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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진의 이슈후] 노벨문학상, 왜 밥딜런인가?

▪살림문화재단▪ 2016. 10. 14. 21:44

[조성진의 이슈후] 노벨문학상, 왜 밥딜런인가?




[스포츠한국 조성진 부국장] 보들레르는 ‘상상은 무한과 인척 관계’라고 했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유한’의 정해진 학습을 잘하는 것인 반면, 생각하고 상상하는 행위는 그보다 상위의 ‘무한’의 개념이다. 이미지를 이해하기 위해선 사고와 언어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미지는 기호의 일정한 조합과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밥 딜런 노래는 ‘유한’보다는 ‘무한’, 틀 속의 정해진 체계인 ‘기호’보다는 ‘상징’에 가깝다. 시력은 만지는 것 보다 더 지능적이지만 듣는 것 보단 덜 지능적이다. 이미지는 글이라는 기호보다 전염성이 강하고 더욱 큰 바이러스성을 띤다. 

시적인 은유와 상징은 밥 딜런의 가장 큰 문학적 무기다. 언어라는 정해진 체계인 기호를 그는 상상, 즉 무한의 이미지 영역으로 확장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Blowin' in The Wind’를 비롯해 ‘Knockin' on Heavens Door’, ‘Like A Rolling Stone’, ‘Visions Of Johanna’ 등등 수백여 곡이 넘는 그의 곡들은 대부분 잘 짜여진 기호(언어)의 조합을 통한 이미지 아트의 구현이다.

미국의 여러 대학에선 밥 딜런의 노랫말을 연구하는 강좌가 있다. 하지만 국내외 권위 있는 영문학 교수들 사이에서조차 문학적 향기와 철학적 메시지가 강한 그의 가사를 해석하는 방식이 다를 정도다. 그만큼 밥 딜런의 가사가 지닌 의미는 다의적이다. 

대중음악 가사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느낀 것을 문학성 짙은 방식으로 토해내는 밥 딜런의 스타일은 이미 오래전부터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되고 있던 관계로 이번 노벨상 수상은 결코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밥 딜런의 이런 탁월한 가사쓰기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뮤지션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밥 딜런은 자유분방 그 자체였다. 건방이 하늘을 찔렀고 자기가 최고인 양 공개적으로 떠들어 댔으며 ‘폼생폼사’의 전형이었다.

그런데 밥 딜런의 태생적인 오만함은 데뷔와 동시에 스타로 뜨는 순간 오히려 매력으로 화했다. 수많은 여자들에겐 ‘뭔가 있어 보이는’ 거부할 수 없는, 심지언 성적 매력으로까지 둔갑했던 것이다. 

여자관계도 복잡했다. 시공을 달리해 2~3명의 걸프렌드와 사랑을 나누는 것은 기본이고 그러다 보니 여자들과 심각한 불화로 끝을 맺곤 했다. 그는 존 바에즈와 헤어지자마자 뉴욕의 첼시 호텔에서 세라라는 여자와 동거를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공연 때마다 숱한 여자들과 관계했고, 심지언 소속 음반사 여직원과도 관계를 가져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외에 미모의 영화배우와 오랫동안 사귀기도 했다. 

빚을 갚기 위해 1978년부터 시작한 114회나 되는 대대적인 월드투어는 다행히 큰 성공을 거둬 밥 딜런에게 2000만 달러란 거액을 안겨다 줬다. 이 월드투어 중 코러스를 맡고 있던 고교를 갓 졸업한 헬레나 스프링스와 눈이 맞아 새로이 사귀기 시작했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아프리카 마오리족 여러 명의 흑인 여성들과 트리플 데이트를 하며 깊은 관계를 계속했다.

1986년엔 자신의 코러스걸인 흑인 캐롤린 데니스와 재혼해 딸 ‘Desiree’를 낳기도 했는데, 그녀는 밥 딜런의 여섯 번째 아이였다. 하지만 캐롤린과의 결혼 생활 중에도 여전히 숱한 여자들과 밀회를 즐겨 결국 1992년 이혼당하고 말았다. 

밥 딜런이 첫 부인 세라와의 사이에 낳은 큰딸은 변호사로 일하고 있고, 큰아들은 엔터테인먼트 관련회사 CEO로 두각을 보였다. 또한 딸 중의 하나는 화가이며 막내아들 제이콥 딜런은 세계적인 록 밴드 월플라워스 리더로 유명하다. 

밥 딜런은 여자와 헤어지거나 위자료, 그리고 변호사 선임비 등등으로 천문학적인 재산의 상당 부분을 써버렸고 그 때마다 공연을 통해 탕진했던 재산을 다시 보충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여성 편력과 자유분방한 삶 속에서도 그는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 정신적 허기를 달래려 했다. 온갖 경험과 독서, 사색은 왕성한 가사쓰기를 통해 생산적 결실을 맺었다.

이처럼 음악과 여자로 점철된 변증법적 삶이었다고 해도 만일 그가 탕아였다면 이런 행동이 단순쾌락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밥 딜런에겐 이 모든 경험이 가사쓰기의 또 다른 재료와 자극으로 기능했다. 

시골뜨기 무명의 밥 딜런이 1960년대 뉴욕의 소호에서 읽은 것은 당대를 주름잡을 새로운 포크음악의 절대적 필요성이었다. 한 시대를 읽어대는 이러한 통찰력은 오늘날 그를 신화로 만들게 한 원동력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노래에서 멜로디, 즉 음의 고저는 기본임에도 불구하고 밥 딜런은 이런 통념을 깨버리고 억양이 없이 대화하거나 읊조리는 듯한 소위 ‘밥 딜런식 창법’을 선보였다. 언뜻 들으면 노래 같지도 않은 마치 시를 외는 듯한 중얼거림이 노래로 둔갑해 안티 세력으로부턴 ‘사기꾼’이라는 비난도 들어야 했다. 이런 창법 기저엔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원초적 감성이 내포돼 있어 그의 공연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들에겐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임팩트를 선사했다.

남을 완벽하게 따라 하기보다 불안정해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강화시켜 나가는 것, 이것이 데뷔 때부터 줄곧 고수해온 밥 딜런의 뮤지션십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대중음악=저급한 가사’라는 통념을 본능적으로 깨는 가사쓰기로 이어졌다. 

밥 딜런은 현재까지 1억3000만장의 앨범 판매고를 올렸고 11개의 그래미상을 비롯,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상을 수상했으며, 2008년엔 “팝 음악과 미국 문화에 깊은 영향”을 인정받아 퓰리처상까지 수상했다. 2012년엔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최고의 영예인 자유의 메달을 수여받고 스티브 잡스가 가장 사랑한 아티스트로 재조명 받기도 했다. 

그러나 밥 딜런은 90년대 중반 이후 ‘매우’ 중요한 행사에 참여하는 거 이외엔 거의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해 왔다. 무료하다 싶을 때 옛 동료를 모아 투어를 돌며 록뮤지션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행복감을 맛보는 정도다. 외부 매체들과의 인터뷰를 극도로 자제하는 관계로 가히 그는 전설 속의 ‘은둔 고수’로 자리했다. 

오만하고 시니컬한 그러면서도 자기 음악에 대해선 너무도 독특한 컬러와 완벽성을 추구했던 밥 딜런. 경험과 수많은 독서+상상을 통해 생각을 가사로 다듬어 노래했고 결국 이것이 지구상 가장 높은 문턱을 자랑하는 ‘상 중의 상’ 노벨상을 넘는 쾌거를 이루게 됐다.

어찌 보면 그의 삶 자체가 소설이나 대하드라마를 능가할 만큼 변화무쌍하고 흥미진진한 파노라마였던 것이다. 문학이 단순히 책을 통해 학습한 지식을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접한 상태에서 그걸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또 하나의 수단이고 커뮤니케이션의 장이라면 밥 딜런의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오랜 시간동안 그는 높은 문학적 품격의 가사로 반전과 평화, 사랑, 자유를 노래해 왔다. 대중음악 가사이기 이전에 완벽한 한 편의 시였던 것.

스웨덴 한림원은 밥 딜런을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위대한 미국 음악의 전통 내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냈다”고 밝혔다. 이 말 속엔 많은 것이 함축돼 있다. 무엇보다도 문학서적을 잣대로 평가하던 전통적 방식에서 탈피해 대중음악 가사를 보다 적극적으로 평가 기준으로 삼아 심사의 외연을 넓혔다는 점에서 노벨문학상 선정 방식의 변화에도 박수를 보낸다.

여자에겐 ‘바람’둥이였고, 삶 자체도 시간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아 불었다 가는 ‘바람’인듯 집착하지 않고 유유자적하며 자유분방 관조하는 밥 딜런, 그래서 더욱 그는 진정한 음유시인 무리 중에서도 여전히 보스다. 

그래미,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 퓰리처상에 이어 노벨상까지 거머쥐며 초유의 그랜드슬램 기록을 세운 밥 딜런이란 바람은 여전히 쉬지 않고 불고 있다. 

노벨상 수상 이후 그는 또 바람 따라 어디로 향할까?.... 바람만이 답을 알 뿐.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봐야 깨닫게 될까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이 바다 위를 날아야 백사장에서 편히 쉴 수 있을까전쟁의 포화가 얼마나 많이 휩쓸고 나서야 영원한 평화가 찾아올까 친구여, 그 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네”- 밥 딜런, Blowin' in The Wind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