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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추 EBS '다큐프라임' / 남한 국민 23년… 북한 인민 13년… 무국적자 17년… 옛 소련 공민 16년

▪살림문화재단▪ 2015. 3. 22. 23:19

망명 작곡가 정추의 파란만장한 삶 조명

출처 세계일보 | 입력 2010.01.11 21:29 | 수정 2010.01.11 23:53

 

정추 EBS '다큐프라임'

2009년 3월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한인 작곡가 정추(85)의 탄생 기념 음악회가 열렸다. 세계적인 소설가 아나톨리 킴과 유명인사들이 참석한 이 음악회는 교향곡 '내 조국'이 연주되면서 감동에 휩싸인다. '내 조국'은 정추가 통일된 조국에 바치는 유언으로 만든 곡이다. 남한에서는 월북자로, 북한에서는 반동분자로 찍혀 망명 생활을 하고 있지만 정추의 조국에 대한 짝사랑은 반세기 넘도록 계속되고 있다.

EBS '다큐프라임'은 2010년 한·러수교 2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해 12일 오후 9시50분 분단된 조국이 낳은 비운의 천재 음악가 정추의 기구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추적했다.


◇구소비에트 연방 출신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한국인 작곡가 정추. 반세기 넘도록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이역만리 타국에서 인생의 황혼을 맞고 있는 처지이지만 그의 음악에는 민족애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 담겨 있다.
EBS 제공

전남 광주 출생인 정추는 고등학교 시절 일본인 교관과의 다툼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월북해 평양음대 교수로 지내다 구소련으로 다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반체제 시위를 주동했다고 몰려 소련으로 망명했고, 소련은 그를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추방했다.

정추는 모스크바 음대를 사상 유례없는 5점 만점으로 수석 졸업했고, 민족음악파의 거두인 차이코프스키의 4대 직계제자로 발탁될 만큼 천재적인 음악가였다. 1961년 가가린 첫 우주선 발사 현장에서 정추의 곡이 연주됐으며, 카자흐스탄 음악 교과서에 60여곡, 피아노 교과서에 20여곡이 수록되어 있다.

비록 정추의 삶은 남한에서는 월북자로 북한에서는 반동분자로 찍혀 정처 없는 유랑의 연속이었지만 그의 음악에는 한국적인 정서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한국의 전통적인 5음계에 바탕을 둔 그의 음악은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절절하게 담고 있다. 카자흐스탄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지금도 그가 작곡한 모든 노래는 반드시 한국어로 부르게 한다. 프로그램은 질곡의 역사 속에서 걸어온 정추의 비극적 생과 그의 음악, 망명자로서 겪었던 절망, 조국애 등을 통해 '조국'이 어떤 의미인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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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국민 23년… 북한 인민 13년… 무국적자 17년… 옛 소련 공민 16년

가수 주현미의 노래만 들으면 가슴이 시렸다는 천재 작곡가 정추(90). 카자흐스탄에서 고국을 그리던 선생은 지난 13일 옛 수도 알마티 시내의 식당으로 점심 식사를 하러 가던 중 사망했다. ‘검은머리 차이콥스키’라고 불리던 정추의 음악은 카자흐 교과서에만 60여곡이 실렸다. 그는 러시아 음악 사전에 차이콥스키(1840∼1893)의 4대 제자로 기록돼 있다. 

음악적 업적은 찬란했지만 그는 평생 망명자였다. 정추의 인생은 한국사의 질곡과 그대로 닮아 있다. 일제 말기인 1940년대부터 23년은 남한 국민, 13년은 북한 인민, 17년은 무국적자, 16년은 옛 소련 공민으로 살았다. 그는 늘 자신의 인생에서 이상을 좇았다. 이상이 좌절될 때 또다시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는 늘 망명자, 이방인, 경계인이었다. 남한과 북한 모두에서 잊혀지거나 환영받지 못했다. 월북 행위와 김일성 우상화에 반대해 북한에서 쫓겨난 이력은 꼬리표처럼 달렸다. 

1944년 니혼대 음악학과를 졸업한 그는 2년 뒤 형인 정춘재 영화감독을 따라 월북했다. 평양음악대학교 교수로 재직한 그는 1953년 당시 사회주의 종주국이면서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던 러시아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다. 차이콥스키음대 졸업 작품인 ‘내 조국’으로 유례없이 심사위원 만점을 받을 정도로 재능을 인정받고 옛 소련이 세계 최초 유인 우주선을 발사할 당시 축하 음악회에 초대받아 한국 서정이 가득한 ‘뗏목의 노래’를 연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1957년 모스크바에서 벌인 김일성 우상화 반대시위 때문에 그의 인생은 다시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당시 그는 사회주의자였지만 개인숭배, 비밀경찰 제도, 극단적 언론 통제가 횡행한 스탈린주의는 옳지 않다고 여겼다. 1953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하고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집권하면서 소련에선 스탈린 격하운동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김일성 우상화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모스크바 유학생 사이에서 폭넓게 확산했다. 그는 운동을 주도했다. 북한 당국은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1958년 무국적자가 된다. 북한 당국은 소련 정부에 정추의 송환을 요구했으나 소련은 대신 지금의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유배를 보냈다. 옛 소련은 17년 후에야 그에게 공민증을 발급했다. 

조국은 그를 내쳤지만 정추의 음악 300여곡엔 민족혼이 서려 있다. 그는 1958년부터 녹음기를 메고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가요와 민요를 채록했다. 당시 6㎏ 무게의 녹음기를 든 중년의 정추는 고려인들이 밀집한 카라탈, 타퀴켄트, 크즐오르다 등에 자리한 집단농장이나 국영기업소를 헤매며 1000여곡을 채록했다.

“9월 26일 아침 나는 알마아따 자동차정류소에서 바까나스행 차를 탔다. 무거운 녹음기를 걸머진 나의 차림새는 먼 길을 떠나는 지질 탐사대원이나 고고학자를 연상시킨다. 그들이 지층을 읽으며 광석도 찾고 땅 속에 묻혀버린 유물을 찾아낸다면 나는 심금을 울리는 세기의 목소리를 더듬어 사라져가는 인민음악을 발굴 보존하자는 것이다. 

나는 여러 생각에 잠겨 시간의 흐름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어느새 차는 일리강 역에 자리 잡은 까리가치 촌을 훨씬 지났고 새로운 주택들이 오른편에 보이기 시작했다. 1년 동안에 벌써 백여 호나 들어선 이곳이 바로 ‘박빡띄’란 새마을이다. 박빡띄는 카자흐 말로 민들레 벌이라는 뜻이다… 벼 가을 준비가 분망한 때임에도 불구하고 김학룡 동무는 그날 저녁에 김블라지마르 동무네 집에서 노래 잘하는 사람을 모아 놓았다. ‘새파란 풀밭에 이슬은 반짝이고…’ 고운 목소리로 김웨라가 ‘양치는 처녀’를 불렀다.”

그는 1968년 6월 18일 ‘녹음기를 메고서 조선 민요를 찾아서’라는 글에서 민요 탐사 여행을 이렇게 기록했다. 채보한 음악을 ‘소련의 고려가요’라는 이름으로 집대성해 세상에 내놓았고 스탈린에 의한 고려인 강제이주의 슬픈 역사를 담은 교향곡 ‘1937년 9월 11일 스탈린’을 작곡했다. 5악장으로 구성된 곡은 ‘삼엄한 명령, 낙망, 모국 추억, 울분, 슬픈 울음’이라는 각각의 제목을 악장마다 갖고 있다.

그의 음악적 열정은 늘 식지 않았다. 정추는 카자흐 국립여자대학에 음악학부를 설립하고 카자흐 민요를 합창곡과 피아노 연주곡으로 편곡해 음악 교과서에 수록하는 등 공훈예술인 칭호를 수여받았다. 카자흐의 음악 평론가 표트르 아라빈은 “풍부하고 깊이 있는 한국 음악을 소개하고 한민족의 전통음악을 바탕으로 이곳에서 새로운 음악 세계를 창조해냈다”고 정추의 작품을 평한다. 

그는 가끔 한국 땅을 밟았다. 2011년 12월 17일 모교인 서울 양정고가 주최한 양정음악제에 참석한 당시 한 일간지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훗날 내가 세상에 없더라도 작곡했던 ‘내 조국’이 통일된 조국의 애국가로 불리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어.” 그는 2013년 6월 13일 타국에서 사망했고, 통일은 여태 오지 않았다.

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