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연구소/安哲(안철)

목포5 18 관련 증언록-안철 목포의 민주화운동[안철]

▪살림문화재단▪ 2013. 6. 2. 02:22




목포5 18 관련 증언록-안철 목포의 민주화운동

4) 안철
목포지역 5·18의 가장 중요한 체험자 중의 한명인 안철은 현대사사료연구소에서 발간된 증언채록과 거의 동일한 증언을 하였다. 연구진에서 조사할 당시 그 증언자료집을 기본 자료로 질문을 하였는데 그 내용이 거의 일치했던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증언을 들으면서 자료집의 내용을 재구성한 것을 게재하기로 했다.

19일 피신했다가 21일 목포로
1977년 8월에 한국 기독교 장로회 전국 연합 회장에 당선되어 활동하던 중 1977년에 긴급 초치 9호로 투옥되어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고 만기 출소하였다. 그 후 1979년 10월에는 국제사면위원회 목포지부를 만들어 총무로 근무하면서 양심수 석방을 위한 선언문 채택, 가두시위를 벌이는 등 사회 운동에 투신해 유신 체제 종식을 위해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한다. 
1980년 5월 15일, 16일 이틀 동안 목포대생과 목포실업전문대생을 중심으로 '비상계엄 해제하라, 정치 일정을 밝히라'고 요구하는 가두시위가 있었다. '이제는 유신 독재 정권이 무너졌으니 민주화가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과 아울러 김대중 선생에 대한 기대에 들뜬 시민들은 가두에 나와 시위대를 환영했다. 
17일부터는 학생들의 시위도 없었고 18일 자정을 기해 계엄령이 확대 선포되고 검거령이 내렸지만 목포는 비교적 평온한 상태였다. 
18일에 나는 연동 교회에서 주최하는 야유회를 갔다. 점심을 먹은 뒤 "광주에서 학생들의 시위로 계엄군과 충돌이 계속되다"라는 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자세한 상황은 보도되지 않았지만 광주에서는 학생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9일에 집에 있는데 전남대에 다니던 학생이 와서 "지금 광주에는 난리가 나서 민주인사들을 연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배님은 왜 이러고 게십니까? 빨리 피신해야 합니다"고 했다. 우선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유원규 목사(당시 중앙교회 전도사)에게 연락을 했다. 그날 밤 9시경에 유목사와 함께 배를 타고 용당으로 간 뒤 고향인 해남으로 갔다. 
20일 저녁 텔레비전 뉴스에서 광주의 시위 상황에 관한 보도가 나오고, 광주MBC방송국이 불타는 장면이 잠깐 비치더니 그 뒤로 방송이 중단되었다. 그것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다.
'광주가 저 정도라면 목포도 시위를 할텐데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 빨리 목포로 가서 무슨 대응책을 마련해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21일 용당을 거쳐 목포로 가는 도중 전화로 확인한 결과 목포는 아직까지 평온하다는 것을 알았다. 용당에서 12시 배를 탔는데 그것은 마지막으로 외부로 통하는 배편과 차량이 모두 끊겼다.

차량 시위를 하며 파출소 습격 유도
오후 1시 경 죽동교회로 갔다. 그곳에는 유기문 목사, 김현식 목사, 정권모 목사, 그리고 광주에서 온 강신석 목사가 있었다. 강목사는 나를 보자마자 "지금 광주에서는 난리가 나서 시민들이 죽어가는데 목포 사람들은 뭐 하고 있냐"고 힐책했다. 지금부터 하겠다고 대답하고 몇가지 구호를 정했다. '김대중을 석방하라' , 유신 잔당 물러가라, 민주 정부 수립하라' 등등이었다. 
그때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밖이 소란스러웠다. "계엄군이 들어온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 모두 밖으로 나갔다. 죽동교회 앞이 공설시장이었는데 그곳에서 들어보니 광주에서 시위 차량이 내려왔다는 것이었다. 그때가 오후 2시경이었다. 
그 순간 시위 차량들이 우리 앞을 지나갔다. 나는 내앞을 지나던 두 번째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다 나는 버스에서 내리면서 광주에서 온 청년들에게 차를 타고 유달산에 있는 MBC방송국을 점령하거든 방송하라며 교회에서 작성한 구호가 적힌 쪽지를 건네주었다. 잠시 후 그들이 되돌아왔다. 이미 기계 몇가지는 부서진 상태이고 직원들은 한 명도 없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광주에서 시위대가 오는 것을 보고 경찰도 철수한 상태라 지레 겁을 먹고 기계를 부수고 도망쳤다고 했다.
시위 차량을 역전으로 보내고 죽동교회로 갔으나 아무도 없어 목포역 앞 태화장으로 갔다. 3층에서 상황을 지켜보니 완전히 무정부 상태였다. 일단 목포역 방송실을 점거해 시민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목포역 방송실을 점거해 엠네스티 강사로 일하던 최인분씨가 광주 상황을 알리는 방송을 했다. 그 시간에는 이미 연동 파출소 등이 파괴되고 상가도 거의 철시한 상태였다. 나는 지나가던 시위 차량에 탔다. 차안에는 부서진 총이 몇 자루 널려 있었다.
나는 차를 타고 다니면서 경찰서, 중앙정보부 등 당시 국민의 원성을 샀던 곳을 지명했다. 그러면 분기충천한 청년들이 곧바로 습격·파괴하였다. 나는 시위 상황을 즉시 쪽지에 적어 역 방송실로 보냈다. 그러면 방송실에서 시민을 상대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시위 상황을 알렸다. 차량 시위를 하면서 가두방송을 하고다니자 사태를 심각하게 생각한 시민들이 몰려나와 도시 전체가 흥분되었다. 나는 '오늘 하루는 이런 무정부 상태로 끌고 가 시민들의 참여를 높이고 나중에 사태를 추스르는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관민 합동으로 대책회의 개최
22일 아침부터 시내버스와 택시의 운행이 중단되어 걸어서 목포역 광장으로 나갔다. 역 주변에는 일찍부터 차를 타고 질주하면서 공포를 쏘고 다니는 것이 완전히 무정부 상태였다. 역전으로 모여든 시민들은 무장한 청년들이 공포를 쏘고 다니자 몹시 불안해했다. 그것을 본 나는 빨리 질서를 회복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유원규 전도사와 함께 역 주변에 있는 동양여관으로 갔다. 지배인을 불러 여관에 아무도 없느냐고 물어 보니 건너편 방에 수사과장이 있다고 해 그 방으로 갔다. 서로 만난 적은 없지만 그 사람은 나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지 않소? 질서를 잡아야겠으니 서장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 서장에게 내가 만나고 싶어한다고 전해주시오"
수사과장은 내 말에 동의하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서장을 만나기 전에 목사님들과 사전에 회의할 필요를 느껴 중앙 교회로 갔다. 몇몇 목사들이 모여 논의한 결과, 모처럼 형성된 해방감과 혁명적 분위기가 잘못하면 반혁명적 분위기로 돌변할 위험이 있으니 우선 질서를 회복하면서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해야 된다고 결론지었다. 그러기위해 일단 총기를 회수하고 관민 합동으로 회의를 하기로 했다. 
목포시장, 경찰서장, 목사, 정당 대표, 목포대학장에게 전화해 오전 11시에 우리집(행복동 소재)에서 만나자고 연락했다. 목포 시장과 경찰서장은 용당리와 고하도에 피신해 있었는데 상당히 불안해하여 내가 신변을 보호할테니 나와달라고 했다. 
그러는 동안에 시내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빨리 수습할 필요를 느껴 교육청으로 가서 마이크를 빌려 달라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다시 시내로 나와 그때부터 총기 회수를 시작했다. 대부분 총기를 반납했으나 거절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날 12시경에 우리 집에서 회의를 했다. 서장은 불참했고 대신 정보 계장이 나왔으나 들어오지 않고 밖에 서 있었다. 그날 모임에는 목포시장, 목포대학장, 재야인사, 정당 대표, 목사 몇 명이 참석했다. 
그 회의에서 치안을 회복하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첫째, 현사태는 민주화를 거부하는 유신 잔당과 집권 세력에 사로잡힌 일부 군인이 일으킨 쿠데타에 대한 민주 시민의 반항이다. 그러니 시민들이 원하는 정치 일정을 밝히고 평화적인 시위를 보장하라.
둘째, 총기를 회수하여 시민들의 불안을 덜어 주고 치안을 바로잡아야 한다. 총기를 가지고 있으면 계엄군이 진압할 것이다. 그러면 광주보다 훨씬 많은 사상자가 생길 테니 거시적인 안목에서 관민 합동으로 총기 회수에 참여하자. 총기회수는 시민 궐기대회를 개최하여 무장 청년을 설득하는 방식으로 한다. 
셋째, 시민들에게 이같은 사실을 알리려면 방송 시설이 필요하니 시장은 방송실을 준비하라.
넷째, 시장은 시위대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시위가 장기화 될 것에 대비, 식량의 외부 방출을 막아달라.
다섯째, 정부 당국은 계엄군에 연락해서 계엄군의 투입을 방지하라.
위의 사항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나설테니 차후에 정치적인 보복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고 요구했다. 이 회의의 명칭을 '목포 시민 민주화 투쟁 위원회'로 정하고 내가 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궐기대회를 통해 총기 회수 작업
나는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을 알리기 위해 목포 역으로 갔다. 
시민들에게 시민 궐기대회 개최를 알린 후 청년들을 모아 총기 회수 작업을 시켰다. 그때 양지문(당시 집행부 기획 실장)을 처음 만나 회수된 총기의 관리 책임을 맡게 했다. 
나는 궐기대회 첫 연사로 오창원 목포대학장을 연단에 세웠다. 오학장은 "이런 식으로 사태가 진전되면 안된다"는 말을 짤막하게 했다. 그것으로는 시민들을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아 내가 연단에 올라가 약 15분 동안 연설을 했다.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의 정당성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현 사태는 민주화를 거부하는 유신잔당과 집권야욕에 사로잡힌 군인들의 쿠데타다. 우리가 여기에 맞서 싸우지 않으면 민주화는 오지 않는다. 민주화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이 현재의 많은 사상자를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이점을 명심하여 총궐기해서 규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무정부 상태에 빠진 현상태에서 시민들의 재산을 치안당국에 맡길 수가 없게 되었으니 시만 스스로 지켜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총기를 반납해야 한다. 총기 회수 후 만약 계엄군이 들어와 시민들을 살상할 경우 우리가 나서서 그 총으로 싸울 테니 총기를 반납해 달라. 그리고 이 시간 이후부터는 각 동별로 자치대를 만들어서 시민들을 보호하고 재산을 지키자. 우리는 끝까지 평화적인 시위를 통해 우리의 목적인 민주화를 이룩하자."
주로 이런 내용의 연설이었다. 연설이 끝난 뒤 내일 오전 11시에 목포역 광장에서 시민 궐기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홍보하고 곧바로 시가행진에 돌입했다. 목포대학장이 앞장서고 그 뒤에 재야 인사와 목사, 시민들이 뒤를 따랐다. 차량과 무장 청년까지 합세해 3시간에 걸쳐 목포 시내 곳곳을 돌아다닌 후 해산했다. 궐기대회가 끝난 후에도 나는 총기와 차량 회수작업을 계속했다. 회수된 차량은 교회버스, 군용 지프차, 트럭 등 종류가 다양했다. 차량은 회수된 즉시 주인이 찾아갔고, 총기류는 목포역 대합실에 있는 사무실에 보관했다. 
총기회수가 어느정도 마무리되자 늦은 시간에도 많은 시민들이 역 앞으로 모여 들었다. 물론 그때까지도 몇몇 차량은 구호를 외치며 시내를 질주하고 다녔다. 그날 밤 목포역에 '방화한 사건이 발생했다. 역앞에 가보니 몸집이 좋고 머리가 짧은 사람이 시민들에게 붙잡혔다.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대학생들에게 보고 받아 알게 되었는데 그는 군인이었다. 
시민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계획적으로 목포역 청사를 방화했으나 타다 말았다. 그는 시민들에게 두들겨 맞아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 시민을 향해 외쳤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계엄군들이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조작한 것입니다. 앞으로는 어떤 이유로든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거나 공공기관을 파괴하는 자는 시민의 이름으로 처단합시다."
그러자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그날 밤 몇몇 청년, 학생들은 목포역 대합실에서 남아 밤을 세웠고 시민들은 모두 밤늦게 돌아갔다. 
23일 오전 9시에 목포 역으로 나가 시민대회와 시가행진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에 대해 구상을 하면서 플래카드를 작성했다.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민주정부 수립하라'는 등의 구호를 적어 역 앞에 부착했다. 
이날부터 중고교생도 시민대회에 대거 참석하여 연단에서 입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행상을 하던 아주머니들도 식사제공에 앞장서
나는 대회 직전에 교회 여신도들에게 연락해 목포 역에서 철야한 청년, 학생들을 위한 식사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래서 역광장에 모인 시민들에게 "우리가 조금씩이라도 식사를 준비해서 시위대에게 제공하자"고 안내 방송을 했다. 그러자 그날부터 30인분 혹은 50인분씩 밥을 지어 역 대합실로 밥을 가져왔다. 선창에서 생선 행상을 하시던 아주머니들은 리어카 가득 밥을 가지고 와서는 "우리 김대중선생을 어떻게 해서든 살려야합니다. 아무쪼록 열심히 싸워 주십시오"라며 눈물겨운 격려를 하기도 했다. 
전날 시민대회가 끝난 뒤 나는 정권모 목사와 오창운 학장에게 내일 있을 시민대회의 연설문을 준비하라고 했다. 그런데 23일 시민대회 시작 몇시간 전에 오학장은 본인은 못나가게 됐으니 알아서 하라는 연락이 왔다. 
정목사는 대회 시작 직전에 태도를 바꿨다. 
"내가 시민들에게 데모를 하라고 부축이겠는가, 아니면 하지 말라고 막기를 하겠는가, 자네한테 일임할테니 마음대로 하소."
"어제는 한다고 했잖습니까? 지금 곧 시작해야 하는데 연사가 없으면 어떻합니까?"
"나는 안되겠네."
정목사가 거절하자 할 수 없이 내가 나서기로 결심하고 '연단이 없으니 역 청사에 들어가서 할까' 하고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오전 11시가 다 되었을 때 JC 트럭이 내 앞으로 왔다. 그 차를 연단으로 쓰라고 해서 마침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차에 타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는 시민들을 향해 "이 차를 세워 주십시오"라고 외쳤다. 그들이 나를 납치하려고 했던 것이다. 시민들의 도움으로 차를 다시 역 광장으로 돌렸다. 차가 도착하자 곧바로 대회를 시작했다. 시청 기자실에 모인 기자들 말로는 그 때 모인 시민 수가 5만이라고 했다. 시민대회는 국민의례, 목포 시위보고, 광주 시위 상황보고, 대표자 연설, 성명서 낭독 순으로 진행되었다. 
그 대회에서 나는 약 30분에 걸쳐 연설을 했다. 맨 처음 김대중 선생에 대한 말을 했다. 그 분이 얼마나 유능한 정치 지도자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광주 사태에 대한 이야기와 아울러, 김대중 선생을 석방하지 않고 집권욕에만 사로잡혀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전두환은 끝내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유신 이후 우리가 얼마나 핍박받고 살았는지에 대해 말하면서 이번에야말로 우리가 굳게 단결해서 민주화를 쟁취하자는 내용이었다.   
다음으로는 우리가 어떻게 싸울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말했다. 목포 시민이 똘똘 뭉쳐 싸운다면 평화적인 방법으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전제하고 만약 희생이 불가피할 경우에는 내가 앞장서겠다고 했다. 그러니 여러분은 시민 투쟁 위원회를 믿고 광주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군부 독재가 퇴진할 때까지 뭉쳐서 싸우자고 호소하면서 연설을 마쳤다. 
사전준비도 없이 갑자기 하게 된 연설이었으나 시민의 반응으로 보아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연설한 뒤 현재 작고하신 강수복씨가 성명서를 낭독했다.

JC회원들의 방해공작
대회가 끝난 뒤 5만여 시민이 참여한 가운데 시가행진을 했다. 그런데 시민대열 앞에서 JC 회원들이 차를 타고 "질서를 지킵시다" 라는 방송을 하고 다니며 시위를 방해했다. 나는 그들을 불러 놓고 "너희들 이러지 말고 우리랑 함께 행동하자. 지금은 너희와 시비할 시간이 없다. 그러니 제발 자제하기 바란다. 꼭 방송을 해야겠으면 우리와 별도로 해라. 그것까지 막지는 않겠다"고 하자 차를 타고 가 버렸다. 그 사건으로 시민들이 JC를 비난하자 오후에 JC회장이 찾아와 사과하면서 학생들 식사 값에 보태 쓰라며 약간의 돈을 주고 갔다. 
그날은 거의 총기 회수가 끝났기 때문에 아주 평화스럽게 시위를 했다. 오후 3시 30분 경에 시가행진을 마친 뒤 일부 시민은 계속 농성을 하고, 나머지는 밤에 있을 횃불 시위를 위해 수백 개의 횃불을 만들었다. 
시가행진을 끝내고 목사들을 따로 모아 '현상황에서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 나라를 위해 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왕이면 카톨릭도 함께 할 수 있는 거국적인 기도회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부분의 목사들이 내 의견에 동조했다.

해역사에 무기반납
우리가 시가행진을 하고 있을 때 청년, 학생들은 목포 역 사무실에 모여 시민 투쟁위원회 산하 학생 집행부를 구성했다. 그곳에 모인 청년, 학생들이 투표로 집행 부장을 선출해 목포 실업전문대생 박상규가 뽑혔다. 조직 구성은 집행부장, 기획 실장, 재무가 있었고 홍보부와 지역 경비대가 생겨 시위에 관한 홍보와 외각 지역의 경계임무를 맡았다. 집행부 결성 후에는 시민투쟁위 그날 그날의 일정과 계획을 적은 쪽지를 집행 부장에게 보내면 집행부에서 논의를 통해 시위를 진행했다. 집행부에서도 요구사항이나 의논할 일이 있으면 역시 쪽지로 시민투쟁위에 알렸다. 갑작스럽게 처리할 일이 생길 때에도 공식 도로를 거치지 않고 개별적으로 맡겼다. 공개적으로 전달하지 않는 이유는 사태 수습 후에 있을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자는 의도였다. 
오후 4시경 목포 역으로 가보니 양지문씨가 JC회장 이형래씨에게 무기를 내주고 있었다. 나는 왜 무기를 반납하냐고 양지문씨에게 따졌다. 그는 회수된 무기를 관리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이형래씨한테 이 무기를 책임지고 반납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처음부터 회수된 무기를 반납하지 않고 보관해 두기를 원했다. 나중에 혹시 계엄군이 진입하면 사용해야 된다고 생각했고 또 무기를 회수할 때 시민들과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중에 보고 받은 바에 의하면 회수된 무기를 JC회장이 지산 부대로 가져갔으나 문제가 생겨 다시 해역사로 가 그 곳에 반납했다고 한다. 
그날 밤 8시에 횃불시위를 시작했다. 그날 아침 정전이 되어 시내가 캄캄하자 낮에는 체면 때문에 참여하지 못하고 구경만 하던 시민들이 모두 동참해 그 수가 약 15만명에 이르렀다. 그 대열이 역전 광장에서 2호 광장까지 늘어서 함성을 지르는데 시 전체가 그 소리에 묻히는 것 같았다. 횃불을 든 사람은 대열의 가운데 서고, 그 뒤를 정당인, 재야 인사들이 따라갔다.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시내 전역을 돈 뒤 11시쯤에 해산했다. 
그 날 오후 나는 목포시장과 경찰서장을 만나 다음의 사항을 요구했다. 
첫째, 현재 시내버스가 운행 정지되어 시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으니 일부만이라도 운행하도록 조치를 취해 달라.
둘째, 피신 중인 공무원은 모두 돌아와서 언제든지 정상 근무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 
셋째, 경찰은 밖으로 나오지 말고 대신 교통경찰 몇 명만 보내 달라. 
세가지 요구 사항이 모두 받아들여져 24일부터 일부 시내버스가 운행되었다. 24일 비가 많이 내려 시민대회를 하지 못하였다. 
그날 오후 목포 역 대합실에 분향소를 설치했다. 영정도 없었기 때문에 제단만 만들어놓고 먼저 가신 영령들의 명복을 비는 형식이었는데도 분향 행렬은 줄을 이었다. 
그날 밤 우리 집으로 경찰서장과 정보과장이 찾아와 시위를 중지해 달라고 사정했다. 
"안철씨도 마찬가지겠지만 경찰 서장인 나 역시 이번 사건이 끝나면 잡혀갈 것이다. 이제 목포 시민으로서 할 일은 다 한 것 같으니 시위를 중지해 주십시오."
"지금 목포 사태는 내가 원한다고 해서 중지될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만약 지금이라도 광주의 사태가 종결된다면 목포 시민도 자진해서 시위를 중지할 것이오. 나는 물론 당신들은 시위대로부터 보호하면서 광주 사태가 끝날 때까지 계속 싸울 것이오. 목포 사태는 광주 사태가 언제 종결되느냐에 달려 있으니 이러지 말고 돌아가시오."

목포 역 광장에서 실시된 기독교인들의 비상 구국기도회
나는 아침마다 목포 역 광장실에 마련된 시민투쟁 위원회 사무실에 출근해 전날 시위를 점검해 보고 그 날의 중요한 일을 적은 쪽지를 학생 집행부에 보내 처리하도록 했다. 그런 후 각 시민단체와 정당인, 재야인사들을 만나 시위 전반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고 성명서나 플래카드 제작을 요청하기도 했다. 
25일은 교인들이 참여해 구국 기도회를 갖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은 마침 일요일이라 오전 11시에 목포 역 광장에 모인 교인들이 각 교회별로 예배를 보고 12시에 전체 교인이 참석해 기도회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역전에서 예배를 보는 도중 연동교회에서 플랫카드를 가져왔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피값은 외상없다. 즉각 보상하라'는 내용인데 일부 목사들이 그것을 치우지 않으면 예배를 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연동 교회에 다니던 내 친구가 플랫카드를 붙잡으며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고백이다"라고 외치자 목사들은 아무말도 않고 가 버렸다. 
이날 집회에서 목포시 기독교 연합회 비상 구국 기도회의 이름으로 된 '광주시민 혁명에 대한 목포 지역 교회의 신앙고백적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광주-목포간 교통 두절로 광주 시위 상황은 자세히 알 수 없어 사람을 보내 서로 유인물도 교환하고 연대 투쟁을 시도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26일 시민대회 때는 각 동별로 플랫카드를 들고 나오도록 했다. 약 2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회가 진행되었다. 그날 대회에서는 2명의 연사가 연설을 했고 밤에는 횃불 시위를 했다.

광주가 진압된 후 결의문 채택하고 해산
27일 새벽 광주가 계엄군에 의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광주가 함락되었으니 목포 시위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광주가 싸움을 계속할 경우 우리도 끝까지 싸우겠다는 처음 의도대로 현재 광주가 진압되었으니 우리도 일단 종결지어야 한다고 결정짓고 아침에 학생 집행 부장에게 쪽지를 보냈다. "오늘 시민대회를 마지막으로 시위 투쟁 위원회를 해체하고 집회도 끝낼 것이니 각자 알아서 피신하라"는 내용이었다. 
27일 마지막 시민 대회에는 2만여명이 참석하였고 우리 겨레와 세계 자유민에게 보내는 목포 시민의 결의문(2)을 채택하고 또다시 이런 일이 발생할 경우 계속 싸울 것을 다짐했다. 광주 진압 사실을 시민에게 알리고 시가 행진을 한 후 오후 3시경에 해산하였다. 학생 집행부는 밤까지 남아 횃불 행진을 하고 시위를 마감했다고 들었다. 
나는 오후 5시경에 목포를 빠져 나와 전주를 거쳐 부산으로 가 숨어 지냈다. 피신해 있으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시위를 주도했던 내가 끝까지 나타나지 않으면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지 못한 수사 기관에서 먼저 잡힌 동료들을 학대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목포 연동교회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나를 수배한 이유를 확인한 결과, 김대중과의 관련부분을 집중적으로 수사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 이유라면 내가 나서서 목포의 시위를 떳떳하게 밝히고 법정투쟁을 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판단했다.

자수
7월 3일, 2차 자수기간 마지막에 합수부로 갔다. 목포 합수부에서 자술서를 쓰는 것부터 시작하여 며칠동안 잠을 자지 못한 채 조사를 받았다. 목포에서 있었던 시위과정에 대해 숨기지 않고 정확히 밝히자 조사는 별다른 어려움없이 진행되었다. 합수부에서 조사가 끝난 뒤 광주 상무대로 갔으나 나는 손목부상과 항문이 빠져 국군통합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치료 후 상무대로 옮겨졌다. 
10월 27일 군사 재판을 받았다. 12년 구형에 8년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집행관 확정과정에서 4년으로 감했다. 
10월 30일경 교도소로 이송되자마자 단식투쟁을 했다. 그 무렵 전두환이 광주에 왔는데 교도소 측에서 공식적으로 구타를 허락받았는지 수감자들을 무작위로 구타한 사태가 발생했다. 그 중 나와 서경원(카톨릭 농민회장), 한상석(전남대생)은 더욱 많이 맞았는데 그때 살아난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될 정도이다. 
우리는 현행법에 의한 정당한 대우를 요구하면서 단식을 한 것이다. 그 후 수감자에 대한 구타가 많이 없어지고 식사도 개선되었다. 
교도소에서 생활하는 동안 의협심과 분노로 광주 항쟁에 참여한 청년, 학생들의 의식변화를 위해 많은 대화를 했었다. 나는 그들에게 군부 독재의 총칼에 맞서 평화적으로 대응하더라도 혁명은 성취될 수 있다는 입장을 주로 얘기했다. 
석방 후에는 전부터 하던 약국을 운영하며 목포에서 지내고 있다. 

출처: 전남대 지역계발연구소 『5·18 기념사업 종합계획』보고서 중 목포부분 발췌 1996.8