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당/살림단상(한국타임즈)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외국인이라니

▪살림문화재단▪ 2016. 1. 28. 03:49

강행원 살림단상칼럼니스트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외국인이라니

- 왜곡임명에 중심 잃은 한국미술계의 정체성 바로 잡아야-



과거문화의 모양에 비춰진 그늘이 곧 당대문화 현상이며, 그 집대성이 현대문화의 전모이다. 그래서 현대문화의 전모는 다시 미래문화에 미치는 문화유전인자인 셈이다. 그러므로 문화는 과거 없는 현재문화가 찬연한 빛을 발할 수 없으며, 현재 없는 미래문화의 새로운 존립도 기대 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우리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러한 존립기반이 무너지고 있다는 데 있다. 세계의 여느 국가를 막론하고 자신들의 생활문화는 곧 한나라를 지탱하고 있는 정신에 해당된다. 만약 그 정신이 무너져 버린다면 온전한 나라이겠는가에 대해 나라의 지도자를 비롯한 문화주무장관에게 묻고자 한다.

문제는 국립현대미술관장 임명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일이지만, 견해차의 분노를 가눌 수 없다. 우리 미술계에는 적임자가 없다는 결론 끝에 나온 인사가 외국인 관장이라는데 어처구니가 없다. 관장직에 임명된 사람은 스페인의 '바르토메우 마리'씨이다. 하지만 그의 능력은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다. 그가 한국회화예술을 인지할만한 우리의 정서나 정체성을 지닌 사람일 수 없다는 것은 시비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관장직을 수락한 그도 한국 미술계의 자존심을 짓밟는 데 일조한 모양새다.

미술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먼저 이성을 가지고 한 번 판단해 보자. 미술은 자국의 예술문화에 대한 국제성을 띤 무성의 언어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러한 자국의 무성언어를 통해 국가장래의 미학적인 문화 창출의 한 중심에 서있는 문화 이미지를 대표하는 홍보관이다. 다시 말하면, 겨레의 창의적인 솜씨(Art)에 대한 과거와 현재를 조망하는 곳으로, 미술문화를 통해서 미래문화의 새로운 미학창출을 꾀하여 펴는 마당이다.

더 부연하면, 세계미술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선진예술에의 꿈으로부터 미술가들에게 도약의 발판이 되는 전시 공간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 일상은 자국문화의 창조적인 정신이 담긴 조형언어들의 상시전을 비롯한, 각종 기획전 및 국제교류 등의 전시 허브기능을 하는 나라의 얼굴을 상징하는 곳이다. 이를 한마디로 일축하면 국격의 상징인 동시에, 민족예술에 대한 우월성을 과시하는 국력의 자존심이 담긴 문화 산실의 전당이다.

세계의 선진국에서 갖추고 있는 최소한의 국격을 유지하는 정도의 미술관 기능들을 예로 들면 역사미술관, 근대미술관, 현대미술관, 오늘의 실험조형관 등 4개의 미술관이 기본적으로 갖춰져야 겨우 국격이 유지되는 수준이다. 이러한 입장의 예에서 보면, 아직 우리는 국격의 모양새조차 갖추지 못한 실정이다. 국립현대미술관 하나로 이 기능들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에겐 모든 미술문화에 대한 국격의 자존심이 이 한곳에 걸려 있는데, 그 자존심을 지킬 수장을 우리와는 무관한 외국인을 고용했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미술대학이 가장 많은 나라이다. 따라서 미술인구도 나라인구에 비하면 수위를 다툴 것이다. 이와 같은 조건을 가지고도 한국미술을 이끌만한 적임자가 없다는 것은 인사농단이다. 이는 미술인들을 얼마나 업신여긴 처사인가를 생각해 볼 때, 기가 막혀 말문을 막는다. 지난 1년여를 공석으로 두고 응모자를 뽑던 시나리오 치고는 너무도 수치스럽다.

불가의 붓다는 "마음속 욕망과 외적인 변화에 장악되는 사람은 100년을 살아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라고 했다. 이 법어는 임명권자의 직위를 얼마나 정의롭게 쓸 수 있느냐의 여부와도 통하는 말이다. 정의가 붕괴되면 자유로운 흐름의 역류가 강하게 밀려들 것은 자명한 일이다.

지탱할 정신이 붕괴되는 일인데, 입을 다물고 있는 3만 명이 넘는 '한국미술협회'는 도대체 존재 자체가 무슨 의미인가. 덧붙여 이 땅의 민주화와 정의를 위해 외쳐대던 '민족미술협회'까지 일언반구조차 없으니 더 가슴이 아프다. '민미협'이 더 이상 존재의미가 있는 것인가.

이런 판국에 필자 혼자 시비하는 미친 사람이 됐으니, 미친 자가 무슨 말을 주저하겠는가. 아무리 지도자의 곁에서 권력 맛을 본 관리라 할지라도 그 눈치에 장악돼 소신을 펼 수 없었다면 살아있는 시체와 다를 바 없다. 설령 파벌싸움에 치우치지 않는 이미지 쇼를 보이려했다 하더라도 사대주의를 갈망한 짓일 뿐이다. 이는 한편 통치자에 아첨할 적임자가 1년이 다 지나도록 없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을 잘 모르는 외국인을 불러들여 아바타로 쓸 생각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발상이 나올 수 있을까.

한갓 외국인 그림 장사꾼을 상대로 인사정책을 감행했다는 것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사설 그림 장터쯤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처사다. 체육인들이 경기 흥행을 위해 외국인 선수나 감독으로 고용하는 경우와는 다르다. 한나라의 자존심이 걸린 미술문화를 이끌 수장을 한 운동 종목의 감독 정도로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기에 앞서, 정신 나간 사람이다. 침체기에 있는 한국미술을 활성화하기 위함이었다는 변은 웃지 못 할 코미디 대사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직위를 바르게 쓸 수 있는 책무에 따른 자질인데, 이는 국가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지도자도 예외는 아닌 것이다. 지도자의 능력과 자질에 따라 중간계층을 망하게도 흥하게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 중간계층의 붕괴다. 문제는 중간계층을 회복하는 것이 실업률을 회복하는 길이며, 모든 시장경제의 침체기도 되살리는 길이다. 미술경기 회복을 위해 외국인 관장 임명이라니, 소가 웃을 일이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가. 세계는 온통 글로벌전장에서 이권경쟁에 깊이 휩싸여 있다. 글로벌이라는 발상은 지구주의 순화를 뜻하지만, 그 책략은 결국 지구를 독식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패권국의 뜻대로라면 탈 국가주의가 되는 일인데, 무장을 해제한 나라들이 무엇으로 자국을 보호하겠는가.

이러한 입장에서 예술의 영역은 국제성을 가진 자국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중요한 회화문화의 주체적 자율성을 지키는 사령탑을 외국인에게 맡기는 것은, 아프리카의 후진국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국민을 조롱하는 것이다. 글로벌전장에서 유일하게 지킬 수 있는 문화의 영토마저 잃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왜곡임명의 발상의도에 밟힌 오늘 우리시대의 참된 예술은 중심을 상실한 위기의 국면을 맞고 있다. 통치자를 에워싸고 있는 정치생명은 주위의 한정된 입맛에 맞는 도움으론, 결코 국가 경영의 좋은 치적을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이 동서고금의 교훈이다. 선량한 응모자들이 무참한 꼴을 당하게 된 이 현실을 어떻게 설명 할 것인가? 민주화가 어두운 터널을 지나던 군사 정권 시절에는 정의의 정통성이 부정되는 길들여진 문화풍토가 없지 않았다.

그때의 망령이 현 정부에 되살아나는 재현을 보는 것 같아 섬뜩하기 그지없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다. 정치에서는 인사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현 정부의 출범당시부터 굴절됐던 인사를 되 뇌이고 싶지는 않다. 논공행상이 가져온 과오는 마치 주머니에 넣어둔 송곳처럼 튀어나온 모순들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우리는 지난시대 핍박받고 피 흘려 쟁취한 민주화의 가치질서에 반하는, 국가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왜곡임명 철회와 주무장관의 책임을 요구한다.

강행원 (화가/ 동양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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