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담방/레프 톨스토이의 도담방

《부활》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다석채플

▪살림문화재단▪ 2013. 4. 1. 05:17

 

* 러시아화가가 그린 톨스토이 http://blog.naver.com/yiwoosong/110029728321

《부활》 대하여

《부활》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재판소의 배심원으로 나온 주인공 네흘류도프 공작은 살인절도 혐의를 받아 재판을 받는 까츄샤를 만난다. 그녀는 청년시절에 자기가 정욕의 대상으로 유린한 순결하고 아름다운 그 까츄샤였던 것이다. 그녀는 임신을 하고 하녀 겸 양녀로 있던 집을 쫓겨나 타락하여 전락해 버린 것이었다. 네흘류도프는 그 타락의 원인이 자기의 무책임한 행동에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이 까츄샤에 대한 양심의 가책과 귀족사회에 속한 자기 생활 태도에 대하여 깊은 의혹을 품게 되고, 동시에 남의 노역으로 포식하게 되는 토지사유제에 대하여 회의를 갖게 된다. 까츄샤의 감형운동을 위하여 감옥에 드나드는 동안에 그는 도움을 바라는 무고한 죄인들을 발견하고 그에 대한 냉혹한 불합리를 목격하게 된다. 그는 일신상의 정리를 위해서 자기 영지에 내려가서 농촌의 궁핍을 눈앞에 보게 되고 또 뻬쩨르부르그에 가서 유력자들을 찾아다니는 동안 귀족 사회의 경박함과 부패를 다시금 인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재판소에서의 인상이 사회 비판과 현대 문명에 대한 규탄으로까지 확대된다. 이 같은 흐름에 따라서 제 1 부에서는 재판소와 감옥을 중심으로서 한 사법 형벌의 세계가 다루어지고, 제 2부에서는 자기 영지의 농민과 빼쩨르부르그 상류사회의 묘사와 죄인호송대의 출발 전후의 사건이 다루어지고, 제3부에서는 시베리아의 죄인호송 여행 이야기가 다루어지고 있다. 결국 네흘류도프라는 한 귀족이 까츄샤라는 한 창녀를 따라 괴로운 시베리아 유형을 자청하여 시베리아의 황막한 벽지에서 끝없이 바라던 용서의 정신으로 영혼의 부활을 발견한다는 내용이다.

작자 자신이 한번도 시베리아의 황야나 감옥을 구경한 일이 없으면서도 눈에 보이듯이 생생하게 표현한 죄인들의 생활, 시몬손을 비롯한 남녀 혁명가들의 생활은 당시의 사회를 아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고 하겠다. 또한 뻔뻔스럽도록 양심이 마비돼 버린 재판관, 오만불손한 부패한 관리, 호화찬란한 껍데기를 쓰고 있으면서도 속은 텅텅 비어 있는 상류사회 귀족들이 경멸적으로 그려진 모습은 이 나라에 혁명이 불가피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제정 말기 압제정치의 옹호자였던 포베노스쩨프가 문교대신 또뽀로프의 가명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기독교의 참 정신을 망각하고 껍데기 의식에만 집착하여 정부의 추악한 주구에 지나지 않았던 러시아 정교회의 공허함이 여지없이 풍자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렇게 볼 때《부활》은 제정 러시아의 부정인 동시에 새로운 러시아의 예언이라고 하겠다. 제정 러시아의 사회생활이 비판되고 해부되어 있을뿐더러, 그 불완전한 사회제도 아래서 신음하고 있던 국민의 이상과 고통과 앙심이 〈세계의 양심〉인 작가의 양심을 통해서 《부활》속에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러시아 문학의 2대 지주인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가리켜, 전자를 지식계급의 대표작가라고 생각한다면, 후자는 러시아 정신의 표현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전자가 러시아의 부조리와 죄악에 대해서 더 많은 사랑으로 속죄하려고 했다면, 후자는 행동으로써 속죄하려고 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부활》에서 토지문제에 큰 비중을 두어 다루고 있다. 그 자신이 큰 영지를 가진 대지주였으며, 국민의 대부분이 농사에 매달려 사는 러시아의 형편으로서 그는 이 문제를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 깊은 연구를 쌓은 그는, 《부활》에서 스펜서의 〈사회평형론>을 읽고 감명을 받은 네흘류도프가 대학 졸업논문을 〈토지사유론〉이란 제목으로 쓰고, 또 자기 자신의 사상을 실증하기 위해서 상속받은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해 준다는 이야기를 넣어 의의를 부여했던 것이다.

원래 톨스토이는 《부활》에서 네흘류도프와 까츄샤를 결혼시켜 시베리아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게 하면서 중요한 국가개혁안을 기안하여 황제에게 진언하는 형식으로 그의 의견을 직접 소개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 기초안이란 《헨리 조지론》에 입각하여 토지를 국유로 하고 조세를 단일제로 한다는 개혁서였다, 결국 이러한 계획은 피했지만 아무튼 톨스토이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당시의 잔인한 러시아의 사회조직에 대하여 예리한 비판을 가했다. 그러나 모든 권력과 전제에 대한 매서운 통매를 가하는 톨스토이의 이러한 불온사상에 대해서 당국에서는 그냥 묵과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부활》은 주간잡지 《니바》에 연재되고 있을 때부터 벌써 수많은 삭제가 가해졌다. 이 때문에 《부활》의 완본이 러시아 안에서 간행되지 못하고 외국에서 간행되어 러시아에 밀수되는 형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가차없는 교회에 대한 비판은 종교성의 기피하는 바가 되어 작자 톨스토이에게 정교회 파문선고(1910년)를 내리게 되었다. 이때 그가 교회에 대한 답변을 통해서 어떠한 권력도 그를 신으로부터 파문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성명으로 응수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톨스토이는 《부활》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수 그 자신은 지금 교회에서 하고 있는 온갖 행위를 다 금했었다. 그리고 사제들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하는 그러한 장황한 말과 모독적인 요술을 금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딴사람을 스승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금했었다. 교회에서는 기도를 금하고 누구나 혼자서 기도하기를 가르쳤고, 교회 자체를 금했을뿐더러, 자기는 교회를 헐기 위해서 온 것이며, 교회에서가 아니라 정신과 진리 속에서 해야 한다고 말했다.……"

톨스토이는 이같이 교회의 일체의 권위를 부정했다. 교회의 의식, 기만에 찬 미사, 교회 안에서의 우상숭배 등 교회 자체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참된 가르침에 어긋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위선과 부정과 불평등을 기조로 한 사회가 강압과 허위에 의해서만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부활》에서 강조하고 있다.

한편 톨스토이 자신은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 당한 후 자신의 신념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나는 정신으로서, 사랑으로서, 만물의 근원으로서 이해되는 신을 믿는다. 나는 신이 내 속에 있으며, 또 내가 신 속에 있음을 믿는다. 나는 신이 내 속에 있으며, 또 내가 신 속에 있음을 믿는다. 나는 신의 의지가 인간 예수의 가르침 속에 알기 쉽게 명백히 표현되고 있다고 믿는 것일 뿐, 예수를 신으로 생각하고 그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을 가장 큰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또 인간의 참된 행복은 신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에 있으며 신의 의지라는 것은 인간이 서로 사랑하고 남을 자기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이런 사상은 《부활》의 에필로그 속에 선명하게 피력되어 있다. 그는 산상의 설교 속에 모든 본질적인 도덕률이 있다고 믿고, 만일 인간이 불화와 위선과 폭력을 버리고 자유로운 협조와 형제애를 소중히 여기려고 애쓰기만 한다면 이 지상에서도 신의 왕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마태오의 복음서》 제5장 중에서 이 해답을 찾았고, '어떠한 악이라도 거기에 항거하지 말라'는 설교를 지상명령으로 믿었다. 그리고 그의 독특한 〈무저항주의〉와 〈무교회주의〉는 러시아 정신생활의 중심이 되었으며 전세계에 새로운 사상적 파문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무저항을 설교하면서도 자기의 세계가 공격당할 때는 성난 사자와 같았다. 그는 어떠한 권위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당시의 제도, 도덕, 생활양식을 비판했다. 바로 여기에 톨스토이의 비극이 있었던 것이다. 즉 그 거부의 효력은 사랑과 자비를 요구하는 호소보다도 훨씬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모든 점에서 완전무결하게 자기의 무저항주의에 철저했다면 그는 이미 인간이랄 수가 없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인간다운 인간, 성자 아닌 거룩한 인간 속에서 우리는 가장 다정한 벗으로서의 인간 톨스토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부활》에서 자기가 사상과 감정의 일면을 대표시키는 인물로서 기꺼이 네흘류도프의 이름을 내세운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미 그의 초기의 작품 《지주의 아침》(1856년)이나 《청년시절》(1857년)에서 드미트리 네흘류도프라는 인물을 보아왔다. 이것은 이미 작자 자신의 주관적 자서전적 인물의 하나로 톨스토이 정신생활의 어느 한 시기를 대표하고 있다. 그런데 톨스토이는 그의 만년에 《부활》이라는 위대한 예술적 경험을 종합함에 있어서, 또다시 드미트리 네흘류도프의 이름을 새로이 등장시켜 1890년대의 자신의 사상을 대표시키고 있다.

네흘류도프에게는 지적 방종이나 정신적인 방황이 거의 없으며, 정신의 균형과 합리성이 그 특징으로 되어 있다. 이 같은 네흘류도프의 특이성은 《부활》에서 보듯이 도덕적 경험의 통제에 꽤 적응되어 있다. 또한 네흘류도프에게는 《청년시절》의 주인공 이르쩨니예프가 《까자흐 사람들》(1863년)의 주인공 올레닌이나 《안나 까레니나》(1877년)의 등장인물 레빈이 겪는 정신적 혼란도 소요도 없다. 네흘류도프의 내면세계는 투명하게 곧잘 우리 앞에 전개되어 있다.

"네흘류도프의 마음속에도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의 자아가 있었다. 그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도 행복이 될 수 있는 자아만을 찾는 정신적인 자아였다. 또 하나는 자기 행복만을 찾고 이를 위해서는 만인의 행복도 희생시키려는 동물적 자아였다." (제1부제14장) 그러나 최초의 몇 장을 읽게 되면, 네흘류도프의 마음속의 동물적 자아가 정신적 자아를 압도한 것은 극히 일시적이었음을 대뜸 알게 된다. 많은 관계에 있어서 규범적 현상이기나 한 것처럼 보이는 동물적 자아는 네흘류도프로서는 변태적 현상이며, 그의 본성의 악신이며, 이기주의적인 발작에 지나지 않는다. 네흘류도프는 본래"도덕적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희생은 고상한 정신적 기쁨을 가져오게 한다."(제1부 제12장)고 생각하고 있는 인간이었다.

이 정신적 자아의 동물적 자아에 대한 승리, 이를테면 그의 갱생, 즉 "부활이 너무나도 빨리, 그리고 힘차게 그의 눈뜬 양심 속에서 이루어져가고 있다." "그렇다, 까츄샤를 만나서 사과하자. 그렇다. 어린애가 하듯이 빌자."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 저를 가르쳐주소서. 나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모든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주소서!"(제1부 제28장). 그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이 눈물은 그의 마음속에서 잠자고 있었던 정신적 존재에 대한 각성이기 때문에 선의 눈물인 것이다. 이 같은 사상은 바로 그의 《인생론》(1887년)에서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