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당/이우송사제칼럼

훨훨 떠나간 시인 박명순

▪살림문화재단▪ 2013. 4. 22. 00:52

 

훨훨 떠나간 시인 박명순

이우송사제칼럼

 

지난 8월 무심히 떠나버린 시인 박명순. 불혹을 살다간 그의 삶은 너무도 모진 삶이었다.

시인이기 이전에 친구였던 한 사람으로서 그가 살아온 내력을 살펴봄으로써 유고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신학공부를 시작한 명순이 성직자가 되지 않고 공무원, 시인의 삶을 살아온 반면 사회과확을 공부한 내가 사제가 된 것도 친구로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묘한 인연이라 하겠다.

 

그는 40여년 전에 해남군 화원면 구림리에서 박근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근호는 보통의 어른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못배운 탓도 있겠지만 동네 생긴 이래 처음으로 여학생을 목포에 유학시킬만큼 자식 가르칠 욕심도 있는 아버지였다. 명순이 화원초등학교 4학년 때 목포중앙초등학교로 전학을 와서 중학교 다니는 누나와 함께 자취생활을 하면서 첫 객지생활이 시작된다. 그런 명순이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길게 설명할 수 없으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진학한 명순의 고교시절 또한 순탄할 리 없었다. 반항과 체념을 거듭하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하는데 보수신앙이라고 하기에는 모호한 열성적이고 신비주의에 가까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게된다. 역시나 그들과도 함께 어울리지 못한 채 주변을 맴돌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정신적 방황을 하게 된다. 당신의 환경으로 볼 때 미치지 않고는 못배길, 어쩌면 예견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이후 서울신학대학에 입학하게 되는데, 그때부터 영어공부와 책 읽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물론 고등학교 시절에도 학과 공부보다는 학과 이외의 책이 손에 들려 있엇지만 그의 방대한 독서는 대학시절에 절정을 이룬다.

그런 명순에게 시련은 계속된다. 신학을 시작한 명순은 어깨가 결려오면서 오른손에 경련이 오기 시작하는데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미세한 상태의 경련이라 할지라도 학업을 중단하면서 안아야 하는 신체적․정신적 고통은 차라리 형벌이었다.

 

질병치료를 끝내고 군에 입대했다. 논산에서 헌병생활을 하던 중 말년에는 또다른 질병을 얻게 되는데 결핵이었다. 마산 통합병원의 요양원에서 치료가 끝나갈 무렵에 아버지의 얼굴을 보게 되는데 처음이자 마지막 면회였다고 한다. 그리고 명순이 군에서 전역한 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다.

 

다시금 명순이 신학대학을 다니지만 결국 3학년을 수료하고 학교를 떠나게 되는데 신학대학을 그만두면서 가지고 있던 신앙마저 포기하게 된다. 신앙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마치 신앙을 버린 자처럼 보였던 게 사실이다. 이미 명순의 유고시에서도 드러났지만 후일에 명순은 다시금 신학교를 그리워하며 소사의 복사꽃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생활이 서서히 안정되기 시작하면서 마음은 서서히 서울신대의 언저리와 교회를 맴돌며 새로운 고뇌를 엿보였다. 명순이 세상을 떠나기 두어달 전에 기독교방송에 출연할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박선생은 언젠가 목사가 되어야 할 운명같다는 아나운서의 질문에도 고개를 내젓거나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금년 겨울 한달 남짓을 함께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한때 동로마의 수도였던 터어키의 이스탄불에서였다. 폐허가 된 소피아 대성당 앞에서 장탄식을 하며 그리스도교회의 몰락을 마음아파했다. 그 뿐만 아니다. 인류문명의 발상지라 불리는 크레타섬에서 함께 밤을 지새울 때는 신의 존재를 확신하면서 익명의 크리스챤으로 살고 싶다는 것이다.

 

명순이 신학대학을 다니면서 중퇴와 복학을 거듭하다 결국 포기하고 나왔지만 그가 포기한 것은 도그마에 감싸인 교회를 포기했을 뿐 신앙을 버리지 않았음을 잘 알 수 있다.

어쨌든 신학교를 떠나온 명순에게 또 다른 방황이 시작된다. 여기저기를 떠돌며 절에도 가고 흑산도를 비롯한 남녘의 섬들도 돌아다닌다. 산사람으로 들사람으로 그리고 도시의 방랑자로 일단의 세월을 보낸다.

 

다시금 광주에 올라와서 새로운 설계를 시작한 것이 공무원 시험준비였다. 군용 슬리핑백과 수험서를 사들고 독서실에 눌러 앉아 있을 때 만난 적이 있다. 이때는 명순에게 연인이 있었다. 외로움을 같이 하고 인생을 함께 설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소냐같은 여인이 있었기에 오늘의 명순이 존재했는지 모른다. 다음 언젠가 만났을 때는 7급으로 출발한 늦깎이 공무원이었다.

 

그 이듬해에는 오누이처럼 친구처럼 4년을 사귀어온 연인 김영숙과 결혼을 하면서 일단의 방황을 끝난다.

명순이 글을 써온지는 오래지 않다. 대학시절에 써놓은 몇편의 글이 있지만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된 것은 1년여밖에 안된다. 살아온 삶이 말해주듯이 명순의 짧은 생애는 갈등과 고뇌 그리고 한으로 응고된 핏덩이를 어느날 서로 토해내고 만 것이다.

 

죽은 동생을 생각하면 뼈에 사무친다는 그의 누나는 이렇게 말한다.

“얽히고 설킨 이야기들, 너와 나만 아는 이야기를 누가 알것소! 막내는 몰라! 지는 글이라도 써서 속이라도 시원하겠지만 글도 못쓰는 내 맘은 누가 알것소!”

 

명순이 어린시절을 더듬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차츰 갈등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을 용서하기 시작했다. 살아온 삶의 흔적을 의심할만큼 천진했던 명순에게 남도인의 기질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힘들게 살아온만큼 세상에 대한 고뇌와 외로웠던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지 1년여만에 100여편에 달하는 주옥같은 시를 토해낸 것이다.

 

또 한가지 특이한 사실을 발견했다. 명순의 죽음이 알려지고서 주변의 친지들은 ‘그가 도청에 다니고 있었구나! 그리고 시도 썼구나! 주변에 그토록 많은 친구와 이웃들이 있었구나!’하고 놀랐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가 뭐하는 사람인 줄도 몰랐던 친지들을 보면서 면순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또다른 성품을 보게 되었다.

그런 반면 명순에게는 남다른 호방함이 있었고 진지함이 있었다. 학창시절에 다하는 학생운동 한번 해보지 못했던 사람이 어떻게 사회문제를 냉청하게 볼 수 있었는지도 의심이 간다. 어떻게 보면 문학적 내용 못지 않게 사회문제나 환경문제 정치적 견해가 탁월했는지는 오히려 주변에서 궁금해할 정도였다.

 

끝으로 명순은 아픔과 고뇌를 말로 드러내지 않고 삭혀서 글로 드러낸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펜으로 쓴 글이 아니다. 검지손가락을 날카롭게 깎아서 피로 쓴 절규의 시였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은 살아도 죽은 자가 있는가 하면 죽어도 산 자가 있다. 명순은 결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은총 가운데 평안히 쉬기를 기도한다.

 

* 아래 고 박명순시인의 시를 두 편 소개한다.

 

아부지 1

 

치깐 뒷거름을 헤치며 뭉실거리는 하이얀 김을

아부지는 온 옷통으로 뒤집어 쓰고 있다.

낑낑대며, 매케한 소매도 붓고

그 얼얼한 냄새에 아주 취해

등짝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솟는다.

쇠똥도 있고 돼지똥도 있고

우리가 마지막 힘으로 밀어낸

덜 삭은 똥덩어리도 버무리면서

아버지는 땡볕에

바랜 삭신을

움씰 거리고 있다.

지릿하고 쾨쾨거리는 냄새를

코를 잡고 막으면

“야 이놈들아 요것은

모두가 땅냄새여

아버지 냄새다이“

옷통에 땀 송글린 채로

소매 묻은 손에 궐련 말아

힘차게 빨아 헤치면

파란 하늘을 더듬던 푸런 연기

콧구멍을 헤엄치며 달아나던

아버지 냄새…

 

 

아버지 2

 

똥장군 진 아부지 바라진 장딴지는

힘살만 불끈거렸다.

뛰뚱거리며

오르막길을 오를 때

아부지 다리는 똥장군 무게에 약간씩 떨리고

삭은 똥냄새를 맡으며

호박구덩이, 마늘밭에

부어줄 똥장군 아부지

가슴 조이며 따른다.

“똥은 다른 짐보다 무겁다이

요놈은 적게 지면

출렁거려 못쓰고

많이 지면 힘든 거여“

“나는 말이다 똥장군 진다만

너는 요모양 요꼴로 똥장군 지면 못쓴다이“

나비가 구릿한 똥장군을 따라 훨훨 날고

아부지 오금이 찔끔거릴 때

미군이 쓰다버린 똥바가지

옆에 들고

아부지 뒤꿈치 따라 가슴 조이며 간다.

장군 아부지 따라 간다.

 

1995. 08

유고시집 "떠도는 흑산도" 친구 박명순을 쓰다

이우송 (신부․대한성공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