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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의 감사성찬례(예전 / 예배순서) 소개

▪살림문화재단▪ 2018. 12. 19. 01:47

1. 성공회의 감사성찬례(예전 / 예배순서) 소개



종교개혁의 시대에 가톨릭에서 떨어져나온 개신교중에 성공회가 있습니다.

그 성공회의 감사성찬례(예전-예배의식 / 예배순서 ) 소개입니다


제1부 개회예식

개회예식은 입당으로부터 정심기도, 죄의 고백 그리고 기원송가까지 이지만 실제 내용상으로는 오늘의 본기도까지가 된다. 다만 개회예식을 생략하는 경우 본기도가 함께 사라지지 않도록 그 구분을 말씀의 전례 앞부분에 위치시킨 것이다. 어쨌든 개회예식의 목적은 예배자의 마음을 정화하여 하느님께 집중시키는 데 있다.

1. 입당(성가)

대한성공회의 경우 성시나 송가를 하기보다는 회중이 다함께 부르는 성가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입당성가는 예배자들의 일체감을 강화하고, 절기와 축일의 신비를 깨닫도록 마음을 준비시키며, 예식자들의 행렬을 수반한다.

① 주로 그날의 복음말씀과 관련된 성가를 선택하여 예배의 주제를 미리 주지시킴으로써, 예배자들의 마음을 하나의 지향으로 모으는 것을 돕는다.

② 대림과 성탄, 사순과 부활처럼 특성이 두드러진 절기의 의미를 반영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교회력이 지닌 성사적 신비에 능동적으로 참여케 한다.

③ 제단을 향한 예식자들의 입당행렬은 몸과 마음을 주님께 더욱 가까이 두고자 하는 표현이며, 회중은 입당성가를 함께 노래함으로 이러한 상징에 적극 동참할 수 있다

 

2. 개회기도

감사성찬례의 공식적인 시작을 알리는 개회기도로 채택된 기도문은, 전승된 짧은 기도문들 중에서 가장 엄숙한 기도로 불려왔던 ‘정심기도(The Collect for Purity)’이다. 본래 라틴어 미사예식서에서 사제들의 미사 준비기도로 쓰이던 것인데, 그 일부를 토마스 크랜머가 번역하여 사용하면서부터 성공회감사성찬례의 전통적 개회기도가 되었다.

정심기도는, 예배자를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관계로 인도하여 깨끗함과 성실함이 참된 예배의 조건임을 상기시켜주고, 그 목적이 하느님을 사랑하며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송케 하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이 기도는 감사성찬례뿐만 아니라 모든 예배의 개회에 어울리는 것으로, 하느님의 계명에 의하여 우리의 양심을 성찰하게 하며 하느님과의 만남을 준비토록 돕는다.

 

3. 죄의 고백

우리 기도서에 첨부된 교리문답을 보면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자기 생활을 반성하고 죄를 뉘우치며 사랑과 자비의 실천을 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기도서 786쪽). 성찬에 앞서 양심의 짐을 느끼는 사람들의 회개가 전제되는 규정은 그리스도교회가 규범으로 삼아온 것이며, 신약성서의 가르침에도 부합한다(1고린 11:27-29). 그런데 고대의 예전에서는 오늘날과 같이 회중이 다함께 하는 죄의 고백이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회개란 기본적으로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흔히 통회의 예절을, 참례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일종의 사죄식으로 보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좀 지나친 확대해석이다. 감사성찬례는 전체로서 죄를 사하고 하느님과 형제자매와 화해를 이루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통회의 예절은 이러한 성격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강조하는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의 미사예문을 보면 전체적으로 기도의 내용이 죄인의 참회와 자비를 구하는 어두운 분위기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대예전에서는 죄 많은 인간이 '저 높이 계신' 하느님께 드리는 속죄제사의 예배 이미지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를 사랑하고 받아주시는 '지금 여기에 계신' 하느님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2004년 기도서의 감사성찬례는 자신을 정화하는 단계로부터 시작해서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조명하고 성찬으로 주님과 하나 됨을 지향하도록 구성되어있다. 즉 이전에 예식문 곳곳에서 등장하는 참회와 용서의 분위기를 개회예식으로 제한하고 감사와 부활의 기쁨이 고양되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죄의 고백은 부활주일과 같이 특별한 경축 분위기에서는 생략할 수도 있으며, 이를 십계명 또는 성수예절로 대신할 수 있다(기도서 236쪽).




4. 기원송가 Invocation

2004년 기도서의 특색 중의 하나는 ‘기리에’나 ‘영광송’ 등을 기원송가란 제목으로 분류한 것이다. 기원이란 말은 영어 Invocation의 번역어인데 적절한 우리말을 찾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개신교에서는 이 말을 “예배의 부름”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는 본래의 뜻과는 상반된 표현이다. Invocation은 예배 초두에 하느님을 부르는 것, 즉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시기를 비는 내용이지 결코 사람들을 예배로 부르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2004년 기도서가 기원송가란 말을 통해서 의도하는 바는 개회기도와 죄의 고백을 통해 예배를 준비한 신자들이 이제 하느님께서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고 그 장소에 임재하시기를 비는 순서라는 것이다. 마음을 준비하고 죄를 고백한 후에 하느님을 부르는 기원송가를 배열함으로써, 개회예식의 모든 구성을 순차적으로 고양시킨 것이다.

집전자는 그날의 예배의향에 따라 ‘기리에’, ‘거룩하신 하느님’, ‘우리에게 오시어’, ‘영광송’ 중에서 하나를 임의로 선택할 수 있다(기도서 237쪽). 절기에 따라 권장되는 순서를 번호로 나타내보면 아래와 같다.

 

1) 대림절: ①우리에게 오시어 ②기리에 ③거룩하신 하느님

2) 성탄절: ①영광송

3) 사순절: ①기리에 ②거룩하신 하느님

4) 부활절: ①영광송

5) 연 중: ①영광송 ②거룩하신 하느님 ③기리에 ④우리에게 오시어



1) 기리에 Kirye

원래 기리에는 동방의 예전에서 비롯된 것인데, 회중에게 기도의 권고를 하면 회중이 그 말을 듣고 응답하는 연도와 같은 형태에서 온 것이다. 후일 연도는 사라지고 말미의 기리에만 남은 것이다. (스페인 수녀인 에테리아가 400년경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면서 그 당시의 전례를 기록한 「에테리아 여행기」를 보면,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치던 저녁기도 중에 한 부제가 기도 지향을 말하면 소년들이 매번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하고 응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기리에는 참된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 향하는 신자들의 환호이자 그분의 자비를 간청하는 고백이다. 우리의 죄를 사해주신 주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찬양으로, 그분을 공경하고 섬김을 드러내는 환호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코 복음 10장에 나오는 예리고의 소경 바르티매오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그분의 자비와 능력을 굳게 신뢰하는 가운데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크게 외쳤던 것처럼, 우리 모두도 그런 마음 자세를 가지고 이를 노래하거나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선창자와 회중이 계응으로 노래하나, 때로는 모두가 합송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특히 우리 기도서의 C곡은 오히려 합송하는 것이 더 어울리기도 한다.

2) 거룩하신 하느님 Trisagion(=Thrice Holy)

거룩하신 하느님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가장 오래된 기도의 하나로 여겨진다. 이는 아마도 묵시록에 기록된 천사의 외침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이시로다!"(묵시 4:8)가 확장된 듯하다.

이 송가는 본래 비잔틴 입당예식에서 쓰였는데, 널리 알려지다 보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러 예식에 이 내용이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 65년 기도서에도 성금요일과 상장예식에서 이 송가가 등장한다. 성찬예배에서 기리에를 대신하여 쓸 수 있도록 한 것은 1976년 미국 공도문이 처음이며, 우리 기도서는 이 전통을 따른 것이다.

3) 우리에게 오시어

이 송가는 기리에를 한국적으로 각색한 한국 고유의 송가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본래 1999년 시험기도서에서 기리에 대신 등장했던 송가의 문장을 좀 더 다듬은 것이다.

 

4) 영광송 Gloria

영광송은 우리가 소영광송이라 부르는 송영(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과 비교해서 대영광송이라 부르기도 한다. 영광송은 그 기원이 2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리스도교가 갖고 있는 가장 오래된 찬미가 중 하나다. 그 구조를 보면 두 부분으로 되어, 앞부분은 루가복음 2장 14절의 천사의 노래로 시작하며 성부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감사를 노래한다. 이 부분은 콘스탄티누스대제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뒷부분보다 시대적으로 앞선다. 이어지는 부분은 성자이신 예수께 호소하는 내용으로서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고백이 담겨있다. 축제 분위기의 성찬례에서 영광송을 부르는 관습은 5세기부터 시작되었는데, 부활절뿐만이 아니라 그 첫줄 가사로 인해 성탄절에도 아주 적절한 송가이다. 그리고 마지막 소절,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아버지 우편에 앉으시는 승리의 어린양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환호는 전통적으로 왜 영광송을 주일과 부활절에 불렀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연중시기에 다른 기원송가 다음에 함께 사용할 수도 있으나, 전통적으로 사순절과 대림절, 별세성찬례에는 사용치 않는 것이 상례이다.

원래 영광송은 모인 회중 전체가 불렀다. 하지만 성가대가 부르게끔 따로 작곡된 경우도 있는데 가끔 그렇게 해도 나쁠 이유가 없다. 또한 기도서에 표시하고 있는 대로 회중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교송하는 방법도 어울릴 것이다.

제2부 말씀의 전례

5. 오늘의 본기도

1) 인사

본기도에 앞서 집전자는 신자들을 향해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인사를 하면, 신자들은 “또한 사제와 함께 하소서.”라고 응답한다. 이 인사는 개회인사라고도 볼 수 있는데, 개회예식이 생략되는 경우 본기도가 실제적인 시작부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응답은 옛날부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즐겨 사용되어 온 전통적 인사법이었다. 주의 만찬을 나누려고, 즉 성찬례를 거행하려 모인 신자들은 우선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비단 성찬례가 아니더라도 공적 예식을 가지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먼저 인사를 나누는 것은 상례인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인사가 지닌 소중함은, 모인 이들로 하여금 예배의 본질을 향하도록 서로를 일깨우고 기원해 주는 그 내용에 있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18:20)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배의 중심엔 언제나 예수그리스도의 임재가 전제되기에 그렇다. 성찬례는 그 임재의 은총과 신비를 가시적으로 그리고 극적으로 드러낸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성찬례가 포함된 예배를 집전하는 사제만이 이 인사를 인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크고 작은 예배에서 평신도 주례자의 인도로 이 인사를 함께 주고받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라 하겠다. 이 경우 우리 기도서는 다음과 같은 범례를 추천하고 있다.

 

❖ 주께서 이제 여기에

◉ 우리와 함께 하소서

2) 본기도 Collecta

‘오늘의 본기도’를 흔히 본기도라 칭하지만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본기도란 특별한 정형을 가진 짧은 기도를 통칭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즉 ①주님 호칭, ②감사의 서술, ③간구, 마지막으로 ④삼위일체 송영이나 예수 이름으로 끝나는, 기도서에 등장하는 모든 정형화된 기도들이 본기도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그 날 절기나 독서와 관련된 본기도는 과거 당일 축문이라 불렀던 것처럼 ‘오늘의 본기도’라 해야 맞는 말이다. 더구나 2004년 기도서에 수록된 본기도는 3년 주기의 ‘개정 공동 성서정과표(Revisd Common Lectionary)’에 맞추어져 있어서, 모든 주일의 성서본문과 본기도의 내용이 관련되도록 했다. 당일의 예배의향을 명확히 드러내는 소중한 주제 기도문인 것이다. 이 기도의 본래 명칭이 ‘모음기도’의 뜻을 지닌 꼴렉따(Collecta)인 것은, 예배에 모인 회중의 염원을 하나로 ‘모아서’ 바치는 공기도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듯하다.

본기도 끝에 붙이는 송영은 다음 세 가지 유형 중에서 선택한다.

1) 성부를 호칭으로 부르는 경우(짧은 송영)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2) 성부를 호칭으로 부르는 경우(긴 송영)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으로 이제와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3) 성자를 호칭으로 부르는 경우;

성자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나이다.

 

6. 독서

1) 개정 공동성서정과표

성서를 공적으로 낭독하는 것은 유대교 회당예배의 전통이거니와, 신약이 증언하는 초대교회의 오래된 관습이기도 하다(1디모4:13). 아주 초기에는 구약만이 경전이었지만 후에 그리스도교 자체의 문서들이 등장하면서 이들도 낭독하게 되었다. 바울로가 쓴 편지들은 해당 교회의 회중 앞에서 낭독하라고 쓴 것이며(골로4:16, 1데살5:27), 복음서도 본래 낭독용으로 편집된 것이었다.

현행 성공회기도서에 실린 정과표는 천주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성공회를 포함한 다른 여러 교파의 학자들과 협의하여 만든 미사성서정과(Ordo lectionum Missae)의 개정판이다. 여러 판본이 있지만 루터고, 장로교, 감리교 등 여러 교회가 이 공동개정정과표를 사용하고 있다.

주일과 축일의 독서는 신자들이 가장 많이 모일 때이기에 성서의 주요 부분을 총망라하고 있다. 연중주일에는 공관복음을 기준으로 「가」해에는 마태오, 「나」해에는 마르코, 「다」해에는 루가복음이 낭독된다. 이중 「나」해의 마르코복음이 분량 면에서 짧기 때문에 연중 12주 후부터는 요한복음으로 보충하고 있다. 연중시기가 아닌 특수시기에는 요한복음이 봉독된다. 사순절의 구약독서는 그 자체로 연결성을 지니고 있는데, 세례후보자가 부활전야의 세례를 기다리며 구원사의 개요를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2) 복음서 전의 성서독서(1,2독서)

주일 또는 주요 축일에는 복음서 낭독 전에 지정된 1독서(구약, 또는 서신 중 발췌), 2독서(서신)를 읽어야 한다. 주간이나 소예배라면 1,2독서와 복음만을 읽을 수 있다. 독서는 전통적으로 ‘앰보(ambo)'라고 하는 독서대 위에서만 했다. 지정된 자리에서 회중을 향하여 읽음으로써 말씀의 통일성과 선포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복음서 전의 독서는 예배에서 평신도가 맡는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사역 가운데 하나이다. 초대교회에서 독서자는 종종 평생직으로 임명되었을 만큼 중요한 위치였다. 그러나 중세에 들어 성직자가 그 직무를 대신하게 되었다가, 현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평신도가 읽는 오랜 관습을 회복할 수 있었다(기도서 234쪽). 독서자는 아래 지침을 참고하여 소중한 직무를 수행함이 옳다.

 

① 독서자는 본기도를 하는 동안에 독서대로 가지 않도록 한다. 회중이 착석하여 자세를 추스를 여유를 둔다.

② 성서를 읽기 전에 먼저 회중을 한번 둘러보아, 편안히 앉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확인함이 좋다.

③ 크고 바른 소리로 명확히 내용을 전달해야 하나, 지나치게 극적으로 읽어 청중의 관심을 성서 내용보다는 독서자 자신에게 이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④ 너무 빠르거나 느리게 읽으면 청중이 문장의 흐름을 놓쳐 버릴 수 있으니, 읽는 속도에 특별히 유의한다.

⑤ 독서 끝에 잠시 여유를 두고 나서, 읽은 내용이 주님의 말씀임을 선언한다. 서두르지 않고 신자들이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라고 응답한 이후에야 독서대를 떠난다. 시편 또는 층계성가 전 잠시 침묵을 두는 것도 좋다.

⑥ 이러한 독서 후 계응을 노래로 하여, 그저 어느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선포했음을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독서 계응 시에 성서를 들어 올리거나 성호를 긋는 것은 아니다.

 

3) 성시교송

제1독서가 끝난 다음 이어지는 성시교송은 그날 성서독서에 대한 일종의 해설이거나 혹은 응답의 뜻으로, 말씀의 전례에 필수적인 부분이다. 독서 사이의 시편은 정과표를 따라 사용하게 되지만 때로는 그 길이가 너무 긴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는 시편 내용을 잘 살펴 생략할 수 있는 절을 선별해서 가능한 너무 길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성시는 노래로 하든지 말로 낭독할 수 있는데, 그 방법은 아래와 같다.

 

① 성가대와 신자들이 혹은 인도자와 회중이 한 절씩 응송으로 할 수 있다.

② 신자 전체가 단순히 합송으로 노래할 수 있다.

③ 신자 전체가 반으로 나누어 교송할 수 있다.

 

만일 선창자가 없거나 노래로 하지 않는다면 1독서를 담당한 사람이 성시 장절을 알리고 교독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복음 전의 독서를 하나만 하는 평일 예배 때는 성시의 기능이 단순히 복음서를 읽을 준비를 갖추게 해 주는 보조기능으로 평가절하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성시는 이끄는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앉아서 진행한다.

 

4) 층계성가

복음서 낭독을 기다리면서 ‘알렐루야’를 부르는 「복음환호송」의 전통은 3세기경까지 그 자취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오랜 관습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예배음악이 전문화되고 복잡해짐에 따라 음악적으로 단순할 수밖에 없는 짧은 ‘알렐루야’에다가, 자체로 완성된 또 다른 곡을 만들어 첨가하려는 욕구가 생겨났다. 그 결과 10세기의 예전학자들은 복음환호송인 알렐루야 다음에 ‘부속가’를 첨가하여 부르는 관습을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은 알렐루야와 복음서 사이의 연결성을 회복시키려는 의도에서 순서를 바꾸어 이 노래를 먼저 부른다. 이에 따라 이 성가가 지닌 ‘복음환호송 부속가’로서의 성격에, ‘2독서에 대한 화답송’이라는 기능이 첨가 되었다. 본래 화답송은 1독서를 통해 들은 하느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기도로 화답하는 시편을 말하였는데, 초기에는 화답송을 독서대에서 부르다가 7세기경부터 이 노래와 복음 사이의 등급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제단 밑의 층계에서 부르게 되었고, 여기서 「층계송」이라는 명칭이 생겨난 것이다.

어쨌든 우리 감사성찬례에서는 2독서와 복음 사이에 묵상할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드리는 노래를 층계성가라 한다. 따라서 회중 전체가 노래하기 보다는 정해진 독창자나 성가대가 노래하는 것이 좋으며, 그동안 신자들은 조용히 앉아서 층계성가를 배경으로 성서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이는 엄숙한 ‘침묵 속에서의 묵상’과 달리, 배경음악을 감상하며 진행하는 ‘정서적인 묵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예배를 준비하는 사람은 앞선 2독서의 내용과 주제를 반영하거나 아니면 곧이어 읽을 복음서의 내용을 기대하는 성가를 준비하는 것이 적절하다.

 

8. 복음환호송(알렐루야 또는 영송)

 

복음서 낭독을 기다리면서 ‘알렐루야’를 부르는 관습은 3세기경까지 자취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어쩌면 더 오랜 관습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에 모이기 시작한 까닭은 안식일 다음날인 이 날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일예배는 그 시작부터가 부활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기념잔치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2004년 새 기도서는 과거 부활절기에 국한하여 부르던 복음환호송 ‘알렐루야’를 모든 주일에 부르도록 권장하고 있다. 다만 사순절에는 참회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알렐루야 대신에 '영송(Tract)'이라 부르는 후렴(그리스도여,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을 사용한다.

알렐루야나 영송을 할 때에는 모두 일어선다. 복음환호송을 부르는 방법은 다음 세 가지가 있는데 곡의 형태에 따라 적절한 방법을 사용하면 좋을 것이다.

 

① 선창자가 처음 후렴과 성구를 노래하면 회중은 마지막 후렴만 같이 부르는 방법

② 선창자가 처음 후렴을 부르면 회중이 그 후렴을 반복해 부르고 선창자가 성구를 노래한 후에 다같이 후렴을 부르는 방법

③ 처음 후렴과 마지막 후렴을 선창자와 회중이 함께 부르는 방법












 

9. 복음서

1) 복음낭독

전통적으로 교회는 복음서 낭독에 특별한 경의를 표했다. 낭독이 진행되는 동안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고 낭독 전후로 그리스도를 향한 공경을 바쳐 복음서 낭독 안에 현존하신 그리스도를 고백하게 했다. 복음을 통해 오시는 그리스도께 대한 성대한 존경과 환영의 표시로 향을 피우거나 좌우에 초를 켜서 행렬을 하기도 한다. 좌우의 촛대는 기쁨의 상징이기도 하고 세상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요한 8:12).

복음서 낭독은 부제의 특권이나, 부제가 없을 때는 사제가 대신한다. 부제는 주교가 참석중이면 주교에게, 아니면 집전사제에게 복음서를 들고 와서 축복을 받는다. 축복을 받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서면 집전자는 머리 위에 손을 펴거나 십자성호로 다음과 같이 축복한다.

 

주께서 그대의 입술과 마음을✛정결케 하사, 주님의 거룩한 복음을 선포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하소서

 

이때 주교 반지에 키스하는 것은 하지 않는다. 부제가 아닌 사제가 복음을 읽는다면 제대로 가서 깊은 절을 하면서 침묵으로 혹은 낮은 소리로 다음 기도를 드린다.

 

주여, 나의 입술과 마음을 정결케 하사, 당신의 거룩한 복음을 선포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하소서

 

그 후에 복음서를 들고 복사들과 함께 회중석으로 혹은 독서대로 순행하여 나간다. 복음서 낭독 선언이 있으면 회중은 “주님께 영광을 드립니다.”라고 응답하면서 오른손 엄지로 이마와 입술, 가슴에 작은 십자성호를 긋는 것이 전통이다. 그러고 낭독자는 유향을 드릴 수 있다. 다 읽은 후에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면서 책을 높이 올리기도 하는데 이는 권장할 만하지 않다.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찬미합니다.”라고 응답하고 낭독자가 복음서에 반절을 하는 것은 좋다.

 

2) 수난복음

성지주일과 성금요일에 낭독하는 수난복음의 경우는 일반적인 복음낭독의 경우와 그 방법이 조금 다르다. 통상적인 인사와 응답을 생략하는 것은 수난복음이 주는 엄숙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며, 복음 전반부를 앉아서 듣다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는 장면이 읽혀질 때 모두 일어서는 것은 다소 실용적인 이유에서 비롯한 것이다. 긴 수난복음이 낭독되는 내내 서 있는 것은 오히려 말씀에 집중하는 일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알렐루야’ 대신 ‘영송’(그리스도여,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을 복음환호송의 후렴으로 드린 후에, 부제(또는 사제)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복음입니다.”라고 말하면 회중은 조용히 자리에 앉는다. 읽는 방법은 몇 사람이 또는 회중과 함께 역할을 나누어 할 수도 있고 혼자 읽을 수도 있다. 훈련된 독창자와 성가대가 노래로 부르기도 한다(수난곡).

마태오복음은 27장 32절, 마르코복음은 15장 21절, 루가복음은 23장 26절에서, 그리고 요한복음은 19장 16절 하반부에서 회중이 일어선다. 그러므로 그 시점이 되면 낭독을 잠시 멈추어서 회중이 일어설 여유를 주도록 하고 일어선다는 안내를 주는 것이 좋다.

 

10. 설교

설교는 감사성찬례 말씀의 전례 안에서 아주 중요하고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설교는 중요하게 강조되어야 할 부분이면서도, 동시에 전례의 한 부분으로서 예배 전체의 연관된 흐름을 깨뜨려서도 안 된다. 그날의 독서, 특히 복음서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건전하고 신학적이며 성서적이고 성사적인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지정된 하느님의 말씀을 조명하는 설교는 언어전달이 깨끗하고 확실해야 하며, 다른 주변 이야기로 핵심을 흐려서는 안 된다. 설교 시작에 앞서 광고나 기타 불필요한 말, 심지어 사사로운 기도나 기원조차도 가능한 삼가는 것이 좋다. 선포된 복음서와의 연결성을 저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교 후에는 실용적인 이유로 설교를 맺는다는 말이 필요하기도 한데, 한국 성공회에서는 성호경이 가장 보편적인 마침이다. 교부들의 설교를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이다.”라든지 “주께서는 이제와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나이다.” 등과 같이 상당수가 본기도 송영과 비슷한 방식으로 끝을 맺는다. 초대교회는 유대교 관습에 따라 설교자가 의자에 앉아 설교하였다(루가4:20-21). 어쨌든 설교자의 위치는 모든 회중들이 잘 볼 수 있고 잘 들을 수 있는 곳이라야 마땅하다. 원한다면 설교 후에 모두 잠시 침묵하는 시간을 가져도 좋다.

11. 신앙고백

예전에서 니케아신경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5세기에서 11세기에 걸쳐 다양한 부분에서 점진적으로 채택하게 된 방식이다. 초기 전통에서는 성찬기도 자체가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간주되었다. 주일과 대축일에는 니케아신경을 쓰는 것이 전통이며, 그 외의 평일과 별세성찬례 때에는 사도신경을 한다.

신경 중에 “성령으로… 사람이 되심을 믿으며” 할 때 머리를 숙여 예를 표하는 것은 교회의 오랜 전통이다. 성찬예배 도중에 예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머리를 숙이는 습관이 있는데, 이를 금할 필요는 없지만 너무 반복되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신경은 세례, 견진, 세례갱신서약 등을 할 때에 생략될 수 있다. 세례언약(기도서312쪽)이 이를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수난주일(성지주일)에도 생략할 수 있다. 신경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요한 역사적 문헌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만 사목적인 이유가 있다면 때때로 생략할 수 있는 것이다.

성공회기도서는 때로 교육적인 목적으로 신경 대신에 ‘신앙의 개요’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데(기도서766쪽), 이는 연중주일이나 평일미사 등에서 활용하면 좋을 것이다

12.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우리 기도서와는 달리 영국과 미국의 기도서에는 여러 가지 기도 양식이 마련되어 있다. 우리 경우는 다양한 예식보다는 간편하고 보편적인 것을 원하는 경향이 강한데, 다양한 양식을 자연스럽게 소화할 수 있는 예전적 훈련이 부족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 기도서의 대도 양식들은 일종의 모델로 제시된 것이다. 특별한 경우 사정에 맞게 따로 준비된 것을 사용해도 무방하나, 아래의 의향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미국 공도문 383쪽).

 

① 공교회와 그 선교를 위해 ② 국가와 공직자들을 위해 ③ 세상의 복지 향상을 위해

④ 지역 교회나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⑤ 고통과 질병 가운데 있는 이들을 위해

⑥ 별세한 모든 이들을 위해

 

우리 기도서는 편의를 위해 단정히 앉을 것을 지시하고 있지만, 대도 역시 이 세상과 하느님 사이에서 교회가 행하는 중보적 역할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가능하다면 모든 회중이 일어서는 것이 좋다. 앉아서 할 경우라도 집전자와 기도 인도자는 일어서서 진행한다.

대도는 기도서에 나온 세 양식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서 사용할 수 있으며, 가능한 아래 지침에 따라 하는 것이 좋다.

 

① 부제 혹은 훈련된 평신자가 기도를 인도한다.

② 기도의 의향은 짧고 분명하게 전하되, 기도문 형식으로 마치 다른 기도를 삽입하는 것처럼 하지 말고, 기도의 의향을 전하는 것이어야 한다. 예를 들면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특별히 …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그리고 잠시 침묵을 가진 후에 기도서의 본문기도를 드린다.

③ 끝맺는 기도는 모두 함께 한다.

④ 인도자는 독서대에서 신자들을 향하여 손을 모으고 할 수 있다.

⑤ 주교 이름을 부를 때는 신명만 사용한다.

⑥ 1양식 “우리나라 지도자들…” 다음에 “특히 대통령 ( )”를 삽입할 수 있다.

⑦ 1양식 네 번째 기도는 교회나 그 공동체의 특별한 기도 제목이 있을 때 그 의향을 말하고 잠시 묵상 한 후에 “주여 우리 소원을…”로 이어진다. 만일 특별한 의향이 없다면 이 기도는 생략한다.

⑧ 1양식은 매 기도 전에 의향을 추가할 수 있지만, 3양식의 경우에는 먼저 의향을 모두 말한 후에 시작한다. 2양식은 이 두 가지 방법 모두 사용할 수 있다.

Ⅲ.성찬의 전례:성찬례의 역사와 의미

성찬의 전례는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하라!” 하신 말씀에 순종하여 드리는 것이다. 초대교회 몇 세기 동안은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 전체를 기억하고 선포하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즉 성육신, 출생, 공생애,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영광중에 다시 오시리라는 약속 전부를 기억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세기에 이르러 성찬례는 예수의 대속적 희생만을 부각시킨 좁은 의미의 제사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자기 대신 동물을 희생제물로 바쳐 죄의 용서를 구했던 구약의 제사와 같은 관점에서 미사를 보았던 것이다. 단지 그 제물이 소와 양이 아닌 예수의 살과 피(빵과 포도주)로 대체됐을 뿐이었다.

이러한 해석은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단 한번 희생제물이 되셨다는 성서의 관점(히브 10:12-14)에 위배되는 것이어서, 종교개혁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그리스도의 죽음에 맞추어진 성찬례의 초점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1552년과 1662년 성공회 공도문만 보더라도 부활과 승천은 그저 니케아신경, 부활절과 승천일의 본기도 혹은 축문에서나 기억될 따름이었다. 성공회 내에서 성찬례의 폭넓은 관점을 회복해야 한다는 운동은 스코틀랜드성공회에서 맨 처음 시작되었다. 성찬기도 속에 부활과 승천에 대한 언급을 회복시킨 것이다. 오늘날 세계성공회 대부분의 공도문에는 구원사건에 대한 이러한 포괄적 이해가 농축되어있다. 우리기도서 성찬기도 2양식의 기념환호를 예로 들자면 아래와 같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죽음은 사라졌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새 생명을 얻었으니, 주 예수여 영광 속에 다시 오소서.

성찬례라는 성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독특한 방식으로 주님의 백성들 안에 참으로 현존(real presence)하신다. 거기서 갈보리의 희생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이 서로 만나며, 참여하는 모든 이들과 더불어 친교 하신다. 따라서 성찬례는 하느님과의 소통이요 사람과의 소통이다. 이 안에서 빵과 포도주와 우리 자신이 창조주 하느님께로 인도되는 것이다. 이렇듯 성찬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과 인간 삶의 성화(聖化)를 가시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속죄와 구원의 교리를 재현한다. 무엇보다 성찬례는 성육신(成肉身)의 은총을 일깨워준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느님은 먼 데 계신 하느님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성찬례는 그 자체로 교회의 의미를 집약해 준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리 서로의 상호의존을 의미하며 선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찬례는 천국 잔치를 미리 보여줌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을 소망케 한다. 위에 열거한 것으로도 부족한 놀라우리만큼 풍성한 성찬례의 의미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의존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식의 구성과 언어와 동작 하나하나가 지닌 뜻과 표현을 포괄적으로 음미하며 참례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성찬례의 구조와 의미

앞서 언급한 성찬례의 요점을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오늘날의 전례들은 성찬례의 '사중구성(fourfold shape)’이라고 부른 내용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중구성이란 예수께서 성찬례를 제정하시며 행하신 네 가지 동작, 즉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올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루가22:19)는 내용을, 각각 ①봉헌물의 준비와 ②축성과 ③떡을 떼는 것, 그리고 ④영성체라는 네 가지 요소로 전례화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과거 전통적인 예전에서는 이러한 사중구성 외에 번거롭고 장황한 수사들을 여기저기 끼워 넣어 그 명확성을 떨어뜨리는 꼴이 되었다. 그래서 현대의 예전은 이를 간소화하여 혼잡하지 않으면서 차분히 질서 있게 성찬의 전례를 진행하도록 사중구성을 회복한 것이다.

 

① 빵을 들어(took) --> 봉헌

②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had given thanks) 다음 --> 성찬 기도

③ 그것을 떼어(broke) --> 성체 나눔

④ 제자들에게 주셨다(gave) --> 영성체

 

13. 평화의 인사

미국, 캐나다 공도문은 평화의 인사로서 말씀의 전례를 끝맺고 있는데, 우리 기도서는 영국과 같이 평화의 인사로서 성찬의 전례를 시작한다. 전자는 대도와의 연결성을 강조하기 위함인데, 즉 “모든 교회와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나서 서로 평화를 나눈다.”는 상징성을 더 부각시킨 것이다. 후자는 마태오복음 5:23-24의 말씀이 주는 상징성, 곧 “봉헌에 전제되는 형제와의 화해”를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만약 모인 사람 중 그 누구하고라도 평화의 인사 나누기를 꺼린다면 이는 곧 성찬에 참여할 자격이 안 되는 것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것은 신약성서로 거슬러 올라가는 관습이다(로마16:16, 1고린16:20, 2고린13:12, 1데살5:26, 1베드5:14). 물론 사랑과 애정, 친밀감의 표시이지만 무엇보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를 나누는 의미가 있다(요한20:19,21,26).

옛날에는 ‘거룩한 입맞춤’으로 평화의 인사를 나눴지만(로마16:16) 특별히 어떤 규정이나 절차를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며, 지역 문화에 걸맞은 친밀한 방법을 취하면 된다. 중요한 사실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이 인사를 성직자가 회중에게 하는 전례행위로 이해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집전자와 다같이 인사한 후에 자기가 선 주변 사람들과 나누게 마련인데 특별히 서먹한 사람들과 더욱 그리해야 한다.

14. 봉헌(1)

예수께서 성찬례를 제정하실 때, 감사의 기도를 드리기 위해 빵과 잔을 집어 드신(took) 동작에서 기원한 전례이다.(루가22:17,19) 그러므로 봉헌은 성찬기도에 앞서 식탁에 빵과 포도주를 차려놓는 ‘식탁준비’의 순서라는 것을 무엇보다도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를 굳이 ‘봉헌예식’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초대교회 시절 신자들이 성찬례에 쓰일 빵과 포도주를 각자 가져와서 봉헌했기 때문이다.(1고린11:21) 시간이 흘러 성찬례 재료와 더불어 여러 가지 교회운영과 구제활동을 위한 기금을 함께 드리기 시작하였고 지금의 형태로 정착했다. 나아가 이 예식은 물질뿐만이 아닌 신자들의 전인적 헌신을 상징하게 되었다.(로마12:1) 이런 의미에 따라 신자들의 대표가 빵과 포도주를 제단에 가져오는 것은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사실 ‘성찬기도 그 자체가 하느님께 바치는 설제적인 봉헌기도’라는 성서적이며 초대교회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현대에 만들어진 많은 공도문들에는 봉헌이란 제목의 순서가 없다. 별도의 봉헌기도 없이 ‘성찬준비’라는 순서 속에서 봉헌이란 말이 언급될 뿐이다. 우리 기도서는 캐나다 기도서와 마찬가지로 성찬준비가 끝나고 짧은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이 기도는 거두어진 헌금을 위한 기도가 필요하여 삽입된 것이므로, 빵과 포도주 그리고 헌금을 봉헌하는 기도라기보다는 이를 준비하는 기도, 즉 ‘봉헌준비기도’라고 부르는 것이 의미에 맞다.(감사성찬례표준지침서 55쪽)

로마교회는 발효되지 않은 무교병을, 정교회는 발효된 유교병을 성찬례에 사용하도록 고수하지만, 성공회는 어느 것이든 무방하다. 통으로 된 한 덩어리 빵을 쓰는 것이 신약성서가 강조하는 ‘한 빵’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으니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1고린10:17) 사람이 너무 많아 소면병을 써야 할 때라도 대면병을 반드시 준비하여, 성체나눔사를 할 때에, 이를 쪼개는 장면을 모두가 볼 수 있어야 한다.

포도주에 물을 섞는 것은 1549년 공도문 루브릭 이후에는 별도로 명시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유대인이나 로마인들이 순포도주를 그냥 마시지 않고 물을 약간 타서 마시던 관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다음과 같은 상징성을 부여하여 그 의미를 새겨왔다.

 

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옆구리에서 흘린 피와 물을 상징한다.(요한19:34, 1요한5:6-8)

②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성(포도주)과 인성(물)이 함께 계심을 상징한다.

③ 성찬에 참여하는 신자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나타낸다. 8세기 에티오피아 전례기도 안에 이러한 의미가 잘 드러나 있다. “거룩한 잔 안에서 물과 포도주가 분리될 수 없듯이 우리를 구원의 어린양이신 성자로부터 분리되지 않게 하소서.”

 

 


15. 성찬기도(1)

성찬기도와 관련된 예식행위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찬기도의 구성과 용어들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동·서방 교회가 모두 인정하고,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성사적 일치를 위해 내놓은 ‘리마문서(Lima Document)’에서도 합의된, 성찬기도의 기본구조는 다음과 같다.

※ 각 순서에 따른 용어 설명은 다음 주일에 연재합니다.

 

성공회기도서 1,2양식(서방전통)

성공회기도서 3,4양식(동방전통)

① 거심경(마음을 드높이)

② 감사서문경

③ 삼성경(거룩하시다)

④ 연결기도(삼성경후 기도)

⑤ 축성문(성령임재기원)

⑥ 제정사

⑦ 기념환호송 ※ 2양식은 ‘기념과 봉헌사’ 다음

⑧ 기념과 봉헌사

⑨ 청원기도

⑩ 송영과 대아멘

① 거심경(마음을 드높이)

② 감사서문경

③ 삼성경(거룩하시다)

④ 연결기도(삼성경후 기도)

⑤ 제정사

⑥ 기념과 봉헌사

※ ‘기념환호송 생략

⑦ 축성문(성령임재기원)

⑧ 청원기도

⑨ 송영과 대아멘

 

15.성찬기도(2)

성찬기도를 구성하는 각 순서를 용어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거심경(Sursum Corda마음을 드높이):성찬기도 처음에 나오는 인사와 계응 부분이다.

② 감사서문경: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에 대한 감사와 하늘과 땅의 모든 천군천사와 신자의 상통을 언급한다. 절기에 따른 특송이 포함된다.

③ 삼성경(Sanctus거룩하시다):이사야(6:3)와 마르코복음(11:9)의 말씀으로 구성된 내용으로, 집전자와 회중 모두가 다함께 부르는 찬양의 노래이다.

④ 연결기도(Post-sanctus 삼성경후 기도):통상 주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감사의 서술이 들어간다.

⑤ 축성문(Epiclesis성령임재기원):빵과 포도주에 성령이 내리시어 주님의 몸과 피로 축성하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⑥ 제정사(Narrative institution):복음서에서 나오는, 예수님께 하셨던 마지막 만찬에서의 말씀이 실려 있다.

⑦ 기념환호송:주님의 죽으심과 부활, 재림 등을 노래하는 환호송이다.

⑧ 기념과 봉헌사: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며 빵과 포도주를 봉헌한다는 내용이다.

⑨ 청원기도:전통에 따라 교회와 신자들을 위한 간구기도가 들어있다. 성사를 받는 모든 신자들에게 성령이 임재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 포함된다.

⑩ 송영과 대아멘:삼위일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기도문으로 성찬기도의 결언이며, 그 기도에 동참한다는 의미에서 회중의 ‘아멘’이 따른다.

15.성찬기도(3)

축성된 성체와 보혈을 거양하고 경배하는 행위는, 빵과 포도주를 통해 구체적이며 극적으로 회중 가운데 임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경의를 표하는 아름다운 전통이다. 제정사 이후에 성체와 보혈을 각각 따로 거양하고 경배하는 방법과 성찬기도를 마감하는 송영에서 성체와 보혈을 함께 거양하고 경배하는 방법, 두 가지가 있다. 전자는 대한성공회가 보편적으로 행해 온 것으로 중세 로마의 예식을 따른 것이며, 후자는 보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성찬례 전통에서 비롯한 것이다. “축성은 성찬기도 전체를 통하여 그리고 회중의 참여와 동의로 이루어진다.”는 초대교회적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서 「2004년 기도서 표준지침서」는 후자의 방법을 추천하고 있다.

로마식 전례를 유지할 경우에도 이전 관습처럼 세 번의 종소리와 함께 ‘절하고-성호를 긋고-절하는’ 방식 보다는, 성체 또는 보혈을 거양할 때 바라보라는 의미의 첫 타종과 함께 십자성호를, 그리고 다시 제대에 내려놓으면 예를 표하라는 의미의 둘째 타종과 함께 경배를 드리도록 권장한다.

성찬기도 마지막에 성체와 보혈을 함께 거양하고 경배할 경우, 집전자는 가슴높이에서 성체(대면병)를 성작 위로 받쳐 들고 송영을 노래한다. 회중의 ‘아멘’ 응답 후 집전자는 성체와 성작을 조금 더 높이 천천히 든다. 이 때 우러러보라는 의미의 첫 번째 타종에 맞추어 회중은 십자성호를 한다. 그리고 제대에 다시 내려놓으면 경배를 알리는 두 번째 타종소리와 더불어 예를 표한다.

15.성찬기도(4)

2004년 기도서는 네 가지의 성찬기도를 싣고 있다. 이들은 그 내용에서 뿐만 아니라 구조에 있어서도 각각 다른 특징을 가진다.

 

1양식:1549년 크랜머 대주교에 의해서 만들어진 성공회의 전통적인 성찬기도문이다. 이 기도문은 당시 로마예전과 비교할 때 그 구성이나 내용이 훨씬 초대교회적일 뿐 아니라, 성공회의 개혁정신이 담겨져 있는 성찬기도문으로서 현대의 것으로도 손색이 없다. 따라서 세계 모든 성공회기도서에 반드시 들어가는 역사적 의의가 큰 표준적인 성찬기도이며, 대한성공회 역시 초창기부터 이 기도문을 사용해 왔다.

 

2양식:영국 2000년 공도문 중 E양식을 참조한 것으로서, 죄와 회개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는 수동적인 신학보다는, 창조와 생명, 정의와 자비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선교적 사명을 강조하는 능동적인 내용으로 구성했다. 신앙의 신비 선포부분이 1양식과 다르며, 그에 따라 새로운 곡조를 맞추었다. 이 성찬기도는 성인 축일에 사용하기 적합하다.

3양식:1982년 미사예문 3양식의 기반이 된 성 크리소스톰 성찬 기도문으로서 이전보다 원문을 더욱 반영했으며,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강조된 성찬기도이다. 동방교회로부터 전례된 기도문이기에 축성문이 제정사 뒤에 오고 기념사 응답이 없다. 별세기념 성찬례에 사용하기 적합하다.

 

4양식:에큐메니컬 성찬기도문으로 불리며 로마가톨릭, 성공회, 루터교, 감리교, 장로교의 신학자들이 고대 예전인 성 바실 예전을 기초로 재 작성한 것이다. 서문의 특송이 고정되어 있으며 기념사 응답이 없다. 네 양식 중에서 가장 길고 화려한 문장으로 대축일전례에 어울리고, 에큐메니컬한 생성 배경 때문에 교회일치 주일 등에도 어울린다.

 

15.성찬기도(5)

거룩하시다(Sanctus)

그리스도교 예배에 있어서 4세기에 일어난 큰 변화는 예배 장소가 일반 가정집에서 공공장소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체 회중이 함께 노래 부를 기회가 많게 된 셈이다. 삼성경이 특송과 함께 성찬기도의 일부로 자리잡게 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삼성경의 가사 자체는 “천사 세라핌의 찬가(이사6:3)”에서 유래하는데 이미 유대교의 아침기도에서 예전적으로 쓰이던 것이었다. 이 유대교의 관습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환영하던 백성들의 찬가(마태21:9/시편118:25-26)”의 호산나(구원하소서)와 베네딕투스(찬미 받으소서)를 덧붙여 그리스도교의 삼성경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온 누리에 가득한 성부 하느님의 영광과 성자 예수님의 오심을 천사와 백성이 더불어 찬양하고 환호 하듯이, 집전자와 회중이 다함께 부르는 것이 원칙이다.

관례상 “거룩하시다”를 할 때 집전자나 보좌들은 제대에 깊숙이 머리 숙여 절하며, “하늘과 땅에…” 부분에서 다시 허리를 편다. 성찬기도의 시작인 “마음을 드높이…”부터 마지막 대아멘(Great Amen)까지 하나의 기도라는 것을 훼손치 않기 위해, 신자들은 삼성경 후에도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여 계속 서 있거나 계속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 좋다. 하지만 실용적인 이유로 자세를 바꿔 앉게 되더라도, 집전자는 최대한 기도의 흐름이 단절되지 않도록 배려한다.

16.주의 기도

성찬기도와 빵을 떼는 사이에 주의 기도를 위치시킨 것은 이 기도문으로 하여금 감사송의 절정인 동시에 영성체 준비기도 구실을 하게 하려는 것이다.

옛날 교부들은 주의 기도의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이란 표현을 다른 양식은 물론이거니와 특별히 성찬에 적용시켜 이해했다. 즉 성찬은 “생명의 빵”으로 우리의 또 다른 일용할 양식이라는 것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6:51)

 

그리고 우리가 남을 용서함과 같이 우리도 용서해 달라는 기도는 이제 제대 앞에 나아가 영성체를 하려는 신자들에게 아주 적합한 기도로 생각되었다.

또한 성찬을 통해 하느님을 섬길 힘을 얻어 우리 일상생활에서 주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고 또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므로 그 의미가 영성체를 위한 기도로 적절했던 것이다.

 

17.성체 나눔

예수께서 성찬례를 제정하시며 행하신 네 가지 동작, 즉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올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루가22:19)는 내용 가운데 “빵을 떼신” 동작에서 기원한 전례이다. 이는 초대교회 시절 감사성찬례를 대표하는 명칭(Fractio Panis=Breaking of Bread)으로 쓰였을 만큼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2:42)

 

처음에는 실제로 큰 빵을 나누었으나 9~10세기경부터 작은 면병을 사용함에 따라, 집전자가 대면병을 쪼개는 행위로써 일치와 사랑의 의미를 표상하게 되었다.

 

우리가 그 빵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

(1고린10:16-17)

 

집전자는 대면병을 성작 위로 약간 높이 들고 성체나눔사를 말한다. 회중의 응답이 끝나면 빵을 반으로 쪼개고 곧바로 성반에 내려놓는다. 집전자는 양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여 잠시 침묵기도를 바친다. 이때 모든 회중이 이 침묵기도에 동참한다. 기도가 끝나면 집전자는 반으로 나눈 대면병을 성반에서 다시 나눈다. 이와 동시에 “하느님 어린양(Agnus Dei)"을 시작한다.

18.영성체

예수께서 성찬례를 제정하시며 행하신 네 가지 동작, 즉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올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루가22:19)는 내용 가운데, 빵을 제자들에게 “주셨다(gave)”는 네 번째 동작에서 기원한 전례이다. 영성체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누신 ‘마지막 저녁식사’에서 비롯한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산산이 부서져 나뉜 빵처럼 우리를 위해 수난 받으시고 죽으신 주님의 고결한 ‘마지막‘을 기억하는 동시에,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고 더불어 둘러 앉아 ‘식사’를 나누는 거룩한 친교가 바로 영성체인 것이다.

이러한 영성체의 신비와 신앙을 표명하는 뜻에서, 신자들은 성체를 영하기에 앞서 ‘아멘’이라고 응답한다. 이는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 다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리라는 소망과 결의를 표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큰 소리로 똑똑하게 ‘아멘’이라고 대답해야 하며 생략해서는 안 된다.

영성체를 전후하여 모두 함께 노래하는 것 역시 하느님께 대한 공동의 찬미이고 신앙일치의 증거이다. 영성체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맞이하거나 또는 개인적으로 만나 친교를 나누는 것만은 아니기에, 모두 같이 노래하여 일치의 의식, 나눔의 의식에 참가하는 것이 좋다.

영성체 행렬 또한 순번을 기다리기 위한 단순한 줄서기가 아니며, 주님의 만찬에 동참하고 주님의 부활잔치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모두가 그런 마음으로 즐겁게 같이 노래하고 함께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양형영성체란 성체와 보혈을 함께 영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최후만찬 때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내어 주시면서 당신의 몸과 피니 먹고 마시라고 하셨다. 이에 초대교회는 처음부터 최후만찬의 의미를 되새기며 성찬례 때에 양형영성체를 하였다. 그러나 12세기부터 신자들이 보혈을 흘릴 위험성이 있다는 사목상의 문제로 성체만 영하게 되었다. 당시 포도주를 대량으로 확보하기가 곤란했고 많은 신자들이 포도주를 영할 경우 발생할 위생상의 염려 등 이런저런 현실적인 이유들로, 로마가톨릭교회는 지금껏 특별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평신도는 성혈을 받아 모시지 않고 있다(이를 단형영성체라 한다). 동방정교회와 성공회는 초대교회 전통을 따라 양형영성체를 유지하고 있다.

회중이 많지 않다면 보혈은 성작에서 직접 마시는 것이 좋다. 이때 분배자는 잔의 밑 부분만을 살짝 잡아 신자가 두 손으로 잔을 받쳐 마실 수 있게 한다. 그러나 회중이 많고 질병의 전염이 염려되는 경우 성체를 보혈에 찍어서 영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새 기도서에 따른 감사성찬례 표준지침서에 따르면 영성체 전 후에 제대를 향해 깊은 절을 드리는 것은 괜찮으나, 영성체 전 성체분배자 앞에서 십자성호를 긋는 행위는 금하고 있다. 자칫 성체분배자가 들고 있는 성합이나 성작을 건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19.영성체 후 기도

집전자는 제대 중앙에 서서 신자들을 향하여 “기도합시다.”라고 말하면서 손을 모은다. 잠시 침묵을 지킨 후 기도자세로 팔을 벌린 후 기도를 시작한다.

영성체 후 기도는 방금 영성체를 통해 받은 은혜뿐만 아니라 감사성찬례 전체에 대한 공적인 감사기도이자, 방금 거행한 감사성찬례의 신비가 실생활 중에 좋은 열매를 맺어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누릴 수 있도록 은총을 비는 간구기도이다. 성찬예배의 형식이 갖추어지고 나서 여러 세기 동안은 별다른 축복기도 없이 영성체 후 기도를 한 다음 곧바로 폐회하는 것이 관례였다. 영성체 자체를 가장 큰 축복으로 보았기 때문인데, 이를 마무리하는 영성체 후 기도 또한 그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2004년 기도서에서는 영성체 후 기도를 집전자가 드리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만일 회중과 다함께 이 기도를 드리기 원한다면 회중이 다 알고 있는 통상적인 본문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표준지침서에서는 파견사 후에 광고시간을 갖는 것은 순서의 논리상 맞지 않으므로, 영성체 후 기도 전이나 후에 교회소식을 전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하지만 각 교회의 형편과 관습에 맞게 무리 없이 진행함이 마땅할 것이다.

Ⅳ.파견예식- 20.축복

축복기도에 앞서 집전자는 손을 펴고 신자들을 향하여 본기도, 복음낭독, 성찬기도 때와 같이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인사를 회중에게 건넨다. 근본적으로 그 의미와 표현은 같지만 특별히 이때에는 감사성찬례 안에서 말씀과 성찬을 통해 신자들 안에 오시어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 주님께서 교회 밖의 일상생활 중에서도 계속 그들과 함께 계시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추가된다. 인사를 마치면 집전자는 손을 다시 합장하고 축복기도를 드리며, 십자성호로 신자들을 축복한다. 축복문은 특정문을 따라서 그 날의 절기와 주제에 맞는 내용을 선택한다. 십자성호를 할 때 왼손은 제대 모서리를 잡거나 가슴에 대고 오른 손으로 성호를 긋는다.

사실 축복기도가 파견예식에 등장한 것은 중세 후기에 이르러서이며, 그 전까지 영성체 후 기도를 한 다음 곧바로 폐회하는 것이 관례였다. 주교의 축복이 있을 경우 폐회 후 퇴장하면서 행해졌고, 10세기를 전 후해서 이 축복이 예배 끝부분에 들어왔지만 전적으로 주교에게 유보되어 있었다. 1549년 성공회 최초의 공도문에서는 폐회가 따로 없이 축복기도가 이를 대신 하였고, 이것이 다음 4세기동안 성공회의 표준적 관습이 되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 미국성공회 중심으로 영성체 후에 축복기도를 따로 넣는 것이 장황한 관습이라 하여 축복기도를 빼고 다시 폐회를 넣기도 했지만, 루터교나 천주교의 개정예식이 다 축복기도를 넣음에 따라 이제는 확고한 위치를 잡을 것으로 보인다. 영성체 자체가 가장 큰 축복임에 틀림없지만 사제의 축복기도는 바로 그 축복에 대한 확인과 선언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1.파견

우리 성공회기도서에는 파송선언으로 쓸 수 있는 세 가지 응답이 있다. 그 셋 모두 세상에 나가서 화해의 사역을 하자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 사역은 예배를 마치고 나가는 교회 문턱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며, 이미 세례와 아울러 그리고 예배와 더불어 시작된 사역이다. 예배에서 신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되어, 교회를 위한 기도를 바치고 또 자신들이 보냄을 받은 세상을 위해 기도를 바친다. 그리고 높이 고양된 마음으로 하느님의 놀라우신 행위들에 감사하면서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함께 모인 이들과 한 몸을 이루어 천국잔치를 미리 맛본 다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나누고 평화를 이루자는 말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온 누리에 이루자는 권고인 것이다. 이는 곧 교회 안에서 온전히 드려진 예배가, 신자들의 삶을 통해 세상에서 드려지는 선교적 예배로 거듭되기를 다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파견선언은 본래 부제의 몫이나, 없을 때에는 집전 사제가 한다. 부활 후 50일 동안 즉 성령강림주일까지는 파견사 끝에 알렐루야를 덧붙인다. 파견 후 성가를 부르는 동안 집전자는 다른 성직자, 복사들과 함께 제대에 깊은 절을 하고 예복실로 퇴장한다. 집전자는 퇴장 순행이 끝난 다음 예복실에서 마침기도를 한다. 대한성공회는 전통적으로 아래 ‘별세기원송’을 드린다.

 

“별세한 신자의 영혼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평안히 쉬게 하소서. 아멘”

 

 

출처 : 안양교회 http://cafe.daum.net/francis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