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당/이우송사제칼럼

47.사백구십번을 용서하느니 모세의 법을 택하라

▪살림문화재단▪ 2013. 4. 20. 19:32

 

사백구십번을 용서하느니 모세의 법을 택하라

(이우송신부, 성공회 대전교구 정의실천사제단 회장)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의 사형과 무기라는 구형에 국민의 절대적 대다수는 당연한 형량이라는 반응이다. 반면에 전두환 노태우씨를 중심으로 한 군사반란과 내란으로 인해 가장 회생물이 된 광주지역에서는 노씨외 명은 구형량 이 너무 가볍다며 철저한 처벌을 요구했다.

검찰이 제시한 구형량 이하로 감형하거나 사연 시킬 경우 국민적 심판 이 뒤따를 것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대구 합천에서는 금번 구형에 대해 역사의 죄과를 받은 것 이라고 당연시 하는 사람도 있지만 상당수가 ‘그래도 전직 대통령에게 사형은 무리한 것 아니냐, 잘한 일도 있는데 ... ’ 라는 아쉬운 표정이다.

 

내전에 가까운 군사반란과 시민대학살을 같이 지켜보고 겪으면서도 서있는 자리에 따라 생각은 많이 다르다. 에피소드 같지만 27차례에 걸친 재판과정에서 재판정 밖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어김없이 나타난 소복 입은 5,18유족회원 및 희생자 가족들과 승복을 입 은 전,노씨 주변의 불교신도들이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반목하다가 한 번씩 말다툼도 하고 고 성이오가며 몸싸움이라도 일어날 때면 척하니 나타난 관원들에 의해 번번이 5,18유족들에게 자중하라는 제재를 가한다는 것이다. 결국 27차 공판에서도 유족회와 불교신도들 간의 실랑이와 한판의 노동은 계속되었다. 광주의 아픔은 회생 자를 넘어선 민족전체의 아픔이며 수치이다. 이 를 두둔하러온 일부 불교신도들의 사적인 자비심은 한국불교 신자의 입장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이번의 공판건은 잘못을 뉘우친 자도 없지만 용서를 빈다고 용서될 일이 아니다. 자비라는 종교적 관용의 벽을 훌쩍 넘어선지 오래 다. 그러기로 한다면 자비뿐인가? 궁극적으로 같은 말이지만 기독교의 표현으로 사랑하고 용서해라. 얼마나요?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해야지. 그래서 사백구십번까지는 용서해 주고 사백아흔한번째 또 같은 잘못을 범하면 그때 가서는 벼락같은 혼쭐을 내주라는 말일까.

 

예수님 자신이 비슷한 경우를 당하셨을 때 어떻게 대처하셨는지 살펴보자. 예루살렘에 올라 성전에 들어섰을 때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팔며 돈을 사고파는 환전상을 보시고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소와 양을 쫓아내고 상을 둘러엎고 환금상들의 돈을 쏟아버리고 그들을 향해 너희는 이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라고 호통을 치시는데 나는 아무래도 앞에서 말씀하신 일흔 번씩 일흔번을 용서하라는 두 말씀이 연결이 되지를 않는다.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경전에 나타난 말씀의 적용이 경우에 맞지 않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아직 우리에게 기독교나 불교는 너무 벅차고 과분한 종교가 아닐까. 성인들께서 말한 속뜻은 버리고 필요에 따른 단어들이나 몇 마디 걸러서 채택한 나머지, 경전을 통해 성숙치 못한 일부 종교지도자들이 상황에 따라 편한 해석으로 쉬운 보속을 남발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등록된 신자수가 국민의 전체수률 넘어 선지 오래이건만 부도덕한 범죄가 많고, 하늘 우러러 견딜만한 땅 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우리에게 구약의 법을 적용시킬 수 있다면 혹은 이슬람의 법율 집행 할 수 있다면’ 하고 상상해본다. 이미 언론에서 크게 다룬 사건이의 한 예로. 부모 없이 어린 동생들과 함께 사는 13세의 소녀가장을 향해 먹을거리나나 라면 한 박스씩 들고 가서 한 동네에서 배울 만큼 배운 성인 십 수명이 돌아가면서 성 폭행을 가했는데 이런 엄청난 기사를 접하고는 잠시 그런 기억이 희미할 뿐 마치 헤프닝처럼 지나치고 만다.

 

그런 경악할 만한 사건이 있은 후 소녀가장을 욕보인 동네의 어르신님, 청년, 장년, 등 약 20여명에 이르는 선한 일을 한 악한들이 처벌을 당했다는 기사를 본적이 없다. 관심을 가지고 검색을 해봤지만 어느 누가 책임을 지지 않았다. 혹시 그까짓 소녀가장 하나쯤. 그만한 일로 마을을 도륙할 일이야 있겠나. 쉬 쉬 하다보면 금세 기억에서 사라질 일을... 이런게 이사회의 암묵적인, 묵계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가해자인 아비의 잘못으로 그 (죄없는)딸들에게 애비가보는 앞에서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한다. 라거나, 도둑질한 손을 자르듯 성폭행한 남성의 몸가락을 도려내는 제도가 있다면 오늘 의 범죄 양상은 또 달라지지 않았을까? 수백명의 양민 을 학살했던 범죄자에게 앞에서의 방법으로 대 가를 치루는 제도가 있다면 이런 다중범죄가 가능했을까?

 

 우리의 현실을 되짚어 볼 때 예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내용은 너무 벅차고 과분하다. 당신께서 2000년 후의 인간사를 모르셨을까. 만은 모세 영감님의 법을 그냥 놔 두시 지 않고 ... 그분은 분명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 하신 것이다. 군사 구테타와 대량학살의 주범들 에 대한 중형이 구형된 지금, 내일이면 재판부 의 판결을 보게 될 텐데 국민들의 생각은 착잡하다. 스스로 공소권 없음에서 어느 날 치켜든 검찰의 칼자루가 스스로의 생각은 아닐진대. 또 한 최규하 전 대통령의 중인 불출석에 당시 사망자수, 그리고 미국개입의혹 등 진실이 덜 드러난 미진한 수사 결과만 가지고도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제 남은 재판부 의 선고를 기다린다. 오직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하게 될 재판부의 역사적 판결을 집중된 온 세계의 눈과 함께 지켜볼 참이다. 끝으로 이 재 판이 정치적 이용이나, 또다시 국민들로부터 재판받는 재판부가 안 되기를 기대한다.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주보. 빛두레 26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