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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유대교와 예수

▪살림문화재단▪ 2015. 4. 3. 06:15

 

[신간] 유대교와 예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셈어 수메르어 등 고대 근동어를 전공한 조철수 박사가 유다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예수의 가르침과 유다교의 가르침을 비교 분석한 책이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유다교'라고 불리는 종교가 체계를 갖춘 것은 유다교의 성서 해석서인 '미드라쉬'와 '탈무드'가 성립한 서기 5세기경의 일이다. 흔히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리스도교가 유다교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정확한 이해가 아니다. 초기 교회와 초기 유다교는 서로 비슷한 시기에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길을 걸으며 발전했기 때문이다.
예수가 유다교의 어떤 점을 개혁하고 또 어떤 새로운 메시지를 전했는가를 정확하게 밝히는 연구서가 거의 없는 실정에서 이 책은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예컨대 유다교의 문헌 가운데 하나인 '새 계약의 규례'는 멍청이 미친 사람 소경 절름발이 귀머거리 어린 아이 등은 토라(모세의 율법)를 배울 수가 없어서 토라의 법규를 지킬 수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성전에 들어올 수 없다고 못박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을 새 복음의 공동체에 들어오게 하여 병을 고치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엄격한 유다교 율법주의에 반기를 든 혁신적인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성서와 함께'에 지난 99년부터 2년 가까이 연재한 '랍비들은 성서를 어떻게 풀이했을까'가 기초가 됐다. 신학 전공자뿐만 아니라 유다민족에 대해 좀더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들의 갈증을 충분히 해소해주고도 남을 만한 본격적인 유다교 연구서다.(길 14000원)

 

 

 

 

 

 

 

                            유대교와 예수


 조철수 저 /


[서평] 성경만 읽어서는 성경을 모른다 - 조우석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인문학적 호기심이 있는 독자라면 흥미롭게 접근할 만한 책이 《유대교와 예수》이다.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책의 가치는 따로 있다. 기존 고급종교의 틀과 구분을 벗어나 새로운 영성靈性을 모색하고 있는 지구촌의 변화 상황과 또 달리 문화 격차가 존재하는 한국 특유의 종교사회학적 상황 때문에 더욱 폭발적인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귀한 콘텐츠가 무언가 효과적인 본문 편집, 책의 만듦새 부족 때문에 충분하게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뜨이고, 그래서 다소 지루하게 읽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신학이나 종교학 영역에서 탄생한 멋진 읽을거리라서 반가운 마음이다.


 

《유대교와 예수》는 신약 복음서 속의 여러 익숙한 주제들을 초창기 유대문헌 자료들의 맥락 속에서 견줘보는 흥미로운 작업이다. 이를 통해 성서를 보다 싱싱하고 구체적으로 읽을 수 있게 만들어주고, 고대 유대사회의 맥락에서 접근해보게 만들어주는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해준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이 책을 꼭 1년 전 이 분야에서 탄생한 매력적인 텍스트 하나와 한 묶음의 컨셉트로 파악해야 한다고 본다. 매력적인 텍스트란 짐작하는 이 적지 않겠지만, 캐나다에서 활동중인 종교학자 오강남 박사(캐나다 리자이나대 교수)가 펴낸 단행본 《예수는 없다》(현암사)를 말한다.


 

《예수는 없다》의 경우 지난해 쏟아져 나온 신간들 중 한국 사회의 종교사회학의 측면에서 그 중 의미깊은 책으로 꼽을 만한 책이다. 주로 기독교와 관련해 부족적 신관神觀에 머물고 있는 이 사회에 던져지는 어젠더로도 성공을 거뒀고, 상업적으로도 그랬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그렇다고 그 책이 대중에게 영합을 한 시장 추수주의의 단행본이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이 중요하다. 한국사회의 주류 종교이면서도, 새로운 영성靈性을 찾아 무한 변모 중인 지구촌 신학의 흐름에서 가장 멀리 있는 ‘외딴 섬 종교’로 변해버린 한국 기독교의 외곬에 대한 의미있는 죽비 한방이 실은 그 책이었다.

오강남 죽비가 겨냥한 것은 항용 복음주의 신앙으로 불리는 파행의 신앙태도의 문제점이다. 즉 한국 교회와 신자대중이란 유아기 수준의 정신연령을 가진 ‘닫힌 종교’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성경이란 텍스트는 한 점 한 획도 틀리지 않거나 따라서 첨삭 불가능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굳게 믿는(성경 무오류설無誤謬說), 따라서 타종교와의 화해를 강조하는 다원주의 신앙의 등장을 말 붙일 필요조차 없는 이단신앙으로 치부하는 맹목주의 신앙 말이다.

자,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는 없다》의 성공요인이다. 책이 담고 있는 신학적이고 종교학적 정보 그 자체는 알고 보면 새로울 것이 없는 전언傳言이지만, 그것을 ‘발언 방식의 새로움과 친절함’으로 포장하는 기술의 측면 말이다.

즉 전문용어의 숲을 피해 그걸 일상언어로 바꿔주면서도 내용의 함의는 외려 더 풍부해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즉 그 책은 글쓰기의 수준을 내려야 하는 단순 속화俗化 작업과는 또다른 종류의, 인문학의 대중화의 한 좋은 모델이었다. 이런 서술방식은 최근 몇 년 새 거론돼온 인문학의 죽음이라는 음울한 소식과 또 다른 갈래에서 뜻밖에 터져 나온 출판 르네상스의 흐름을 타고 있음을 염두에 둬 보라. 즉 대학 등 제도권 학교에서 인문학은 ‘장사가 안 되는 업종’이지만, 그것에 대한 지식대중의 목마름은 여전하고 그걸 채워주려는 출판상품들은 독서시장에서 확대되고 있는 현상을 반영한 것이다.


 

《유대교와 예수》의 경우도 크게 보아 성경이란 텍스트를 한 점 한 획도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굳게 믿는 철지난 지 오래인 성경 무오류설의 신화에 일정하게 도전을 하고 있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유대 문헌학에 두루 밝은 학자인 저자의 저술 의도란 도발적 효과를 기대하기보다는 외려 성경 깊이 읽기, 성경의 문맥을 찾아 읽기라는 중립입장에 속한다. 따라서 현재 한국사회의 종교 행태에 대한 호오好惡의 가치판단은 거의 드러나지 않은 채 유보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뜨인다.


 

그러나 본디 독서시장에 던져진 책이란 저자의 의중을 넘어설 수도 있다. 내 경우 《유대교와 예수》는 오강남 박사의 《예수는 없다》 이전에 신학자 안병무 박사가 20년 전의 명저 《역사와 해석》을 통해 성서 해석상의 새로운 신학적 표준이자 상식이 된 문헌비판적 접근방식의 중요성을 언급한 것을 새삼 연상시킨다.

즉 《유대교와 예수》는 이제는 건전한 지식대중의 상식이 되어야 하는 ‘열린 종교’에 대한 일정한 옹호의 입장을 은연중에 담고 있다고 본다. 안병무 박사의 말을 옮겨보자.


 

어떤 사람들은 성서는 영(靈)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든지, 또는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고 권고한다. 그러나 그 말은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즉 성서를 이해하려면 어떤 특수한 오르간(器官)이라도 가져야 한다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성서는 인간에게 필요없는 책이다(《역사와 해석》 29쪽, 한길사, 안병무 전집 제1권, 1993).


 

이름이 ‘성서’이기 때문에 독자가 이것을 다른 것과 구별된 거룩한 내용만 실려 있으리라는 전제를 가지고 읽어나가다가는 크게 실망을 할 것이다. 그 안에는 다른 어떤 민족의 건국신화나 민담 또는 야사 등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잡다한 것이 무수하게 섞여 있기 때문이다(같은 책 21∼22쪽).


 

안병무 박사는 성서 비판의 시작이 기원 후 3세기의 교부 오리게네스 이후 종교개혁기의 루터와 캘빈을 거쳐 근·현대의 성서연구의 문헌비판학을 열었다는 점, 따라서 이성이란 성서이해의 지팡이라는 점을 각각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대교와 예수》는 이 책을 쓴 저자의 집필의도와 상관없이 한국 기독교가 보다 성숙한 신학적 토대를 만들어내는 작업에 일조를 한다고 봐야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배에 실려온 구미 선교사의 박래품舶來品 기독교에서, 1960년대 초반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허용되고 권장되기 시작한 토착 기독교 쪽으로의 변화 말이다.


 

《유대교와 예수》에서 거론되는 기본 레퍼런스란 초기 유대교의 문헌자료 대부분을 제공해준 기원전 1세기말의 분파들인 엣세네파 유대교(로마의 우상숭배를 반대하고 종말론에 입각한 고립주의 분파들)와 바리새파 유대교(사제층과 권력층에 대항하여 독립적인 토라Tora해석을 주장하며 적극적 사회참여를 주장하는 파벌)의 문헌들이다.

엣세네파와 바리새파 유대교는 사두개파(로마정권에 탐닉하는 분파), 열심당원(로마정권에 무력 대항하여 메시아 시대를 이루자는 분파), 그리고 예수파(예수를 그리스도로 확신하고 정치와 상관없이 메시아 시대를 이루자는 분파) 등과 함께 혼란스런 모색과정에서 정통 수호와 개혁적 문제제기를 거듭하던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주류 분파들에 해당한다.


 

극심하게 분파활동을 하면서 유대교의 정통성을 모색하던 이들은 기원전 6세기의 전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대교의 중심체인 토라(모세5경과 함께 ‘하나님의 가르침’을 포괄적으로 지칭), 그리고 율법해석과 생활규범, 이들을 정리한 유대교의 기본 윤리강령격인 성문법 ‘미쉬나’, 그리고 ‘미쉬나’에 부가된 다양한 판례와 해석인 ‘탈무드’ 등을 중심으로 다양한 해석과 체계를 형성해놓은 집적물들 위에서 전개됐고, 그것을 보다 다양하게 변용시키는 작업을 토해냈었다는 기본적 정보가 이 책의 서두에서 밝혀진다.


 

따라서 엣세네파 유대교의 경우만 해도 무시 못할 문헌자료들을 생산해냈고, 그것이 바로 ‘20세기 최대의 발견’ 중 하나로 꼽히며, 쿰란 문서 혹은 사해 두루마리Dead Sea Scrolls로 불리는 문서 더미에서도 확인됨을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엣세네 공동체에서 가르치고 배울 때 사용했던 이 필사본 문서는 1947년 사해 주변의 동굴에서 극적으로 발견됐는데, 두루마리만 해도 8백 권이라고 하니 정말 방대한 분량이다. 포함 문서에는 히브리 성서 필사본, 엣세네 공동체의 규례와 성서해석서, 묵시문학 작품 등 다양하다.


 

따라서 이 책 《유대교와 예수》의 저자가 주로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생애와 행적을 당대의 여러 전승과 비교해 새롭게 읽어보는 행위란 그 자체가 성서 해석의 여러 가지 중 하나임을 천명하는 셈이 된다.

신약성서를 당대에 경쟁했던 다양한 랍비들의 다양했던 의견과 해석, 그리고 그것이 담긴 유대 문헌과 비교해 함께 읽어보는 작업이란, 말하자면 ‘성서와 유대문헌 사이의 비교연구’에 해당하는 것이다.

즉 성서를 진공 속의 텍스트로 판단하거나 공연히 거룩한 책으로 보기보다는 제3의 창문을 통해 들여다보는 일종의 문헌비판 작업인 셈이다.

어차피 신화와 민간전승의 옷을 입고 나타난 성서라면 보다 다양한 읽기와 해석이 유효하겠지만, 특히 리뷰어인 나의 관심을 끌었던 대목은 예수 공동체와 너무도 흡사했다는 엣세네파 공동체 문헌자료들과의 비교 대목이었다.


엣세네파란 말은 신학에 대해 보통 정도의 상식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내게 무엇보다 민영규 연세대 전 사학과 교수가 펴낸 단행본 《예루살렘 입성기》(연세대출판부, 1975년)부터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본디 《예루살렘 입성기》는 불교학의 태두로 불리면서도 한국학 일반과 기독교 신학의 사정에도 두루 밝은 노老역사학자 민영규 교수가 1960년대에 예루살렘 기행문의 형태를 띈 신학 에세이를 연세대의 《연세춘추》에 장기 연재했고, 그 당시 신과대 소속의 지동식, 김찬국 교수 등과 한차례 깊이 있는 신학논쟁까지 벌어지게 만들었던 문제의 책이다.


 

파천황의 문제제기가 담긴 문제의식 때문에, 그리고 서구 신학의 주변부에 불과한 한국 기독교의 성격 때문에 지식사회의 논의로부터 묻혀버리고 만 책이 이 책이지만, 나는 이 책을 아직도 한국 토착신학의 한 실마리로 보고 있는 쪽이다. (내 속생각을 밝히지만, 어쩌면 우리 근·현대 인문학의 위대한 성취의 하나가 《예루살렘 입성기》라고 본다).

어쨌거나 민영규 교수는 신약성서에 거의 노출이 되지 않고 있는 공적公的 생애 이전의 예수의 성장배경을 밝혀낼 수 있다고 본다. 이런 규명작업의 실마리로 그의 독보적인 구약세계에 대한 정보나 극대치의 종말론 신앙으로 미뤄 보건대, 또 사해문서의 정보들이 암시하듯이 예수는 엣세네파 소속으로 잔뼈가 굵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대담하기 짝이 없는 가설이다. 가설은 거듭 펼쳐진다. 예수는 머리가 굵어가면서 세상으로부터 문을 닫아건 엣세네파의 고립주의와 금욕주의에 대한 반발로 이 수도집단을 벗어나면서 사해대중의 구원을 목표로 공적 생애를 비로소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는 가설이다.

국내 신학자들을 질겁케 한 민 교수의 문제제기가 과연 적절한지 여부를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사해문서, 혹은 쿰란문서의 구체적인 정보가 궁금하고, 그 안에서 공적 생애를 막 시작한 유대 젊은이 예수를 읽어내는 코드를 발견해낼 수 있겠다는 추정만은 막연하게나마 갖고 있다.


 

《유대교와 예수》는 신약 정보의 유대교적 맥락 찾기에 시종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입성기》에서 보이는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외려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성경 읽는 방식의 다양함을 보여주는 쪽이다.

내 경우 처음 들어보는 진기한 사실들이 무척 흥미로웠다. 조금 애매한 대목은 두세 번을 거듭 읽다보면 지적 호기심을 채울 수 있어서 무척 유쾌했던 것도 사실이다.

전체가 21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 중 제18장 ‘열셋과 서른 닢’을 보자. 마태복음 26장 14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돼 있다. “그 때에 열두 제자 중의 하나인 가롯 유다라는 자가 대제관에게 가서 말했다. 내가 당신들에게 그 분을 넘겨주면 당신들은 나에게 무엇을 주겠습니까? 그들은 은전 서른 닢을 정했다.”


 

(이 부분은 저자가 직접 번역한 것이다. 책에 등장하는 성서 인용은 모두 그의 새 번역으로 선보이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별로 애매한 문맥도 아니고, 새로운 해석이 첨가될 것 같지 않은 것이 유다의 예수 팔아 넘기기로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도 않다.

다음 저자의 설명은 이렇다. 고대 유대 법조항에 따르면 은전 서른 냥, 즉 30 쉐켈이란 보통 한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60평생 동안 내고 살 수 있는 만만치 않은 납세금액에 해당하는 금액이라는 것, 동시에 노예 한 사람의 목숨 값을 상징한다는 것, 그 때문에 예수의 목숨 값도 은전 서른 냥으로 책정됐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런 추론 속에서 제3의 결론도 가능하다.

즉 유다는 단순히 돈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는 추론 말이다.


 

유다는 예수 공동체의 스승인 예수를 대제관과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주는 대가로 앞으로 예수팀의 새 보스 행세를 하려한다는 권력 찬탈의 흑심을 드러냈다고 봐야하겠고, 당시 권력과 그 점에 대해 합의를 했다고 봐야한다.

이처럼 이 책은 숫자가 갖는 상징성을 통해 초기 유대교 공동체의 성서해석을 시도하는 흥미로운 추론이 무척 많이 등장한다. 이 대목은 오해를 부를 소지가 없지 않다.

고대사회에서 주술성을 함축하기 마련인 숫자의 속성을 통해 성서를 편의주의적으로 읽어보겠다는 의도가 충분히 설득력 있는가 하고 물을 이가 없지 않겠기 때문이다.


 

글쎄다. 그 점은 논란의 소지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숫자의 상징성이란 유대문헌 전반에 깔린 것이기 때문에 연결고리 추적 차원에서 꼭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즉 왜 예수는 나이 12살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 나들이를 해야하고, 5천 명 군중을 먹이고도 남은 먹거리 밑천이 꼭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서술되는가도 저자에 따르면 상징성을 함축하는 대목이다.


 

항용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이적으로 말해지는 마태복음 14장 13절 이하의 이야기는 갈릴리 호숫가의 풀밭에 모인 예수를 따르는 큰 무리들에게 빵을 떼어주고 함께 배불리 먹은 것으로 말해진다.

저자는 이 사화史話의 의미란 메시아 예수와 5명으로 구성된 천부장 사이의 성찬례 의식의 상징적 표현으로 풀이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즉 말 그대로 몇 사람이 먹을 만한 먹거리가 수천 군중의 집단급식으로 변하는 마술로 이해하는 액면 그대로의 설명 이외의 다른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왜 그럴까? 두 마리의 물고기란 예수 당시 춘분 시기 떠오르는 황도 십이궁이 드러낸 새로운 모습이고, 그때 떠오르는 별자리는 두 마리 물고기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에 두 마리 물고기란 새 시대의 메시아를 상징하는 어휘로 항용 쓰이고 있었다는 얘기인 것이다.



또 ‘오천 명’의 ‘오천’이란 히브리어로 새롭게 읽을 경우 ‘다섯 천부장’으로 읽을 수 있고, 그 경우 마태복음의 이 대목은 말 그대로 이적사화異蹟史話라기보다는 메시아 예수와 천부장 사이의 성찬례를 알리는 공동체 역사로 읽혀진다는 지적이다.

어쨌든 이 책이 인류의 고전의 하나인, 그리고 근·현대 한반도에서 이상異常괴력을 떨치고 있는 성서라고 하는 텍스트를 새롭게 바라보는 시선을 만들어주는 계기라는 점이 반갑다.



따라서 고대 샘어, 이집트학, 앗시리아학을 두루 공부하고 수메르어 문법으로 박사학위를 땄다는 놀라운 지적 편력과 박람강기博覽强記의 저자에 대한 우리는 기대는 크지 않을 수 없다.

보다 보편의 지평 속에서 성경을 접할 수 있는 책을, 그리고 보다 친절한 언술의 책을 펴내 달라고 말이다. 그리고 단행본 저술의 지평은 굳이 기독교의 신학과 그 지평 속에 국한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질문도 던져보고 싶다.

탈모더니즘 시기 이후 거대한 종교 역학의 재편이 이뤄지고 있는 이 와중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