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당/이우송사제칼럼

80.그 해 광주의 오월은 왜 그처럼 위대했는가.

▪살림문화재단▪ 2013. 4. 20. 20:06

그 해 광주의 오월은 왜 그처럼 위대했는가.

이우송사제칼럼

 

80년 오월을 민주화의 봄이라 불렸다.

그 해 광주의 오월은 왜 그처럼 위대했는가?

12.12 사태로 정권을 찬탈했던 이른바 신군부의 서슬퍼런 총칼 앞에서 광주시민들은 목숨을 걸고 항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80년의 광주를 중심으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은 사살아 왜곡되면서 비극적인 희생을 강요당해 왔다.

그로부터 다시 찾아온 오월의 봄을 열네번째 맞아한다. 매년 이만 때가 되면 이제껏 괴롭혀 온 광주의 상처에 통증이 도지기 시작한다.

병명인 즉은 폭동에서 사태로, 사태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그리고 의로운 항쟁으로까지 바뀌어 불리지만 1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정권이 바뀌어 문민정부가 되었어도 처방전이 바뀌지 않았다.

우선 핵심 문제에 환한 진실 규명이 계속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오늘날 민주화를 위해 무엇보다 군사문화와 지역감정의 극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광주항쟁은 그들의 악폐를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4.19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하변서 집권하는 현 정치세력이 문민정부의 간판을 걸고 있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인 해방의 욕구가 내재되어 있는 오월의 정신을 받아들 일 수 있는가 하는 점은 극히 회의적이다.

이런 점에서 80년 5월의 팡주항쟁은 단순환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에 계속되는 현재의 사건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현존하는 광주의 항쟁을 기억하면서 필자는 기독교의 눈으로 광주항쟁을 살펴보려고 한다.

성서는 출애굽이라는 사건, 세계적으로 볼 때 지역적인 사건을, 그리고 갈릴리 예수, 이스라엘의 한 지방이며 로마 통치지역의 극히 미미한 지역의 한사람이 온 세계를 해방하고 구원하는 보편적인 사건과 인물로 인정되었음을 증명한다.

이는 지역적 고백이 지역을 넘어 보편적 가치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광주〉 역시 광주라는 지역성을 넘어 세계사적언 민중사건으로 보편화되었고, 이미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또한 성서는 구체적 삶의 고백으로 이어진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는 한 개인의 신앙고백이 이를 넘어 온 인류의 구원자 하느님으로 고백되어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현존하는 역사는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악의 세력을 정복하려는 역사속애 나타나기 때문이다. 에굽이라는 거대한 악의 구 조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의 핫비루는 광야를 거치면서 내적언 적과 싹웠으며, 요단강애 이르러서는 외적인 적과 싸우는 항쟁을 통해 가나안 땅이라는 역사를 얻어 냈다.

이러한 사실은 하느님나라의 현존이 민중의 투쟁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에 광주의 항쟁은 20세기에 드러난 돋보이는 하느님의 역사이다.

이런 현실을 안병무선생은 이렇게 예화로 말했다.

”나치는 폴란드로 진입하자 유태인을 색출했다. 일군의 유태인들이 유태인 공동묘지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애서 한 여인이 해산을 하게 되었다. 무덤 가운데서 그 누구도 도와주지 못하는 상황 아래서. 그때 무덤지기는 ’오, 하느님! 이제야 메시아를 보내십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무덤에서 생명이 탄생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고백하며 기도했다는 것이다"

”보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는 세력이야 말로 하느님나라를 차지하는 주역임을 보여준다.

거짓 세력, 악의 세력에 대항하여 광주 시민은 일어섰다. 죽음을 가져오는 세상의 권력 과 무력을 두려워하면서도 당당하게 싸웠던 광주항쟁은 하느님나라가 이 땅에 현재화되었음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다면 매년 광주의 상처를 되새가고 드러내야 한다.

성찬식을 나누며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기억하며 온 폼으로 받아 모시듯이, 광주의 오월을 기억하면서 그 기간 동안 도망했던 제자들의 부끄러운 행동을 되새기며 그리스도 앞에 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듯이 이제 이 땅에 남은 광주의 상혼이 이 땅에서 어떻게 자라고 기억되고 있는지 비겁했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지를 돌이켜 매년 되새겨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광주의 상처를 계속해서 되새겨야만 하는 다른 이유는 악의 세력이 스스로 광주의 죽음은 자기의 파당을 위해서 행한 살인이었다는 것을 시언하고 최를 자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복수의 의미보다 하느님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과정으로 서 있다

또 광주의 죽음을 몰고 온 책임자를 밝혀냄으로써 악의 세력은 결코 예수님의 부활앞 에 승리자가 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함으로서 회개의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죄를 덮어 놓고는 회개가 있을 수 없다.

특별히 우려가 광주민중항쟁의 진상을 밝혀야 하는 이유는 광주항쟁이 분단애서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광주항쟁을 통해 우리는 이 땅의 분단과 통일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 고, 우리는 통일의 길이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가는 갈의 한부분이라고 믿게 되었다. 따라서 통일된 조국을 원한다면 분단이 원언이 되어 쟁긴 광주민중항쟁의 진상 을 드러내지 않고는 안 된다.

광주의 눈에는 죽음을 닫고 부활하신 예수의 상처와 십자가가 결코 한 종교적 현상일 수도 단순한 상정일 수도 없다. 이제 더 이상 산자들의 땅에서 숨겨질 수 없는 일이다.

광주의 진상이 밝혀지고 광주의 아픔이 치유되지 않고서는 조국의 통일을 이룰 수 없다.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아간의 죄를 밝힌 후 그를 처벌했듯이 우리는 통일된 조국을 위해서라도, 또한 하느님나라를 갈망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명히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해야 할 것이다.

광주항쟁을 벌써 열네 해째 기억하면서 작년의 주장을, 아니 그해의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라거나, 진부한 주장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될 때까지 할 것이다. 이천년 전애 너희들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예수의 사건이 결코 오늘에 도 되풀이 되는 것이 부끄럽거나 진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신문 1994. 5. 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