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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요약복음서

▪살림문화재단▪ 2012. 12. 7. 22:39

 

 

 

 

레프.톨스토이 편역   要約 福音書


  서언(序言)


  이 요약복음서(要約福音書) 는 아직도 원고(原稿) 그대로이고 앞으로도 출판할 수 가없을 (러시아에서는) 훨씬 많은 저서(著書) 중에서 뽑아낸 것이다.(이 서언이 써진 다음부터 여기 말한 (여러 책-복음서연구 상해) 는 바로 외국에서 러시아어로 출판되었다.


그 책은 4부로 나누어 이루어 졌다


1.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교에 진리가 있다라는 확신에 이르게 한 나의 생활 및 사상의 경로의 서술


2. 첫째는 오로지 정교회(正敎會)의 해석에 의해, 둘째는 일반교회, 사도(使徒)및 이른바 교부(敎父)들의 해석에 의한 그리스도의 교리의 연구 및 그들의 해석 중에 있는 허위(虛僞)의 적발(摘發).


3. 그들의 해석에 따르지 않고 오로지 복음서 중에 쓰여 있고 덧붙여 쓰이기도 한 그리스도의 가르침 가운데서 직접 우리에게 전해진 것에 의한 그리스도교의 연구 그리고


4. 그리스도교의 진의(眞意) 그 곡해(曲解)된 원인 및 그 설교가 의당히 받지 않으면 안될 결과들에 대한 서술 그래서 이 요약은 위의 제 3부로부터 편찬된 것이다


이 책에서 나는 교리의 의미에 따라 4복음서를 통일했다. 그런데 그 통일에 즈음해서 복음서에 서술돼있는 순서를 바꿀 필요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복음서의 시귀(詩句)바꿔놓기는 글레췰레뷔치의 4복음서나 나의 알고있는 여러 복음서에 비해서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약간 적은 편이다.

요한복음과 같은 것은 나의 통일에 의해 전연 시귀를 바꿔놓은 것은 없고 모두 원본과 같은 순서로 서술돼 있다.

복음서를 12장, 혹은 6장(2장을 1장으로 통일) 에 분류 한 것은 교리의 의미에 따라 자연스런 흐름의 결과다. 아래 각 장의 의미를 들여다보면-

1. 사람은 무한(無限)한 본원(本源)의 아들이다. 육(肉)에 의하지 않고 영(靈)에 의한 아버지의 아들이다.


2. 그러므로 사람은 영으로서 이 본원을 섬기지 않으면 안 된다.

 

3. 만인의 생명은 신성(神聖)한 본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본원만이 신성하다.

    

4. 그러므로 사람은 만인의 생명 속에 존재(存在)하는 이 본원에게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아버지의 뜻이다.


5생명의 아버지 뜻에 대한 봉사는 생명을 준다.


6. 그러므로 자기 하나의 뜻에 만족은 생명에 있어서 필요치 않다.


7. 한때(一時)의 생명은 참 생명의 양식이다.


8. 그러므로 참 생명은 시간을 초월해 있다.(그것은 항상 현재 속에 있다)


9. 생명의 속임수(欺滿)는 시간 속에 있다. 과거와 미래의 생명은 사람 앞에 현재의 참 생명을 은폐(隱蔽)한다.


10. 그러므로 사람은 과거와 미래의 일시적 생명의 속임수를 깨뜨려버리기 위해 항상 노력  하지 않으면 안 된다.


11.참 생명은 만인에게 공통되는 현재의 생명이 어서 사랑(남을 돌봐주는 일)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12. 그런고로, 현재에 있어서 만인에 공통하는 생명인 남을 돌봐주는 일에 사는 이야말로 아버지 본원 및 기초적(基礎的) 생명과 일치(一致)하는 것이다.


이렇게 각 장마다 두 장씩 서로 원인(原因)결과(結果)로서의 연관을 가지고 있다. 12장 이외에 이 해설에는 요한복음서의 필자(筆者)가 자신이 전교리(全敎理)의 의미에 대해 말하는 제 1장의 서론과 같은 필자의 편지의 결론(다분히 복음서보다 먼저 써진 것일 것이다.)으로서, 그 이전의 일체의 교리의 일반적 결론이 들어있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서언과 결론은 교리의 주요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론도, 결론도 다함께 교리의 의미에서 말하면 생략해서 조금도 지장이 없는 것이었는데 불구하고-(항차, 이들 부분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요한에 의해 쓰여진 것임에 있어서랴)- 내가 이것을 하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의 교리의 단순한 해석에 즈음하여 이들 부분이 하나가 다른 쪽 및 교리전체를 확증하면서 교회의 기괴(奇怪)한 해석에 대항하여, 교리의 본래의 의미에 대한 가장 간명(簡明)한 지시(指示)로 되어 있는 까닭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또 각 장 첫머리에 내용의 간단한 정의 이외에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 중에서 각 장에 알맞는 말도 발췌해 놓았다.


 내 일을 끝냄에 즈음하여 내가 놀라고 또 기뻐한 것은 주의 기도가 내가 배열한 각 장의 순서와 완전히 같은 순서로 가장 긴축된 형식으로 그리스도의 전교리를 표현한 것에 다름이 없는 것과 기도의 한마디 한마디가 각 장의 의미와 순서가 꼭 들어맞는 일, 이런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1. 우리의 아버지시여,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2. 하늘에 계신 이,

  하나님은 생명의 무한한 영적 본원(靈的本源)입니다.


3. 당신의 이름이 높이게 하옵소서.

  이 생명의 본원은 신성 하여이다.


4. 당신의 왕국이 오게 하옵소서.

  당신의 권력은 만인의 속에 실현될 것입니다.


5.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이 무한한 본원의 뜻이 그 자신 속에 행해지는 것 같이,


6.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육신에도 행해지게 될 것입니다.


7. 우리에게 날마다의 양식을 주시 옵소서.

   한때의 생명은 참 생명의 양식입니다.

8. 오늘도,

   참 생명은 현재(지금)에 있사옵니다.


9.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이를 용서해 줌과 같이 우리의 빚도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러면 과거의 잘못과 오해(誤解)가 우리에게 이 참생명을 가리어 숨기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10. 우리를 홀리는 꾀임으로 인도하지 마옵소서. 그러면, 우리를 거짓으로 인도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11. 우리를 악한 일로부터 구해주옵소서. 그때에는 사악함이 없어질 것입니다.


12. 나라와 권력과 영광은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권력과 힘과 이성(理性)이 오시리이다.


이 책의 원본에 있는 제 3부의 해설 중에는 사복음서의 필자에 의해 설명된 복음은, 조금도 빠뜨리지 않고 서술돼  있다. 허나, 이 요약에서는 아래 말하는 부분은 생략했다.-즉 세례요한의 수태(受胎)와 출생, 저의 투옥(投獄)과 죽음, 그리스도의 출생. 그 계보(系譜), 어머니와 함께 애굽에의 탈출(脫出), 가나와 가버나움에서 의 그리스도의 기적(奇績), 악마의 축출, 바다 위의 보행(步行), 무화과나무의 건조(乾燥), 병자의 치료, 죽은 이의 소생(蘇生), 그리스도 자신의 부활(復活) 및 그리스도의 생활에서 성취된 예언의 지적(指摘)들이다.


  이들 시귀를 이 요약에서 양략한 것은 이런 것들이 조금도 교훈(敎訓)을 담고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설교이전 그 시대 및 이후에 발생한 사건을 적은 것에 지나지 않아, 글을 번잡하게 하는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 시귀는 설사 어떻게 해석되더라도 그 교리의 반대에도 그의 진실성(眞實性) 의 증명도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이들 시귀의 유일한 의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는 이에 대해 그것을 증명하는 것 뿐 이다 기적에 대한 이야기의 불확실성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뿐만 아니라 저의 교리에 의해 그리스도의 신성에 의혹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이 시귀는  그 불필요성에 의해 자연히 소멸해 버리기 때문이다.


상해(詳解)의 편에서는 보통 번역과 틀리는데 라든지 삽입(揷入)된 주석이라든가 생략이라든가 모든 복음서의 각종 개작(改作)의 비교연구나 문맥(文脈)이나 언어학상 그 밖의 고찰 등으로부터 설명도 되고 증명도 되어 있다.

 

이 요약에서는 모두 이런 증명이나 교회의 잘못된 해석에 대한 반박이라고 하는 것은 자세한 주해나 인증과 같이 그 대목에 대한 논의는 아무리 옳고 또 적절하다 하더라도 그 논의는 요컨데 참 교리의 의미를 이해하게 하는 역할을 못한다는 이유로서 생략하고 말았다.


교리의 진정한 이해에 대한 증명은  하나 하나의 문제에 대한 논의 중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교리의 통일, 명료, 단순, 충실, 및 진리를 찾는 모든 사람의 내적 감정과 교리와의 부합되는데 있는 것이다.


총체적으로 나의 해석과 교회에서 인정하고있는 원서와의 사이에 존재하는 상이점에 대해서 독자는  우리들의 선입견으로 되어있는 4복음서는 일언 일귀의 끝까지 신성한 글이라고 하는 것의 과오라고 하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독자는 또 그리스도는 프라톤과 같이 필론과 같이 마르크스아우렐리우스와 같이 자신의 글을 쓴 일은 한번도 없고 또 소크라테스와 같이 자기의 가르침을 교육과 지식 있는 사람들에게 전한 일 마져 없이 불학 무식한 군중들에게 말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의 사후에 오래 있다가 비로소 사람들이 그에 대해들은 것을 적기 시작한데 지나지 않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독자는 또 그러한 수사본(手寫本)이 퍽 많았다는 것과 그중 에서 교회가 최초로 세 가지를 나중에 또 하나의 복음서를 골라냈다는 것 이들 가장 좋은 복음서를 골라내면서도 교회는 ‘휘지 않는 막대기는 없다’라는 속담과 같이 그것을 그리스도에 대한 크나큰 문헌에서 분리해내는데는 많은 의곡도 껴잡지 않으면 안되었던 일, 교회법에 의한 복음서에서도 위교(儰敎)라 해서 배척 당한 복음서와 같이 많은 좋지 않은 부분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독자는 다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신성하겠지만 그 한자 한 마디가 신성할 수는 단연코 없고 또 사람이 그것을 신성하다고 하는 것만으로서 여기서부터 여기까지의 시귀가 신성해진다는 것도 있을 리가 없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뿐 아니라 독자는 이들 골라낸 복음서도 역시  몇 십 명이란 서로 틀리는 사람의 지식과 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고  수세기 동안에 선택되어 증가되고 주석된 것이라는 것 또 현재까지 전해진 제4기 의 복음서는 모두 아무기호도 없이 써 내려간 필사여서 그 때문에  제4 제5세기 이후에는 극히 다양한 책이 돼서 이렇게 제각기 읽는 법이 틀린 책이, 복음서에는 5만종이나 이나 있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독자는 이런 것들을 모두 잘 기억해서 복음서가 현재 이해되고 있는 것과 같이 틀림없이 성령으로부터 우리에게 보내진 것이라는 것과 같은 상투적 견해에 혹하지 않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독자는 복음서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때버리고 각 장의 구절을 비교 대조해서 그 뜻을 밝히는 것은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그렇게 하지 않고 한자 한 귀절의 끝까지를 신성시함의 불합리성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다른 측면에서 내가 나의 요약복음서의 독자에게 기억해주기 바라는 것은 만일내가 복음서를 보기를 성령으로부터 주어진 신성한 책이라고 생각지 않는다면 한층더 그것을 종교문학의 역사적 기념물이라고 생각치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복음서에 대한 신학적 아울러 역사적 견해를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다른 입장에서 그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내가 독자에게 희망하는 것은 나의 해설을 읽어 가는데 있어서 내가 택하지 않는 교회적 견해나 또는 근래 교양 있는 사람들 사이에 상투적으로 돼있는 복음서에 대한 역사적 견해에 현혹되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그것을 특수한 신의 계시로서도 아니려니와 역사적 현상으로서도 아니고 인생에게 의미를 주는 교리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교에 인도 된 것은 신학적 연구도 역사적 연구도 아니고 내가 50세 때 나는 무엇이냐?

나의 생의 의미는 어디에 있느냐? 라는데 대해 자신에게 묻고 또 주위의 모든 현인에게 물어서 너는 원자의 우연한 결합이라고 하는 대답을 얻은 것 때문이었다.


 인생의 의미는 없다. 인생자체가 악이다. 이런 대답을 얻은 것으로 인해 나는 절망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끓으려고까지 했으나 그때 예전에 내가 신앙을 가지고있던 어린 시절에는 인생이 내게 있어서 의미가 있던 일 및 나의 주위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 부귀에 의해 타락되지 않는 사람들은 신앙을 잃지 않고 인생의 의미를 확실히 파악하고있는 것을 생각하고 나는 나에게 주어진 주위 현인들의 해답의 진실성에 의심을 갖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인생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주고있는 해답을 다시 조사해볼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교 가운데 무엇이 사람들의 생활을 지도하고있는 것인가 하는 쪽에 대해 그 교리의 연구를 시작했다.

나는 내가 실생활에 있어서 그것을 법칙(自然原理)으로 삼고 있는 것을  목격한 그 그리스도교를 연구하기 시작하여 그 교리의적용과 그의 원천을 비교 대조해 보았다.

그리스도교의 원천은 복음서였다. 그래서 나는  그 복음서에서 모든 살아있는 사람들의 생활을 지도하는 의미의 설명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 맑고 깨끗한 생명의 물위 원천과 아울러 나는 거기에 나를 위해서 오늘까지 그 맑고 깨끗함을 가리고있던 진흙탕이 부당하게 섞여있는 것을 알았다.


숭고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아울러 나는 거기에 그와는 상관이 없는 유대교와 교회의 추악한 교리가 들러 붙어있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악취를 풍기는 진흙주머니를 받은 사람이 오랜 고투(苦鬪)와  심로(心勞) 끝에 비로소 그 주머니 속에 진흙투성이 가 되어 값을 알 수 없으리만큼 비싼 진주가 여러 개나 실재로 뒹굴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 그때의 상태와 흡사하게 찾아냈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 그 사람이 악취를 풍기는 진흙탕에 대해 혐오감을 가졌다고 해서 별로 죄가 아닌 것은 당연하고 또 이 진주를 진흙탕과 함께 모아 보존한 사람들도 단지 죄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아 마땅한 사람인 것도 당연한 도리가 아니면 안 된다.


나는 빛을 몰랐었다. 그래서 인생에게는 진리의 빛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은 오직 이 빚에 의해서만 사는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기에 이르러 나는 그 원천을 찾기 시작하여 드디어 그것을 잘못된 교회의 주석에도 불구하고 복음서 중에서 찾아 낸 것이다.

그래서 이 빚의 원천에 도달함과 함께 나는 그 빚의 휘황함에 어우러지면서도 나의 생과 다른 사람의 생의 의미에 대한 의문에 대해 완전한 해답, 내가 알고 있는 한 다른 국민이 얻은 해답과 완전한 일치 할뿐만 아니라 내가보는 바로는 그 모든 것에 비해 월등한 해답을 얻은 것이다.


본래 나는 인생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한 것이었지 신학상의 문제나 역사상의 해답을 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게 있어서 주요한 문제는 예수그리스도가 신이냐 아니냐?

성령은 누구에게서 나온 것이냐 운운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동시에 또 언제 누구 손에 의해 어떤 복음서가 써졌다 라든가 어떤 비유는 그리스도가 말한 것이라든가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느니 하는 것들은 아는 것도 다함께 중요하지 않으려니와 필요치도 않은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1800년간 인류를 비춰주고 과거에 나를 비춰주었고 현재 또 비춰주고 있는 이 빛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이 빛의 근원은 무엇이라고 부를 것인가?

그 요소가 무엇인가? 또 어떤 사람의 손으로 불 붙여진 것일까? 이런 것은 내게서 어찌되었건 관계가 없는 일이다.


만일 복음서가 오늘날 발견된 책이라면 또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1800년간 허위의 해석이 가해지지 않았다면 이 서언은 이쯤에서 끝이어도 좋다. 그러나 지금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똑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 허위의 해석의 주된 기초를 명확히 알아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습관적으로 되어 분간키 어렵게 되어있는 허위의 해석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아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닌 교회의 가르침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지극히 적은 부분이 포함돼 있는데 불과한 모순에 찬 문서의 설명으로부터 성립되어 다른 문서의 설명의 요구로 왜곡되고 꾸부려 뜨려진 교회의 가르침이 선전되고 있는데 있는 것이다. 이 허위의 해석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란 오직 단순히 세상시작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교회 안에 이어져오는 계시(啓示)의 사슬의 고리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들 허위 해석자 들은 예수를 이름하여 하느님(神) 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그러나 저를 신(神) 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저들로 하여금 신의 것인 말씀이나 교리에 모세의 오서(五書), 시편, 서간, 묵시록, 기타 교회의 규정과 교부들의 문서 이상의 의미마저 주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들 허위 해석자 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 그 이전 및 그에 이어지는 모든 계시와 일치하지 않는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저들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뜻을 설명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서로 모순을 극 한 각종문서 모세오경 시편 복음서 편지 사도행전등 즉, 일반적으로 신성시(神聖視) 하고 있는 모든 전적(典籍)들 사이에 가급적 모순이 적은 뜻의 일치점을 발견하려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진리가 아니며 조화될 수 없는 것의 조화 즉 신약(新約) 구약(舊約) 두가지 문서의 조화를 목적으로 한 해석이 수(數)에 있어서 많은 것은 자명한 이치이고 사실이 또한 그러하다.


바울의 편지 “우리와 성령의 이름으로”란 형식으로 써 내려간 교회의 규정도 모두 같은 것이다. 로마법왕 종교회의 편타교도와 그 밖에 저들의 입을 통해 성령이 말한다고 단언하기를 서슴치 않는 모든 허위적 해설자의 규정도 모두가 그런 것이다.

저들은 모든 것이 다 자기 해석의 진실성을 확인함에 있어서는 저들의 해석은 인간의 것이 아니고 성령이 하시는 것이라고 한다. 조잡한 상투적인 수법을 쓰는 것이다.


각각 자기만을 진리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는 이들 신앙 그 자체를 분류하지 않고 소위 구약 신약의 그 많은 문서를 꼭 같이 신성한 것으로 인정하고자 한다. 저들 모두의 공통된 태도에는 저들 자신의 손으로 자기 앞에 놓인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가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모든 계시의 조화수가 다만은 한없이 다종다양(多種多樣)일 수 있으나 신이라고 숭배하는 한 사람의 가르침과 해석이 부조화가 생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땅위에 내려온 신의 가르침이 땅위에 신으로 내려오신 그 목적을 보더라도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느님이 만일 인류에게 진리를 계하기 위해 땅위에 내려 오셨다고 한다면 적어도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진리를 계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하는님이 그것을 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었던 것이다. 만일 하느님의 진리가 하느님 조차 그것을 인류를 위해 이해하기 쉽게 할 수가 없을 정도의 것이었다면 사람이 그것을 하기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예수가 신이 아니고 단지 하나의 위인이라고 한다면 한층 더 그의 가르침은 그런 여러 가지의 부조화가 생길 리 없다. 원래 위인의 가르침이란 오직 일반 사람이 말한 것으로는 알기 어려워 분명치 않는 것이 알기 쉽고 분명하게 말해진 점에서 비로소 위대한 것이다.


위인의 가르침에도 불가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위대하다고 할 수 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어떤 위인의 가르침도 분파가 생기지 않았다.

다만 이것은 성령의 계시다. 이것이야말로 유일한 진리다. 다른 모든 것은 허위다. 이렇게 주장하는 해석 이런 해석만이 부조화를 일으키고 거기서 파생하는 교회가 상호간에 적대심을 조성하게 되는 것이다. 여러 가지 교파의 교회가 얼마나, 우리는 다른 교파를 비난하지 않고 다만 일치하기를 바랄 뿐이며 저들에 대해 결코 증오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강변해도.. 그것은 거짓말이다. 아이리(아리우스)로부터 시작하여 어떠한 교리라 해도 하나같이 반대교리의 허위를 비난하는 것 이외에서 출발한 것이 없다.


이러한 교리의 표현이 성령의 신선한 표현이란 성명(聲明)은 가장 극단적 오만이고 다른 사람에 대한 악의(惡意)이다.

극단의 오만이라 함은 자기가 하는 말은 자기를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이 말한 것이라고 하는 이상으로 오만한 말은 다시없겠기 때문이다. 또 악의라고 하는 것은 자신을 유일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리를 파악한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바로 자기와 같지 않는 모든 것은 허위라고 단정하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교회라는 것은 모두가 이것만을 말하고 있고 신앙이란 이름으로 일찍이 이 세상에서 행했으며 오늘날에도 아직 행해지고 있는 모든 악폐는 바로 여기서 생기고 또 생겼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이와 같은 해석과 분파를 만들어낸 이 일시적인 악폐 이외에 그것은 또 하나의 가장 중대한 저들의 단정에 불확실하고 애매한 불신한 내부적 결함을 가져다준다는  내부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

이 결함은 모든 교회가 처음에 사도에게 내려오고 나중엔 차츰 가상적으로 선출된 사람에게로 옮겨간 성령의 계시를 최후의 것으로 인정하면서 그 계시가 과연 어떠한 것인가는 어디에도 직절(直節)하고 확실히 결정적으로 천명(闡明)하지도 않은 주제에 이 가상적으로 연속돼있는 계시에다 자기의 신앙의 기초를 두고 그것을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그 한 가지일 때문에 이 결함이 생기게 되었다.


성령의 계시를 인정하고 있는 모든 교회적 관습은 마호멧교도 들과 같이 모세 예수 및 성령의 세 가지 계시를 승인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마호멧교의 신앙에 따르면 모세와 예수의 뒤에는 마호멧이 모세와 예수의 계시의 의미를 설명하는 최후의 예언자이고 그래서 이 마호멧의 계시야말로 모든 정교도(正敎徒)인 자기들이 가져야 한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교회의 신앙은 이와는 좀 다르다. 그것은 마호멧교와 같이 모세 예수 및 성령 이 세가지의 계시를 인정은 하고 있으면서 자기를 부르기를 최후의 계시자의 이름을 따서 성령교 라고 하지 않고 그 신앙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저들은 자기교리를 전도하면서 그 교리의 권위를 예수에게 돌리고 있다.


교회적 관습은 어느 사람은 바울 어느 사람은 하나의 회의(會議) 어느 사람은 다른 회의 누구는 법황 누구는 주교의 그것을, 그 이전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최후의 계시라고 인정했다고 하면 그것을 그대로 발표하여 자기의 신앙을 최후에 계시를  제공한 사람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최후의 계시가 교부들의 것이라든가 혹은 동방교회(東方敎會)의 주교들의 편지라든가 법왕이 결정한 것이라든가 유론표 라든가 또 루터나 휘라렡의 교리문답 이라고 한다면 저들은 그렇게 말하고 그 신앙을 그렇게 명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최후의 계시는 언제나 가장중요한 계시가 아니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들은 그것을 하지 않고 그 대신에 그리스도와는 도대체 상관도 없는 교리를 전하면서 이 교리는 그리스도가 주장한 것이라고 우기고 있다.


그 때문에 그들의 교리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그의 피로 아담이래 타락한 인류를 대속(代贖)했다고 말하며 신(神)은 창조주라고 하면서 성령(聖靈)은 사도들에게 내려와서 안수례를 거쳐 성직자에게 옮겨진 것이라고 하고 구원을 위해서는 일곱 가지의 거룩한 비밀예식이 필요하다고 하며 성찬식은 두가지 종류가 아니면 안 된다는 등등을 말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에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하나의 암시조차 주지 않았는데도 이러한 일이 모두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고 돼 있는 것이다.


본래 이들 거짓교사들은 자기의 가르침 자기의 신앙을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니고 성령의 가르침 또는 신앙이라고 명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신앙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서 중에서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최후의 계시로 인정하는 그 신앙뿐이기 때문이다.


얼른 보아 이것은 지극히 간단명료해서 그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되지만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무리 괴이하더라도 오늘날까지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한편에서는 구약성서(舊約聖書)와는 인위적으로 아무 근거도 없는 견강부회(牽强附會)적 조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 다른 편에서는 성령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교리의 자의적 추가나 곡해(曲解)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로 어떤 사람은 예수를 삼위일체의 제 이의 인격(아들인 神)이라 부르며 그의 가르침을 저들이 구약성서나 사도의 편지나 회의(會議)의 교부(敎父)들의 결의 중에서 볼 수 있는 제 삼의 인격(聖靈)의 예의 가상적 계시와 연관돼 있는 것에 틀림없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또 예수를 신이라고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역시 저의 가르침을 저에 의해 말해진 대로 이해하지 않고 바울과 그밖에 저의해석자가 해석한 것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예수를 신이 아니고 하나의 인간으로 인정하면서 이들 해석자들은 예수에게서 가장 정당한 인간의 권리, 자기의 말에는 책임을 지지만 그 말의 거짓 해석자들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권리를 박탈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면서 이들 지식층의 해석자들은 예수가 말하려고 생각치도 않은 것들까지 저에게 둘러씌우고 있는 것이다.

해석자중 이 파의 대표자들은 그중 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르낭을 선두로 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그리스도 자신의 가르친 것과 그의 해석자들이 그에게 둘러씌운 것들은 분간하려고 하지 않고 또 이 가르침을 얼마만큼 이라도 깊이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예수의 출현과 그 교리의 전파의 의미를 예수의 생애의 사건과 그의 시대상황으로부터 이해해 보겠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이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문제는 다음의 한가지로 1800년 전에 어떤 가난한 사람하나가 나타나서 그가 무엇인지 모를 여러 가지 말을 지껄이고 갔다는데 있다.

그는 매를 맞고 사형을 당했다. 그리고 그 이후 자기의 정의를 위해 죽은 의인은 그 밖에도 무수히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현우(賢友) 지무지(知無知)를 망라하여 몆 억의 사람들이 이 사람, 오직 이 사람만이 神 이었다는 생각에서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놀라운 현상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 것인가? 교회 신도들은 말하기를 이것은 예수가 신이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만일 그렇다면 그것으로 만사가 해결된다. 그러나 만일 그가 신이 아니었다면 이 일개 단순한 인간이 모든 사람으로부터 신이라고 인정받게된 사실을 과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파의 학자들은 아무리 이 사람의 생애의 미세한 것을 탐구해 보더라도 (실제 아무 것도 찿아 낸 것은 없지만) 설령 예수의 전 생애를 아주 작은 일에 이르기까지 재현해 보았자 어째서 그가 즉 그란 인간이 그렇게 까지 인류에게 영향을 끼쳤는가 라는 것은 여전히 미해결의 상태로 남겨진다고 하는데는 생각이 미치지 못해서 열심히 이 사람의 생애를 열심히 탐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의 해답은 예수는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느냐 라느니 누가 그를 양육했냐 라는니 하는 것들에 있지 않다. 항차 로마에서 무엇이 있었다느니 백성이 미신에 기울어져 있었다느니 하는데는 있을 리가 없고 그것은 오직 이 사람이 아주 이상한 설교를 했기 때문에 그 때문에 사람들이 모든 사람으로부터 그를 구별해서 그때나 지금이나 그를 신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 한 가지에만 있는 것이다. 생각컨데 여기서 하지 않으면 않될 제일의 것은 그것은 이 사람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힘쓸 것, 즉 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전파하고 있는 그의 가르침의 예의 조잡한 해석이 아니고 그의 가르침 그것을 이해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도무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들 그리스도교의 학식 있는 역사가들은 자기들이 예수가 신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을 도깨비머리라도 잘라 온양 기뻐서 그의 가르침이 신성한 것이 아니니까 따라서 의무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급한 나머지 저들이 그는 단 한 인간에 지나지 않고 그 가르침이 신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면 할수록 오히려 저들이 차지하고 있는 그 문제의 해결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전력을 기울여 그가 다만 인간이라는 것 따라서 그의 가르침은 신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놀라운 오해를 분명히 알아보기 위해서는 르낭의 추종자 하붸의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점으로 보아도 기독교도가 아니다” 라는 것을 확인한 문장이나 예수그리스도는 심히 촌스럽고 어리석고 못난 인간이었다는 것을 양양하게 증명하고 있는 쏘우리의 말을 상기해보면 족하다.


문제는 예수가 신이 아니었으니까 그 가르침이 신성하지 않은 것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고 그가 가톨릭교도도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사람들이 그 가르침의 설교자를 신이라고 인정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으리 만큼 사람들에게 높고 귀하게 여겨지게 된 가르침의 요소가 무엇이냐를 그 완전하고 순수함에서 이해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만일 독자가 교회의 신앙에 따라 교육을 받아왔긴 하나 그의 불 합리를 부인하고 있는 건전한 사상과 양심을 가진 교양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 속한다면(그런 사람들의 마음에 그리스도교 정신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이 남아 있는지 어떤지 혹은 이가 무는게 화가 난다고 외투를 태워버린다고 하는 속담과 같이 그리스도 전체를 해로운 미신이라 생각하느냐 아니냐는 차지하고) 나는 이런 독자에 대해서는 저를 배척하는 것도 저에게 미신이라고 생각되는 것도 다같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 또 그리스도는 그의 가르침에 덧붙여 그리스도교의 이름을 참칭(僭稱)한 예의 추악한  전설에 대해 책임이 있을 리가 없는 것 및 진정 그리스도교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전해진 그리스도 그 가르침만을 즉 그리스도 그 사람의 것으로서 참으로 교훈적 의미를 가진 그의 언행만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주기 바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연구할 때 이런 류의 독자는 반드시 그리스도교는 높은 것과 낮은 것의 혼합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장 엄숙하고 청순한 그리고 충실한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윤리학(倫理學的) 이고 인간의 이성이 오늘날까지 도달한 최고의 교리이며 인간의 모든 활동 정치적 과학적 시적 철학적 활동이 이렇다 의식하지 않으면서 그 범위 안에서만 활동하고있는 교리인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만일 독자가 또 교회의 신앙을 고집해서 외부적 목적 때문이 아니고 내부적 평정을 위해 그를 신앙하고 있다고 하는 교양 있는 사람들의 극소수의 사람들에 속한다면 나는 이러한 독자에 대해서는 이 책 중에서 말하고있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명칭은 같지만 그 내용은 전연 다른 것 이어서 그가 믿고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그에게 있는 문제는 여기서 말한 교리가 그의 신앙과 일치하느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어떠한 교리 모든 경전의 조화로부터 성립된 그 교회적 교리와 단순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어떤 것이 저의 이성과 감정에 보다 더 조화되느냐고 하는 그 한가지에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주기 바라는 바이다. 그에 있어서의 문제는 오직 그가 새로운 교리를 갖기를 바라느냐 의연히 자기의 신앙에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바라느냐의 한가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또한 독자로서 만일 교회의 신앙을 그의 진리로 믿기 때문이 아니고 다만 그 신앙과 설교를 자기를 위해 유리하다고 생각해서 외부적인 고려만으로 존중하고 있는 측에 속해 있다면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저들 사이에는 아무리 많은 동지가 있다하더라도  저들이 아무리 유력하다 하더라도 어떠한 옥좌에 앉아 있더라도 또 아무리 귀한 이름으로 내노라해도 저들은 고발하는 이가 아니고 고발당하는 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런 독자에게는 저들이 증명해 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저들의 할말은 이미 오래 전에 해 버렸다는 것. 만일 저들이 또 증명하려는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다만 저들 각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서로들 부정하고 있는 모든 교회 신앙을 증명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을 이해시켜야 할 것이다.


실제로 저들에게 증명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저들은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저들이 신인 예수의 가르침을 에스라의 가르침 종교회의(宗敎會議) 및 쇼피락트의 가르침들과 같은 수준에 놓고 어리석게도 신의 말씀을 사람의 말을 기본으로 해서 곡해하고 변경하여 범한 성물 모독죄를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저들은 마음속에 있는 모든 광신을 신인 예수에게 떠넘기고 그것을 가르침과 같은 것이라고 한 독신죄(瀆神罪)를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 저들은 저들이 이 세상에 행복을 가져오기 위해서 온 하느님의 가르침을 가려놓고 그 자리에 자기의 성령의 신앙을 갖다놓아 바꿔놓은 것으로 인해 몆 억의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가 저들에게 가져다준 행복을 빼앗고 그로 인해 오게된 사랑과 평화 대신에 세계에 종교분열과 비방과 살인과 모든 죄악을 가져오게 한 기만의 죄를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들 독자들에게는 오직 두 가지의 빠져나갈 길이 있을 뿐이다. 조용히 참회하고 그 허위를 거부하던가 그렇지 않으면 저들이 과거에 그러했고 현재 행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 저들을 적발하는 이를 추방 하든가 이다.

저들이 만일 그 허위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저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하나 나를 추방하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 나는 이제 이 책을 완성함에 이르러 일종의 환희와 아울러 자신의 약함에대해 공포를 가지고 각오를 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