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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르담의 조형물

▪살림문화재단▪ 2013. 4. 17. 21:14

 

 

노트르담의 조형물

                                                                         (이우송/조각가.종교미술칼럼니스트)

 

파리에 머물면서 노트르담성당을 찬찬히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13세기 초에 세워졌다는 성당을 오려다보며 괴기스럽게 내려다 볼것 같은 곱추를 떠올렸다.

 

고딕건축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석탑의 상단부에 발판을 매놓고 정교한 석조건물의 외벽을 청소하는데, 200년에 한번씩 먼지를 털어내는 작업이다.

행여 건축물이 손상될세라 200년된 때를 붓으로 털어내는 작업이 마치 대리석의 속살을 보는듯 했다.

 

성당의 중앙입구에는 좌편에는 최후의 심판을, 우편에는 성모의 부활과 대관을 조각하는 등 로마네스크에서 고딕성당으로 넘어오는 환상과 동감을 억제하면서 인간미와 종교적 숭고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전자는 왼손에 성서를 들고 오른손을 올려서 축복의 자세를 취하고 있고 후자는 화관을 쓰고 어린 아기예수를 안은 젊은 모자가 따뜻한 웃음을 띠고 있는데 실로 경이로웠다. 

 

그곳 교회의 오랜 관습상 순례객들은 성상, 즉 조형물 앞을 지나면서 잠간의 묵상과 경례를 하면서 지나간다. 때마침 관광객차림의 한국인 성지순례단 20여명이 개신교 목사님의 안내를 받으며 성당내부를 둘러보는데 찬란했던 중세기독교와 성당건축의 웅장함을 칭찬하면서도 한편으로 성상 앞에서 묵상하고 절을 하는등 우상숭배 행위라는 비난을 서슴치 않았다.

 

교리적 견해차를 이해하면서도 지켜보는 입장에서 아쉬움은 남았다. 이 성당이 지어진 시기는 13세기 초쯤이고 종교개혁으로 개신교가 생겨나기 몆백년 전부터 있어왔던 예배장소였다.

 

중세시대 교회는 생활의 중심이었으며 정신과 육체가 더불어 위안을 받는 성소였다. 따라서 이곳에 제작된 고부조와 저부조 환조등으로 벽면가득 떡 주무르듯 새겨진 수많은 성서내용의 사실적인 조각과 종교회화는 함께 무학, 문맹(無學, 文盲)의 신자들에게는 눈으로 보고 체감될 수 있는 성서로 제작되었다.

 

불과 이삼십년 전만해도 우리나라에 국문해득을 못한 문맹인이 많았음을 감안하면 이해가 간다. 또한 무학, 문맹이 아니라도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실용화되기 전 까지 성서는 필사본에 의존했기 때문에 대성당이 아니면 신,구약성서 한권을 보관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는 신약성서정도와 기도서 정도를 가졌을 뿐 분량이 많은 구약은 주일에 읽을 분량의 양피지의 두루마리 성서를 이웃교회에서 빌려다 낭독하는등 개인이 경전을 소유할 수 없는 시대도 있었다.

 

성서의 낭독 또한 라틴어를 터득한 유급 독경사의 몫이었고 사제의 독서와 강론, 그리고 예배전례가 유일한 메시지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 성당의 곳곳에 서있는 조형물과 스테인스라스는 성서를 주제로 한 쪽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성당의 조형물 앞에서의 묵상과 경례는 돌로 만든 단순한 장식물이나 우상이라기보다는 예수님 멧세지에 대한 공경의 표시로 이해함이 옳다고 본다.

 

사실 서구 유럽의 관광이나 볼거리는 거의가 기독교적 유산일 뿐 아니라 회화와 조각, 조형들은 독립된 장식이아니라 오히려 건축의 일부로 보는 편이 옳다. 그것은 신자들에게 신에 대한 공경과 숭배를 통한 깊은 신앙심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오늘 이야기는 중세기독교를 설명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외국인들이 한국의 문화유적을 살피려면 도교와 미륵신앙, 그리고 1600년 역사의 불교와 생활속에 뿌리 깊게 자리한 유교적 전승을 알아야 하듯이 세계화물결을 타고 넘나드는 해외여행에도 문화적관심이 선행되어야할 것이다.

 

(96.4. 광남일보 문화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