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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장학생 정추 선생 "6·25는 명백한 남침" - 백범 김구의 행적

▪살림문화재단▪ 2015. 3. 22. 22:50

북한 장학생 정추 선생 "6·25는 명백한 남침" - 백범 김구의 행적

북한 장학생 정추 선생 "6·25는 명백한 남침"

2012.06.21


북한이 오늘 6.25 전쟁을 또 북침이라고 억지 주장했습니다. 해방 직후 북한으로 건너가(=자진 월북) 김일성 일가를 가까이서 지켜봤던 천재작곡가 정추 선생은 "명백한 남침"이라며 북한의 주장을 일축했습니다. 현대사의 얼마 남지 않은 증인인 정추 선생을 신은서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아흔살의 정추 선생은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은 소련에 접수돼 있었다며 6·25는 명백한 남침이라고 증언했습니다.


[녹취] 정추 / 망명 작곡가 

"최고사령부가 불러서 가보니 전부 소련군이 참모야."


북한 영화의 창시자로 무용가 최승희씨와 작업한 형 정준채 감독을 따라 1946년 월북한 정추 선생은 영화촬영소에서 김일성 일가와 자주 만났다고 합니다.


[녹취] 정추 / 망명 작곡가 

"김일성도 촬영소에 왔다. 김정일은 (친구인) 세르게이에게 맨날 엊어터져서 김정숙이 머라고 머라고 했다."


정추선생은 1952년 장학생으로 선발돼 세계 3대 음악원인 소련 차이코프스키 음악대에 유학합니다. 차이코프스키 직계제자로 불렸는데, 1958년 김일성 우상화에 반대하는 유학생들과 이른바 '10진회'를 결성한 뒤 줄곧 카자흐스탄에서 망명생활을 했습니다.


그러자 유학생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있었습니다.


[녹취] 정추/ 망명 작곡가 

"(평양에 유학생들을) 잠깐 들어오라고 해서 다 죽였다. 30년간 북한은 소련에 유학생을 보내지 않았다." 


1991년에는 북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임시 정부 '구국전선'을 만들어 김일성의 허상도 폭로했습니다.


[녹취] 정추/ 망명 작곡가 

"(가극들을) 김일성이 만들었다는데 다 집체창작이야."


정추 선생은 최근의 종북논란에 시대착오라고 일침을 가합니다.


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6/21/2012062102302.html

 

 

 

월북 작곡가 정추(아마도 가족 사진인듯...)


 

 

                                조선일보에게는 작곡가 정추가 "망명 작곡가"가 되는 모양이군요.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하면, "월북 작곡가"로서 카자흐스탄에 망명한 작곡가라고 해야 하겠지요.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은 소련에 접수돼 있었다


교묘한 ㅈㅅ닐보식 진실왜곡.......ㅉㅉㅉ


위 동영상을 시청해보면 알 수 있지만.....

그리고 위 화면캡쳐 사진에도 나와 있지만

정추씨는 분명히 "북한군 최고사령부에 소련 고문들이  있더라"고 말했지...

"북한군이 소련에 접수 되어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양자의 차이는 실로 엄청나지요.


과거 베트남 전쟁 때 북한도 북베트남에 군사고문단 및 전투조종사들을

파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당시 호지명의 북베트남이 북한군에 의해 접수당해 있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건 그야말로 진실왜곡이자 넌센스적 발상이지요.


즉, 해당 국가 군대의 실질적 지휘권을 과연 누가 가지고 있었느냐의

문제인데.....북한 군사고문단이 비록 북베트남에 파견되어 도움을 주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북베트남군의 실질적 지휘권은 아마도 북베트남 공산당이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마찬가지로.....만일 소련 군사고문단이 북한에 와 있었다고 할지라도

만일 북한군에 대한 실질적 지휘권을 북한당국이 가지고 있었다면

그건 소련이 북한군을 "접수"했다고 표현해서는 안되는 상황이지요.


왜냐면 지휘권을 남의 나라에 빼앗겨 "접수"된 군대는

솔직히 말해서 "군사식민지 꼭두각시 군대"나 마찬가지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인터넷에 떠도는 여러 사료들에 의하면....

당시 북한군대가 소련군의 지휘권 하에 있었던 것 같지 않습니다.


참고로.......


현재 한국군의 전시작전지휘권은 남의 나라 군대인 미군에게

넘어가 있다는 사실.....참으로 통탄스럽고 뼈저린 일입니다.



형 정준채 감독을 따라 1946년 월북한 정추


ㅈㅅ닐보의 시각에서는 아마도 소위 말하는 진짜 "빨갱이" 작곡가일 것인데 말입니다.

남침 주장을 합리화 하려다 보니....이젠 그런 진짜 "빨갱이" 마저 인터뷰해서

이용하고자 하는 모양입니다. ㅉㅉ



1958년 김일성 우상화에 반대하는 유학생들과 이른바 '10진회'를 결성

(평양에 유학생들을) 잠깐 들어오라고 해서 다 죽였다. 

30년간 북한은 소련에 유학생을 보내지 않았다

1991년에는 북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임시 정부 '구국전선'을 만들어


맹한 일반 무지랭이 국민들 또는 ㅈㅅ닐보 독자들은 

위와 같은 정추씨의 일방적 주장을 실제 사실인 양 곧이곧대로 믿겠지만....


그러나 나처럼 비판적 추론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위와 같은 일방적 주장을 있는그대로 곧이곧대로

믿지 않습니다.


우선, 정추씨의 가족사진으로 보이는 화면을 보니

아마도 정추씨는 카자흐스탄 여성과 결혼한 모양이군요.


전에 동독에 유학하다가 남한으로 탈북한 아무개의 말을 듣자면

외국인과의 결혼이 허용되지 않는 북한사회체제 때문에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한으로 탈북했다고 하는 것 같던데....


정추씨의 경우는 어느 경우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북한이 정말로 무려 30년 동안이나 소련에

유학생을 파견하지 않았는지 어떤지는 내가 아직 모르겠고....


만일 그것이 실제 사실이라면....

뭔가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정추씨가 정말로 김일성 독재정치에 반대하여 그런 활동을 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소련의 사주를 받아 김일성 정권 전복 활동을 한다고

북측 당국이 당시에 판단했던 것인지.....우리로서는 현재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원래 한반도를 미소가 분할할 때 남한은 미국이 식미지던 위성국이던

하여튼 맘대로 장악하고, 북한은 소련이 마음대로 장악하여 위성국,

즉, 사실상의 군사식민지로 만들고자 음흉한 계획을 획책하였지요.


그랬는데.....미국은 어쨌든 남한에 성공적으로 계속 주둔할 수 있게 된데 반해

소련은 북한에서 쫒겨나는 신세가 되어 버렸지요. 그래서 소련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니....당시 소련이 북한에 대해 어떤 공작을 벌였을 것인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위 사건에 대해서도 정추씨의 일방적 증언에만 의존하여

그 진짜 진실을 판단할 수 없는 일임은 분명하지요.



최근의 종북논란에 시대착오


반북적이 된 정추씨가.....현재 남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북" 타령이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비판한 모양이군요. 많이 웃기네요.


암튼, 위 찌라시 기사를 계기로.....북한에서의 소련군 고문단에 대해

갑자기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진을 한번 검색해 보았는데....


그 과정에 아래와 같은 자료들이 딸려 나오더군요.


 

소련군 군사고문단이 김일성의 북한 입국과 함께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런데.....당시 소련군 군사고문단이...북한군 지휘권 조차도 장악했던 것일까요?

아마도 그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위 사진 검색과정에서......김구 선생의 

아래와 같은 행적을 새로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하여튼, 수구꼴통들은 온갖 자료들을 모으는데 아주 열심인 모양입니다.

덕분에 우리도 편하게 그런 자료들을 구경해 볼 수 있게 되는군요.)

 

[스크랩] 김구와 김규식이 북한에 가서 협의서명한 4.30공동성명| 시사토론 ●자유게시판

네오콘|조회 59|추천 0|2008.01.17. 13:35


▲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의 공동성명서(1948. 4. 30)

 

남조선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연석회의에 뒤이어 평양시에서 4월 30일 남북조선정당사회단체지도자들이 헙의회가 진행되었다. 이 협의회에서는 상정된 문제를 충분히 토의할 결과 다음과 같이 제문제에 대하여 협의가 성립되었다.

 

1.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즉시에 철거하는 것은 우리 조국에서 조성된 곤란한 상태하에서 조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정당하고 유일한 방법이다. 미국은 이 정당한 제의를 수락하고 자기 군대를 남조선에서 철퇴 시킴으로써 조선 독립을 실지로 원조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제가 우리 조국에서 추축된 이후 우리 조선인민은 자력으로 외국의 간섭 없이 우리 문제를 우리 민족의 힘으로 능히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성장되었으며, 우리 조국에는 이것을 해결하기에 충분한 간부들이 다수 있다.

 

2. 남북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은 우리 강토에서 외국 군대가 철퇴한 후에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또 그들은 통일에 대한 조선 인민의 지망에 배치하는 여하한 무질서의 발생도 용허하지 않을 것이다. 남북 정당사회단체들 간에 전취 약속은 우리 조국의 완전한 질서를 확보하는 튼튼한 담보이다.

 

3. 외국 군대가 철퇴한 이후 하기 제 정당 단체들은 공동 명의로서 전조선 정치 회의를 소집하여 조선 인민의 각층 각계를 대표하는 민주주의임시정부가 즉시 수립될 것이며 국가의 일체 정권은 정치, 경제, 문화생활의 일체 책임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정부는 그 첫 과업으로 일반적 직접적 평등적 비밀 투표로서 통일적 조선 입법 기관을 선거할 것이며, 선거된 입법 기관은 조선 헌법을 제정하여 통일적 민주 정부를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4. 상기 사실에 의거하여 본 성명서에 서명한 제 정당 사회 단체들은 남조선 단독 선거의 결과를 결코 승인하지 않을 것이다. 또 이러한 선거로서 수립되는 단독 정부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며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1948년 4월 30일

정당 사회 단체명... 생략

 

 

▲ 전조선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가한 정당사회단체(남북조선주둔군사령관에게 제출한 요청서와 4 · 30 공동성명에 서명한 서열 56개정당사회단체(정당 16, 단체 40)

 

1. 북조선노동당                                                 9. 북조선농민동맹

2. 남조선노동당                                                 10. 근로인민당

3. 북조선민주당                                                 11. 북조선민주청년동맹

4. 한국독립당                                                    12. 신 진 당

5. 민족자주연맹                                                 13. 사회민주당


http://cafe.daum.net/issue21/3Fdk/2686

 


김구가 걸어간 길 | 역사

쭌이와 민 2010.03.23


남침의 초대장---주한미군 철수 찬성


독립운동가 金九, 金奎植은 1948년 북한으로 올라가 김일성과 회담하고 4월30일에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성명서는 金九, 金奎植의 역사적 평가에 있어서 치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두 사람이 철저하게 김일성에게 이용당하여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려 하였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성명서는 5월10일로 예정된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기 위하여 회의가 열렸음을 분명히 한 뒤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즉시 철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소련은 북한과 接境하고 있어 군대를 철수하더라도 언제든지 개입할 수 있지만 미군은 한번 철수하면 한국이 남침을 당하더라도 제때 파병할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이 명백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兩金씨는 공산주의자들의 주한미군 철수론에 동조한 것이다. 


  이 성명서는 또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들은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철퇴한 후에 內戰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라고 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철수한 1년 뒤 북한군의 南侵이 있었다. 주한미군 철수는 南侵의 초대장이었다. 그럼에도 金九, 金奎植은 외국군대가 철수한 후에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확언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민들을 속인 셈이다. 지도자가 속는 것은 결국 국민들을 속이는 행위이다. 


이승만세력 뺀 남북공산 연합정부 동의

 

  이 성명서는 또 ‘외국군대가 철퇴한 이후 下記 諸정당단체들은 공동명의로써 全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선거를 통하여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여야 할 것’이라고 했다. 통일정부 수립을 주도할 ‘下記 諸정당단체들’은 북조선노동당, 남조선노동당, 한국독립당, 민족자주연맹, 근로인민당, 북조선농민동맹 등 56개 단체였다. 金九, 金奎植 세력과 남북한 좌익단체 연합체가 건국을 주도한다는 말이다. 즉 李承晩 세력 등 자유진영을 제외하고, 남북한 공산세력이 뭉쳐 공산국가를 만드는 데 김구, 김규식이 가담한다는 뜻이었다. 여기서도 金九, 金奎植은 철저히 이용당하였다. 


  梁東安 교수는 이렇게 평하였다. 


  <이것은 美蘇공위에서 소련이 주장해온 것, 즉 남한의 우익진영을 배제하고 통일임시정부를 구성하자는 주장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다. 단지 美蘇공위 때는 소련이 배제하려 했던 김구와 김규식 및 그들의 추종정당과 단체들을 추가로 참여시킨 점이 다를 뿐이다. 김구, 김규식 등이 이제는 소련의 제안을 지지했기 때문에 공산당지배정부 수립에 참여할 수 있는 ‘혜택’을 받게 된 것이다. 모든 일이 성명의 내용대로 진행되어서 공산당이 지배하는 정권이 수립되면 그 다음에 생길 통일정부가 소련이 원하는 공산정권이 될 것은 너무나도 自明한 것이었다. 요컨대 4.30 성명도 공산당의 한반도 지배를 위한 소련의 정책을 뒷받침해주는 결과를 초래할 문건이었다>

 

"북조선은 새로 잘되는 집안...남쪽은 망하는 집안"


  金奎植은 평양에 가 있을 때 김일성이 주최한 초대연에서 이렇게 연설하였다. 

  <북조선으로 오니 북조선은 살 토대가 있다. 남쪽은 공장이 없고 미국 차관만 가져오고 여기 공장은 일하고 있으며 남쪽은 망하는 집안 같고 여기는 새로 잘 되는 집안 같다>


  그는 서울로 돌아온 다음날(5월6일) 외신기자들과 회견하면서 비슷한 이야기를 되풀이하였다. 


  <남조선에는 도처에 부패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북조선의 공장은 남조선의 공장보다도 충실한 생산을 하고 있다. 소련인은 그다지 표면에 나서지 않는데 남조선 미국인은 너무나 간섭이 심하여 현재 군정부에는 부패가 심하다>


  金九, 金奎植은 5월6일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에서 두 사람은, 4.30 공동성명이 통일조국을 건설할 방향을 명시하는 것이라고 自讚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북조선 당국자도 單政은 절대 수립하지 아니 하겠다고 확언했다>


  4.30 성명대로 통일조국이 건설되면 자유진영이 배제된 공산국가가 될 것이다. 金奎植, 金九는 사실상 공산국가 건설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힌 셈이다. 


  <북조선 당국자도 單政은 절대 수립하지 아니 하겠다고 확언했다>는 말은 완전히 거짓말이다. 당시 이미 북한엔 ‘인민위원회’라는 이름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 ‘북조선 당국자’란 말 자체가 정부를 전제로 한다. 남한엔 ‘남조선 당국자’로 불릴 만한 조직도 사람도 없었다. 美軍政이 있을 뿐이었다. 


김구의 역할 재연김대중 연방제


  4.30 성명은, 2000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김정일과 만나 발표한 6.15 선언이 연합제-연방제 혼합방식의 反헌법적 통일방안을 제시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김구, 김규식이 했던 역할과 비슷한 役을 김대중이 再演했다. 김구, 김규식이 김일성의 대변자 비슷한 말을 한 것이나 김대중이 김정일의 대변자 같은 말을 지금껏 계속하고 있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두 김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10 선거는 투표율 90% 이상의 참여로 공정하게 치러졌다. 김구는 그러나 “선거가 부자유한 분위기 속에서 실시되었다”는 논평을 냈다. 유엔감시기구도 공정하다고 평한 선거를 惡評한 것이다. 양동안 교수는 이렇게 논평하였다.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김구와 김규식은 대한민국 건국을 훼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제헌국회가 開院되고 국회 개원식에서 이승만이 제헌국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하였다고 말한 데 대하여 “현재 국회의 형태로서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아무 조건도 없다”라고 말하였다. 김구와 김규식은 6월7일 보다 조직적으로 5.10 선거 무효화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키로 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김구, 김규식은 나중엔 북한에 대하여도 정부 수립 움직임을 비판하여 兩非論을 보이기도 하였다. 梁東安 교수는 <그러나 그들의 분단정권 반대는 남한의 대한민국에만 타격을 줄 뿐 북한의 단독정권에는 타격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이 남한에 거주하고 있었고, 남한의 정치체제가 개방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고 평하였다. 


이승만 "북한에 김일성정권 들어섰으니 우리도 자유민주국가 세우자"

 

  李承晩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 박사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북한은 소련군에 의하여 공산화되어 이미 김일성 정권이 들어섰으니 남한의 갈 길은 북에 조직된 공산군의 武力 앞에 굴복하여 공산화를 감수하든지 아니면 정통성을 가진 자유민주 국가를 세워서 반공으로 국가발전을 도모해 자유통일을 진행하든지 두 가지가 있었다. 여기에 제3의 길이란 한국엔 없었다. 金九와 金奎植, 兩金은 북한에 가서 이미 양성된 공산군의 실태를 보고 남한에 정부를 수립해도 곧 붉은 군대가 쳐내려와 인민공화국이 될 터이니 대한민국을 建國할 필요가 없다고, 끝까지 소련과 북한공산정권의 편을 들어 정부수립을 반대하다가 마침내 해방정국의 迷兒가 되고 말았다(*아래 대화록 참조)>


  그는 또 이렇게 설명하였다.


  <金九와 金奎植은 북의 공산집단이 머지않아 남침해 올 것을 알고 돌아온 것이다. 그러면서 두 金은 그럴 일은 없다고 거짓성명을 하였다. 정부를 수립해 봐야 곧 없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그들의 강력한 建國반대였다. 그대로 있다가 공산화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민족통일이었다. 金九는 西山大師의 漢詩 구절,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말지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를 愛誦(애송)하였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눈길을 金九는 옳게 걸어갔는가? 과연 김구를 따르는 용공통일의 길이 옳았던 것인가? 반세기 이상을 신문과 방송이 김구 찬양 일색인데 과연 그 추종자들이 우리 사회를 이롭게 하고 있는가 말이다. 김구는 저항민족주의자일 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간판을 유지하였던 공로는 1945년까지 혁혁하였다. 역사의 진실을 가리고 한국사회가 지금도 金九예찬론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金九-劉馭萬 대화 비망록 


 유엔한국위원회의 중국(=장개석의 대만 중국) 대표인 劉馭萬(유어만) 公使는 1948년 7월11일 오전 11시 金九를 자택으로 방문,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劉 공사는 대화의 내용을 英文으로 요약하여 국회의장 李承晩에게 전달하였다. 이 문서는 梨花莊(이화장)에 보존되어 있다. 이 대화는 대한민국 建國에 반대하는 일에 공산주의자들과 손잡은 金九의 심리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이다. 




김구와 중국공사 유어만 비밀대화록 ⓒ 뉴데일리

 

 劉馭萬: 나는 선생님의 어떤 면보다도 정직한 분이란 점에서 존경하여 왔습니다. 나도 비록 외교관이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서울에 부임하게 된 것은 나로선 최초의 외교관 임무입니다. 오늘 선생님을 화나게 만들지 모르지만 정직한 사람과 정직한 사람 사이의 대화를 하기 위하여 방문한 것입니다. 

 

金九: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떡일 뿐)

 

 劉: 유엔 위원단의 한 사람으로 上海를 방문하고 돌아온 후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며느님과 아드님께서 중국에 체류중인 것으로 알고 있고 엄씨도 선생님과 같이 살고 있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어 나를 통역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래서 자주 여기에 올 수가 없었습니다. 

 

金: 귀하가 말한 그 사람들이 여기에 없어도 귀하를 위하여 통역할 사람은 있어요. 

 

 劉: 나는 오철성이 보내는 편지를 갖고 있는데 공사관에 두고 왔습니다. 중국 외무장관 왕시굴도 직접 편지를 보낼 것입니다. 蔣介石 총통께서도 편지를 직접 쓰려고 하였는데, 외무장관이 오늘 대화에 대한 보고를 받고 나서 쓰시도록 건의를 드렸습니다. 저는 이 세 통의 편지가 같은 메시지를 선생께 전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즉, 李 박사와 협력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李 박사와 선생과 金奎植 박사가 남한 정권을 수호하는 데 협조해주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런 중국 格言이 있습니다. “집안에서 형제들이 다툴 순 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自招해선 안된다.”  선생들 사이에서 이견이 많다고 해도 소련이 지배하는 세계 공산주의라는 공통의 위협 앞에선 다 형제들입니다. 나는 선생의 아들 김신을 나의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듣기 거북하시더라도 아들이 자신의 아버님에게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이라고 생각 해 주십시오. 


만약 선생께서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가담하실 생각이라면, 저는 그렇게는 믿지 않습니다만, 제발 그렇다고 말씀하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정치적 敵手로서 서로 헤어지고 다시는 만나지 않으면 됩니다. 


金: (심각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나는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어요. 사실은 내가 마음에 준비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내 최측근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라 당신에게 털어놓는다는 게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로만 말씀드리지요. 머지않은 장래에 모든 것을 밝히겠습니다. 귀하를 포함한 내 친구들이 좋아하든 않든 간에. 귀하는 기다려주실거죠?

 

 劉: 지금 생각하고 계시는 것을 말씀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오히려 말씀 하시지 않도록 권하고 싶어요. 저에게 부과된 메시지 전달은 끝났으므로 허락해주신다면 선생님께서 고민하고 계시는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실 때 도움이 될 만한 저의 개인적 생각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金: (찬성은 아니지만 예의상 승낙한다는 표정을 지음)

 

 劉: 내가 李 박사에게 선생과의 협조 가능성을 타진할 때마다 그분의 대답은 변함없이 “만약 그가 나와 함께 일할 생각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에게 다가가 환영하겠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나는 李 박사께서 부통령직을 선생에게 제의하실 생각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갖고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나는 귀하께서 그런 자리를 초월하신 분이라 그런 점에 대하여 제가 언급하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선생님께선, “부통령 같은 것은 집어치워! 어떤 공직도 맡지 않겠어!”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선생께서 李 박사와 협력하시고 싶다면 새롭게 구성되는 정부에서 그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적어도, 많은 사람들과 당황하고 있는 선생의 지지자들에게 右翼진영의 단결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께선 애국활동의 찬란한 기록을 갖고 계십니다. 선생께서 최근 평양에서 열린 소위 남북한 지도자 협의회에 관계하신 일은 그런 기록에 타격이 되었습니다. 


북중국에서 조선인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포로가 되면, 목숨이 아까워서 그러겠지만, “우리는 김구 지지자들입니다. 그분이 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아시시 않습니까”라고 말하는 일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선생의 모든 동지들은 선생의 찬란한 과거 업적이 이런 식으로 허물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金: 나도 알 알고 있는 일입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나를 자신들의 협력자로 간주합니다. 내가 귀하께 이야기했듯이, 모든 사람들이 내 입장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남한 정부에 참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귀하도 알다시피 李 박사는 한민당의 포로가 되어 , 말하자면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해야 하는 신세입니다. 내가 만약 정부로 들어가면 피할 수 없는 갈등이 일어나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내가 바깥에 머무는 게 낫습니다. 나는 그 더러운 정치싸움에 연관되는 게 싫습니다

 

 劉: 선생님의 말씀은 오히려 바깥에서 계시는 것보다는 정부에 들어가셔야 한다는 논리를 갖게 합니다. 李 박사께서는 한때 선생님의 동지이셨던 신익희, 이범석, 이청천씨 같은 분들을 麾下(휘하)에 두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참여하셔서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시지 않으신다면 모든 게 한민당 뜻대로 되고 말 것입니다. 李 박사께서 國益을 위하여 그렇게 하고 싶으셔도 혼자서 그 정당을 제어하는 것이 어려울 것입니다. 선생께서 정부에 들어가셔서 그들을 견제하면 李 박사를 강화시켜줄 것이고 만약 버리신다면 李 박사를 한민당의 수중에 떨어지게 할 것인데, 선생께서도 한민당이 국가의 운명을 견제 없이 함부로 농단하여선 안 된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金: (정치싸움 등 이미 말한 것을 되풀이 한 다음) 더구나 나는 한 특정 정당의 비방전에 의하여 反美주의자로 광범위하게 색칠당하였습니다. 나는 중국과 미국만이 한국에 도움이 되는 이웃나라라고 생각하는 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건설하는 데는 미국의 도움이 필요한데 내가 정부를 구성할 때 그 안에 있으면 미국인의 동정심에 찬물을 끼얹어 국가이익을 해치게 될 것입니다. 

 

 劉: 선생님 말씀은 틀렸습니다. 李 박사도 한때 반미주의자로 惡評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미국 사람들이 태도를 바꿔 그를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결국 한국인의 고유한 일입니다. 한국에 있는 미국인이 선생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들은 결국 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 장군도 명예롭게, 창피를 당하지 않고 소환될 것입니다. 가도 괜찮습니다. 귀측이 단결하고 유엔이 전폭적으로 지원하게 되면 미국측이 떠나가는 일도 앞당기게 될 것입니다. 

 

金: 귀하는 중국이 한국을 인정하는 첫 번째 나라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까?

 

 劉: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입장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중국, 미국, 영국이 최대한 빠른 시일내에 그렇게 할 것이라는 점을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金: 미국이 (지금 입장을) 물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劉: 불가능합니다. 왜냐 하면 미국인들이 한국의 독립을 확고하게 지지하니까요. 


김구 "북한에 가보니 단시간에 여기 내려와 인민공화국 선포 될 것입니다"


 金: 내가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지도자 회의에 참석한 한 가지 동기는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북한군의 확장을 3년간 중단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 남한에서 무슨 노력을 하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맞서는 군대를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주-북한군)을 南進하는 데 써 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劉: 러시아가 전쟁을 각오하지 않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인데, 그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과거에 러시아는 두 번 국제적인 압력에 굴복한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한국으로부터, 또 한 번은 요동반도로부터 물러났습니다. 유엔을 통하여 세계 여론이 일어나면 러시아는 그 충격 앞에서 다시 굴복할 것입니다. 여기서 만들려고 하는 정부가, 북한정권이 러시아의 꼭두각시인 것처럼 미국의 꼭두각시라면 나는 선생께서 어느 쪽과도 협력하지 않으려 하는 입장을 쉽게 이해할 것입니다. 유엔의 지지 덕분에 한국 정부는 主權국가가 될 것이고, 통일을 성취할 基地가 될 것입니다. 선생께서 한국이 약하게 보일수록 선생께선 조건 없이 (建國을 위하여) 투신하셔야 합니다(끝). 

 

 

 金九-劉 공사의 대화를 읽으면 金九가 보인 행동의 모순점이 드러난다. 金九는 "러시아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주-북한군)을 南進하는 데 써 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즉,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군의 남침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평양에서 발표한 4.30 성명서 중 "외군이 철수해도 內戰은 없다"는 대목은 완전한 속임수가 된다. 

 

 金九는 북한군이 반드시 남침할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할 유일한 수단은 주한미군의 장기 주둔이었다. 金九는 이 안전판의 제거를 요구한 것이 된다. 즉, 북한군의 남침에 대한 장애물을 치우는 일을 도왔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서울주재 중화민국 공사이던 劉馭萬은 장개석 총통의 뜻을 받들어 이승만, 김구, 김규식이 화합, 대한민국 건국에 협조하도록 막후에서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일행이 1948년 1월8일에 서울에 왔다. 유어만(劉馭萬: Liu Yu-man)은 이승만, 김규식, 그리고 김구가 한 자리에 모이게 하기 위해 점심에 초대하였다. 그것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위원들이 “한국의 지도자들이 장래성이 없이 분열되어 있고 서로 마주 보지도 않을 정도라는 인상을 가지고 돌아가는” 불행한 일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정창인)>.  


 劉馭萬은 장개석 정부가 대만으로 물러난 뒤 유엔주재 중화민국 대표부 처장, 駐韓 대사 등을 역임, 1966년에 별세하였다. 


http://blog.daum.net/khj0204000/16648854

 

 

 

 




위 중국대사와 김구 선생의 대화가 상당히 흥미롭군요.


그런데 당시 시대상황을 정확히 알고 위 대화를 읽어야 할 것입니다.


김구 선생의 상해임정은 사실 중국 장개석의 경제적 지원하에

겨우 유지할 수 있었으므로 장개석의 부탁들을 거절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장개석의 부탁을 거절하는군요.


그렇다면 당시 대만으로 쫒겨가기 전의 중국 장개석 정권의 국제정치적

위상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당시 장개석 중국은 미국, 러시아에 맞먹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였습니다.

즉, 적어도 국제정치적으로는 막강한 위세를 가지고 있었지요.


그런데 당시 중국이 보는 입장에서는 아마도 남북한에 각각 미국, 소련의

꼭두각시 식민정권들이 들어서는 것을 막고자 혈안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중국의 이익에 반하는 짓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당시 중국 장개석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남북한 모두에 자주독립정권이 출범되도록 해두고 나중에

중국이 영향력을 행사할 꿍꿍이 속이 있지 않았을까....추측되는군요.


장개석 중국의 그런 음흉한 시도는 당시 막강한 국제정치적 파워를

가지고 있던 미국의 의도를 누를 수 없었을 것임은 자명한 이치이지요.


결국 모든 것은 미국의 의도대로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암튼, 위 수구꼴통의 해설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

김대중의 6.15 선언은 바로 김구 선생의 재연이라고 보는 점입니다.


사실 나 자신도 이미 오래전부터 그 점을 지적해 온 터이지요.


즉, 김대중이야말로 김구 선생의 정치철학을 가장 충실하게

물려받아 실행한 정치인이라고 말입니다.

[이상 퍼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