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당/이우송사제칼럼

85.구유속의 개보다 신포도를 포기하는 여우가

▪살림문화재단▪ 2013. 4. 20. 20:12

구유속의 개보다 신포도를 포기하는 여우가

이우송사제칼럼

이솝우화에 ‘구유속의 개’라는 이야기가 있다.

“구유속에 누워있는 개가 보리를 먹지도 않으면서 보리 먹는 말이 가까이 오는 것을 못하게 하는 것. 이다.”

이솝우화에는 포 ‘신포도’이야기도 있다.

”배고픈 여우 한마리가 포도송이를 따려 했습니다. 나무를 기어 올라가는 포도 넝쿨에 달려있는 것인데 너무 높이 달려 있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여우는 자리를 떠나가면서 어차 피 저 포도는 시어서 못 먹을 걸, 뭐!"

대한성공회 제12차 전국의회는 초대 관구장에 검성수주교롤 선출하고 이날 의회에서 “북한지역을 교구 신설지역으로 한다는 내용을 현장 중 관계조항에 삽입.”하기로 결의하였다.

전국의회가 끝난 후액에 일간지 및 교계 신문에서도 관구장 선출소식과 함께 북한지역 교 구 신설계획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필자는 전국의회 대의원이 아닌 관계로 늦게야 일간지를 통해 소식을 접하며 기쁨과 함께 미묘한 갈등을 느껴야 했다. 대한성공회는 77년 10월 3일 전국의회에서 ”새로운 교구 설립 후보지역을 절정, 전국의회 결의로 교구가 설립될 때까지 공동 또는 특정 교구의 선교 지역으로 할 수 있다”고 결의했다. 그 해 77년 11월 14일 전국상임위원회는 호남지역을 신설 교구 후보지로 확정하고 79년 8월 18일에는 호남지역 개발위원회 위원을 선임했다.

80년 제7차 전국의회는 제6차 전국의회에서 논의되었던 호남선교의 원칙을 재확인하고 구체적언 진행이 요망된다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호남교구 신설 논의는 한국성공회가 ”원칙적으로 4개의 교구가 되어야 자치 관구를 형성할 수 있다’는 세계성공회의 관구 승 격 요건을 채우기 위한 방편으로만 거론해 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87년 ACC산하 CAK회의애서 목 4개의 교구가 아니더라도 민족적으로 단일 민족이고 문 화적으로 독자성을 가졌으므로 독립관구가 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자 그 직후부터 호남교구 신설논의가 점점 퇴색해가기 시작했던 우리의 경험이 이련 의구심을 더욱 뒷받침 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어엿한 독립관구가 되고 관구장까지 선출되었으니 지난 제6.7차 전국의회의 결의는 무효한 것인지 아직도 유효한 것인지. 전국의회에 묻고 싶다.

물론 80년대 후반에 들어와 열화와 같은 통일 논의와 함께 최근 사회주의권 와해 현실에 편승해 활기를 띄기 시작한 한국교회의 북방선교를 여러 가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각 교 단과 선교단체들의 참여폭이 넓어지고, 북방선교는 계속될 전망이다.

이에 반해 성공회는 해방 전에 북한에 교회가 있었기에 교회 회복차원에서 북한선교를 논의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북한지역 교구 신설은 당장 법적인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전국의회가 결의해서 될 일도 아니다. 일에는 선후가 있는 법. 전국의회가 이미 2회에 걸쳐 결의했던 호남교구 신절계획은 15년간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가. 그리고 실제 호남지역을 관할하는 대전교구는 호남교구 설립을 위한 복안이 있는가. 만약 물적 자원도, 인적 자원도 여의치 못해 오늘에 이르렀다면 관할권만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니라 77년 채6차 결의를 실천 하는 의미에서 공동 선교지역으로 전국의회 앞에 반납할 의사는 없는가.

하느님선교에 인간들의 자존심이 문제될 것은 없다고 본다. 형식적이나마 세계성공회 속에 하나의 독자적인 관구로 성장한 대한성공회의 선교적의지가 별 책임 없이, 그리고 부담 없이 의결해 북한선교라는 명분만 획득해 메스컴의 눈길이나 끈다면 하느님과 우리의 대중인 신자들 앞에 죄를 짓는 일이다.

또한 전국의회의 권위도 결의했던 약속이 지켜질 때 가능한 것이지 명분 축적을 위한 결의 기구일 때는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지금 우리 교회는 호남교구 설립이라는 오랜 과제를 놓고 이솝우화의 구유속의 깨가 범하는 오류를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볼 일이다. 지금은 차라리 북한교구 신설이라는 현실성 없는 신포도를 뒤에 두고 상대적으로 실천 가능한 호남교구 신설이라는 새로운 먹이를 찾아 떠나는 여우의 지혜가 돋보일 때이다.

[성공회신문 33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