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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토(西土)의 꿈 [artngo에서 퍼옴]

▪살림문화재단▪ 2011. 8. 15. 09:43

 

서토(西土)의 꿈


노자가 통찰한 바를 바탕으로 우주의 창조와 초기 진화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노자의 글만으로는 사실 그 참뜻을 알아낼 길이 없습니다. 여기에 성리학과 불교의 성과뿐만 아니라 현대 자연과학이 이룬 지식을 통합하여 관념과 실제를 아우르는 종합 인식을 통해 그 진면목을 밝히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다음은 노자의 텍스트에 대한 저의 해석입니다. 아직 덜 익은 사과(思果)임을 자인합니다. 그래도 우선 떫은맛을 감수하고라도 읽어주시면 저에게 무척 기쁜 일이 될 것입니다.




1. 신에 대한 사유


신에 대해서는 앞서 말했지만 잠깐 보충설명하고 넘어가기로 합니다. 신은  우리의 감각을 통해 인지할 수 있는 상대세계를 초월해 있는 절대세계입니다. 상대세계를 유(有)라고 할 때, 절대세계는 완전한 무(無)의 세계가 됩니다. 상대세계를 정량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수의 개념이 적용될 수 없는 세계이지만, 굳이 수(數)로 표현하자면 하나(一)이면서 전체(全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대세계는 다(多)의 세계이므로 각 개별적 실체를 구분하기 위해 우리는 편의상 고유명사로서 이름(名)을 사용합니다만, 절대세계(존재)는 그러한 필요가 애초에 없으므로 이름이 필요치 않습니다. 따라서 이름 붙일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끼리 의사소통의 필요에 의해서 대명사로 지칭을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신이라든가 하나님이라든가 하느님이라든가 여호와라든가 부처라든가 알라라든가 한얼이라든가 道라든가 또 그 외 다른 많은 인간이 붙인 이름들은 결국 동일한 세계(존재)를 지칭하는 여러 표현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니 신의 이름을 어찌 부르건 이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하고 나아가 치고 박고 싸우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거야말로 ‘나는 너를 사랑해’ 라고 말했는데, 상대방이 ‘이히 리베 디히’ 했다고 싸우는 거와 무엇이 다릅니까?

 

이제 어떤 분은 자신이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자신의 종교교리를 담은 경전을 들어 저에게 반박할 것입니다. 우리는 옳고 쟤네들은 틀렸다든가 저들의 교리는 악마에 의한 것이라든가 하면서 말이죠. 정말 이런 분이 있다면 저는 그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믿는 당신의 유일신은 옳다. 그런데 당신도 잘 알다시피 그분은 전지전능하며 유일한 신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그렇게 그르다고 비판하는 저들 또한 신의 창조물로서 그분의 소관이 아닌가? 그들이 정말 악마의 자식들인가? 그렇다면 당신의 전지전능한 신은 왜 악마를 용인하는가? 저들을 사주하는 악마는 도대체 무언가? 악마는 신이 어찌할 수 없는 당신이 믿는 신과 동격의 존재인가? 정말 그렇다면 신과 악마를 창조한 또 다른 상위의 신이 있다는 말인가?’ 라고 말이죠.


또한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싶어집니다. ‘당신이 믿고 내가 믿는 신은 또한 저들의 신이기도 하지 않은가? 어쩌면 신은 당신이나 저들에게 똑같은 진실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알려줬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혹시 신은 당신이나 저들에게 모든 진실을 한꺼번에 모두 알려주지 않고 당신에게 조금, 저들에게 조금 알려줬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모든 사람은 신의 창조물이므로 당신이나 저들이나 서로 형제간이 아닌가? 이제 저 형제자매들 말도 좀 제대로 한번 들어보는 것이 좋지 않은가? 정말 얼마나 다른지 정말 얼마만큼 같은지 알고 싶지 않은가?’라고 말이죠.


일단 여기까지 합니다. 어차피 이런 논의는 끝이 날 리 만무하다는 것을 저도 잘 압니다.  저도 어차피 제 주장을 하는 꼴이 되고 말 수밖에 없겠죠. 어쨌든 지금부터 저는, 그래요 저만의 주장이 될지도 모르는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어차피 게임의 승패는 누가 더 이 세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가에 달렸으니 어디 해보자. 씩씩-’ 이렇게 저를 위로하고 채근하면서요.




2. 道生一(神이 음기(陰氣)를 낳았다)


노자는 신을 道라고 표현했지만 그냥 우리들이 보편적으로 쓰고 있는 神이란 대명사를 저는 사용하겠습니다. ‘道生一’을 저는 ‘신이 음기(陰氣)를 낳았다’라고 해석합니다. 여기서 陰氣란 ‘공간’을 말합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는 공간은 ‘시간과 공간’ 할 때의 공간과는 좀 다른 개념입니다. ‘시간과 공간’이라고 할 때의 공간은 시간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음과 양의 차이에 의해 발생하는 변화운동(에너지)의 한 양태인 위치변화를 측정하기 위해 고안한 ‘개념’으로 파악되는 것이지만, 제가 말하는 음기로서의 공간은 실재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낳았다는 표현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환유적 표현인데요, 저는 이 상대세계의 궁극적 원인인 신에 의해 최초의 결과가 ‘야기됐다’는 정도의 의미로 생각합니다. 신이 공간을 ‘창조했다’는 표현도 그리 크게 문제될 게 없을 거 같습니다.


이제 왜 신의 첫 창조물이 공간이냐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할 거 같습니다. 공간 없이 이 상대세계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공간을 그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준비해야 할 도화지라든가 캔버스라든가 또는 맨땅과 같은 바탕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바탕 없이 그림을 그릴 수는 없기 때문에 바탕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공간은 분명 상대세계인 有의 세계이지만 신과 유사한 무한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한한 공간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유한한 공간을 담는 또 다른 공간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간이 무한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를 無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 우리는 공간을 있다 없다로 표현하며, 이는 분명한 실체를 가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젠 신이 왜 공간을 창조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밝혀야만 할 거 같습니다. 그 이유는 쉽게 말해 ‘어쩔 수 없어서’입니다. 달리 말해 ‘이유 없는 이유에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속 말씀드리지만 신은 결과(공간)를 낳은 원인입니다. 그 자체 결과를 창출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내포하고 있는 존재가 신입니다. 그 ‘이유’를 저는 ‘숙명적 理’ 또는 ‘초월적 理’라고 표현합니다.


율곡과 퇴계의 사상의 차이는 바로 이 ‘초월적 理’를 인식했는가 아니 했는가 또는 인정했는가 아니 했는가에 의해 발생합니다. 율곡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율곡은 맑스와 마찬가지로 그 어떤 초월적 존재로부터 주어지는 운명을 거부하고 인간의 의지로써 민본정치를 바탕으로 이 세상을 개혁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율곡의 사상은 후에 실학으로 이어졌고, 퇴계의 사상은 이 나라에 천주교가 뿌리내리는 데 기여했으며, 동학운동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순신이라는 걸출한 당대의 영웅을 낳은 사상은 퇴계의 것이었습니다. 퇴계의 사상이 꼭 좋은 결과만을 불러온 것은 아닙니다. 퇴계사상의 왜곡해석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낳았으니까요. 신을 인정했는가 안 했는가에 의해 그 사람을 선하다 악하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여부에 의해 신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든가 구원을 받는다든가 하는 것도 유치한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건 너무 앞질러가는 내용이라서 한참 뒤로 미루겠습니다.


자 이제 여러분들은 저에게 따지듯 물을 것입니다. 아니 신이 고작 저 무한허공 하나 달랑 창조했다는 말이냐? 예, 맞습니다. 우리 몸과 모든 사물을 이루는 한 부분이며 우리를 둘러싸고 무한히 뻗어있는 무한허공 하나로 우리가 지금 보고 느끼는 이 놀랍도록 아름다운 세상을 있도록 한 신이야말로 얼마나 위대합니까? 신이 애들처럼 진흙 반죽 조물닥거려 인간을 빚어냈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신을 능욕하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그렇다고 성경의 창세기가 모두 틀렸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의 해석이 잘못되었고 인식의 발전과 함께 바로잡았어야 할 오류를 그냥 그대로 방치했다는 것이 문제라는 거죠. 창세기가 쓰여질 당시 모세는 분명 자신의 글을 읽을 일반대중을 생각했을 것이고, 그러한 독자의 수준에 맞춰 글을 썼을 것입니다. 물론 모세 본인의 인식의 한계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무오류입네 하고 자신의 해석만이 옳다는 고집과 욕심을 내세워 자신과 달리 해석하고 표현하는 자를 이단으로 공격한 그 한심한 작태가 저는 싫을 뿐입니다. 제가 말하는 신과 성경에서 말하는 신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 이제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궁금증에 빠집니다. 신이 공간을 창조했다면 그것이 신의 목적인가? 아닙니다. 신이 창조한 공간은 신의 아들 딸들인 우리 얼(정신 또는 영혼)이 깃들 우리 몸을 낳고 기르기 위한 집이자 밭을 마련하기 위한 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얼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이냐? 다른 동식물이나 광물과 같은 무생물과는 달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가진 그 무엇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만이 신을 찾는다는 그 사실 하나입니다. 아이가 엄마를 찾듯 신을 찾는 유일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저의 이런 논리가 우습다고요? 그렇다면 당신은 신에 대해 모를뿐더러 인간에 대해 모를뿐더러 자연에 대해 모르는 것이라고 저는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우리 모두가 신의 아들 딸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만이 신의 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예수는 그걸 먼저 자각한 사람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이 우주는 신이 깃들어 있는 집이라고 볼 수 있으며, 우주의 축소판인 우리 몸은 우리의 얼이 깃들어 있는 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깃들어 있다는 말은 변증법적으로 통합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원인과 결과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굳이 그것을 우리가 구분하는 이유는 쉽게 이해하기 위한 방편에서입니다. 원인(정명제 또는 반명제)과 결과(반명제 또는 정명제)는 변증법적으로 통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허공인 우주공간을 신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부분을 가리켜 전체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자연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 전체를 신이라고 말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저는 예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사실 유일신과 범신은 백지 한 장 차이밖에 없습니다. 어느 한쪽만을 정답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신을 완벽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둘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스펙트럼까지를 망라하고 통합하여 직관적으로 깨닫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다만 저는 우리가 ‘나’라는 개별로서 우리 속에 내재하는 ‘얼’을 파악하듯, 이 자연 전체를 아우르는 신을 우리 얼과 일대일 대응으로서 파악하는 것이 보다 쉽게 신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유일한 존재로서 신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3. 一生二(陰이 양(陽)을 낳았다)


음기인 공간은 신의 속성인 무한의 속성을 가졌을 뿐 아니라 창조의 속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양기를 낳게 됩니다. 양기(陽氣)가 무엇일까요? 저는 이것을 ‘물질?에너지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자 이 표현이 대단히 애매모호하게 들리실 겁니다. ‘씨앗’이 너무 관념적인 표현이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달리 어찌 양기를 표현할 말을 저는 찾지 못했습니다. 이제 차근차근 양기에 대해 따져보기로 합시다.


일단 양기를 이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 물질이나 에너지의 형태라고 가정하고, 그것이 무엇일까 거슬러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자 물질을 이루는 원소, 또 이 원소를 이루는 양성자, 중성자, 전자 등을 생각하고, 또 이를 구성하는 보다 작은 소립자를 찾아냅니다. 그렇게 해서 현대물리학은 6종의 쿼크라는 소립자까지 밝혀냈고, 그 외 끈이론이라든가 하는 가설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물질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에너지가 변형된 것이에요. 그렇다면 이제 원자나 소립자와 같은 입자에 국한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파동의 형태로 존재하는 에너지 즉 빛이라든가 전기, 소리 등을 이루는 기본단위를 밝히는 게 근원에 접근하는 보다 빠른 방법이 될 것입니다. 소리나 빛, 전기를 이루는 최소단위는 무엇일까요? 원자나 소립자 등과 같은 입자로 파악되지 않는(현재의 과학수준으로 측정이 블가능한) 아주 작은 알갱이들의 흐름을 우리가 파동의 형태로 인식하는 것이라면, 해답은 간단합니다. 그 알갱이들을 양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점 혹은 의문점이 여전히 남게 됩니다. 양기를 어떤 알갱이 즉 입자로 파악하게 되면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또 다시 나눌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요? 수학을 통해 우리가 배운 바로는 1/n에서 n을 무한대로 하면 0에 수렴하게 되고, 이 문제의 답을 0이라고 쓰면 맞는 걸로 봤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0이 아니지요. 아무리 0에 가까워진다고 하지만 분명히 0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물질이나 파동에너지를 이루는 최소단위를 뭐하고 해야 할까요? 그것은 실재하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한 답으로서 저는 이런 걸 생각해봤습니다. 위에서 신이 음기인 공간을 창조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음기는 신의 속성을 닮아 무한성과 창조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음기는 상대세계에 속한 것이므로 엄밀히 말해 무한성과 창조성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음기의 무한성은 양기에 의해 비로소 절대적인 것에서 상대적인 것으로 규정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음기가 양기를 낳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지요. 이제 음기의 창조성을 밝힐 차례입니다. 신이 음기와 양기 모두를 창조했다고 하면 이런 걸로 고민할 필요도 없는데, 제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신을 보다 완전한 존재로 파악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 이제 음기가 양기를 낳았다는 표현을 따져봅시다. 음기는 절대존재인 신의 속성인 창조성을 가졌지만 상대세계를 이루는 한 요소이므로 자신과 같은 또 다른 有를 창조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무어라 당장 증명할 수는 없지만 다음과 같이 직관적으로 파악했습니다.


키워드는 ‘상상임신’입니다. 상상임신이라니? 여러분들은 분명 실소를 터트리고 말겠군요. 사실 저도 그러니까요. 그런데 이게 그냥 웃어넘길 만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 외에는 해답을 찾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 생각해 봅시다. 우리 조상들은 신을 ‘삼신할머니’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를 양기라 봤을 때 어머니는 음기일 것이고 음기를 낳은 신은 할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할머니는 어머니를 어떻게 낳았습니까? 성령으로 낳은 것입니다. 성령이 무엇이냐? 간단히 말하면 ‘생각’입니다. 생각이야말로 우리가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정신적인 것이고, 흔히 영감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카톨릭이나 기독교에서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를 성령으로 잉태하였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 성경에 그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이것을 곧이곧대로 파악해서 비현실적이다 이렇게 말할 게 아닙니다. 생리학적으로 어떠니 하고 따질 게 아니라는 것이죠. 이것을 사실관계로 파악하는 것보다는 상징체계로 파악하는 게 옳을 것입니다. 불교에서도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말합니다. 色氣는 陽氣를 말하고, 空氣는 陰氣를 말합니다. 無는 뮤즈의 여신을 말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동서양의 정신문화는 동일한 사유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달리 말해 하나의 원형질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상상임신’에 의한 ‘상상출산’에 의해 음기가 양기를 낳았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쉽게 말하면 양기란 실재하는 것이 아닌데 음기가 자신의  일부분을 따로 분리해서 그것을 자신의 아이라고 생각하고 키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다소 기괴한 이야기로 밖에는 들리지 않을 겁니다. 아니면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불교에서 스님들이 입적 후 다비한 후 스님의 유골과는 다른 ‘사리’가 나온다고 합니다. 양기를 이와 같은 ‘사리’와 같은 것으로 파악해 봅시다. 신을 우리는 ‘무한한 사랑의 존재’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머니나 할머니에게서 느끼는 그 무한한 사랑 말이지요. 그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 간절한 비원, 자기 자식에 대해서 완전한 무욕(無慾), 이것의 결실이 바로 그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간절한 꿈과 믿음이 기적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자 이제 위와 같은 사유를 통해 이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실재한다고 믿고 있는 이 상대세계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음기조차 실재하는 것으로 파악하기가 힘든데, 양기  또한 그렇다면 음기와 양기로 이루어진 이 세상을 과연 실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생각이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을 가능케 합니다.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어쩌면 누군가의 꿈속에서 산다고 말해야 옳은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누군가 감독하고 연출한 영화의 스크린에 비춰지는 등장인물들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로 말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누군가 미리 작성한 시나리오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미 정해진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사실 지금까지 수많은 사유와 이렇고 그러한 사유의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에서의 경험으로 이러한 필(feel)이랄까 예감이랄까를 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운명론자나 허무주의자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설령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누군가의 꿈속일지라도 어느 영화의 스크린 속일지라도 우리의 모든 감각기관이 또한 우리의 모든 생각이 이 세상을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한 우리는 실재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지금까지의 스토리 전개상 설령 이 세상이 꿈속일지라도 영화 속일지라도 이 이야기는 결국 해피네버엔딩(Happy-never-ending) 스토리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저는 도달했으니까요.


자 여기에서 우리는 성철스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산(陰氣)은 산이요, 물(陽氣)은 물이로다’가 정답이지요. 이제 양기에 대해 현실적인 정의를 내려 봅시다. 앞에서는 큰 덩어리를 계속 잘게 나누어 가는 작업을 통해 양기를 추출하려고 했습니다. 이제 거꾸로 0(無)으로부터 출발해 봅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변증법적 관계에서 음기와의 대립명제로서의 양기입니다. 그러니까 음기와 변별되는 0(無)보다 큰 최소한의 알갱이, 이것이 양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그것을 측정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엄연히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고 만지고 들음으로써 실재하는 것으로 느낄 수 있는 이 세상이 존재하게 된 것이니까요. 양기는 음기의 대립명제로서 음기와의 대립과 타협을 통해 끊임없는 변화를 발생시키므로 ‘변화의 씨앗’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 변화를 통해 이 세상을 구성하는 물질(엄밀히 에너지)과 에너지가 비롯되었으므로 ‘물질과 에너지의 씨앗’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다음으로 홀가분하게 넘어가기로 합니다.




4. 二生三(陰陽으로부터 삼태극(三太極)운동이 생겨났다)


위에서 저는 음기가 양기를 낳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음기의 속성 중 두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음기의 무한성과 창조성을 말씀드렸는데, 상대세계를 구성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신과는 대별되는 불완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불완전성은 음기의 대립명제로서의 양기와의 통합을 통해 비로소 치유된다 할 수 있겠는데, 이제 음기와 양기가 가진 속성들을 보다 세밀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음기의 속성은 신의 창조에 의해 발생하므로 신이 부여한 리(理)에 의한 것입니다. 이제 상대세계를 구성하는 음기와 양기의 속성을 규정짓는 리(理)를 저는 ‘현상적 理’라고 명명하려고 합니다. 왜 ‘현상적’인 理인가? 그것은 신이 이 상대세계를 창조한 본뜻으로서 ‘본질적 또는 궁극적 理’를 염두에 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과정으로서의 理가 발현된 것이 음기와 양기의 속성 또는 성질을 갖게 한 것이라는 저의 시각을 드러낸 표현인 것입니다.


음기와 양기의 속성을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은 엄마와 아들의 관계에 비추어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일단 제가 파악한 음기와 양기의 속성을 몇 가지 나열하고, 그 각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음기(陰氣=空氣) : 공간 - 무한(본질상 유한) - 확산/척력작용(全爲) - 냉(冷) - 사랑과 희생(이타주의)


양기(陽氣=色氣) : 변화의 씨앗 - 유한 - 응집/인력작용(본질상 不爲) - 온(溫) - 욕심과 집착(이기주의, 본질상 음기의 속성이 투영된 것)


우선 이렇게만 정리하겠습니다. 앞서 두 가지 속성은 살펴보았습니다. 보통 우리는 공간을 그저 텅텅 빈 것, 그래서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 지구의 대기를 하늘이라고 하고, 하늘과 땅과 사람간의 작용, 그리고 지구와 지구대기 밖의 우주공간을 생각해봅시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양기와 음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제 사물과의 구분은 양기와 음기의 비율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리고 사물 간의 작용은 서로를 비교함으로써 파악될 수 있습니다. 하늘은 사람에 비해 양기를 띱니다.


주기율표 상의 원자 중 원자번호가 낮은 원자일수록 양기를 띠게 됩니다. 이것은 원자의 구조와 원자 간의 비교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엄밀히 말해 원자핵을 둘렀싼 전자구름층에 전자가 돌고 있다고 해야 좀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행성과 위성, 그리고 우주공간을 축소한 것이 원자라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원자핵도 음기와 양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원자핵을 둘러싼 전자구름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서로를 비교하면 원자핵이 보다 양기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보다 응축된 양기로 구성되어 있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원자핵이 클수록 이것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 보다 두터운 전자구름층이 필요하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이제 서로 다른 원자량을 가진 원자를 비교해 봅시다. 수소원자와 산소원자를 비교하면, 산소원자가 수소원자에 비해 보다 음에 가깝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개의 원자핵만 보자면 산소원자핵이 보다 양이지만, 비교가 되는 것은 결국 원자핵을 둘러싼 전자구름층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 이제 ‘하늘이 사람에 비해 양기를 띠고 있다’ 또는 ‘하늘이 사람에 비해 보다 양이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죠. 이와 같이 하면 땅은 사람에 비해 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당연히 땅은 하늘에 비해 보다 음입니다. 지구의 대기층과 그 밖에 위치하는 우주공간은 어떨까요? 우주공간은 지구의 대기층에 비해 매우 음기를 띤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 정리했듯이 음기는 확산 또는 척력작용을 하고 양기는 응집 또는 인력작용을 합니다만, 이제 이것이 틀려서 음기가 응집작용을 하고 양기가 확산작용을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렇게 가정하면 큰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지구의 대기는 우주공간으로 다 흩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건이 땅에 떨어지는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 생각해 봅시다. 현대과학은 중력의 법칙으로 이것을 설명하고, 우리 또한 그렇게 배운 대로 알고 있습니다. 지구의 중심에서 잡아당기는 힘이 작용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위에서 제가 말한 음기와 양기의 속성을 적용시켜보면 분명 땅은 대기에 대해서 인력이 아니라 척력(부양력)작용을 합니다. 땅을 이루는 원자들은 대기를 이루는 원자들에 비해 보다 큽니다. 원자들 사이의 빈틈에는 정말 빈틈없이 음기(공간)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땅은 대기에 비해 보다 음기를 띤다고도 볼 수 있으며, 빈틈을 채운 음기에 의해 서로 연결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서로에 대해 작용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주공간은 양기에 비해 음기의 비율이 극도로 높기 때문에 아주 강한 음기라 할 수 있으며, 지구의 대기를 사방에서 감싸고 누르는 작용을 합니다. 지구대기와 우주공간의 음양 차이는 매우 크기 때문에 이제 대기가 흩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대기가 쭈그러드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대기를 쭈그러들지 않게 하는 힘이 바로 지구의 지각에서 나옵니다. 땅의 확산/척력작용(부양력)은 대기(하늘)를 받쳐주는 기둥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땅의 부양력에 의해 이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는 하늘을 향해 자라날 수 있는 것입니다. 사과가 떨어지는 원리를 생각하기 전에 사과가 떨어지기 전에 어떻게 나무에 매달려 있을 수 있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떨어지는 것보다 그 무거운 사과가 아주 연약한 사과꼭지를 연결고리로 사과나무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 정말 더 큰 신비 아니겠습니까? 나무는 땅의 부양력을 이용해 뿌리로부터 잎까지 물을 이동시킬 수 있으며, 잎에서의 증산작용으로 모양을 유지시킬 수 있습니다. 사과가 나무에 매달려 있을 수 있는 이치도 이와 같습니다. 이제 사과가 익어 나무는 연결고리를 스스로 끊습니다. 사과는 대기에 비해 음입니다. 그러니까 대기에 대해 척력작용을 합니다. 사과를 둘러싸고 대기가 있기 때문에 사과에게는 위로 올라갈지 땅으로 내려갈지 고민거리가 생길 거 같은데, 사실 고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습니다. 대기층도 겹겹이 음양의 차이로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사과의 위는 사과의 아래보다 보다 양기를 띠는 대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과의 척력작용은 당연히 음양의 차가 큰 방향으로 작용하게 되고, 결국 아래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엄밀히 떨어진다는 말보다는 스스로 양기를 밀어내고 자신과 음양의 비율이 보다 가까운 땅으로 붙어버린다는 말이 적절할 거 같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뉴튼의 사과는 도대체 무어냐 저에게 반문하고 싶으실 겁니다.  제가 보기에 뉴튼이 얼떨결에 주운 사과(思果)는 ‘덜 익은 사과’일 뿐만 아니라 그간 우리의 눈을 어둡게 했으므로 ‘독이 든 사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냉과 온의 속성을 살펴봅시다. 우주공간에는 1 세제곱 센티미터당 수소원자 1개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주선(宇宙線)이 지나다니고 있겠죠. 그러니까 우주공간은 음기의 비율이 굉장히 높습니다. 우주공간의 온도를 절대온도K라 표시하고 대략 섭씨 -273.15도라고 합니다. 이에 비하면 지구는 대단히 따뜻한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비교를 하고 보면 음기가 냉의 속성을 양기가 온의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우주공간보다 더 차가운 대기를 가지고 있는 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땅이나 사람이나 하늘의 온도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그만큼 이 셋은 음양의 차이가 작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서로 간에 급격한 작용과 이에 따른 변동을 초래하지 않고 서로 안정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희생/욕심과 집착은 보다 깊은 사고를 요하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고, 다음에 음양변증법적 사고를 통해 인간관계와 인간의 심성을 살피면서 다뤄보겠습니다. 양기의 속성 중 응집/인력작용은 사실 없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음기의 확산/척력작용의 결과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라고 해석하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때론 어떤 자연현상을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데 이러한 구분이 도움이 되므로 그냥 두기로 합니다.


이제 삼태극운동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삼태극이란 음기, 양기 그리고 음기와 양기에 부여된 理에 의해 발생하는 음양의 차이를 말합니다. 삼태극운동이란 결국 음기와 양기, 음양의 차이에 의해 초래된 변화와 운동을 말합니다. 이것에 의해서 에너지라든가 물질이 만들어지고, 또 이것의 변화운동이 우주의 구조를 창출하게 됩니다.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서 짚어보기로 합니다.



5. 三生萬物(三太極운동으로부터 만물이 생겨났다)


태극운동이란 음기와 양기, 그리고 음기와 양기와의 차이에 의해 발생하는 변화와 운동을 아우르는 말입니다. 이것으로부터 상대세계를 이루는 모든 에너지와 물질 등이 만들어졌고, 또한 이것의 끊임없는 변화운동이 지금과 같은 원자의 구조에서부터 우주의 구조까지를 결정짓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변화운동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즉 음과 양의 끊임없는 대립과 투쟁, 양보와 타협의 산물이 현재의 우주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주뿐만 아니라 우주의 축소판인 개인이나 사회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인간의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우리는 늘 우리의 역사나 사회가 계속 혼돈스러워지고 퇴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염려하지만, 사실 거시적으로 인간의 역사나 사회는 혼돈에서 조화로 이행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 우주가 혼돈으로부터 시작해 조화를 찾아가고 있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걱정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니라 현 시점에서 제대로 우리의 위치를 가늠해보는 일이며. 이를 바탕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일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맘에 안 든다면 변화시켜야 합니다. 정말 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싶다면, 그 동안 실패한 사례를 계속 따를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그 실패한 사례가 무엇입니까? 대립과 투쟁을 통한 갈등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양보와 타협’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통해 조화와 질서로 향하는 길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어 노무현대통령 같은 말을 하고 있네’ 하고 여러분들은 놀리듯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예, 맞습니다. 노무현님이 맞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다고 말을 하지만, 사실 그가 잘못한 일은 ‘그만이 홀로 깨어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와 적대적인 세력뿐만 아니라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조차 자신들의 욕심과 무지로 인해 그를 희생양으로 만들려고 들 것입니다. 아니 지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 결국 희생양이 될지 모르지만, 그 희생은 결국 그에게나 우리 모두에게나 영광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음기와 양기의 대립과 투쟁, 양보와 타협의 과정과 그 산물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계속 이어나가기로 하고, 이 글은 이제 음기와 양기의 차이에 의한 태극운동이 시작되기 전 찰나 그러니까 신이 음기를 창조하고 음기에 의해 양기가 생성된 그 시점을 살펴보고 갈무리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앞서 저는 창조과정을 시간의 흐름순으로 얘기를 했지만, 사실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는 시간이란 무의미하겠죠. 그것을 굳이 시간으로 파악한다면 0이거나 무한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0이든 무한이든 그것은 ‘영원’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음기와 양기가 짠하고 생성된 시점을 상상해 봅시다. 양기는 아주 작은 알갱이의 형태로 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인식이 가능해지니까요. 음기인 공간은 무한히 뻗어있습니다. 양기는 어때야 할까요? 아마 그것은 유한성을 가지기 위해서 일정 영역에 뜬구름이나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불규칙적인 구름모양이다 그러면 무언가 엉터리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다고 완전한 구의 형태로 가정할 수도 없습니다.


완전한 구의 영역에 한정되어 양기가 생성되었다고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발생합니다. 양기가 있는 구의 영역 밖으로 냉혹한 음기가 둘러싸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양기가 있는 구의 영역은 양기와 음기가 섞여있는 모양으로 구의 내부의 음기는 양기를 밖으로 밀어내려고 하겠지만 구 밖의 음기가 아주 고르게 사방에서 엄청난 힘을 작용시킨다면 결국 구는 내부의 음기가 빠져나가고 양기가 서로 결합하면서 계속 수축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될 경우 결국 양기는 한 점으로 수렴하게 됩니다. 아마 현대물리학의 빅뱅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극도로 수축된 한 점의 양기가 폭발을 일으킴으로써 우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하겠지만, 이건 엉터리입니다. 폭발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내부의 투쟁이 필수적이니까요.


자 무언가 합리적인 형태가 없을까요? 구의 형태가 가진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불균형한 형태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불규칙한 구름 모양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 많은 모양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문제가 있죠. 여기서 무언가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면서 창조적인 불균형을 갖춘 형태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런 생각 속에서 제가 찾아낸 것이 아래 그림과 같은 ‘알’의 모양입니다. 잘 보시죠. 아래의 계란모형은 다윗의 별을 도출하는 오각형으로부터 6개의 핀과 1개의 고리를 사용해서 나오게 된다고 합니다. 이 그림의 출처는 콜럼 코츠의 ‘살아있는 에너지 - 빅터 샤우버거의 삶과 아주 색다른 과학이야기’ 107쪽임을 밝힙니다. 제 개인적으로 빅터 샤우버거야말로 광야에서 홀로 외치던 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는 과학계에서 미운오리 새끼와 같은 취급을 받았지만, 누구보다도 자연을 잘 이해했고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던 가장 선진적인 과학자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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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분할비를 보통 ‘이상적인 균형과 조화의 비율’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해 ‘창조를 위한 불균형의 비율’이라고 해야 정확한 정의가 될 것입니다. 앞서 보았듯이 완전한 구의 형태는 아무 것도 창출할 수 없었습니다.


위와 같은 달걀 모양의 영역에 양기가 생겨납니다. 양기를 알갱이로 파악할 때, 마찬가지로 이 모양도 달걀 모양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달걀이 가득 든 달걀 모양의 바구니를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입니다. 바구니 속의 달걀(양기)과 빈틈(음기)의 비율도 마찬가지로 황금분할비의 형태를 취할 것입니다. 제가 수학을 잘 모르므로 그것이 어떤 비율일지 말할 수 없지만 아마 PHI:1 또는 PHI의 제곱 : 1, PHI의 세제곱 : 1 등등의 비율이 될 것입니다.


자 이제 바구니 안에서도 불균형이 일어나서 바구니 안의 음기가 양기를 밀어냅니다. 바구니는 양기와 음기로 이루어졌지만 바구니 밖의 음기에 비해 양기를 띤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구니 밖의 냉혹한 음기가 달걀모양의 바구니를 엄청난 힘으로 사방에서 내리 누릅니다. 그런데 바구니 모양이 달걀모양입니다. 물 묻은 손으로 달걀을 잡은 것처럼 달걀이 미끄러져서 손으로부터 빠져나갑니다. 이제 엄청난 혼란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바구니 안에 있는 음기는 달걀을 밖으로 집어던지려고 하고 미끄러지는 바구니를 향해 솔개가 병아리를 덮치듯 음기가 달려듭니다. 이렇게 해서 이제 기나긴 우주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위의 달걀은 ‘황금거위巨爲알’입니다. 아리랑의 아리는 빛을 의미한다고 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또 시베리아 남부지역에 살고 있는 에벤키족은 아리랑(ALIRANG)을 ‘맞이하다’는 뜻으로, 쓰리랑(SERERENG)을 ‘느껴서 알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음 글에서 살펴보겠지만, 창조시점의 알은 다시 변화 운동을 통해 에너지와 물질의 형태를 만들게 되고 이게 다시 응집하여 새로운 알을 탄생시킵니다. 이 알의 부화가 빅뱅이 되는 것이고 알의 바깥쪽을 이루는 빛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길을 내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리’는 빛을 의미할뿐더러, 인간의 입장에서 빛을 맞이하는 것 그리고 행성의 나선형 이동경로를 뜻하는 아리랑고개로 의미가 확대되는 것입니다.


신은 음기를 낳고 음기는 다시 양기를 낳았습니다. 결국 신이 아주 커다란 ‘알을 슬게 된’ 것입니다. ‘알을 슬다’에서 ‘아리랑 쓰리랑’이 나왔다고 저는 봅니다. ‘아라리가 났네’의 ‘아라리’는 신이라고도 볼 수 있고, ‘아라理’로 변형하면 약간 다른 뜻이 됩니다. 어쨌든,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에에, 얼쑤(Earth) 좋다 지화자(地化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