도가 아직도 존속하고 있는 것은 이런 과정을 겪은 기성 시인들이 자기들의 레테르에 붙은 기득권을 지키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학 지망생들에게 자랑스러운 자기의 레테르를 존경하고 추수하기를 강요하면서 그것으로 권력을 틀어잡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름께나 있는 시인, 소설가, 평론가들은 지금에라도 자신이 왜 신춘문예 심사를 해야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깊이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잘 생각해보면 신춘문예 심사하고 있다는 것이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라 자유로워야 할 문학에 권력의 횡포를 행사하는 폭군이 되는 것이거나 그 하수인이 되는 일일 것이다. 부끄럽고 또 무서운 일이다.

다음으로 신춘문예와 관련된 논란거리가 생겨나는 것은 사회에서의 학벌주의와 꼭 닮은 등단지 등급 매기기가 우리 문단에 횡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사회에서는 간판이 아주 중요하게 작용한다. 학벌과 직업과 자격증이 바로 그 간판이 된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보증해 줄 확실한 표식을 가진다는 것은 개인의 경쟁력 확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사회가 이런 외형적 표식에만 너무 매달리고 있다는 점에 있다. 대학졸업장, 학위증명서, 각종 자격증, 외국어 및 IT자격증 등이 이런 표식에 해당한다. 이런 것들로 우리는 자신을 나타내는 간판으로 삼고 또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레테르로 만들어 달고 다닌다.

 

 하지만 간판과 레테르가 내실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수많은 방송사 출연 기록을 과시하는 화려한 간판만 믿고 들어갔던 식당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음식 때문에 낭패를 당한 적도 더러 있고 레테르만 보고 산 옷의 품질에 실망했던 적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더 나아가 한 사람의 성품과 능력을 어찌 간판과 레테르에 해당하는 외형적 표식으로만 평가할 수 있겠는가? 이런 외형적 표식으로만 사람을 바라보고 평가하게 되면 인간은 사라지고 그 인간이 가지고 있는 조건만 남게 된다.  

 그런데 외형에 현혹되지 않고 진정한 가치를 찾아가려는 노력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는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도 이런 외형적 표식의 영향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지금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시인들의 세계에서도 바로 이 간판이 크게 작용한다. 그리고 신춘문예는 그 간판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시인이 쓴 시를 통해 그 시인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문이나 잡지로 등단했는지 어떤 출판사에서 시집을 냈는지를 통해 그 시인을 평가한다. 그야말로 시가 시인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스펙이 그 시인이 쓴 시의 가치를 말해준다. 본말이 전도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을 시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등단한 등단지로 평가하는 풍조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잡지 편집자나 주간 등의 직함을 가지면서 문단에서 권력께나 행사하는 사람들이 보통 처음 인사하는 시인들을 대할 때 첫마디가 어디로 등단했어요?”이다. 그것으로 그 사람의 등급을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더러 많은 시인들은 자신이 등단한 문예지가 수준이 낮아서 아무데서도 청탁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좋은 곳으로 재등단을 시도하기도 한다. 내가 아는 한 시인은 자기가 등단한 문예지가 격이 낮다고 생각해 앞서 얘기한 족집게 등단 전문 선생에게 찾아가 정말 6개월 만에 번듯한 일간지로 재등단했다가 결국 표절 시비에 휘말려 문학의 길을 영영 접게 된 일도 있다. 같은 족집게 선생에게서 배운 두 사람이 1년의 시차를 두고 등단했는데 그 작품이 서로 비슷했기 때문이다. 정말 코미디 같은 일이지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그것이 유야무야 지나가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또 어떤 문예지는 그 문예지 발행인이 자기들은 중앙 일간지 신춘문예나 메이저 문예지 신인상으로 등단한 사람이 아니면 청탁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랑스레 발표하기까지 한 적도 있다. 이것은 바로 시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없어 시인이 가진 레테르로 그 시인을 평가하려는 천박하고 아주 무식한 짓이다. 그런데도 많은 시인, 평론가, 문예지 편집자들이 이런 짓을 부끄러움 모르고 저지르고 있다. 그것이 권력 행사의 아주 좋은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천박하고 불합리한 풍조와 제도가 있기 때문에 몇몇 물욕에 눈이 어두운 시인들이 등단 장사를 할 수 있게 되고 허명을 얻기 위해 시심마저 돈으로 살 수 있다는 부도덕한 시인 지망생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정말 무서운 것은 가만히 눈감고 생각해보면 다 알 수 있는 이러한 문제를 아무도 고치려하거나 문제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우리 문단의 침묵이 더 무섭다고 느껴진다. 문제제기하거나 고치는 것이 자신의 권력에 누가 되고 자신의 허명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것으로 누렸던 이제까지의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그것을 가지지 못한 조무래기 시인, 작가들은 그 권력에 기생하여 조금의 시혜라도 얻어 기득권을 확보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기회를 놓치기 싫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가 다 이득만을 생각하고 부끄러움을 몰라서 생기는 일이다. 문학까지 이렇게 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3. 누구를 위한 문학상인가?

 

문학상의 권위가 떨어졌다고 말하고들 한다. 문학상의 종류가 너무 많아서이기도 하고 문학상을 제정한 주체가 가진 사회적 힘이 예전만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권위가 없어졌다는 사실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상이 권위를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문단권력이 강화되어 있고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문학상들의 권위가 떨어졌다는 것은, 몇몇 단체나 출판사가 문단에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매체가 다양해지고 문학 활동 영역이 넓어짐에 따라 더 이상 소수의 문단 권력이 문학판을 독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리고 이는 발전이면 발전이지 결코 우려할 사항은 아니다.

또한 일각에서는 문학상의 객관성을 요구하기도 한다. 객관적 기준을 정해 거기에 합당한 사람이 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타당한 주장처럼 들린다. 또한 최근 몇몇 수상자의 면모를 떠올려 보고, 해당 매체 중심으로 자기 사람에게 돌아가며 상을 주는 풍토를 생각해 볼 때 이해가 가는 지적이다.

 

하지만 문학상을 주는 데 객관성이라는 것이 가능하기나 하는 것일까?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받으면 상을 줄 수 있다. 운동선수가 시합에 나가 이기고 골을 많이 넣거나 점수를 많이 얻으면 상을 받는다. 보험 외판원이 많은 가입 건수를 올리면 역시 상을 받는다. 여기에는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이 있다.

하지만 문학이나 예술에 이런 기준이 있을 수는 없다. 정해진 기간 동안 많은 작품을 양산한 작가가 상을 받아야 할까? 그 작품을 읽은 독자수를 파악해서 상을 주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모든 잡지나 출판사를 등급 매기고 A급 잡지나 출판사에 작품을 게재하거나 출판한 건수를 점수화해서 점수가 많은 작가나 시인에게 상을 내린다면 객관성이 보장될까? 하지만 이런 객관적 기준을 문학이나 예술에 적용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문학을 하는 우리 모두는 90점짜리 시인, 88점짜리 소설가로만 존재하게 된다.

 

지금 문학상의 문제는 앞서 설명한 권위의 하락이나 객관적 기준의 부재의 문제는 아니다. 사실 위의 두 문제를 지적하며 비판들을 하지만 문학상이 객관적 기준을 확보하고 예전에 가졌던 권위를 회복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문학상이 그런 것보다는 상업성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점을 다들 알기 때문이다. 잘 팔릴 작가에게 유명한 상을 주어 그것을 통해 대중의 관심을 끌고 상업적 성공으로까지 연결시키려고 하는 것이 최근의 경향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한 작가에게 상을 줌으로 해서 상을 주는 잡지나 출판사의 인지도를 높여 상업적으로 도움을 받고자 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유명 시인의 경우에는 인지도가 좀 떨어지는 잡지에서 자기에게 상을 주려고 하자 상금 액수를 묻고는 수상을 거부하는 일까지 있다고 한다.

 

이쯤해서 상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상이란 국어사전에 따르면 "잘한 일을 칭찬하기 위해 주는 표적"이라고 나와 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그 일을 잘한 일이라고 평가해 주고 칭찬해 줄 누군가의 판단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면 그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나 교육기관에서 상을 내린다. 또 회사에서 일을 열심히 해서 성과를 내면 그 성과를 판단하는 회사에서 상을 주어 보상해 줄 것이다. 이렇게 상을 주기 위해서는 그 상을 받는 대상 위에 존재하며 그것을 평가할 절대적 힘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에 상은 항상 교육과 하사의 의미를 가진다. 자기보다 높거나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상을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칭찬함으로써 기존의 질서와 가치를 따르게 하고 기존 사회 관계에 편입하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일반적인 상의 의미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문학이나 예술에 상이라는 제도가 필요하고 가능한 것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다음 두 가지 경우라면 문학상이 필요하다.

첫째는 작품이 아니라 상품을 만들기 위해 시나 소설을 쓰는 경우이다. 잘 팔리는 시나 소설을 써서 출판사나 작가자신에게 큰 경제적 이익을 가져왔다면 그 사람은 상을 받아야 한다. 목표로 했던 것을 잘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상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또 다른 수요를 창출하는 마케팅 기법으로까지 작용할 수 있으니 당연히 상을 내려야 한다.

두 번째는 문학은 이래야 한다는 강력한 문학적 이념을 가지고 있는 집단에 들어가야 자신의 문학적 가능성이 보인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그런 경우라면 그 집단에서 요구하는 문학적 경향을 착실히 수행하여 그 집단의 인정을 받고 구성원으로 편입되는 과정이 바로 상이라는 형식을 빌려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경우가 아니라면 문학하는 사람이 상을 받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